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은 개천절, 한글날, 3-1절, 광복절과 함께 국경일의 하나다. ‘국경일’은 대한민국의 법률적 제도다. 1949년 10월 1일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그 근거다.

 

민족과 국가를 굳이 구분해서 따지자면 다섯 개 국경일은 모두 국가보다 민족의 경사를 대표하는 날이다. 그중 국가의 경사로서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제헌절인데, 이것 역시 민족의 경사로서 의미를 더 크게 볼 수 있다. 한민족이 헌법을 갖고 입헌정치를 누리게 된 것은 천여 년 전 민족국가를 갖게 된 이래 국가제도 측면에서 가장 큰 성취임에 틀림없다.

 

근년 사회 일각에서 8월 15일을 광복절보다 건국절의 의미로 경축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치졸하고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는 제헌절에 담겨 있다. 8월 15일의 정부수립 선포는 헌법 공포에 비해 비중이 작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한 것이고, 수립 직후의 대한민국 정부도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치졸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1948년을 내세워 1945년의 의미를 뭉개려 드는 의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1945년에 끝난 일본 식민지배는 한민족의 1천년 민족국가 역사가 중단된 민족사 초유의 이민족 지배였다. 이민족 지배의 가장 비근한 예로 13세기 중엽 이래 백여 년간의 ‘몽골 지배’를 들 수 있는데, 일본 식민지배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의 간접지배였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배’ 대신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는 학자들도 있다.

 

나는 1945년의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했다는 문제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해방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외세의 억압을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가 1945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 민족사회가 장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조건을 거의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민족의 경사로서 의미가 큰 일이었다. 그 뒤의 역사를 아무리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로 볼 수 있게는 된 것이다.

 

‘건국절’ 주장에 대해 5년 전 이렇게 논평한 일이 있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계급, 투기세력에게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작전일 뿐이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현대세계에서 제 발로 첫 걸음마를 뗀 계기였다. 서툴 때 고생도 많았지만, 피땀 흘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오죽잖은 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도 그 동안 국민들이 잘 키운 덕에 이제 국가 노릇을 제법 하게 됐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해서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것,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불만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대한민국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키워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35쪽)

 

한민족이 헌법을 갖게 된 것을 큰 경사로 여긴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헌법을 두 개 갖게 되었다는 것이 또 문제다.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한 일을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이 헌법은 장차 구성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회의에서 9월 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란 이름으로 다시 공포되기에 이른다. 7월 10일의 공포는 북조선의 것이고 9월 8일의 공포는 전 조선의 것이란 주장이다. 이남의 7월 17일 공포 헌법 역시 전 조선의 헌법이란 주장이었다.

 

7월 10일 일기에서 이북의 헌법 제정은 이남에 비해 차분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남 국회에서 헌법 심의 과정을 서둘러 진행하는 이승만의 초조함은 7월 12일 심의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7월 13일자 <동아일보> “국회여적”에 희화화되어 그려진 데서도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틀 동안을 휴회하였던 작일의 국회는 헌법안 제3독회를 열어 역사적 제헌의 성문을 완료하는 것이다. 국내외의 정세가 일각의 순준(巡逡)을 허락지 않는 긴박한 국면에 하루가 바쁜 정부수립을 앞두고 그 기초법인 헌법의 통과를 초조히 생각하는 이 의장, 이날도 몸소 사회를 맡아 의사진행을 집무.

 

웬만한 것은 이론만으로 시간을 천연할 것 없이 빨리빨리 진행하기를 위주하는 이 의장과 호흡을 같이 하여 헌법안의 조문을 낭독하여 내려가는 기초위원장, 숨도 안 쉬는지 낭독의 음조 몹시도 빨라 좀처럼 수정발언의 틈조차 허락지 않는다.

 

(...) 제6조 ‘국방군’을 ‘국군’으로 수정하자는 동의와 제72조 제2항 즉 외국인의 지위에 관한 조항 등에 있어 약간의 의논이 벌어져 시간이 걸린 뒤 제72조 낭독이 끝났을 무렵에 이 의장, “오늘의 오전 회의는 30분을 연장하여 이 독회를 마치도록 한다. 여러분이 발언을 너무 많이 하는 까닭에 벌로써 시간을 연장한다.”고 유모어 일석.

 

(...) 12시 20분 헌법안 제103조 전문의 낭독은 완료. 곧 전문을 그대로 통과할 것을 전원 기립으로 가결하자 엄숙한 성의(盛儀). 이리하여 헌법은 드디어 성전(成典). 이 나라의 기초는 이로써 완벽.

 

그런데 의원 총 기립 중 오직 유아독존(?)인가. 이문원 의원 의연히 그대로 독좌(獨坐). 헌법안 통과 그것을 마다고 함인가, 헌법안 내용에 불만이 있다 함인가. 엄숙(?)한 침묵에 그 의중을 짐작할 바 아니나 총 기립 중에 부화(附和) 않는 것만 가상타 할까.

