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외로 알뜰하게 읽어 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열받네요. 열받은 김에 열심히 쓰렵니다.

군대 얘기. 여성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 그냥들 지나가셨겠지만,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일을 빼놓을 수도 없으니... 조회수 절반으로 떨어질 거 각오하고 적어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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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대학 졸업 무렵 병력 자원에 대한 베이비붐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현역 징집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75년 입대할 무렵에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체에 대해서는 도무지 자신이 없던 내가 현역으로 가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가게 됐다. '신의 아들'이 아니라 '유력인사 자제'였기 때문이다. 병무 비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심해지자 당국은 대책이랍시고 '유력인사 자제'를 분류, 신검에서 배치까지 최대한 불리한 결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이 '유력인사'에 국회의원, 장-차관이 들어간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 대학교수들을 넣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덕분에 교수 어머니를 둔 내가 치이게 된 것이다.

형들의 학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병역문제에도 얼마간 신경을 쓰셨다. 큰형이 66년 대학 졸업 직전에 해군에 입대한 것은 든든한 빽을 믿어서였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 초열 여사의 부군이 함대사령관으로 계셨다. 당시에는 함대가 한국함대 하나뿐이었다. 형은 사령관 숙소 당번병으로 군대생활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69년 제대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체수가 작던 작은형은 68년 3학년때 체중미달로 면제받자마자 학부 편입으로 유학가 버렸다. 당시 체중미달 기준은 45킬로였는데 얼마 후 40킬로로 강화되었다. 형의 체중이 45킬로가 안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병무행정 가닥으로, 한 번 재 보고 미달된다고 바로 면제 결정을 바라기 힘들었다. 면제 결정이 확실히 나오도록 뭔가 기름칠이 있었던 것 같고, 당시로서 드문(비용도 많이 드는) '조기유학'을 서두른 것도 병역 문제가 다시 제기될 위험을 의식한 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형들의 병역 문제 처리를 보아 온 나로서는 내 일도 어떻게 "해주겄지~" 하는 기분으로 졸업 때까지 연기하고 있다가 막상 졸업을 하려니까 막막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대부분 방위로 빠졌고, 빠지는 데 얼마 들더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주고받는데, 나는 '유력인사 자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2년간 안식년(당시에는 그런 이름의 제도가 아니었지만)을 얻어 외국에 나가셨다. 일단 대학원에 들어가 2년 더 연기하고 보기로 했다.

74년 석사를 마치고 바로 훈련소에 갔다. 훈련소 신검에서 즉일귀향인가? 판정을 받고 돌아와, 이만하면 현역 복무를 하게 되지는 않겠지, 하고 지내다가 결혼까지 했다. 박사과정 입학 수속도 밟았다. 그러고 75년 3월 다시 영장을 받아 대구 성서의 강철사단인지 양철사단인지 훈련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6주 훈련을 받은 얘기는 훈련소 생활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딱히 보탤 만한 게 없다. 대단히 힘들고, 때로 무지 괴로웠지만, 견뎌냈다. 다들 함께 겪는 일이라는 인식이 큰 몫을 했다. 훈련소를 나와 보름만에 영창에 갔을 때는 그런 인식이 없어서 더 괴로웠을 것이다.

'유력인사 자제'는 병과 훈련도 없이 전방 사단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성서를 떠난 사흘 후 춘천의 군단 보충대를 거쳐 화천의 사단 보충대에 도착했다. 보충대 막사 앞에 신병들이 열을 지어 서서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막사 문이 열리더니 작대기 셋 짜리가 모자도 안 쓰고 슬리퍼를 끌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오더니 신병 대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놀고 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나를 툭 치고 "뭐 이런 고문관까지 다 왔어?" 야지도 놓았다. 그러고 막사에 도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문을 빼꼼히 열고 "야! 한 놈 일루 와! 너!" 외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넷! 이병 김기협!" 외치고 뛰어들어가려니 "더플백도 가져와!" 하는 것이었다.

