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09:41

세 분 간병인들(장 여사, 강여사, 그리고 새로 온 채 여사)이 모두 어머니를 각별히 모시는 태도를 보여준다. 몇 가지 조건이 합쳐져 작용하는 것이다.

첫째, 어머니 당신이 꽤 재미있는 분이시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신 후로는 (연초에 식사를 시작하시면서) 환자 분들 중 제일 반응이 활발하실 뿐더러, 좀 갈팡질팡하시기는 해도 말씀과 태도에 별난 가락이 많이 얹혀져 있어서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자극을 꽤 많이 주신다. 그리고 회복이 많이 되신 후로는 당신께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 적절한 응대가 쉽게 나오신다.

둘째, 우리 내외가 열심히 다니면서 말 하나라도 따뜻하게 하고, 아내가 뇌물도 적절히 쓴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니 돈을 주면 물론 좋아하지만, 한국인들이 돈이면 제일인 줄 안다는 경멸감 내지 혐오감 비슷한 것이 조선족 사회에는 널리 있어서, 받고 좋아하면서도 마음은 잘 움직이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급여 외에 별도의 사례를 받는다는 것이 직업윤리에도 문제가 있다. 아내가 적당한 간식거리 챙겨주고 전화카드 가끔 갖다주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아내가 같은 조선족이란 유대감이 있다. 어머니 곁에 놓아두는 책들을 주 여사가 틈 나는 대로 들여다보곤 했는데, (서점에서 근무한 아내를 포함해서 일반 조선족은 일반 한국인들에 비해 책 읽는 일이 익숙치 않아서 주 여사의 독서 취미는 특이한 것이었고, 떠나기 며칠 전에는 <밖에서...> 한 권을 사인해서 드렸다.) 주 여사 떠난 뒤에 장 여사가 아내에게 한 번 말하기를, 내 책 후기에서 아내를 아끼고 존중하는 대목을 주 여사가 보여줬다고. 조선족인 아내가 한국 고급 지식인에게 존중받고 지내는 것이 자기네 마음에도 기쁘니 더욱더 행복하게 잘 사시라는 얘기... 자유로 병원에서도 이 유대감이 큰 몫을 했는데, 이쪽에 와서는 더욱 증폭된 셈이다.

어제는 저녁 드신 뒤에야 가서 모시고 앉았는데, 채 여사가 들러서 말해 준다. 어제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많이 자기네를 찾으시더라고. 채 여사는 있은 날자가 적지만, 눈치가 빠르달까, 잘 챙기는 면이 있다. 장 여사는 워낙 말수가 적은 분이고, 강 여사는 좀 천진한 성격이랄까, 내가 궁금한 점이 있어 물으면 대답해 주는데, 채 여사는 특이사항을 제절로 알아서 얘기해 주는 일이 많다.

환자가 간병인 많이 찾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방 반대쪽의 아주머니 한 분은 내가 앉아 있을 때도 "아줌마, 아줌마..." 하며 여사님들을 부를 때가 많은데, "지금 바빠요. 좀 있다 갈께요." 대꾸하는 게 보통이고, 내게 "참 골치아픈 분이예요. 다른 분 곁에 있으면 왜 그리 샘을 내시는지..." 하며 절레절레한 일도 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많이 찾으신 일은 무슨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참 고르지 않다.

어머니는 심심하실 때, 또는 뭔가 생각난 것을 얘기하고 싶은 상대가 필요할 때 여사님들을 부르시는데, 소리쳐 부르시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살랑살랑 손짓에 표정을 곁들이신다. 간병인들을 '제자'라고 하시는 것이 처음에는 단순한 착란이신 줄 알았다. 그런데 요새 와서는 그것이 꽤 고급한 전술전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 전날 내가 앉아 있는데도 여사님 한 분을 손짓으로 불러 몇 마디 말씀하고 돌려보내신 뒤에 "내가 부르면 잘 오지." 흐뭇한 표정으로 자랑하신다. 불러도 안 오면 어떻게 하시냐고 여쭈니 태연하게 대답하신다. "그러면 즈이들이 점수 못 받아가는 거지, 뭐."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저쪽에 서 있는 여사님들에게 소리치신다. "너희들, 점수 필요 없으면 안 와도 돼." 점수 갖고 학생들 농락하시던 버릇이 제2의 천성이 되셨나보다. 그러니까 여사님들은 불려와도 귀찮다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겠지.

