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민족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표상이다. 민족언어가 없다면 민족문화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근세의 뚜렷한 사례로 중국에 군림했던 만주족이 있다. 만주족도 언어 보존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든 공문서에 한어(漢語)와 함께 만주어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2백여 년을 지내는 동안 만주어는 만주족의 생활에서 사라져버렸다. 만주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이 희미해져서 형식적 존재만 남아있다.

 

민족정체성에 위협이 제기된 근대 초기에 일어난 한글운동은 곧 민족운동이었다.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되면서 민족운동으로서 한글운동은 더욱 부각되었다. 1921년 세워진 조선어학회(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가 이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일제 말기 가장 큰 민족운동 탄압이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는 데서 이 학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사업이 1929년에 시작한 <큰사전> 편찬이었다. 조선민족의 튼튼한 정체성을 뒷받침한 것은 수준 높은 언어와 문자였다. 특히 15세기에 만들어진 한글은 근대적 언어생활에 적합한 문자다. 나는 ‘근대화’의 요체가 사회 내 활동 주체의 확대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과 한국에서는 유럽에서보다 먼저 나름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한글 창제를 그 증거의 하나로 보는데, 아직 뒷받침이 충분하지 못한 관점이므로 여기서 크게 고집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글이 근대적 민족운동의 근거로 큰 자산이 되었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큰사전> 편찬의 의미는 한글의 제도화에 있었다. 민간의 관습 형태로 존재해 온 한글을 민족국가의 제도적 근거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제일 먼저 집중한 것이 이 사업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 때 압수된 사전 원고를 조선통운 창고에서 찾아 사업을 복구하게 된 사정을 1945년 10월 4일 일기에 적었다.

 

되찾은 원고 분량에 대해 관계자들의 기록에 약간의 편차가 있으나 대략 400자 원고지로 10여만 매에 달한다. 1957년 완간에 이르게 될 분량이 조선어학회사건 전까지 갖춰져 있었고, 해방된 상황에 맞춰 수정-보완이 필요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의 추가 작업보다 비용이 출판을 위해 더 절박한 문제였던 상황을 정재환은 이렇게 서술했다.

 

원고를 찾고 교정 작업을 시작했지만, 학회 재정 형편으로는 자력 출판이 불가능했다. 1947년 봄, 이극로와 김병제는 원고 보따리를 들고 을유문화사를 찾아 출판을 부탁했지만, 출판사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사전 편찬이라는 거창한 작업을 맡는 것은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회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을유문화사의 문을 두드렸다. 이극로, 김병제, 이희승이 세 번째로 을유문화사를 찾았다. 삼고초려가 따로 없었다.

 

이날 이극로는 원고 뭉치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은 일이겠소?” 이극로의 한탄과 호소는 마침내 을유 중역진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단 1권만이라도 간행하기로 하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또 다시 대책을 수립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해 5월 13일 조선어학회와 을유문화사는 <큰사전> 출판 계약을 체결하였고,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 간행하였다. B5판(4x6배판) 600면에 특가 1,200원이었다.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411-412쪽)

 

제1권을 겨우 내고 다음 단계 전망이 막막한 채로 8개월이 지난 1948년 6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45,000달러의 원조를 결정한 것이다.

 

“‘조선말큰사전’ 미 락펠러재단서 물자 제공”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조선말큰사전>은 전 6권 중에 그 첫 권을 작년 10월 한글날에 내어놓았고 둘째 권 조판도 이미 완성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간할 것이라는데 여기에 드는 막대한 물자의 구득에 고심 중 지난 3일 문교부를 통하여 미국 락펠러재단으로부터 조선말큰사전에 필요한 우수한 물자를 조선어학회에 제공하겠다는 소식이 도착되었다 한다.

 

이는 조선어학회로부터 문교부 편수국장 고문이었던 앤더슨 씨를 통하여 락펠러재단에 교섭한 결과 지난 6월 18일 동 재단에서 미화 4만5천 불에 해당한 물자로 이를 돕기로 가결하였다 하며 그 물자는 머지않아 조선에 도착되리라 하는데 이로써 동 사전은 가격이 매우 싸질 것이며 어학회 사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1일)

 

조선어학회 간부인 장지영과 최현배가 편수국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앤더슨 대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인데, 그들이 문교부 예산을 따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군의 편수국 담당자까지도 필요성을 인정한 사업인데도 미군정 고위층은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 사업을 외면했기 때문에 록펠러재단에 손을 벌리게 된 것이다.

