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2:58
 

어머니와 간병인들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너무 가까워 보인다. 내가 말씀을 걸면 무슨 바람이 지나가나? 하는 식으로 천천히 눈길이 옮겨오시는데, 어느 여사님이든 말씀을 걸면 즉각 눈길이 꽂히신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시다. 내가 드리는 말씀은 알아들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기색이신데.

어찌 생각하면 그럴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분들과는 하루 24시간 함께 지내시는 것이 벌써 네 달을 채워가고 있다. 모든 수발을 그분들이 다 해드린다. 나야 명색이 아들이지, 기저귀 한 번 갈아드리는 일이 있는가? 그분들에게 정도 들고 의지도 되시는 것이 이상한 일일 수가 없다.

간병인 복은 참 좋으시다. 작년 7월 파주 탄현면의 자유로요양병원에 들어가실 때부터 능력이나 품성이나 믿음이 가는 여사님을 만났다. 심양 출신의 장 여사, 그 작은 체수에 선한 눈매가 지금도 생각난다. 며칠 안 있어 새로 만든 병실로 옮기면서 장 여사 손길에서 떨어지셨지만, 장 여사는 틈틈이 들여다보며 어머니를 아껴드렸다.

그 뒤로 몇 번 간병인이 바뀌었고, 바뀔 때마다 "이렇게 믿음직한 분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에 휩싸였지만, 이상하게도 바뀔 때마다 더 믿음직한 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병원에서 맨 끝에 돌봐드린 조 여사는 화룡에서 온 분으로 나랑 동갑인데, 그분에게는 정말 깊은 경의까지 느꼈다. 사람이 똑똑한 데다 정도 깊고, 게다가 행실까지 아주 반듯한 분이다. 내가 없을 때 찾아온 분이 용돈 얼마라도 드리고 가면 내게 꼭 금액까지 밝혀서 알려주곤 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쯤 문안 전화를 드리면 무척 반가워한다. 그렇게 반가워할 거면서도 이쪽으로 전화는 안한다. 객지에 나와 약한 입장인 사람이 연락을 취하면 뭔가 바라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것을 꺼리는 그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정말 조 여사 손길에서 어머니를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용태가 안 좋으시니 그 병원에 계속 계셔도 중환자실로 옮기셔야 할 형편이 되어 병원을 바꿀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 그 병원을 고른 첫째 이유가 한탄강 바라보는 한적한 위치라서 도시생활을 싫어하시는 어머니 입맛에 맞는다는 점이었는데, 거동도 못하시게 되니 그 이유가 사라졌다. 시설을 비롯해 기능적 조건이 나은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 모실 생각을 하고 일산 시내 병원들을 둘러본 결과 탄현역 앞의 현대재활요양병원을 골랐다.

자유로병원에서 13개월 계시는 동안 그만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셨다. 정말 거기서는 대접도 VIP 대접을 받으셨다. 그곳 직원들은 어머니 경력에 외경심을 품기도 했고, 외진 곳의 병원에 우리가 워낙 부지런히 다니니 안면이 받혀서도 각별히 대해드리게 되었다. 게다가 간병인들까지 모두 남 같지 않게들 살펴드린 것은 아내 덕분이다. 수십 명 간병인 중에 한 사람 빼고는 모두 조선족이었는데, 같은 조선족인 내 아내의 시어머님이 어찌 남 같겠는가. 나랑도 많이들 친하게 되어 휴가 나갈 때면 내가 대화역까지 태워드리면서 "선생님은 우리 간병인들 전속 쓰지(기사)예요." 하는 말을 듣곤 했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미묘한 얘기는 중국어로 바꿔서들 얘기할 때가 있다. 한 번은 그러다가 옆 자리의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 저 양반은 다 알아들을 텐데, 부끄러워서 어떡해?" 하는 것 같다.(중국에서 몇 해 지냈어도, 그런 말 귓전으로 알아들을 만큼 익히지는 못했다.) 눈치로 때려잡고 "워 팅부동, 니 팡신바.(못 알아들어요. 마음 놓으세요.)" 했더니 모두 정신없이 웃는다.

직원 중에도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살림꾼 노 실장은 다음 주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갖다주러 가봐야겠다. 1년 넘게 그곳에 계실 수 있었던 데는 그 분의 도움이 컸다. 그 분 아버님도 그곳에 입원해 계셔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버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해 마음이 미안하다. 병원을 옮길 때, 우리가 떠나는 것이 서운하면서도 지금 상태에서는 옮기시는 편이 좋다고 격려해 주고, 옮길 병원의 살림꾼 안 실장에게도 각별한 배려를 부탁해줬다.

