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22:02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처음으로 영천군 청통면의 고향을 찾아갔다. 대구 대명동에 있던 고종사촌 영돈 형님 집에 가 큰고모님께 인사드리고 머물다가 하룻밤 다녀왔다. 큰고모님이 그 몇 해 전까지 서울에서 셋째 아드님 기돈 형님 집에서 지내신 것은 기돈 형님이 고와서나 서울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형제들에게 할머니 노릇 해주려는 뜻이었으리라는 것을 나중에 짐작하게 되었다. 우리도 클 만큼 크고 기돈 형님이 대전으로 옮기면서 큰 아드님 집으로 옮겨가셨었다.

대구도 내겐 처음이었다. 고모님 세 분이 살고 계시던 곳인데, 형들은 중고등 시절에 다녀간 적이 있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야 처음 가보게 되었다. 청통 고향에는 아마 형들도 못 가 봤던 것 같다.

자식들이 청통만이 아니라 대구 가는 것도 어머니는 과히 좋아하지 않으셨다. 괴로운 기억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7년의 결혼생활 중에 시집살이는커녕 시댁에 찾아가 뵙지도 않았다. 고향에는 아버지의 전처가 살아 계셨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재혼(일시적으로는 중혼)을 반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 입장이 난처했었다. 작은형까지 낳은 뒤에야 며느리로 인정받으셨다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참혹하게 돌아가신 곳이 청통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까지도 아버지는 고향 갈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도 제사 모시러 혼자 갔다가 변을 당하신 것이었다.

사고 직후 청통에 달려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몇 번 들은 일이 있다. 매번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대목이 하나 있다. 범인이 바로 잡혔는데, 경찰에서 범인을 보겠냐고 묻는 것을 안 보겠다고 거절했다는 얘기다. 그 뜻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게 된 얘기다. 한 실존 인물을 한없는 분노와 슬픔의 구체적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을 꺼리신 뜻을. 지금 적으면서 생각하니, 그 장소와 그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서적 어려움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를 저격한 범인은 재판에서 정신장애자로 풀려났다고 친척들에게 들었다.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추측이 떠돌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워낙 엄청난 것이어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만 모든 힘을 모으시겠다고.

 

청통에 가는 것은 큰고모님도 말리셨다. 그러나 고집하지는 않으셨다. 마뜩하지는 않지만, 자손이, 그것도 장원급제하고 돌아온 자손이(나이든 친척들은 서울대 이공계 수석합격을 그런 종류로 이해했다.) 조상 산소를 뵙겠다는 것이 반가우셨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청통에서 밤을 지내지 말라는 당부는 쉽게 거두지 않으셨다. 나를 데려갈 둘째 아드님 세돈 형님이 한참을 설득하고서야 마지 못해 승낙하셨다. 역시 17년 전의 참변을 잊지 못하고 계신 것이었다.

세돈 형님을 따라 하양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청통에 도착했다. 은해사 들어가는 길 갈라지기 전의 면사무소 있는 마을이 신학동이고, 내 본적지로 표시되어 있던 원촌동은 그 뒤로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기범 형님 집은 신학동에 있었다.

아버지의 전처 소생으로 2녀1남의 이복형제가 있었다. 맨 위 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밑이 나보다 열 살 위의 기범 형님이었고, 그 밑으로 욱이 누님이 있었다. 욱이 누님은 80년대에 계명대 간 뒤에야 상면하게 되고, 기범 형님을 첫 고향 방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기범 형님이 그 때 서른도 안 된 나이였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니 새삼스럽다. 어렸을 때 녹용을 먹인 것이 잘못되었다던가, 모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체수도 작았다. 고향 재산은 그 형님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당시까지도 농촌 살림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고 한다. 큰고모님 집안에서 돌봐줘 온 모양이었다. 형수도 정씨 집안 출신이었다.

