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08:39

그저께는 점심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들어서며 보니 장 여사가 떠먹여 드리고 있다. 얼른 손을 씻고 숟갈을 넘겨받았는데, 좀 웃기신다는 생각이 든다. 장 여사가 떠 드릴 때는 한 입 무실 때마다 흥에 겨워 고개도 흔들고, 눈길도 움직이시던 분이, 내가 앞에 앉으니 근엄한 표정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벌려 죽을 받아 잡수신다. 뭔가 시치미를 떼고 계신 것 같아, 저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사래라도 들리지 않으실까 걱정될 정도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나도 근엄한 표정과 자세로 작업에 열중했다.

다 잡수시고 물까지 드신 다음 무심한 척 앞만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 얼굴을 약간 치뜬 진지한 눈길로 20초 가량 쳐다보고 있으니 내게 눈길을 돌리신다. 이럴 때 눈에 힘을 줘 크게 부릅뜨고 나를 마주 보시다가 내가 "픽!" 웃음을 터뜨리면 따라서 "픽!" 웃으시며 긴장을 풀 때가 많다. 그런데 그저께 반응은 "뭘 노려봐, 이놈아!" 하는 호통이셨다. 나는 움찔! 하는 기색을 과장되게 보여드리고는 진지한 표정을 그대로 지키며 "노려본 게 아니고, 어머니 모습이 고와서 쳐다봤습니다, 어머니." 능청을 떠니까 퉁명스럽게 "곱거나 말거나!" 하고 눈길을 도로 돌리신다.

침대 머릿가 서랍장 위에 놓아두었던 간 과일 병으로 손을 뻗치니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곁눈질로 힐끗 보시고는 "그건 뭐냐?" 물으신다. "소화제예요, 어머님." "소화제? 무슨 소화제?" "며느리가 만들어드린 맛있는 소화제 모르세요?" "모르겠는데? 아무튼 먹는 거라면 먹어보자." 이제 시치미는 안녕이다. 향기롭고 달콤한 과일즙의 매혹 속에 못생긴 아들까지도 예뻐 보이시는 모양이다. 드실 만큼 드신 뒤에 내가 또 한 숟갈을 푸자 말씀하신다. "너도 한 입 먹으렴."

과일즙의 매혹에서 헤어나오시자 다시 호통 모드. 그런데 역정이 깔려 있지 않은, 순전히 재미로 치시는 호통인데, 어찌 그리 시치미를 잘 떼시는지. 이건 그 다음날(어제) 아내랑 함께 갔을 때 여사님들이 해준 말인데, 왜 그 착한 아드님을 자꾸 야단치시냐고 했더니 흐뭇한 웃음을 띠고 "그놈이 내 앞에선 벌벌 떨지." 하시더라고. 살아오시는 동안 호통 모드는 대인 자세의 기본 패턴 중 하나인데, 그것을 써먹어 보실 상대역으로 내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사님들이 일 없을 때 잠깐씩 앉아 쉬는 간이침대가 어머니 발치 건너편에 있다. 마침 두 분이 쉬고 있기에 내가 물어보았다. "오늘은 그렇게 많이 드시려고 하지 않네요. 이제 드시는 분량이 자리 잡힌 걸까요?" 그러자 두 분이 마주 보며 한 차례 웃고 한 분이 대답해 준다. "오늘 워낙 많이 드셨어요. 바나나도 반 개 잡수시고, 과자도 하나 드셨어요." 틀니를 안 하시고도 잡수실 만한 것은 이제 다 잡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단계 식생활 대책의 필요가 분명해졌다. 병원 식사가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은 공급해 주지만, 웬만한 음식 드실 수 있는 것은 권해드려도 좋다는 닥터 한의 얘기는 들어 두었으니까.

세 가지 종류의 요구르트와 웨하스(이제 영어 이름을 일본식으로 쓰는 건 이걸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는 물건)를 갖춰 저녁때 다시 갔다. 정말 시간 감각은 확실히 되찾으셨다. 전 같으면 왔으면 왔나보다 하실 뿐 얼마 만에 다시 온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하셨는데, 내 얼굴을 보자 "어? 너 또 왔니?" 하신다. 식사 마치고 30분쯤 되셨을 것 같은데, 여사님께 간식 드려도 괜찮겠냐 물어보니 너무 많이 드리지는 않는 게 좋겠다고 한다.