보충대 행정반에 들어가 문을 닫고 돌아서려니 지금까지 거들먹거리고 있던 차 상병이 내 손을 부여잡고 굽신거리며 "선배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4년 후배라면서. 서류를 보고 선배님 오시는 줄 알았는데, 다른 신병들 이목 때문에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단 안에서는 아무 데라도 가고 싶으신 대로 보내드릴 테니 골라잡으라고 한다.

차 상병은(마에가리지만) 사람이 똘똘한 데다 쩐도 적당히 쓸 줄 알아서 제 몸도 편하게 지내고 (육군 사병 치고는) 보충대 밖에까지 꽤 영향력을 가진 재간둥이였다. 사단장 숙소당번 말고는 아무 거나 찍으라고 하는데, 알아야 면장질도 한다고, 뭘 알아야 찍고말고 하지. 어벙한 꼴을 보고는 차 상병이 그 사이에 들어온 병장 하나와 토론을 벌인다. 사단 사령부에선 저 형님처럼 점잖은("어벙한"이란 뜻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분이 적응하기 힘들 거고... 떨어져 있는 직할대가 좋을 것 같은데... 참, 의무중대에 전령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서 그 날로 나는 의무중대로 갔다. 전령 조수가 뭐하는 짓인지도 잘 모르면서.

전령은 상급 부대와의 사이에 문서를 전달하는 직책이었다. 의무대에서 작성한 문서들을 모아 사령부로 가져가 해당 부서에 접수시키고 의무대로 올 문서들을 모아 가져오는 일이다. 한 직책을 두 사람이 맡으면 상급자를 사수라 하고 하급자를 조수라 한다. 의무대 전령을 오래 맡아 온 강 병장의 제대가 석 달 후로 다가와 있어서 인수받을 조수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의무대에 가서는 그런 대로 쉽게 적응이 되었다. 만 25세가 넘어 박사과정 입학해 놓은 쫄병을 신기해 하는 분위기가 별난 놈 갈구고 싶어 하는 일부의 욕구를 대충 가로막아 준 셈이었다. 사수 강 병장은 연세대 재학 중에 입대한 친구였는데, 워낙 점잖은 성품이고, 며칠 지내다가 무슨 얘기끝에 자기 친구가 내 친구의 동생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를 좀 어려워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강 병장이 며칠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가르쳐준 다음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강 병장은 오랫동안 갈구해 온 말년의 편안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일이 터지고 내가 영창에 가는 바람에 강 병장이 다시 전령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시경 사령부로 출발하려는 참에 환자계가 이등병 하나를 데리고 왔다. 퇴실하는 (군단에는 병원이 있고 사단 의무대에는 '병실'이 있기 때문에 환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입실', '퇴실'이라 했다.) 군악대 환자를 사령부 가는 길에 데려다주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때까지 이등병이지만 마에가리 일등병을 달고 다니고 있었다.

사령부 앞에서 함께 버스를 내린 뒤 군악대 막사를 가리키며 "저기가 군악대지?"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을 보고 내 볼일 보러 갔다. 점심 후 마지막 볼일을 보고 버스정류장에 나와 있는데 찦차 하나가 지나가기에 군기 충만하게 "다~안결!"을 외쳤다. 그런데 그 차가 서더니 말똥 하나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전령들에게 외친다. "여기 의무대 전령 있어?"

내가 나서자 펄쩍 뛰어내려 아무 말 없이 나를 뒷자리에 태우더니 그냥 고고씽이다. 그러더니 이 차가 헌병대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하고 영창에 들어갔다. 영창 근무자들에게 한바탕 혼이 나면서 한 마디씩 주워모아 보니, 아침에 데려다준 군악대 신병이 그 길로 막사에 들어가는 대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가 검문소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탈영방조범"으로 붙잡혀온 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병에게 '인솔'을 맡긴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헌병 참모가 인솔을 내게 맡긴 자들의 책임을 묻자고 주장하다가 위에서 덮어버리니까 홧김에 눈에 띠는 대로 나를 '납치'해 온 것이었다. 의무대에서도 꿀리는 데가 있으니까 구명에 나서지 못하고, 그냥 그넘한테나 화를 푸시라고 맡겨놓는 상황이 되었다.