 

익산을구 출신의 이문원 의원(1906-1969년)은 무소속구락부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5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전쟁 중 납북된 인물이다. 그는 헌법 심의과정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6월 26일에는 33인 의원을 대표해서 헌법안 채택 의결에 국회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게 하자는 동의를 내놓았다가 부결되었다. 6월 30일 본회의에서는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초안을 전적으로 반대한다. 국회는 양원제이어야 하며 내각제로 할 것을 주장한다. 대통령은 직접선거에 의하여야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순이 어찌하여 생겼는가. 국가 만년대계의 원칙인 헌법의 제정은 법이론에 입각하여야 한 터인데 이 초안은 너무 현 정세에만 구애된 감이 있다. 이 헌법은 조속한 독립을 원한다는 구실로 일부 간부가 자파 이익에 부합시켜 제정하였다고 본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일)

 

이 발언 중 “일부 간부”란 물론 의장 이승만을 가리킨 것이다. 기초위원회에 대한 이승만의 개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안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것이다. 그는 6월 15일 기초위원회에 임석해서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고, 기초위원회가 그에 따르지 않자 6월 21일 예정된 본회의 상정을 23일로 늦추면서 자기주장을 관철시켰다. 이렇게 직접 나서기까지 하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이용해 초안을 자기 원하는 방향으로 만든 점이 많았을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문원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회의장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7월 1일자 <자유신문> “국회기자석” 칼럼이 재미있다.

 

“모 간부 의식적 주장 설로 개회 이래 초유의 파란 야기”

 

헌법 초안에 관한 대체토의란 중요한 것인데 날이 무더워서 그런지 의원 제공들은 신경이 과민해져서 가끔 인간의 일면인 감정을 노출하여 아는 사람에게는 국회 내의 3-1과 무소속구락부가 드디어 재작일에 합동을 하게 되어 그에 따르는 공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게 된다.

 

이문원 의원의 헌법 통과에 있어서의 기본태도 문제와 관련된 발언 중 “너무 정세론에 흐르고 있는 듯하여 어떤 간부 의식적인 주장 노력에 의하는 것 같다. 운운”과 이에 대한 변증은 결론도 맺기 전에 고함 노성으로 중지되었는데 과연 결과에 있어 파문은 커서 의원 중 체면불고하고 타인의 발언을 방해 억제하려는 것은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이남규 서우석 이윤영 서상일 조헌영 제 의원이 격분하여 발언취소 요청 또는 징계위원회 회부를 주장하는데 나용균 의원이 “기초위원회에 관한 문제로 과연 기초위원회가 어떤 간부의 의사대로 초안을 작성하였는지 우리 기초위원에게 물어봅시다.”라 한 발언은 학(鶴)의 일성(一聲) 같다고나 할까.

 

국회법 제82조에 의하여 징계 운운이 연발되며 김명동 의원 의분을 느꼈는지 등단하여 국회법 제61조를 인용하여 이남규 의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동의한 것은 이척보척(以尺報尺)에서 나온 일이라고 할까. 말인즉 의장이 발언 금지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10여 차나 언권 없이 발언한 것이 까닭인 듯도 하였다. (...)

 

당시의 헌법 준비과정을 굳이 비교하면 이남의 절차가 허술했다. 그 후 이남 헌법이 기구한 곡절을 더 많이 겪게 되는 것도 이 출발점의 허술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곡절 속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발전을 거듭해 와서 이제 헌법 자체는 어느 나라 헌법 부럽지 않게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그에 따라 제헌절의 의미도 떳떳하게 되었다.

 

3-1구락부와 무소속구락부의 이름이 위 기사 중에 나온다. 국회 개원 무렵부터 무소속 의원들의 세력 형성이 ‘구락부’란 이름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6월 1일 조봉암이 주도한 50여 명의 모임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3일자) 6월 5일자 같은 신문 보도에는 조봉암과 김약수를 중심으로 한 6-1구락부와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3-1구락부가 거명되었다. 6-1구락부가 무소속구락부의 출발점으로 보이는데, 3-1구락부는 신익희가 독촉 일부의 독자세력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3-1구락부 가담, 독촉 중요 간부 반대”

 

조선 독립정부 수립에 중대한 역할을 띠고 전 민중의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신 국회 내부에 구락부가 족출하여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 제정을 비롯하여 제반 법안 제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최근 독촉 출신 신익희 의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3-1구락부에 대하여서는 현 독촉 중앙간부진에서는 3-1구락부에 대하여 찬부 양파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한다.

 

즉 독촉국민회를 순수한 국민운동 단체로 하자는 명제세 이윤영 양우정 이활 제씨들은 국회에서 구락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파를 초월하여야 할 국회 내에 파벌대립 관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독촉 출신 의원에게 구락부에 가담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발송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며 신익희 전호엽 남송학 제씨는 구락부 조직을 강조하고 있다 한다. 하여튼 독촉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3-1구락부원과 현 독촉 중앙간부와의 관계가 주목을 끌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1일)

 

6-1구락부와 3-1구락부의 통합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6월 내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는데, 신익희 측에서 독촉에 대해 명분을 세우는 동시에 세력 확장을 꾀하기 위해 퍼뜨린 얘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5-10선거의 무소속 당선자 80여 명 중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일부가 한민당과 3-1구락부로 흡수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국 50여 명이 무소속구락부로 남게 된다.

 

서산을구 출신의 김동준 의원이 1948년 6월 23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무속 의원의 각오”가 무소속구락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므로 길지만 옮겨놓는다.

 

금반 총선거에 당선된 국회의원을 소속정당 별로 분류해 보면 무소속 의원이 85명으로 단연 수위를 점하고 그 다음이 독촉계열과 한민당의 순위로 되어 있다. 총선거의 이 숫자적 결과로 추측컨댄 일반 국민이 기존 단체나 기존 정당에 소속된 의원에게보다도 정당적으로 아무 연계도 없는 소위 무소속 의원들에게 더 많은 기대와 촉망을 가지고 있음을 규지할 수 있다.