요구르트 중 떠먹는 것 하나를 먼저 드렸더니 그 강한 향기에 충격을 느끼시는 것이 역력하다. "맛이 어때요, 어머니?" "와~ 너무 달다." "이건 그만 드릴까요?" "그래도 먹을 건 먹어야지." 결국 오만상을 찡그리신 채로 다 받아 드신다. 요건 당분간 다시 권해드리지 말아야겠다. 웨하스를 한 입 크기로 쪼개 드리니 입안에서 녹이시면서 입맛을 짝짝 다시신다. 두 쪽을 드신 다음 입가심 하시라고 물을 드리니 빨대로 빨아 물이 조금 입에 들어가자마자 밀쳐내신다. 왜 그러시냐 했더니 "싱거워." 하신다. 웨하스의 뒷맛이 씻겨 사라질까봐 아까우신 것이다.

요즘 어머니 모시는 주요 메뉴의 하나로 긁어드리는 일이 떠오르고 있다. 머리가 가렵다고 긁어달라고 하시는데, 긁어드리면 눈을 지긋이 감고 완전 엑스터시에 빠지신다. 끝도 없다. 적당히 끝내려고 수작을 걸면 "잔소리 말고!" 하며 머리를 들이대신다. 어떤 때는 2,30분 하고 있으면 틈나는 여사님 한 분이 와서 교대해 주며 빨리 가시라고 한다. 며칠 전부터 내가 개발한 방법은 긁어 드릴 만큼 긁어 드린 뒤에 물티슈를 하나 꺼내 한 차례 두루 문질러 드려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원한 맛이 좋으신지 불평이 없으시다.

사흘 전(1일)인가? 진짜 기막힌 경지를 보여주신 일이 있다. 건너다 보이는 저쪽의 할머니 한 분에게 그 아드님이 와서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있었다. 그걸 가리키며 "저거 봐라." 하시기에 "뭐를요, 어머니?" 했더니 "저 착한 아들이 어머니 팔을 주물러드리는구나." 하고는 내게 눈길을 돌리시더니 "나도 뭐 좀 해받아야 되지 않겠니?" 하시는 거다. 그래서 "어디가 가려우세요, 어머니?" 했더니 "그래, 뒤통수가 좀." 하며 긁기 좋도록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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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6. 08:35

입으로 다시 진지를 드시게 된 지 한 달이 됐다. 8개월간 튜브피딩을 하시던 끝이라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아직 기력이 많지 않으신데 배탈이라도 한 번 하시면 큰 타격이 될 수 있으니까.

거의 미음만 권해 드리면서 이틀 지내고 나니 소화 능력에 마음이 놓여 고기 삶은 것을 갈아 미음에 섞어 드리고 병원에서 나온 간 채소반찬도 조금씩 권해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로 연시도 속을 긁어두었다가 조금씩 권해 드렸다. 권해 드리는 것을 못 잡수신 것이 없고, 소화시키지 못하신 것도 없다. 연시만은 대변이 늦어지시기에 사나흘 후부터 배 중심의 과일믹스로 바꿨다.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과일이다. 감 드시면서 황홀해 하신 일은 당시에 적었지만, 그 후 배-사과-바나나-딸기-귤 등을 적당히 섞어 간 것, 언제 꺼내놓아도 대환영이시다. 처음엔 "햐~ 달다!", "야, 너무 달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따라 나오다가 차츰 덤덤해지신 편이지만, 첫 숟갈을 물고 눈을 반짝이시는 것은 아직도 그대로다.

