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긍긍"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메일에 왜 자꾸 착오가 생기는지 잘 모르겠네요.

 

선생님 블로그 통해서 진즉에 편지는 접수했습니다.

다만 요즘 제 마음이 썩 편치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어졌네요.

선생님의 우호적인 반응과 달리,

저는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얻어 맞고 있거든요.

한국사 전공하시는 한 분과는,

메일로 실시간으로 다섯 편의 글이 오고가는 설전도 펼쳐야 했습니다.

근대라는 잣대를 거두고 동아시아의 과거를 다시 보자, 는 제안이,

자꾸 '친중파'로 독해되니 곤혹스러움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저의 궁극적인 지향 또한 더 나은 '한반도'에 있음이 분명한데도요.

작년까지의 글에서는 이런 격한 반론이 없었는데,

그래서 요즘에는 제가 선생님을 대신하여 덤탱이로 욕을 실컷 먹는 것 아닌가 하는 투정도 입니다.

나이도 모자라니 만만한데다가,

아직 소화도 덜 된 채로 자꾸 토해내니 마땅치가 않을 수 있겠죠.

 

소화불량의 절정은 이번 달에 쓴 <고별민주>라는 글이었어요.

어디 응모를 겸하여 작심하고 시작은 했더랬습니다.

이 또한 다분히 선생님과 교신하며,

또 직접 뵙고 들은 몇 토막 말씀들에 크게 자극받은 바가 있었지요.

이거야말로 근대의 마지막 신화마저 깨는 파천황이구나 해서 덥석 물었고,

몇 달간 민주주의 공부를 좀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몇 달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큰 주제였나 봅니다.

원고지 80매 쓰는데 근 한 달을 전전긍긍 했거든요.

아주 죽을 썼습니다.

본래는 선생님께 미리 선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투고할 만한 것인지, 아직 여물지 않아 더 익혀야 하는 것이지 감별을 청하려고요.

헌데 억지로 겨우겨우 글을 짜내다 겨우 마감에 임박해 마침표를 찍었고,

원고를 보낸 이후 지금은 후회만 한가득입니다.

다시 꺼내어 보고 싶지도 않네요.

애당초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을 저질렀구나.

쓰다 만 글을 보냈으니 민망함도 이루 말할 수 없고요.

약간 울적하기까지 합니다.

아는 것의 8할만 말하라, 는 말씀도 귓가를 계속 맴돌고요.

아무래도 '어른 흉내'는 그만둬야 겠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요.

 

서중석 선생님 정년 인터뷰는 여러 매체에서 접했습니다.

뉴라이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진보(역사)학계'에 대한 호통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현대사 공부만 열심히 해서야 제대로 된 반격을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그래서 역전(?)당한 것 같거든요.

조선에도 '근대'의 맹아가 있었다라는 내재적 발전론의'뻥'이 밝혀지면서,

식민지 근대론 등이 맹위를 떨치고 이에 마땅히 대응할 방로를 못찾은 것 같아요.

그들이야말로 근대의 가치=진보에 충성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역문역, 한역연 등 '87년체제'의 역사학 그룹들이 활력을 잃은 것도,

19세기 이전과 단절된 20세기에 지나치게 편중되었던 패착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조선을 다시 읽는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 작업이 '회심의 일격' 같던데요.

 

그런 차원에서 저는 <노무현의 대한민국>을 크게 기대하는 편입니다.

선생님이 자처하시는 '보수주의'라는게,

근대의 좌/우 자체를 상대화하는 새로운 지평을 말하는 것 같거든요.

제가 여기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어울렸던 친구들이 대저 '좌' 쪽인데,

그 편도 뉴라이트 못지 않게 근대의 질곡에 갇혀 있는 듯해요.

제 글에 부정적인 반응도 그 쪽이 더 심하고요.

'건강'이라고 표현하셨던 잣대,

20세기나 근대를 근원적으로 재인식하는 척도로 대한민국을 살필 수 있는 안목.

