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 스탈린이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는 사실은 근 반세기가 지난 1993년 2월 26일자 마이니치신문 보도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정식, “냉전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 13쪽) 이정식은 이 지령의 발굴이 “한국 현대사에서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주기도 한다.”며 이를 매우 중시했다. 그 중요성을 이정식은 이렇게 설명했다. (같은 책 14쪽)


이 지령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소련 정책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능도 한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한반도 분단 고착화에 관한 연구들은 대체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거나, 국내 정치 세력 간의 투쟁을 중점적으로 분석해 왔다. 따라서 소련은 미국의 행동에 항상 수동적으로 반응했던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사실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소련의 정책이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한반도 분단의 책임론에서 소련의 몫을 늘려주는 자료라는 것이다. 나는 이정식의 다른 글을 본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한 아무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 주장을 이 논문에서 펼치는 방식을 보면 연구자로서 신뢰감이 들지 않는다. 충분하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책임론을 벗어나려는 강박에 몰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40여 쪽의 짧지도 않은 논문 속에 이 중요하다는 자료의 내용이 맨 위에 옮겨놓은 딱 한 줄 외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의 인상을 받는다. 맥락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소개된 한 줄 갖고는 이것이 과연 스탈린의 한반도 분단 의지를 보여주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상식에 어긋나는 추측도 마음에 걸린다. 이 지령이 바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까닭을 이정식은 “지령을 소화해서 행동으로 옮길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며, “9월 말에서 10월 사이 남북한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감안해볼 때 스탈린의 지령이 북한 지역 점령 사령부에게 처음 하달된 것은 10월 초이고, 좀 더 상세한 보충 지령이 내린 것은 10월 말인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같은 책 42쪽) 이런 지령의 하달에 어떻게 열흘 넘는 시간이 걸릴 수 있을까?


소개해 놓은 한 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했다. 당시에 소련은 동구권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 혁명정권을 세워주고 있었다.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울 마음이라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권”이란 것이 항구적인 “국가”보다 영어의 “regime”과 같이 임시적 “체제” 정도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조만식 세력을 존중하던 당시 소련 점령군의 자세와 부합하는 것이다.


현대사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 데 큰 장애가 정치적 편향성이다. 연구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시각이 굴절되는 것까지 아니더라도, 중립적 입장의 연구자도 정치적 대결의 초점이 되는 문제에 과민한 반응을 보여 무리한 흑백론에 빠지기 쉽다. 내가 보기에 이 지령이란 것은 분단에 대한 소련의 책임론을 늘려주는 것도 아니고 줄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분단 책임론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라서 이정식에게 강박을 준 것 같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분단 책임론이 예민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국무성은 소련 책임론을 공식화해서 퍼뜨렸다. 종전 당시부터 소련은 한국을 분단시켜 북한에 위성국가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의 실행자로 김일성을 선택하고 조종했다는 것이다. 남한의 우리는 이 주장을 확고한 사실처럼 교육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양쪽의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조작된 소련 책임론은 무너졌다. 한국 분할 점령은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고, 김일성 그룹은 해방 후 한 달 이상 지난 뒤에야 입국했다.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질수록 당시 극동에서 소련의 정책이 수동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정식은 스탈린의 지령 하나가 이 추세를 뒤집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종전 시점에서 소련의 정책이 수동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9월 12일부터 런던에서 진행 중이던 연합국 외상회담으로 인해 스탈린의 생각이 바뀌어 이런 지령을 내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외상회담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즉각 정책을 그토록 크게 바꾼다는 것이 석연치도 않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이란 것이 분단 건국 정책으로 해석되지도 않는다.


찰스 암스트롱이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 74~75쪽에서 보인 관점이 내게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전후 정책과 관련된 증거들을 보면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대 동아시아 정책은 모험주의라기보다는 “주의를 기울이는 수준”이었다. 전후 점령 초기 몇 년간 스탈린은 유럽에서 소련의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한 반면 아시아에서는 너무 적게 사용했다. 동유럽에서 소련 점령당국은 경쟁자인 미국보다 훨씬 고압적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그 반대였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면서 소련의 주변부에서 공산주의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던 조건의 독자혁명 가능성을 활용할 생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인이 공산주의를 시행할 능력이 없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스탈린은 여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949년 4월 23일 중국 국민당 정부가 공산군의 진격 앞에서 남경에서 광동으로 쫓겨 갈 때 행렬에 함께 있던 유일한 외국 대사가 소련 대사였다고 한다. 이정식의 위 논문에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스탈린의 이중적 정책이 잘 설명되어 있다.


Posted by 문천

 

김일성(1912~1994)이 귀국했다. 그의 등장에 관해 임영태는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57쪽에 이렇게 서술했다.


