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09:46
 

모시고 앉았을 때 틈이 나면 금강경을 꺼낸다. 익숙하신 경문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시고, 그 받아들이시는 태도를 통해 정신상태를 살피기 좋은 것 같아서다. 식사 시작하신 후론 가급적 식사 때를 맞춰 가서 한 끼라도 떠먹여 드리는데, 식사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면 식전부터 펼치기도 한다. 읽고 있다가 식사가 나오면 내가 "어머니, 금강경도..." 하고 어머니가 "식후경이지." 받으신다.

회복을 시작하실 때는 글자 하나하나를 떠듬떠듬 읽으시는 것만도 대견했는데, 얼마 지나자 독송하시던 가락을 되찾아 꽤 외우시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 와서는 그 뜻을 따지기 시작하셨다. 율동에 따라 중얼중얼 읽어 내려가시다가 한 장이 끝나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 커멘트를 붙이시는 일이 잦아진다. 그러다가 "네가 한 번 읽어봐라." 넘겨주시고, 읽은 뒤엔 "그게 무슨 듯인지 해석을 한 번 해봐라." 주문하신다.

그래서 일 주일에 두어 번은 모자 간에 머리를 맞대고 금강경 강독을 한다. 나는 미리 선을 긋는다. "어머니, 제가 글자는 알아보지만, 뜻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글자를 풀 수 있는 데까지만 풀겠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의미를 잘 알아들으실까 자신이 없는데, 뜻밖으로 쉽게, 그리고 분명히 이해하는 표정이시다. 어떤 대목에선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말인데, 뜻은 아무래도 모르겠구나." 하시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현역 시절의 사고력에서 조금도 뒤져 보이지 않으신다.

열흘쯤 전 17장에서 시작해 32장 끝까지, 모처럼 많은 분량을 읽으신 일이 있는데, 한 장 끝낼 때마다 커멘트를 붙이셨다. 대부분이 "여기도 알 듯 말 듯하구나."였는데, 꼭 한 번 "이건 좀 알 것 같다." 하셨고, "이건 영 모르겠다."가 두어 번 있었다. 책을 덮고 내게 고개를 돌리며 "야, 이거 아무리 읽어도 말짱 황 아니냐?" 하시기에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나 저는 글자는 알아보잖아요? 뜻은 몰라도. 그러니까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몰라도 모르는 게 뭘 모르는 건지는 알 수 있으니, 그게 어디예요?" 했더니 한참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대답하신다. "그건 그래."

그 이튿날은 심술 모드셨다. 한 마디 입을 떼셔도 꼭 화가 나신 것처럼 떼떼거리거나 호통을 치신다. 식사 하시는 동안에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억지로 드셔 주시는 것처럼 받아 드시고, 식사 후 과자 한 조각을 권해 드리는 데도 평소처럼 "과자 하나 드시겠어요?" 하고 여쭙는데 "그런 걸 왜 먹어야 돼!" "어머니, 어머니께서 하나 드시면 제 마음이 무척 기쁠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하나 드세요." 엉구럭을 떨어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정말 억지로 먹어 주신다. 그래도 과자 다음의 과일즙에서 분위기가 많이 회복됐다. 몇 숟갈 드시나, 미리 목표를 정해 두는데, 숟갈 수에 정신을 집중하시는 것도 기분에 괜찮으신 것 같고, 목표 달성 후 몇 숟갈 보너스를 드리면 기분이 썩 좋아지신다. 그런데도 과일즙 뒤에 금강경을 꺼내니까 일순간에 심술 모드로 돌아가신다. "그건 읽어서 뭘 해!"

그 날의 심술 모드가 금강경에 대한 좌절감에 원인이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장 여사에게 물어보니 그 전 날부터 말씀이 적으셨다고 한다. 매우 익숙한 텍스트인데도 상식적 수준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못마땅하신 것 같다. 사실 절에 다니며 불경 읽는 사람 대부분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않고, 하나의 신비로운 대상으로 여긴다. 어머니도 수없이 독송하며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계셨을 텐데, 지금은 그런 인식을 잊어버리고 상식적 이해를 바라시는 것 아닐까?

그 뒤로 금강경 읽을 때 어머니 표정에 바짝 주의를 기울인다. 조금이라도 어려워하시거나 답답해 하시는 기색이 있으면 뭐라 하시기 전에 앞질러 "어머니, 여긴 좀 특별히 어렵네요. 제가 글자라도 한 번 풀어 볼까요?" 하면 무의식중에 반가운 기색을 살짝 띠고 "그래라." 하신다. 어머니도 왕년에 한문깨나 하셨지만 아무래도 읽으신 분량이 나랑은 차이가 있고, 또 나는 번역을 직업처럼 하면서 글자를 푸는 기술을 바짝 연마해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 독해에도 도움이 돼 드릴 수 있는 것 같다.  글을 풀어드리면 표정이 편안해지시고, 내가 "거기까지 글자로는 풀겠는데, 그 이상 뜻은 모르겠네요." 하면 끄덕끄덕하시고, 더러 "그래도 훨씬 낫다." 하시기도 한다.

그렇게 글풀이를 많이 해 드리니 요새는 책을 펼쳐도 나더러 읽으라고 하실 때가 많다. 나는 원래 현토식으로 읽는데, 한 때는 토를 빼고 독경식으로 읽으라고 요구하기도 하셨다. 눈으로 따라 읽으시기 편리하도록 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전엔 한 번 독경식으로 읽기 시작하니까 "아니, 너 하던 식대로 읽어라." 하신다. 현토식으로 읽으면 한문을 좀 하는 사람에겐 따로 글을 풀어주지 않아도 해석이 대충 전해진다. 금강경 경문을 읽으며 동시번역을 마음속에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 수준의 해석 능력과 상당 수준의 집중력이 모두 필요한 일인데, 이것을 하실 수 있으니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건강을 확보하신 것이다.

오늘은 다섯 장만 읽어드렸다. 내내 집중력에 흔들림이 없으시고, 내 독법에 만족하시는 눈치다. 다섯 장 읽은 뒤에 잠깐 숨을 돌리며 더 읽을까 여쭤보니 "오늘은 그만하면 됐다." 집중해서 들으며 읽으시기 때문에 전보다 적은 분량을 읽고도 만족하시는 것이다.

적당한 기회인 것 같아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너무 좌절감을 느끼지 않으시도록 내 관점을 설명드렸다. "어머니, '불립문자'란 말씀도 있지 않아요? 이게 원래 문자에 담을 수 없는 뜻인데, 따로 담을 데도 없으니까 그냥 담는 시늉만 한 걸 거예요. 그러니 이 글을 보고 뭔가가 어느 방향에 있나보다 하고 어렴풋이 느끼면 됐지, 그게 뭔지 글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닐 거예요." 말씀은 드리면서도 이 정도 추상적인 얘기가 과연 접수될지 확신은 없다. 그런데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기시는 걸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시는 것 같다.

불광 잡지를 비롯해 관심을 두실 만한 자료를 몇 가지 시도해 봤지만 금강경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비길 만한 것이 없다. 금강경에서 관심의 패턴을 웬만큼 확인한 셈인데, 어떤 자료로 이어 나갈지? 주변에 아동심리학 전문가가 없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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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