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6년 동안 집에서 학교까지 가까우면 5분, 멀어도 10분 안 걸리는 데 살았는데, 통학 거리가 엄청 늘어났다. 1년에도 수백 번을 걸아다니다 보니 발짝 수를 가지고 거리를 재 본 것도 여러 번인데, 약 2.7 킬로미터로 기억한다. 처음 몇 차례는 고3인 큰형이 중1짜리 동생을 데리고 가며 지름길을 가르쳐주는 아름다운 광경도 있었지만, 혼자 다닐 만하게 되어서는 형을 먼저 보내고 슬금슬금 다니게 되었다.

"슬금슬금"이라고 하지만, 시간을 단축시켜 보려고 경보선수 흉내를 내고 다녔다. 이런 기록에 집착하는 것도 내 성격상의 한 가지 문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에 매여서... 학원사 백과사전을 외우려고 들 때부터 분명히 드러난 병폐다. 그래도 덕분에 걷기 취미는 지금까지 누리고 있고, 성장기의 건강에도 좋았던 것 같다. 비슷한 병폐를 가진 넘이 이준구였다. 그 친구랑 마주치면 무조건 전력질보였다.

온 길에 중고딩들이 깔리는 시간인데, 가다 보면 같은 방향 사는 또래들과 많이 마주치게 된다. 다른 반 애들은 등교길에서 안면 트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 두드러진 애가 하나 있었다. 원남동 모퉁이를 돈 뒤에 길 건너오는 걸 가끔 마주치던 넘... 홍석현이었다.

합격자 발표 때 어른들 주고받는 얘기 중에 윤보선 아들도 떨어졌다더라, 홍아무개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붙었다더라, 하는 얘길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홍아무개가 누군지도 몰랐고, 원남동 네거리에서 마주치던 홍석현이가 그분 아들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냥 보니까 무지 잘난 애였다.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행동거지도 또래들보다 으젓했고, 말 한 마디 해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느낌이었다. 그 친구랑 마주치면 괜히 재수 좋은 기분이었다.

버스는 부득이할 때만 탔다. 집에서 명륜동 정류장까지 700미터, 안국동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600 미터, 버스를 타도 어차피 절반은 걸어야 하니 버스를 잘 타도 겨우 10분 절약이다. 더구나 그 시간대엔 버스가 꽉꽉 차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게 많아서 잘못하면 걸어가는 것보다 더 늦기도 한다. 그러나 걸어가서 지각이 분명할 때는 운을 버스에 걸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시절 만원버스... 몇 번 타면서 요령이 생기고는 가급적 고딩 누나들, 될 수 있는 대로 덩치 큰 누나들 곁으로 붙게 되었다. 안전하니까. 쬐끄만 중딩이가 늑대들과의 사이를 가로막아 주는 게 반가워서 만원버스 안에서 일으키기 쉬운 짜증을 고딩 누나들은 대개 참아주었다. 그리고... 누나들은 감촉도 좋았다. 중3 이후로는 아무리 지각이 분명해도 등교길에 버스를 타지 않게 되었다. 덩치가 커지니까 누구에게도 인내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중학교 수업은 점심 전에 네 시간, 점심 후에 두 시간, 하루 여섯 시간이었다. 세 시쯤 끝나 미술반에 가면 내 세상 같았다. 서로 놀리기도 하고 골리기도 하며 지내지만, 그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형제간과 같은 사이였다. 최 선생님이 키워주신 분위기 덕분이었다고 지내놓고 나서는 생각되는데, 인간적 존중이 철저한 곳이었다. 선배가 후배 혼내주는 거야 미술반 밖과 다름없는 당시 풍속이었지만, 변태적 재미를 위해 남을 괴롭히는 짓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교실 생활은 대개 지루했고, 가끔 괴로웠다. 힘도 약하고 말도 잘 못하고 공부도 별로인 나 같은 아이는 친구도 별로 사귀지 못하고, 그저 미술반 갈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성적은 60명 중 20등에서 40등 사이를 완만하게 오락가락했다. 10등 안쪽의 우등생들과 50등 바깥쪽의 건달들을 모두 부러워하며 지내는 '말 없는 다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2학년이 되면서 가끔 발작적으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일 화려한 무대는 어느 날 주산 시간에 오늘은 암산을 할 테니 주판을 집어넣으라고 했을 때였다.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얻은 사람 손 들라고 해서 결과를 확인하는데, 갈수록 큰 숫자로 빠르게 하니까 손 올라가는 게 줄어들다가 중반쯤 되어 나 혼자만 남았다. 선생님도 놀라운 기색을 보이며 계속 등급을 높여 가는데 계속 혼자서 정답을 대니까 다른 애들한텐 구경거리가 났다. 그러다 한 문제 조금 자신 없는 대로 답을 얘기했다가 선생님이 틀렸다고 하자 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문제 잘못 읽어주신 거 아니냐고. '평민 영웅'의 맛을 그 때 처음으로 보았다. 늘 잘 나가던 아이가 아닌, 자기들 중 하나가 두각을 나타내니까 그렇게들 열광하는 것이었다. 그 한 시간을 편하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도 있었을 거고.

