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국회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헌위)가 30인 의원으로 구성되어 그 날로 활동을 시작했다. 헌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문위원 10인의 위촉이었는데, 그중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준비해 놓은 초안이 잘 준비된 것으로 인정되어 이것을 중심으로 기초위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유진오 초안의 특징은 아래와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1. 제1조에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국체를 규정.

2. 민의-참의원제를 창설.

3. 제2장에 인민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는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 권리를 강화하고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4. 대통령을 행정수반으로 하고 임기는 6년으로 되어 있으며 책임내각제로 되어 있음.

5. 3권분립을 명확히 하고 법률심사권은 대법원장에게 줌. (<경향신문> 1948년 6월 6일)

 

헌위에서 헌법 기초안을 결정해서 본회의로 보내면 본회의 토론에서 수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위 인원이 3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기초위의 결정이 본회의에서 번복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헌위에서 제일 먼저 결정해야 했던 것은 제1조에 나올 국호였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8일까지 본회의에 제출할 초안 작성이 앞으로 약 10일을 더 요하게 되어 8일의 본회의에 제출, 시일 연기를 요청하였거니와 지난 7일에는 하오부터 야반까지 유 씨 초안을 기간으로 하여 이에 사법부 내시(內示)를 기술적으로 참작하면서 축조토의를 개시 제1장 7조까지 완료하였다 한다. 즉 제1장 총강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국호 문제인바 당일 동 문제로 각 위원 간에 격론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표결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서 대한민국으로 낙착되었다 한다. 여기서 국호 결정을 위효한 헌위 동향을 보면 이청천을 비롯하여 독촉계에서는 의장 이승만이 개회 당일 식사에서도 대한민국을 천명하였고 그때 이의가 없었던 만큼 그대로 추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 박사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며 한민당 출신의원은 고려공화국을 역설하였던 것이라 한다. 하여간 헌법 작성에 있어서 그 지향이 주목되는 이때 헌위에서 대한민국의 국호 결정을 본 것은 앞으로 헌법구성 기준을 가히 추측할 수 있다고 하며 따라서 대통령제와 책임내각제에 대한 논전이 일층 백열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9일)

 

다음으로 심각한 토론이 벌어진 것은 정부조직에 관한 여러 사항이었다. 국회는 유진오 초안의 양원제를 1원제로 고쳤고, 대통령 선출은 국회에서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원제를 채택 - 대통령 선임방법에 논쟁 - 헌법기위 55조까지 기초 완료”

 

국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에서는 연일 분위를 열고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 기초에 노력하고 있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0일 분위에서는 전문위원 측으로부터 제출된 헌법초안 제5장 “정부” 제1절 대통령에 관한 조항 제55조까지의 기초를 완료하였다 한다. 그리고 특히 주목을 끌고 있던 제3장 국회구성에 관한 조항 제31조 양원제는 단원제로 할 것을 12대 10으로 가결하였다 한다. 또한 다음 53조 대통령선임에 관하여 보선(普選) 실시로 선출하느냐 또는 국회가 선출하느냐로 상당히 논의되었으나 결론에 도달치 못하였으며 허정(한민)의원은 보선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다. 또한 현재 헌법 기초에 있어서 제일 주요한 헌법초안 제5장 제2절 내각제에 관하여 대통령책임제로 하느냐 국무총리내각제로 하느냐에 대하여 격론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하는데 만약 대통령책임제가 헌법기초분과분원회에서 기초되는 경우에는 헌법을 초안한 전문위원은 전부 사임할 공기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런데 유진오 초안과 사법부 측에서 제출된 초안은 전부 국무총리책임내각제로 기초되어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2일)

 

국회의 양원제-1원제, 대통령 선출의 직접-간접선거에 대해서는 전문위원들이 초안을 제출했을 뿐, 헌위의 결정에 맡겼다. 그런데 내각책임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권력구조의 본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헌법 내용 중 가장 주목을 끄는 문제가 되었다.

