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하 남조선 언론은 공산권 동향에 어두웠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티토”를 검색해 보니 1948년 6월 말까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합쳐 11회 나타난다. 그런데 7월 초순 열흘 동안에 25회 나타난다. 6월 28일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공산당 축출을 계기로 스탈린-티토 간 갈등이 표면화된 여파였다. 7월 9일자 <경향신문>에는 모처럼 큼직한 해설기사도 실렸다.

 

“소련 블록 붕괴의 조짐? - 유고 사태는 비상 - 조선공산당에 타산지석”

 

7월에 들어서자 외전은 철의 장막 속에서 돌발한 이변을 연일 전하고 있다. 즉 9개국 국제코민포름은 유고의 티토 수상을 동 코민포름에서 추방하였다는 것을 성명하였고 소련은 동 성명을 지지하고 티토 수상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진의는 소련을 배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유 친목을 강조, 동구 각국 간의 오해를 풀어달라고 스탈린 수상에게 간원(懇願)하였으나 일척(一擲)당하고 소련은 내 21일 개최되는 유고공산당 전국대회에 사절 파견을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는 유고와의 국교 단절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종가인 소련을 위시하여 동구 제국은 유고를 보이콧하고 있다.

 

이처럼 진전된 이유로서 외전은 단지 유고의 티토 수상은 마르크스-레닌 노선에 이반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고 인민은 티토 절대 지지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제2차 대전 후 철의 장막 속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라 볼 수 있는 동 사건의 귀결에 대하여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외전도 전하는 바와 같이 결국 티토는 자기비판으로서 소련 노선을 추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난 요인을 우리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 국제 문제에 대한 권위자 측의 말에 의하면,

 

1. 티토 수상의 노선은 소련 측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의 노선이라는 것보다 사회주의 노선이요, 거기다가 ‘민족’이라는 두 자가 더 있었다. 제2차 대전 후 약소민족이면 약소민족일수록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더 강하였다. 그런데 국제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의 관념을 냉대한 나머지 공산주의운동은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 실례를 우리는 조선에서 볼 수 있고 조선공산당이 주의운동에 실패한 것도 이 점에 있다.

 

2. 공산주의사회에는 헤게모니 장악전이란 격렬한 것이다. 과연 티토는 동구에 있어 혹성(惑星)과 같은 존재였다. 이를 시기하는 제국의 음모가 없을 수 없으니 그러한 예는 능히 조선에 있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해방 후 남로와 사로의 대립, 장안파 대 대회파 공산당의 알력 등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였다.

 

3. 그 위에 마셜계획의 역할이 있고 또 유고의 국민성 내지 9할을 점하고 있는 종교의 힘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을 잘라 말하자면 철의 장막 속은 평온무사하고 행복한 것 같지만 기실은 불안과 불행의 지역이라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는 산 자료일 것이다.

 

수준 높은 해설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런 정도가 일반 조선인들의 공산권 사정 이해를 위해 주어진 자료였다.

 

해설자의 눈에도 스탈린에 대한 티토의 저항이 당랑거철(螳螂拒轍) 내지 이란격석(以卵擊石)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오래지 않아 진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도 나타나 온 소련의 큰 힘과 유엔에서 소련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동구 공산국의 행태에 비춰보면 당연한 인식이다.

 

그런데 유엔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위성국가’ 행태에서 벗어난 일은 이미 있었다. 1947년 11월 하순 유엔총회에서 조선 문제와 나란히 상정된 팔레스타인 분리건국 제안에 소련이 찬성하는데 유고는 기권했다. 민족주의와 관련된 사안에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령’을 벌써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두 달 전 코민포름 결성 때까지도 유고슬라비아는 누구 못지않게 모범적인 공산국이었다. (1947년 9월의 코민포름 결성 과정은 1947년 10월 5일자 일기에서 설명했다.) 코민포름 본부가 베오그라드에 설치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후 몇 달 동안 티토와 스탈린 사이의 신뢰가 사라지고 1948년에 들어서면 유고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 가시 돋친 편지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Wikipedia> "Tito-Stalin Split")

