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2:49

네 시간 반. 1년 남짓 병원에 모셔 놓고 지내던 중 한 번 가서 모시고 있는 시간으로 엊그제 신기록을 세운 게 아닌가 싶다. 며칠 전부터 용태가 썩 좋아지셨지만, 그 날은 전날과도 비교가 안 되게 정신이 초롱초롱해 보이셨다. 정신이 좋으실 때도 30분, 길어야 한 시간 정도만 깨어 계시면 피로를 느끼시는지, 눈을 뜨고도 몽롱한 상태에 빠지시는데, 그 날은 네 시간 동안 내내 정신이 좋으셨다. 바짝 좋아지신 것이 반갑기도 하고, 어떤 변화가 있으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길게 앉아 있게 되었다.

내가 가기 전에는 글까지 읽으셨다고 한다. 천수경과 금강경이 든 독경집을 놓아두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실 때 읽어드리면 편안히 휴식으로 빠져드시는 것 같아 얼마씩 읽어드리곤 하는데,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여사님들도 틈날 때 읽어드린단다. 그런데 그 날은 한 분이 읽어드리는데 달라는 듯이 손을 내미시기에 눈앞에 펼쳐드렸더니 얼마간 소리내어 읽으시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모시고 있으면 그런 재간을 잘 안 보여주신다. 여사님들이 안타까워, "아까 하시던 말씀 아드님께도 해 드리세요." 하고 조르면 어쩌다 한 마디 입을 떼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웃기만 하신다. 나는 너무 긴장시켜 드리는 것이 조심스러워 별로 채근하지 않는다. 내가 곁에 있을 때 재간을 아끼시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시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날은 여사님들 듣기 좋으라고 짐짓 "어머니, 이제 아들보다 여사님들이 더 좋으신가 봐요." 했더니 어머니도 웃음 지으시고 여사님들도 좋은 기색이다.

여덟 시 넘어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다 생각하니, 세상 참 좋아졌다 싶다. 1년 남짓 병원에 매일 가 뵙는 것을 놓고 아는 이들은 나를 대단한 효자 취급한다. 내 편리한 시간 골라 가서 어떤 때는 30분도 안 앉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이 나처럼 직장도 안 다니는 사람에겐 힘들 일이 아무 것 없다. 노환 든 분들을 집에서 모시던 시절 생각하면, 이건 일도 아니다.

지난 여름까지 1년 남짓 계시던 병원이나, 네 달째 계시는 지금 병원이나, 집에서 모시는 것보다 훨씬 든든하고 편안하다. 의술이 좋아지고 말고와 관계 없이, 조직과 제도의 문제다. 특히 자식인 우리보다도 더 믿음직한 간병인들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노인에게 좋은 일이다. 우리가 여늬 보호자들보다 자주 가고, 또 아내와 동향이기 때문에 여사님들이 더 마음을 써주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노인들 살펴드리는 태도를 봐도 저보다 더 잘 살펴드릴 자식이 어디 있을까 싶다.

오늘은 두 시간 가량 모시고 있는 동안 말씀이 한 마디도 없으셨다.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에 잠기신 것 같아 손을 잡은 채 책을 펼쳐 읽고 있다가, 얼핏 쳐다보니 얼굴이 울상이시다. 그래서 책을 치워놓고 "어머니, 저는 책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요." 엉구럭을 떠니 금세 풀리셨다. 책한테 샘을 내시는 건가? 그렇다면 용태가 대단히 좋아지신 거다. 튜브 피딩이 끝나 편안해 보이실 때 인사 드리고 나오려니 무표정하게 쳐다보시는데, 박 여사가 "아드님 가시는데 빠이빠이해야죠." 하고 얼려 드리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웃음이 가득하시다. 사랑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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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2>

기사입력 2002-06-08 오전 10:24:26

“잠깐 한가한 틈에 요즘 월드컵 때문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봅니다. 지난 5월 31일 세네갈전 패배로 나와 내 친구들은 기뻐 날뛰었지요. 반항심과 죄책감이 기묘하게 얽혀 빚어낸 감정이라고 할까요. 반항심이란 지난 월드컵 이래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자라난 과도한 축구 열기와 자만심에 대한 것이고, 죄책감이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 대한 우리 세대의 죄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1일 프랑스 고등사회
과학원 카트린 클레망텡 교수로부터 받은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했다. 54세의 클레망텡 교수가 말하는 ‘우리 세대’란 바로 68세대. 대학시절 유럽중심주의 등 전통을 뒤집는 혁명의 분위기에서 자라난 이 세대는 국가주의를 죄악시한다. ‘프랑스의 영광’에 대중이 열광하던 4년 전의 월드컵이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억일 뿐이다. 편지는 이어진다.
  