 

“내각제는 찬성 못하나 국회서 통과되면 추종 - 이 박사 행동통일을 강조”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7일 오전 10시 시내 각사 기자단과 회견하고 8일부터 속개되어 상정될 예정인 헌법과 국회 내의 사상통일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정부 수립과 내각제에 대하여: 정부 수립 기한에 대하여서는 신국회에서 제반 문제를 처리함에 따라서 결정될 것인 만큼 여기선 나로서는 그 기일을 확언하기 곤란하다. 현재 기초 중인 헌법에 내각제는 국무총리를 둘 책임내각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국회에서 결정할 것이며 나 개인으로는 미국식 3권분립 대통령책임내각제를 찬성한다. 유럽의 프랑스나 영국이나 혹은 일본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책임내각제로 하는 (?) 대통령을 국왕과 같이 하는 신성불가침으로 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정체와는 좀 다른 것이며 이와 같이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과 같은 독재정치가 될 위험이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두고 책임내각제의 헌법이 통과된다면 나도 이에 추종하게 될 것이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8일)

 

이승만의 추종자들도 이 얘기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일본 얘기하다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왜 나오지? 분명한 것은 이승만이 대통령책임제를 원한다는 사실뿐이다.

 

“국회서 통과되면 추종”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6월 15일 헌위 회의에 임석해서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현 정세에 적합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경제조항을 논의 - 헌법 85조까지 기초”

 

(...) 한편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15일 동 기초회의에 임석하여 정부조직에 있어서는 대통령책임제를 채택할 것을 거듭 역설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책임내각제를 규정한 이때에 동 초안이 그대로 본회의에 상정된다 하더라도 이 박사가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이상 앞으로 정부조직 1조항을 중심으로 국회에서는 상당한 물론(物論)이 있을 것으로 일반은 관측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7일)

 

헌위의 초안 검토는 6월 15일에 일단락되어 6월 16일부터는 초안 전문이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6월 19일에는 모든 토론을 끝내고 21일 본회의에 상정할 초안을 확정했다. 그런데 21일 본회의에서는 상정이 23일로 연기되었다. 그 경위가 이렇게 보도되었다.

 

“전원위원회 안 부결 - 헌법 상정 23일로 연기”

 

신생독립국의 기본법인 헌법 초안은 그동안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위원의 안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의가 계속되어 오던 바 19일 제3독회가 종결됨으로 전문 105조가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헌법안은 21일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었으나 인쇄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상정을 23일까지 연기하게 되었는데 측문한 바에 의하면 실상은 21일 본회의에서 의원 대다수의 반대에 봉착한 비공개 전원위원회 개최설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연기되었다 한다.

 

즉 첫째로 정부수립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때에 헌법을 그대로 상정하여 의원들의 논쟁에 방치한다면 헌법 심의에 장구한 시일이 소비되어 정부수립에 지연이 염려가 있다는 점에서 공개회의 전에 대체로 조속한 심의방법을 강구해 보자는 간부의원 측의 견해인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정식으로 심의될 때에 문제가 될 중요 조항 즉 국호 문제, 양원제 단원제 문제, 경제조항 문제, 정부조직 문제 등을 토의하기 전에 전원위원회에서 대체로 이에 관한 의견통일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정부조직에 있어서 원안에는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으나 이승만 박사는 자초로 대통령책임제를 주장하여 왔으며 지난 15일에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하여 대통령제를 주장하였고 또 20일에는 헌법을 기초한 의원들을 이화장에 초청하여 그러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 전반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하며 헌법 심의를 위한 전원위원회 개최의 주장도 그러한 의도의 연장이라고 보이는데 결국 비공개 전원회의는 비민주주의적이라 하여 16차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2일)

 

‘전원위원회’란 새로 제정된 국회법 제15조에 따라 설치된 것인데 유엔총회의 소총회처럼 같은 구성원으로 구성되면서 운영방법을 달리한 것 같다. 헌법안 토의를 비공개로 하기 위해 전원위원회를 활용할 궁리를 했던 모양인데 이것이 부결되자 인쇄 미비를 핑계로 상정을 연기해 놓고 상정 전에 상정할 초안 내용을 바꿀 공작에 들어간 모양이다. 결국 6월 23일 상정된 초안은 대통령책임제로 되어 있었다.

