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2일자 <경향신문>의 “헌법을 신중 선택, 통일의 길을 열어두라 - 하 중장 국회에 공함(公函)” 기사에는 전날 하지 사령관이 막 개원한 국회의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공함’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본관은 귀하가 조선정부 조직과 조선국가통일(사업)에 참여하도록 국민의 대표로 피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귀하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은 귀하도 주지하시는 바요 또한 그 책임을 귀하와 귀하가 대표한 양민은 큰 광영으로 알고 잘 이행하리라고 본관은 확신합니다. 이번 선거에 가장 중대한 점은 조선의 운명과 장래를 조선인 손에 일임한 것입니다.

 

남조선에서 당선된 제위가 어떠한 형식과 방법으로 국사처리를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 조선국민 장래에 중대 항구한 영향이 미칠 것입니다. 미국의 정책은 시종일관하게 외국의 지배가 없는 민주적 정부를 가진 통일독립조선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동일한 정책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43대0으로 조선국민정부 수립의 제일보적인 조선 내 선거를 감시하며 조선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당선된 대의원들을 협조하는(결의문을 표결할 때에) 국제적으로 반영된 것입니다. 이 정책은 조선 3천만 국민의 희망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남조선에서 시행이 된 자유선거가 38이북에서 동시에 시행되지 못함을 우리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미국과 국련은 자유선거로 피선된 북조선대표가 남조선대표와 합석하여 진정한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남북을 통일하여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은 본관과 미국정부와 수차에 걸쳐 본관에게 표시한 국련조선위원단의 희망으로 이번 새로 당선된 대표 제위가 전력을 다하여 참된 민주적 정부를 세워 조선을 통일하였으면 합니다.

 

본관은 국회의원 제위는 개인으로나 정당원으로 이 목표달성을 어떻게 하였으면 된다는 이념을 가지고 계실 줄 압니다. 이에 관련하여 여러분이 정부조직을 토의 시작하려고 집합할 때에 가급적 속히 고려하여야 할 이하 3개안을 제의합니다.

 

(1) 남북통일의 길을 열어두기 위하여(국회가 소집되면) 곧 결의문을 통과하여 북조선의 100명(혹은 인구비례로 계산된 수)의 석(席)이 국회에 공석으로 있어 북조선에서 합법적으로 피선된 대표동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표명할 것.

 

(2) 국회에서 조속히 국련조선위원단과 연락을 취할 연락위원을 임명하여 조선독립정부 수립의 편의를 도모하여 촉진하라는 특수한 사명을 가진 그 위원단과 연락할 것. 제위가 조직할 정부로서 세계국련의 찬동을 얻게 되기를 물론 희망할 터인데 이런 연락위원은 1947년 11월 14일부 국련 결의문에 남아 있는 조항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국련과 조선국회에 가장 유용할 것입니다.

 

(3) 국회로서 조선국민의 요구와 심리에 부적당한 형태의 정부를 비치한 그런 류의 헌법을 경솔히 채택함을 피할 것. 헌법은 국가의 기초라 가장 신중 주도히 고려할 것.

 

본관은 조선국민대표로 당선된 제위에게 성공을 축복하며 주조선 미국수석대표의 자격으로 확신하는 바는 제위의 일생을 통하여 숙원하던 통일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있어 본관은 계속하여 조선국민을 각 방면으로 협조하려 합니다.”

 

국회의 개원으로 남조선의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미군정의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다. 5-10선거를 시행한 것은 미군정이지만, 만약 이 선거가 미군정 주장대로 민의 수렴에 성공한 것이라면 당선된 의원들의 집합인 국회는 적어도 남조선 지역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국회의 손으로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조직한 다음 미군정으로부터 권력과 책임을 넘겨받기 위한 제반 절차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국회는 선거를 통해 실질적 정통성을 이미 확보해 놓고 있는 것이다. 미군정과 새 국회는 상하관계 아닌 협력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주둔군사령관이 개원하는 국회의 전 의원을 상대로 ‘공함’을 보내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당시 상황에서 국회와 미군정의 관계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 앞으로 문서를 보낼 수는 있어도, 입법부 구성원들 앞으로 ‘공함’을 보낸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으로 보인다. 입법의원이 군정청의 부속기구였던 시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국회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하 중장의 ‘공함’ 운(云)에 이론 - 국회본회의 제3차 경과”

 

