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업 구상을 떠올린 지 3년이 되었다. 오는 8월 15일에 연재를 마치려 하니 겨우 한 달 남짓 남았다. 3년 전 막막하던 데 비하면 뭔가 해냈다는 만족감이 든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수없이 많지만, 공부하는 자세를 지켜왔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이다.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막연히 알던 사실들의 미묘한 의미를 포착하고, 그 의미의 집적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이해를 얻는다는 것이 이 작업의 기조였다. 이제 작업의 마무리를 바라보며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큰 시각으로 돌아가 본다. 지금까지 밝혀 온 미세한 사실들이 전 세계적 변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확인할 틀을 펼쳐보려는 것이다.

 

먼저 중국 사정을 살펴본다. 연합국 5대강국 중 역사적-지정학적으로 조선에 대해 큰 중요성을 가진 나라인데, 국공내전의 혼란에 빠져 국제적인 힘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중국 사정의 변화는 눈에 덜 뜨이는 가운데서도 조선 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끼칠 것이다.

 

일본 항복을 앞두고 국공합작은 명목만 남아있어서 국부군과 공산군 사이에는 직접 대결만을 겨우겨우 회피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항복은 국공내전 대대적 발발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의 내전 발발을 원하지 않은 미국과 소련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8월 말부터 10월 10일까지 모택동과 주은래 등 공산당 대표가 국민당 아성 중경에 가서 ‘중경회담’을 열었다. 국공합작의 갱신-연장을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도의 성공 전망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 1946년 1월의 ‘정치협상회의’였다. 그 전 달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미-영-소 3국이 연합국의 중국 문제 불간섭을 선언하고 중국인 자신의 협상을 촉구한 결과였다. 소규모로 시작되고 있던 충돌을 중단하기 위한 정전협정이 1월 10일 조인되고 22일에 걸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외에도 중국청년당과 민주동맹 등 여러 정파가 참여했고, 공산당도 만족할 만한 협의안이 이 회의에서 도출되었다. 공산당의 합법적 정권참여를 허용하는 협의안이었다.

 

국민당은 평화를 원하는 인민의 요구와 미-소 양국의 압력 때문에 협상에 응하고 있었지만 다른 세력, 특히 공산당과 권력을 함께 나눌 마음이 없었다. 국민당 병력은 인원으로도 공산당의 3배가 넘었고 무기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공산당을 제거해 놓지 않으면 갈수록 더 어려운 상대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2중전회는 정치협상회의 협의안을 거부했고, 이 무렵 소련군의 만주 철수가 시작되면서 국민군과 공산군의 충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마셜 특사가 내전 확산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국부군의 대규모 작전이 6월 26일 시작되고 말았다. 국공내전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으로 보였다. 국민군의 승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공산당의 저항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미국은 경고만 발할 뿐 국민군을 가로막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소련도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두 나라 눈치를 보면서 공격을 계속했고, 1947년 3월 공산당 근거지 연안을 점령하면서는 완전 소탕이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소탕당하지 않았다. 국공내전 내내 공산군이 국부군의 우세한 장비 앞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도 병력 충원이 원활했던 것은 농촌의 인구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1948년 초 중국의 전황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조선에도 보도되고 있었다.

 

“위기에 직면한 중국 - 미국의 적극적 원조만이 국부군 붕괴 방지”

 

[북평 4일발 UP 조선] 장개석 씨 영도하의 중국 국민정부는 지난 2년 동안에 군사적 실패를 거듭하고 현재 종전 이래로 가장 심각한 난경에 처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중공군은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년말 이래로 중공군은 중국의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만주는 이미 중공군의 수중에 거의 함락할 것 같이 보이며 화북에서는 도처에 전투가 발생하고 다수 도시가 고립화하고 있다. 그리고 화중에서의 중공군의 세력 흥기는 양자강 계곡을 위협하고 있다. 장춘에서 남경에 이르는 각지의 중립관측자들은 중공군이 소모전에 승리를 취하고 있으며 중공군은 완전 승리와 중국 제패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는 국부군 측에 중대 환심사(患心事)가 되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하북성 석가장에서의 중공군의 승리는 중공군의 전략이 기습전으로부터 정면공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을 시사한다.