 

기존 정당들이 각각 정강정책을 중외에 분명히 선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이 정당인에게보다 무소속 의원에게 더 많은 기대를 가지는 것은 무슨 이유이며 우리 무소속 의원들은 또 무슨 까닭으로 무소속을 표방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던가?

 

입헌정치에 있어 정치적 활동을 강력히 전개하려면 그리고 또 정치인으로서의 영달적 야망을 만족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정당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한 인사들에게는 초보적인 상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정당적 배경을 거부하면서 무소속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장래할 국회 의장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정치적 활동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릇 정당이라는 것은 정강정책을 같이 하고 또 이해(利害)가 일치되는 정치인사들의 규합체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해서 정당인은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소속 정당의 대변자적 역할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무소속 의원은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지공무사하고 공명정대한 정치적 공도를 걸어 나가기 위하여 무소속으로 나왔고, 일반 국민들이 무소속 의원들에게 격별한 기대를 부치고 있는 것도 또한 그 점에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여 마지않는다.

 

즉 환언하면 ‘무소속’ 3자는 국회에 임하여 우리는 하등의 단체적 약속이나 정당적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진실로 초정당적인 입장에서 자율적인 태도로 멸사봉공을 다하겠다는 것을 일반 국민에게 서약하는 무언의 맹서였던 것이다.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국회의원 중에는 반드시 순수한 무소속만이 아니라 개중에는 당선의 영예를 획득하기 위한 기만적 가면을 썼던 인사가 전연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가면을 썼거나 어쨌거나 무소속 입후보자는 정치활동에 일체의 외적 구속을 배격하겠다는 묵계만은 있었고, 일반 국민이 신성한 한 표를 우리에게 던진 것도 그러한 약속 밑에서였다.

 

이에 85명의 무소속 의원들 간에는 일반 국민에게 무언으로 맹서한 내용이 동일함을 깨달을 수 있고 무소속 의원들의 공통된 정치이념이 여기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출마 당시의 유권자 제위와의 묵계를 배반하지 않는 이상 그 이념은 확고부동 영구불변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국회 내에는 국회의원만이 있을 뿐이지 정당인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돌이켜 생각건댄 도대체 정당이라는 것은 정치활동을 위한 단체요, 정치활동은 국회를 통하여 비로소 전개되는 것일진댄 의회에 있어서의 정당의 존재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총선거 이후 각 정당들이 무소속 의원을 포섭하려고 맹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을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5월 31일 국회 개회 이래 각 정당에서는 무소속 의원 포섭에 다방면 다각적으로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심하면 무소속 의원이란 마치 필연적으로 어느 정당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될 부동(浮動)적 존재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일부의 무소속 의원들 자신까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무소속이란 일체의 정치적 연계를 배격하고 자유자재한 입장에서 정치적 활동을 실천할 것을 일반 국민에게 맹서한 지공무사한 존재일 따름이지 풍세에 맹종하여 우왕좌왕할 부동적 존재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무소속 의원은 국민에게 대한 공통적인 묵계에 따라 무소속 의원끼리 일치단결할 필연성은 잠재하여도 그 외의 어느 기존정당에 편승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만약 기존하는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가담한다면 가담하는 행동 그 자체가 이미 국민과의 약속을 배반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겠다.

 

무소속 의원들의 이제부터의 거취는 지금 대다수 국민의 주시의 적(的)이 되어 있다. 우리들의 금후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반 국민의 신뢰와 실망을 직접 좌우할 것을 생각할 때 신체는 비록 개일일지나 우리의 쌍견에 부하된 책임이 중차대함을 자각하여 일시적인 개인 감정이나 개인 이해로 경솔한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심신(深慎)의 주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무소속 의원들은 의회활동에 있어서 앞으로 어떤 태도로 나가야 하겠는가? 이미 위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우리들 본래의 이념은 국정에 대한 일당전제를 견제함으로써 정치를 국민 본위로 운영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상의 좌우와 정당의 갑을을 막론하고 그 정책이 국가의 장래에 유익한 것이라면 용감히 이를 취하고 국민의 복지에 해로운 것이라면 결사적으로 이를 배격할 기동적 지반에 입각한 의원은 오직 무소속 의원들뿐이요, 그것의 승리를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무소속 의원들뿐인 것이다.

 

실로 무소속 의원들의 무소속다운 진면목도 여기에 있고 그 점이 무소속 의원의 공통된 임무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지상임무를 망각하고 일시적인 사정이나 일신상의 명리에 현혹된다면 우리를 무소속인 까닭에 국회 의장에 내보낸 유권자 제위를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접대할 것인가?

 