영창에 넣는 데는 사법적 입창과 징계성 입창이 있었다. 나처럼 뚜렷한 혐의도 걸지 않고 "버릇 고치도록" 집어넣는 징계성 입창은 아마 원천적으로 불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정당한 입창자들보다 징계성 입창자들에게 가혹행위가 더 심했다. 사법적 입창자들은 다음 단계에 더 높은 곳에서 불평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1주일 동안 영창에서 겪은 가혹행위는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심한 것은 점심을 굶긴 것이었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부터 반성을 돕기 위해 징계 입창자들은 점심을 생략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다른 가혹행위는 신체의 고통을 불러오는 것 뿐인데, 이 조치는 입창자들을 생사의 기로로 내몬 짓이었다.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더니, 헌병 참모의 미움을 받는 나 때문에 영창 동기생들의 고생이 더했다. 그래도 그들이 내게 화풀이를 별로 하지 않은 데서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키울 수 있었다.

훈련소보다 영창이 더 괴로웠던 이유를 그 후 간간이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훈련소는 누구나(적어도 많은 사내들이) 겪는 것인데, 영창은 너무나 재수없는 곳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는 가혹행위의 의도성이다. 훈련소에서는 기본목적이 훈련에 있었다. 단편적인 일탈행위는 있을지언정, 원칙적으로는 훈련의 목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가혹행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창에서 징계성 입창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헌병 참모 이하 헌병대 전체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저지르는 조직적 행위였고, 이것이 윗선에서까지 묵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소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했다. 영창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증오까지 하게 되었다. 영창은 기껏 혐오밖에 할 줄 모르던 내게 증오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영창에서의 고생은 의무대에서 간부들과 고참들의 동정심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덕분에 제대를 두 달 앞둘 때까지는 다시 헌병대 신세를 지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입대 두 달만에, 그리고 제대 두 달 전에 헌병대 신세를 졌다는 것도 참 공교로운 일이다. 제대 말년의 헌병대 신세 얘기도 다음에 한 번 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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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6. 08:51

어제 친구 세 분이 다녀가셨다.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의 이정희 선생님. 같은 과 동료로 계시던 김호순 선생님. 그리고 건국대 국문과에서 퇴직한 강인숙 선생님은 같은 과 계시던 이어녕 선생님의 부인이시다.

세 분이 전번에 다녀가신 것이 11월 초순이나 중순이었던 것 같다. 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 11월 하순이었는데, 다녀가신 기록이 앞에 없다. 회복 추세가 시작되신 것이 11월 중순이었으니까 여러 달째 기력도 없고 정신도 혼미하시던 모습을 보고들 가신 것이다.

그때도 운전을 맡아준 강 선생님의 조카며느님이 이번에도 세 분을 모셔왔다. 전번에는 어머니를 보신 다음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가셨는데, 이번에는 미리 먹고 들어가서 느긋하게 보자고들 하셔, 킨텍스 모퉁이에서 마중해 전에 어머니도 모시고 가끔 가던 굴밥집에 갔다.

미리 연락할 때부터 이 선생님이 그 점심은 당신이 산다고 장담하셨는데, 그럴 만한 사유가 있는지 평소 같으면 계산을 그분에게 절대 넘기지 않는 두 분 선생님이 양해들을 해주신다. 나중에 병원에서도 이 선생님이 어머니께 용돈 쓰라고 금 일 봉을 주셨다. 두 사람 조직도 못해 자손이 없으신 분인데, 친척이나 후배 중에 도와드린 분이 있었는지. 아무튼 굴파전 하나 곁들여 매생이 국밥으로 한 식사는 모두들 대만족이셨다.