지난 5월 31일 월드컵 개막전에서 전 대회 우승팀과 프랑스와 세네갈이 격돌하고 있다.ⓒ연합뉴스

  “나는 집에서 TV를 꺼놓고 일하고 있었지만 아파트 건물이 통째로 들썩이는 함성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 수 있었지요. 우리 아파트에는 말리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골이 터진 순간부터 경기 끝까지 ‘세네갈, 세네갈!’ 합창이 이 집 저 집에서 이어졌습니다.”
  
  인도
전문가로서 제3세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클레망텡 교수에게 옛 식민지의 종주국에 대한 승리는 유쾌한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편지를 보면 기분좋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친 모양이다.
  
  “그런데 어제 르몽드 주말판을 보니까 내가
그린 그림이 영판 엉터리였더군요. ‘흰 프랑스에 대한 검은 아프리카의 복수’ 같은 것이 아니더라고요. 프랑스 대표팀의 주축이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죠(극우 정치인 르펜 씨가 얼마나 유감스러워 하는 일인지). 더 기막힌 사실은 세네갈 선수 전원이 프랑스에서 훈련을 받고 1년 내내 프랑스의 어느 팀에선가 뛰는 선수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내가 정확히 이해한 것이라면 지금의 세네갈팀 선수 몇 명이 다음번 프랑스팀에 뽑혀 오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환상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네갈팀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군요.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한심한 상황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를 그는 상상했던 것일까.
순수한 축구팬에게는 세네갈의 승리가 바로 다윗의 승리다. 프랑스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선수들을 모아 만든 ‘잡초팀’이 ‘거목팀’을 쓰러뜨리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변인가. 정치에 물든 시각으로 보니 명색은 독립했어도 현실에서는 축구조차 식민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아무튼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클레망텡 교수가 월드컵에는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7일) 받은 메일에는 우루과이와의 2차전 결과에 대한 소감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관전은 하지 않았지만 옆방에 TV는 켜 두었지요. 뭔가 일이 터지면 이웃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쫓아가 보려고요. (그 사람들도 아프리카팀 상대가 아니라면 프랑스팀을 열렬히 응원한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 소리가 안 나더군요. ...... 용케 아직 탈락은 안했군요. 여기 축구기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프랑스는 아직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정치 걱정으로 넘어간다. 11일의 덴마크전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에 앞서 9일의 의회 1차선거에서 르펜이 이끄는 극우파를 봉쇄하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말한다. 만약 일요일에 극우파가 득세하고 화요일에 16강에서 탈락하는 재앙이 겹친다면 프랑스는 어떤 꼴이 될 것인가, 자기가 질문을 던져놓고는 “
아마 전 국민이 집단적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답해 본다.
  
  정치도 선진국이고 축구도 선진국인 프랑
스지만 정치에 대한 축구의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우리 정치에는 축구가 어떤 영향을 끼칠까. 화요일 폴란드전 때 길거리에 나타난 군중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6.10 이후 15년래 드러난 최고의 힘이라고 한다. 폴란드와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립관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승리의 기쁨으로 고르게 덮였다. 그런데 월요일 미국전은 어떤 감정을 우리 마음에 일으킬까? 우리 국민의 미국관에 지난 동계올림픽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분위기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

기사입력 2002-05-29 오전 9:15:02

  프레시안은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인 김기협씨의 칼럼 ‘페리스코프’를 시작한다.
  필자는 80년대 대학에 있을 때는 공부의 깊이에 매달렸고 90년대 신문사 일을 하면서는 공부의 폭을 앞세웠다. 이제 양쪽을 아울러 시사를 역사로 보고, 역사를 시사로 읽는 눈을 다듬고 싶다는 게 필자의 생각. 동서교섭사를 연구하며 신간 외서를 폭넓게 섭렵하는 필자의 안목이 시사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야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넓혀 줄 것으로 기대한다. 물 속에 잠겨서도 세상을 두루 둘러본다는 뜻에서 문패를 ‘페리스코프(잠망경)’로 단다./편집