이에 무소속 의원들은 각자 간에 공통된 지상임무의 완전 수행을 위하여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약 금후로도 기왕과 같이 분산적인 태도로 나간다면 무소속 의원들은 공통된 이념 아래 공통된 임무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사명을 충분히 완수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현하 국회 내의 분위가 반드시 순조롭다고만 보기 어려운 형편이니 차제에 우리는 대동단결로써 행동통일을 꾀하지 못한다면 건국 대업에 천추의 유한을 남기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무소속 의원의 대동단결을 고조하는 것은 그러한 단결을 통하여 정당적 색채를 띠자거나 혹은 의회 내에 있어서의 세력체를 조성코자 함이 아니라 그 목적은 진실로 무소속 의원들 본래의 공통적인 사명을 다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애국적 지성(至誠)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결론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제 하에서 개회 이래의 무소속 의원들의 향배를 관망할 때 우리는 반성치 않을 수 없는 점이 반드시 없다고도 하기 어렵다. 무소속 의원의 단결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기에 이미 무소속 결합체로서 3-1구락부와 무소속구락부가 생겼다. 그러나 상기 두 결합체를 두고 볼 때에 마땅히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고 무소속 의원들이 두 개의 결합체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분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소속 의원의 결합의 의의가 공통 임무 달성을 위한 행동 통일에 있다고 할진댄 같은 무소속으로 두 개의 결합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 어느 하나는 이미 진정한 무소속적 임무를 포기한 것이라고 보아도 그리 과오는 아닐 성싶다. 지방에 있는 유권자 제위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낙망할 것이며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결합을 빙자하여 분열을 초래할진댄 차라리 각자각출로 개별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무소속 의원들은 공통 사명 달성에의 행동 통일을 위하여 대동단결하자! 도원의 결의를 맺어 나아가되 보조를 같이하고 물러가되 행동을 같이하자! 의회장을 우리의 결전장으로 알고 공생공사의 각오로 매진하자. 오직 그 길만이 우리 85명 무소속 의원들의 걸어갈 공도요, 또 그러는 것만이 신성한 임무를 다하는 유일한 방도인 것이다.

 

 

Posted by 문천

 

7월 15일 딘 군정장관의 기자회견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문답이 있었다. 이 문답을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군정의 자세를 한 차례 점검해 본다. 그런데 딘이 이 무렵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훑어보려고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니 좀 우스운 이야기들이 보인다. 7월 15일의 기자회견 문답에 앞서 이 소소한 기사들을 소개한다.

 

“장 청장에 딘 장관이 선사”

 

군정장관 딘 소장은 수일 전 해방 후 혼란시기에 수도청장에 취임하여 수차에 걸친 폭탄테러와 갖은 고경을 극복하고 일로 민주경찰 수립에 꾸준한 노력을 다하여 온 수도청장 장택상 총감의 다대한 공적에 대하여 미국제 고급 승용자동차(크라이슬러 1947년) 1대를 선사하였다 한다. 군정장관이 조선인 군정관리에게 물품을 선사한 것은 금번 장 수도청장이 최초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1일)

 

“받은 자동차는 과정(過政)서 배당된 것 - 장 청장 담”

 

12일 장 수도청장은 지난 번 딘 군정장관으로부터 승용자동차를 장 총감에게 선사하였다는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과도정부로부터 관청용으로 본인에게 배당된 것이지 결코 딘 군정장관이 본인에게 준 선물이 아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3일)

 

“딘 장관 사진기 도난”

 

11일 하오 4시부터 동 30분 사이에 군정청 후정에 정차 중인 딘 군정장관 승용차 안에 두었던 ‘플렉스’ 사진기를 도난당하여 방금 범인을 엄사 중이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3일)

 

이런 기사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딘 군정장관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15일의 기자회견에서는 아래 문답이 오갔다. 번호는 필자가 매긴 것이다.

 

문1: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다고 하는데 미군정에서는 신정부에 모든 권한을 이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답: 미군정에서는 어느 때든지 신정부에 모든 권한을 이양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가지고 있다.

 

문2: 치안부 독립설에 대하여.

답: 이 문제는 대한사람 자신이 정할 문제인 만큼 내가 그에 대한 가부를 말할 일이 아니로되 개인의 견해를 말한다면 기구문제보다 운영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문3: 북조선에서는 8월 25일에 선거를 실시한다는데 장관의 견해는 여하?

답: 동 선거는 전형적인 공산주의적 선거라고 본다. 지정된 입후보자 한 사람에 대하여 흑백 2개의 투표상자를 두고 가부를 투표한다는 것은 자유선거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그곳에서 자유선거를 해서 이곳 국회의 빈자리를 못 채운 것과 유엔위원단 감시 하에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문4: 양김 씨는 제2차 남북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려고 미소 양군 당국에 교섭중이라는데?

답: 미군 당국과 그런 교섭이 있는가는 나는 모르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평양에서 행하였다는 전력교섭과 같은 믿을 수 없고 모략적인 회담은 나로서는 도와줄 생각은 없다.

 

문5: 전력문제에 관하여.

답: 발전선을 더 증가시키라는 의견도 있으나 그 운영비용이 막대하므로 더 가져올 의향은 없다. 또 이 전력문제에 관련해서 전번에 전력대책위원회에서 위원 몇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는데 나는 그들이 찾아온 줄을 전연 모른다. 그러나 설혹 찾아왔다 할지라도 나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북조선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 만났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일전에 미국에서 온 전기기사들은 아직 계속하여 발전시설에 관하여 조사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구체적인 대책을 세웠다면 후일 발표하겠다.

 

문6: 요즈음 쌀 배급이 줄었는데 그 원인은?

답: 식량보유량이 일정한데다 인구는 점점 늘어가기 때문에 부득이한 조치로 줄인 것인데 앞으로도 유령인구를 철저히 적발하는 한편 식량수집도 강화해서 어쨌든 식량만은 충분히 확보할 예정이다. 그런데 여태껏 적발한 유령인구는 24만 명이나 되는데 월남하는 한인은 6월중에만 해도 약 2만 명이나 된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16일)

 

정권이양에 관해 이승만은 며칠 전(7월 12)일 기자회견 중 “정부 조직의 순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 일이 있다.