기사분이 차에 남아있을 바에야 병원 현관 앞에 내려드린 뒤 주차장에 들어가게 하면 될 것을, 이 선생님이 가게에 들러 뭘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약 200 미터를 걸어야 했다. 이 선생님이 그 연세에 쌩쌩하신 분이지만 걷기는 힘들어 하신다. 가게 들를 일은 두 분 선생님이 말렸지만,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내가 강 선생님을 먼저 올려보냈다.

김 선생님과 함께 이 선생님을 모시고 방에 들어서니 어머님과 강 선생님은 벌써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강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여사님들이 내게 어떤 관계냐고 묻기에 선생님 남자친구의 아내라고 했지." 이어녕 선생님이 이대 국문과 들어갈 때 어머니가 학과장이었고, 계시는 동안 어머니가 무척 아끼셨기 때문에 가까운 분들이 어머니의 '보이프렌드'라고 놀리는데, 강 선생님까지 한 몫 거드시는 것이다.

이 선생님이 곁에 앉자 어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띠신다. "나 알겠소?" "그럼 알구말구." "내 이름이 뭐요?" "이-정-희!" 나까지 놀랄 정도다. 상태가 좋으실 때는 그만큼 사람을 알아보실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정확하게 인식하실 것을 꼭 바랄 수는 없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세 분 선생님들, 모두 놀라 마지않는다. 석 달 전 와서 보신 모습과 너무 다른 것이다.

이 선생님이 반대편에 앉아 있는 김 선생님을 가리키며 "저 사람도 알아보겠네." 하니까 고개를 돌려 보시곤 "오! 호호!" 탄성을 올리신다. 40여 년 전부터 자매간처럼 가까운 동료로 지내 온 김 선생님을 오랫만에 보시면서는 말씀보다 이런 괴성이 제격이시다. 함께 산에 다니며 빚어온 가닥이다.

강 선생님은 부군께서 보낸 것이라며 한과세트를 가져오셨고, 김 선생님은 머핀 두 봉지와 과일을 가져오셨다. 좋아하시던 한과를 과연 드실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길쭉한 강정 하나 끄트머리를 끊어 입에 넣어드리니 우물우물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강정 하나를 다 드신 다음 이번엔 머핀을 조금 잘라드리니 이것도 끄덕끄덕. 선생님들이 모두 기뻐하시는 거야 그렇다치고, 이 선생님은 어머니가 더 못 드시겠다고 백기를 드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는 듯이 자꾸 권하신다. 옆에서 눈치를 드려도 하도 막무가내셔서, 결국엔 무례할 정도로 제지를 해야 했다. 무례는 김 선생님께도 저질렀다. 어머니 흥을 돋워 드리느라고 목소리를 자꾸 높이시는데, 워낙 볼륨이 좋은 분이셔서 도저히 방치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다른 할머니들 쉬시는 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소리지르세요."

입원해 계신 19개월 동안 세 분 선생님은 대여섯 차례 와 보셨지만, 이번 방문처럼 기뻐하시는 것은 처음이다. 3개월 전에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시고 팔조차 못 움직이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담소를 다시 나눌 일은 아마 모두 포기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도 칭찬이 빗발칠 수밖에. 독신으로 지내신 김 선생님, 약간 오버까지 하신다. "아들이 여럿이니 하나쯤 걸리기도 하잖수. 나처럼 자손 없는 사람은 부럽기가 한량없네." 속으로는 '선생님도 쓰러지시기만 하세요. 제가 모실께요. 연습은 아주 잘 해놨어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참는다. 김 선생님은 독신이라도 친정이 워낙 든든하셔서 자식 못지않은 조카들이 즐비한 분이니 어떤 농담이라도 드리겠지만, 실향민 출신으로 친척도 적은 이 선생님 앞에선 조심스럽다.

