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9. 13:35
 

이럴 수가! 병실에 들어서며 건너다 보이는 어머니 얼굴이 뜻밖에 훤해 보이신다. 어쩐 영문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문간에서 마주친 간호사가 반갑게 붙잡고 말해 준다. "어머님께서 오늘부터 튜브피딩을 중단하고 미음을 드시기 시작했어요." 그렇다. 코에 꽂아놓았던 튜브가 사라진 것이다.

간병인들도 너도 나도 밝은 얼굴로 축하를 해 주는데, 경위를 파악한즉 사고를 치신 것이다. 튜브를 잡아 빼지 못하시도록 손이 얼굴까지 닿지 못할 정도로 침대 난간으로부터 묶어놓는데, 여사님들이 마음아파서 너무 느슨하게 묶었던지, 밤중에 튜브를 뽑아 버리신 것이다. 아침에 튜브를 도로 꽂아드리기 전에 원장님이 살펴보고는 미음을 드려보라고 지시했고, 드려 보니 괜찮게 잡수셔서 이제부터 입으로 식사를 하실 전망이 굳어진 것이다.

모시고 앉았더니 오늘은 불경집에 관심을 모으신다. 읽어드리지 않고 앞에 펼쳐 보여드리고 있으려니 한참 들여다 보시고는 책장을 넘기시려는 듯 손가락에 침을 바르고 손을 뻗치신다. 그럴 때마다 넘겨 드리고 이따금씩 읽어드리기도 하면서 한 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여다보신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사님들이 오늘은 많이 들여다보지 않고 저쪽 끝 내실에서 짐을 꾸리는 듯 어수선하고 파견회사인 천사케어 상무 아주머니도 오락가락한다. 하도 이상해서 가 보니 김 여사, 박 여사가 평상복을 입고 있다. 김 여사에게 "다른 병실로 가시는 데 옷까지 갈아 입으세요?" 했더니, "그럴까 했는데, 아주 다른 병원으로 가기로 했어요." 한다. 충격을 감추며 박 여사에게 "박 여사님은 배웅 나가세요?" 했더니 "저도 갑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 곁에 돌아와 앉아 있다가 생각하니 시간이 여섯 시가 넘었는데, 교통에도 익숙지 않은 분들이 차편이라도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가 물어보니 약 한 시간 뒤의 경의선 기차로 서울역까지 일단 갈 참이라고 한다. 조금 있다가 내가 나갈 때 대화역까지 모셔드리면 어떻겠나 물어보니 반색을 한다.

출발하면서 보니 김 여사는 짐이 혼자 주체하기 벅찰 정도로 많고, 또 가는 곳이 부평이라서 대중교통으로는 너무 멀다. 서울 시내로 가는 박 여사를 대화역에서 내려주고 부평 삼산동의 아파트 현관까지 모셔 조카딸에게 인계하고 돌아왔다. 김 여사에게는 특히 고마운 생각이 큰데,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어 다행이다. 내가 돈을 안 가지고 나간 탓에 통행료를 내게 한 것(그리고 돌아오는 통행료를 뜯어온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새해 코앞에 어머니가 식생활을 되찾으신 것이 기쁘고, 여기 이르도록 두 분이 살펴드린 것이 고마우면서도 두 분이 떠나니 마음이 허전하다. 식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무엇을 얼마만큼 잡수시는 것이 좋을지 그분들이 살펴드릴 수 있으면 참 믿음직할 텐데. 주 여사라도 남았으니 다행인데, 그분도 근래 부군 건강이 매우 안 좋아 귀국 생각을 하고 있다니 걱정스럽다. 내일부터는 병원 근무시간을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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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9. 13:32
 

새로운 재간을 개발하셨다.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울상으로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실 때 줄줄 흐르다시피 하는 것에 비해, 흐뭇한 웃음 속에 지긋이 감은 눈가에 비치는 눈물은 하품 끝에 번져나오는 눈물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미심쩍었다. 그런데 어제저녁에는 하품의 눈물과는 다른 웃음의 눈물이란 확인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찡그리고 우시는 본격적 울음은 며칠 전부터 아주 드물게 되었다.

그저께 갔을 때는 잠깐만 뵙고 나왔다. 요새 감기 걸린 환자가 여러 분이라, 보호자 방문을 최소화하도록 권하고 있다는 간호사의 안내를 듣고, 협조하는 자세를 한 차례 과시하기 위해 재촉도 받기 전에 금방 돌아섰다. 상태가 괜찮으신 것을 확인하고는, 한 시간이라도 자식이 곁에 있어 드리는 일 없이 지나가면 반응이 어떠실까 한 번 살피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대신 어제는 마스크를 가져가 쓰고 보통때처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간병사 여사님들이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말씀이 수다(?) 수준을 향해 늘어나고 계시다는 것이다. 사진첩을 보여드리며 "이 분이 누구예요?" 하면 "다 알면서 그건 왜 물어?", "왜 그렇게 다 알려고 하는 거야?" 하는 반응이 수시로 튀어나오신다고 한다. 불경 읽어드리는 데 열심인 주 여사는 소리내어 읽으신 분량이 기록을 깨뜨리셨다고 흥분한다.