 

분쟁의 이유로 유고슬라비아가 독자적 경제정책을 추진했다는 점과 소련이 제창하는 국제공산주의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점이 거론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후자가 더 근본적인 문제다. 티토의 경제정책이 마르크스-레닌 노선에서 벗어난 것인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큰 문제이기 때문에 분쟁의 출발점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나니까 티토 노선을 비난하기 위해 들고 나온 문제일 것 같다.

 

1947년 3월 12일과 14일, 그리고 1948년 5월 13일 일기에서 그리스 사태를 설명할 때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을 곁들여 소개한 일이 있다. 티토는 영국과의 흥정으로 그리스공산당을 배신한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발칸연방’을 추구하면서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의 합방도 추진했는데, 스탈린은 그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지도를 받지 않고 서둘러 추진하는 데 분노했다고 한다.

 

1948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소련공산당과 유고공산당 사이에 오고간 몇 차례 편지를 통해 분쟁이 격화되었다. 4월 13일의 유고공산당 편지에는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5월 4일 소련공산당에서 보낸 편지에는 소련 적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파멸로부터 구원”해 줬다며 유고공산당의 오만을 질책했다. 유고공산당은 5월 17일 편지에서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의 항쟁 성과를 묵살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다음 달 코민포름 회의장에서 따져보자고 했다.

 

이것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스탈린의 오만이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의 도움 없이 추축국을 물리쳤다. 마지막 고비에서 소련군이 잠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정부와 협정을 맺고 들어와 제한적 역할만을 맡은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위성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힘에 의지해 정권을 잡은 것과 달리 티토의 유고공산당은 자기 힘으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한 것이었다.

 

1948년 6월의 코민포름 제2차 회의에 유고공산당은 불참했고, 이 회의에서 유고공산당의 제명이 의결되었다. 소련은 9월에서 10월에 걸쳐 유고슬라비아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그 위성국들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까지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흐루시초프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의 목록에서 티토가 한국 다음이었지.” (<Wikipedia>에 이 발언의 출처는 표시되어 있지 않음.)

 

코민포름과 결별한 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대적 ‘코민포름주의’ 탄압이 있었고 다른 공산국에서는 ‘티토주의’ 탄압이 있었다. 코민포름주의란 국제노선에 충성하며 조국을 등지는 것이었고, 티토주의란 민족주의에 매달려 국제노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에게 버림받은 유고슬라비아는 마셜플랜의 도움을 받으며 활로를 찾았다. 미-소 경쟁에서 이득을 취한 셈인데, 어떻게 이런 입지가 가능했는지는 언제든 더 세밀히 살펴보고 싶다. 경쟁의 중간에 서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런 위치에서 양쪽 압력에 치어 패망의 길을 걷기가 더 쉬울 것이다. 티토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라비아의 체제가 튼튼했기 때문에 압력에 눌리는 대신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격화되고 있던 냉전의 와중에서 독자적 입지를 세운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깃발이 되었다. 비동맹기구는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설립되었고, 티토는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엥크루마와 함께 그 지도자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과 화해했지만 그 위성국의 위치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토와 바르샤바동맹 양쪽에 모두 대항하는 국방체제를 유지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탈퇴는 당연히 공산권의 구조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소련과 미묘한 관계 속에 ‘해방전쟁’을 수행하던 중국공산당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취하는 입장에도 작지 않은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김성보는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243-246쪽에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는가?” 질문을 제기하는데, 북한이 소련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위성국가였다고 하는 통념에 반성의 여지가 있다. 동유럽에서 6개 위성국과 유고슬라비아의 노선 차이를 기준으로 하여 초기 중국과 북한의 소련과의 실제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스탈린과 티토 사이의 갈등을 살펴보다가 소련이 유엔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를 다시 생각해볼 만한 실마리도 떠올랐다. 그리스 문제에 대해 미국 정책을 비난하며 유엔의 개입을 보이콧한 것은 조선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처칠에게 양해한 바 있었고, 실제로 그리스공산당의 항쟁 지원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엔에서는 말로만 핏대를 올리며 보이콧으로 미국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조선 문제에 대해서도 말로만 미국의 분단건국 제안을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보이콧으로 부결의 위험을 없애준 것 아닐까? 조선을 통째로 차지하려고 미국과 극한대립을 벌일 뜻이 스탈린에게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절반을 차지하게 하면서 나머지 절반을 챙기는 것이 힘도 안 들고 소련의 이익에 충분히 부합하는 방책으로 생각되었을 것 같다. 그리스에서나 조선에서나 스탈린은 내전의 참극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알리바이만 챙기고 있었던 것 아닌가. 반공 선전 중 “스탈린의 음흉함”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를 찾지 못하겠다.