세 분이 흐뭇한 마음을 안고 떠나신 후 조금 더 곁을 지켜드렸다. 꽤 길게 흥분상태를 지내신 만큼 약간 노곤한 기색을 보이시지만 크게 힘들어 하지 않으신다. 이 정도면 불원간 일반병실로 옮기셔도 지내시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이제 틀니를 넣어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저녁때 갔다. 휴가 갔던 장 여사가 돌아와 있는데,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던 채 여사도 그대로 있다. 둘러보니 주 여사가 안 보인다. 그래서 장 여사에게 잘 다녀오셨어요? 인사한 다음, 이번에는 주 여사가 휴가 가셨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뜻밖에도 "휴가가 아니라...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주 여사는 지난 11월 중순, 어머니 회복이 시작될 무렵 여기 왔으니 세 달 있은 셈이다. 그런데 그 전부터 오래 있던 김 여사와 박 여사가 연말에 떠난 다음 새로 온 강 여사와 장 여사를 이끌고 8층 중환자실을 꾸려 왔다. 그 사이에 더러 적은 일도 있지만, 일하는 자세가 대단히 훌륭한 분이다. 자기 몫을 해 내는 정도를 넘어서서, 방을 꾸려가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새로 합류한 분들이 쉽게 적응하도록 배려하는 태도가 매우 훌륭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떠나다니. 그 동안 열심히 일해 온 자세가 오래도록 일할 기반을 닦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뜻밖이다.

어머니가 회복되시기 전 상태부터 쭉 살펴왔기 때문에 어머니가 필요로 하시는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주 여사가 없어져 매우 아쉽다. 그래도 이제 한 달 남짓 된 강 여사와 장 여사가 일에 꽤 익숙해져 있고, 어머니도 상당히 든든한 상태로 올라와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집에 돌아와 형에게 메일로 감사 전화 하라고 일렀다. 어머니 전화를 주 여사 전화로 해 왔기 때문에 번호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 전화를 위해서는 장 여사 번호를 보내줬다.

어머니 상태는 오늘도 썩 좋으시다. 죽을 조금 남기셨지만, 요 전날처럼 잡수실 기운이 없어서 남기신 것이 아니라 태연히 앉아서 "먹을 만큼 먹었다." 하는 표적으로 손을 휘휘 저으신다. 강정을 하나 꺼내 둘로 잘라 한 쪽을 드리니 우물우물 끄덕끄덕 맛있게 드셨지만, 또 한 쪽을 드리려 하니 "그건 네가 먹어라." 하신다. 과일즙을 꺼내며 "소화제는 드셔야죠?" 하니까 "안 먹어도 된다." "조금만 드세요, 어머니." 하니까 고개를 까딱까딱. 한 숟갈 입에 들어가시자 표정이 약간 바뀌며 "더 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리 많이 드시지 않고 이내 만족하신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은 숫자에 대한 집착. 들어갈 때 염주알을 세고 계셨던 듯, 한 곳을 꼭 쥔 채 "잊어버렸어." 하신다. 그리고는 내게 "몇이야, 몇?" 다그치신다. 내가 점쟁인 줄 아시나? 대충 보고 어림짐작으로 "서른여덟입니다, 어머니." 했더니 못 미더워하시며 또 묻고 또 묻고 하시다가 급기야는 내게 들이대며 세어보라고 하신다. 얼른 세어보니 37 아니면 38 같아 "서른여덟 맞아요, 어머니." 했더니 또 다시 세어보라신다. 찬찬히 세어보니 37이다. 그래서 "이제 보니 서른일곱이네요, 어머니." 했더니 "그것 봐." 하고 종주먹을 들이대신다. 내가 세어보는 동안에 "거기다 넷을 더하면..." 하는 식으로 종잡을 수 없는 숫자 얘기를 중얼거리신다. 15분 가량 염주를 놓고 싱갱이를 벌이시다가 "에잇, 집어쳐!" 하고 관심을 거두신다.