그런 패러다임으로 한구사를 조감해 주시면,

저도 그에 슬쩍 기대어서 좀 편하게 욕 덜 먹으면서 말할 수 있지 싶습니다. ^^

 

<해방일기>의 대미가 머지 않았네요.

마지막 편의 글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건강과 건필을 빌면서.

 

-이병한 드림

 

 

Posted by 문천

 

해방 후 미군정은 경찰 인원을 크게 늘렸는데, 총독부 경찰 출신이 그 중핵이 되었다. 해방 당시 조선인 경찰이 8천 명 가량이었는데, 그중 약 5천 명이 미군정 경찰에 들어왔다 하니, 이남 지역의 총독부 경찰관은 거의 전원이 미군정 경찰로 이어진 셈이다.

 

같은 경찰이라도 악질 등급에는 차이가 있었다. 개인 출세를 위해 경찰이 되기는 했어도 눈치 보며 그럭저럭 경찰 노릇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제국을 받들며 동족을 악착같이 탄압한 자들도 있었다.

 

경찰 지휘관으로 경무부장 조병옥 다음으로 거물 행세 한 것이 수도청장 장택상이었는데, 장택상 휘하에는 악질 간부들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노덕술, 최운하, 최난수 등은 정판사사건과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사건 등 정치적 사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경찰 간부들의 성분 분석을 치밀하게 해보지는 않았으나, 장택상이 악질 간부 챙기는 데 열심이었다는 인상을 한 평범한 경찰관의 회고에서 받는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어요. 이천에 왔다가 그 다음 안성으로 갔는데, 당시 서장이 가창현이라는 분이었어요. 충남 서산 사람으로 마쯔야마라는 개명을 썼는데, 알고 보니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했던 사람이었어요. 해방되고 고등계 형사들은 대부분 그만두었는데,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안성경찰서로 왔어요. 알고 보니 고등계형사를 하는 중에 수도경찰청장 하던 장택상 씨를 붙잡아 고문을 했던 자더라고요. 고문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고, 취조하다가 얼굴에 침을 뱉는 정도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가창현이 제일 먼저 장택상 씨를 찾아가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장택상은 역시 그릇이 큰 양반이라 “다 반성하고 잘해 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가지를 자르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경감 직위 그대로 안성경찰서장으로 보냈어요. 고등계형사가 다시 발탁되기는 그 사람이 처음일 겁니다. (문제안 외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28-229쪽, 홍순복 증언)

 

장택상을 “그릇이 큰 양반”이라니까 좀 우습기는 하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상대에게는 큰 도량을 보여주는 재주도 있었던 모양이다. 가창현은 1952년에 경무관으로 승진,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을 지냈다.

 

장택상이 조병옥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친 데는 심복이 된 악질 간부들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그들 중 하나인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가 비리 혐의로 경무부 수사국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

 

(...) 선거를 전후하여 잠잠해졌던 수사국은 수일 내로 근일에 드문 긴장한 공기 속에서 인천여자경찰장을 비롯하여 소금 먹은 경찰간부와 수도경찰청 통신과장 이주호 등을 연속적으로 송청하더니 17일 밤부터 다시 한층 긴장된 속에 돌연 수도사찰과장 최운하와 동대문경찰서장 박주식 등을 연일 극비밀리에 철야하여 취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편 수도경찰청에서는 매일 과서장이 구수회의를 열고 있다는 바 통신과장 이주호를 수사국에서 구속 송청한 이래 수사국과 도청 간에는 미묘한 공기가 떠돌아 세인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침묵 중의 수사국은 숙청의 속도를 감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최운하와 박주식은 직권을 남용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거액의 수회를 한 일대 독직사건으로 수사국 숙청망에 걸려들은 것이라는 바 그 내용인즉 작년 10월경 서울 을지로2가 오리엔탈공무사 사장 강태섭(38)과 김용태(40)가 공동출자하여 청부공사를 한 결과 2천만 원의 이익금을 얻었는데 강태섭은 이것을 혼자먹을 흉계를 꾸며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와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박주식에게 거액의 금품을 주고 공작을 하기 시작하자 이에 매수당한 최운하와 박주식은 이것이 민사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강태섭의 청탁을 받아 사기죄로 몰아넣고 김용태 외 2명을 종로서 유치장에 20일 이상이나 불법감금하고 게다가 김용태에 이득금 반분의 권리까지 포기하라고 공갈협박하여 권리포기의 서약서까지 받아놓아 2천만 원을 강태섭에게 독점시킨 후 36회에 걸치는 향응을 받고 11월 14일 최운하는 현금 30만원 박주식 25만원을 받았으며 각각 시가 5만원의 양복도 한 벌씩 받아 입은 것이라 한다.