김일성은 해방 전 이미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전반적 조건과 자산을 갖고 있었다. 항일빨치산투쟁 과정에서 획득한 대중적 지명도와 더불어 지도자적 경력과 능력을 검증받았다. 때문에 빨치산 핵심 세력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더욱 중요한 사실은 소련공산당 중앙과 소련 군부 및 극동군의 적극적인 지원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입국한 뒤 불과 3개월 만에 북한 지역 최고지도자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김일성에 대해 온갖 희한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1987년 군사독재 종식 후에야 김일성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일반인도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사에서의 역할에 비해 남한 국민들에게 그 모습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못하고, 아마 북한 주민들도 지나친 신격화로 인해 정확한 이해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 김일성의 실제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데도 기회 있는 대로 노력을 기울이고 싶다.


내게 김일성의 모습을 제일 가까이서 보여준 문헌은 김성호(연변대학)의 <민생단사건 연구>였다. 다른 주제의 연구에 김일성을 주변 요소로 담았기 때문에 관련 서술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객관적 시각이라는 신뢰를 준다. 유격대 지도자로서 김일성의 훌륭한 면모를 여러 모로 실감할 수 있었는데, 그 책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아 바로 예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종석은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해방전후사의 인식 5> 수록)에서 북한 체제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전통을 주축으로 세워진 사실을 밝혔다. 1930년대에 만주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이던 항일투쟁 세력이 1939년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에 타격을 입고 활동 근거를 잃자 그 주력이 소련 영내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소련군의 ‘88특별여단’ 형태로 꾸며진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 참여해 항일투쟁의 대오를 정비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조직력과 아울러 소련군, 중국공산당, 양쪽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88여단 그룹의 조직력은 무엇보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단결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 그룹의 지도적 위치에는 김일성 외에 최용건(1900~1976)과 김책(1903~1951)이 있었다. 최, 김 두 사람은 나이도 김일성보다 10세가량 위일 뿐 아니라 경력에 있어서도 ‘윗사람’들이었는데, 해방을 앞둔 7월 ‘조선공작단’을 결성할 때 김일성을 단장으로 추대한 이래 귀국 후까지 그를 일사불란하게 지도자로 받들었다.


연상의 선배들이 후배를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해방 당시 다른 정치세력에서는 볼 수 없는 강점이었다. 이 특성에 대한 와다 하루끼의 해석을(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민주항일전쟁>(창비 펴냄) 281-282쪽) 임영태의 위 책 51-52쪽에서 재인용해 놓는다.


김일성은 다른 두 사람에게 없는 결정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최용건과 김책이 북만에서 활동해서 조선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데 비해 김일성은 동남만에서 활동하며 조선 북부로 공격해 들어간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명도에서는 최현도 들 수 있지만 김일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일성은 소련 측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최용건과 김책만큼 깊지 않았던 것도 평가되는 점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극성이나 부하의 장악도 면에서 김일성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상과 같은 김일성의 자산을 고려할 때 최용건과 김책이 김일성을 앞에 내세움으로써 만주의 유격대파가 해방 후 조선혁명의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야말로 해방 후 김일성을 음으로 양으로 보좌하여 그를 찬양하고 유일한 ‘수령’으로 치켜세웠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고서는 될 리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3형제의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장남과 차남은 조건이 좋은 막내에게 집안의 상속을 잇게 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막내의 현명함을 칭송하며 자기들도 스스로를 낮추어 막내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집안과의 엄혹한 대항 속에서 집안을 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Posted by 문천

 

지난 8월 30일 일본군 각부대로부터 제대가 되어 돌아온 청장년장병들이 일치단결하여 귀환장병대라는 이름으로 현재에는 치안유지에 힘쓰는 한편 장래 국군의 기초를 닦으려고 주야로 맹활동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이번에는 기본 뜻을 가진 단체로 귀환군인동맹과 합류하여 이름도 ‘조선국군준비대’라고 고친 후 앞으로 목표하는 방향을 향하여 일로매진하기로 되었다. 현재 조직된 인원으로는 서울 시내가 5백 명 지방이 1천 명 도합 1천5백 명가량이며 대의 특색으로는 어디까지나 당파에 기울지 않고 꾸준히 훈련에만 전심하였다가 어느 때고 정부가 수립되는 때에 국군에 무조건으로 합류하자는 것이다.

강령과 역임은 다음과 같다.

◊ 綱領

(가) 우리는 現有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국군편성의 기초를 준비코자 함

(나) 우리는 軍團的 발전을 편성함

(다) 신정부군대가 편성될 때에는 그에 합류함

(라) 우리는 主義的 혹은 파벌내 분쟁을 배척함

(마) 우리는 自衛治安에 노력함

◊ 隊長:李赫基(略)

매일신보 1945년 09월 1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좋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한국 현대사를 참혹하게 만든 말이다. 크고 건강한 단합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뭉쳐야지, 뭉쳐야지,” 마음먹고 뭉치는 것은 이해관계에 따른 작은 단결이기 쉽다. 더 큰 대립을 가져오는 패거리의 뭉침이 되기 쉽다.


질서를 잃은 사회에서 조직이 큰 힘을 발휘한다. 힘에 대한 억제가 약하고 힘없는 자가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힘 있는 조직에 속하고 싶어 한다. 자금과 기획력을 가진 야심가들은 이런 사람들을 모아 쉽게 세력을 만들 수 있다.