"식전에 금강경 좀 읽을까요, 어머니?" 하니까 "그거 좋지." "제가 소리내 읽을까요, 어머니?" 하니까 이번에도 "그거 좋지." 꺼내서 읽다 보니 어머니와 내가 한 장씩 번갈아 읽어서 다 끝낼 때 식사가 들어왔다. 내가 치우며 "금강경도 식후경!" 하니까 흥겨운 표정으로 "그래, 금강경도 식후경!" 따라 하신다.

지금까지 여사님들과 협조, 의논할 일은 주 여사가 앞장서 줬는데, 이제는 세 분과 고르게 '소통'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내일부터는 읽을 것을 가져가서 병실에 좀 길게 머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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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6. 08:44

오늘 점심때는 잠깐 걱정이 들었다. 세 달 가까이 줄곧 기력이 좋아지시기만 했는데, 오늘은 눈에 띄게 약해 보이셨다. 내가 온 것을 알아보시면 무슨 말씀을 한 마디 하실 때도 있고 한 차례 웃음을 띠기만 하실 때도 있는데, 오늘은 웃음이 좀 희미해 보이셨다.

막 식사를 시작하시는 참이었다. 먹여드릴 채비를 하고 있던 강 여사에게 숟갈을 넘겨받았는데, 식사에 흥을 보이지 않으신다. 시치미떼고 점잔떠시는 것도 아니다. 의식이 흐릿하신 것 같다. 식사 뒤쪽으로 가서는 입에 죽을 무신 채 삼킬 것도 잊어버리기도 하신다. 식사 시작하시던 때 이후 처음으로 약간이지만 남기신 채로 식판을 치우지 않을 수 없었다.

웨하스 한 조각을 둘로 나눠 드렸는데, 본능적으로 입에 넣어 우물거리시는 것 같고, 그 맛에 신경이 집중되지도 않으시는 것 같다. 과일즙을 꺼내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입에 한 숟갈 들어가자 그제야 뚜렷한 감흥이 다소나마 일어나시는 듯하다. 침대 등을 중간 정도까지 내려놓고 반야심경을 읽으니 따라 웅얼거리셨지만, 금강경으로 옮기니 가만히 듣다가 이내 잠이 드신다.

어제 약간 변화의 조짐을 느낀 것이 있지 않았다면 걱정이 크게 들었을 수 있다. 그저께까지에 비해 말씀이 적고, 목소리도 크게 내시지 않았고, 장난기도 덜하셨다. 장난기가 아주 없으신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내가 들어갈 때 곁에 있던 주 여사가 "누가 오셨나요?" 하자 "나 아는 사람이야." 하는 말씀은 평소와 같았지만, 더 능청스럽다고 할까, 말씨에 장난기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아는 사람 누구예요? 며느리예요?" 거듭 다그치자 "이 사람? 우리 며느리 남편이야." 하셨다. 유머 감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대답이셨다. 며느리 잘 못 알아보시는 것을 여사님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대답에서 며느리를 앞세워 주시니 여사님들이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 없을 때 과외공부를 시켜드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는 내내 반응이 명민하면서도 차분하셨다. 식사를 마치신 후 무심한 눈길을 앞쪽으로 향하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관조하고 계시는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말씀을 걸면 얼굴을 살짝 돌려 내 얼굴을 보며 들으신 다음 말씀이든 표정이든 가벼운 반응을 보이고는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셨다. 내가 "어머니, 어제 제 생일이었어요." 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랬니? 몰랐구나." 하시고, "어머니, 생일이 되니까 어머니께서 저 낳아주신 일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니까 가볍게 "뭐 별걸..." 내가 짐짓 정중하게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며 고개를 깊이 숙이자 말씀은 없이 큰 웃음으로 입가가 양쪽 귀에 걸리셨다.