 

수사국에서는 인적 물적 증거를 잡고 준열한 취조를 한 결과 죄상이 판명되어 21일 오전 11시에는 민동식 판사로부터 영장까지 교부를 받았으니 송청은 시간문제라 한다. 이에 앞서 수사국장 조병설은 19일 서울지방검찰청을 방문하고 모종 의논을 하는 듯하더니 21일 오전에는 수도청장 장택상이가 역시 지방검찰청 청장과 차석검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등 자못 복잡 미묘한 공기 속에 사건은 진전되고 있는 모양이나 참다운 경찰의 확립을 위하여 모처럼 칼집을 벗어난 전가 보도에 기대는 크다. (...) (<조선일보> 1948년 6월 23일)

 

전형적 비리사건의 하나일 뿐으로 보이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 장택상의 심복이 저런 정도 일로 걸려든다? 장택상의 위상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장택상은 6월 24일 이 사건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엄밀 조사 후 규명 - 최-박 양 경관 사건 수도청장 담”

 

수도청장 장택상 씨는 24일 기자단과 회견하고 수도청 내 간부 독직사건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근일 중 각 신문지상에 수도청에 관한 부정확한 기사는 매우 유감된다. 배후에서 고의적으로 수도경찰의 강력한 조직을 약체화하려는 목적으로 이 같은 선전을 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본청 간부 중 독직사건이 엄연히 존재하고 또 취조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하여 당연히 본청에서 취조할 사건으로 현재 취조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닌 기사를 과장하고 증거 없는 보도재료를 조작하여 수도청장이 군정장관에게 불리었느니 게재 금지를 강요하였느니 하는 보도로 민중의 이목을 현혹케 함은 무슨 일인가.

 

법치국에서는 사건 문초가 결말을 짓기 전에는 추측적으로 피의자를 사직의 이목에 불리하게 하지 않는다. 시기심과 인기주의로 이와 같은 정보를 정당한 경로를 피하고 곡선을 밟아 민중의 이목이 될 보도계에 제공함은 매우 유감되고 양해키 어려운 일이다. 본청은 그 사건을 엄밀 조사하여 추호도 사건을 도호치 않고 처리할 것이며 그 사건 내용은 유감없이 우리 보도계에 제공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5일)

 

“시기심과 인기주의” 같은 말은 조병옥을 겨냥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장택상은 이 사건이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하여 당연히 본청에서 취조할 사건”이라고 주장했는데, 며칠 후 경무부 수사국 이만종 부국장이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장 수도청장이 수도청 간부 독직사건에 대하여 지상에 담화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 사건을 엄밀히 조사하여 처리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으며 또한 수도청의 강력한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모략이 배후에 개재하였다고 운운하나 동 사건은 상급관청인 수사국에서 적발 문초한 결과 인적 물적 증거로써 범죄사실이 역연히 판명되어 이미 검찰당국에 송청 심리 중임에 불구하고 재조사한다는 것은 하등 법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더욱이 피의자가 수도청 간부임에 비추어 이해하기 곤란하며 이는 경찰의 명령계통을 문란시키는 동시에 전례 없는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경찰의 부패한 분자를 단호 숙청함으로써 도리어 명랑하고 강력한 진용이 엄존하는 동시에 민중이 기대하는 민주경찰이 구현될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7일, “재조사 권한 없다 - 부패분자는 단호 숙청”)

