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결의로 만들어진 총회의 부속기구였다. 조선에 총선거를 실시해서 신탁통치 없이 바로 독립국가를 세운다고 하는 결의에 붙여 그 과정을 맡을 위원단을 만든 것이다. 위원단은 아시아 4개국(중국, 인도, 필리핀, 시리아)과 다른 5개국(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엘살바도르, 우크라이나)으로 구성되었는데 우크라이나가 참여를 거부하여 나머지 8개국 대표로 운영되었다.

 

1948년 1월 초순 위원단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북 당국과 소련군이 입경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소총회에 보고하고 ‘가능지역의 선거’를 실시하라는 소총회의 권고를 받은 후(소총회는 조선위원단과 병립하는 총회 부속기구이기 때문에 위원단에 ‘지시’를 내릴 위치가 아니라 ‘협의’ 상대였다.) 3월 12일에 같은 방향의 결정을 내렸다.

 

소련은 당사자인 조선인의 의견 청취가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11월 14일의 총회 결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는데, 3월 12일 위원단 결정의 정당성에는 이와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과반수 찬성’이라 했는데, 8개국 기준으로 과반수란 얘기다. 총회가 구성한 기구이므로 총회 결정 아니면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이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고 한 일부 대표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유엔위원단의 ‘가능지역 선거’ 결정은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의 단순다수결로 원칙 없이 강행된 것이어서 소련의 거부 명분을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 유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마치 유엔과 그 위원단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던 것처럼 흔히 생각하는데, 아직 냉전이 고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갓 만들어진 유엔에 대한 각국의 태도에는 아직 유동성이 컸다. 미국 제안의 무리한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소련 측이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참여해서 반대했다면 미국도 ‘가능지역 선거’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2월 25일 소총회에서 미국대표 제섭이 결의안을 제출할 때의 제안 설명 일부를 그 날 일기에 옮겨놓았는데, 그중 한 대목을 다시 살펴본다.

 

조선위원단은 그들을 원조하고 있는 점령당국과 협의하여 선거법 및 그 세칙을 제정하며 적령자 선거권을 기초로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투표지역 혹은 지대를 규정하고 선거 일자를 결정하도록 그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 지역 혹은 지대에서 동시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는 동 위원단의 인원수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동 위원단은 수 지역 혹은 지대에서 순차로 선거를 감시할 것 즉 조선의 남부 도로부터 실시하여 그 도가 완료되면 점차로 북쪽으로 이동 실시하도록 한다는 것을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위원단의 13개월간(1947년 12월에서 1948년 말까지) 비용으로 리 사무총장이 예산위원회에 51만 달러를 신청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47년 11월 12일) 수십 명 인원이 1년간 조선에 체류하며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넉넉한 예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선거감시를 위해서는 인력과 예산이 모두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대표는 선거를 일시에 행하지 않고 지역을 나눠 차례로 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야 위원단의 선거감시가 가능하다고 각국 대표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방침은 제안 설명에만 나오고 결의안 자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선거 시행의 주체인 미군정은 한꺼번에 시행할 것을 결정했다. 선거과정에서 실제 감시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단 내부의 토론 내용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시리아대표를 비롯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프랑스 대표가 엄격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흔히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3월 12일의 위원단 결의에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이 확인되어야만 위원단이 선거감시에 나설 것이라는 부대조항이 있었는데, 이 조항에 입각해서 위원단이 선거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었던 모양이다. 위원단은 4월 28일에야 선거감시에 나서겠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는데, 캐나다, 프랑스, 시리아 3국 대표가 이 표결에서 기권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9일)

 

결국 선거는 치러졌는데, 5월 10일 일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선거의 자유분위기와 공정성에 만족하지 못한 대표들이 위원단 안에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시리아대표 무길이 마침 임시의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위원단 공보 제59호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공보가 나간 이튿날 위원단 전체회의에서 그 내용을 무길의 개인 의견이라고 확정한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미국을 지지하는 대표들에 의한 다수결의 횡포였다.