기범 형님은 나를 보고 턱없이 좋아했다. 이복이라도 동기간에 만나는 것이 반가운 것은 물론이고, "내게도 이런 장한 동생들이 있다"고 으쓱대는 마음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모자란다고 해서 괄시받으며 자라오고 살아온 데 대한 자격지심이 강했다. 이 자격지심이 십여 년 후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나갔다가 고달픈 객지생활 끝에 나이 50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형님을 힘든 길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랫만에 생각이 떠오른 형님, 명복을 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차례로 안내해 준 다음 기범 형님은 인근의 모든 친척집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은 모두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떠나고 딱 한 집 청통에 남아 있지만, 그때까지도 20여 호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집안 족보도 그 때 처음으로 구경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10대쯤 위에서 예안으로부터 왜관 부근으로 갈라져나왔다가 몇 대 후에 거기서 또 청통으로 갈라져 나왔다는 정도를 기억하고 있다. 청통 들어온 지 5-6대 된 할아버지 때까지도 토성에 눌려 행세를 못하다가 할아버지가 걸출하신 덕분에 영천 향교에서도 우리 집안의 존재가 부각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 등. 뿌리가 아주 깊은 집안은 아니지만, 40년 전까지 그 동네에서 알아주던 집안 하나가 지금은 딱 한 집만 남아있게 되다니... 허망한 마음이 든다.

 

청통은 결국 내 고향 노릇을 별로 하지 못했다. 첫 방문 후 10년쯤 지나 기범 형님이 떠난 후로는 산소들도 자주 찾아뵙게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대구가 제한된 의미로나마 내게 고향의 힘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경북중 출신이고 대구에 집이 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대구 가는 길에 그 친구들을 만나니 자기네 중학 동창으로 경북고 나온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여기서 시작해 서울대 교양과정부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이랑 노는 재미에 방학만 하면 대구에 가서 얼마동안이라도 지내게 되었다.

지내 놓고 생각하면 내가 경기 체질이 못 되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동창의 일부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상류사회 분위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하고 있었고, 나도 거기에 어울릴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맥주-양주 마시는 동창들 모임보다 막걸리-소주 마시는 대구 촌놈들 자리가 편했다.

체질 문제는 지낸 뒤에 떠오른 생각이니 견강부회일 수도 있는 것이고, 당시 나는 대구 친구들 몇몇의 인간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근년 내가 워낙 사람을 안 보고 지내와서 그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친구들이 여럿 있다. 아마 경기 같은 '천하 명문'보다 경북고 같은 '지방 명문' 분위기에서 자라난 '인재'들이 내 엘리티즘 취향에 맞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대구에의 끌림은 학부를 졸업할 때 큰 작용을 했다. 군대는 연기하고 봐야겠으니 대학원 진학은 해야겠는데, 서울대 대학원은 가고 싶지 않았다. 민두기 교수 때문이었다. 박사과정에서 결국 충돌하고 말게 되지만, 민 교수는 나와 다른 학문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학문관이란 것이 당시에는 확고하게 세워져 있지 못했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가? 냄새가 벌써 틀렸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 동양사학과에는 고병익, 민두기 두 분 교수만 있었는데 고 교수는 학교 행정에 매달려 있어서 학과 운영은 민 교수가 전횡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었지만 군대 문제에 막혀 있고... 서울대는 민 교수에게 막혀 있고... 사립대학은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결론은 지방 국립대학이었다. (당시에는 사립대와 국립대 등록금이 몇 배 차이가 났다.) 마침 어머니도 2년간 해외에 나가 계실 참이었기 때문에 영아도 기숙사 들어갈 계획이었고, 나 역시 서울에 있은들 어차피 하숙생 신세를 면할 길 없는 형편이었다. 지방대학이라면? 익숙한 대구를 제쳐놓고 다른 곳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경북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상한 넘이 하나 불쑥 나타났는데... 이것을 싫어한 교수들도 있었고 좋아한 교수들도 있었다. 대학원 시절의 성적표를 보면 두 그룹이 확연히 갈라져 보인다. 싫어한 교수들은 서울대 출신이 그곳 교수자리 바라고 처들어온 게 아닌가, 자기 제자들 밥그릇 걱정해준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학계에서 위상을 키우고 있던 민두기 교수와의 관계를 생각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반가워한 분들 중 서울대 출신들은 말할 것 없고, 경북대 출신 교수들 중에도 리버럴리스트 입장에서 다양성을 반겨준 분들이 있었다. 내 지도교수를 맡아 연구실까지 내주고 마음껏 공부할 여건을 만들어주신 김영하 선생님의 고마움은 잊을 길 없다.