 

같은 날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만종의 발언에 “서류가 수도청으로 간 것은 지난번 수도청장이 경무부장실에 왔을 때 참고로 본다고 가져간 것으로서 부장이 준 것도 아니요 따라서 사건이 수도청으로 이관된 것은 아니다.” 하는 한 마디가 더 붙어 있다. 장택상이 조병옥을 찾아가 항의하다가 관계서류를 막무가내로 들고 나왔단다. 장택상이 경무부의 기습을 당하고 검찰로 송청된 뒤에 쫓아가 뒷북을 친 것 같다. 아무튼, 경무부에서 이미 수사한 일을 지방경찰청인 수도청에서 조사하겠다니, 장택상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최운하와 박주식이 불구속 상태로 송청되고(<경향신문> 1948년 6월 25일) 기소 역시 불구속으로 된 것은(<동아일보> 1948년 7월 4일) 그나마 장택상의 힘 덕분이었을까? 그런데 이 독직사건의 파장이 진행되는 동안 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끔찍한 상황이 장택상과 그 심복들에게 닥친다.

 

“드러난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 전모 - 장살(杖殺) 후 사체유기 - 수사과장 등 어제 송청”

 

대 서울 장안 한복판에서 형사사건 혐의자에게 악독한 고문을 가하여 이를 죽인 다음 한강물에 띄워버린 천인공노의 전율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자로서 수도청 사찰과장 노덕술 등 간부를 경무부 수사국에서 문초 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 믿지 못할 사건이 노덕술 등의 자백으로 백일하에 사실화되는 동시에 26일 일건서류와 함께 폭행 능욕 상해치사 사체유기 죄명으로 일당은 구속 송청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러하다.

 

금년 정월 24일 수도청장 장택상 씨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수도청에서는 27일 그 혐의자로 박성근(25)이를 사찰과에서 체포하여 중부서 형사실에서 취조 중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 동 사찰과장 최운하는 27일 오전 10시 취조 현장에 출두하여 소위 임화(본명 박성근)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하여 노덕술 자신이 곤봉으로 난타 고문하여 중상을 입힌 후 다시 노덕술 지휘로 사찰과 부과장 박사일 수사과 부과장 김재곤 사찰과 경위 김유하 사찰과 경사 백대봉 등 4명에게 물을 먹이는 고문을 하라고 지시하여 드디어 사망케 하였는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노덕술은 김재곤 박사일을 수도청 관방장실로 불러놓고 3인이 모의하여 도주를 가장키로 하고 박사일 등이 28일 오전 2시경 중부서 형사실 들창문으로 뛰어나가며 저 놈 잡아라 고함을 쳐서 다른 직원에게 임화가 도주한 것 같이 오인시킨 다음 박사일 김재곤이는 구급용 자동차에 시체를 싣고 한강으로 가 인도교와 철교 사이의 얼음 파는 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라 한다.

 

“책임자 인책 필요 - 수도청장은 부인해 왔다 - 수사국 조-이 양씨 기자단 회견 담”

 

고문치사 사건에 관하여 수사국장 조병설 부국장 이만종 양씨는 26일 오전 11시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수도청 책임자는 이 사건을 아는가?

답: 알 것이다. 2월 3일 당시 경무부장이 직접 장 총감을 불러 고문 사실을 물었는데 그때 장 씨는 극력 부인하였다.

 

문: 사건 단서의 경위는?

답: 고문치사 했다는 노덕술의 진술로 취조에 착수했으나 장 청장의 부인으로 지금까지 내사해 왔던 것이다.

 

문: 책임자의 책임규명은?