 

중공군의 성공은 한정이 있는 것이나 건실한 데 의미가 있으며 장개석 씨는 “미국이 원조할 것인가, 하시에 여하히?” 하는 연래의 의문이 아직도 번민의 재료가 되고 있다. 거년 초 국부군은 불원 승리를 희망하고 (...) 서북부에서도 1년 전 국부군은 장대한 철도망을 확보하고 수원성(綏遠省) 내에 세력을 펴고 역사적 장성 관문인 장가구를 중공군에게서 탈회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장가구도 고립상태에 있다.

 

중공군의 전술은 소모전이며 교통기관을 마비시키고 철도를 폭파하고 산업을 파괴하고 수확을 몰수하고 도시를 질식시켜서 기아 또는 반란으로 패망케 하고 약점을 공격하고 강력한 저항을 회피하는 데 있다. 이 전술은 예상 이상으로 성공하여 국부의 경제생활에 중대 타격을 주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방관 태도를 지속하고 있으며 충고는 하나 적극적 군사원조는 행하지 않고 있다. 국부 공군도 대체 정비가 없으므로 열악화하고 있다. 대부분 군사소식통에서는 미국의 적극원조만이 국부군의 금후의 붕괴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6일)

 

국공내전의 경위를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는 책 하나를 소개한다. 현이섭의 <중국지>(2책, 인카운터 펴냄). 국공내전만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사와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세밀한 서술을 담은 책이다.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혁명사 관점에 묶여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1947년 연안 함락으로 위기에 몰렸던 공산군이 1948년 여름까지 전세를 만회한 까닭이 이 책에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훌륭한 지도와 공산군 지휘관들의 훌륭한 임무수행으로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대다수 중국인이 공유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사회에도 그런 설명을 이해해 둘 필요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관점이 단순한 만큼 사실 파악에는 유용한 책이다.

 

중국 내의 중국현대사 서술은 공산당정권과 국민당정권의 관점에 오랫동안 지배되어 왔다. 공산당정권의 관점은 계급혁명에 중점을 둔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이르는 ‘해방전쟁’ 과정 역시 공산주의의 정당성 중심으로 서술된다.

 

근년 들어 더 넓은 관점이 개발되고 있다. 종전 당시 중국인의 염원이 계급혁명보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더 쏠려 있었다는 관점이다. 공산당의 승리는 이 염원을 국민당보다 잘 반영한 데 원인이 있었다는 설명이 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진정한 공산화는 1950년대 중엽에야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동(東)아시아 근(近)현대(現代)통사(通史) 7>(암(岩)파(波)서점(書店) 펴냄) 235-254쪽 중(中)촌(村)원(元)재(哉), “국공(國共)내전(內戰)과 중국(中國)혁명(革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에서 약소민족의(당시에는 중국도 약소민족의 하나로 자타 공히 인식하고 있었다.) 염원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로 집약된 것은 일반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좌우 대립이 더 중요한 문제로 흔히 인식되어 온 것은 양대 강국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투영된 까닭이다. 그리고 이 왜곡된 인식이 냉전구도 속에서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조선 경우에도 해방공간의 실제 상황의 이해를 위해 민족주의 측면의 보강 필요를 느낀다.

 

장개석은 1948년 5월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헌정 형식을 갖춘 국가체제를 세운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장개석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진정한 헌정 실현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었다.