74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구를 떠났다가 81년 계명대학에 부임하게 된 데도 고향의 끌림이 얼마간 작용한 셈이다. 80년도에 막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한 부산 어느 학교에서 오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학교를 가 보니 너무 대학 같지 않아서 안 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학교 건설계획 중 끝에서 두 번째가 도서관이었고, 맨 끝이 교수연구실이었다.) 그리고 1년 뒤에 계명대학으로 갔다. 부산보다 대구에 더 끌린 점도 다소 있지 않았겠는가?

9년 반 동안 계명대학에서 지내는 동안 내 인생은 여러 면에서 방향 전환을 겪었거니와, 고향에 대한 태도도 그 하나의 측면이었다.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자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지냈고, 가문에 대한 의무도 최대한 이행하며 지낸 시절이었다. 할머니 같던 큰고모님과 뒤이어 기범 형님을 저 세상으로 보냈고, 욱이 누님을 만나 얼마만큼이라도 동생된 도리를 했다. 계명대학을 떠난 후 뿌리를 지우며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계명대학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뒷골이 그리 심하게 당기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영창에 다녀온 후 내게 수호천사가 생겼다. 고교 3년 선배인 법무관 정아무개님이 나와 같은 무렵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는데, 그분이 내 봉변 소문을 듣고 나를 가엾이 여기게 된 것이었다.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마 보충대 차 상병이 연락해 줘서 사령부 가는 길에 인사드리고 점심을 얻어먹었던 것 같다.

정 법무관은 첫눈에 '열혈남아'였다. 기분좋을 때 웃음도 통쾌하거니와 화났을 때 그 부리부리한 눈에 힘이 들어가면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내 영창 경위를 묻고 나서 결연한 한 마디로 그 얘기를 마무리한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김 일병 고생했어. 앞으로 내가 있는 동안 김 일병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어!" 그러고는 다른 화제로 바꾸며 화통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분은 약속대로 2년 동안 내 수호천사 노릇을 해줬다. 떠도는 얘기로는 사단 간부들 회식하는 자리에서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의무 참모에게 큰 소리로 내 얘기를 했다고도 한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인재인데, 군에서 맡아가지고 있다가 제대로 돌려보내야지, 이유도 없이 영창에 굴리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옆에 있던 헌병 참모 얼굴이 벌개지더라는 얘기도 있고. 그분이 성격이 괄괄한 데다가 노골적으로 나를 감싸줬기 때문에 누가 지어낸 얘기였으리라 생각한다.
2년 후 그분이 떠날 때는 나도 중고참 축이 되어 부대에서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형편이었다. 행정 담당 중고참이 되면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다치는 수가 있어서 간부들도 조심스럽게 대한다. 나도 정 법무관의 후광 아래 너무나 많은 일탈이 있었기 때문에 숨 죽이고 조심하며 잘 지냈다.

그러다가 만기를 6개월 가량 앞둔 어느 날 작은 충돌 하나가 있었다. 나와 같은 무렵 소위로 왔다가 막 중위 단 애가 하나 있었는데, 영 덜떨어진 애였다. 고 녀석이 당직을 선 후 신새벽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전원 연병장에 집합! 열외 없음!"을 때린 것이었다. 나는 집합 명령과 구보 명령에는 응했지만 "대가리 박아!"에는 응하지 않았다. 고 녀석 얼굴이 새빨개져서 폴짝폴짝 뛰었지만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 보직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령을 그만두고 취사병이 되었다.

 

2백명 인원 밥을 해주는 취사장에 두 명이 있다가 내가 가서 세 명이 되었다. 의무대라서 취사시설이 잘 돼 있기 때문에 충분하고도 남는 인원이었고, 모든 집합에서 최소한 한 명은 원천적 열외니까, 그리고 식생활에 애로가 없는 자리니까 괜찮은 보직이었다. 그런데도 험한 일이란 통념이 있었고, 따라서 권 중위가 나를 그리 보낸 것이었다.