 

헌위에서 이승만의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초안의 내각책임제를 지킨 데는 한민당 의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5-10선거를 치르기까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한 뜻이었지만 이제 권력 앞에서 경쟁관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면 대통령을 맡을 수 없다는 ‘벼랑 끝 전술’로 한민당 의원들의 뜻을 돌려놓았다고 한다.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 펴냄) 30쪽)

 

국가원수로서 '대통령(president)' 제도를 처음 둔 나라는 1776년 독립한 미국이었다. 그 후 새로 독립하는 나라와 왕정을 폐지하는 나라에서 흔히 대통령제를 채택, 지금은 150개국에 이른다. 공화정을 시작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제가 인기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왕의 존재를 대통령이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국민은 누군가가 과거의 왕처럼 포괄적 책임을 져주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제 국가 중에도 대통령의 역할에는 큰 편차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의 권력이 크지 않다. 대개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는 대개 정치적 후진국들이다. 이 점을 놓고 보면 미국도 정치적으로는 후진국가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대통령중심제가 19세기에는 세계인의 선망 대상이었고 20세기까지도 큰 허물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21세기에는 미국 정치의 자산이 아니라 큰 짐이 되어있다.

 

대통령중심제의 근본적 폐단은 과도한 권력집중에 있다. 아무리 3권분립의 원리를 분명히 세워놓는다 하더라도 행정권의 현실적 힘이 다른 2권을 압도하기 쉽다. 전쟁선포권이 단적인 예다. 미국 헌법상의 전쟁선포권은 의회에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수많은 전쟁에서 의회가 이 권한을 행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사태도 미국 권력구조의 병리적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도 공론은 내각책임제로 모여 있었다. 이승만은 이 공론에 맞서 대통령책임제를 관철하기 위해 ‘현 정세’를 내세웠다. 원칙상으로는 내각책임제가 옳다고 인정하면서 당장의 상황 때문에 대통령책임제가 필요하다며 구걸하듯 얻어낸 것이다.

 

지난 65년을 돌아보면 대통령중심제가 이 나라에 혜택보다 재앙을 더 많이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질 나쁜 인물이 권력을 쥐었을 때 해악이 엄청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괜찮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그 엄청난 권력에 따르는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치활동이 대통령선거라는 단판 승부에 집중되는 바람에 정치의 실질적 기능이 마비되고 순조로운 발전이 봉쇄되었다.

 

이승만이 내세운 ‘현 정세’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이승만의 고약한 유산을 내다버릴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Posted by 문천

 

1896년 창설된 올림픽대회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국제행사의 하나가 되었다. 창설 초기에는 참가 주체가 개인이었는데 1908년 런던대회부터 국가별 참가가 제도화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보다 ‘민족’이 참가 주체였다.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도 각자의 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해서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통치 하의 조선인은 올림픽위원회를 조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 전 마지막 대회인 1936년의 베를린대회에 손기정은 일본선수단에 끼어 참석해야 했고, 그래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해방 후 첫 대회인 1948년 런던대회 참가는 독립한 민족으로서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1946년 7월 조선체육회 내에 올림픽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런던대회 참가를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대책위 위원장은 미군정 문교부장이며 체육회 부회장인 유억겸이 맡았고 부위원장은 전경무와 이상백이 맡았다.

 

전경무의 역할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주했다가 사업가로 성장한 전경무는 재미동포 재력가의 한 사람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공헌했고, 해방 후 미국과 조선을 오가며 민족 독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 사람이다. 자기 사업을 하면서 그 성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이승만 같은 직업적 운동가와 대비된다.