 

 

Posted by 문천

 

민족자주연맹(민련)과 한독당 중심의 남북협상파는 1948년 4월 초 평양행을 앞두고 노선 조율을 위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를 결성했다. 이남의 남북협상 추진세력으로는 2년 전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간파와 민전 중심의 좌익이 있었는데 1948년 들어 김구가 이끄는 우익의 한독당이 가담했다. 통협은 중간파와 우익의 연합이었는데 중간파 중 좌익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므로 민족주의 진영 형성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5월 초 평양에서 돌아온 후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통협 확장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일이 순조롭지 못하자 통협 확장을 포기하고 새 기구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양김 씨의 진영, 통촉(統促)을 신 결성”

 

민련과 한독당에서는 8일 하오 3시부터 동 6시 반까지 경교장에서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유림 씨와 타협이 성립되지 못하여 ‘통협’과는 별개로 새로운 기구 조직을 의논한 결과 ‘통일독립촉진회’를 구성하고 신발족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동일 발기주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 위원으로 김붕준·이두산·여운홍·엄항섭·배성룡·조헌식 등 6씨가 선정되었는데 작 9일 오전 10시부터 약 3시간 민련 회의실에서 동 위원의 초회합을 하고 ‘통촉’ 발기에 대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0일)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통협의 한 축을 맡았던 유림은 우익 지도자들이 이북 측 의도에 말려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경계하고, 4월 평양회담 후에는 김구, 김규식 등 참석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섰다고 비난했다. 7월 8일 통협에서 통촉으로의 전환 결정의 계기가 그 날 나온 유림의 비타협 선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협이 ‘통일탁치운동자협의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성명서를 유림은 이런 말로 맺었다.

 

“보살은 아귀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갈 수 있으나 범부 중생은 보살을 따라 지옥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양김 씨는 공산당을 선택 수단으로 포용할지라도 나는 무명소졸이라 부지중에 공산당 오열에 징용되지 않도록 부단히 경각을 가지고 싶다.

 

나는 통일운동을 통해서 사세(私勢)를 확충하려는 심사도 없고 허구 선전으로 모해 중상하려는 일체 무치(無恥)행위는 괘치 아니하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최후까지 항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은 동포들의 혁명 도의와 애국 양심의 판단에 맡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0일, “찬탁에 서명한 양김 씨 통협 영도권 없다 - 유림 씨, 폭탄성명 발표”)

 

유림이 양심적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탁치 수용을 주장한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들과 갈라선다는 것은 지나친 결벽증 같다. 이념으로 뭉치는 붕(朋)이 이익으로 합치는 당(黨)보다 현실 속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문제다. 이익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인 반면 이념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파 대표인 유림의 반발 앞에서 통협을 포기하고 통촉으로 전환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당시 지사(志士)들의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보는 것 같다.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거나 몰아내기보다 함께 하던 일에서 물러서는 자세. 유림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조소앙의 대답에서도 이런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유림 씨는 명쾌한 비판을 잘하는 분이다. 그러나 국가의 독립을 완성하는 수단방법으로 민족의 총단결은 물론이며 역사적으로 동일한 궤도에 섰던 민족계열들의 단결을 유효하게 추진하는 것도 비판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줄로 본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1일)

