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부터 조선의 여러 신문에 팔레스타인 관계 기사가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위임통치가 5월 14일 자정을 기해 끝났는데, 그 뒤의 상황에 대한 당사자들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커지고만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유엔에서 조선 문제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는데, 팔레스타인 문제는 훨씬 더 논란이 큰 문제였다. 조선에서 유엔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유엔의 역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시오니즘 운동가들이 팔레스타인의 지배하는 영국 정부에 로비를 벌여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을 위한 ‘민족의 터전(national home)’을 만들 방침을 밝힌 발포어선언(1917년)을 받아냈다. ‘국가 수립’과는 거리가 먼 방침이었다. 당시 그 지역 인구는 아랍인 70만 명, 유태인 5만6천 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발포어선언 이후 10여 년간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많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나치즘의 유태인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이주가 활발해졌고, 전쟁 중 수용소와 대학살을 겪으면서 유태인 국가 수립 염원이 강렬해졌다. 전쟁이 끝났을 때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유태인 중에는 박해를 받던 원래 거주지로 돌아가기보다 유태인의 새 나라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 직전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영국 정책을 집약한 것이 ‘맥도널드백서’였다. 1939년 3월 발표된 이 백서는 그때까지 45만 명의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어서 발포어선언이 제시한 ‘민족의 터전’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태인 국가 수립은 영국의 정책목적이 아니며 향후 유태인 이주를 영국 당국의 치안능력 범위 내로 제한한다고 했다. 1940-1944년의 5년간 7만5천 명이 한도로 설정되었다.

 

맥도널드백서는 영국이 전쟁을 앞두고 아랍인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태인은 배려해 주지 않아도 연합국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때는 이 수준으로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화 <엑소더스>는 이 상황에서 일어난 갈등을 그린 것이다.

 

이 문제 해결에 미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1946년 4월 영-미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조사위원회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유태인 10만 명의 이주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이스라엘 건국 지원 작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1947년 봄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불원간 끝내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그 후속 대책을 유엔에 맡겼다. 그래서 1947년 5월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가 11개국으로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3개월간의 조사작업 끝에 가을 총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7개국의 지지를 받은 유태인국가-아랍인국가 분할건국안과 3개국의 지지를 받은 연방건국안이 나란히 들어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는 아랍인 120여만, 유태인 60만 남짓으로 약 2대 1 비율이었다. 연방국가가 되면 유태인이 소수파가 될 것이므로 유태인은 당연히 분할건국안을 지지했다. 유엔은 임시위원회를 만들어 팔레스타인위원회가 작성한 분할건국안을 조정했는데, 그 결과는 영토의 약 60퍼센트를 유태인국가에 주는 것이었다. 아랍인국가 지역의 유태인 비율은 1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유태인국가 지역은 주민의 절반이 아랍인이 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분할건국안은 총회에서 유효투표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 안건이었다. 1947년 11월 26일 표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명확치 않은 이유로 연기되어 11월 29일 시행되었다. 찬성 33개국 반대 13개국(기권 10개국)으로 분할건국안이 채택되었다. 11월 26일에 표결했다면 부결되었으리라는 견해와 분할건국안 추진세력의 치열한 로비활동에 대한 지적이 <Wikipedia> "United Nations Partition Plan for Palestine" 조에 소개되어 있다.

 

이 지적 중 제일 뚜렷한 것이 필리핀의 경우다. 로물로 대표가 “안건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라며 “팔레스타인 주민의 민족주의 열망에 명백히 역행하는 방침”에 반대하는 뜻을 밝힌 뒤 본국에 소환되었고, 교체 대표가 찬성표를 던졌다.