 

[전경무와 이상백 사진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캡션은

“정치적 야심 없이 조선 독립운동에 성실히 공헌하던 재미 사업가 전경무(1900~1947)는 1947년 5월 29일 스톡홀름 IOC총회 참석을 위해 미군기를 타고 조선을 떠났다가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상백(1902~1966)은 영남 부호의 자제로 해방 전 일본 체육계의 거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학계와 체육계 양쪽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1947년 서울대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고, 한국체육회장과 KOC 위원장, IOC 위원을 지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41&docId=538934&mobile&categoryId=1641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93&docId=542199&mobile&categoryId=1593

 

1946년 12월 5일 전경무가 유억겸에게 전보를 보냈다. IOC 부위원장이며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브런디지를 만나 조선의 올림픽 참가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서울신문> 1946년 12월 22일) 외부에서 들어온 첫 청신호였다. 그런데 이 보도가 나온 며칠 후 이를 뒤집는 브런디지의 발언이 합동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최근 나는 조선 올림픽참가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조선은 통일된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는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시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28일)

 

이에 대해 올림픽대책위원회 이상백 부위원장이 ‘독립국가’가 되어 있지 않아도 올림픽 참가에 문제가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것은 통신원의 오전이나 혹은 속단일 것이다. 나는 올림픽 경기회의 정신으로나 관례로나 조선이 당연히 참가할 자격이 있으며 또 우리의 희망은 능히 관철될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 일제시대라도 일본이 반대만 하지 않고 조선에 NOC(국내 올림픽위원회)만 있었다면 조선 단위로 참가했을 것이다. 이 예를 들면 필리핀 캐나다 애란 호주 남아프리카 이집트 및 인도지나 팔레스타인 등은 예전부터 당당히 독립단위로 승인을 받고 참가하고 있으며 다만 법규상으로 올림픽경기 일반규정 제9조에 의하여 정식 참가신청은 NOC를 거칠 필요가 있으므로 NOC가 없는 곳에는 이것을 창설해서 IOC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IOC와 OOC의 정식 교섭도 연락도 되지 못하고 브런디지 씨와의 연락이 이번 전경무 씨의 도미로 겨우 시작된 것뿐이니 대외교섭에 여러 계단은 많이 취하겠으나 조선 참가는 확신이 있다고 단언한다. 참가선수를 양성하는 각 경기단체는 자신을 가지고 선수를 양성할 것이고 일반도 적극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 언제든 통일된 정권이 서고 완전독립이 하루라도 속히 되기를 고대하는 열의는 올림픽 문제를 떠나서도 국민의 일원으로 바라는 바이나 그러나 올림픽법규와 관례상 우리는 당당히 런던 올림픽참가를 주장할 근거와 자신이 있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1일)

 

조선올림픽위원회(KOC)는 1947년 5월 16일 결성되었다.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인 여운형과 유억겸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스톡홀름의 IOC총회에 전경무 위원 파견을 결정했다. 전경무는 그 길에 비행기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IOC총회는 6월 20일에 KOC 승인을 의결했다. 그로써 1948년 7월의 런던대회 참가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올림픽 참가를 위해 도장 받을 곳이 아직 남아있었다. 미군정이었다. 출국 허가는 물론, 참가 경비도 미군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후원회가 결성되어 후원권과 기념우표를 발매하고 국악원의 <대춘향전> 공연(1948년 1월 15~20일, 국도극장) 등 후원행사를 열었지만 수십 명 선수단을 런던에 보낼 비용에는 턱도 없었다. 환금에도 물론 미군정의 승인이 필요했다. 1인당 비용은 2천 달러로 책정되었다.

 

“63명으로 내정 - 올림픽 참가인원과 종목 상미결정(尙未決定)”

 

조선체육회에서는 세계올림픽대회에 파견할 연원과 선수 문제로 오랫동안 토의를 거듭하여 오던바 지난 15일 육상 역도 농구 레슬링 축구 권투 등의 역원을 포함한 선수 63명이 결정되어 KOC의 최후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그런데 최근 자전거선수의 추가참가 문제로 동 체육회에서 문제가 되어 있으나 또한 금명간 참가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정당국에서는 기정한 63명도 많다고 말하고 있느니만큼 어떻게 될는지 주목을 끌고 있다 한다. 한편 올림픽준비위원회에서는 선수 1인당 2천 달러의 여비와 양복 가방 기타 15만 원을 계상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2일)

 

사이클이 추가되었다는 며칠 후의 기사를 보면 선수단 규모가 미군정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본부임원 경질 요구는 무슨 이유일까?