한 달 전 합류한 신참인 주 여사의 역할이 늘어나고 있다. 김 여사와 박 여사는 54세 동갑인데, 아마 40대 후반, 연길시 공원가 가두판사처에서 퇴직했다는 주 여사는 공무원 출신답게 처신이 능란한(그곳 말로는 '해박하다'고 한다.) 인상일 뿐 아니라 봉사정신도 투철한 것 같다. '언니'들이 가르쳐주고 시키는 것을 넘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열심이고, 언니들도 그런 주 여사를 미덥고 곱게 보는 눈치다.

한 열흘 전부터 주 여사의 교시에 따라 어머니 등 밑으로 손을 넣어 어깨와 등 주물러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열세 분 환자 중에 그렇게 해드릴 필요가 있는 분이 어머니 포함해 네 분이라고 주 여사가 말한다. 주 여사의 합류로 인해 새로 본격화된 서비스다. 김 여사와 박 여사도 그런 일을 더러 하기는 했지만,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일 자기가 최소한 두 차례는 꼭 해드리고 있는데, 보호자가 더 해드리면 더 좋을 거라는 주 여사의 말을 듣고 시작했는데, 이것이 참 효과 만점의 접촉방법이다. 내 얼굴을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시는 것 같은 어머니의 긴장감이 쉽게 풀어지고 편안한 웃음이 깔린다. 눈을 지긋이 감으실 때가 많고, 그런 상황에서 '웃음 속의 눈물'도 확인했다. 내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실 때도 있는데, 그럴 때의 눈길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아니다. 나한테 씌워져 있는 아버지 귀신을 바라보시는 것 같다.

두 분의 사이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일기와 어머니의 회고가 모두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어떤 인간관계에도 없을 수 없는 굴곡의 기미가 여기저기 나타나기도 한다. 요즘 내 얼굴을 (아마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이유 없는 불편함을 느낄 때, 표현과 실제 사이의 거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북바친다.

어렸을 때 학교에 제출할 호적초본(등본이었을지도?)을 보면 어머니 이름이 모르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이런 이름도 쓰신 건가? 했다가(같은 이씨였으니까) 차츰 사정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으며,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입적을 못하고 계셨다는 사정을.

우리가 자라나는 동안 고종사촌 형님 몇 분이 마치 숙부들처럼 우리를 살펴주셨다. 아버지가 네 분 고모님 밑의 외아들이었으며, 몇 살 차이 안 나는 생질들을 자상하게 돌봐주셨기 때문에 그분 돌아가신 후 그 형님들이 비상한 사명감을 가지고 외숙모를 받들며 외사촌들을 아껴준 것이었다. 어머니의 호적상 위치에 대해 우리가 의문을 가지게 되자 그 형님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진짜 아내였다는 사실을 극구 증언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있는 아내를 버리고 새 아내를 취한 일을(당시에는 아버지의 본처가 살아계셨다.) 변명하기 위해 본처 그분께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어른이 된 후 이복형제들과도 만나고 아버지 본처의 친정 친척들과도 다소의 접촉을 가지게 되면서 고종 형님들의 설명이 사실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혼이라는 사정이 두 분께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압박감을 드린 사실은 여러 각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실체적 모습을 어느 정도 확실히 파악한 지금 내가 보기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택한 것은 본처보다 더 예쁘고 똑똑한 사람을 얻어 당신들끼리 오글복짝 행복하게 살려는 뜻이 아니었다. 사회를 위해 더 큰 공헌을 하기 위한 길로서 택한 정략(?)결혼이었고, 어머니에게도 평범한 지어미로서의 행복보다 어머니의 재주와 능력을 건실한 방향으로 펼쳐나갈 길을 열어준다는 명분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명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런 취지의 말씀을 어머니께 여러 번 들었다.)

