익숙하지 않은 성격의 자료 하나를 살펴보고 있다.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의 <1945년 남한에서>(김명호 옮김, 한울 펴냄). 이 작업에 뛰어들기 전인 몇 달 전 같으면 이런 자료가 손에 쥐어져도 잘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1906년생의 러시아 저널리스트로,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에서 부영사로 근무하던 남편과 함께 1940~46년간 한국에서 지냈다. 귀국 후에는 한국학 연구자가 되었고, 이 책은 1974년에 쓴 것이다. 1992년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1940~45>를 냈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편파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편파성의 방향이 내게는 특히 낯선 쪽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믿음. 어찌 생각하면 낯선 쪽이기 때문에 편파성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근본주의 기독교도의 미국 제일주의와 딱 대칭으로 느껴진다.


전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을 이런 자료에 꽤 많은 흥미를 일으키게 된 것은 몇 주일 동안 이 주변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윤곽만이 아니라 질감(質感)까지 살피게 된 덕분이다. 편파성에 대한 거부감을 일단 접어놓고 살펴보면 지금까지 익숙하던 자료에서 보지 못하던, 그러면서도 상당히 적절한 시각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소련은 제정러시아 이래 일본의 숙적이었다. 영토 문제와 만주 진출권을 놓고 내내 대립했고, 1904년에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어서 아관파천의 현장이던 서울의 옛 공사관에 영사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략적 이유 때문에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잠재적 적성국 사이의 오월동주(吳越同舟)였던 셈이다.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뀐 이후 일본과의 사이에는 국경과 만주를 둘러싼 종래의 갈등 위에 또 하나 갈등이 얹어졌다. 소련의 계급혁명 세계화 정책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의 충돌이다. “미영귀축(米英鬼畜)”을 부르짖고 있을 때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미영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한 것이 소련이었다.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할 때 한국인의 반응을 샤브쉬나는 한 화학 교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그렸다. (위 책 100쪽)


“국민들이 미군을 맞이할 때 가진 조심성에 대해 놀랄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 원인은 그들에게 있었지요. 3주일 동안 우리를 일본 경찰과 일 대 일로 내버려 두었으니까요. 그리고 맥아더의 명령서들이 과연 불안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제 인천에서 있었던 발사 사건은요? 과연 그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민족사를 알고 있는 조선인들은 우리에게 힘들었던 시기에 미국이 취했던 행동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도 우리를 통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식을 가진 많은 조선인들에게는 확실하게 다가오지요. 아직 그것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도 미국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오만하게 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 전까지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조선에 살았었답니다. 그들은 우리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우리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양키들을 잘 알고 있지요.”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아관파천과 러일전쟁의 역사를 아는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보다 러시아에 더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 한 달 동안의 경험은 이 막연한 신뢰감을 더 굳혀 주었을 것이다. 소련군은 8월 23일 일본군 무장해제를 시작하고 미군 도착 무렵까지는 북한 대부분 지역의 행정권을 현지 인민위원회에 넘겨주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은 훨씬 늦게 모습을 나타내고, 게다가 한국인에게 어떤 권리도 맡기지 않겠다는 방침부터 내세우고 있었다.


9월 하순, 미군이 주둔한 지 보름이 지나면서 미군 정책의 몇 가지 특징은 일시적인 착각이 아니라 항구적인 방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9월 22일 미 군정청은 “토지소유관계 무 변동”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닷새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소작료를 30%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대조적인 조치가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에드가 스노의 주의를 끌었던 모양이다. 스노가 1946년 3월 31일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에 실은 기사의 일부가 샤브쉬나의 위 책 105-107쪽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재인용한다.


최초로 소련과 미국의 두 체제가, 어느 정도 같은 조건의 한 아시아 국가에서 동시에 심판대에 놓이는 일이 발생했다. (...) (북쪽에서) 소작료는 인하되어 소작인들은 수확의 70퍼센트를 갖게 된다. 어떤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소작료와 빚을 갚는 것을 완전히 중지했다. 일본 기업들은 모두 압수되었다. (...) 수많은 조선인 재산가들과 관리인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쳤고, 그들이 버리고 온 공장들 역시 노동자위원회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행정관리는 인민위원회의 손 안에 놓여 있다.

(...)

영어로 말하고 외제상표가 붙은 좋은 옷을 입고 경제용어를 이해하는 조선인들은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재산가들인데, 그들은 신용과 우정을 지닌 사람들로써 미국인들의 존경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이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에게서는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 많은 미국사람들에게 있어 감옥에 있었던 사람은 위험한 존재이다. 비록 그가 일본에 반대하여 행동하다가 감옥살이를 했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는 정치범들의 신상기록은 마치 추천장과 같다.


이런 내용을 인용하면서도 스노의 관점을 자본주의자의 것으로 몰아붙이며 내용 일부의 타당성만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샤브쉬나의 교조주의에는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아무튼 스노가 이 시기의 한국을 세밀히 관찰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샤브쉬나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 관한 스노의 글을 더 찾아서 검토해야겠다. 중역(重譯)을 겪은 위의 글만 봐도 스노 같은 사람의 시각이 당시의 한국 상황을 개관하는 데 뛰어난 점을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