 

제14회 국제올림픽대회에 우리 조선대표로 파견할 단원의 최후 인선 문제는 자전거경기 종목의 추가로 인하여 일대 난항에 봉착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그 동안 군정당국의 호의로 인하여 총인원수 63명이 66명으로 3명의 추가를 보게 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으나 이번에는 군정당국으로부터 본부위원 2명의 경질을 요구하여 또다시 파견단원의 최후결정에 막대한 지장을 던지고 있다.

 

즉 군정당국에서는 지난번 조선체육회이사회에서 결정한 본부위원 중 부단장 겸 총감독 이병학과 총무 김용구 대신에 부단장에 신기준 총감독에 이상백 양 씨로 경질하라는 요구가 있어 지난 28일에 동 이사회를 개최하고 전기 요구의 수락 여부를 토의한 결과 이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그 최후심리를 KOC에 위촉하였다는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는지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그리고 자전거경기의 감독 및 선수는 다음과 같다. 감독 장일홍. 선수 권익현, 황산웅. (<조선일보> 1948년 5월 30일)

 

조선체육회와 KOC가 6월 4일부터 6일까지 결정한 선수단 본부임원은 단장 정환범, 총감독 이병학, 부단장 신기준, 총무 정상윤-김능구, 재무 심재홍, 의무 유한철, 수원(隨員) 손기정의 8명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8일) 군정당국이 경질을 요구한 두 명 중 한 명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출발을 보름 앞둔 이 시점까지도 딘 군정장관은 사람을 바꾸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출발 1주일 앞두고 아직도 올림픽 파견단 편성문제는 결정을 보지 못하고 지난 12일에는 다시 딘 군정장관이 역원진의 일부를 변경한 문제를 가지고 KOC와 조선체육회 이사회가 각각 개최되었는데 KOC에서는 이묘묵·안동원·김용택·정환범 제씨 외 1명의 5의원이 선출되어 KOC에서 승인한 명부를 개정한 이유를 규명하는 동시 KOC에서 승인한 원안대로 추진시킬 것 등을 군정장관에게 건의할 것 등을 결의하여 14일 오전 군정장관을 방문하였다고 하며 일방 체육회 이사회에서는 대표단 편성에 있어 불필요하게도 시간적으로 지연시켜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주었음과 올림픽 파견에 관한 군정청과의 교섭 자주실행이 불가능상태에 이름은 동 이사회의 책임이라는 결론으로 회장 이하 이사·감사가 총사직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 회의에 이어 14일 오후 1시부터는 임시 평의원회의가 개최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의 결의가 또한 주목되고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6월 15일)

 

간부진의 ‘자폭’이라 할 이 사태가 벌어진 구체적 경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맥락으로 보아 미군정의 선수단 본부임원 교체 요구로 촉발된 것은 분명하다. 교체 요구의 이유가 무엇일까? 기능상의 필요는 미군정이 아니라 체육회와 KOC가 판단할 일이었다. 선수단 참여를 특혜로 여긴 인물들이 로비를 통해 미군정의 힘을 빌리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미군정이 교체를 요구한 것으로 나타난 두 사람 중 하나가 이상백이었다. 이상백은 한국인으로 첫 IOC 위원을 지내는 등 체육계의 독보적 거물이 될 사람이었다. 1984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에 “여명의 개척자들” 시리즈 제30회에 이상백이 등장하는데, 1948년 올림픽을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관계의 착오가 더러 눈에 띄지만 맥락 파악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으므로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명의 개척자들(30) 이상백 - 올림픽 눈뜨게 한 스포츠계의 ‘큰 별’”