답: 당연히 인책 사직해야 될 것이다.

 

문: 고문취조 경관을 수도청에서 치하했다는데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2월 5일 오전 11시 수도청 회의실에서 고문치사에 관련한 직원과 현장을 본 기타 직원 등 14명을 불러 치하 훈시하고 최고 2만 원 최저 5천 원을 주었다.

 

문: 이런 사건의 빈발을 어떻게 보는가?

답: 고문하지 못하게 지시 단속하고 있는데 말단 제1선에서는 이 지시를 무시하고 있는 곳이 있어 여러분에게 미안한데 앞으로는 이를 계기로 철저 단속하겠다.

 

“노덕술 도주”

 

이 고문사건의 수괴라고 할 수도청 관방장 겸 수사과장 노덕술은 그 동안 경무부 수사국에 구금 문초 중이던 바 25일 수도청 부청장으로부터 신원은 책임질 터이니 잠시 돌려보내라고 요청한 바 있어 수사국에서도 사건 문초를 다 끝내고 돌려보냈는데 노덕술은 뻔뻔스럽게도 도주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한다. 이에 수사국에서는 도주 사실을 탐지한 즉시로 전국 각 관구에 체포령을 내렸다 하므로 체포는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27일)

 

한 달 후에 있을 고문치사 사건 탄로 이야기를 미리 꺼낸 것은 지금 진행 중인 최운하 등의 비리 적발과 같은 맥락의 일로 보기 때문이다. 조병옥-장택상 간의 권력투쟁 맥락이다. 조병옥은 한민당 사람인데, 장택상은 이승만에게 매달린다.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병설과 이만종은 사건 단서를 묻는 기자들에게 “노덕술의 진술”이라고 대답했다. 짐작컨대 노덕술의 진술은 취조를 통해 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건 당시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자랑삼아 해온 이야기일 것 같다. 사람 하나 죽여도 이렇게 끄떡없다고 자랑했을 것이다. 자기네 세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건 직후 조병옥이 장택상을 불러 고문 사실을 물었다는 이야기도 위 문답 중에 있다.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경무부 수사국장과 부국장이 장택상을 놓고 “당연히 인책 사직해야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데서 조병옥의 의지가 느껴진다. 조병옥은 6월 초부터 ‘독불장군’ 장택상의 제거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지가 세워지자 수사국이 수도청을 정조준할 수 있었고, 고문치사 사건 관계자 중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증인’이 나올 수 있었다.

 

1949년 1월 25일 새벽 노덕술은 효창동의 한 사업가 집에서 반민특위의 손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운전기사와 무장경관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한다.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9년 1월 26일, “특위 활동 본궤도에 - 노덕술을 체포, 영등포서에 수감”)

 

“고문치사 사건으로 반년을 두고 잡으려던 것을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노덕술에게 무장경관이 공공연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조사위원회에는 무기와 자동차가 없어 일을 못하고 있는 때, 노(덕술)는 자동차와 권총을 6정이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삼아 뒷이야기 하나 붙인다. 노덕술이 체포 당시 경찰 자동차와 호위경관 6명을 대동하고 있다는 소문에 여론이 악화되자 서울시장 윤보선이 변명이랍시고 했다는 이야기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27일)

 

“내가 듣기에는 노덕술이가 가지고 있던 자동차는 경찰의 것이 아니다. 그 찝차에 ‘나쇼날 폴리스’라고 써있어 경찰책임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찝은 노 씨가 경찰에 재직할 때 자기 소유의 찝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호위경관이 6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실은 노 씨가 과거 3년 동안 경찰에 재직하였을 때 좌익을 탄압한 사실이 있어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관 1명을 배치한 사실은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5명은 아마 사적으로 놀러갔던 것이 아닌가 본다. 어쨌든 그의 진상을 조사하여 발표하겠다.”