 

“헌법은 이미 통과되었으니 정부조직법만 통과된다면 곧 대통령 부대통령을 선출하고 외국에 통첩하는 한편 군정을 이양해야 할 것이니까 우리 대표와 군정부에서 대표를 선출하여 이양에 대한 방법 등을 교섭할 것이고 내 생각으로는 8월 15일까지는 이를 완료할 예정으로 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3일)

 

국회 개원 때 하지 사령관이 의원 전원 앞으로 ‘사신’을 보냈다가 망신당한 일이 있다. 이제 미군정이 앞에 나서서 움직일 계제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문1에 대한 딘의 답변에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문2의 ‘치안부 독립설’이란 당시 국회의 정부조직법 심의 중 치안국을 내무부 밑에 두게 되어 있는 초안에 대해 치안부를 장관급 부서로 독립시키자는 한민당 측 주장을 말하는 것이다. 조병옥을 통해 군정청 경무부를 이용해 온 한민당 측은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에서도 ‘조병옥의 치안부’가 한민당의 세력거점으로 지켜지기 바란 것이다.

 

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을 놓고 세력 간 대결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안건이 이 치안부 문제였다. 헌법이 통과된 후 정부조직법 외의 국회 안건으로는 정-부통령 선출이 있었는데,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고, 부통령 선출이 대결의 초점이었다. 그리고 초대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또 하나 관심의 초점이었다. 한민당-독촉-무소속 3개 세력의 이 세 가지 안건에 대한 태도를 개관한 기사가 눈에 띈다.

 

◊ 한민당: 전문위원의 정부조직안을 대체로 찬동하는 바이다. 치안부의 독립과 광공부의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오세창의 출마를 간청하고 있는데 오세창은 이시영을 추천하여 사양하고 있다 하며 국무총리에는 김성수를 추대할 것이라 한다.

 

◊ 무소속구락부: 전문위원의 4처 10부안을 지지하는 동시에 치안부 독립은 절대로 반대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 국무총리는 조소앙을 추대할 것이라 한다.

 

◊ 독촉계: 전문위원안을 대체로 지지하고 있으며 치안부 설치에는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조직법에 있어 국무총리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한다.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 국무총리에는 신익희를 추대할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14일)

 

이승만 추종세력인 독촉계가 한민당의 치안부 독립 주장에 반대한다는 데서 그 사이의 긴장관계가 고착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경찰은 대단히 큰 실력집단이었다. 군 창설 준비를 위해 만들어진 조선경비대는 이름 그대로 ‘경찰예비대’로서, 아직 경찰과 비교가 되지 않는 미약한 존재였다.

 

조병옥과 장택상이 키워낸 ‘정치경찰’은 권력의 중요한 근거가 될 참이었다. 지난 6월 24일 일기에서 장택상의 심복부하들이 연거푸 경무부 수사국에 걸려드는 것을 보며 조-장 간의 권력 암투를 짐작했는데, 장택상은 확실히 한민당을 등지고 이승만에게 달라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승만에게 장택상을 내무장관으로 쓸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8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대통령의 내상 임명에 부통령의 태도 자못 강경”

 

초대 국무총리에 이범석 씨가 피임된 당일인 2일 (...) 내무부장관에 모씨에 대한 항간의 물의가 비등해 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부통령 이시영 씨는 3일 오전 11시 명륜동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확고한 신념을 보여,

 

“작일 국회의원들이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한 것도 들었거니와 군정관리를 등용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고 있다. 민의가 그렇다면 대통령도 참작하리라고 믿으나 만일 이와 반대되는 처사를 한다면 나는 나대로의 이미 결심한 바가 있다.”

 

라고 내무 외무 등 조각 문제에 대한 부통령의 반대 태도를 암시한 바 있었는데 만약 이 대통령이 부통령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어코 장모 씨로 내무장관을 임명하게 될 때는 이 부통령은 사임이라도 할 강경한 태도로 나아갈 것으로 관측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북조선 선거에 관한 문3과 제2차 남북회담에 관한 문4에 대한 대답은 정치적 주장에 불과한 것이므로 언급의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흑백함 선거라는 이유만으로 자유선거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유치한 수준이 굳이 지적하라면 지적할 만한 것이다.

 

전력 문제에 관한 문5에 대해 '전력대책위원회‘를 “북조선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자기를 찾아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오더라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꼴은 정말 가관이다. “그런 놈들 찾아오면 쫓아버리고, 왔다는 보고도 내게 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해 놓았다는 얘기다. 군인이라 예절을 모르는 정도 문제가 아니다. 하기 싫은 일 저렇게 피하는 자라면 전투라고 제대로 하겠는가. 포로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발전선은 비용이 높아서 더 가져오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는 발전선이 있으니 이북에서 송전을 끊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던가. 5월 14일 단전 이후 이남의 예상 발전량과 실제 발전량 사이에 가장 큰 차질을 가져온 것이 발전선이었다. 배에 실은 발전기가 육상의 발전소보다 비용이 높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비용을 미군에서 부담한 것이 아니었다. 딘이 6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발전선의 발전요금 문제: “전기요금이 비싼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요금은 소비자 소비량에 의해 받는데 발전 비용에 기준에서 요금을 작성한 것이다. 거둔 요금은 한 푼도 미국으로 안 간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5일)

 

경성전기 등 전기회사에서 요금을 받았을 텐데, 그야말로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는 것이다. 그 값이 얼마였는지 조사해서 이북에서 들여오던 전기 값과 비교해 보고 싶은데, 거기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했다. 아마 수십 배 비싸지 않았을까? 이북에 줄 전기 값을 주지 않아 단전의 빌미를 주어놓고 큰소리치던 대체전력 요금은 자기네가 ‘발전 비용’이라고 작성한 대로 받다니, 눈 뜨고 있는 사람 코 베어가는 격이다.