국회 제3차 회의는 2일 오전 10시부터 국회의사당에서 의장 이승만 박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먼저 국민의식이 끝난 후 제2차 회의록 낭독이 있었는데 동 회의록 중 하지 중장의 ‘공한’이라는 어구를 수정하자는 발언이 있자 동 어구 해석 문제가 논란의 초점이 되었다. 즉 진헌식 의원으로부터 “하지 중장의 서한은 공한이 아니라 사한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발언이 있자 서정희 의원으로부터 “누구의 지시를 기다릴 것 없이 이북 동포에게 국회 성립을 전달하자”는 발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이 의장으로부터 “그렇잖아도 우리 국회는 독촉 또는 한민당이 운영하느니 하는 풍설이 있는데 하지 중장의 서한을 ‘공한’으로 인정한다면 국회는 하지 중장의 의견대로 운영된다는 오해를 살 것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중대발언이 있었다. 다음 동 회의록을 약간 수정 통과한 후 (...) (<경향신문> 1948년 6월 3일)

 

이렇게 해서 하지 사령관이 체면을 구기는 결과가 되었는데, 공한이든 사한이든 이 편지에서 하지가 제기한 3개항의 내용을 살펴본다. (1)항 ‘가능지역 선거’의 한계를 한 차례 확인해두는 것은 괜찮은 일이고, (2)항 유엔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도 미군정 입장에서 적절한 권고다. 그런데 (3)항 헌법 제정 방향을 왈가왈부한 것은 망발이다. 공한이건 사한이건 국회에 대해 이런 차원의 잔소리를 늘어놓는 데서 하지와 그 보좌진의 의식수준이 드러난다.

 

새 국회의 가장 급한 일은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 제정 등 정부수립을 위한 작업이었다. 6월 3일 오전의 제4차 회의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30인)와 국회법 기초위원회(15인)를 구성한 후 휴회로 들어가고 오후부터 두 분과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갔다.

 

“헌법 등 기초 착수 - 전문위원 10명을 선정”

 

국회법 및 헌법 정부조직법 등을 기초하기 위하여 국회 본회의는 3일 오전 회의로써 일단 휴회하고 오후부터는 각 분과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즉 3일 오후 2시부터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국회의사당에서, 국회법 기초위원회는 의원실에서 각각 시간을 같이하여 열렸는데 이 날 국회법기위에서는 동 분과위원장으로 서정희(한민) 의원을 선출하고 극히 간단히 회의를 끝마쳤다.

 

그러나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에서는 위원장에 서상일(한민) 의원과 부위원장에 이윤영(조민) 의원을 선출한 다음 국회임시준칙 제7조 후항에 의한 전문위원으로 학계 사법계 경제계 등 각 부문의 권위자를 망라하여 다음 10명을 선정하였다.

 

유진오(고대 교수) / 고병국(전 법대 학장) / 권승렬(사법부 차장) / 노진설(대법관) / 한길조(변호사) / 윤길중(국선위 선전부장) / 노용호(국선위 사무국 차장) / 김용근(국선위 계획부장) / 차윤홍(국선위 전문위원) / 임문환(중앙경제위원) (...)(<경향신문> 1948년 6월 5일)

 

대략 같은 내용을 보도한 같은 날 <동아일보> “양 분과위원장 결정 - 헌법 기초 업무 진행” 기사 끝에는 기사 끝에 유진오의 역할을 부각시킨 대목이 붙어 있다.

 

(...)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은 과거 30여 년간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오던 사계의 대권위자 유진오 씨가 초안한 것을 중심으로 토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동 씨가 초안한 법안은 프랑스헌법과 제2차 대전 후 일본에서 제정한 일본헌법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일본헌법보다는 훨씬 사회화하여 초안된 것이라 한다.

 

전문위원들은 위촉받자마자 헌법 초안을 내놓았다. 헌법 제정은 건국을 위한 필수과제였으므로 민주의원에서도 입법의원에서도 그 준비를 위한 노력이 있었다. 5-10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체계적 준비가 있었던 사실은 아래 기사로 보아 분명하다. 그 경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파악되는 것이 있으면 보완하겠다.

 

“국체는 민주공화국으로 - 3권 정립(鼎立), 대통령임기 6년 - 양원제의 창설에 책임내각”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지난 3일 오후와 4일로써 제1독회를 끝마치고 5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2독회로 들어가 축조토의를 시작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기초안은 2개월에 걸쳐 차윤홍 김용근 노용호 유진오 노진설 등 전문위원 5씨가 5-10선거 전부터 준비하였던 것으로 전문은 10장 108조로 되어있는 것인데 그중 중요한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조에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국체를 규정.

2. 민의-참의원제를 창설.

3. 제2장에 인민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는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 권리를 강화하고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4. 대통령을 행정수반으로 하고 임기는 6년으로 되어 있으며 책임내각제로 되어 있음.