생각이 이제 내 상상 밖으로 넓고 깊게 자라나시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어제 와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저께는 저녁 후에 다시 가 뵈었는데, 정신이 아주 초롱초롱하셨다. 그래서 대구의 세돈 형님께 전화를 걸어 바꿔 드렸다. 내게 고종사촌이지만 어머니보다 불과 몇 살 아래인 세돈 형님은 아버님 계실 때 '가방모찌'처럼 곁에서 모셨고, 우리가 크는 동안 마치 숙부님처럼 우리를 살펴주신 분이다. 작년 여름 자유로병원으로 와 뵙고는 이제 다시 뵙기 어렵겠구나, 체념하고 돌아서셨던 형님, 뜻밖에 '아지매' 목소리를 듣고 매우 기뻐하신다.

통화하시는 동안 그쪽 집 걱정까지 해주시며 이쪽 걱정은 마시라고 의연하게 말씀하시는 것만도 대견했다. 그런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통화가 끝난 뒤 나를 돌아보며 하시는 말씀. "제사..."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를 내놓으시고 잠시 끊었다가 말씀을 이으신다.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남들이 너무 걱정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채로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만큼 편안하게 지내며 재미있게 지내시는데, 남들 걱정시킬 일이 뭐 있겠어요?" 그러자 처연하게 보이는 웃음을 띠고 말씀하신다. "우리야 그렇다 해도 남들 눈에는 형편없게 보일 수 있지 않니?"

그 말씀을 듣자 앞에 "제사..." 한 마디에 무슨 뜻이 있었는지 알겠다. 우리 집 제사가 끊긴 지 8년째다. 큰형이 한국에 없으니 작은형이 나서서 지내다가 작은형이 학교 그만두고 미국에 많이 나가 지내게 되면서 내놓은 것을 내가 시늉만으로라도 잇고 있다가 아버님 50주기를 큰형 가족까지 불러들여 모처럼 본때있게 지낸 뒤 나마저 중국으로 나가고는 아예 접어놓은 것이다.

아내와 함께 귀국해 지내면서 제사를 되살릴까 하는 생각도 얼핏얼핏 들었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한국 사회가 중국 조선족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데, 제사 안 지내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제사를 좋은 풍속으로 이어가는 분들을 부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 친척을 모아 추모의 계기로 의미를 살리지 못하면서 두 내외가 제사 시늉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허례허식일 뿐이다. 8년 전까지는 그래도 후일을 기약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초라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지내드릴 때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제사를 제사답게 모실 장래의 전망도 없다.

어머니는 제사 문제로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내가 시늉만의 제사를 지내려 애쓸 때도, 절에서 천도 불사를 모아서 할 테니 따로 제사 지낼 것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 성격이 망자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지 않는 편이시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제사 등 전통에 대한 태도가 각별히 단정한 세돈 형님과 오랫만에 마주치자 마음에 걸려 있던 문제를 드러내신 것이다. 절 사정에 밝으신 분들께 여쭈어 절에 맡겨서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를 최소한 갖추는 길을 찾아야겠다.