다른 애들이랑 다른 식으로 시간을 보내온 결과의 한 모퉁이가 어쩌다 학과 중에 삐져나온 것이었다. 골목에서 뛰어노는 데 잘 붙여주지 않으니까 혼자 앉아서 속셈을 하는 '취미'가 있었다. 2의 제곱이나 3의 제곱을 속으로 마냥 거듭해서 숫자가 머리속에서 가물가물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방해가 없으면 2의 30승이나 3의 20승 정도까지 보통 올라가곤 했다. 몇십억대 숫자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아이한테 몇만대의 암산은 정말 '아이들 놀이'였던 것이다. (이 취미를 군대 초년까지 지킨 생각이 난다. 그때는 2의 100승까지 올라갔다. 볼펜과 종이를 가지고.)

이 숫자 감각 때문에 과학자를 향한 나의 꿈은 더욱 굳어졌다. 말도 잘 못하고 이해력이나 상상력도 변변찮은 아이에게 뭔가 '꿈'이라고 가질 수 있는 것이 과학자 뿐이었다. 훗날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들들을 과학자의 길로 유도하려고 꾸준히 애쓰신 것이다. 두 분의 경험을 통해 한국의 상황이 인문학을 제대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절감하셨기 때문에 자식들이 '안전한' 방면으로 나가기 바라신 것이었다. 그래서 과학 방면으로 조금만 적성을 보이면 그것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나는 숫자 가지고 노는 능력 때문에 거기 딱 걸려서, 다른 길은 생각도 못해 보게 되었다.

혼자만의 취미생활이 학과 중에 삐져나온 모퉁이는 한둘 더 있었다. 우선 한문. 그때는 신문에도 한자를 쓰고 사람들이 한자에 지금보다는 훨씬 더 익숙할 때였지만, 초딩 때 <현토 삼국지>를 떼고 올라온 중딩은 별로 없었다. 한문 시간에 좀 어려운 한자 써볼 사람 있냐고 할 때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내 독차지였다. 영어도 중딩 수준과 전혀 다른 어휘력과 해석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문법 중심의 중딩 과정에서는 별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형들과 BOAC, SAS, IHI 같은 회사 이름이 뭐의 약자인지 맞추기 놀이를 하던 실력을 중학교 교실에서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어 성적도 별로였다. 고등학교 올라가 영자신문반원을 학년에서 세 명 뽑는 데 뽑히고 나 자신이 놀라는 것은 뒷날의 일이다.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초딩 때보다 크게 늘어나면서 가정생활은 줄어들었다. 저녁 식사 후 형제들이 어울려 노는 시간은 그래도 꽤 됐는데, 내가 형들 쪽으로 붙는 바람에 영아가 좀 쓸쓸하게 됐다. 내 초딩 말년부터 형제들 사이에선 바둑이 유행했다. 달력 뒷면에 사인펜으로 바둑판을 그려놓고 검은색과 흰색 단추를 한 상자씩 사달라고 해서 큰형이 학교에서 배워온 바둑을 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3형제가 다들 웬만한 적성을 보여서 몇 달 안 되어 3급 안쪽에서 서로 어울리게 되었다. 이 놀이에 영아가 적응 못한 것이 고독의 길로 접어든 가장 큰 고비였던 것 같다.

