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에 들어갈 때 내 꿈은 과학자에서 노벨상으로 좁혀져 있었다. 노벨상이 동네 강아지 이름이 아니라는 건 열아홉 살이나 된 놈이 물론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꿈을 꼭 쥐고 있었던 건 벼락부자 누깔에 뵈는 게 없는 격이었다. 꾸준히 우등생 노릇을 해 왔다면 주제 파악이 좀 쉬웠을 텐데... 고3이 되면서 '천하 경기'의 전교 1등을 난 데 없이 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서울대 전교 수석은 아니라도 이공계 수석까지 이어지면서, 나는 내가 천재라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 확신은 동기생 대다수가 공유한 것이라서 더욱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애 있는 줄도 몰랐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깃발 날리며 나서니까 다들 놀라자빠졌다. 고3 내내 나는 '평민 영웅'이었다. 매달 치는 모의고사에서 내 석차가 올라가면 다들 괜히 좋아하고 내려가면 괜히들 아쉬워했다. 한 번은 짖궂은 친구들이 대표를 뽑아 내게 실험을 걸었다. 김종민이라고 문화부 장관 한 녀석, 무지하게 잘 노는 재밌는 친구가 나서서 모의고사 전날 늦게까지 맨투맨으로 나랑 놀아줬다. 당일치기 못하게 해서 결과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당당히 1등을 해 보이자 '평민 영웅' 신앙은 더욱 굳어졌다.

천재의 환상은 내 인생에 큰 흔적을 남겼다. 커 오는 동안 내내 가지고 있던 총체적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좋은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음미하게 된 측면이고, 나는 오랫동안 이 환상의 부정적 영향을 가지고 고심했다. 일상적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행동의 선택에까지 '상식적' 판단에 저항감 내지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어머니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 환상을 그분이 부채질하셨던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길을 가야 한다"는 일종의 엘리티즘이 자식들을 닥달하는 그분의 지론이었다. 나이 50이 넘도록 어버이 탓을 하고 살다니... 난 참 못난 놈이다. 그래도 근년 들어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지워진 것은 내가 드디어 '천재 컴플렉스'에서 벗어난 조짐일까?

2학년 올라갈 때 사학과로 전과한 것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결정한 큰 고비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재 컴플렉스를 그 고비에서 바로 벗어난 것은 아니라도 차츰차츰 벗어날 길을 찾아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대중'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도 보통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만큼 편안히 여기고 즐기게 된 데는 역사학을 인간관계의 탐구로 여기며 오랫동안 공부해 온 덕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전과를 격려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대감을 가졌을 만한 분(예컨대 당시 충남대 사학과 교수로 있던 고종사촌 기돈 형님)들도 전도양양한 물리학도의 장래를 포기하는 일에 당당히 찬성하고 나설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물리학과 교수들도 "이런 인재가 아니면 누가 노벨상을 바라보겠습니까?" 하며 어머니를 부추겼다. 나 혼자의 고집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나 자신 석연치 않다.

 

역사학이 좋아서 전과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물리학을 떠나고 싶었다. 물리학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대학 들어와 수학과 물리학의 본 모습을 대하고 보니 내가 그때까지 생각해 온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내 적성으로 볼 때, 겸손한 마음으로 임했다면 재미를 붙일 만한 분야였다. 그러나 노벨상을 목표로 매진해 갈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학기 지나고 나자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떠나고자 한 것은 노벨상의 꿈이었다. 물리학은 'collateral damage' 였던 셈이다.

손쉽게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전과였고, 당시의 서울 문리대는 문과와 이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었다. 물리학과 떠날 마음을 먹고 둘러보니, 이과는 모처럼 맘 먹고 도망치기에 너무 가까운 곳이라서 문과 쪽을 건너다보게 되었다. 첫 선택은 사회학이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대로 셈본 실력을 활용할 여지가 커 보여서였다. 그런데 그 해에는 사회학과에 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사학과였다.

역사학이 뭐하는 건지, 나는 일반 고졸자의 인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 이력 중에 "서울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란 항목이 있어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도통 모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옛날 책에 얼마간 익숙했다는 사실 외에는 사학과를 특별히 고를 이유가 없었다. 정말 어쩌다 가게 된 것이 사학과였다.

이렇게 천둥벌거숭이로 사학과에 뛰어든 나를 당시 사학과 선생님들이 바라보며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갔을지, 이제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사학과는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 서울대 전교 수석급 인재가 온다는 데 기대감을 품는다는 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성칠 교수'의 아들이 사학과에 나타난 것을 보면서 어떤 감회를 느끼는지는 당시의 나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사학과의 원로 교수는 한우근, 고병익, 민석홍 제 교수로 서울대 사학과 1~2회 졸업생들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해방이 되자 서울대로 편입했다가 졸업한 분들인데, 1회가 47년 졸업이었다. 45년까지 경성제대였고, 46년 한 해가 '경성대학'이란 이름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해에 졸업했다. 69년에 내가 사학과에 가서 마주친 원로 교수들이 졸업반일 때 아버지는 강사와 조수(조교) 신분으로 그분들과 접했고, 그분들이 졸업할 때 조교수로 취임한 것이었다.

93년 <역사 앞에서> 출간을 계기로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거니와, 사실 나 자신도 87년 그 일기를 처음 보면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 이력이 그저 자리 하나 채운 것이 아니라 서울대 사학과, 나아가 한국 역사학의 진로를 상당 부분 좌우할 잠재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비명에 가신 그분의 아들이 입학시험도 거치지 않고 어느 날 불쑥 사학과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던 교수분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님이 99년 돌아가시기 전 명륜동 댁에 종종 찾아뵈면서 당시의 소감을 더러 듣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 존재의 의미를 거의 모르는 채로 사학과에 다녔다. 한문과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쫓기는 느낌 없이 여유롭게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생각하면 역사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노벨상 생각하며 물리학과 들어가던 때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85년 이후 유럽의 학풍에 접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키우고 있던 위에 87년 이후 아버지 일기에서 얻은 자극이 겹쳐져 나 나름의 학문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69년의 전과 당시에 나는 향후 겪게 될 변화의 방향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이 많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과 자세에 접근해 온 사실을 놓고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해 온 요인들 중에도 뭔가 필연적인 측면도 더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느 시점까지는 나 스스로 전과를 한 게 잘한 짓이었는지 어쨌는지 회의가 수시로 들곤 했었는데, 근년에는 그런 회의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 올 데까지 온 모양이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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