 

인도의 네루 수상도 시오니스트 세력의 뇌물 공세와 동생인 비자야 락슈미 판디트 대사에 대한 암살 위협 등 유엔의 혼탁한 분위기를 불평했고, 리베리아의 유엔대사는 미국대표단으로부터 원조 삭감 위협을 받았다고 했다. 원조정책에 영향력을 가진 미국 상원의원 26명이 서명한 분할건국안 찬성 촉구 전보를 여러 나라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투표 내용에서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아시아 11개국 중 필리핀 하나만 찬성했다. 중국이 기권하고 나머지 9개국이 반대했으니 반대표의 3분의 2가 아시아에서 나온 것이다. 분할건국안이 아시아인의 민족주의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소련 등 공산권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그래서 소련과 미국이 이 무렵 유일하게 유엔에서 죽이 맞았던 사례로 일컬어진다. 두 강대국은 경쟁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하면서 중동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공산권 중 유고슬라비아만이 기권을 한 것은 소련과 멀어지고 있는 거리를 보여준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이 결의안 반대에 일치단결했다. 평화공존의 의미에서 분할건국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이 결의안의 분할 방식은 너무 불공평한 것이었다. 유엔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은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유엔결의안 통과 직후 영국은 1948년 5월 15일에 위임통치를 끝낼 계획을 발표했다. 그 후에는 팔레스타인 행정과 치안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태인은 건국 준비와 아울러 군사력 확보에 매진했고, 5월 14일 자정 위임통치 종식과 동시에 건국을 선포했다.

 

한편 아랍인은 유엔결의안에 반대하는 입장에 머무르며 건국 준비를 진행하지 못했다. 요르단과 이집트 등 인접 아랍국들의 엇갈린 이해관계가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영향을 끼쳐 정치조직도 군사조직도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영국 군대와 경찰이 손을 떼는 즉시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유태인의 힘이 아랍인을 압도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주변 아랍국들이 개입할 것도 분명한 일이었다. 1948년 초의 팔레스타인은 5월 14일 자정에 맞춰져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D-데이가 왔을 때 아랍 5개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의한 전쟁 발발보다 더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 선언 불과 몇 분 후에 나온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였다.

 

“미 유태국 승인, 소련 제압이 목적?”

 

[워싱턴 15일발 UP 조선] 트루먼 대통령은 돌연 미국의 신생 팔레스타인유태 승인을 발표하였다. 14일 오후 6시 1분에 팔레스타인 유태국가 성립이 선언된 수 분 후 트루먼 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가 수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 임시정부의 승인이 요청되었다는 통고에 접하였다. 미국정부는 동 임시정부를 사실상의 신생 이스라엘 정권으로 승인하는 바이다.”

 

금반 미국정부의 승인은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의 정식 종결과 동시에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의 로스 비서관은 금반 유태국가의 탄생과 또한 미국의 동 정권 승인은 유-아 쌍방 간에 평화를 재래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조그만치라도 줄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결정은 지난 2일간 상층부의 비밀에 속하였으며 일단 이가 공표되자 국무성 내부의 하층부조차 일경(一驚)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금반 미국정부의 응급조치에 대한 외부의 반향에 의하면 미국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종결과 동시에 유태 측에서 신정부 수립을 내외에 공표하자 소련이 이를 급속 승인할 것을 예상하고 그 기선을 제하기 위하여 금번의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6일)

 

지난 가을의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건국안을 밀어붙인 데서부터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미국의 뜻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분할건국안의 나머지 반쪽인 아랍인국가의 성립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단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미국 외교관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의 전격적인 이스라엘 승인은 유엔을 필요할 때는 이용하지만 유엔 입장에 구애받지는 않는 미국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었다. 당시 임시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의 전쟁 위기에 대한 대책이 토론되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의 토론이 필요 없게 되었다.

 

“소(蘇)도 ‘유태국 존재’ 인정 - UN임총 무위, 성지 결국 분할”

 

[뉴욕 16일발 AP 합동] 미 트루먼 대통령의 유태국가 승인 선언으로써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실패의 암향(暗響)을 받게 되었다. 과거 4주일간 성지 문제 조정자를 5대 강국이 선정하자는 가결 이외에는 아무런 결실도 없이 토의를 계속하여 온 UN임시총회는 15일 야로써 폐회되었는데 이 총회 폐막의 최후 순간에 트 대통령이 유태인국가를 승인하였다는 보도가 전달되어 총회는 일시 혼란 상태에 빠졌었다. 유태 측은 환호성을 올렸고 아랍 측은 “우리는 속았다”고 외쳤었다.