자유로병원까지 집에서 차로 30분 걸렸다. 5분도 안 걸리는 지금 병원을 다니면서 생각하면 그 먼 데를 어떻게 매일 다녔을까 싶다. 그러나 그 때는 멀다는 생각 하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정말로 즐거웠다. 나 자신에게 못된 구석이 보통사람들보다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보호를 필요로 하시는 어머니 보호해 드리는 자세에는 못된 점 다 치워놓고 괜찮은 면만 나타난다. 원장님에서 간병인, 그리고 낯이 익은 환자분들까지 내 얼굴만 보면 괜히 좋아들 하는 분위기로 여러 달 지내다 보니 진짜로 내 품성까지 많이 순화된 것 같다. 고맙습니다, 어머님.

지금 병원의 여사님들 얘기를 하다가 전 병원 얘기로 넘어간 것이 너무 길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접어놓고 우리 김 여사, 박 여사, 주 여사 이야기는 다음날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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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7. 12:56
 

회복을 크게 바랄 계제는 아니라도 용태가 좋아지니 지내기도 편해 보이고 생각도 임의로우신 것 같아서 마음에 좋다. 팔도 거의 굳어지시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제 꽤 잘 움직이신다. 너무 잘 움직이셔서 코에 꽂은 피딩 튜브를 두 번이나 잡아 빼시는 바람에, 일 저지른 오른 팔 손목이 얼굴까지 가지 못하고 아래쪽에서만 놀도록 묶어놓고, 누가 살펴드릴 수 있을 때만 풀어 드리는 것이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다.

워낙 자유를 좋아하고 억압을 싫어하는 분이시라 이렇게 행동이 제약된 상태를 견뎌내시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로웠다. 그런데 몇 달째 몸도 못 일으키고 누워만 계시는 데 답답증을 보이지 않으시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거동 못하게 되신 지는 반 년 가량 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iv 주사를 꽂아놓으면 성가셔 하셔서 무의식중에라도 잡아 뽑으시기 때문에 발이나 다리에만 놓도록 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오랫만에 정신이 많이 드시면서는 갑갑한 기색을 거의 안 보이신다. 지금 상황을 하나의 단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오늘은 미국의 큰형에게서 온 전화를 꽤 자상하게 받으시더라고 김 여사가 신이 나서 설명해 준다. 세 분 간병인 가운데 성격이 씩씩하면서도 침착한 김 여사가 팀장 격이다. 형이 김 여사 핸드폰으로 전화를 치면 어머니께 쫓아가 바꿔 드린다. 전에는 쥐고 귀에 대어 드려야 했지만, 요새는 어머니가 손에 쥐고 받으시는데도 곁에 붙어 서서 대답 잘 하시라고 응원도 해 드리고, 내가 나중에 가면 녹화 중계도 해준다. 김 여사 형편이 안 될 때는 박 여사 번호를 치도록 알려놓았다. 체수가 작은 박 여사는 성품이 자상하고 장난기가 좀 있어 보인다. 막내인 작은 김 여사는 무슨 일이 있다던가 1주일째 보이지 않는데, 대신하고 있는 거구의 여사님도 벌써 어머니를 많이 아껴드리는 기색이다. 나이는 모두 50 전후 같은데, 중국 동포들은 요즘 한국인에 비해 나이 들어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조금 적을 수도 있겠다.

김 여사가 형의 전화 얘기 끝에 "작은 아드님한테도 얘기 좀 하세요." 하니까 "내가 얘기를..." 하고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여러 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뒤론 내가 있는 동안 다시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많이 웃으셨다. 반응이 꽤 활달하신 것을 보고 내가 이런저런 예전 일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니 대목대목에서 웃음을 지으시는 것이 거의 다 알아듣는 기색이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 걱정해 주시는 몇 분께 전화를 드렸다.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시는데 찾아와 봐야 마음만 아플 것을, 부담감을 드리기만 할 것 같아 용태를 알리는 전화도 하기가 힘들었었다. 지금 상태 같으시면 찾아오는 분들도 편하게 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작은형에게 전화했다. 네 달 전 병원 옮겨드릴 때 전화로 의논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끝내 잡히지 않았고, 녹음을 몇 번씩 해놓아도 여태 연락 한 번 없었다. 그 후로는 나도 다시 전화하려 애쓰지 않고 지냈다. 마음이 삐지기도 하고, 본인이 무슨 사정이 있다면 괜히 덧드릴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해서였다. 그런데 저만큼 정신 돌리신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보니, 진짜 이 사람 웬 일인가 걱정도 들어 오랫만에 전화를 돌리게 되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고 또 꽝인가 생각하는데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도 멀쩡하다. 근황을 알리니 며칠 후에 와 뵙겠다고 한다. 목요일 어떻겠냐 하기에 그 날은 내가 다른 데 일이 있어서 그 날 오면 어머니가 "닭 대신 꿩" 왔다고 좋아하시겠다고 했더니 "닭 대신 꿩?" 하고 한 차례 천진스럽게 웃고는 꿩이랑 닭이랑 함께 보시도록 금요일에 오겠다고 한다.