처음엔 500cc 병에 담아 가다가 1주일쯤 지나면서는 1000cc 병으로 바꿨지만 이틀이 못 간다. 소화와 용변에 다 좋으실 것 같아 드실 수 있는 대로 거의 제한 없이 드리다가, 며칠 전 검사에서 혈당이 조심스럽다는 주의를 받고 드시는 양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제한이 표현력 발전에 자극이 되기도 한다. 부탁, 간청, 요구, 호통, 등 온갖 화법이 이런 상황에서 재개발되는 것이다. 수량 감각에도 자극이 되신다. 오늘 낮에 병을 꺼내 놓으면서 "어머니, 의사 선생님이 이것도 너무 드시면 안 된대요. 아홉 숟갈만 드세요." 하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열아홉 아니구?" 하신다. 정말 유머 감각은 예전보다 더 좋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세 숟갈 드신 뒤에 "몇 숟갈 드셨어요?" 하니까 "셋," 한 숟갈 더 드신 뒤에 "몇 숟갈 남았어요?" 하니까 "다섯," 대답이 즉각 나오신다. 그런데 여섯 숟갈 드시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눈을 묘하게 뜨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제 절반 먹었네." 하신다. 어이 없는 내색을 감추고 "네, 많이 드셨네요." 하고 더 드리니 정확하게 세 숟갈 더 드신 다음 정색을 하고, "야, 조금만 더 먹자." 하셔서 "네, 그러세요, 어머니. 세 숟갈 더 드시죠." 하니까 고개를 마구 끄덕이시고, 맛있게 세 숟갈을 더 드신 다음 선선히 물러나신다.

오늘 같은 날은 매우 평화로운 상황이었다. 어제는 뭔가 심기가 좀 삐딱하신 편이었는데, 절반 넘게 남은 병을 꼭 바닥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잡수셨는지, 종당에는 주먹까지 휘두르시고 (주먹을 들먹이시면 편리한 위치에 머리통을 갖다대야 한다. 그래야 팔 운동이 되시니까.) 주 여사가 쫓아와서야 겨우 진압을 해드릴 수 있었다.

심기가 삐딱하신 것은 그저께, 내가 서울에 일이 있어 못 가고 아내만 갔던 날부터였다. 아내에게 얘기 들으니, 다른 일 하고 있는 여사님들을 당신한테 와달라고 안달하시고, 목청도 꽤 높이시더라고 했다. 아내에게 말씀하시는 데도 장난기를 넘어선 심술기가 느껴졌다고 하고, 여사님들은 어머니께 꼬집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심술까지 회복되신다면 정말 대단한 회복이시다. 작년 가을 자유로병원에 계실 때는 간병인 학대범으로 온 병원에 소문이 나실 정도였다. 안 여사란 이가 몹시 당했다. 겨울 되면서 기력이 떨어지시고, 또 모시는 재주가 좋은 김 여사로 바뀌면서 그 증세가 사라졌는데, 이제 기력이 그만큼 좋아지셨나, 대견스럽다. 지금 여사님들과 관계가 워낙 좋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않는다. 꼬집으셨다는 게 내 머리통 때리시는 정도겠지.

어제는 심술 회복 소식을 들은 터라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비위 맞춰 드리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살펴 보니, 분명히 삐딱하시다. 장난처럼 호통을 치시는데, 조금만 삐끗하면 역정으로 바뀔 소지가 느껴진다. 결국 난감한 장면을 맞고야 말았다. 진지 드실 때부터 똥이 마렵다고, 일으켜 앉혀 달라고 거듭거듭 조르시는데, 1년 가까이 누워서 볼 일 잘 보시던 분이 웬 유난을 떠시나? 종이까지 달라고 하신다. 겨우 식사를 마치신 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요구가 그치지 않으셔서 체면불고하고 다른 일 하고 있는 주 여사를 불러 임무를 넘겨드렸다. 대변까지 받아드려야 효자 되는 거라면 난 효자 못하겠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바람 좀 쐬다가 내려와 보니 아직 볼 일을 못 보셨다고 한다. 무척 불안한 기색이시다. 곁에 앉아 있는데, 불쑥 나를 보고 "야, 너무 아프다!" 하신다. 깜짝 놀라 (오랫만에 들은 말씀이다.) "어디가 아프세요, 어머니?" 하니까 "이게 걸렸어. 양쪽 사이에." 하고 얼굴을 찌푸리신다. 내가 더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겠고, 차라리 내가 없어야 여사님들이 제대로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전 일하러 갈래요, 어머니, 재주껏 누세요." 하고 일어나려 하니까 "어디 가니?" "집에요, 어머니." 하니까 오늘따라 별나게 "갔다가 금방 와야 한다." 하신다. "네, 금방 다녀올께요, 어머니." 하고는 병원을 나올 수 없어 아래층에 가 설 후에 한 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있던 김 (간호)과장에게 갔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어도 정신이 불안정하시니 가급적이면 중환자실에 계속 계시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올라와 보니 그 사이에 볼 일은 보셨다.