 

그런데 소련 수석대표 안드레 그로미코 씨 역시 총회에서 “유태국가는 존재한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소연방 역시 유태국가를 승인하는 측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청천벽력으로 제시되었던 미 측의 팔레스타인 탁치안이 자태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트 대통령의 유태국 승인으로 미국은 사실상 무언중에 성지 분할안을 재긍(再肯)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8일)

 

5월 19일자 <동아일보> “소(蘇)도 유태국 승인” 기사를 보면 소련도 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이 기사에 미국 소련과 ‘파례알라’ 세 나라가 유태국을 승인했다고 했는데, ‘과테말라’의 오기가 아닐지. 그런데 붙어 있는 기사를 보면 영국은 훨씬 신중한 태도다.

 

“유태 승인 조건 불비 - 영 대변인 성명”

 

[런던 18일발 UP 조선] 영 외무성 대변인은 유태국 승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영 정부는 현 단계의 이스라엘은 국가 승인을 받을 만한 조건을 구비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정부의 유태국 승인에 필요한 조건은 (1) 국가기능을 개시한 정부의 존재, (2) 명확히 제정된 국경, (3) 국제적 의무를 수락하고 이를 수행할 통치기관의 존재 등이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조건의 실현은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설령 영국의 승인 조건이 미국의 그것과 상위한다 하더라도 영국의 유태국 승인 문제에 관한 태도는 추호도 선입관 또는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며 다만 법적 고려에 의하여 인도될 뿐이다.

 

영국의 신중한 태도는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국으로서 책임이 있는 입장에서 아랍국의 반발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외무성 대변인이 내놓은 조건은 국가 승인을 위한 최소한의 형식요건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격적 이스라엘 승인은 국제관계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안보리 회의에서 시리아대표 앨크리가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조선위원단에서 시리아대표가 미국 방침에 가장 비판적인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여사한 미국의 행동에 관하여 나는 그 합법성을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에 위임할 것을 요구한다. 여사한 유태국 선포를 승인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미국인이 정신결함자가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미의 유태국 승인으로 안보 논쟁 격화”)

 

이 회의에서 ‘이스라엘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시리아 등 아랍국의 주장에 영국과 중국도 동조해서, 영국 제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유태 영역 내의 임시행정기관’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의 독단적 조치에 대한 반발이 대단하다.

 

이 사태가 많은 조선인들이 미국의 정치적 태도와 유엔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신문 아닌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까지 실렸다.

 

“2차의 미 태도 돌변으로 국련 면목 상실 - 성지 문제”

 

[뉴욕 26일 중앙사 공립] 국제연합은 또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그 위신을 잃은 일에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되었다. 이는 즉 최근 2주일간에 걸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성지 문제인데 이 문제는 벌써 전번 총회에서 아랍 측 지구와 유태 지구를 분할하는 데 미-소 간에 유엔 창설 이후 최초의 합의를 그때에 큰 성공이라고 일반은 호감을 가지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를 위임통치하던 영군이 5월 15일에 철퇴한 후에는 당연히 총회가 일단 결정한 방침이 적용되어 지금 같은 극도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유엔의 권위도 다소나마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렇던 문제가 미국의 2차에 걸친 돌발적 태도로 유엔은 여지없이 그 권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즉 1차는 미국이 성지 분할안에 솔선 찬성을 하여 놓고 그 후 월여가 지나지 않아 이것을 반대하고 성지의 유엔 탁치를 주장하여 각국 대표를 일경(一驚)케 하였으며 이것의 시비가 자자하자 미국은 유엔에 사전 하등 제의도 없이 돌연 5월 19일 소련에 솔선하여 유태국 승인이라는 청천의 벽력을 내린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매 유엔 안보의 활동이라든가 성지대책위원회의 사업은 전혀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으며 유엔은 여지없이 그 무력한 기구인 것을 폭로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이와 같은 정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중아(中亞)지방의 석유자원 개발권을 위요하고 아랍 측을 지원하여 이것을 의연히 지배하려는 영국과 새로이 문제에 개입하려고 유태 측을 성원 지지하는 소련 측에 제선하여 미국이 이 지위를 획득하려는 것으로 금후 영-미 간에 이스라엘국 승인 문제를 두고 연출할 외교전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인데 결국 미국의 영국에 대한 압력은 사태가 지연되면 될수록 가중해질 것으로 영국의 양보에 의하여 해결될 것이나 그밖에는 유태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중아에 있어서의 미-소 간의 신 세력균형전이 세계의 새로운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8일)