 

“입헌 중국 초대 대통령 장개석 씨 당선 - 국가 안전보장에 최대권한을 부여”

 

[남경 20일발 UP 조선] 현 국민정부 주석 장개석 씨는 19일 국회에서 거행된 선거에서 압도적인 대다수로 입헌정체 하 초대 중화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 투표수 2,734표 중 장 씨는 2,430표를 획득하였으며 유일한 경쟁자인 현 사법원장 거정 씨는 269표를 획득하였고 잔여 35표는 무효로 취급되었다.

 

현재 계획에 의하면 장 씨는 5월 5일에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될 것이며 국회 결의에 의하여 비상대권이 부여될 것이다. 국회는 대통령선거 전일에 있어 대통령에게 헌법에 규정된 제한을 받지 않고 국가 안전보장에 대한 중대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장 씨는 중화민국 창설자 고 손문 씨 서거 이래로 중국의 제1 실력자로서 1927년 이래로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여 왔으며 1943년 이래로는 국민당 선거에 의하여 국민정부 주석으로 중국을 통치하여 온 것이다. 그는 일찍이 대통령입후보 사절을 선언하였으나 그는 금번 국민당 대표로서 입후보한 것은 아니며 국회의 공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절차를 취하였으며 입헌 하 초대 대통령에 피선됨으로써 그의 수십 년래의 혁명투쟁 생애는 이에 최고 승리를 노리게 된 것이다.

 

이 날 국회 내빈석에는 리턴 스튜어트 미국대사, 레이프 스티븐슨 영국특사, 기타 외국 외교사절도 내림하여 역사적인 중국 국회의 대통령선거 광경을 목도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21일)

 

선거를 앞두고 장개석은 일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6일) 그러나 그 속셈이 ‘비상대권’ 확보에 있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4일) 그리고 대통령선거 전에 비상대권에 관한 국회의 결의를 받아냈다. 대통령중심제라야 출마하겠다고 우긴 이승만이 보고 배운 데가 있었던 것이다.

 

중화민국의 헌정 체제는 불구인 채로 시작되었다. 국민당과 장개석의 강권통치는 그대로 계속되었고, 최소한의 개혁을 요구해 온 미국정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대중 원조자금 미 하원 세출위원회서 가결 - 경제 재건 활용 기대”

 

[워싱턴 4일발 UP 조선] 금반 하원 세출위원회는 정부에서 요구한 4억6300만 불의 대중 원조계획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동 위원회는 이에 대한 보고서 중에서 미국은 본 자금에 대하여 철저한 통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 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강조하였다.

 

“종래의 대중 원조가 만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본 위원회는 금반의 할당 자금에 대한 전면적 감독으로써 이의 활용을 기하도록 미국 정부가 방책을 세울 것을 고집하면서 본안을 지지하는 바이다.”

 

(...) 대중 원조기금 중 1억2500만 불만은 중국정부의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3억3800만 불은 아래와 같이 세분된 것이다. 미곡 8500만 불, 목면 7250만 불, 석유 및 석유생산품 6500만 불, 비료 2400만 불, 연초 1000만 불, 주요시설 보충 2000만 불, 운영비 160만 불, 재건비 6000만 불.

 

그리고 기간 비밀에 붙여져 있다가 금반 공개된 세출위원회의 증언록에 의하면 국무성 당국자들은 대중 원조의 성공 여부는 전혀 의문이며 장개석정부의 강화를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은 토지개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 의하면 W. 소프 국무장관보는 동 위원회에서 아래와 같이 마셜 국무장관을 대변하였다.

 

“마셜 국무장관은 중국 사태는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으로 보고 있다. 즉 오늘 다수의 인민은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 정강을 더 많이 세우고 있는 때문에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공산주의사상은 모르나 토지개혁과 공산지구에 들어갈 때 그들이 받는 전반적 대우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정부 측에서도 이 점에 착목하여 토지개혁을 위한 준비공작을 진행시키려는 인사가 있는 것을 마셜 장관도 인정하고 있다.”

