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08:44

오늘 점심때는 잠깐 걱정이 들었다. 세 달 가까이 줄곧 기력이 좋아지시기만 했는데, 오늘은 눈에 띄게 약해 보이셨다. 내가 온 것을 알아보시면 무슨 말씀을 한 마디 하실 때도 있고 한 차례 웃음을 띠기만 하실 때도 있는데, 오늘은 웃음이 좀 희미해 보이셨다.

막 식사를 시작하시는 참이었다. 먹여드릴 채비를 하고 있던 강 여사에게 숟갈을 넘겨받았는데, 식사에 흥을 보이지 않으신다. 시치미떼고 점잔떠시는 것도 아니다. 의식이 흐릿하신 것 같다. 식사 뒤쪽으로 가서는 입에 죽을 무신 채 삼킬 것도 잊어버리기도 하신다. 식사 시작하시던 때 이후 처음으로 약간이지만 남기신 채로 식판을 치우지 않을 수 없었다.

웨하스 한 조각을 둘로 나눠 드렸는데, 본능적으로 입에 넣어 우물거리시는 것 같고, 그 맛에 신경이 집중되지도 않으시는 것 같다. 과일즙을 꺼내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입에 한 숟갈 들어가자 그제야 뚜렷한 감흥이 다소나마 일어나시는 듯하다. 침대 등을 중간 정도까지 내려놓고 반야심경을 읽으니 따라 웅얼거리셨지만, 금강경으로 옮기니 가만히 듣다가 이내 잠이 드신다.

어제 약간 변화의 조짐을 느낀 것이 있지 않았다면 걱정이 크게 들었을 수 있다. 그저께까지에 비해 말씀이 적고, 목소리도 크게 내시지 않았고, 장난기도 덜하셨다. 장난기가 아주 없으신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내가 들어갈 때 곁에 있던 주 여사가 "누가 오셨나요?" 하자 "나 아는 사람이야." 하는 말씀은 평소와 같았지만, 더 능청스럽다고 할까, 말씨에 장난기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아는 사람 누구예요? 며느리예요?" 거듭 다그치자 "이 사람? 우리 며느리 남편이야." 하셨다. 유머 감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대답이셨다. 며느리 잘 못 알아보시는 것을 여사님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대답에서 며느리를 앞세워 주시니 여사님들이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 없을 때 과외공부를 시켜드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는 내내 반응이 명민하면서도 차분하셨다. 식사를 마치신 후 무심한 눈길을 앞쪽으로 향하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관조하고 계시는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말씀을 걸면 얼굴을 살짝 돌려 내 얼굴을 보며 들으신 다음 말씀이든 표정이든 가벼운 반응을 보이고는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셨다. 내가 "어머니, 어제 제 생일이었어요." 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랬니? 몰랐구나." 하시고, "어머니, 생일이 되니까 어머니께서 저 낳아주신 일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니까 가볍게 "뭐 별걸..." 내가 짐짓 정중하게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며 고개를 깊이 숙이자 말씀은 없이 큰 웃음으로 입가가 양쪽 귀에 걸리셨다.

기력과 정신을 되찾으신 이래 새로운 느낌 때문에 감수성과 표현이 확장되어 있다가 다시 익숙해지시면서 안정된 양상으로 접어드시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반갑게 생각했다. 오늘 기운이 떨어져 보이시는 것도 그 연장선 위에서 생각하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너무 맥없어 보이신 것은 마음에 걸려 나오기 전에 주 여사랑 잠깐 얘기를 나눴다. 어제부터 좀 조용해지신 변화에는 주 여사도 동의하면서, 자기가 보기에 걱정스러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단, 생각에 깊이 잠기실 때가 많고, 그럴 때 여쭤보면 옛날 일들을 생각한다고 하시며 자식들 이름을 다 대기까지 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여러 개 단층선으로 쪼개져 그 사이를 넘나들 때 착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시는 것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주 여사의 말을 들으면 그 단층선들이 상당히 해소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점심때 피곤한 기색을 금세 보이신 것은 졸리우실 때라서 그랬을 것이란 주 여사 말이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저녁 후에 잠깐 들러서 용태를 한 번 더 살펴봐야겠다. 내일 낮에 친구분들(이정희, 김호순, 강인숙 선생님) 찾아오실 때 오늘 점심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시면 너무 아깝겠다.

 

저녁 전에 잠깐 뵈러 갔다가 예상 외로 오래 붙잡혀 있었다. 진짜로 '붙잡혀' 있었다. 오후에 푹 쉬고 기운이 나 계신데, 호통 모드를 넘어 깡패 모드시다. 내게야 한 마디를 하셔도 호통이 정상이지만, 간병인 여사님들에게까지 호통쪼시다. 그래도 여사님들은 좋아만 하는 것이, 점심때 모습으로는 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막 쌍욕도 하고 꼬집기까지 하셨어요." 하면서도 싱글벙글, 그렇게 깡패짓 하게 만들어 드린 게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다.

기력도 좋고 정신도 또렷하신데, 착란 현상은 평소보다 심하시다. "전문가들한테 뒤치닥거리를 해줘야지..." 비슷한 말씀을 거듭거듭 하신다. "누가 전문가예요, 어머니?" 하니 "전문적인 공부 한 사람들 있잖아." 하셔서 "그러면 역사학자나 국어학자도 전문가인가요?" 하니까 "그렇지. 일이 그 사람들한테 다 몰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힘들지." 정신이 맑으실 때 생각이 꽤 멀리까지 흘러가셨던 것이 착란을 거치면서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금강경을 읽어드릴까 여쭈니 오만상을 찡그리고 실감나는 목소리로 "지-겨-워!" 하신다. 그러면 반야심경을 읽을까요, 했더니 더 찌푸리시고 "그건 더 지겨워!" 그래서 "어머니, 그럼 노래 부를까요?" 했더니 거부 반응 준비로 얼굴을 찌푸리다가 잠깐 눈알을 굴리시더니 "그래, 불러라." 하신다. 여사님들과 가끔 부르신다는 "아리랑"과 "푸른하늘 은하수"를 부르니 처음에 따라 부르실 것처럼 입술을 달싹달싹하시다가, 금세 포기하고 감상에 집중하신다. "잘했다." "그만하면 합격을 줄 만하다." "다시 불러봐라." 하시는 데 따라 너댓 번씩 부른 끝에 "열심히 하니까 나아지는구나. 다른 건 없냐?" 그래서 이것 저것 목소리 낮춰 부를 만한 걸 부르다가 "행복의 나라"가 아다리가 되었다. 한 번 부를 때마다 뭐라고 논평을 하시곤 "그거 또 한번"을 붙이시는 바람에 열 번쯤 불렀다. 노래를 모르고 사는 내가 1년치 노래를 앉은 자리에서 부른 것 같다. 정말 지겹다.

여덟 시도 훌쩍 넘어 일어서려 하니 막무가내로 붙잡으신다. "일하러 가야 돼요. 먹고 살아야 돼잖아요?" 하면 "해봤자 별 수 있냐?" "어머니, 저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요. 집에 가서 먹어야 해요." 하면 "여기서도 밥 주던데?" 결국 장 여사가 쫓아와 설득에 나서 준 바람에 겨우 빠져나오려니, 흐뭇한 미소를 띠고 손을 살래살래 흔드신다. "어때, 혼났지?" 하는 표정으로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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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