내가 2학년 올라갈 때 큰형은 서울공대로 진학하고 작은형은 경기고로 진학했다. 작은형도 미술반에 합류, 쉽게 적응해서 학교생활도 얼마간 공유하게 되었는데 큰형은 대학생이 되면서 얼마간 거리가 생겼다. 영어 만화책과 잡지는  공유를 계속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줄어들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중학교로 갈라진 단계에서 3형제의 제일 큰 공유물은 바둑이었다. 학교 가면 미술반, 집에 오면 바둑과 만화책,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요즘 그 시절을 가끔 떠올리는 것은 영아를 볼 때다. 오빠들 중 제일 가까웠던 나랑도 거리가 커졌던 것이 걔한테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도 중학생이 되면서 내게는 새로 생긴 것이 많았고, 그것이 영아와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걔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별다른 내용이 아닌데도 잊어지지 않고 떠오르곤 한다. 내가 3학년 될 때 영아는 입시에 떨어지고 이대부중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아마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공주할머니도 그 무렵까지 우리랑 같이 지냈다. 연세가 높아져 기력은 줄어드시는데 집은 커졌으니 부엌일 해줄 분들은 새로 들어왔다. '남복 아주머니'와 '나영이 누나'가 번갈아 오랫동안 살림을 맡아주었다. 할머니, 아주머니, 누나, 지금 생각하면 다 고마운 분들인데, 그 분들 오고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나는 과학자 될 꿈만 꾸고 있었다. 삭막한 세월이었다.



Posted by 문천
2009. 12. 15. 09:21

며칠 전부터 시간에 대한 의식이 자리 잡으시는 것 같다. 회복이 덜 되신 상태에서 이 세상과의 접촉은 한 토막 한 토막 꿈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지. 정신 드셨을 때 인식과 사고 능력은 상당한 수준을 보이셨지만, 오래 지속 못하고 몽롱한 상태에 도로 빠져드셨다. 20년 전 내가 타이포이드 진단을 빨리 받지 못해 십여 일간 코마 상태를 겪던 때와 비슷한 것 아닐지 추측해 본다.

그런데 이제 정신 드신 상태가 정상인과 큰 차이 없을 만큼 길게 지속되시면서 사건들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차츰 인식하시는 것 같다. 어제, 금강경 강독이 길어져 평소보다 한 시간쯤 더 앉아 있던 끝에 이제 일어설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생각나셨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오늘은 늦었구나, 일하러 가야지?"

불경은 워낙 익숙하신 것이라 쉽게 접근이 되시는 것 같다. 그저께는 금강경에 앞서 반야심경을 내가 먼저 한 차례 읽은 다음 손수 읽으시겠냐고 권했더니 서슴없이 낭송을 하시는데, 역시 금강경보다 훨씬 쉽게 독경의 틀을 되살려내신다. 한 차례 읽고서 고개를 갸웃갸웃 하시는 것이 '더 잘 외울 수도 있는데,' 하는 눈치시기에 다시 한 번 읽으시기를 권하니 얼른 응하신다. 역시 첫 번째보다 잘 외우신다.

금강경을 놓고는 약간의 토론도 있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수다원이..."로 시작하는 장 읽기를 마치는데, "야, 너무 어렵다. 무슨 뜻인지 영 모르겠다." 하신다. "어머니, 요 앞쪽은 그런 대로 무슨 얘긴지 알 만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발판으로 뒤쪽에서 '아란나' 얘기 한 것은 저도 캄캄해지네요." 하니까 알아들으시겠다는 듯이 끄덕이신다. 내가 이어 "앞쪽에서 쉬운 얘기 한 게 뒤쪽의 어려운 얘기 끌어내려고 발판을 놓아준 것 같은데, 앞쪽도 알 듯 말 듯하니 어쩌겠습니까? 우리 수준이 그 정돈가 봐요." 하니까 더 크게 끄덕이신다. 합리적인 얘기는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초월적인 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설명드리는 정도는 석연하게 이해를 하시는 것이다.

오늘은 <밖에서 본 한국사>를 가져갔더니 전번에 보실 때와 반응이 다르시다. 물론 처음 보시는 책이라 생각하신다. 그러나 왜 이 책을 썼느냐, 무슨 얘기를 담았느냐, 물으시는 데는 다년간 논문 심사 하시던 풍모가 되돌아와 있다. 펼쳐서 읽으시려다가 "야, 글자가 너무 작다." 하시기에 펼쳐 보여드리면서 머리말을 읽어드리니, 앞 부분 두 쪽 가량은 문장 하나 끝날 때마다 끄덕끄덕하시다가 뒤쪽으로 가면서 다소 현학적인 얘기가 나오니 시들해지신다.