 

평양회담 이후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협상파의 세력은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유림처럼 타협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협을 너무 좋아해서 이북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이 막강한 힘으로 추진하는 분단건국을 막을 길이 없다는 체념으로, 이북에서라도 민족국가의 꿈을 이뤄보겠다는 뜻이었다. 이북 정권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배합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족주의자로서는 합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에는 비대칭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북측은 단일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는데, 남측의 협상 추진세력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남로당과 민전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은 북측 입장에 호응하고 있었고, 민족주의 진영이 통협으로 뭉쳐져 있었지만 결속력이 약했다. 민족주의 진영에서 상당수가 이북 정권 참여파로 넘어가면서 남북협상은 북측의 명분 확보에 이용되는 결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남 민족주의 진영이 통촉 설립의 방향을 겨우 잡고 있을 때 이북에서는 정부 수립을 위한 중요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를 결정한 것이다.

 

이북의 헌법 제정 작업은 이남에 비해 차분한 과정을 거쳤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조선 관계 결정이 있은 며칠 후 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헌법 제정 논의가 이뤄지고 31인의 임시헌법 제정위원이 선임되었다. 제정위원회는 11월 20일 첫 회의에서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전부장 김택영, 역사가 이청원과 북조선최고재판소 판사 김윤동 3인을 초안 작성위원으로 임명했다. (<북한의 역사 1>(김성보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26-130쪽)

 

제정위원회는 1948년 2월 초순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 임시헌법 초안을 제출했으나 인민회의는 이 초안을 바로 심의하는 대신 초안의 형태로 공표해서 ‘전 인민 토의’에 부쳤다. 2개월간 진행된 전 인민 토의 중 제정위원회는 2,236건의 수정안과 첨가안을 접수했다. 이것을 근거로 수정 작업을 진행, 완성된 초안은 4월 29일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김성보는 이 초안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채택된 헌법 초안은 인민위원회를 국가권력의 기초로 하는 인민적 국가 형태와 인민주권 형식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경제구성에서 국가소유, 협동단체의 소유, 개인소유를 모두 인정했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 북한 헌법 초안은 소련 헌법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일반화되고 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틀에서 수용한 것이었으며, 남북분단의 상황 등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북한의 역사 1> 129-130쪽)

 

6월 3일에야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서 두어 주일 만에 초안을 작성하고 다시 두어 주일 만에 본회의 심의를 끝낸 이남 국회의 헌법 제정 과정은 민의 수렴도 미흡하고 졸속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군정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미국과 단정 추진세력은 9월의 유엔총회 전에 건국 작업을 끝내기 위해 서둘렀고, 이승만은 헌법 심의를 지연시키는 의원들을 반역세력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이남의 헌법도 이북의 헌법도 분단국가의 헌법이 아니었다. 이남에서는 국회 정원을 3백 명으로 하되, ‘가능지역 선거’에서 선출된 2백 명 의원으로 개원했다.(실제로는 북제주 2명이 빠진 198명) 정원의 3분의 2 이하 의원만으로 헌법 제정 등 가장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는 문제는 건국의 정통성 확보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0일 발표된 이북의 선거 계획은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을 포함한 것이었다. 8월 25일 실시될 이북의 선거 전에 이남에서는 간접선거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7월 15일부터 남조선 대표자선거를 시작하고, 여기서 선출된 1,080명의 대표자가 38선을 넘어 해주에 집결, 8월 23~25일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해주대회에서 선출되는 360명의 대의원이 8월 25일 이북 선거에서 선출되는 212명 대의원과 함께 정원 572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게 된다.