 

록펠러재단에서 제공한 종이 등 재료가 12월 초 인천항에 도착했다. 사전 편찬사업에 종사하다가 이 종이를 받으러 간 이강로의 회고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근 60년 후의 회고인데도 당시의 황홀할 정도로 기쁘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인계를 받는데, 양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 기차로 열세 화차예요. 종이만 아홉 화차야. 그러니까 얼마나 종이가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때 인천에 물건이 지천으로 쏟아져 들어오니까 ‘쌩, 하고 가지고 가기만 하면 내 거다’ 생각하는 쌩쌩이판이 있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큰일났다 싶어 수산경찰서에 부탁해서 경찰관을 여섯 사람인가 화차칸 사이사이 연결되는 마디에 배치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다니면서 읽어버리지는 않나 감시를 하는데, 첫날부터 어떤 사람이 와서 자꾸 종이를 만져 보고 또 돌아다니더니, 사흘째 되는 날 물건을 싣는데 날 좀 오라고 하는 거예요. 갔더니 좀 앉아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자식이 어떤 자식인가 하고 앉았더니 대뜸 물어요.

 

“여보, 저 종이 뭘 할 거요?”

 

“그걸 왜 묻소?”

 

“아, 글쎄 얘길 해보소.”

 

나는 사전 만들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당시 위조지폐를 ‘사전’이라고 했어요. 사사로울 ‘사’에 돈 ‘전’. 그러니까 법에도 위조지폐 만들다가 붙들려 가면 ‘사전죄’라고 했어요. 나는 ‘딕셔너리’, 우리나라 어휘사전을 만든다고 하는데도 그놈은 계속 내가 위조지폐 만든다는 말로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불쑥 동업하자고 그래요. (문제안 외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49쪽)

 

1945년 12월 창립된 을유문화사는 (창립의 해이기도 한) 해방의 해 간지(干支)를 이름에 쓸 정도로 민족문화 창달에 큰 뜻을 갖고 세워져 해방 직후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업적을 이룬 출판사다. 그러나 사전 출판처럼 큰 사업을 진행할 재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1권만을 우선 맡았던 것이고, 제1권이 그렇게라도 만들어져 있는 것이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는 데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전의 조선어학회 사업은 유지들의 출연에 많이 의존했다. 학회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기구였기 때문에 체면상 돈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재력가도 많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학회 간부들이 민족주의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친일파 재력가 중에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해서 ‘투자’ 의미로 재물을 제공하려 들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무렵에는 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별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으로 판단이 된 모양이다.

 

“자진 기부한 어학회관, 타협도 없이 방매(放賣)설 - 이 씨 변심에 어학회 분개 성명”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이종회 씨로부터 현재의 사옥인 청진동 188의 건물을 자진 기부받아 이제까지 아무런 탈 없이 사용 중인데 요즘에 들어 기부했던 이 씨는 마음이 변했는지 그 건물을 팔겠다고 신문광고까지 내어 집주인인 조선어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 본 회관이 5월 20일 경매된다는 광고가 게재되었으나 청진동 188 현 회관은 해방 후 집주인(이종회)이 기부한 것으로 이미 그때 신문지상에 발표되어 천하가 다 확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회관은 새삼스러이 경매될 집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 앞에 성명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0일)

 

이강로의 회고 중에 이 이야기도 나온다.

 

지금은 광화문에 한글학회 건물이 있는데,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 사무실이 청진동 188번지에 있었어요. 지금 청진동 고려화재보험회사가 우리 회관이었죠. 그 이야기를 하면 또 기가 막혀요.

 

해방이 되고 친일파들은 금방 죽을 것 같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살 길이 뭐냐? 독립단체나 이런 데에다 뭐라도 조금 기대서 활로를 찾을까 한 거예요. 그렇게 보면 조선어학회가 제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조선어학회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우리가 회관을 지을 테니 이리 오시오, 이리 오시오” 하는데 그 중에서 청진동 회관이 화동에서 제일 가깝고, 지대며 건물도 괜찮았어요. (...)