 

선거의 자유분위기에 대한 위원단의 판단은 총회에 제출할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위원단이 조선 밖으로 나가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한 것은 미군정의 관할지역을 벗어나야 엄정한 작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원단은 도쿄에 가려고 했는데 맥아더가 반대했기 때문에 상하이에 가기로 했다. 그러자 맥아더가 입장을 뒤집어 도쿄로 오라고 했는데 위원단은 그냥 상하이로 갔다.

 

“상해서 보고서 작성 - 16일 의장 이하 일행 출국”

 

보고서 작성차 동경으로 향발하려는 국련조위에서는 맥아더사령관으로부터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12일 개최된 제39차 전체회의에서 재론된 결과 중국 상해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14일 공보 제62호로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다.

 

“1948년 5월 12일의 제39차 전체회의에서 보고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보고서 제1부를 준비하기 위하여 1948년 5월 18일 이내에 서울로부터 상해로 갈 것.

 

2. 6월 제1주에 서울에 귀환할 것과 모든 필요한 정보를 접수하기 위하여 부재기간 중 서울에 잔류할 대표로써 구성된 연락반을 임명할 것.

 

이 결정의 결과로서 위원단 및 사무국의 다음과 같은 구성들이 1948년 5월 16일에 상해로 가게 될 것이다. 즉 의장 S. H. 잭슨(호주), 유어만(중국), I. J. 바하둘 씽(인도), 야신 무길(시리아), P. J. 슈밀(비서장), 및 R. S. 하우스나(행정관)이다. 다른 대표들과 사무국원들도 수일 내에 이에 따를 것이다.”

 

“이제는 조위 측서 방일(訪日)을 거부 통지”

 

[서울 14일 발 UP 조선] 재일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그의 방침을 변경하여 국제연합조선위원단의 동경 임시본부 설치를 허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동 위원단은 최근 거행된 남조선 선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코자 일본 외의 다른 곳으로 갈 터이라고 무길 의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 위원단은 맥아더 원수의 결정을 주목할 뿐이며 조선 내지 일본 외의 타국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을 추진시킬 터이다. 본 위원단은 12일 밤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으며 따라서 맥아더 원수의 신(新) 성명이 이를 변경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맥아더가 애초에 왜 위원단 도쿄 체류를 반대했는지 명확한 설명은 찾지 못했다. 도쿄에 못 오게 하면 서울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미군정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지가 도쿄 행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협조적인 위원단 대표들도 이런 유치한 수준의 비협조에는 약이 올랐을 것이다. 결국 미군 지배가 아닌 상하이로 가게 되었으니 미국 쪽에서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위원단은 상하이에 갔다가 6월 7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6월 12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를 보면 미국의 요구를 위원단이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길지만 유엔위원단을 둘러싼 긴장된 분위기를 보여주는 기사이므로 전체를 옮겨놓는다.

 

“본 사명에 배치된 행동에 조선인 극도 분노 - 조위 동정에 UP 미 기자 신랄할 비평”

 

[서울 11日 UP특파원 로우퍼 발 조선] UN조선위원단은 남조선에 있어서 UN의 악평을 사고 있다. 8개국으로 구성된 동 위원단은 선거를 감시하고 조선을 독립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난 1월 당지에 도착한 것이다. 당지 남조선의 정객·실업가들은 위원단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끼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위원단은 원조차 내도한 체면이 중대시되는 이 마당에서 조선인의 감정을 손상하고 조선에 대한 불만을 표면화시켰다는 것이다. 1개월 전에 선출된 조선국회 내부에서는 이제 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려 하고 있다.

 

조선에 있어서의 동 위원단의 주요 임무는 미국인과 조선인이 실시한 선거방법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위원단은 래 9월 21일 파리에서 UN총회가 개최되기까지 그 판결을 비밀에 부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조선국회 영도자들은 이에 격앙하고 있다. 그들은 신생국가가 여러 가지 원조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UN의 이 중대결정을 알기까지 3개월을 고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대하여 이론이 있는 것이다.