 

소프 씨는 또한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대중 원조는 즉 중국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대중 원조를 단순한 쥐구멍 투자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국내에 진정한 개혁을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나는 동감이다. 그리고 장개석 씨로 하여금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게 할는지도 모르는 1억2500만 불을 의회에서 따로 계상한 데 대하여 국무성은 약간 불만이다. 국무성에서 최초 본안을 상정하였을 때는 그 전액이 경제원조를 위하여 사용되기를 원하였으나 의회는 하등의 조건도 없이 1억2500만 불을 중국정부에 직접 할당하였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5일)

 

미국의 국제정책 결정에서 외국정부의 로비능력으로 전설적 명성을 떨친 것이 ‘China Lobby’와 ‘Israel Lobby’다. 국무성에서 엄격한 조건을 붙여 대중 원조안을 작성했는데, 의회에서는 그 조건을 풀어주고 있었으니, 참으로 탄복할 만한 로비능력이다. 세계대전이 끝난 이제 미국에게 중국 원조의 필요가 줄어들고 있는데 장개석정부는 로비능력만으로 상황 변화에 대응하고 있어서 결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서울에서의 중국 사정 보도는 당연히 미국 언론사와 국민당정부 쪽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공산당 쪽 사정의 보도는 원활하지 못했는데, 커밍스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에서 중국공산당 측과 이북정권 사이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 측면은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 민정장관직 퇴임 축하드립니다. 이거, 축하드릴 일 맞죠?

 

안재홍: 가시방석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축하받아야죠. 고맙습니다.

 

김기협: 그 자리를 맡으실 때 선생님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민족주의자로서 선생님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미군정은 진주 이래 민족주의를 대놓고 탄압은 하지 않았더라도 은근히 억누르는 태도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미군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친일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한민당과 통하는 사람들이라서 ‘통역정치’라는 더러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니 가시방석이 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 자리에 나아가셨던 뜻을 지금 다시 한 번 듣고 싶습니다.

 

안재홍: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떤 추세도 극단에 이르면 돌아서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미군정이 그때까지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억누른 것이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 사정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실수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민정장관에 취임하기 반년 전부터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한 것이 그 실수를 깨달은 결과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그 도중에 10월 소요사태가 터지자 조미공위를 열어 민족주의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미군정의 성공을 위해서는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각성이 있었던 것이라고 봤죠.

 

미군정 행정부에는 혈혈단신의 입성이었지만 김규식 박사가 입법의원 의장을 맡고 꽤 많은 민족주의자가 관선의원으로 입법의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호응이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당장은 행정부에서나 입법부에서나 소수파지만 좌우합작과 조미공위의 정신에 따라 미군정의 민족주의자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는 과정이라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그 과정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당장의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일단 그 직을 맡기로 했던 겁니다.

 

김기협: 그런데 그 판단과 기대가 어긋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으신 거죠.

 

안재홍: 한 석 달 정도는 그 기대에 매달려 있었죠. 그런데 1947년 5월경이 되어, 다른 무엇보다 경찰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기대를 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46년 11월의 조미공위 때부터 인적 개혁이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분명했고, 인적 개혁 중 첫째가 경찰, 둘째가 중앙청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미소공위 재개 전에 경찰 개혁을 완료해 놔야 공위 진행이 순조로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첫 목표로 정했고, 공위 대표 브라운 소장도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문제에는 강한 주장을 삼가면서 경찰 문제 하나에만 노력을 집중했어요. 하지 사령관 등 미군정 간부들은 대개 경찰 개혁의 필요를 인정하면서 당장 대안이 없으니 너무 서두르지 말자는 정도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위 재개 전인 5월을 시한으로 설정하고 추진했는데, 막상 5월이 되어도 개혁 실현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기협: 취임 때의 기대감이 석 달 만에 사라졌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박차고 나오지는 않으셨는데, 일에 임하는 자세는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안재홍: 달라지지 않을 수 없죠. 해방 조선의 상황을 그때까지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반성 전에 노력의 목적을 낙원 건설에 두었다면, 반성 후의 목적은 지옥의 불구덩이를 피하는 쪽이 되었습니다.