제사 생각이 떠올랐지만, 건드려서 재미없을 듯하기에 밀쳐놓고 시치미를 뗐다. "어머니, 존경까지는 못 받는다 해도, 형편없다고 우습게 보이기까지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끄덕끄덕하시며 "그렇지, 나야 아들 셋이 다 잘들 하니까..." 그리고는 스스로 미심쩍으신 듯이 덧붙이신다. "기봉이야 어디 한 구석 걱정할 데가 없고... 기목이는 아주 미덥지는 않지만..." 하시는 대목에서 내가 가로챘다. 나쁜 쪽으로 내가 우겨야 어머니가 방어적인 자세로 작은형을 감싸시게 되리란 계산도 있지만, 나도 스트레스 좀 풀어야겠다. "아주 미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미더운 구석이 전연 없죠. 미덥지 않은 사람 억지로 믿으려고 괜히 부담 주지 마세요." 했더니 뜻밖의 고명한 대꾸가 나오신다. "내가 보기에 그렇더라도 너희 사이에 그러면 안 되지. 형제 간에는 서로 믿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

이 정도면 재작년 여름 쓰러지시기 전까지의 여러 해 동안보다 더 폭넓고 유연한 사고력이시다. 하드웨어 상태가 더 좋아지셨을 리는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사고력에 제한을 가하던 여러 가지 '집착'이 기억의 범위가 줄어들면서 풀어지신 덕분일까? 아내를 대하시는 태도에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갔을 때 아내에게 어머니를 맡겨놓고 나는 나와서 책을 보고 있으려 했는데, 나가려는 나를 아내가 가리키며 "어머니, 저 사람 어머니랑 놀아드리지 않고 도망치려고 해요. 붙잡으세요." 하기에 내가 "어머니는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좋아하시니까 제가 비켜 드릴께요."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여사님 한 분이 "할머니, 아드님이 더 좋아요, 며느님이 더 좋아요? 어느 분이랑 노시겠어요?" 하니까 이쪽 저쪽을 쳐다보신 뒤에 음흉한(?) 웃음을 띠고 "나는 며느리가 더 좋아." 하신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시려는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며느리에 대한 인식은 이번 회복 이후에 새로 입력되신 것 같은데, 그 인식을 행동의 준거로 삼으실 만큼 안정된 자신감이 확보되신 것으로 생각된다.

음식에 대해서도 절제의 틀이 자리 잡히신 것 같다. 그저께 점심 때 맛있게 죽 한 사발을 비우신 다음 식판을 치우려 하자 식판을 붙잡으며 "나 아직도 배고파." 하신다. "이렇게 맛있게 드시고도 배고프세요? 미안하지만 공양이 끝나셨는데요?" 했더니 "끝나긴? 이제 시작인데." 강정을 하나 입에 넣어드리니 식판을 선선히 내보내신다. 얼마 전에는 정말로 더 잡숫고 싶은 욕구 때문에 식판에 매달리기도 하셨는데, 이젠 장난으로 그러시는 것이 분명하다. 당신의 욕구를 스스로 바라보실 수 있는 것이다. 과일즙이건 과자건 아무리 입에 맞으시는 것이라도 보름 전처러 끝장을 보자고 달려들지 않으신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2. 28  (0) 2009.12.18
09. 2. 22  (0) 2009.12.17
09. 2. 11  (0) 2009.12.17
09. 2. 10  (0) 2009.12.16
09. 2. 8  (0) 2009.12.16
Posted by 문천
2009. 12. 17. 09:34

19개월 병원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를 살펴드린 간병인이 (임시로 며칠 봐드린 분들 제하고) 열 손가락으로 모자란다. 그분들을 대해 온 내 태도를 스스로 돌아보며 내 인간관 내지 처세술을 반성할 때가 더러 있다.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지금 맡고 계신 분을 최고로 여기는 것이다. 이 분 손을 떠나면 어떡하나, 늘 걱정하고 어떻게든 떠날 위험이 적도록 말 한 마디에서 간식거리 챙겨드리기까지 공을 들인다. (간식거리로는 해자부리=해바라기씨가 간편하고도 인기다.) 아내는 가끔 옆에서 웃는다. 돈벌러 온 만큼 다들 열심히 하고, 사람이란 게 대개 다 착한 건데, 왜 그렇게 안달을 하냐는 것이다.