 

1923년 일본의 와세다대학 근처의 다카다노바바의 귀족촌.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은 184cm의 훤칠한 한국청년이 하숙을 구한다. ‘조센징’이라며 기피하던 그들도 하숙비는 요구하는 대로 주겠다는 청년의 말에 큰 방을 내준다. 다음날 그는 일본 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초호화 가재도구를 들여놓는다. 하숙집 주인도 20세밖에 안 된다는 청년의 엄청난 씀씀이에 깜짝 놀란다. 더구나 한국인이... 상백(想白) 이상백. 한국 올림픽의 선구자인 그는 이렇게 갈고닦아진다.

 

(...) 와세다대학 2학년 때 농구부를 창설한 그는 28년 일본대학농구협회를 조직, 천부적인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28년 와세다대학 농구팀의 선수 겸 인솔자로 미국 원정을 시도한 그는 샌프란시스코시장의 환영연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답사를 읽어 “일본에도 영어를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

 

(...) 32년 LA올림픽 일본대표단 본부임원으로 일본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 참가하는 데 후원자로서, 또 해방 후 한국 올림픽운동을 펴는 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한다.

 

32년 일본선수단이 LA에 가는 도중 하와이에 기항하자 한국 독립에 앞장을 섰던 한인회에서 일본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한 마라톤선수 김은배와 권태하, 그리고 복싱의 황을수를 초청, 환영연을 베푼다. 한인회는 이들을 데리고 당시 비참하게 살던 동포들의 생활상과 나라를 찾기 위한 운동을 소개,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뒤늦게 이 얘기를 들은 이상백은 한인회를 찾아가 “나는 일본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왔다. 또 일본대표단의 한국선수들도 용기와 포부를 불태우고 있는 젊은이들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 동포의 비참한 생활상을 공개하는가?”라고 항의했다. 그의 지론은 비록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광복의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배사죄한 한인회는 이튿날 한국어신문에 그의 멋진 사상을 대서특필한다.

 

35년 일본체육회 전무로 발탁된 이상백은 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대표단 총무로 참가, 뒷날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브런디지를 만난다. 한국선수 출전을 가로막던 일본 집행부의 횡포를 저지시킨 것도 그가 전무로 있었기 때문이다.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쓴 것도 바로 이상백의 노력으로 출전이 가능했던 것.

 

민족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 체육계에서 갈고닦아 온 조직력과 외교수완을 마음껏 발휘한다. 한국의 올림픽위원회가 이상백에 의해 만들어진 지 1년 후인 47년 5월 15일,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브런디지 IOC 위원장으로부터 이상백을 도와 조선의 올림픽 참가에 힘써 달라는 서한을 받는다. 하지는 다음날 KOC 부위원장인 이상백과 오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브런디지의 편지를 공개하며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선의 IOC 가입 문제를 서둘러 달라.”고 당부했다.

 

일에 착수한 이상백은 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처음 대면한 후 서신 왕래 등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브런디지의 서신에 감사하면서 당시 KOC 부위원장 전경무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가 5월 27일 저녁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이상백은 후속조치로 미국에 거주하던 이원순을 6월 15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 제40차 총회에 급파, KOC의 IOC 가입을 정식으로 승인받고 한국의 올림픽 참가 결정 선물을 얻게 된다.

 

이로써 한국은 48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런던올림픽에 69명의 선수단을 파견한다. 이상백의 수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1회 대회를 51년 3월 인도에서 치른 아시안게임 정식 회원국이었던 북한을 축출하고 한국을 가입시켰다. 66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때는 한국에 “KOREA”를, 그리고 북한에는 “NORTH KOREA”라는 국호를 표기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탁월한 외교능력 덕분이었다.