기력이 없으실 적에는 얼마 모시고 있으면 노곤해 하셔서 쉬시는 것을 보고 나올 수 있었고, 기력을 되찾은 뒤로는 대체로 내가 일하러 가야 한다는 사정을 이해하시는 듯, 어떤 날은 떠나는 내게 "넌 가서 일해라, 난 여기서 놀께." 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어제는 내가 떠나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시는 기색이셔서 좀 길게 모시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차현실 선생이 오셨다. 이만큼 회복되신 것을 보고 반가워 눈물까지 글썽일 듯하다. 그래서 차 선생께 어머니를 양보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최근 이틀 간의 불안정하시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도 아무 동요 없으셨고, 이마에 뽀뽀를 신청하니 "쬐끔만 하거라." 하고 선선히 내놓으신다. 아마 의식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일시적인 불안정이 나타나신 것 아닌가 싶다. 용변은 앉아서 보는 일이란 강박까지 되찾으셨으니, 어느 수준까지 회복되실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식욕이 정말 왕성하시다. 그저께부터 "배고프다"란 말을 입에 달고 지내시고, 한 번은 진지 갖다드리는 여사님에게 "다들 많이 먹으면서 왜 나만 이렇게 쪼끔 주냐?"고 투정까지 하셨단다. 그래서 오늘 점심부터는 미음을 죽으로 바꿨는데, 정말 '식은 죽 먹기'로 가볍게 비우신다. 그리고는 식판 치우려는 것을 못 치우게 하고 "뭐 더 없냐?" 하신다. 두유를 드리니 한 팩 다 드시고야 만족스러운 기색. 그리고도 소화제(과일 간 것)도 드실 만큼 드신다. 식생활 대책을 더 적극적으로 마련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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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물리학과에 들어갈 때 내 꿈은 과학자에서 노벨상으로 좁혀져 있었다. 노벨상이 동네 강아지 이름이 아니라는 건 열아홉 살이나 된 놈이 물론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꿈을 꼭 쥐고 있었던 건 벼락부자 누깔에 뵈는 게 없는 격이었다. 꾸준히 우등생 노릇을 해 왔다면 주제 파악이 좀 쉬웠을 텐데... 고3이 되면서 '천하 경기'의 전교 1등을 난 데 없이 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서울대 전교 수석은 아니라도 이공계 수석까지 이어지면서, 나는 내가 천재라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 확신은 동기생 대다수가 공유한 것이라서 더욱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애 있는 줄도 몰랐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깃발 날리며 나서니까 다들 놀라자빠졌다. 고3 내내 나는 '평민 영웅'이었다. 매달 치는 모의고사에서 내 석차가 올라가면 다들 괜히 좋아하고 내려가면 괜히들 아쉬워했다. 한 번은 짖궂은 친구들이 대표를 뽑아 내게 실험을 걸었다. 김종민이라고 문화부 장관 한 녀석, 무지하게 잘 노는 재밌는 친구가 나서서 모의고사 전날 늦게까지 맨투맨으로 나랑 놀아줬다. 당일치기 못하게 해서 결과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당당히 1등을 해 보이자 '평민 영웅' 신앙은 더욱 굳어졌다.

천재의 환상은 내 인생에 큰 흔적을 남겼다. 커 오는 동안 내내 가지고 있던 총체적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좋은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음미하게 된 측면이고, 나는 오랫동안 이 환상의 부정적 영향을 가지고 고심했다. 일상적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행동의 선택에까지 '상식적' 판단에 저항감 내지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어머니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 환상을 그분이 부채질하셨던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길을 가야 한다"는 일종의 엘리티즘이 자식들을 닥달하는 그분의 지론이었다. 나이 50이 넘도록 어버이 탓을 하고 살다니... 난 참 못난 놈이다. 그래도 근년 들어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지워진 것은 내가 드디어 '천재 컴플렉스'에서 벗어난 조짐일까?