겪어놓고 보면 아내 말이 맞다. 자유로병원 있을 때 한 달 이상 봐드린 이가 넷이었는데, 바뀔 때마다 새로 온 분이 더 좋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봐드린 조 여사에 대해서는 신뢰를 넘어 경의까지 품을 정도였다. 자유로에선 한 분이 살펴드리는 일반실에 계시다가 현대병원에 와선 세 분이 살펴드리는 중환자실에 드셨는데, 세 분 중 말뚝인 김 여사와 박 여사가 조 여사만큼 존경스럽지는 않아도 충분히 믿음직스러웠고, 세 분이 돌봐드린다는 시스템 자체의 장점 때문에 더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들어온 지 한 달 남짓 되는 주 여사를 놔두고 두 분이 떠날 때 막 걱정스러웠는데, 며칠 안 되어 "주 여사 최고!"를 외치게 되었다. 고참들 밑에서 거들고 지낼 때는 보이지 않던 장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개인적으로 자유로의 조 여사 못지 않은 경의를 품게 되었다. 청결상태 등 중환자실의 운영 기준을 업그레이딩 하면서 새로 온 강 여사, 장 여사가 새 근무처에 쉽게 적응하도록 소소한 일에도 배려하는 태도가 정말 훌륭했다. 강, 장 두 분은 주 여사보다 한 살, 세 살 연상인데도. 두 분이 처음 왔을 때는 좀 어리버리해 보였지만, 이제 주 여사가 빠져도 걱정스럽지 않을 만큼 듬직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주 여사가 그 동안 잘 이끌어준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도 조 여사와 주 여사의 뛰어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아내 말로는 '공직'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이다. 두 분은 화룡과 연길의 가두판사처(동사무소 내지 구청)에서 공작하던 이들이다. 틀 잡힌 단위(직장)에서 공작한 이들은 공사가 분명하고 경우가 밝다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주 여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랑은 몰라도 아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틈나는 대로 붙어앉아 그렇게 재재거리며 친밀하게 지낸 터에. 주 여사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보다 세상 물정을 알 만큼 아는 아내랑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제밤 큰형에게 메일 보내며 끝에 이렇게 썼다. "왜 이렇게 떠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이 그 동안 해온 일에 대해서는 고마울 따름입니다. 곧 떠난다고 하는데, 떠나기 전에 전화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아침에 주 여사에게 전화했다. 목소리 듣자마자 누군지 알아보고, 말 없이 떠난 것을 사과하며 행여 오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저께 세 분 선생님과 함께 갔을 때 일정이 세워져 있었지만 그 날은 번잡스러운 것 같아 어제 내가 평소처럼 점심때 가면 말하려던 것이 내가 저녁때 가는 바람에 보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갔다가 한 달이면 또 와서, 현대병원에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관계자들에게 모두 당부해 놓았다고 한다. 조금 전에 큰형 전화도 받았다며, 자기도 우리에게 고마웠고, 어머님을 다시 살펴드리고 싶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하니, 주 여사가 말하지 않는 뜻까지 이해될 것 같다. 그저께 세 분 선생님들 떠나신 뒤에도 내가 30분은 더 있었으니, 조용히 얘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저께는 얘기할 생각이 없었고, 어제 출발에 임박해 얘기할 마음이었을 것이다. 왜? 그저께 얘기하면 우리가 금 일 봉이라도 준비할 시간을 주는 셈이니까. 앞서 김 여사와 박 여사가 떠날 때, 내 주머니에 마침 척푼도 없어서 고작 차 태워드리는 데 그쳤다가 며칠 후 잠깐 도로 왔던 박 여사가 다시 떠날 때 차비라도 쥐어 보낸 것도 봤으니까. 우리가 그 동안 다니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따뜻이 대하고 아내가 가끔 간식거리랑 전화카드랑 사주고 한 데 만족하며 새삼스레 전별금을 받네 못 받네 하기가 싫었던 마음을 훤히 알겠다. 내가 마침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푼돈이라도 내놓는 건 몰라도 떠나는 줄 미리 알고 뭐든 따로 준비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아내는 현명하고 나는 미련하다. 그런데 어떡하나? 내가 다른 사람들 볼 때도 나처럼 미련한 사람들이 더 정이 가고 좋은 걸. 이렇게 반성할 줄 모르니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2. 22  (0) 2009.12.17
09. 2. 16  (0) 2009.12.17
09. 2. 10  (0) 2009.12.16
09. 2. 8  (0) 2009.12.16
09. 2. 4  (1) 2009.12.16
Posted by 문천
 