결사의 자유가 없던 일본 통치가 끝난 후 몇 달 동안 수백 개의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는 정당 등 정치단체가 제일 많았고 군사단체도 수십 개에 달했다. 군사단체 중 제일 큰 것이 이 국군준비대로, 연말까지 상비군 1만7천 명에 예비군 7만여 명을 조직했다고 한다. 좌익 단체로 지목되어 우익 단체들과 잦은 충돌을 빚다가 이듬해 1월 12일 총사령 이혁기 등 간부들이 미군정에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이혁기는 경성제대 출신으로 학도병 탈영자였다. (<위키백과> “국군준비대” 조)


인적 자원은 차고 넘쳤다. 수백만 해외동포가 귀국하고 있었는데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 상황이었다. 북한 지역 일부 주민의 남한 이주도 시작되었다. 류상영은 “8-15 이후 좌-우익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 4> 61쪽)에서 “1946년 8월까지 일본, 만주, 38선 이북 등 전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인구수는 미군정 정보국의 통계에 의하면 186만1,390명”이라고 했다. 1년간 10%의 순증가였고, 아마 서울은 갑절로 늘어났을 것이다.


유민 상태의 대중 속에서 조직의 가치가 가장 큰 것이 활동력 있는 청년층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 귀환병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군사조직은 참가자들에게는 일종의 취업이었고, 조직자들에게는 세력 확대의 길이었다.


국군준비대 강령 (라)항에 “우리는 主義的 혹은 파벌 내 분쟁을 배척함”이라 했지만, 이 시기의 어떤 조직도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향성을 정말로 가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지향성이었으니까. 국군준비대는 좌익 성향으로 파악되었다고 하는데, 1945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국군준비대와 충돌한 소위 우익 단체들이 극우 성향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실제 노선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맨 오른쪽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왼쪽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니까.


해방 후 연말까지의 기간 중에 좌익 쪽 민중 조직이 우익 쪽보다 활발했다는 통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류상영의 위 논문 64쪽에는 나주 치안대의 상황을 예시하며 “이처럼 8-15 직후에는 자발적인 청년조직들에 의한 일제 잔재 청산과 친일파 제거 주장이 매우 지배적으로 대두되었기에 이에 대항할 우익 청년조직의 움직임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자발적 청년조직’은 민족주의 조직이지 좌익이 아니다. 따라서 ‘이에 대항할’ 조직이라면 우익이 아니라 극우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대표적 좌익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도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지, 극좌를 배제한다는 노선을 표방했다. 해방 직후 상황에서 중도 노선이 인민에게 환영받던 상황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이 자리 잡은 뒤에야 ‘우익’을 표방하는 극우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단체가 1946년 1월 7일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학련)이었다. 서중석의 서술을 보면 학교를 많이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 주류 세력이 학생들을 동원하기 쉬웠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33쪽)


우익의 최고 지도자로서 우익 청년-학생운동단체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학생연맹의 후신인 전국학생총연맹을 가장 믿음직한 활동단체의 하나로 아끼고 사랑했다고 하며, 각종 우익 청년-학생단체를 지원하고 그 소속원들을 격려하였다. 김구와 조소앙은 청년-학생단체의 소속원들이 체포되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시켰다. 이들 단체에 대한 자금의 지원은 ‘인촌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이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성수와 ‘전국학련의 금고’로 자처한 전용순이 가장 많이 하였고, 이승만, 박흥식 등도 지원하였다. 이철승은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 이밖에 정인보, 장덕수, 엄항섭, 김도연, 안호상, 이선근, 박순천, 김활란, 임영신 등이 물심양면으로 전국학련 등에 대해 지원하였다고 한다.


미군정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에 대한 비판은 미군정이 ‘한 짓’에 많이 집중되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통치건 점령이건 한 사회의 운영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질서 유지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은 돈과 주먹의 힘이 날뛰는 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이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폭력에 의지함으로써 극우의 길로 흘러가는 것을 군정이 방치 내지는 방조까지 한 것이 한국 정치 수준을 타락시키고 중도파의 길을 봉쇄한 기반조건이었다. 좌익 쪽의 폭력성은 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파의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적어도 미군정이 질서 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던 남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장준하가 광복군 시절 존경하고 따르던 이범석이 1946년 6월 귀국 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모습에 실망한 이야기가 있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돌베개 펴냄) 225-227쪽) 이범석과 함께 광복군의 찬란한 지도자였던 지청천 역시 귀국 후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광복군을 대표하던 이런 인물들조차 극우 테러리즘밖에 진로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미군정 하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국군준비대 총사령이던 이혁기는 1948년 2월 22일 인민혁명군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 안에 국군준비대 출신 장병들을 중심으로 좌익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건이다. 1944년 학병 거부운동에 함께 앞장섰던 이철승이 학련의 맹장으로 나선 것과 대비되는 행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