기력과 정신을 되찾으신 이래 새로운 느낌 때문에 감수성과 표현이 확장되어 있다가 다시 익숙해지시면서 안정된 양상으로 접어드시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반갑게 생각했다. 오늘 기운이 떨어져 보이시는 것도 그 연장선 위에서 생각하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너무 맥없어 보이신 것은 마음에 걸려 나오기 전에 주 여사랑 잠깐 얘기를 나눴다. 어제부터 좀 조용해지신 변화에는 주 여사도 동의하면서, 자기가 보기에 걱정스러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단, 생각에 깊이 잠기실 때가 많고, 그럴 때 여쭤보면 옛날 일들을 생각한다고 하시며 자식들 이름을 다 대기까지 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여러 개 단층선으로 쪼개져 그 사이를 넘나들 때 착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시는 것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주 여사의 말을 들으면 그 단층선들이 상당히 해소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점심때 피곤한 기색을 금세 보이신 것은 졸리우실 때라서 그랬을 것이란 주 여사 말이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저녁 후에 잠깐 들러서 용태를 한 번 더 살펴봐야겠다. 내일 낮에 친구분들(이정희, 김호순, 강인숙 선생님) 찾아오실 때 오늘 점심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시면 너무 아깝겠다.

 

저녁 전에 잠깐 뵈러 갔다가 예상 외로 오래 붙잡혀 있었다. 진짜로 '붙잡혀' 있었다. 오후에 푹 쉬고 기운이 나 계신데, 호통 모드를 넘어 깡패 모드시다. 내게야 한 마디를 하셔도 호통이 정상이지만, 간병인 여사님들에게까지 호통쪼시다. 그래도 여사님들은 좋아만 하는 것이, 점심때 모습으로는 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막 쌍욕도 하고 꼬집기까지 하셨어요." 하면서도 싱글벙글, 그렇게 깡패짓 하게 만들어 드린 게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다.

기력도 좋고 정신도 또렷하신데, 착란 현상은 평소보다 심하시다. "전문가들한테 뒤치닥거리를 해줘야지..." 비슷한 말씀을 거듭거듭 하신다. "누가 전문가예요, 어머니?" 하니 "전문적인 공부 한 사람들 있잖아." 하셔서 "그러면 역사학자나 국어학자도 전문가인가요?" 하니까 "그렇지. 일이 그 사람들한테 다 몰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힘들지." 정신이 맑으실 때 생각이 꽤 멀리까지 흘러가셨던 것이 착란을 거치면서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금강경을 읽어드릴까 여쭈니 오만상을 찡그리고 실감나는 목소리로 "지-겨-워!" 하신다. 그러면 반야심경을 읽을까요, 했더니 더 찌푸리시고 "그건 더 지겨워!" 그래서 "어머니, 그럼 노래 부를까요?" 했더니 거부 반응 준비로 얼굴을 찌푸리다가 잠깐 눈알을 굴리시더니 "그래, 불러라." 하신다. 여사님들과 가끔 부르신다는 "아리랑"과 "푸른하늘 은하수"를 부르니 처음에 따라 부르실 것처럼 입술을 달싹달싹하시다가, 금세 포기하고 감상에 집중하신다. "잘했다." "그만하면 합격을 줄 만하다." "다시 불러봐라." 하시는 데 따라 너댓 번씩 부른 끝에 "열심히 하니까 나아지는구나. 다른 건 없냐?" 그래서 이것 저것 목소리 낮춰 부를 만한 걸 부르다가 "행복의 나라"가 아다리가 되었다. 한 번 부를 때마다 뭐라고 논평을 하시곤 "그거 또 한번"을 붙이시는 바람에 열 번쯤 불렀다. 노래를 모르고 사는 내가 1년치 노래를 앉은 자리에서 부른 것 같다. 정말 지겹다.

여덟 시도 훌쩍 넘어 일어서려 하니 막무가내로 붙잡으신다. "일하러 가야 돼요. 먹고 살아야 돼잖아요?" 하면 "해봤자 별 수 있냐?" "어머니, 저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요. 집에 가서 먹어야 해요." 하면 "여기서도 밥 주던데?" 결국 장 여사가 쫓아와 설득에 나서 준 바람에 겨우 빠져나오려니, 흐뭇한 미소를 띠고 손을 살래살래 흔드신다. "어때, 혼났지?" 하는 표정으로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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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