관악산으로 옮긴 서울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80년도는 어수선한 때였다. 부산의 교수직 이야기 나온 것이 12-12 쿠데타 직후였다. 그 때 나는 서점 점포를 접고 주택가에 사무실을 열어 인문학 분야 서적 유통 사업을 한다고 하고 있었는데 별로 신통치 않았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신분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복학 쪽으로 더 끌리기도 했다. 아예 서울대 후문 부근에 전세방을 얻어 파묻혀 지내기로 했다.

군대 가기 전부터 과학사학회에 가입해 놓고 있었다. 당시 과학사학회에는 역사학 전공자가 별로 없고, 과학 전공하다가 자기 전공 분야의 역사를 살펴보게 된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외국 대학원 과정에서 과학사를 익히고 온 이가 전상운 교수와 송상용 교수 두 분 뿐이었다. 송 교수는 "과학사의 전도사"라 할 만큼 과학사의 불모지 한국에 과학사 도입을 위해 초인적 활동을 한 분인데, 당시 과학사가 한국 대학에서는 교양과학 강의에 일부 활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임 자리가 없었고, 송 교수는 나보다 10년이나 위인데도 그때까지 시간강사를 뛰고 있었다. 시간강사 경력이 한국 최고라고 자랑하곤 했다. 내 석사논문이 그 분 눈에 띄어 학회 가입을 권유받은 것이었다.

내가 군대 있는 동안 미국에서 과학사를 전공한 분 두 분이 돌아와서 과학사학회의 틀이 더 든든해졌다. 박성래 교수와 김영식 교수. 전 교수, 송 교수와 함께 네 분이 한국의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 성신여대 총장이던 전 교수가 얼굴로 한 몫 하고 송 교수가 몸으로 한 몫 해 온 터에 이제 박 교수는 글로 한 몫 하고, 김 교수는 그 배경 위에서 진짜 큰 일을 벌였다. 화학과 교수로 서울대학에 들어와 있으면서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의 대학원 과정을 만든 것이다. 많은 인재가 이 과정에서 배출되어 한국 과학사학계를 30년 동안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과학사학회에 참여하면서 나는 과학사 분야의 잠재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학부와 석사 논문에 천문학과 수학이 관계되는 역법을 주제로 고른 것은 수학 기초가 있으니까 편의상 고른 것일 뿐이었는데, 역사 전공자 중에는 수학 기초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방치되어 있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위에 분야사로서 과학사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서 "이거다!" 방향을 잡고, 군대 있는 동안 유학길을 모색한 것도 중국과학사 분야였다.

그래서 나는 과학사 방면에 뜻을 둔 상태에서 박사과정에 복학했는데, 민 교수는 이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고병익 교수는 과학사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총장으로 있으면서 김영식 교수의 협동과정 개설을 적극 도와준 분이었지만 이미 학교를 떠나 있었다.