 

결국 이 고문치사 사건은 1949년 4월 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백대봉이 재판 막바지에 자취를 감췄고, 수사과정에서 백대봉에게 신변 보장과 경위 승진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증언에는 증거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경향신문> 1949년 4월 30일) 반민특위에 대한 반격이 준비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

 

1. 연합국의 조선 독립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약속은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출발했다. 그에 앞서 1941년 8월 영국과 미국이 작성한 대서양헌장에서 조선을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는 연합국의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카이로선언의 배경이 되었다. 대서양헌장과 카이로선언이 나온 시점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헌장과 선언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1941년 8월 14일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의 플래신셔 만에 온 처칠 수상이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 오거스타 호로 옮겨 타 프랭클린 대통령과 만났다. 수상과 대통령으로서 첫 만남이었고 2년 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첫 만남이기도 했다.

 

유럽을 휩쓰는 추축국의 위세 앞에 영국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였다. 독일이 그 동안 미뤄뒀던 소련 침공을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판단 아래 결행한 것이 달포 전의 일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앞에 처참하게 밀리고 있었고, 영국에게는 의지할 만한 연합국이 없을 때였다. 미국은 영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뉴펀들랜드 섬의 대서양회담은 영국이 미국의 참전을 간청하는 자리였다.

 

대서양헌장은 미국에 대한 영국의 항복문서였다. 피압박민족의 독립, 자원과 무역의 개방 등 연합국 전쟁 목적의 새로운 규정으로 영국이 식민제국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고비였다. 미국 여론과 의회를 참전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했던 영국의 양보였다. 옛 슈퍼파워 영국 대신 새 슈퍼파워 미국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기본 원리가 대서양헌장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4개월 후 미국이 정식으로 참전했다. 참전의 직접 계기는 진주만 습격이었지만, 그 습격도 대서양헌장 발표 이후 미국의 영국 지원이 강화된 결과였다. 미국이 일본의 자원 획득 활동에 강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던 일본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이 열렸다. 소련과 미국의 참전 이후 추축국의 위세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고 1943년 들어서는 연합국의 공세가 추축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와의 정전협정은 연합국의 궁극적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의 끝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일본 문제를 다룬 11월의 카이로회담과는 일본과 교전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빠졌고, 독일 문제를 다룬 12월의 테헤란회담에는 중국이 빠졌다.

 

카이로회담의 조선 독립 약속에는 한편으로는 대서양헌장의 민족자결주의 실현이라는 뜻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이 아직 독일군 장악 아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이 전세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어준 최근의 경험이 있었다. 추축국의 내부 결속을 와해시키는 전략은 그 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도 성과를 거두는데, 조선 독립의 약속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본제국의 결속력 약화를 노리는 목적이 있었다.

 

 

2. 조선과 오스트리아, 신탁통치 결정의 의미

 

카이로선언이 조선 독립을 약속한 의미를 바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 그 몇 주일 전의 모스크바선언이다. 미-영-소 3국 외상회담에서 작성된 이 선언에 “이탈리아에 관한 선언”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선언”이 들어 있는데, 후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연합왕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아메리카합중국 세 나라 정부는 히틀러 침략의 첫 희생물이 된 나라인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은 1938년 3월 15일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강제한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시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에 3국은 구애받지 않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가 복원되고, 그럼으로써 오스트리아인 자신과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이웃 여러 나라 주민들이 항구적 평화의 불가결한 근거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향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3국은 함께 희망함을 선언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피면할 수 없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최종적 처리에서 감안되리라는 사실을 오스트리아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카이로선언에서는 연합국의 전쟁 목적이 영토 획득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밝힌 다음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영토의 반환(대만과 만주 포함)과 함께 조선 독립 방침을 밝혔다. “조선은 필요한 과정을 거쳐 자유와 독립을 얻을 것”(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이라는 간단한 내용이다. 이 간단한 내용에 연합국의 어떤 뜻이 얹혀 있던 것인지, 오스트리아 독립에 관한 모스크바선언 내용이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연합국의 눈에는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위치가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다. 두 나라는 합방을 통해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었는데 독일, 일본과 다른 자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연합국이 승전할 때 두 나라를 독일과 일본에서 떼어내는 것은 두 전범국의 약화를 위해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방침을 미리 천명할 경우 두 나라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촉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연합국은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연합국의 이런 희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지만, 연합국 눈에는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다. 소련-영국 등 연합국 군대에 백만 명 이상 종군한 폴란드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임정 주석 김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 소식에 오히려 가슴을 쳐야 했던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조선 국내에서도 일본제국 해체를 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도 조선도 “최종적 처리”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10년, 조선은 5년의 신탁통치가 부과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군소리 없이 신탁통치를 감수하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거센 반탁운동 때문에 미-소간 합의가 깨어지고 1948년의 분리 독립을 거쳐 내전을 치렀다. 내전 후에도 조선민족은 두 개 국가로 갈라진 채 서로 적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3. 미국과 소련, 조선 점령의 의도