 

문6의 쌀 배급 문제에 관해 1948년 7월 15일자 <조선일보>에 해설 붙인 기사가 실렸다.

 

혼란된 경제 상태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생활의 3대 요소인 의·식·주 3자를 완전 해결함은 너무도 가망이 없는 일이니 무너진 집에 떨어진 옷을 입고라도 단 한 가지 식생활만은 절대적인 문제이며 위정당국의 시책 중점도 마땅히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인데 정규배급을 준다 하여도 소위 야미쌀 보충에 시민은 신음하고 있는 이때 연속적으로 쌀 배급량이 감소됨은 웬일인가? 2홉5작을 배급하던 식량은 지난번 배급부터 2홉2작으로 줄어 쌀 시세를 올리더니 16일부터 배급될 제34회 배급은 쌀 1홉2작 잡곡 8작 도합 2홉밖에 안된다고 13일 서울시식량사무소에서는 발표하였다.

 

2일 딘 군정장관은 기자단과의 정례회견 석상에서 쌀값 등귀를 방지하기 위하여 당분간이라도 2홉2작 배급을 계속함이 어떠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 2홉5작 배급을 한다면 앞으로는 2홉2작도 배급하지 못할 것이니 미곡 보유량이 부족하여 더 주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어 2홉2작만은 계속될 듯하더니 불과 수일을 지나지 못하여 다시 감소된다는 것은 일반으로 하여금 이해키 곤란케 하는 문제요 또한 감배로 말미암아 쌀값은 소두 한말 천원을 돌파하였으니 외국의 식량 원조를 받으니까 실시한다는 식량의 수집과 배급이 이같이 중심을 잃는다는 것은 식량행정의 모순이 폭로되었다는 것은 물론 비상방법을 강구치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에 도달되어 있는 만큼 당국은 미봉책으로 2작을 감배하는 것보다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2작 감배가 초래하는 역효과 즉 시민이 그에 의존치 않을 수 없는 시장 쌀값의 폭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근본적인 조치가 절대로 요청되고 있다.

 

군정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망쳐놓은 것이 쌀 문제였는데, 3년이 지나 군정이 끝날 때가 되어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조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쌀값이 소두 한 말에 천원을 돌파했다니 한 가마에 만원이 넘는다는 얘기 아닌가. 마침 독도폭격 희생자에 대한 보상 내용이 보도되었다. 미군정도 맥아더사령부도 이 문제에 대한 정식 사과 없이 미군정에서 ‘소청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에만 나섰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0일) 쌀값 만원을 염두에 두고 보자니 기가 막힌다.

 

“독도사건 배상 - 죽변어업조합 관내 248만 원”

 

[춘천 발 조통] 울진군 죽변어업조합으로부터 강원도 수산과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미군 당국에서는 독도사건에 관하여 7월 1일로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지불되었는데 죽변어조 관내 피해어민에 대한 배상액은 유가족 부조료 및 어선 침몰 파선 등 2,484,200원이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변리 오종석(선주) 684,300원(기범선 1척, 범선 3척, 로프 2환, 백미 3가마, 중유 반 드럼)

 

유가족 부조료(사망)

죽변리 권천이 40만 원

동리 김기화 22만 원

동리 이천식 16만 원

온양리 박춘식 34만 원

동리 오재옥 34만 원

동리 조성룡 34만 원

 

한편 동 보고에 의하면 선주 오종석의 피해는 기범선 경양환(50마력 19톤 86) 파손에 대한 수선료 2백만 원 범선 묵호환 침몰 1백5십만 원 동 행정환 침몰 1백만 원 동 해양환 파손 70만 원 합계 5백2십만 원으로 계상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6일)

 

 

Posted by 문천

 

교사 여러분과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되어 기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씀이 아닙니다. 원래 공부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 짝을 이룰 때 제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않고 공부만 해왔습니다. 재물도 나누고 돌리는 데서 효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공부도 쌓아놓기만 해서는 가치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6년 전부터 글쓰기를 열심히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교실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못하는 대신 글을 통해서라도 내 공부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통한 가르침에는 한계가 크지요. 그래서 나는 교사들을 부러워하면서, 교사 분들의 일에 도움을 드림으로써 내 공부가 교육 현장에서 간접적으로라도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글쓰기의 대부분은 누구보다 교사님들에게 읽히기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것입니다.

 

광복 68주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20세기 전체를 우리 민족의 어두웠던 시기로 봅니다. 그 중간에 한 차례 한반도가 빛에 휩싸였던 순간이 68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순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이전의 반세기 암흑은 일본의 침략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이후의 암흑은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20세기 민족사회의 불행은 더 큰 문제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고, 일본의 침략은 그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모습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20세기 초입에 한민족은 국가를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국가를 1945년에도 제대로 되찾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2010년에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조선 망국의 의미를 따져보는 작업으로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를 냈습니다. 그 작업을 끝내자마자 1945년의 해방에서 1948년의 정부 수립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는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 3년 만에 이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작업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현실적 의미를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소득을 글에 담을 수 있는 대로 담아 왔습니다만, 오늘 모처럼의 기회에 말씀으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민족주의 비판은 한민족의 실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약 20년 전 ‘세계화’란 말이 부각되면서 ‘국가’와 ‘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보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추세이며, 이에 저해되는 국가와 민족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이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양심적 지식인들 중에도 ‘탈민족’을 바람직한 진보를 위한 과제로 여기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하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둘 다 1983년에 출간된 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Imagined Communities 와 에릭 홉스봄이 테렌스 레인저와 함께 엮은 책 The Invention of Tradition 을 말하는 겁니다.