어머니도 그런 취지를 이성적으로는 승인하셨겠지만, 그에 대한 인식이 아버지처럼 투철하실 수는 없었을 것 같다. 행복보다 도덕을 앞세워야 할 절박한 사정은 아버지 때문이지, 어머니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명분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명분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이런저런 고비에 어머니께는 드셨을 것 같다. 예컨대 1946년 아버지가 당시 한국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던 금융조합을 때려치우고 학문을 위해 서울대 조교로 들어가실 때는(이듬해에 조교수로 취임하셨는데, 금융조합의 정치적 분위기가 악화되는 바람에 갑자기 떠날 생각을 하시고, 연구실에 앉아 계실 수 있는 조건만을 위해 학교로 급히 옮기셨던 것이다.) 좋은 낯으로 참아주실 수 있었을지 몰라도, 1951년 생존의 조건이 막막한 피난살이 중에 전사편찬위원회 일 그만두실 때는 기가 좀 막히셨을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의 기억에 착잡한 면이 어머니께는 있으실 것이다. 7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버지의 도덕적 엄격성이 그런 면으로 보통 넘는 어머니께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켜드렸을 것이다. 초년에 겪을 만큼 겪어내면 살아가면서 차츰 풀려갈 것을 은근히 바라고 계셨을 텐데, 그나마 초년 고생만 잔뜩 시켜놓고 훌쩍 떠나버리셨으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표정을 가장하려 드시는 것처럼까지 보이는 어머니의 착잡한 눈길이 어깨를 주물러드리는 동안 스르르 감기고 두어 방울 눈물이 번져 나오는 것을 보며 콧시울이 시큰하다. 그 눈길 속에 아버지 모습을 겹쳐 떠올리는 것이 내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라도 두 분의 기억이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길이라면 망상 속을 한없이 헤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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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7. 13:09
 


다섯시 반쯤 병실에 들어서니 눈을 꼭 감고 계신다. 주무시면서 저절로 감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꼭 감고 계신 것 같다. 소리 내지 않고 곁에 서 있자니, 2-3분간 가만히 계시다가 김 여사가 다가와 내게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신다. 역시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시는 기색이 아니고 눈을 뜨시자 마자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신다.

김 여사의 자랑스러운 보고가 꽤 길었다. 형의 전화를 받으시자 마자 "어~ 기봉이냐?"로 시작하셔서, 여러 번 "그래."를 하시다가, "그래, 그러마."로 끝내시더라는 얘기. 다른 건 그만두고, 전화로 이름 불러대시는 건 정말 오랫만의 발전이다. 그리고 낮에 튜브피딩을 위해 윗몸을 일으켜세워 놓았을 때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 방 안팎을 둘러보시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이셨다고 김 여사가 좋아한다.

김 여사가 어머니께 "큰 아드님 전화에는 이름도 부르셨는데, 지금 작은 아드님 온 것 보시고는 뭐라 그러셨어요?" 하니 못 들은 척 무표정하시다. 내가 "말씀하셨어요. '잘 왔다.' 하고." 그랬더니 무심결에 빙긋 웃음이 떠오르신다. 에라~ 내친 김에, 하고 "'너 참 잘 왔다.' 그러셨던가요?" 하니까 눈길을 내게 돌리며 웃음이 커지신다.

의식이 계속 더 맑아지시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들어올 때 눈을 감고 계신 것도 그냥 떠오르는 생각에 의식을 맡기는 것을 넘어 뭔가 생각을 집중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걱정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의식이 더 분명해지시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지금 상황을 괴롭게 느끼시지나 않을지.

그리고 나에 대해 혹 불편한 생각을 떠올리시는 것이나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든다. 간병인들 상대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태를 스스럼없이 내시던 분이 내 앞에서는 표정도 말씀도 모두 아끼신다. 기술적인 이유려니, 생각하려 해도 자꾸 마음이 걸리는 것은 내 자격지심일까?

큰형을 너무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존중해 준 것이 미안하다는 말씀을 어머니께서 하신 일이 있다. 가장 역할로 부담을 주셨다는 것이다. 큰형이 어려서부터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을 키운 데는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비판할 만한 일이 있어도 "내게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며, 험한 말 할 일을 극구 피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몸에 밴 것 같다.

나는 가치관에 있어서 큰형과 많이 겹치지만, 그런 조심스러운 자세가 없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입으로 죄를 짓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한편 작은형은 워낙 신선 같은 분인지라 자기 자신도 비판할 줄 모르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귀찮아서도 못한다. 형제 중에 '비판' 실적은 내 독차지다. 어머니께 싫은 말씀 드린 것 형 둘이 합쳐도 내가 한 것의 10분의 1을 못 따라올 것이다.

이모님이 같이 앉았을 때 어머니께서 농담에 뼈를 넣어 말씀하신 일도 있다. "저 놈은 아무래도 김 서방(아버지를 가리킴) 귀신이 씌인 놈 같애. 너무 잘난 양반 만나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더니, 이 늘그막에 와서는 저 놈에게 꾸중 들어가며 살게 되었어."

그 말씀을 들으며 움찔, 했다. 21년 전 그분의 일기를 넘겨받은 후 내 머릿속에는 그분 생각이 늘 머물러 있다. 일에서건 생활에서건 조금만 긴장할 일이 닥치면 그분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께 대하는 태도에도 그분의 존재가 작용했다면 정말 귀신 씌었다는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꼼짝 못하고 누우신 분께서 내 얼굴을 보며 57년 전에 혼자 먼저 떠나신 분을 떠올리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큰형이 보는 것처럼 어머니는 두 개의 뚜렷이 다른 측면을 가진 분이다. 통상적인 말로 감성적 측면과 이성적 측면이라 할까? 내가 어머니 인생에서 이성적 측면을 대표하는 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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