 

장관직에 있으면서 넓혀진 견문도 내 마음을 비관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카이로선언이란 것을 정작 그 선언을 만든 미국인과 소련인들이 어떤 눈으로 보는 것인지 실상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느꼈습니다. 겉으로는 피압박민족을 해방시켜 준다며 천사 시늉을 하는 그들이 조선인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러 민족을 대하는 방식을 보며 약육강식의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구나, 민족의 장래는 민족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구나, 절감했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곧 민족의 해방이라고 생각한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제국의 껍데기에 막혀있던 온갖 외부의 압력에 조선인이 노출되는 계기입니다. 물론 일본인의 한결같은 억압에서 벗어나 민족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여우 피하다가 호랑이 만난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자결권이 무슨 천부의 권리인 양 오만한 마음을 먹으면 그만큼 더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 하는 일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걷어찰 생각 하지 말고,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김기협: 장관직에 계신 만큼 민간에 있을 때보다 많은 정보에 접하셨겠죠. 민간의 해외정보는 몇몇 통신사 제공 기사에 한정되어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세계정세에 대한 선생님 관점을 한 차례 들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유엔의 권능에 대한 생각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며칠 전 팔레스타인 상황을 정리해 보면서 미국의 국제정책에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면이 많고 유엔에게 그런 면을 억제할 힘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미국의 주도하에 유엔이 관여하는 정부수립이 진행되고 있는데, 미국과 유엔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안재홍: 유엔은 기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만들어졌던 국제연맹과 같은 성격의 기구로 봐야겠습니다. 물론 국제연맹에 비해서는 회원국 수가 많아서 안정성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그 기능도 앞으로는 발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강대국의 횡포를 견제할 수 없는 한계가 국제연맹과 큰 차이 없습니다.

 

유엔이 견제 못하는 힘이 미국과 소련이죠. 유엔이 창설 후 적극 개입한 곳이 그리스, 팔레스타인, 조선의 세 곳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유태인국가 수립을 지원하는 소련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그리스와 조선에서는 미국이 유엔을 활용하고 소련이 이것을 보이콧하는 형세입니다. 두 나라의 갈등에 대한 조정 기능이 유엔에는 없습니다.

 

유엔은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경제를 미국이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경제란 물과 같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가진 것이니, 미국의 경제 독점은 날이 갈수록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강력 추진한 팔레스타인 분리독립안이 아슬아슬하게 총회를 통과한 것을 보세요. 아시아 11개국 중 필리핀 한 나라만이 거기 찬성했죠. 대미 의존도가 높은 중국조차 기권하고 9개국이 반대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약소국들이 자기 입장을 키워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적 지도자로서 간디의 성망을 등에 업은 인도가 이 움직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김기협: 조선은 역사를 통해 중국과 일본의 힘에 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비록 앞으로 식민지배나 종속관계를 다시 겪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나라의 존재는 거대한 인접국으로서 조선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장래 전망이 3년 전 일본 항복 당시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조선과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선생님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중국부터.

 

안재홍: 중요한 점을 짚어줬습니다. 지금 당장은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형국이지만, 실제로는 중-일 두 나라의 진로가 조선 상황에 이미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나는 봅니다. 두 나라의 중요성은 앞으로 갈수록 더 커지겠지요.