 

이제 종전 시점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독일은 1945년 5월 8일에 항복했고 일본은 8월 15일에 항복했다. 일본과의 전쟁에는 미국과 중국이 주역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전쟁 수행능력이 약했기 때문에 승리의 주역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제국 처리의 칼자루를 쥐는 데 다른 연합국의 이의 제기가 별로 없었다.

 

일본제국 처리를 놓고 미국의 주도권에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연합국이 소련이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겪으며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였고 일본제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였다. 그리고 종전 당시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다. 또한 소련은 사회주의국가였기 때문에 이미 유럽의 전후 처리에서도 사회주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는 양상이 시작되어 있었다.

 

1943년 말 카이로와 테헤란의 정상회담에서 추축국에 대한 기본전략이 정해졌는데, 독일을 꺾는 데 우선 연합국의 역량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 일본을 요리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다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일본에 개전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독일과의 전쟁에 소련의 역할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일본 쪽 부담은 지우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그 방침에 따라 소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 진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렸고, 일본은 곧 항복했다.

 

우리는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 항복의 직접 원인인 것처럼 배워 왔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소련군 참전을 일본 항복의 더 중요한 계기로 보는 관점이 연구자들 사이에 확산되어 왔다. 그 관점에 따르면 미국의 원폭 투하 의도도 일본 항복의 재촉보다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에 있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 미국의 공식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통파’ 관점과 대비해서 이 새로운 관점을 ‘수정주의’ 관점이라 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소련의 적화 야욕을 강조하는 ‘정통파’와 미국의 역할을 중시하는 ‘수정주의’ 사이의 대립과 평행한 것이다.

 

수정주의 관점에 따르면 일본 항복은 시간문제였는데 그 항복을 앞당김으로써 일본 처리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이 커질 시간을 없애는 데 미국의 원폭 투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원폭 투하의 시점에 비추어 타당성이 큰 관점으로 보인다. 소련의 전후 처리 참여가 만주와 북조선 점령에 그친 이유는 실제 전투 지역이 넓지 않았다는 점과 원자탄을 독점 보유한 미국과 충돌을 꺼렸다는 점 두 가지로 이해된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분할점령 등 더 많은 요구를 소련이 내놓았을 것이다.

 

대서양헌장 이래 연합국은 새 영토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표방했다. 식민지 형태의 제국주의가 끝난 이제 이데올로기 대결 형태의 냉전체제가 펼쳐질 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은 영토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점령권이 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에 점령을 통해 공산권을 만들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 구 일본제국을 영향권에 끌어들이면서 한반도를 소련이 구축하는 공산권을 가로막는 보루로 만들었다.

 

미군도 소련군도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조선 민족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을 권리를 가진 주체인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국민 중에는 자기네 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조선인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는 착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겠지만, 두 나라 정부에게는 그런 뜻이 없었다. 조선 점령을 국익 신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뜻이 절대적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