  지난 달 궁지에 몰린 야세르 아라파트를 보호하러 나선 ‘인간방패’ 속에는 62세의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드 샤브페르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61년 전 나치의 손에 죽은 유태인이다.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도망왔지만, 독일의 프랑스 점령 후 온 가족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부인의 어머니만은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체포를 모면했다고 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인들로 구성된 연합 시위대가 지난 4월 27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팔레스타인 사태해결을 촉구하며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하는 평화시위행진을 벌이고 있다. ⓒ인디미디어

  한 쪽만이 유태계인 샤브페르 부인은 스스로를 유태인보다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유태인의 고통에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이스라엘로 날아간 것이다.
  
  아리엘 샤론이 유태인의 이름으로 자기를 대표해서는 안된다고 부인은 분개한다.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희생자들을 팔아 이스라엘을 나치 독일과 같은 나라로 만드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인간방패 노릇을 자원한 것이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자손이 시오니즘의 총알을 가로막고 나서다니, 참으로 아이러닉한 상황이다. 아라파트의 인간방패 속에는 샤브페르 부인 외에도 프랑스 유태인이 여러 명 있었다.
  
  집권당인 리쿠드당이 팔레스타인 독립을 반대하는 당론을 정한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국민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독립을 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엄청난 국론의 괴리는 시오니즘의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프리 휫크로프트의 ‘시오니즘 논쟁(The Controversy over Zion)’(1997)에는 시오니즘의 세 가지 모순이 지적되어 있다. 첫번째는 구조의 모순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이념적 배경이 된 시오니즘을 앞서 제창한 것은 주변사회에 동화한 서유럽과 미국의 유태인들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에 실제 정착하러 간 것은 대부분이 중부와 동부유럽의 게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바란 반면 후자는 ‘힘있는 조국’을 원했다.
  
  두번째는 논리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은 유럽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응하면서 그 배타성을 본받았다.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에서 현지 아랍인 주민의 입장은 식민지의 원주민 정도로밖에 고려되지 않았다. “그들은 선진문명을 전달해주는 우리를 환영할 것”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식민주의 논리 그대로였다.
  
  세번째 모순은 상징성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이 유태인사회의 전폭적 단결을 이룬 것은 나치의 대학살 덕분이었다.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참상이 시오니즘의 어떤 극단성도 정당화해 주는 상징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 in Jerusalem)’(1963)에서 나치범죄의 본질을 ‘악마성’ 아닌 ‘비속성’으로 논해 호전적 시오니스트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이 상징성을 손상시킨 때문이었다. 악마성에 대항한다는 명분 없이는 극단적 호전성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모순이 근년의 이스라엘에서는 모두 더욱 심화되어 왔다. 구조의 모순을 심화시킨 것은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유태인의 대거 이민이다. 이스라엘 인구의 15%를 점하게 된 이들은 히브리어도 할 줄 몰라 러시아어 신문과 방송이 생길 정도다. 더 많은 땅을 원하는 이들은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자는 온건파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며 서안지구의 정착촌에 앞장서 자리잡고 있다.
  
  논리의 모순은 유럽의 탈(脫)민족주의 변화로 부각되고 있다. 시오니즘의 배경이던 유럽 민족주의가 유럽연합의 그림자에 덮이면서 시오니즘은 민족주의보다 인종주의의 틀로 옮겨가는 것이다. 상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 강경파의 입장은 온건파와의 대화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은 상징성의 모순을 심화시킨다. 자살폭탄이 담은 극단적 증오를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반(反)인간적 현상이 악마성으로 보일 수밖에 수 없다. 폭력만으로 이에 대응하는 자신들이 얼마나 악마적으로 보일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40년 전 영화 ‘엑소더스’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바탕으로 한 그 감동은 시오니즘의 모순을 가려줄 수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약자도 아니고 시오니즘의 모순은 이념으로서 시오니즘의 효용성까지 위협할 정도로 심화되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탄압이 나치의 유태인 탄압을 닮아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유태인 나치 희생자의 후손들에게서까지 나오고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