형제간에 흉보는 얘기를 이런 자리에서 하는 것이 온당치 않겠지만, 나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기탄 없이 할 생각이다. 다만 오늘은 시간도 늦고 글도 길어졌으니, 닭인지 꿩인지 흉보는 얘기는 금요일 얼굴 본 뒤에 하겠다. 근데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나 같은 착실한 효자보다 날건달 같은 둘째 아들을 그렇게 고와 하시는 까닭을 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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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7. 12:53
 

어제 낮에 대덕화 보살님이 다녀간 이야기를 간병인 여사님들께 들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어도 몇 마디 들으니 그분이 틀림없다.

어머니와 인연이 참 공교로운 보살님이다. 작년 6월 하순 설현 거사가 기사 노릇을 해 주어 암자로 찾아뵐 때 같이 계신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태안사 떠나신 뒤에 그 절에 다니다가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뵙고 싶어 찾아왔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늦게 절 살림에 드셨지만, <불광>에 싣던 수필을 좋아하는 이도 많고 청화 큰스님과 서로 받들고 아끼시던 인연을 흠모하는 이들도 많아서 외진 데 계셔도 찾아오는 분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본 두 분 보살님, 대덕화 님과 그 올케 되는 성진행 보살님은 잠깐 봐도 어머니 대하는 태도가 은근하고도 편안해서 각별히 고맙게 느껴졌다.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 오후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공주 어느 병원에 모셔놓았는데 큰 병원으로 곧 옮겨 모셔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몇 차례 통화로 상황을 파악해 보니 당장 위급하신 것은 아니지만 병원 신세는 크게 져야 할 형편인지라, 일산 백병원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절 살림을 오래 계속하시기 힘들겠다 생각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차였다. 암자에서 큰절까지 포행도 힘들 만큼 기력이 떨어지신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보다도 기억력 감퇴가 큰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 날 일산으로 모셔오도록 결정을 내린 데는 절 생활 끝내실 계기일 것 같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백병원에서 며칠간 검사를 받으신 후 보아두었던 파주의 요양병원에 모셔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순조롭게 접어들었으니, 그 날 쓰러지신 일에는 다행스러운 면도 있었던 셈이다.

백병원에 모신 이튿날 대덕화 보살님이 찾아왔다. 쓰러지실 당시 상황도 설명해 주었다. 두 분 보살님이 공주 시내로 모시고 나와 점심 대접을 한 후 걸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벌러덩 쓰러져서 머리에서 피가 날 만큼 바닥에 짓찧으셨다는 것이다. 퇴행성 치매가 이미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니 언제 어디서라도 깜빡 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곁에 있던 분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검사 결과를 설명해 드려도 좀체 편안치 못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다가, 몇 달 지나 요양병원에서 새로운 생활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17개월 동안 성진행 보살님도 몇 번 와 뵈었지만, 대덕화 님은 한 달에 한두 번씩 꾸준히 뵈러 왔다. 쓰러지실 당시 모시고 있던 책임감이라면 남매간이 같을 텐데, 대덕화 님은 특별히 애틋한 정을 키우게 된 것 같다. 딸 하나 있는 것이 딸 노릇 못하는데, 대덕화 님이 정말 딸 노릇 해드리는 셈이다. 튜브 피딩을 시작한 반 년 전까지, 어머니의 마지막 음식 호강은 그 분 덕분이었다. 공이 드는 음식을 어쩌면 그렇게 알뜰하게 마련해 오는지, 번번이 놀랄 뿐이었다.

한 번 병원에서 만났을 때, 대덕화 님이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 병 수발하던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노인 모시는 이력이 있나보다며, 또 한 분 어머님 모시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정말 예쁜 마음이다. 모습도 50대는커녕 40대로도 보이지 않는 미인이지만, 그 밑에 깔린 마음은 사춘기도 겪어보지 않은 아이처럼 밝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 분과의 인연은 어머니 말년의 큰 복이시다.

대개는 내가 없을 때 다녀가기 때문에 다녀간 이야기만 곁의 여사님들께 듣는데, 몇 주일 전 한 번은 어머니를 뵙고 싶어 하는 스님이 나도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해 와서 시간을 정해 만났다. 기력이 영 안 좋으실 때였는데, 그래도 알아보시는 기색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어제 왔을 때는 정신이 훨씬 더 맑으신 것을 보았을 테니,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하며 나도 마음이 흐뭇하다. 고맙습니다, 대덕화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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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