5. 3권분립을 명확히 하고 법률 심사권은 대법원장에게 줌.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책임내각제를 선택한 것은 프랑스의 헌법을, 그리고 대법원장의 권한을 강화한 것은 미국헌법을 참고한 것으로 동 초안의 입안 의도는 민주정신에 입각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다. 그런데 동 초안이 본회의에 상정되려면 예정 기일이 내 8일보다 2, 3일 지연되리라고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6일)

 

같은 날 같은 신문에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위원인 조헌영의 헌법에 관한 개인 의견이 칼럼 형식으로 실렸다. 경북 영양 출신의 조헌영(1900-1988)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한의학 연구에 몰두해 근대한의학 발전에 공헌한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다. 제헌의회 출범 때까지 한민당에 속해 있었지만 곧 탈당하고 반민특위 활동에 주력했다. 전쟁 중 납북된 후에도 한의학 연구 등 많은 업적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시인 조지훈이 그 아들이다. 칼럼 내용도 흥미롭거니와 불운한 시대를 만난 한 걸출한 인물의 흔적을 아끼는 마음에서 여기 옮겨놓는다.

 

“헌법 제정에 임한 사안(私案) - 조헌영”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나라는 민족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국가이니 헌법은 이러한 정신으로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몰각하고 계급을 토대로 해서 독재주의를 실시하려는 정치형태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또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민 전체의 이익을 몰각한 군주전제나 귀족전횡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칫하면 그리로 흘러가기 쉬운 관료독선이나 재벌농단의 정치가 되지 않도록 국민의 모든 권리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을 충분히 보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정치적으로 부여된 국민의 권리가 공문화(空文化)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국민이 평등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된 헌법이라면 사소한 조문 상 차이 같은 것은 크게 문제로 하지 말고 하루빨리 이 법안을 통과시켜 시급히 정부를 수립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요망하는 몇 가지 의견을 말해보기로 한다.

 

1. 국호는 ‘고려민국’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그 이유는 첫째 ‘고려’는 전 세계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호인 것, 둘째 고려는 우리나라가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독립한 때의 국호인 것, 셋째 고려라는 국호에는 민족적으로 반감 대립감 등이 없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한’은 3한으로 분립된 때 쓰던 국호인 것, 또 ‘대한’이란 ‘대’ 자는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스스로 존대하는 것인 것, 해방 후 ‘대한’이란 국호에 까닭도 모르게나마 반감을 가진 민중이 적지 않은 것,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많은 것 등으로 ‘한’이나 ‘대한’은 ‘고려’보다 못한 감이 있다.

 

또한 ‘조선’은 단군조선을 하나 빼어놓고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이다. 중국의 지배를 받던 때의 국호요 더욱 왜정 36년간 나라 없는 이 땅의 칭호가 ‘조선’인 것을 생각할 때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은 조선을 국호로 하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이 땅을 소연방으로 편입하려는 인민공화국이 또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한 데는 말할 여지도 없다.

 

2. 대통령의 권한과 내각의 책임에 있어서는 미국식과 프랑스식이 있는데 이것도 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해서 순 미국식도 아니요 순 프랑스식도 아닌 제도를 택해서 책임내각제를 쓰되 정변만 반복해서 혼란을 조장하고 국정이 말이 못 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될 것이다.

 

정체에 있어서 3권분립제 같은 것을 쓰는 것 같은 것은 일반의 상식이나 말할 것 없고 입법기관은 양원제를 찬성하나 국토를 다 찾고 민론이 귀일할 때가지는 신중을 기한다는 것이 도리어 전신불수가 될는지도 모르니 당분간은 일원제로 나가는 것이 좋을 줄 안다.

 

3. 행정기관에는 고시원 감찰원 계획원 같은 것을 구색으로 두지 말고 그 기능을 강력적으로 발휘해서 인재를 공정히 등용하고 관기문란과 사회의 부패를 철저히 방지하고 국리민복을 증진할 새로운 현명한 계획을 세워서 착착 실행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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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07 14:33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께서 권하셔서 조지훈 선생님의 <지조론>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조론>에서 "지도자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변절해서는 안되고 지조를 지켜야한다."고 했는 데, 부친 조헌영선생님도 해방공간 시기에 반민특위 활동에 주력을 하고 헌법 제정에 대해 주체적인 발언을 하셨군요. 조지훈 선생님에 대해서 다시 찾아보니 1959년에 <역사 앞에서>시집을 내어 광복 이후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 현상 및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출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이승만의 영구 집권 시나리오를 파기하고자 대학교수단 데모에도 앞장섰군요. <역사 앞에서>시집을 읽어보고 싶네요.

  2. 2013.06.07 16:03

    <역사 앞에서> 먼저 나온 책이 있었군요. 지훈 얘기 나온 김에 권해드리고 싶은 논설이 있습니다. 1960년 9월 15-16 양일간 동아일보에 실린 "문단 통합에 앞서야 할 일 - 서정주 씨의 '문단대동단결론'을 읽고". 5-16 쿠데타를 서정주가 얼마나 반가워했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