 

내가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데 그게 1946년인지 47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어쨌든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할 때에요.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 들어오신 뒤에 한 10분쯤 있으니까 웬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누군가 했더니 건물을 기증한 이종회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오더니 최현배 선생한테 말했어요.

 

“이제 그만 돌려주시죠.”

 

“뭘 돌려달라고...?”

 

“아, 이 집 말입니다.”

 

“아니, 우리한테 기증한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돌려달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여보시오, 그런 소리 마쇼. 누가 당신에게 사용하라고 했지 가지라고 했소? 몇 해 동안 집세 한 번 안 내고 잘 썼으면 돌려줘야 할 거 아니요.”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외솔 선생이 얼굴이 새빨개집디다. 말을 더 못했어요. 우리도 화가 나서 저놈의 새끼 아주 그냥 때려주고 싶은데...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있는데 더구나 건물을 기증받으면서 받았다는 증거 하나 받지 않았던 겁니다. 이 노인네들이 참 어수룩하기도 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때 대법원장 하던 조진만 씨라고 있었는데 그분한테 이야기하니까 재판을 해도 진다는 겁니다. (<8-15의 기억> 151-153쪽)

 

이 일이 있었던 시점을 이강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반민특위가 해체된 1949년을 짚어보기도 한다.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한 상황이 그의 기억 속에서는 반민특위 해체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47년에 친일파 득세가 시작되어 있던 사실을 이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일파 재력가들이 앞 다퉈 회관을 제공하던 시절 같으면 사전 출간사업도 록펠러재단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재단 지원 소식이 전해질 때, 사전 편찬사업의 핵심인물 중 이극로(1893~1978)와 김병제(1905~1991) 두 사람은 평양에 있었다. 두 사람은 이후 북한의 어문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극로는 1927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사전 편찬사업을 열고 이끌어오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인물이고, 김병제는 그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로, 다년간 사전 편찬사업의 실무를 맡아 온 인물이었다.

 

정재환은 <한글의 시대를 열다> 제2장 제2절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일부 학자들의 북행”에서(47-100쪽) 이극로와 김병제 등 월북 한글학자들의 월북 경위와 북한에서의 활동 내용을 서술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비해 이북 정권이 어문정책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뒀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극로 등의 월북의 계기를 김두봉(1889-1960)이 만들어준 사실을 정재환은 지적한다. 김두봉은 주시경(1876-1914)의 직전 제자로서 이극로와 나이는 몇 살 차이밖에 안 되지만 한글운동에서는 대선배였다. 그런 그가 제2인자 역할을 맡고 있던 데서 이북 정권이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분단 이전 조선의 모든 문화 활동 중심지가 서울이었으므로 조선어 연구자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북 정권은 민족주의 노선의 어문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연구자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하게 되었다는 박지홍의 회고를 정재환은 <한글의 시대를 열다> 59-60쪽에 인용해 놓았다.

 

“1948년에 남북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이극로는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등 정치활동이 있었고 후에 북한 정권에서도 무임소상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북행에 정치적 동기를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재환이 밝힌 이북에서 그의 활동 내용을 보면 한글운동에 큰 뜻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극로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조선어학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돌아본다. 사전 출간의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미군정에게 외면당해 미국 민간재단에 손을 벌리고 있었다. 기증받은 줄 알고 있던 회관 건물의 반환을 요구받을 만큼 재력가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한글운동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물적 지원을 사회로부터도 정부로부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두봉의 편지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9-28 서울 수복을 앞둔 1950년 9월 26일 역사학자 김성칠은 친구인 영화배우를 북쪽으로 떠나보내며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은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초기까지 이어진 현상이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1950년 9월 26일)

 

 

Posted by 문천

 

1947년 말 시점의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324억여 원이었다. 두 달 전 261억여 원에 비해 약 63억 원, 25퍼센트 가까이 급증한 것인데 추곡수매자금 방출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8일) 추곡수매가 일단락된 후에는 자금 회수에 따라 서서히 발행고가 줄어들어 5월 말에는 286억여 원까지 내려왔다.