 

이스라엘 독립선언 직전에 유엔 임시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조정관을 임명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에 따라 5월 20일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가 유엔의 첫 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 53세의 베르나도테 백작은 오스카2세 왕의 손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교섭하여 억류자를 구출해 내는 인도주의 사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베르나도테가 협상안을 작성해 6월 28일 전쟁 관계자들에게 제시한 내용이 1주일 후에 보도된다.

 

“아-유태 연방을 형성 - UN 베 백작 안 발표”

 

[레이크석세스 5일발 AP 합동] UN에서는 4일 UN 팔레스타인 분쟁조정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예루살렘을 아랍 측 영토로 하는 구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유태-아랍 양 국가로 하는 안을 제출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르나도테 백작의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트란스요르단을 포함한 당초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써 아랍-유태 양 국가의 연방을 형성할 것.

2. 이 연방은 양국의 외교 국방 정책을 조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촉진할 것.

3. 예루살렘은 아랍 측 영토로 하고 동 시 거주 유태인에 대하여서는 자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성지에 대하여서는 보호를 가할 것. (<경향신문> 1948년 7월 6일)

 

두 나라를 세우더라도 연방으로서 연계되지 않고 완전히 따로 세워진다면 분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베르나도테는 인식한 것이다. 애초의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당시는 ‘트랜스요르단’)을 떼어낸 것은 영국이 자기네 편의를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그리고 작아진 팔레스타인을 완전 별도의 두 나라로 쪼갠다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 합작해서 밀어붙인 방침이었다. 그런 조건 위에서는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제야 확인되었다.

 

베르나도테는 조정관에 임명된 지 석 달을 못 채운 9월 17일 예루살렘 시내에서 암살당했다. 유태인 극렬단체 레히의 소행이었다. 레히 지도자들이 몇 사람 체포되었지만 아무도 암살로 기소되지는 않았고, 테러단체 조직으로 기소된 자들도 곧 석방되고 사면을 받았다. 공소시효가 훌쩍 지난 1977년에야 사건 진상이 발표되었다.

 

베르나도테의 죽음은 소신껏 일하던 유엔 관계자들이 겪은 고난과 고통의 한 사례일 뿐이다. 조선위원단의 각국 대표가 조선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 좋은 역할을 맡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게 생각되더라도 그들 모두 주어진 제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겠다. 사실, 유엔위원단이 5-10선거를 비판적으로 보내는 의견을 총회에 보고한다 해서 미국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포기했겠는가?

 

 

Posted by 문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천하 제패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였다. 그런데 유방이 천자 자리에 오른 후 반역의 죄목으로 숙청된 것은 대단히 억울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한신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齊)나라 정벌 때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신은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받은 후 대군을 이끌고 동북방을 원정,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평정했다. 그보다 동남쪽에 있던 제나라가 또 하나 중요한 대국이었는데, 유방은 제나라까지 군사력으로 정벌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 생각해서 역이기(酈食其)를 사신으로 보내 (실제로는 동맹 성격의) 투항을 권유했다.

 

역이기가 제나라 왕 설득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한신이 듣고 군대를 쉬게 하려 할 때 모사 괴통(蒯通)이 그를 부추겼다. 수만 군대를 끌고 힘든 전투로 조나라 50여 성을 겨우 얻었는데 일개 서생 역이기가 세 치 혀 운동만으로 제나라 70여 성을 얻는다니, 그 꼴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앉았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향해 ‘닥치고 공격’에 나서자 제왕은 역이기를 솥에 삶아죽이고 도망쳐 항우의 원조를 청했다.