 

이상백. 그가 한국스포츠를 위해 해온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는 66년 4월 14일 심근경색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로 매도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그의 수완도 능력만큼 발휘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

 

신상돈 기자

 

 

Posted by 문천

 

얼마 전 후지이 다케시 선생 만났을 때 듣지 않았다면 이 행사가 있는 줄 모르는 채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사람 많은 자리 싫어하는 줄 아는 서 선생이 내게 일부러 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참석하겠다는 뜻을 후지이 선생에게 전해듣고는 아마 꽤 기뻤던 모양이다. 행사 전의 연락이나 행사장의 예우에서 그의 제자들이 내게 깍듯했던 것은 그로부터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미리 부탁받은 '말씀'을 위해 이런저런 지난 일을 한 차례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 것도 좋은 계기였다. 서 선생과 내가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왔고 함께 한 일이 많지 않지만, 막상 차분히 생각해 보니 공유하는 것이 적지 않다. 역사 공부와 민족사회에 대한 생각을 나랑 제일 많이 공유하는 분이 서 선생 같다. 그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좌담 중 자기 아버지의 세계관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얘기를 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아버지와 내 얘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사람 많은 자리에 나가 새로 만난 사람들도 많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생각 외로 반가운 마음을 많이 느끼고 불편한 마음은 별로 없었다. 앞으로는 사람들 더 많이 보면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마음속의 자격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구실 제대로 하며 산다는 자신감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 만날 때 불편한 마음을 많이 일으켰던 것이 아닐까.

 

"해방일기" 작업이 역사학계 안에서나 밖에서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처럼 널리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역사학계 안에서의 평가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후한 것 같다. 앞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데 지금까지보다 좋은 여건을 기대할 수 있겠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떠오른 생각이 많았는데, 마구잡이로 적다가는 실례되는 일이 많을 것이고, 연회장에서 가까이 앉았던 몇 사람 기억만 적어둔다. 내 왼쪽에 유인태 의원, 맞은편에 강창일 의원, 국회의원들이 공교롭게 몰려 있었다. 유인태 의원과는 어린 시절 같이 살던 동네에서 만났는데(초등학교부터 선배다) 학생시절 풍모가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 몇 년 후배인 강창일 의원과는 서로 살짝 삐딱한 사이인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내 오른쪽에는 정창현 교수가 앉아 중앙일보 시절을 잠깐 회고할 수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천희상 선생이었다. 천 선생은 참 묘한 인연인데, 나를 지나치게 떠받들어 주는 것이 때로 불편할 정도다. 강연장에 막 들어갔을 때도 원혜영 의원을 내 자리로 모셔와 인사를 시키는 바람에 좀 민망했었다. 원 의원이 문리대 몇 해 후배니 내 자리로 와서 인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아무 타이틀 없는 사람에게 일국의 국회의원을 끌고 와 인사시키다니, 참 천 선생다운 행동이다.

 

천 선생 옆에 있던 정현백 교수와는 잠깐이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만난 일이 없고 1999년 역사학대회 때 그의 발표에 감명을 받았고, 그 발표 중 한 대목을 내가 글에 써먹은 일이 있다는 얘기를 하니까 여걸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붉히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시냐며 즐거운 기색이다. 독일에서는 민족사 교육이 없다는 점이 통일을 쉽게 만들어준 조건으로 지목된다는 얘기였다.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내 일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현백 교수의 동생 정용욱 교수였다. 그의 책 <존 하지와 ...>를 <해방일기>에서도 많이 이용해 왔는데, 한국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을 크게 보는 관점을 나랑 공유하는 사람이다. "노무현 전기" 형식으로 작업을 생각한다는 얘기를 하자 무척 재미있어 한다. 자주 만나면 도움을 많이 얻을 만한 친군데 서울대학이 너무 멀어서...

 

어제의 주인공 서중석 교수, 내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교수직에서는 퇴임이지만, 그의 작업에는 한 차례 중간결산의 계기일 것이다. 그의 경력 중 제도권 밖에서의 공부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일전에 적었는데, 퇴임 후 다시 제도권 밖의 조건을 많이 누릴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그런다면 나도 지금까지보다 많이 어울려 놀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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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