 

3년 전에는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중국 장악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공산당정부의 북중국과 국민당정부의 남중국으로 분리될 것을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국민당정부의 몰락과 전 중국의 공산화를 점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이전에 민족주의의 흐름이라고 봅니다. 일본의 침략 앞에서 중국인들이 염원한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장개석 정권은 전에도 항일전쟁에 열성이 없었다는 의혹을 받아온 터에, 일본 패퇴 이후에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립적 세력까지 공산당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이 중국의 북부를 장악하든 전체를 장악하든 그 정권은 공산주의 정권 이전에 민족주의 정권이 될 것입니다. 장개석 정권의 실패는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임정 세력의 권위 실추로 이어져 왔는데, 중국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독립동맹이 한-중간 민족주의 연대에서 부각되겠죠. 김두봉 등 독립동맹 인사들이 이북 정권에 참여했는데, 그들의 민족주의 노선이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통해 힘을 얻게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선생님은 좌우간의 선택보다 민족주의 실현을 조선의 진로에서 더 중요한 측면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평등을 중시하는 왼쪽이냐, 자유를 강조하는 오른쪽이냐에 민족사회의 모든 장래가 걸려있는 것처럼 좌우 대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에서 특이한 관점으로 보입니다.

 

안재홍: 좌우합작 운동을 함께 해온 분들이 모두 동의하는 관점입니다. 역사를 보세요. 열강으로 행세한 나라들이 모두 민족주의에 투철했던 나라들입니다. 인종 구성이 복잡한 미국조차도 애국심 내세우는 데 누구 뒤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민족을 초월한다는 소련까지도 실제로는 일국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국익을 추구합니다. 민족이 세워지지 않은 채로 이념을 가리는 것은 밥그릇도 받아놓지 않은 채 반찬투정 하는 격입니다.

 

조선인만이 아니라 모든 피압박민족의 염원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나도 해방이 되자마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썼던 거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민족주의 하나만 갖고 쓸 것을, 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듭니다. 민주주의라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까지 형태가 많이 있어서 제가끔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서로 충돌할 수 있어요.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면서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절충시키는 것이 순탄한 길이라고 봅니다.

 

김기협: 일본 사정은 남조선과 같이 미군 점령 하에 있다는 사정 때문에 그 변화가 더 예민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6일 <한성일보>에 올리신 칼럼을 오늘은 살펴보고, 더 듣고 싶은 말씀은 다음 기회에 청하겠습니다.

 

“공일(恐日)-배일(排日)-항일(抗日)”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온다. 전 일제 침략의 수뇌진의 하나인 미즈타 아무개가 왔다. 아니, 온 것을 꼭 보았다. 보았을 뿐일까? 그 사진을 찍고 그 담화도 들어보았다. 저만 온 것도 아니어서, 후지와라 아무개도 왔고, 재계의 거두이던 아무개도 왔다고 한다. 참인가, 거짓인가. 일제 40년의 침략의 압력에서 간신히 벗어나자 지금 새로운 국제적 중압 속에ㅐ 숨도 돌려 쉴 나위가 없는 판이다. 그런데다가 그 수뇌진이 또다시 연해 연방 건너온다고 하니, 악령이 되깬 듯이 물정 매우 소연한 것은 괴이치 않은 일이다. 참이라면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알고본즉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8-15 이후 조선 일은 이름 좋은 해방에 실질은 말이 못되고 있다. 남북통일은 구두선이요, 좌우분열-관민대립은 갈수록 심한 편이다. 전력 사정으로 산업경제 재건설은 암담의 골목에 몰려 들어가려 하고 있다.

 

이러한 때 일본은 도국(島國)적인 배타적 통일감과 전패국민으로서의 감상적 단결심에서, 굴욕을 뛰어넘은 순종적 일로로 점령국민의 유화(宥和)와 온정에 매달리어, 하루 천추 같은 재기 부흥을 벼르고 있다. 맥아더사령부에 준 조-일 양 민족의 준 인상은 전자 점점 악조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반면에, 후자 날로 향상 개선되는 상태이다. 조-일 양 민족 자신의, 또는 타고 있는 현상에서, 미 국책의 발동되는 부면에서, 조선은 더욱더 실망적이요 신경질적으로 됨은 개연 또 필연의 일이다. 미즈타 오고, 아리가 왔다고 하고, 아니 다나카 다케오도 온다고 하는 것은 의심암귀인가. 혹 그 사실인가. 키미지마 왔다 간 일 있고, 소수의 기술자 초빙된 일 있으므로, 조선의 불안한 민족심리에는 일인 대거 재진출의 혐의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사실 없는 것이 적확하다고 믿으려고 한다.