 

결과는 한신의 대성공이었다. 항우가 보낸 용저(龍且)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제나라 확보에 성공했다. 그런 뒤에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제왕에 봉해달라고 청했다. 제나라는 항우 세력과 직접 마주치는 곳인데 제나라 민심도 불안하기 때문에 임시 왕(假王)으로라도 세워줘야 통치가 안정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형양에서 항우군의 포위 아래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던 유방은 한신의 요청에 발끈했다. “곤경에 처해 빨리 와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놈은 왕 노릇 하고 있겠다니!” 욕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측근들이 유방의 발을 슬쩍 밟아 입을 막아놓고 귓속말을 했다. 지금 성질부릴 형편이 아니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상황을 깨달은 유방은 오히려 더 통 크게 나왔다. “임시 왕은 무슨 임시 왕이야! 진짜 왕 하라고 그래!”

 

그래서 한신은 제왕이 되기는 했는데, 십여 년 후 뒤집어쓴 죄목보다 이것이 진짜 ‘반역’이라면 반역이었다. 유방이 그를 제왕에 봉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한신의 제나라 ‘탈취’는 유방의 대외정책에서 군사노선이 외교노선을 물리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신이 지지한 유방이 결국 천하 평정에 성공했으므로 이 일의 득실에 대해 심각하게 따진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생각할 문제가 있다.

 

제나라의 항복을 받는 대신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유방 진영에 이로운 일이었을까? 이로운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왕 전광(田廣)이 항복했을 경우 당장은 동맹관계가 성립되었겠지만 이후 상황에 따라 거취를 뒤집을 가능성이 남았을 텐데, 그 가능성을 없앴다는 점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한신 역시 유방과의 관계에 동맹의 측면이 있었다. 한신이라 해서 상황에 따라 거취를 뒤집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보다 실질적인 문제는 유방의 외교노선이 약화되었다는 데 있다. 뛰어난 외교관 역이기가 개죽음을 당하니 유방의 외교관 노릇 하러 나설 인물이 없게 되었다. 다른 제후들도 유방이 외교관을 보낼 때 그 말을 믿기 어렵게 되었다. 외교노선이 군사노선보다 때에 따라 유용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선택권을 유방은 잃어버린 것이다.

 

한신의 폭거 때문에 유방은 천하의 신의를 잃어버렸다. 관중(管仲)의 진언을 따랐던 제 환공(桓公)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노(魯)나라와의 전쟁에 승리, 유리한 조약을 맺으러 갔을 때 노나라 장군 조말(曺沫)이 단상에 뛰어올라 비수로 환공을 위협, 제나라의 이득을 포기하는 약속을 강제로 시킨 일이 있었다. 환공은 이 일이 분해서 약속을 파기하려 했는데 관중이 약속을 그대로 지키라고 권했다. 그럼으로써 얻는 천하의 신의가 눈에 보이는 이득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이 진언에 따름으로써 얻은 신의가 환공 패업의 기반이 되었다.

 

신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다. 무력처럼 중시받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신의를 가진 자에게는 누구도 맞서기를 꺼려하고, 협력할 일이 있을 때는 쉽게 응한다. 외교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당장 제나라를 확보하는 데는 한신의 군사노선이 유리한 것이었을까? 기록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역이기와의 협상 덕분에 제나라의 방비가 없었던 까닭으로 수도인 임치(臨淄) 함락까지는 수월했다. 그러나 그 후의 항전은 만만치 않았다. 항우가 파견한 용저가 전략만 잘 선택했더라도 쉽게 격파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사마천은 적었다.

 

한신의 제나라 진격은 명목상 주군이던 유방에 대한 실질적 반란이었다. 유방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한신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유형무형의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손실을 끌어안은 채 진력한 결과 천하를 제패했다. 어찌 보면 한신의 제거를 그는 천하 통일의 마지막 단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유방은 천하의 이목을 꺼린 탓인지, 한신 제거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황후인 여후(呂后)가 대신 나섰다. 한신은 죽음에 임해 “괴통의 계책을 쓰지 않아 결국 아녀자의 속임을 당했구나!” 탄식했다고 한다.