 

함께 입학했던 최갑순, 이성규 두 선배는 내가 복학할 때 이미 과정을 수료했고, 조동원, 조병한(65학번, 서강대) 두 선배가 박사과정에 들어와 있었다. 두 분 다 역사학도로서는 특출하게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이었는데, 석사과정에서 민 교수에게 참혹하게들 당한 얘기는 오랫동안 동양사학과에서 괴담으로 떠돌았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경북대학으로 도망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조동원 선배는 박사과정을 아예 안 하겠다고 뻗치고 있다가 전임교수로 들어가기 위해 부득이 박사과정에 들어왔다.

80년의 두  학기를 지내는 동안 민 교수에 대한 내 감정은 공포에서 분노를 거쳐 경멸로 옮겨갔다. 돌아가신 분을 놓고 심한 말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너무 심했다. 나도 그분에게 피해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내 놓고 생각하면 새옹지마로 생각할 측면이 많다. 나보다 더 참혹하게 당한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굽히지 않는 자신감을 나는 보통사람들보다 많이 가진 편이기 때문이다. 민 교수에 대한 내 인식을 심화시킨 몇 가지 사례만 내놓겠다.

민 교수는 학점이라는 무기를 절제 없이 휘둘렀다. 대학의 학점제도에는 A, B, C, D, E, F, 여섯 개 표시가 있지만 E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고 D는 전혀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민 교수는 이것들까지 휘둘렀다. 특히 D는 너무했다. F를 받으면 한 학기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데 그치지만 D를 받으면 고칠 길이 없다. 열심히 강의에 임한 학생들을 민 교수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이 흉악한 무기들로 내리쳤다. 리포트 제출 기한을 어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가 지정한 형태의 원고지에 써 오지 않았다거나... 대학원 수료 자격에 평균 평점 B제로 이상이어야 한다는 항목은 대개 사문화되어 있었는데, 동양사학과에서는 이것이 많은 학생들에게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그것 때문에 수료를 포기한 학생도 여럿 있었다.

첫 학기부터 민 교수와 나 사이의 신경전은 시작되었다. 학기 도중 5월 사태로 학교 문이 닫혔고, 결국 학기말까지 열리지 않았다. 민 교수는 자기 과목의 리포트를 어느 날까지 가져오라 하고 리포트를 낸 학생들에게 모두 같은 학점을 줬다. 자기 딴에는 강의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한 상황에 대한 항의로 사부타쥬를 한 셈이다. 그런데 나는 리포트 내라는 얘기를 마감 지난 뒤에야 전해 들었고, 다음날 준비해 둔 리포트를 정리해서 가져갔다. 그런데 F가 나왔다. 그래서 찾아가 불가항력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B플러스로 고친 학점이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전원 A마이너스로 내줬던 클라스메이트들의 학점을 모두 B플러스로 바꾼 것이었다.

분노와 경멸을 동시에 느끼게 한 일이었다. 석사과정과 함께 운영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8년 후배까지 같은 반에 있었다. 나에게 학점을 주어야 하는 불쾌감을 보상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히다니... 군대에서도 제일 저질의 행태였다.

둘째 학기를 앞두고 나는 민 교수와 정면으로 맞설 결심을 했다. 한 학기에 세 과목 수강이 정상인데, 두 과목만 신청했다. 하나는 민 교수 과목이고, 하나는 국사학과에 개설된 전상운 교수의 한국과학사였다. 전 교수는 여러 해 동안 과학사학회 활동을 함께 하며 나를 역법 전문가로 인정해 주고 있는 터였다. 아무 부담이 없는 과목이었다. 민 교수 과목 하나에만 한 학기를 전력투구해서 결판을 볼 심산이었다.

학기가 끝난 후 B마이너스를 받고 민 교수를 연구실로 찾아갔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이번 학기 선생님 강의에 최선을 다해 임했습니다. 어떤 데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B제로였으면 아마 찾아가서 그런 질문을 꼭 해야 할지 망서렸을 것이다. 그러나 B마이너스는 실질적인 낙제점수다. 모든 과목을 그 수준으로 받으면 수료가 안 되는 점수다. 지적받을 점이 있다면 지적받고 고쳐야 하는 입장이다.