 

“조은 발행고 286억 - 아직 30억 감축 예상”

 

조선은행 조사부 8일 발표에 의하면 5월 29일 현재 발행고는 286억 원대를 지속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약 30억 원이 감축될 여지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는 미곡자금 회수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그런데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상반기 내내 이어져 온 발행고 축소가 끝나고 확장으로 돌아서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조은권 발행 증가 경향”

 

조선은행 발표에 의하면 6월 12일 현재 은행권 발행고는 29,396,943,000원으로 전주에 비하여 396,981,000원의 증가를 보이었다고 하는데, 그 원인으로서는 대출금의 증가를 들 수 있으며 앞으로 하곡수집 자금 방출로 인하여 계속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20일)

 

화폐 발행고는 7월 초에 다시 3백억을 넘어서고 얼마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0월 이후 다시 급팽창을 시작, 연말까지 450억을 돌파하였다. 통화량은 경제운용의 중요한 지표일 뿐 아니라 민생에 직결되는 요소였다. 1948년 8월 15일 <경향신문>에 실린 산업경제연구소 강진국의 기고문에 이 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물가조정의 선봉 - 생산 자극과 상품유통의 접근을”

 

어느덧 해방 4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민족의 생활은 극도로 도탄에 빠져있다. 이것을 화폐개혁으로서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화폐가 민생의 생활 척도를 측정하는 표준 도구가 되느니만치 이번 행정기구 개혁에 따른 생산 부문의 참신한 개혁과 아울러 화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는 아무런 혁신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첫째로 관공리가 구두 한 켤레 값밖에 안 되는 봉급으로 오리(汚吏) 노릇을 아니할 수 없는 판이요, 배급에만 의존할 수 없는 노동자가 하루 임금으로 두 끼를 먹지 못하는 형편이니 어찌 마음 놓고 생산에만 매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통화 수량을 적절히 조정하여 화폐가치가 유통경제, 특히 대내적으로는 국민생활의 정상한 가치 측정의 기준이 되고 대외적으로는 비록 금본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더라도 국내 생산과 어느 정도의 균형을 보유함으로써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니 해방 직전 즉 1945년 7월 조선은행권 발행고 46억9822만 원, 그것도 전 조선 및 만주 영역에 퍼진 것인데 현재 남조선만으로도 289억7338만 원, 약 6배로 팽창해 있다. 따라서 생산 없는 민생경제는 글자 그대로 파탄되고 말았다.

 

우리가 신행정 개혁에 기대하는 바는 먼저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물가조정의 선봉 지도적 역할을 꾀하는 동시에 국내 물자 생산을 적극 제재하여 화폐 수량과 상품 유통량과의 접근을 지향하는 획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민생을 직접 괴롭히는 것은 물가앙등인데, 통화팽창이 물가앙등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은 범인이라도 꼭 주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요인이 더 큰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방 후 물가 앙등추세는 통화량 증가보다 훨씬 가파르다. 이 점은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부회장 하상용이 1948년 1월 8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통화팽창과 농촌의 현상”에도 지적되었다.

 

통화팽창은 물가의 승낙(昇落)에 대하여 어떤 정도의 영향을 주는가를 고찰해 볼 때 이에 대한 원리적인 학설은 물가는 순환통화의 수량에 좌우된다는 설도 있고 이와 정반대로 물가는 순전히 수요와 공급 여하로써 자율적으로 결정되고 통화의 수량은 부수적으로 증감된다는 설도 있으며 또 이상 양설의 절충설도 있다. 그러나 현상 형태에 있어서는 단순한 원리적인 학설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혼돈한 것이 상례이다.

 

현하 남조선의 고물가 현상을 타진함에 있어서는 필자는 절충설에 논거함이 가하다고 생각하며 또 이것을 비중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생산부족 공급부족에 치중함이 가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를 들면 1937년에 비하여 금년 7월의 조선의 발행고는 약 백배인데 평균 도매물가는 약 5백배로 약진하고 있으며 한편 일본의 현상은 발행고는 약 60배인데 평균 도매물가는 약 20배라는 것을 보더라도 일본의 공업생산력이 조선보다는 우월한 까닭이라고 실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세간의 상식적인 견해는 고물가 원인은 주로 통화팽창에 있다고 속단하고 또 통화팽창에 대하여서는 물가와 관련적으로 그 이유는 생산 혹은 공급부족은 숫자로 파악하기 어려우나 발행고는 계수의 파악이 용이하여 인심에 직각적인 충격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3년 동안 통화량은 4배 늘어난 데 비해 도매물가지수가 30배 이상 늘어난 것을 보면 그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하상용의 추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통화팽창이 물가앙등을 그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기본조건의 하나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파탄의 다른 측면들도 통화팽창에 기인한바 컸다는 사실은 통화팽창이 비교적 억제된 이북 경제상황과의 비교에서도 확인된다.