2학년 올라갈 때 사학과로 전과한 것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결정한 큰 고비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재 컴플렉스를 그 고비에서 바로 벗어난 것은 아니라도 차츰차츰 벗어날 길을 찾아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대중'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도 보통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만큼 편안히 여기고 즐기게 된 데는 역사학을 인간관계의 탐구로 여기며 오랫동안 공부해 온 덕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전과를 격려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대감을 가졌을 만한 분(예컨대 당시 충남대 사학과 교수로 있던 고종사촌 기돈 형님)들도 전도양양한 물리학도의 장래를 포기하는 일에 당당히 찬성하고 나설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물리학과 교수들도 "이런 인재가 아니면 누가 노벨상을 바라보겠습니까?" 하며 어머니를 부추겼다. 나 혼자의 고집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나 자신 석연치 않다.

 

역사학이 좋아서 전과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물리학을 떠나고 싶었다. 물리학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대학 들어와 수학과 물리학의 본 모습을 대하고 보니 내가 그때까지 생각해 온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내 적성으로 볼 때, 겸손한 마음으로 임했다면 재미를 붙일 만한 분야였다. 그러나 노벨상을 목표로 매진해 갈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학기 지나고 나자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떠나고자 한 것은 노벨상의 꿈이었다. 물리학은 'collateral damage' 였던 셈이다.

손쉽게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전과였고, 당시의 서울 문리대는 문과와 이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었다. 물리학과 떠날 마음을 먹고 둘러보니, 이과는 모처럼 맘 먹고 도망치기에 너무 가까운 곳이라서 문과 쪽을 건너다보게 되었다. 첫 선택은 사회학이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대로 셈본 실력을 활용할 여지가 커 보여서였다. 그런데 그 해에는 사회학과에 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사학과였다.

역사학이 뭐하는 건지, 나는 일반 고졸자의 인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 이력 중에 "서울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란 항목이 있어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도통 모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옛날 책에 얼마간 익숙했다는 사실 외에는 사학과를 특별히 고를 이유가 없었다. 정말 어쩌다 가게 된 것이 사학과였다.

이렇게 천둥벌거숭이로 사학과에 뛰어든 나를 당시 사학과 선생님들이 바라보며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갔을지, 이제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사학과는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 서울대 전교 수석급 인재가 온다는 데 기대감을 품는다는 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성칠 교수'의 아들이 사학과에 나타난 것을 보면서 어떤 감회를 느끼는지는 당시의 나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사학과의 원로 교수는 한우근, 고병익, 민석홍 제 교수로 서울대 사학과 1~2회 졸업생들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해방이 되자 서울대로 편입했다가 졸업한 분들인데, 1회가 47년 졸업이었다. 45년까지 경성제대였고, 46년 한 해가 '경성대학'이란 이름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해에 졸업했다. 69년에 내가 사학과에 가서 마주친 원로 교수들이 졸업반일 때 아버지는 강사와 조수(조교) 신분으로 그분들과 접했고, 그분들이 졸업할 때 조교수로 취임한 것이었다.

93년 <역사 앞에서> 출간을 계기로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거니와, 사실 나 자신도 87년 그 일기를 처음 보면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 이력이 그저 자리 하나 채운 것이 아니라 서울대 사학과, 나아가 한국 역사학의 진로를 상당 부분 좌우할 잠재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비명에 가신 그분의 아들이 입학시험도 거치지 않고 어느 날 불쑥 사학과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던 교수분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님이 99년 돌아가시기 전 명륜동 댁에 종종 찾아뵈면서 당시의 소감을 더러 듣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 존재의 의미를 거의 모르는 채로 사학과에 다녔다. 한문과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쫓기는 느낌 없이 여유롭게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생각하면 역사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노벨상 생각하며 물리학과 들어가던 때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85년 이후 유럽의 학풍에 접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키우고 있던 위에 87년 이후 아버지 일기에서 얻은 자극이 겹쳐져 나 나름의 학문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69년의 전과 당시에 나는 향후 겪게 될 변화의 방향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이 많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과 자세에 접근해 온 사실을 놓고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해 온 요인들 중에도 뭔가 필연적인 측면도 더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느 시점까지는 나 스스로 전과를 한 게 잘한 짓이었는지 어쨌는지 회의가 수시로 들곤 했었는데, 근년에는 그런 회의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 올 데까지 온 모양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