오래된 장면을 내 일방적인 기억대로 되살려 돌아가신 분께 누가 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꼭 필요한 요점만 적겠다. 그 학기 과목이 제도사였는데, 내가 연구주제로 천문관서를 택한 것이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는 이유였다고 그분은 대답했다. 그리고 쓸 데 없는 과학사 집어치우고 쓸모 있는 정치사 쪽으로 바꾸라고 권유도 해줬다. 그런데 과학사와 정치사의 가치 문제에 앞서 내가 또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선생님, 제가 연구주제를 잘못 택했다고 생각하셨으면, 왜 학기 초부터 단계적으로 발표해 오는 과정에서 일찍 지적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영원한 작별인사인 줄을 그분은 몰랐을 것이다. 대학원생 연구실에 돌아가자 후배들이 몰려들어 하회를 물었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민 선생님 강의는 수강하지 않기로 했어."

 

그리고 계명대학에 부임했다. 교수직 적응에 집중할 필요도 있어서 한 학기를 쉬고 그 다음 학기에는 고병익 교수 과목 하나만 신청했다. 그 때 고 교수는 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가 있고 충남대학에 있던 기돈 형님이 그 밑에 문헌정보부장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연구원에 컴퓨터가 들어와 있었는데, 당시의 인문학 연구자 중에 컴퓨터가 뭔지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동양학 분야에서 컴퓨터 이용 전망에 대한 자문을 두 분께 해드렸고, 그로부터 논문 두 편도 쓰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아무 부담 없이 지낸 한 학기였다.

그렇게 한 학기 더 걸치고 있었던 것은 마침 고 교수 강의가 개설되었기 때문이고, 서울대 박사과정은 내게 이미 끝난 것이었다. 민 교수는 학생들의 수강신청까지 검열하여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학과장 승인"을 학점에 이어 또 하나의 무기로 휘두르고 있었다. 80년 2학기에 내게 B마이너스로 경고를 주고자 한 것은 사실 한국과학사 수강신청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식적으로 수강신청 승인을 거부할 명분은 없으니까 자기 재량의 학점으로 뜻을 밝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82년 1학기부터 휴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후 다른 박사과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서울대학에서 이수한 여섯 과목 학점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수기간을 1년 이상 줄일 수 있는 조건이니까. 연세대학과 영남대학이 이 조건에 맞았다. 영남대학은 위치에서부터 편안한 조건이었지만 너무 편안한 조건만 찾을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연세대학을 택했다.

연세대학에 동양사 담당으로 황원구, 박영재 두 분 교수가 있었다. 황 교수는 민두기 교수와 잘 통하는 사이여서, 입학 때부터 학위논문 심사 때까지 껄끄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취향이 맞지 않는다는 정도의 의사표시에 그쳤지, 민 교수처럼 무도한 짓은 할 줄 모르는 신사였다. 박 교수에게는 실질적인 지도를 많이 받았지만 일본사 전공이어서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를 메워준 것이 퇴직해서 명예교수로 계시던 민영규 교수님이었다. 명예교수 신분으로 내 지도교수를 맡아주시고 살짝 살짝 힌트를 주는 것 외에는 연구방향에 간섭하지 않으셨다. 그분께 실질적인 지도를 더 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연세대학에서 얻은 가장 큰 행운은 김용섭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계기다. 내 학부 시절에 서울대에 계셨지만 특별한 관계가 없었는데 그 사이에 연세대학으로 옮겨 계셨다. 같은 연세대 사학과라도 동양사 전공자인 내가 한국사 담당인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기는 어려운 것인데, 85년 그분이 파리에 체류하실 때 마침 내가 케임브리지에 있으면서 각별한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분은 사제관계로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언젠가 그 이야기도 한 번 풀어놓고 싶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