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8. 10:24

외삼촌, 외숙모와 이모가 벼르고 벼르다가 찾아오셨다. 큰형이 다니러 온단 말씀을 듣고 큰형도 볼 겸 어제로 날을 정해 찾아들 오신 것이다. 외삼촌이 80세, 외숙모와 이모가 76, 77세. 어머니 손아래라서 잘 실감이 나지 않아 그렇지, 막상 생각해 보면 나이 드실 만큼 드신 노인분들이다. 11시 반에 전철역으로 모시러 나갔는데, 용인 사는 외삼촌 내외는 그렇다치고, 여주 사는 이모는 새벽 6시반에 출발하셨단다.

얼마 전 한 차례씩 전화 통화들을 하셨기 때문에 웬만했지, 지난 늦가을 기력이 제일 떨어지셨을 때 와 뵌 데 비하면 완전히 '살아 돌아오신' 누님이요 언니시다. 이렇게 한 차례 대면하고 나면 이승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시지만,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다. 병원 부근의 중국집에서 형이 짐심 대접을 한 뒤 전철역으로 다시 모셔드렸다.

이모님이 내리면서 봉투를 하나 안겨주신다. 오실 때마다 크든작든 봉투 하나는 꼭 안겨주시는 이모님. 자식 없이 이모부님 먼저 보낸 지 십여 년 되는 이모님을 우리가 전혀 살펴드리지 못하는 게 생각날 때마다 안스러운 일인데, 거꾸로 이렇게 받는다는 게 정말 염치가 없다. 그래도 언니 위하시는 뜻이니 따를 수밖에.

큰형은 하루를 병원에서 살았다. 아침 먹고 데려다준 뒤 집에 돌아와 있다가 점심 때 아내와 함께 노인분들 모시고 가 점심식사 한 뒤 혼자 병실로 돌아갔다. 저녁때 가 보니 모자 간의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도 다들 점심 먹으러 나간 동안 외에는 쉬시지 않고 형과 응대를 하셨다니, 노곤하실 만도 한데 그냥 쌩쌩하시다. 저녁식사 후에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도 주고받고, 장난도 치시고 하다가 여덟 시 가까이 되어 내가 금강경을 읽어드리자 눈꺼풀이 내려오고 이윽고 코를 골기 시작하신다. 교수 시절 학생들 사이에 '수면제'로 통하던 내 강의 실력이 아직도 녹이 슬지 않았다.

아내가 저녁 일 나간 날이라 형과 굴밥집 가서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왔는데, 컴 앞에 조금 앉았다가 형이 먼저 자겠다기에 나이트캡 한 잔 같이 하자고 앉았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1년 사이에 내 일에도 변화가 많이 있었지만 형 일에도 큰 변화가 있어서 얘깃거리가 많았다. 군사산업 분야에서 30여 년 일해 온 끝에 이제 연구소와 회사를 떠나 단독으로 의회가 지원해 주는 프로젝트를 몇 년간 운영하게 되어 일에서 보람을 찐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보람을 느낀다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일에 너무 시달리는 것 같아 안됐기도 하고, 이제 은퇴해서 한국 들어오면 내가 어머니 인계하고 중국 가기도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느낀다.

어제 아내가 드디어 작은형을 붙잡았다. 큰형과 내가 여러 날 전부터 통화를 시도해도 받지 않던 사람이 어쩌다 아내 전화를 받았고, 큰형 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오늘 오겠다고 했단다. 그러더니 오늘 12시에 정말로 나타났다.  설 무렵에 와서 문앞에 선물세트 내려놓고 간 일을 추궁하니 순순히 시인한다. 문 두드려보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 어째 전화도 안 돌려보고 내뺐냐 하니까 전화번호를 잊었다면서 전화번호를 적어 달란다.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 아침부터 출근해 있던 큰형과 함께 오랫만의 3형제 사열식을 가졌다. 작은형 얼굴을 보자 어머니는 "어! 이 사람 왔구만, 도망 참 잘 다니는 사람이지!"로 시작해 즉각 농담 모드로 진입하신다. 큰형 보고 반가워하시는 것과도 완연히 다른 분위기다. 말씀을 하시면서든 들으시면서든 작은형 바라보시는 눈매에는 내내 생글생글 웃음기가 떠나지 않으신다. 그 속 편한 작은형도 꽤 놀라고 감동먹는 눈치다. 몇 주 전 통화가 되었을 때 내가 회복되신 상황을 얘기했었지만, 이 일기를 받아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런 정도로 신나게 놀고 계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미워서 내가 일기를 안 보내준 게 아니다. 메일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 자기 말로는 두 달 정도마다 메일함을 열어본다고는 하는데,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빼 보고 뭔지 모르겠는 것은 몽땅 바로 버리는 것 같다.