취사장 갈 때 나도 말년 바라보는 고참이었는데, 진짜 말년 고참 하나가 거기 있었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한다. 서진삼 병장. 나보다 4개월 가량 고참인데, 수송부 정비병으로 있다가 선임하사의 미움을 받아 꽤 오래 전부터 취사장에 와 있었다. 공고 나와서 공장 다니다가 군대 왔다고 하는데, 좀 모난 성격으로 보이는 사람이지만, 나는 은근히 정이 갔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면서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랄까? 함께 지내면서 내 먹물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존중할 만한 면은 존중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도 그의 고지식함에 어이없을 때가 있으면서도 좋아하고, 얼마간의 경의도 품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참 잘 지냈다. 말년 고참들이면서도 서로 일을 미루지 않았다. 일거리 하나 생겼을 때 서 병장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 "이 일은 중요한 일이므로 쫄병한테 맡길 수 없다. 그렇다고 왕고참을 귀찮게 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중고참인 김 병장이 해야 한다. 그런데 김 병장은 이런 일 할 능력이 없는 등신이다. 따라서 본관이 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달려드는 것이다. 일종의 독특한 리더십인데, 솔직히 말해서 당시의 군대에선 잘 안 통하는 리더십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통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안해 보던 짓들을 배워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내며 서로의 사람됨을 웬만큼 익혔을 때 하루는 한가한 시간에 서 병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낸다. "김 병장, 나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화장실 가고 싶다는 얘기도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양반인지라 나는 별 긴장감 없이 대꾸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서 병장님."

"어? 정말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 달만 있으면 서 병장님 안 보고 살 수 있는 판인데, 무슨 부탁인들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서 병장, 씩 웃더니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건네주며 펼쳐보라고 눈짓을 한다. 열어 보니 뭔가 빽빽하다. 들여다 보니 '서진삼 리스트'였다. "*월 **일 **시 행정관 닭 두 마리", "*월 **일 **시 인사계 쌀 한 가마", "*월 **일 **시 대장 기름 한 통", "*월 **일 **시 김 대위 라면 두 줄" 식으로 소소한 비리들의 메모가 가득했다.

뭐라고 응대해야 할지 난감해서 내용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서 병장이 얘기한다. "김 병장이 높은 사람들 잘 통하는 거 알어. 전번 법무관 같은 분께 전해 달라고 부탁할까도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내 손으로 처리할 일이야. 소원수리를 내고 싶어. 그런데 나는 글을 못 쓰잖아. 김 병장이 이걸 글로 정리해 주면 고맙겠어."

이거 참... 당시 군대의 '관행'에서 벗어나는 특출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드러나면 연루된 사람들이 혼이 나거나 최소한 땀을 빼게 될 일들이다. 의무대의 장교, 하사관 가운데 내가 진심으로 존중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권 중위처럼 진짜 이상한 넘들 두엇 외에는 인간적으로 이해 못할 사람이 없었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소한의 배려를 서로 나누며 지내는 것이 괜찮았다. 나는 보수적인 인간이니까.

그런데 서 병장이 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갈 일을 꾸미며 내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봤다.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군대생활을 통해 특정인에게 분노를 쏟은 일이 내가 아는 한 없는,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체제를 미워한 것이었다. 말로는 이 조그만 일들이 모두 사병들을 착취한 나쁜 짓이므로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비리를 저지르고 이웃을 괴롭히게 하는 체제를 미워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정색을 하고 내가 말했다. "서 병장님, 그런 일 안 하시기를 저는 바랍니다. 여기 걸리는 사람들 중에 혼 나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 적혀 있는 일들은 적절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 병장님 생각이 옳은 것은 인정합니다. 글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꼭 제출해야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고맙네. 내가 뭘 더 바라겠는가?"

그리고 며칠 동안 우리는 틈만 나면 그 일에 매달렸다. 메모만으로 알아보기 힘든 맥락을 그에게 확인받기도 하고, 과연 제출해야 할지 토론도 했다. 내가 집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는 나를 철저히 보호해 줬다. "취사장 한 명 빼고 집합"에 제대를 한 달 앞둔 그가 나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사나흘 걸렸던 것 같다. 에이4 용지에 빽빽하게 열네 장인가? 이 작품이 아직도 어느 문서창고에 보관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워낙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문서였으니까.