 

앤더슨 등의 민족주의 비판은 매우 중요한 담론입니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생각할 때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대상과 비판의 논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경우 폐단이 클 수 있습니다. 이들 서양 학자들의 비판이 서양 민족주의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민족’에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국가’라 할 만한 대형 정치조직은 봉건적 계약관계로 맺어진 것이어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과 별 관계가 없었습니다. 중세유럽의 최대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비엔나의 황실에서는 독일어를 쓰는데, 제국 내에는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등을 쓰는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프랑스 등 다른 큰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세기 들어와 성서가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민족문화’란 것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민족보다는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유럽에서는 더 중시되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근대적 민족국가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서둘러 정비할 필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권력이 이 정비작업을 급속히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에 비슷한 무리한 작업이 진행되었지요. 무리하게 빚어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 많은 갈등의 촉매가 되고 심지어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비인도적 현상까지 일으키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주의 비판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여기에 비교해 보세요.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건너갈 무렵 한반도에는 민족국가 고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민족국가는 천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13세기 중엽 이후 백여 년간의 몽골지배기가 그중 국가체제가 약화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튼튼한 민족국가를 누려온 민족입니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가 민족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15세기 초의 한글 창제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찍 만들어진 ‘근대적 민족문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문자를 향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민족문화를 담는 민족 고유의 문자라는 점에서 민족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문화는 ‘세계 최고’의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민족문화로서 뚜렷함과 단단함이 매우 뛰어난 문화입니다.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된 전통”이 아니고, 이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이고 실존의 공동체입니다.

 

 

2. 개항기의 과제 ‘개화’는 부국강병형 근대화를 바라본 것이었다.

 

 

이제 백여 년 전 망국의 상황을 한 차례 돌아보겠습니다. 망국의 원인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쇄국정책 등 ‘개화’의 부진을 지목해 왔습니다. 개화, 즉 서양식 근대화가 당시의 절대적 과제였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수행한 일본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서양식 근대화에 대한 반성이 1970년대 이후 서양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 왔습니다. 위에 소개한 앤더슨 등의 민족주의 비판도 그 맥락 속에서 일어난 것이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이 있습니다. 근대유럽의 가치기준이 지나치게 위세를 떨쳐온 현상을 지적한 것인데, 이 가치기준이 침략 대상자의 의식 속에 내면화되어 ‘거울 속의 오리엔털리즘’을 일으킨 현상까지 지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화를 절대적 과제로 생각해 온 것도 이 현상에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유럽의 근대화는 산업혁명을 주축으로 일어난 변화입니다. 산업혁명은 제조업, 즉 2차산업의 폭발적 발달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근대화’란 것이 꼭 그런 식이어야만 하는 걸까요? ‘근대화’란 중세적 질서의 해체에 대응하는 변화입니다. 꼭 산업혁명 방식이 아니더라도 중세적 질서를 대치하는 새로운 질서의 형성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중기 이후의 조선에서도 자본주의적 원리의 발달 현상이 일어났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된 바 있는데, 유럽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지역에서도 자본주의적 현상이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자본주의체제’란 자본의 힘이 질서의 중심축 노릇을 맡는 체제입니다. 극단으로 갈 경우 신자유주의체제처럼 자본의 힘이 사회질서의 거의 유일한 근거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사회형태 안에서는 자본의 힘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여러 힘 중 하나로서 다른 힘들과 어울리는 관계를 통해 작용하게 됩니다.

 

산업혁명 후의 서양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져서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했습니다. 10-11세기의 중국이나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에서도 자본의 역할이 상당히 커진 일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근대자본주의와 같은 정도로 압도적인 역할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탈중세’의 의미를 가진 현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는 한 마디로 유동성의 증가입니다. 문명 발달은 인구 증가를 몰고 오는데, 사회열역학 원리에 따르면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회유동성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구조가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옮겨갈 필요가 생깁니다. 자본의 역할은 사회구조를 액체화하기 위한 ‘용매’와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당나라를 무력국가, 송나라를 재정국가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는데, 10세기를 전후한 중국사회의 탈중세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고체의 액체화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1천 년 전 중국이나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뻑뻑한 반죽에 물을 조금씩 더 넣어 서서히 유동성을 늘리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3백 년 전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앞세워 일어난 근대화는 훨씬 격렬한 변화였습니다. 반죽에 물을 넣는 게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셈이죠.

 

중세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옮겨가는 여러 방법 사이에도 경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유럽의 ‘산업혁명형 근대화’는 단기적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그 방법의 채택 여부에 따라 생산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엄청난 차이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패망과 순종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산업혁명형 근대화가 근대화의 유일한 방법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고요.

 

개항기 조선의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여겨지는 ‘개화’도 이 산업혁명형 근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개화에 성공해서 강국이 되었고 조선과 중국은 실패해서 침략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이 아직까지도 강고하게 남아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런 개화가 분명히 중요한 과제였지요. 그러나 시각을 더 넓혀본다면 개화의 성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아요. 제국주의 시절 일본 인민이 겪은 피해와 고통은 침략 대상인 조선과 중국 인민보다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의 경우,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역설적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에 있습니다. 유동성의 극대화를 위해 개인을 파편화하고 그 사이의 경쟁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자본주의 원리는 낭비적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경쟁은 낭비를 일으키니까요. 산업혁명의 기술 발달로 인해 자원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이런 낭비적 구조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한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의 큰 굴곡을 살피면서 백 년 전의 망국을 단순한 우발적 사고처럼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을사오적이니 뭐니 매국노 몇 놈에게 책임을 지울 일도 아니고 일본인의 침략성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데,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서야 왕인들 왕 노릇 제대로 할 수 있고 신하인들 신하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길을 잘 찾아나가지 못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3.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었다.