두 시쯤 되어 더 놀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를 겨우 달래놓고 형들을 집으로 데려와 점심을 같이 했다. 정병준 교수가 아버지 글 모아놓은 것을 보고는 작은형도 놀란다. 작업 시작한 후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도 필요 없는 건 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니까, 결과물을 보고 놀랄 수밖에.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과 스스로 비교하는 마음이 신선 입장에서도 조금은 드는 눈치다.

그런 낌새를 놓치지 않고 큰형과 내가 협공에 나섰다. 어머니 표정 봐라, 둘째는 어머니에게 특별한 아들인데, 인생에 큰 지장 없으면 아들 노릇 좀 하라고. 나는 어젯밤 큰형과 나누던 이야기에서 연장해, 앞으로 내 일은 중국에 건너가 지내며 하는 편이 좋은데 너무 오래 붙잡혀 있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작은형이 이제 한 몫 해주면 내가 너무너무 행복해지겠다고. 둘러댈 말도 없으니 응락은 한다. 매주 강의하러 서울 올라오는 길에 꼭 어머니 뵈러 오겠다고. 그런 응락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내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 듣기 좋은 걸 어떡하나. 그리고 또... 혹시 아나?

점심 후에 형들을 병원에 데려다 놓았는데, 지금 막 작은형이 먼저 돌아왔다. 잠깐 어머니 상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중이야 어쨌든 지금은 어머니 자주 와 뵙고 싶은 마음이 돈독한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어머니 행복이야 끝내주시는 거지. 정말 그 편애는 스스로도 어쩌실 수 없는 것 같은데, 이 대목에서 편애의 보람을 얼마만큼이라도 누리실 수 있었으면.

작은형한텐 이 일기 쓴단 얘기 안했다. 앞으로 행실 봐서 보여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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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8. 10:18
 

어제 저녁, 공항으로 나가기 전에 병원에 들렀다. 여사님들께 오늘은 형이 와서 좀 늦게까지 앉아 있을 거라고 양해를 청하고 (아무래도 8시 넘어까지 있으려면 여사님들 휴식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좀 미안하다.) 식사 후에 가급적 간식을 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우리가 와서 뇌물을 쓸 여지를 남겨두도록.

나가기 전에 어머니께 "어머니, 기봉이 보고 싶으시죠? 제가 가서 데려올께요." 하니 "눈이 뗑구래지셔서 "기봉이? 기봉이 미국 있는데?" "어디 있은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는데 제가 안 데려올 수 있나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가는 나를 붙잡지는 않으신다.

8시 10분에 형을 끌고 병실에 들어섰다. 형 얼굴을 보자 입꼬리가 척 귓가에 가 걸리신다. 한 시간 내내 너무 아까워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기도 힘드신다. 이따금 내게 눈길을 던지실 때는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데려올 줄 알다니, 저 녀석도 쓸모가 아주 없진 않군.' 하는 표정이 읽힌다.

그런데 간간이 형을 쩔쩔매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 기봉아..." 하며 잘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손을 뻗쳐 얼굴까지 만져보고 하시다가, 느닷없이 형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며 "우리 봉아 하고 참 똑같이 생기셨수... 어쩜...", 나를 돌아보시며 "그렇지? 참 잘 생기셨지?", 다시 형을 보며 "정말 우리 기봉이를 보는 거 같아요." 정색으로 말씀하신다. 형은 처음엔 "어머니, 저 기봉이 맞아요." 하고 정체성 확인에 급급했다. "에이, 우리 기봉이는 미국에 있다구요." 하시면 "미국에서 이제 막 비행기 타고 왔다니까요." 그러면 특별한 검증 과정도 없이 또 아들로 대하신다. 그러다가 한 5분 후에 또 "정말 기봉이 하고 똑같으시네. 생긴 것만이 아니라..." 거듭되니까 반응을 형도 조금씩 바꿔가며 어머니의 반응을 관찰한다. 처음엔 한 5분마다 한 번씩 의혹을 제기하시던 것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는 좀 뜸해졌다.

요샌 하도 능청스럽게 농담도 잘 하시니까 나도 판단하기가 힘들다. 이 사람이 기봉이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어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모처럼 보는 기봉이 맛을 더 알뜰하게 누리시느라고 장난을 치시는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돈을 꼭 걸 일이라면 뒷쪽에 끌린다.

완전히 잔치집 분위기가 됐다. 여사님 세 분 중 한 분은 새벽근무를 위해 휴식에 들어가 있을 시간인데, 모두 모자 상봉 장면을 구경하며 축하해 주기 바쁘다. 매주 두어 번씩 전화를 바꿔주던 그 주인공, 사진만 보여도, 목소리만 들어도, 얘기만 나와도 어머니 표정이 흐뭇해지시던 그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드디어 나타났으니. 맨날 호통만 듣는 천덕꾸러기 셋째 녀석과 뭐가 어떻게 다를까? 어머니 자리에서 비스듬히 건너편 자리에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 한 분도 (이 방에선 모처럼 대화 능력이 있는 분) 기분좋게 한 마디씩 거들어주신다.