서 병장이 제대할 때 나는 말년휴가 나와 있었는데 그가 보충대에서 전화해, 자기 나가는 날 용산에서 보자고 했다. 역 앞에서 만나니 씩, 특유의 웃음을 짓고 "김 병장님, 이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동안 죄송했습니다." 한바탕 웃음을 나눈 다음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보이며 "이걸 이제 집어넣을 참인데, 혼자서는 용기가 날지 자신이 없어서 김 병장을 불렀어요." 한다. 나는 "안 넣으셔도 됩니다. 그런 기록을 모으고, 또 소원수리를 작성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 얘기했지만 그는 더 이상 말 없이 뚜벅뚜벅 소원수리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넣었다. 돌아서서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아~ 이제 정말로 제대한 기분이다!"

 

서 병장이 제대하고 두 달쯤 지나 내 제대가 두 달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난 데 없이 행정반으로 오라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들어가 보니 행정관 자리에 사복 하나가 앉아 있는데, 눈매가 날카롭고 예리한 인상이었다. 앞에 앉으라 하더니 책상 위의 종이를 돌려 내게 보여주며 묻는다. "이거 김 병장 글씨가 맞습니까?" 서 병장의 소원수리를 복사한 것이었다.

나는 즉각 눈을 들어 그 사람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나랑 좀 갑시다." 행정반 앞에 대 놓은 찦차에 올라 바로 헌병대로 갔다. 헌병 참모의 찦차였다.

헌병대 행정반에 들어가니 헌병대 대원은 아무도 없고 또 한 사람 사복만 있었다. 둘이서 소원수리 작성한 경위를 확인하는 데 얼마 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언성 높이는 일도 없었다.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말로 회견 같은 취조를 끝내고 혼자 돌아가라고 한다. 정문을 걸어나오는 내게 위병이 "다~안결!" 경례를 올리는데,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부대에 돌아가니 간부들은 모두 똥 씹은 표정이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취사반에 돌아가 하던 일 하고 있는데, 행정반 사병 하나가 와서 헌병대 갔던 일을 묻다가 귀뜸해준다. 왔던 사복들이 "CID"라고. 우와~ 전설처럼 듣기만 하던 그 CID? 그 뒤에 들은 얘기로 보면 CID인지 뭔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쎈 데서 나오기는 나왔던 모양이다.

저녁 시간에 권중위가 나 보고 더플백을 싸라고 했다. 내일 아침 전출 간다고.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 하는데 자기가 덧붙인다. "철책선 안에 한 번 들어가서 박박 기어 봐!"

이튿날 새벽, 퇴실환자 두엇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연대 의무중대로 전출 갔다. 행정반 앞에 앰뷸런스가 서니 최 병장이 나오다가 더플백 내리는 나를 보고 묻는다. "김 병장님 오셨어요? 전출병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 놈이예요?" 연대 의무중대 행정병은 초년에 상급부대인 사단 의무대로 전령 다니는 게 보통이다. 상급부대랍시고 거만하게 구는 일이 많아서 티꺼우니까 쫄병만 보내는 거다. 그런데 나는 마주치면 점잖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편이라서 이 친구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다. 최 병장은 나보다 두어 달 아랜데, 당시 자기 부대에선 최고참이었다.
내가 태연하게 "전출병? 나야, 나." 하니까 놀라 자빠진다. 그 날 저녁 예정돼 있던 신고식이 '환영의 밤'으로 둔갑해 한 잔씩들 거나하게 했다. 상급부대라면 괜히 티꺼워하는 기분에다가, 하급부대로의 전출병이라면 꼴통일 테니까 군기를 확실히 잡아야겠다고 별르고들 있었는데... 김 병장님과 얼마동안이라도 같이 지내게 되어 영광이라고 고참들이 야단들을 하니까 졸병들도 덩달아 흥겨워들 한다. 하기사 하룻저녁이라도 신고식보단 '환영의 밤'이 더 좋으니까.