그저께는 아내도 일을 쉬어 점심때 함께 갔다. 전에 비해 며느리 대접이 많이 좋아지셨다. 아마 전에는 과거의 기억을 상당히 갖고 계신 배경 위에서 기억이 많지 않은 상대가 작게 보이셨던 것이, 지금은 배경이 더 흐려졌기 때문에 지금 나타타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며느리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누구든 대하실 때 삐딱하게 보는 먹물적 시각이 곁들일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밝고 따뜻한 면이 든든하게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유머 감각은 많이 살아 계셔서 다행이다.

어제 갔을 때, 세배 드릴 형편은 아니고, 짐짓 "어머니, 경하 드리옵니다." 점잖게 말씀드리니 어머니도 표정을 점잖게 가다듬으시고 "뭘 경하한다는 건가?" 물으신다. "오늘로 어머님께서 아흔 살이 되셨습니다." 하니까 점잖은 기색이 싹 날아가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눈을 꿈벅꿈벅하시다가 "아흔? 내가? 정말?" 하신다. "네, 어머니, 깜짝 놀라실 일이죠?" 하니까 엄숙한 표정이 되어 한참 저 멀리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내게로 얼굴을 돌리시고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물으신다. "그래서 뭐 해줄 거야?" 순간 당황했다가 농담 모드로 얼른 돌려 "어머니, 업어드릴께요!" 했더니 "뭘 해줘?" 물으시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으시고 목청을 높여 "징-그-럽-다!" 외쳐 방 저쪽의 간병인들까지 다 돌아보게 만드신다. 눈과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으신 채로.

그저께 아내와 병원에서 나와 전에 계시던 자유로병원에 갔다. 아내가 조 여사에게 해자부리(해바라기씨) 등 준비해 간 간식거리를 전해 주니 더할 수 없이 기뻐하고 감격하더란 얘기는 나오는 길에 들었다. 살펴드리고 있는 환자의 보호자들도 챙겨주는 이가 없는데, 떠난 분들이 잊지 않아 주는 것이 고맙다고. 아내가 조 여사랑 얘기하는 동안 나는 당직으로 나와 있던 간호부장에게 병원 사정을 설명받고 한 차례 둘러보았다. 다시 오신다면 잘해 드리겠다고, 좋을 것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여기 다시 모시기는 힘들 것 같다. 여기 계실 때도 지나친 능률주의 때문에 간병인과 환자들을 쓸 데 없이 바꾸고 옮기는 폐단이 불안했는데, 그 문제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계신 병원을 어떻게든 잘 구워삶아 거기서 가급적 편하게 계시도록 해야겠다. 혹시 회복이 아주 좋으시면 진인선원 같은 불교계 요양원도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료시설 없는 곳은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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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5. 09:16

한 주일쯤 전에 관찰한 한 가지 특이사항을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좀 더 관찰한 뒤로 미뤄둔 것이 있다. 누우신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처들어 뭔가 짚어나가는 시늉으로 입으론 뭐를 웅얼웅얼하신다. 가만 들어보니 수를 세시는 것이고, 그 대상은 전등, 환풍기, 스프링클러 등 천장에 붙어있는 동그라미들인 것 같다. 내가 천장으로 눈길을 돌리니까 내게도 들리도록 중얼거리신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헷갈리네."

사흘쯤 전에는 식사를 위해 윗몸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방안을 저끝까지 둘러보시며 또 뭔가 헤아리신다. 이번에는 침대 갯수다. 내가 따라서 쳐다보려니까 말씀하신다. "야, 저쪽으론 몇 개냐? 여기선 잘 안 보이네." 그 줄에 네 개라고 말씀드리니 뭔가 성이 안 차시는 기색으로 끄덕거리셨다.

그런데 어제저녁 병실에 들어서며 보니 윗몸을 세우고 앉아계신 거야 식사 준비겠지만, 간병인들이 둘러서 있고 어머니 얼굴에 활기가 대단하시다. 가만 보니 손에 펜을 들고 계시고 식판 위엔 종이가 펼쳐져 있다.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시곤 반색을 하신다. "야! 너 잘 왔다."

다가가 펼쳐진 종이를 보니 "7+4+2=B"라고 적혀 있다. 이게 뭔가 궁리하고 있는데 어머니 말씀, "네가 셈본은 썩 잘하지?" 이제 파악이 됐다. 침대 수를 파악하고 계신 것이다. 창가를 따라 7개, 반대편 벽을 따라 네 개, 그리고 어머니 계신 이쪽 옆벽으로 두 개, 그리고 "B"로 보였던 것은 "13"이었다. 아마 앞쪽은 여사님 어느 분이 적어드리고, 답은 어머니 친필이어서 좀 이상하게 보인 것 같다. 아무튼 대단하시다. 이제 그 정도 덧셈도 하시고, 숫자를 쓰기까지 하신다.