 

1945년 9월 27일 일기에서 통화팽창 문제를 처음 언급했다. 8월 15일의 일본 항복 선언으로부터 9월 8일의 미군 진주 사이 조선은행권 발행고의 급팽창(약 50억 원에서 약 85억 원으로)을 지적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이제 발행고가 3백억 원대에 이르고 보니 당시의 증발 액수 35억 원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과 24일간에 통화량 70퍼센트 증가라는 폭발적 팽창이 가진 의미는 변할 수 없다. 악조건에 빠진 조선 경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과 같은 짓이었다.

 

미군 진주 이후의 4배 가까운 팽창은 어디에 이유가 있는 것이었나? 1948년 2월 29일자 <동아일보> 제3면을 채운 김용갑의 논문 “금융 동태와 인플레 대책”에 간단 명쾌한 설명이 나와 있다. (1948년 10월 3일자 <동아일보> “세제개혁위회 위원도 결정” 기사에 따르면 김용갑은 동아일보 사원으로 있다가 재무부 세제개혁위원으로 위촉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전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약 50억, 일제가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방출한 발행고가 약 40억, 합계 90억이었는데 현재 3백억을 넘으니 2백억 원의 방만한 방출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 국고의 적자지출이 1947년 9월 한 달 동안에 약 4억 원, 민간에 대한 대출초과가 약 7천만 원이니 이 비율로만 본다면 해방 후 난발(亂發)된 210억 중 6분지 5는 국고의 적자지출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또 이 비율을 가지고 국고의 부채액을 추산한다면 175억이다.

 

물론 당국으로부터 국고 부채 총액에 대하여 전연 발표가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신빙할 만한 정보를 종합하여 본다면 170억 원 정도로 추정이 된다. 17일 중앙경제위원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작년도 재작년도 양년에 걸친 국고의 부채가 150억이라 한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국고 부채의 총액이 적어도 170억은 넘을 것이다.

 

이 170억의 적자재정이 불환화폐를 발행하지 않았으X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이 거대한 지출과 방대한 구매력은 악성 인플레를 도발할 것이며 따라서 남조선에서 인플레를 조장한 책임을 추구한다면 그 책임이 정부 자신에 있을 것이다. 이 근본 원인을 발본색원적으로 삼제하지 않는 한 폭리취체 물가행정 등으로 백방 대책을 세운다 하더라도 전부가 실패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 이와 같이 조선의 금융 문제는 자금유통에 있어 6분지 5를 점하고 있는 적자재정의 1점에 귀결될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물가를 단속한들 폭리를 취체한들 매점을 금지한들 더 나아가서는 폐제(幣制)를 개혁한들 그 전부가 인플레를 조장하여 결국은 수포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1947년 4월 6일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인터뷰에서 당시 짜고 있던 1947회계연도 예산을 언급한 일이 있다. 세입 전망은 155억 원인데 각부의 세출 요구액 합계는 550억 원을 넘었다고 한다. ‘균형예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군정 내내 계속된 이 전폭적 적자 상황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김용갑이 말하는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이 거대한 지출과 방대한 구매력”이다. 미군 진주 당시 통화량 85억 원 중 40퍼센트인 35억 원이 최근 24일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 이 무렵 일본인 예금이 28억 원 인출되었는데, 조선은행권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도 금지되었고 일본에서 가져가도 쓸 수가 없었다. 이 돈이 어느 집단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요정의 성업도 사치품을 들여오는 마카오무역의 성행도 이 돈 덕분이었다.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구매력의 출발점이었다.

 

한편 남조선의 산업은 형편없는 침체에 빠졌다.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인해 조선 경제가 겪은 악조건에는 남북의 구분이 없었지만 이를 극복하는 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1948년 4월 24일 평양에 체류하던 이남 대표단이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는데, 거대한 공장이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충격적인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홍명희를 비롯한 중간파 여러 사람이 이북에 주저앉는 데도 이 시찰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정태헌은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역사비평사 펴냄) 202-203쪽에서 미군정의 경제정책을 ‘부재(不在)’ 한 마디로 평가했다.