 

실제로는 반쪽 정부면서 서로 전 조선 정부라고 우기는 상황 자체가 많은 무리를 낳았다. 적대관계를 취하더라도 반쪽 정부라는 사실만 피차 인정했다면 대립의 양상은 훨씬 완만했을 것이다. 미-소의 대리전을 하필 조선이 떠맡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당시에도 오기영 같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능지역 정부”

 

1948년 5월 10일 남조선에서 시행된 선거는 그것이 북조선의 참가가 없이 남조선에서만 단독으로 시행된 것이니 이것을 일러서 단독선거라는 말은 지당한 말이다.

 

더구나 남조선에서도 각당각파가 모두 다 참가한 것이 아니라 일당일파만 단독으로 참가하였으니 이러한 관점에서 단독선거라는 말은 더욱 지당한 밀이다.

 

그런데 이 선거에 참가한 편에서는 이것을 총선거라고 말한다. 어느 모로 보아도 총선거라고 할 수는 없어야 옳건마는 굳이 이것을 총선거라고 하면 장차 남북이 통일하여 시행할 정말 총선거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그야 애꾸도 애꾸라면 싫어하는 모양으로 단독선거도 단독선거라면 싫어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코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애꾸가 아무리 애꾸이기를 싫어할지라도 별 수 없이 애꾸는 애꾸다. 이십세기의 의학발달은 애꾸의 보기 흉한 한쪽 눈에 그럴듯한 가짜 눈알을 해 넣어서 겉으로 보기에 애꾸가 아닌 것처럼까지 만드는 수는 있으나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 애꾸는 애꾸라, 그는 한쪽 눈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대하여 아무리 단독선거라는 말을 싫어할지라도 단독선거는 별 수 없이 단독선거다. 모든 정치적 제스처와 미문여구로 합리화할지라도 실질에 있어서 이 나라의 반쪽에서만 시행된 단독선거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차라리 조선의 정치가들의 협량(狹量)을 슬퍼한다. 이 말은 단독선거를 총선거라고 불러주지 않는 데 대해서가 아니라 단독선거는 단독선거라고 떡 버티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이 다르고 견해가 달라서 이번 선거에 찬부(贊否)가 갈렸다. 하다면 찬부에 대한 정부(正否)는 후일의 사필(史筆)에 맡길 일이요, 일단 그 신념대로 행동한 데 대해서 우물쭈물하거나 가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이 불참하면 남에서만이라도, 똑 각당각파가 불참하면 일당일파 단독으로라도 선거를 행하고 거기 의하여 군정 하에서보다는 나은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었으면 그로써 좋은 일이다. 구태여 총선거 아닌 단독선거를 단독선거 아닌 총선거처럼 주장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충분히 이해한 바와 같이 단독선거라는 말이 듣기 좋을 까닭은 없을 것이다. 나도 지금 단독선거라는 말을 여러 번 썼지만 내가 그 편이 되어도 그 말이 굳이 좋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듣기 좋을 것 없는 말을 구태여 쓸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비위에 거슬리는 용어를 많이 써서 그것이 동족 간에 얼마나 불화를 더하였는지 모른다. 가령 적구(赤狗)라, 매국노라, 극렬분자라 하는 따위 용어의 남용은 쓰는 사람도 옳지 않거니와 듣는 사람으로서도 아무리 정치운동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마는 결국 사람은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좋지 못한 용어에 감정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동족 상화하여 통일건국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피차에 이러한 감정적인 매언(罵言)으로 상대편의 감정을 자극하는 용어는 지극히 삼갈 필요가 절실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운동에 있어서도 높은 교양과 스포츠맨십이 필요할수록 저열하고 속악적인 용어는 일체 사용치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 이르러 우리는 단독선거라는 용어가 생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이해할 때에 구태여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다. 본시 이번 선거는 국제적으로 공식상으로 가능지역선거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주의를 환기하는 바이다.