이번에 의식을 되찾으면서 새로 태어나신 것과 같은 측면도 있을 것이다. 살아오시는 동안 쌓여 온 기억이 상당부분 남아는 있지만 일반 사람들과 같은 연속성이 없다. 8개월간 지내신 혼미상태가 그 이전과 지금을 가르는 또 하나의 단층이 되었을 것이다. 1년 전까지의 당신 모습이 기억에 떠오르시더라도 완전한 '나'가 아닌, 또 하나의 객체처럼 인식되시는 면이 있을 것 같다.

'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지 않다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 또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편안하게 대하실 때는 아들로 인식하시는 것 같지만, 뭔가 요구가 떠오르실 때는 경어체로 바뀌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간병인들에 대한 친밀감과 의존성이 크신 것도 이번에 의식이 돌아오신 후의 경험이 그 이전의 기억과 다른 차원의 '현실'로 인식되시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이 명료해지고 지속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새 인생의 틀이 잡혀가시는 것 같다. 천장의 동그라미 숫자, 방 안의 침대 숫자를 파악할 의욕은 공간을 파악하려는 욕구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시간의 파악 욕구도 뒤따라 드러나지 않을지? 늙으신 어머니 모시는 데 아동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 것 아닌가?

나에 대해서는 과거의 기억도 크신 데다가 새 인생 속의 역할도 뚜렷해서 그 사이의 연결도 안정된 틀이 만들어져 가는 것 같다. 아내에 대해서는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으신 것 같다. 근년의 경험은 입력도 불완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잘 자라나시는 것 같다. 그저께 정 교수의 논문을 검토하느라고 내가 바빠 아내가 혼자 가 뵈었는데, 며느리 대접이 차츰 좋아지시는 모양이다. 아내가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많이 웃었다.

"당신 어머님 완전 양면패예요!" 하고 아내가 웃기에 무슨 말인가 물으니, '양면패'란 상황에 따라 이쪽 면을 내놓기도 하고 저쪽 면을 내놓기도 하는 야바우를 뜻하는 것으로, '기회주의'를 풍자하는 말인가 보다. 간병인 한 분이 어머니와 아내 곁에 와서 "할머니, 아들이 더 고와요, 며느리가 더 고와요?" 묻는데 못 들은 척 대꾸를 않으시기에 재차 "며느리가 아들보다 더 곱죠?" 하니까 "지금은 그렇게 말해야겠지." 하시더라고. 그 말씀에 다시 "아드님이 왔을 때 물으면 아들이 더 곱다고 하시겠죠?" 하니까 "그땐 그래야겠지." 또 "두 분이 같이 왔을 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하니까 "그땐 둘이 똑같이 곱다고 해야지." 하시더란다.

어머니가 지금 상태에서도 꾀 부리시는 것을 보면 참 교활한(!) 분이시라는 아내 의견에 동의해 마지 않는다. 금강경을 더 읽어달라고 지시해 놓고 듣다가 눈을 감고 주무시는 시늉을 하신다. 읽던 장을 끝내고 책을 치우려 하니까 눈을 살짝 뜨고 "나 자는 줄 알았지? 메롱!" 하시는 표정. 떠나기 전 뽀뽀 신청에는 유난히 완강하게 거부하는 척 하시다가 세 번째 부탁에야 비싸게 양보. 방을 나오는데 뒤에서 "야!" 소리쳐 부르시고는 "인사도 안 하고 가냐?" 하시기에 어리둥절했더니,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니 너도 인사 잘 해야 된다." 간병인 여사님들 얘기다. 마침 강 여사가 방으로 들어오던 참이라 거기 대고 허리 굽혀 정중하게 인사하니, 나보다 두어 살 아래인 것 같은 강 여사,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어머니 하명 사항을 알려드렸더니, 깔깔 웃으면서도 감동먹은 눈치다. 이런 분을 교활하시다고 하는데 반박할 길이 어디 있겠는가!

정 교수 논문 얘기가 나왔는데, <역사 앞에서> 재편집을 맡은 정병준 교수가 그 작업을 위해 쓴 논문 "김성칠의 삶과 글" 초고 보내준 것을 그저께 받아 살펴본 다음 어제 학교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 일하는 태도와 방식 모두 정말 맘에 든다. 덕분에 오는 6월에는 <역사 앞에서>의 새 판이 예정대로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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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