그곳 중대장은 군의관 중에 드문 터프가이였다. 다음날 나를 불러놓고 간단명료하게 얘기한다. "나는 네 말년 생활을 최대한 편안하지 못하게 하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 그래서 너를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보내려 한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민통선 안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의 의무지대로 그 날로 건너갔다. 지대장인 군의관은 내가 온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으며 "김 병장 여기서 보니 반갑구먼. 사고만 치지 말고, 소원수리만 쓰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랑 잘 지내게. 아 참! 자네에게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구보를 시켜주라는 권 중위의 부탁이 있는데, 내가 직접 살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대에 내보내는 것도 쫄병들이었다. 너댓 명 지대원 중에 최고참이 군대생활 절반쯤 한 친구였다. 중대 본부의 왕고참들이 엄명을 내려 놓기도 했겠지만, 나 같은 풍운아와(CID 조사까지 받은!) 몇 주일 함께 지내는 것이 지루한 군대생활에 좋은 양념이기도 할 것이어서, 나는 지대장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특별한 신분으로 특별한 대접을 꼭 받아서만이 아니라, 지대원들이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나는 너무 좋았다. 사람 수가 적은 데라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앞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작부터 이런 데서 근무했으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대한 몇 달 후 사단 작전처에 근무하면서 나랑 친하게 지내던 P가 휴가 나온 길에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을 때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 참모총장이 전 육군 모든 부대로 내려보낸 지휘서신에서 서 병장 소원수리 내용과 상황을 적시하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지휘관들이 각별히 유의하라 했다고.

서 병장과 나,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도 진보와 보수 사이의 한 차례 접촉사고였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
 

예상 외로 알뜰하게 읽어 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열받네요. 열받은 김에 열심히 쓰렵니다.

군대 얘기. 여성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 그냥들 지나가셨겠지만,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일을 빼놓을 수도 없으니... 조회수 절반으로 떨어질 거 각오하고 적어 놓겠습니다.

 

------------------------------------------------

 

72년 대학 졸업 무렵 병력 자원에 대한 베이비붐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현역 징집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75년 입대할 무렵에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체에 대해서는 도무지 자신이 없던 내가 현역으로 가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가게 됐다. '신의 아들'이 아니라 '유력인사 자제'였기 때문이다. 병무 비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심해지자 당국은 대책이랍시고 '유력인사 자제'를 분류, 신검에서 배치까지 최대한 불리한 결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이 '유력인사'에 국회의원, 장-차관이 들어간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 대학교수들을 넣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덕분에 교수 어머니를 둔 내가 치이게 된 것이다.

형들의 학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병역문제에도 얼마간 신경을 쓰셨다. 큰형이 66년 대학 졸업 직전에 해군에 입대한 것은 든든한 빽을 믿어서였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 초열 여사의 부군이 함대사령관으로 계셨다. 당시에는 함대가 한국함대 하나뿐이었다. 형은 사령관 숙소 당번병으로 군대생활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69년 제대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체수가 작던 작은형은 68년 3학년때 체중미달로 면제받자마자 학부 편입으로 유학가 버렸다. 당시 체중미달 기준은 45킬로였는데 얼마 후 40킬로로 강화되었다. 형의 체중이 45킬로가 안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병무행정 가닥으로, 한 번 재 보고 미달된다고 바로 면제 결정을 바라기 힘들었다. 면제 결정이 확실히 나오도록 뭔가 기름칠이 있었던 것 같고, 당시로서 드문(비용도 많이 드는) '조기유학'을 서두른 것도 병역 문제가 다시 제기될 위험을 의식한 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형들의 병역 문제 처리를 보아 온 나로서는 내 일도 어떻게 "해주겄지~" 하는 기분으로 졸업 때까지 연기하고 있다가 막상 졸업을 하려니까 막막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대부분 방위로 빠졌고, 빠지는 데 얼마 들더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주고받는데, 나는 '유력인사 자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2년간 안식년(당시에는 그런 이름의 제도가 아니었지만)을 얻어 외국에 나가셨다. 일단 대학원에 들어가 2년 더 연기하고 보기로 했다.