 

위원단의 보고 작성 방식부터 조선인의 불만을 샀었다. 즉 위원단은 최초에 일본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볼 때는 일본은 숙적이며 따라서 이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과연 맥아더장군은 위원단의 일본입국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위원단은 급거 상해로 향하였는데 이에 따라 폐단이 발생하였다. 위원단이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최초의 국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모든 남조선인에게 있어서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으나 UN위원단은 그가 산출한 국회에 대하여 1명의 대표 내지 메시지 하나를 전달하는 것을 등한히 하였던 것이다. 오직 뒤에 남아있던 2명의 위원단원이 국회에서 사과의 논설을 한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그로서 이를 잊어버리려고 하였으나 조선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또한 2명의 위원단위원들이 당지에 도착하자마자 조사도 하기 전에 ‘경찰국가’·‘정치범’을 처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UN위원단원들은 또한 1일 20불씩의 비용을 타면서 숙박비로 미 상인과 동일히 1일 10불을 미군 측이 지불하는 것을 거절하고 교섭 끝에 이를 6불 이하로까지 내린 데 대하여도 조선인들은 속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 소식통이 전한 바에 의하면 세 UN위원단위원은 김구·김규식 씨에 대하여 소련군 점령하의 북조선에서 개최된 소련 측 주최의 회합에 행차할 것을 종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지도자들을 이같이 인도하는 것은 UN대표들의 본분이 아닐 것이며 이는 동양인에게는 확실히 그들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또한 위원단의 ‘중립적’인 사무국은 UN본부에서보다 이곳의 UN활동이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이 축적하여 UN위원단은 상상 이상으로 체면을 손상하게 되었다.

 

조선인은 주로 UN과 UN위원단을 통하여 접촉하고 있느니만치 위원단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 UN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는 레이크석세스의 한 두통꺼리가 될는지도 모른다.

 

숙박비 흥정까지 들먹이며 위원단의 위신을 깎아내리려고 광분하는 것이 일개 기자의 망발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측이 원하는 결론을 서둘러 내려주지 않는 데 대한 전 방위 압력의 한 모퉁이로 이해된다.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귀국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의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끝머리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5-10선거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위원단 내에서 지배적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음을 기자의 질문에서 알아볼 수 있고, 인용된 잭슨의 대답에서는 위원단 내의 의견이 갈라져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씨는 위원단은 5대 3으로 5·10선거를 부인하였다 하는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서는 확답을 회피하고 “어떠한 단체에 있어서라도 만장일치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상이한 의견이 제출됨으로서 더욱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런데 위원단은 6월 25일 회의에서 5-10선거의 공정성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6월 30일 임시의장 미겔 바레 필리핀대표가 국회를 찾아가 이 결의문을 발표한 다음 7월 2일 공보 제70호를 발표했다. 7월 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결의문 내용을 옮겨놓는다.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은 1947년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의 제 조항에 의하여 1948년 5월 10일 조선 내의 가능한 지역에서 시행된 선거를 감시하였고 한국 내의 그 지역에 있어서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분위기가 보장되어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와 민주주의적 권리가 인정되고 존중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선언하였고 여차한 자유분위기가 선거기간 중 존재하였다는 감시반의 보고를 고려하고 본 위원단이 건의한 선거절차가 대체로 정확하게 적용된 것을 본 위원단으로서 만족히 생각하여 1948년 5월 10일의 선거결과는 한국 내의 가능한 지역에 있어서 전 유권자의 자유의사가 표시되고 전 지역 내의 주민 수는 전조선국민의 약 3분지2를 구성한다는 본 위원단의 의견을 기록할 것을 결의함.

 

제69차 본회의에서 본 위원단은 또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에 선거된 국회가 성립되었다는 한국 국회의장으로부터의 정식 통고문에 대한 회한을 결정하였다. 즉 위원단 의장 명의의 회한은 다음과 같다.

 

“본 위원단은 한국국민이 선출한 대표자에 의하여 1948년 5월 31일에 한국 국회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이 대표자들이 하루바삐 조선 독립과 통일을 달성하도록 촉진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귀한(貴翰)은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의 위임사항을 구성하는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안과 1948년 2월 26일부의 국제연합임시소총회 결의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는 본 위원단으로서는 당시 본 위원단 의장이었던 G·S·패터슨 씨가 귀하에게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 총회 결의안에 규정된 바와 같이 이 이상의 실천에 관하여 선출된 대표자들의 요청이 있으면 본 위원단은 이에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통고한 1948년 6월 10일부 서한을 참고로 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결국 미국이 원한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앞으로도 틈틈이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