아홉 시 가까이 되어 내가 먼저 나와 밖에서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형이 나왔고, 나오면서 방 안을 보니 어머니는 여사님들에게 둘러싸여 아직도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형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여사님들이 육탄작전에 나선 것을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다.

형을 태우고 병원을 떠나면서 물었다. "어때? 내 보고가 꽤 정확했지?" 끄덕이며 고맙다고 한다. 그 보고 아니었으면 엄청 놀랐을 게다. 전번 다녀간 것이 작년 4월 초였나? 그래도 아직 기력이 있으실 때였고 튜브피딩으로 들어가시기 전이었지만, 지금의 명민하고 활달하신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그 사이에 힘든 고비를 넘기시고 오히려 더 쌩쌩한 모습을 보이고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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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18. 10:14

지금 어머니 살펴드리는 세 분 여사님께 정말 아무 불만 없다. 능력도 태도도 나무랄 데 하나 없다. 그런데도 연말에 떠난 김 여사나 한 달 전에 떠난 주 여사를 생각하면 차이가 있다. 그 두 분이 워낙 특이한 분들이었다. 보스 기질이랄까, 리더십이랄까, 상황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자세가 있었다.

김 여사가 시작하고 주 여사가 이어받은 사업의 하나가 어머니 노래 시키는 거였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 어리버리하실 때부터 틈만 나면 어머니 곁에 와 노래를 불러드리고 따라 하시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얼리는(조선족 말, '꼬신다'는 뜻) 재간들도 참 좋아서 어머니도 꽤 열심히 따라 부르셨었다. 레퍼토리는 <아리랑>과 <푸른 하늘 은하수> 두 곡 뿐이었지만.

지금 계신 분들은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인데 재미있을 것 같은 일 찾아서 하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주 여사 떠난 뒤로는 노래부르는 취미를 잊으셨는데, 얼마 전부터 내가 조금씩 시도를 시작했다. 며칠에 한 번씩 해보다가 차츰 반응이 좋아지셔서 그저께부터는 정규 일과로 만들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기존의 두 곡을 집중공략했는데, 어쩌다 한 번씩 따라 부르더라도 입안에서 웅얼거리시는 정도로, 큰 흥미를 보이지 않으셨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곡을 불러드렸더니 흥미를 크게 일으키시는 것이었다.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이신 곡은 <행복의 나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나직하게 불러드리는데, 눈을 크게 뜨고 몰입한 표정으로 내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시면서 오른손으로(나는 어머니 왼쪽에 대개 앉는다.) 박자까지 맞추신다. 끝나면 "또!", 과일즙 드릴 때 다음 숟갈 재촉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식욕을 보이시는 바람에 어느 날은 열 번도 넘게 불러드렸다.

내 입을 쳐다보시는 표정, 참 가관이시다. 어떤 때는 그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할 정도다. 한 곡 끝나면 "참 좋다.", "참 잘 부른다." 말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고, "네가 어쩌다 이렇게 잘 부르게 됐냐?" 묻기까지 하신다. 내가 음치라는 사실은 나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시는 사항의 하나다. 진짜로 노래에 빠지셨을 때는 그런 정도 사설도 늘어놓으실 겨를이 없다. 그냥 "또!"

어제부터 새 노래를 가르쳐드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때까지의 패턴은 내 노래를 감상만 하시다가 이따금 <아리랑>과 <은하수>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제 3의 길을 시도했더니 뜻밖에도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다른 노래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했더니 "그러렴." <송아지>와 <찌르릉>을 시도했는데, <찌르릉>이 맞아떨어졌다. <송아지>는 새로 배울 필요도 없이 알고 계셨지만 큰 흥미를 일으키지 않으셨는데, <찌르릉>이 나오자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신다. 손으로 박자를 맞추시고, 완전 몰입 모드다. 끝나자 "또!"를 부르시고, 이번엔 따라 부르신다. 세 번째 부를 때는 가사에 애매한 점을 확인까지 하신다. 일고여덟 차례 지나가면서는 끝날 때마다. "그게 다야?", "그렇게 짧어?" 하고 아쉬움을 보이신다.

노래에 이렇게 빠져드시는 것이 음식에 빠져드시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 아닐까싶다. 좋아하시는 대상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대로 빠져드시는 것이다. 먹을것을 사양하시는 일이 (어떤 음식이라도!) 전혀 없는 현상을 최근에 여사님들도 조심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제 들어오는 길에 간호사와 의논하고 있는 강 여사를 마주쳤는데, 달라시는 대로 음식을 다 드려도 괜찮은지 묻는 것이었다. 간호사는 크게 조심할 필요 없다는 의견을 얘기해 줬는데, 강 여사가 오늘 잠깐 나랑 얘기할 때는 아무래도 조금은 배 고프시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자기 생각을 말해준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문제를 생각해 주니 마음이 정말 편하다.

아무튼, 어머니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 '거리낌'을 잊어버리신 거라면,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시는 지금이 그분 인생의 또 하나 '황금기'로 큰 가치를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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