74년 석사를 마치고 바로 훈련소에 갔다. 훈련소 신검에서 즉일귀향인가? 판정을 받고 돌아와, 이만하면 현역 복무를 하게 되지는 않겠지, 하고 지내다가 결혼까지 했다. 박사과정 입학 수속도 밟았다. 그러고 75년 3월 다시 영장을 받아 대구 성서의 강철사단인지 양철사단인지 훈련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6주 훈련을 받은 얘기는 훈련소 생활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딱히 보탤 만한 게 없다. 대단히 힘들고, 때로 무지 괴로웠지만, 견뎌냈다. 다들 함께 겪는 일이라는 인식이 큰 몫을 했다. 훈련소를 나와 보름만에 영창에 갔을 때는 그런 인식이 없어서 더 괴로웠을 것이다.

'유력인사 자제'는 병과 훈련도 없이 전방 사단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성서를 떠난 사흘 후 춘천의 군단 보충대를 거쳐 화천의 사단 보충대에 도착했다. 보충대 막사 앞에 신병들이 열을 지어 서서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막사 문이 열리더니 작대기 셋 짜리가 모자도 안 쓰고 슬리퍼를 끌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오더니 신병 대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놀고 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나를 툭 치고 "뭐 이런 고문관까지 다 왔어?" 야지도 놓았다. 그러고 막사에 도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문을 빼꼼히 열고 "야! 한 놈 일루 와! 너!" 외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넷! 이병 김기협!" 외치고 뛰어들어가려니 "더플백도 가져와!" 하는 것이었다.

보충대 행정반에 들어가 문을 닫고 돌아서려니 지금까지 거들먹거리고 있던 차 상병이 내 손을 부여잡고 굽신거리며 "선배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4년 후배라면서. 서류를 보고 선배님 오시는 줄 알았는데, 다른 신병들 이목 때문에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단 안에서는 아무 데라도 가고 싶으신 대로 보내드릴 테니 골라잡으라고 한다.

차 상병은(마에가리지만) 사람이 똘똘한 데다 쩐도 적당히 쓸 줄 알아서 제 몸도 편하게 지내고 (육군 사병 치고는) 보충대 밖에까지 꽤 영향력을 가진 재간둥이였다. 사단장 숙소당번 말고는 아무 거나 찍으라고 하는데, 알아야 면장질도 한다고, 뭘 알아야 찍고말고 하지. 어벙한 꼴을 보고는 차 상병이 그 사이에 들어온 병장 하나와 토론을 벌인다. 사단 사령부에선 저 형님처럼 점잖은("어벙한"이란 뜻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분이 적응하기 힘들 거고... 떨어져 있는 직할대가 좋을 것 같은데... 참, 의무중대에 전령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서 그 날로 나는 의무중대로 갔다. 전령 조수가 뭐하는 짓인지도 잘 모르면서.

전령은 상급 부대와의 사이에 문서를 전달하는 직책이었다. 의무대에서 작성한 문서들을 모아 사령부로 가져가 해당 부서에 접수시키고 의무대로 올 문서들을 모아 가져오는 일이다. 한 직책을 두 사람이 맡으면 상급자를 사수라 하고 하급자를 조수라 한다. 의무대 전령을 오래 맡아 온 강 병장의 제대가 석 달 후로 다가와 있어서 인수받을 조수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의무대에 가서는 그런 대로 쉽게 적응이 되었다. 만 25세가 넘어 박사과정 입학해 놓은 쫄병을 신기해 하는 분위기가 별난 놈 갈구고 싶어 하는 일부의 욕구를 대충 가로막아 준 셈이었다. 사수 강 병장은 연세대 재학 중에 입대한 친구였는데, 워낙 점잖은 성품이고, 며칠 지내다가 무슨 얘기끝에 자기 친구가 내 친구의 동생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를 좀 어려워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강 병장이 며칠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가르쳐준 다음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강 병장은 오랫동안 갈구해 온 말년의 편안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일이 터지고 내가 영창에 가는 바람에 강 병장이 다시 전령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시경 사령부로 출발하려는 참에 환자계가 이등병 하나를 데리고 왔다. 퇴실하는 (군단에는 병원이 있고 사단 의무대에는 '병실'이 있기 때문에 환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입실', '퇴실'이라 했다.) 군악대 환자를 사령부 가는 길에 데려다주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때까지 이등병이지만 마에가리 일등병을 달고 다니고 있었다.