 

제나라 진격을 헌책했던 괴통은 그 후에도 유방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한신에게 권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괴통은 한신의 ‘숨겨진 자아’(alter ego)로서, 서술을 위해 설정된 인물인지도 모른다. 한신은 애초부터 절제 없는 야심가였고, 1인자가 되는 길과 2인자가 되는 길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것으로 나는 본다. 그 줄타기를 위해 신의를 내던졌기 때문에 유방을 어렵게 만들고, 천하 백성들을 괴롭히고, 결국 자기 몸을 망쳤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권력을 맡겨놓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갈수록 마음이 불안해진다. 다른 일도 잘해주면 물론 좋지만, 무엇보다 남북관계에 대해 국민에게 위임받은 역할을 잘해주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앞선 정상회담의 대화 내용이 폭로되는 것을 방관하는 속셈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신뢰프로세스’를 약속했다. 그런데 취임 후 몇 달 동안 신뢰를 조금이라도 늘려주는 조치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워낙 중요한 일인지라 쉽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 아주 큰 신뢰를 바라보는 거라서 시간이 좀 걸리나보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신뢰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짓이 태연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신뢰를 무너뜨리는 정도가 아니다. 신뢰의 발판인 ‘언어’ 자체를 망가뜨리는 짓이다. 프로토콜 없이 어떻게 외교가 진행될 수 있는가? 외교 진행과정에서 오고간 대화를 몽땅 깨놓고 개나 소나 멋대로 씹어대게 하는 나라와 누가 진짜 외교다운 외교를 하려 하겠는가?

 

위키리크스 때문에 미국 외교가 곤경에 빠졌다고 하는데, 이건 더 심하다. 해커나 내부고발자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국가정보기관이 스스로 기밀을 공개하다니, 외교 대상으로 기본 자격이 안 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한국과 상호 이득이 되지만 제3자에게 알려지지 않기 바라는 내용이 있을 때 한국 당국자에게 마음 놓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누구든 군사정보나 경제정보를 한국에 알려주려면 노출 위험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신에게 생각을 되돌려본다. 유방은 조나라와 연나라를 한신의 군사노선에 맡겼고, 제나라를 역이기의 외교노선에 맡겼다. 그런데 한신은 유방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나라로 진격했고, 그로 인해 외교노선은 궤멸되고 말았다. 이것은 반란이었다. 유방은 이 반란을 당장 응징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결국은 응징을 했다.

 

유방의 한신 응징에는 개인적 배신감도 곁들여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공공적 기준에 합당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천하 통일은 전국시대 말기 평화에 대한 인민의 염원으로 빚어진 이념이었다. 실력을 갖춘 자들의 기회주의적 준동 위험을 없애는 것이 천하 통일의 목적이었다. 한신은 이 목적에 저촉되는 기회주의자였다.

 

사마천은 “회음후 열전”에 붙인 글에서 탄식했다. 한신이 도를 배워 스스로 겸양할 줄 알고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말았던들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한나라에 대한 공로가 주공, 소공, 태공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보다도 열전 앞쪽에 붙인 일화 하나에서 한신에 대한 사마천의 시각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한신이 빈한할 때 어느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다. 수십 일 밥을 얻어먹은 한신이 고마운 마음을 표하느라고 말했단다. “언제고 내가 이 은혜를 후하게 갚을 것이오.” 이에 아낙네가 발끈했다고 한다. “대장부가 제 밥을 벌지 못하니 멀쩡한 꼴이 가엾어서 밥을 주었을 뿐이지, 무슨 훗날의 보답을 바라겠소!” 한신은 결국 천하에 영웅으로 위세를 떨치게 되지만, 당장 제 구실 못하면서 엉뚱한 장래를 꿈꾸는 그는 선량한 아낙네의 경멸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마천이 이 아낙네에게 공감했다고 본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대북관계에서 우호적 외교노선의 위임이었고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은 적대적 군사노선의 위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위임받은 노선을 각자 나름대로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어떤 노선을 위임받았나? ‘신뢰프로세스’ 내세운 것은 군사노선보다 외교노선을 표방한 것이다. 그런데 군사노선에 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외교노선의 기반을 아예 초토화하다니! 새누리당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온 내 주변의 보수주의자들도 모두 아연실색이다.

 

유방이 한신의 반란을 즉각 응징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 국민도 이번 국정원을 둘러싼 반란행위를 바로 응징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응징의 날이 온다. 얼마나 큰 국익 침해가 있었는지 엄정하게 살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 응징 대상의 범위가 더 넓어질 것이다.