 

해방 후의 급선무는 각종 자원과 노동력, 생산력을 고갈시켰던 식민지자본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재건정책을 통해 일제하에 억압되었던 잠재력을 평화산업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점령당국인 미군정이 세계 냉전체제에 대응하고 동아시아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남한을 일본 등에 비해 주변적 변수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따라서 남한의 경제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

 

게다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이 기계시설이나 재고원료를 팔아치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켜 공장가동에 나서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방임된 초인플레 속에서 생산적 투자보다 물자난에 편승하여 생산시설과 자재를 불법으로 내다 팔아 축적을 꾀하는 투기꾼들이 날뛰어서, 경제재건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원조물자’가 들어와도 생산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웠습니다.

 

1946년 11월 현재 휴업 중인 390개 사업장의 휴업원인은 대부분(70%) 원료난이었습니다. 물가지수를 감안한 1946~1948년간의 생산감소율은 80% 정도나 되었습니다. 만성화된 물자부족으로 1945년 8월 말 기준으로 도매물가는 1945년 말 2.5배, 1946년 말 14.6배, 그리고 1947년 말에는 무려 33.3배나 뛰었습니다.

 

위에 일부 인용한 김용갑의 논문에는 조선 금융의 구조적 문제가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만들어지고 미군정에 의해 방치된 사실도 지적되어 있다. 식민지시기에 일본 금융기관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돈 백수십억 원은 묶여있는 채 조선에서 일본인의 예금은 대부분 인출되어 조선에 ‘저축과잉’의 기형적 인플레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해방 후 조선 금융 동태의 본질을 구명한다면 저축과잉을 내포한 인플레이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인플레의 전형은 투자과잉에 있으며 또한 그것이 경기변동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의 금융 사태는 그와 같은 원칙적인 면모와는 다르다.

 

즉 현재까지 판명된 조선의 각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일본 공사채 주권 등이 106억에 달한다. 이 거액이 조선에서 저축을 형성하여 그것이 일본에 가서 채권화하였으니 우선 조선에서 축적된 자본이 일본의 산업을 개발하는 데 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금융 면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이 얼마나 식민지적인 태세인가를 알 수 있다. (...)

 

금융조합과 같은 서민금고를 조선 전역의 방방곡곡에 동원하여 저축을 강제하여 형성된 예금은 대부분을 일본에서 채권화하여 조선의 산업개발을 압박하였으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대(對)일본 위체(爲替)계정의 청산을 사보타주하였다는 것은 금융사상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금융수탈은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제가 항복하자 대일 환끝은 청산하지 않으면서 대일본정부 청산자금으로 13억, 귀국 일본인을 위한 예금인출 22억, 기타 합 40억 원여의 급격한 방출로서 지폐를 난발하였으니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일 채무는 해방을 계기로 하여 청산을 강요당하였으며 그 채권은 아직 청산하지 못하여 이 변태적인 저축과잉이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해결되지 못한 채, 대내적으로는 생산상의 악조건으로 인하여 투자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화폐 면과 생산 면이 불균형 상태에 방치되었다.

 

통화팽창은 미군정 하의 남조선 경제가 엉망이 된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김용갑 논문의 서두에 임금지수 17,000, 물가지수 119,000, 발행고지수 19,000으로 표시되어 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기준시점부터 1948년 초 사이에 임금은 170배, 물가는 1,190배, 통화량은 190배 늘어났다는 것이다.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의 7분의 1에 불과한 것이다. 민생이 어떠했겠는가.

 

 

Posted by 문천

"떼어먹혔구나!"

 

 

오늘 아침 "진보는 왜 중국을?" 보면서 지금까지 글과 좀 다른 걸 느꼈어요. 읽기가 썩 편안해요. 자기 생각에 대한 자신감이 든든히 느껴집니다.
 
이 선생 글 보면서는 아무래도 내 생각 빌려간 게 다른 것보다 눈에 잘 들어오죠. 근데 오늘 글 보면서는 "떼어먹혔구나!" 느낌이 팍팍 듭니다. 옆집에 소를 빌려주니 그놈이 처음엔 그 집 밭 갈면서도 눈길은 우리 집에 두고 있었는데... 여러 날 잘 먹이고 잘 부리니 이제 자기가 어느 집 소인지도 잊어버리게 된 건가?
 