사령부 앞에서 함께 버스를 내린 뒤 군악대 막사를 가리키며 "저기가 군악대지?"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을 보고 내 볼일 보러 갔다. 점심 후 마지막 볼일을 보고 버스정류장에 나와 있는데 찦차 하나가 지나가기에 군기 충만하게 "다~안결!"을 외쳤다. 그런데 그 차가 서더니 말똥 하나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전령들에게 외친다. "여기 의무대 전령 있어?"

내가 나서자 펄쩍 뛰어내려 아무 말 없이 나를 뒷자리에 태우더니 그냥 고고씽이다. 그러더니 이 차가 헌병대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하고 영창에 들어갔다. 영창 근무자들에게 한바탕 혼이 나면서 한 마디씩 주워모아 보니, 아침에 데려다준 군악대 신병이 그 길로 막사에 들어가는 대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가 검문소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탈영방조범"으로 붙잡혀온 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병에게 '인솔'을 맡긴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헌병 참모가 인솔을 내게 맡긴 자들의 책임을 묻자고 주장하다가 위에서 덮어버리니까 홧김에 눈에 띠는 대로 나를 '납치'해 온 것이었다. 의무대에서도 꿀리는 데가 있으니까 구명에 나서지 못하고, 그냥 그넘한테나 화를 푸시라고 맡겨놓는 상황이 되었다.

영창에 넣는 데는 사법적 입창과 징계성 입창이 있었다. 나처럼 뚜렷한 혐의도 걸지 않고 "버릇 고치도록" 집어넣는 징계성 입창은 아마 원천적으로 불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정당한 입창자들보다 징계성 입창자들에게 가혹행위가 더 심했다. 사법적 입창자들은 다음 단계에 더 높은 곳에서 불평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1주일 동안 영창에서 겪은 가혹행위는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심한 것은 점심을 굶긴 것이었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부터 반성을 돕기 위해 징계 입창자들은 점심을 생략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다른 가혹행위는 신체의 고통을 불러오는 것 뿐인데, 이 조치는 입창자들을 생사의 기로로 내몬 짓이었다.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더니, 헌병 참모의 미움을 받는 나 때문에 영창 동기생들의 고생이 더했다. 그래도 그들이 내게 화풀이를 별로 하지 않은 데서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키울 수 있었다.

훈련소보다 영창이 더 괴로웠던 이유를 그 후 간간이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훈련소는 누구나(적어도 많은 사내들이) 겪는 것인데, 영창은 너무나 재수없는 곳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는 가혹행위의 의도성이다. 훈련소에서는 기본목적이 훈련에 있었다. 단편적인 일탈행위는 있을지언정, 원칙적으로는 훈련의 목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가혹행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창에서 징계성 입창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헌병 참모 이하 헌병대 전체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저지르는 조직적 행위였고, 이것이 윗선에서까지 묵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소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했다. 영창에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증오까지 하게 되었다. 영창은 기껏 혐오밖에 할 줄 모르던 내게 증오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영창에서의 고생은 의무대에서 간부들과 고참들의 동정심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덕분에 제대를 두 달 앞둘 때까지는 다시 헌병대 신세를 지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입대 두 달만에, 그리고 제대 두 달 전에 헌병대 신세를 졌다는 것도 참 공교로운 일이다. 제대 말년의 헌병대 신세 얘기도 다음에 한 번 풀어야겠다.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 1968  / 09-10-28  (1) 2009.12.16
제대 말년의 봉변 1977  / 09-10-24  (1) 2009.12.16
사학과로의 전향 1968  / 09-10-22  (2) 2009.12.15
첫 키스 1970  / 09-10-21  (1) 2009.12.15
중딩 시절 1962~65 (2)  / 09-10-20  (0) 2009.12.15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