 

 

Posted by 문천

 

로버트 올리버는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의 미국 내 홍보활동을 긴밀하게 도와준 사람이다. 미국인 ‘심복’이라 할 만한 사람이다. 그가 1990년 낸 이승만 관련 회고록이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 이승만과 한미관계>(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그 속에는 이승만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선거 직후 로버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5-10선거 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선거는 해결지은 문제보다 새로운 문제들을 더 많이 던져놓은 것 같았다. (...) 5월 14일 선거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기쁨이 산적한 새로운 문제들 때문에 근심으로 바뀌어가는 가운데 나는 리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키프링거뉴스레터와 데이비드 로렌스의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 지는 어느 쪽이나 모두 미국이 장차 한국을 소련에게 ‘포기’하리라는 내용의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사람들이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 다만 이번 선거가 의미하는 바를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당지의 군사지도자들 간에는 박사님이 ‘반미적’이라는 견해가 확고히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박사님의 전 생애가 친미로 일관해 왔음은 저도 알고 박사님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박사님의 일생을 통한 한국독립 투쟁이 반드시 미국을 통하여 미국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과 또한 소련의 침공을 막는 데 있어서도 미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저와 박사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32-233쪽)

 

이승만의 걱정이 두 가지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5-10선거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는 것이다. 유엔위원회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조선을 얼마동안 떠나 있겠다고 할 때였다. 5-10선거가 제대로 된 선거로 인정받을지 여부는 미국의 대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이승만 측은 보고 있었다. 또 하나의 걱정은 이승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임 문제였다. 이승만에게는 미국 요인에게 쫓아가 “얘는 뼛속까지 친미”라고 보증해 줄 형님이 없었던 것이다.

 

올리버는 6월 7일 이승만에게 편지 보낸 일과 함께 유엔위원회 상황을 적었다. 그와 이승만이 그 무렵 인식하고 있던 상황일 것이다.

 

유엔한위는 독립된 한국정부가 존재해야 하는가의 여부를 놓고 5대 3으로 갈라지고 소수파는 정부승인 전에는 앞으로의 국가통일 계획에 관해서 국제연합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는 ‘대표기구’ 이상의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또한 김구와 김규식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38쪽)

 

6월 7일은 유엔위원회 본진이 상해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이다. 그 무렵부터 위원회의 8개국 대표 사이에 5-10선거에 대한 의견이 “5대 3”으로 갈라져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5대 3 중 어느 쪽이 5고 어느 쪽이 3인지 여기는 분명치 않은데, 5-10선거를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 다수였음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의 인터뷰기사 끝머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씨는 위원단은 5대 3으로 5·10선거를 부인하였다 하는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서는 확답을 회피하고 “어떠한 단체에 있어서라도 만장일치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상이한 의견이 제출됨으로서 더욱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승만이 6월 21일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유엔위원단 상황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다.

 

6월 21일 리 박사는 더욱 심난한 사태 진전에 대하여 적어 왔다. 유엔한위 위원들은 이렇다 할 공헌을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메논의 후임으로 의장직을 맡은 인도의 씽은 한국사람이 아무도 협의를 위해 사무실을 찾지 않으므로 자기는 소설이나 읽으며 허송세월 하고 있노라고 불평이었다.

 

중국과 비율빈대표는 5-10선거의 정당성에 관한 유엔한위 보고서를 즉각 작성하고 싶어 했고 엘살바돌대표는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여기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하였다. 대다수의 대표들은 보고서를 미리 내는 것은 남북통일회담 가능성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느끼고 또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늦추려고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김구, 김규식과 맞서고 싶지 않기 때문에 관망적 태도를 취하였다.