청상과부 자식 키우듯 혼자 키워온 생각들이니 물론 애착이 깊죠. 그 자식을 누가 못났다고 흉보면 노여운 것은 물론이고, 잘났다고 칭찬해주는 이가 있어도 겉만 보고 하는 소리 같아서 마음에 차지 않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 이 선생이 내 생각의 함축을 알뜰하게 음미하고 그 연장선까지 순조롭게 펼쳐내는 걸 보니 과년한 딸자식 얼른 치워버리고 말년의 자유를 찾을 마음이 듭니다.
 
오늘 글에서도 '넓은 시각'의 강점이 분명하죠. 19세기 후반 조선과 청나라 상황을 나란히 놓고 봄으로써, 어느 한 쪽만 본다면 설득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관점이 시너지 효과를 통해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거기까진 내가 해온 건데... 그보다 더 넓히는 작업이 나로서는 불급인데 이 선생이 나서 주니 내가 티운 싹에서 큰 결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근년 한국현대사 쪽에 매달리는 데 대해 어느 편집자는 "왜 소 잡는 칼로 닭을 못 살게 구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소백정도 늙어서 힘이 부치면 은퇴해서 취미삼아 닭이나 잡고 지내도 되지 않나? 소 잡을 장정이 따로 없으면 몰라도... ^^
 
핀잔에 대한 억하심정에서 해본 억지 소리고~ 한국에 매달리는 게 내 체질과 습관에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서중석 선생 퇴직 행사에 임해 떠오르는 생각을 블로그에 두어 차례 적은 게 있죠. 서 선생과의 만남이 내게는 역사학과의 첫 접촉이었는데,(갓난애 때 아버지가 안아준 거 빼고) 그분이 한 고비 넘기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동양사로 선택은 했지만 마음은 한국사에 있었어요. 이 선생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강하게 느끼는 강박이 있었죠. 얽매이는 데 없이 공부를 넓히려고만 수십 년 애써 왔지만, 바닥에는 민족에 대한 집착이 깔려 있었죠. 그 바탕이 공부를 풀어오는 가닥을 잡아준 셈이고... 나로서는 지금 한국사로 조여드는 것이 일호일흡, 일소일장의 원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길 같습니다.
 
서중석 선생과의 인연이 지금의 고비에서도 또 한 차례 큰 작용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45년 전 피차 학부생으로 처음 만날 때도 취향 차이가 컸고, 지금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 선생은 그때도 선배로서 화이부동의 아량으로 나를 대해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당장 매달려 있는 과제보다 더 큰 과제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분이라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연구자 아닌 평론가로 겉으로는 자임해 왔습니다만, 속으로는 연구자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죠. 보수주의자를 자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부담을 피면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보수주의자 간판은 앞으로도 버리게 될 것 같지 않지만, 이제 연구자 역할은 더 드러내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퍼센트 연구자를 표방하지는 않겠지만 연구자들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보다는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겁니다.
 
"노무현의 대한민국" 작업에 관해 그 동안 한국현대사 연구자 몇 사람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는데, 마음을 놓을 만한 반응을 얻고 있어요. 이 작업은 여러 연구자들과 토론해 가며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일기"는 평론가 입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작업 성과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입장에 서 있었죠. 개인적 인연을 가진 서중석 선생과 정병준 선생을 이따금 만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평론가로서 연구자들과의 거리를 지킨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거리를 줄이려고 하는 거죠.
 
연구자로서 집필 외의 활동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범위는 만들어볼 생각을 합니다. 출강과 세미나 등... 내년 이후 활동 범위에 대해 금년 중에 궁리와 타진을 해보려고요. 길게 살 곳으로 몇 달 전부터 전주를 생각해 오고 있는데, 그 정도가 적당할지 표준을 두고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다 보니 내 얘기가 한참 늘어졌는데, 이 선생 공부로 돌아가서... 공부를 넓히기만 하는 길에는 초점이 흐려지기 쉽다는 약점이 있는데, 이 선생 경우에는 그 점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기본적인 균형감각이 든든한 것으로 보이니까. 넓히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불안감이 들 수 있겠지만 큰 문제 없을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까. 몇 마디 붙인다고 붙이다 보니 내 마음속의 불안감만 드러낸 셈인가? ㅎㅎ
 
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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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 주소에 아직 배달이 안 되네요. 여기 들러서 봐주기만 기다려야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