 

해방이 미완성되고 통일독립이 요원하게 보이고, 건설이 근심스럽고 생활조차도 빈위(瀕危)상태에 빠져가는 이때, 공일병에 걸림도 당사(當事)일 것이다.

 

공일은 배일로도 될 수 있다. 배일은 일본을 까닭 없이 밉다고 함이 아닌 것이니, 일의 재침략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민족적 안전 자활을 보장하자는 의도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든지 자위적인 생존권 옹호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거의 천부적인 정권(正權)이다. 다만 배일은 정상한 의미의 항일로 되는 것이요, 항일은 나아가서 그 침략성의 배제에 있고, 들어와서는 민족 자신의 결합-통일-건설-발전으로써 그 생존권의 확보, 즉 독립의 체세(體勢)를 자주적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항일은 경일(警日)이 아니다. 일본은 인접한 대민족이라, 그들 만일 재침략의 의도를 청산하고 국제 민주주의 노선을 정진(正進)한다면, 우리는 집정(執定)적인 경일의 의사 없는 것이다. 항일적인 그 의식은 민족 호존(互存)의 견지에서 언제든지 다시 화평을 지향하는 것이다. 조선인은 이즈음 민족 통일 독립의 대로를 정진할 것이다. 남조선만에서라도 이 노선을 확립 및 주진할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 있는 자립에서 공일적 배일은 자동적으로 지양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심기일전을 빕니다."

 

오늘은 편지지 아닌 한글파일로 메일을 씁니다. 지난 주 메일 받고 바로 답장 쓰고 싶은 걸 꾹 참았어요. 이 선생에게 메일 쓸 때 생각나는 대로 내 얘기만 하기 바빴는데, 한 번쯤 차분하게 이 선생 입장에 생각을 모아보고 싶어서요.

 

근대라는 잣대를 거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나는 ‘탈근대’ 추세를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별로 안 읽어봤어요. 딜레탕트 습성이 깊이 배어서 아무리 중요한 공부라도 억지로 힘들여 하는 공부에는 손이 안 가요. 재미있는 공부가 얼마든지 있는데, 억지로 뭐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생긴 대로 노는 게 ‘건강한 공부’라고 우기고 싶어요.

 

그래도 가끔 뒷골이 당겨 조금씩 읽어본 결과는 피상적인 인상 정도인데, 근대성을 비판한다는 담론 방법이 근대적 방법에 묶여 있다는 데서 일어나는 부담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전환기의 선지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짐일까요? 그래도 선지자들의 고난과 희생 덕분에 형편이 좋아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분명히 ‘탈근대’를 의식하면서 글을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의지하지 않고도 독자들에게 생각을 전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 감을 느낍니다.

 

근대와 거리를 두려 애쓰면서 ‘친중파’로 읽힌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죠. 근대 이전의 ‘전통’이 근대 이후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전통의 밑천을 제일 잘 갖춘 것이 중국이니까. 내용도 풍성하고 정리도 잘돼 있죠.

 

근데, 친중파 아니라고 뻗댈 필요가 뭐 있나요? 그 말이 가진 의미의 스펙트럼 중 나쁜 쪽에만 매달려 방어 자세에 묶이기보다, 다른 쪽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러 나서는 편이 더 실속 있는 전략이 아닐까요?