 

파리 차기 총회에서 국제연합이 선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하지 장군은 리 박사에게 유엔한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한국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리 박사는 왜 우리가 늦어지는 것을 반대하는지 설명하면서 “우리는 소련이 반공적인 사람들을 북한에서 몰아내려 하고 있으며 100석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 실시를 제안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떠한 연립정부도 한국을 또 하나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인도가 찬성에서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된 점에 관심을 나타내며 리 박사는 그 이유가 미국이 카슈밀 문제에 인도를 제치고 파키스탄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노라고 했다. “만일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이라면 국제연합은 작당하는 집단에 불과한 것이고 한국문제는 이들에게 아무 뜻이 없을 것이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45-246쪽)

 

중국, 필리핀과 엘살바도르 대표는 미국이 원하는, 5-10선거를 긍정하는 보고서를 빨리 채택하려고 일편단심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5개국 모두가 5-10선거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레바논대표는 확실히 부정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총회에서부터 ‘가능지역 선거’를 분명히 반대했던 오스트레일리아대표 잭슨도 서울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조선에 와서 제2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각계의 조선인과 협의한 결과 소총회에서의 제1대안 즉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조선인을 위하여 현명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음으로 호주는 제2대안 즉 협의체를 위한 대안을 제출하여 이 제1대안에 반대하였으며 캐나다 역시 반대하였고 시리아는 기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1대안이 소총회에서 채택이 되고 또한 이것을 위원단도 채택하였던 것이다.

 

본인도 그간 선거준비의 경위를 관찰한 결과 선거를 감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전의 상태를 고려치 않고 단지 5·10선거 그것만을 볼 때 그 선거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3일, “5-10선거는 성공, 조선 문제 해결에 노력”)

 

5-10선거가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본다는 것이 내게는 불만스럽다. 현장을 다 다녀볼 필요도 없이, 신문 보도만 보더라도 그 선거가 ‘자유분위기’ 속에 치러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5-10선거의 자유분위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내놓기가 각국 대표들에게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흘러가는 사태 진행을 싫어하는 대표들도 선거 자체는 ‘비교적’ 잘 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그저 보고서 채택을 너무 서두르지 않고 남북통일회담의 가능성을 기다려주는 정도의 소극적 저항으로 수렴된 것 같다.

 

유엔위원단 대표들 입장을 생각해보자. 거의 모두 직업외교관들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유엔 관계 일을 하면서 유엔이란 기구의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부터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들 맡는 일이 인류애와 정의감에 입각해서 처리되기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각자의 결단이 자기 나라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오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게 의존도가 높은 나라 대표들은 미국이 원하는 방향을 거스른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비교적 의존도가 낮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대표들이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고, 미국의 중동정책에 불만을 가진 시리아대표가 가장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미국이 어떤 구체적 조치를 취했는지는 밝혀낼 수 없지만, 당시 세계에서 미국이 점하고 있던 압도적인 경제적-군사적 힘만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유엔위원단은 6월 25일에 미국이 원하는 결정을 내리고 남조선 국회에 이를 통보했다.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위원장 유어만은 25일부로 26일 제18차 국회 본회의에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국회를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는데 이로써 항간에 유포되고 있던 유엔위원단 국회 불신임설은 완전히 해소되게 되었다.

 

“한국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 귀하 근계 본인은 귀하께서 1948년 6월 11일부로 발송하신 귀한 즉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회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에 선출된 귀국민의 대표자들로써 구성된 한국 국회가 1948년 5월 31일 서울시에서 성립되었다는 정식 통고를 접수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본 위원단은 1948년 5월 31일에 선출된 귀국민의 대표자들로써 국회가 성립된 사실을 인식하오며 이 대표자들이 조속한 기간 내에 귀국의 독립과 통일을 완성시키도록 노력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귀함은 1947년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와 1948년 2월 23일 소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바 본 위원단은 모든 일을 그 결의 지시에 의거하여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관하여는 1959년 6월 10일 당시 위원장이던 지·에스·페타손 씨가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에서 명시된 본단 사명을 앞으로 실행함에 있어서 귀 대표자(국회의원)들이 요청하시는 대로 상의할 용의가 있음을 통고합니다. 1948년 6월 25일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 위원장 유어만” (<조선일보> 1948년 6월 27일)

 

6월 11일 이승만 국회의장의 공한을 받은 뒤 두 주일 만의 결정이다.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남북협상파를 위해 두 주일 기다려준 것이다. 5월 초 평양에서 돌아온 남북협상파가 가까운 장래에 서울에서 제2차 남북회담을 열 전망을 보여줬다면 아마 더 긴 시간을 기다려줬을 것이다. 결국 유엔위원단이 체념하고 말 때까지 달포 동안 남북협상파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줬는가? 곧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