 

그렇다 이번 선거는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시행하는 것이 좋다는 UN소총회의 권고에 의하여 UN임시조선위원단은 가능지역 선거를 시행토록 하고 그들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 내에서 감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정확히 불러서 이본 선거는 단독선거도 아니요 또 총선거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가능지역선거인 것이다.

 

그러니까 구태여 단독선거라고 꼬집어 뜯어서 상대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동족불화를 조장할 위험이 있는 비례적인 소위라고 생각하거니와 동시에 나는 이것을 실질과 달리 총선거라고 하는 가장(假裝)적 허장성세도 그만두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선거를 가지고 내가 왜 지금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인가. 내가 이것을 구태여 문제 삼는 것은 본뜻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 의하여 성립되는 정부에 대해서 이제ㅐ 또 중앙정부라는 말과 단독정부라는 말이 서로 충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가능성은 결코 기우적인 예측이 아니라 이번 선거에 대한 두 가지 칭호에 의하여 그 실험적 논리 하에서 누구나 시인할 가능성을 가진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심각한 문제요 신중히 생각할 문제다.

 

그러면 이제 성립될 정부를 무슨 정부라고 부를 것인가?

 

마땅히 가능지역정부라고 할 것이다. 가능지역 선거에 의하여 성립되는 정부이니 가능지역정부요, 그 법률과 행정을 거부할 북조선에까지 시행될 가능성은 없고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 시행될 것이니 별 수 없는 가능지역정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가능지역정부를 일러서 혹은 중앙정부라, 혹은 단독정부라 하여 피차의 심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앞날의 통일을 완수하는 데 방해가 되는 동족불화를 조장할 위험스러운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건마는 이 가능지역정부를 가능지역정부라고 부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딱한 가능지역이다. (1948년 6월 10일) (<진짜 무궁화> 89-93쪽)

 

 

Posted by 문천

 

<역사 앞에서>가 나오고 2년쯤 후니까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그때 살고 있던 제주도로 다테노 선생이 찾아왔다. 그 책을 일본어로 번역출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일부를 일본어로 번역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하셨다. 사적인 일기가 아니라 공적 자료로서 작성하신 뜻을 어머니도 물론 알아보고 있었던 것인데, 국내 발표 전망이 없는 30여 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본어로 옮겨 놓을 생각까지 일으키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번역해 놓은 원고를 미처 꺼내보기 전에 찾아온 다테노 선생에게 일부 번역이 있다고 하니까 반색을 하면서 "그러면 이 선생님께서 마저 번역을 하시면 출판교섭 등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크레딧에 연연하지 않고 좋아하는 책이 잘 나오기만 바라는 그 마음에 약간 감동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 번역을 꺼내 보니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을 선생에게 보냈더니 어머니와 자기의 공역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어머니는 정말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당시까지 수필은 쓰고 계셨지만 긴 작업은 바라볼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당신 뜻을 대신 이뤄드리겠다는 제안이었으니. 미안한 마음을 이런 말씀으로 눙치셨다. "시작이 반이라니까, 공역 맞지 뭐."

 

그래서 일본어 번역판 <소우루노 人民軍>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요즘 나 욕하는 사람 없나 싶어서 네이버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는데, 뜻밖에 다테노 선생 기사가 떠오른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350794

 

그 양반도 여든이 다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제주도로 찾아올 때 연세가 지금의 나랑 비슷했겠네.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일 열심히 찾아서 하고 계시다니 참 보기 좋다.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그런데 선생이 지금 하고 싶은 일로 내 책을 일본어로 옮겨 내는 것을 꼽고 있다니! 또 한 번 감동이다.

 

"그동안 번역한 한국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는 김성칠 전 서울대 교수의 한국전쟁 일기 '역사앞에서'를 꼽으면서 김성칠 전 교수의 아들인 역사학자 김기협 씨의 책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내 책이 선생의 번역을 받을 수 있다면 일생의 큰 기쁨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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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