 

담론의 성패가 과학적 승부로 집약되던 근대적 상황이 바뀌어간다고 봅니다. 갑이 틀렸으니까 을이 옳다고 우기기보다는, 갑보다 을의 관점에 더 많은 사실이 더 많이 담길 수 있다는, 요컨대 을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는 주장이 더 효과적인 담론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학도 ‘역사과학’보다 ‘이야기역사’로 흘러가는 추세를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에서 제시한 것으로 봅니다.

 

“아는 것의 8할만 말하라”는 것은 참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지식 중에는 믿음의 등급에 큰 편차가 있는데, 그 등급을 의식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서 파악하고 있는 범위는 얼마 안 됩니다. 아는 걸 다 털어놓으려는 강박에 몰리면 이 등급 차이를 표현할 기회가 없죠. 발언을 줄이면 지식 중 일부만 선택해서 내놓게 되고, 이 선택 과정에서 등급 차이가 저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지식 중 확고한 믿음이 뒷받침해주는 범위가 발표되고, 듣는 사람, 읽는 사람들은 힘과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선생께 충고랄까 조언이랄까 드린다면...

 

아는 걸 다 말하려는 욕구를 없애려 들지는 말기 바랍니다. 내 취향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나름의 장점이 있는 취향이 분명해요. 그냥 생긴 대로 노시되, 조금 다른 영역, 말과 글을 아끼는 영역도 하나 따로 만들어 별도로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말하기, 글쓰기의 목적에 따라 몇 할 정도 내놓는 게 좋을지 저절로 감이 잡혀갈 것 같아요. 사실 나는 8할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체질과 취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죠.

 

이 선생 편지 다시 읽다가 “어른 흉내”란 말에서 다시 피식! 웃음이 나오네요. 예전 같으면 ‘중년’으로 통할 연세인데... 요즘 ‘연세 인플레’가 심하죠? 글자대로 하면 ‘중년’이 딱 맞는 말이죠. 청년의 측면과 장년의 측면에 양쪽으로 접해 있는 나이.

 

그러고 보니 방금 말한 표현의 두 가지 영역을 청년과 장년의 양면에 대응시킬 수도 있겠습니다. 맞아요. 확신이 서지 않아도 생각나는 대로 말 막하다가 두들겨 맞는 청년의 열정과 한 번 정색을 하고 나서면 누구도(국정원 직원과 일베충 말고)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장년의 위엄 어느 쪽에도 적어도 당분간은 묶이지 않기 바랍니다.

 

며칠 전 유시민 선생 만나 자료에 대한 설명 좀 들었는데, 노무현재단에 확보되어 있는 자료가 내게는 충분할 것 같네요. 아마 다음 주 중 재단에 찾아가 자료 검토를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재단 위치가 편리한 위치라 다행이네요.

 

노무현 관계자료 외에는 현대사 자료를(문서 등)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연구자들이 정리해 낸 범위만 참고하려고요.

 

내 서술은 노무현 개인의 성장과 전 세계적 변화의 추세를 두 축으로 삼고, 두 축 사이를 노무현의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을 통해 맺어 나가려 합니다. 이정우 교수나 유시민 선생과 얘기하다 보면 역사에 관한 노 대통령의 언급에 대한 회고가 불쑥불쑥 나오는데, 역사 생각을 참 많이 한 분 같습니다. 연설문 등 관계자료에 꽤 많이 나타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음 주부터 자료 검토를 시작하면, 한 달 내에 구체적인 작업계획을 뽑아낼 수 있겠죠. 작업기간과 원고 분량을 빨리 판단해야 프레시안 연재 계획부터 세울 수 있을 텐데, 내년 초 집필을 시작해서 주 60매씩 2년간 총 4~5천 매로 맞출 수 있으면, 생각합니다.

 

여름이 다가오네요. 계획대로 베트남으로 옮겨가게 되는지? 그렇게 되면 한국에도 얼마간 들르겠지요? 한 번 만나서 느긋하게 얘기 나눌 기회도 갖고 싶네요.

 

김기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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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도 배달 실패... 무슨 문제인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