 

 

백 년 전의 망국이 우리 민족사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한 번 따져보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왕조의 멸망이 제일 크게 보였겠죠. 왕조가 수백 년 동안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 작용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합방 당시 제일 뚜렷한 저항은 ‘대한제국’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10년 후 3-1운동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의 주체로 나타납니다. 사실 대한제국은 국가 노릇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닫자마자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사라진 겁니다. 왕조가 제 노릇 못해서 문 닫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응당 있을 수 있는 일로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조의 멸망이란 당장 충격은 커도 그리 큰 의미를 가진 일은 아닌 셈입니다.

 

왕조 멸망보다 후세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이민족 지배입니다. 민족국가 성립 이래 한민족은 이민족 지배를 받은 일이 거의 없어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큰 침략이었는데, 이민족 군대가 들어왔지만 군사활동을 벌였을 뿐이지 지배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죠. 이민족 지배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13-14세기의 몽골지배기인데, 간접지배에 그친 것이기 때문에 ‘지배’가 아니라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철저한 직접지배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세계의 절반 이상이 식민 지배를 겪고 있었어도, 통치기구의 밑바닥까지 일본인 손에 장악하고 있던 조선처럼 철저한 직접지배는 유례가 없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 궤변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본처럼 조선을 먹고 싶어 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가장 비근하게 지목하는 것이 러시아인데, 러시아도 만주의 이권을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에게 서슴없이 양보했습니다. 조선에서 아관파천으로 얻은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어요. 러일전쟁은 일본이 만주를 넘보면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둘째, 설령 다른 나라 식민지가 됐더라도 일본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대개의 식민지배국은 피지배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현지인에게 맡깁니다. 조선처럼 통치기구의 과장급까지 현지인이 거의 배제되는 식민통치는 문명수준이 훨씬 낮은 곳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조선이 일본 통치 아래 근대화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근대화의 객체가 된 것이지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배의 협력자집단을 서발턴(subaltern)이라 하여 근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데, 조선의 친일파는 협력자라도 아주 수준 낮은 협력자였던 셈입니다. 친일파 중의 친일파로 꼽히는 박흥식이 천황 한 번 (단체로) 배알했다고 방방 뜨는 꼴을 보고 다른 곳 서발턴들이 웃었을 겁니다. 해방 당시 근대적 제도의 운영 경험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 그 후 발전에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런 면을 살피다가 왕조의 멸망과 이민족 지배에 이어 망국의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는 문제입니다.

 

어떤 문명이든지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일차적 역할을 맡는 엘리트계층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합니다. 학식과 재산을 가진 엘리트계층은 자기 사회 안에서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할 동기를 가진 계층입니다. 엘리트계층의 역할이 제도와 관습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는 어떤 변화 앞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선비’ 또는 ‘양반’이란 이름의 엘리트계층이 있었습니다. ‘양반’이란 이름은 특권을 누리는 측면과 흔히 결부된 것이므로 ‘선비 정신’의 측면에 중점을 둡니다. 선비의 전통은 중국과 상당부분 공유한 것인데,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이 선비 정신을 잘 요약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천하의 걱정을 남보다 앞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누린다.”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말한 것이죠.

 

선비의 일차적 기준은 학식입니다. 학식은 생업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학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일을 넓고 깊게 보는 눈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도 힘을 쓰게 되죠. 크게 보면 그것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에는 학식을 갖고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관습과 제도가 작동했습니다. ‘독서인(讀書人)’이란 말도 선비와 비슷하게 쓰였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행실에 훌륭한 점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죠.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선비는 안보의 주체요, 공공성의 수호자였던 겁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 퇴화는 선비 정신의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투쟁이 목숨을 건 전쟁처럼 되면서 웬만큼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도 패거리 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어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공공성을 생각할 여유를 가질 텐데 그런 여유를 가질 상황이 자꾸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심지어 임금까지도 정치투쟁의 마당에서 선수로 뛰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권력이 사유화의 대상이 되어 공공성이 증발한 상태를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기능이 쇠퇴하면 왕조는 망하게 되고, 얼마동안 혼란을 겪다가 선비계층의 풍토가 쇄신되면서 다음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 중국과 조선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도 문명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정상적 경로를 벗어나 식민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일으킨 해악이 여러 가지 지적되어 왔는데, 나는 선비정신의 억압이란 문제가 민족사회에 일으킨 해악을 특히 중시합니다.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도태당하고 그것을 안 가졌거나 버린 사람들이 혜택 받는 상황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고, 우리가 ‘친일파’란 이름으로 떠올리는 유형의 집단이 그 속에서 재산과 고등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선비정신이 한 차례 쇠퇴해도 혼란을 겪다 보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문명의 흐름입니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침체한 선비정신은 식민지시대를 겪으며 빈사상태에 이르러 버립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사회의 생명의 원리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4. 우리는 근대화의 주체였던가, 객체였던가?

 

 

‘전통’의 의미에 생각을 모아 보겠습니다. 전통을 근대화의 장애물로서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보는 관념은 한국인만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부국강병에서 나타나는 그 놀라운 효과를 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활로로 여기는 근대화의 태풍이 유럽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근대화의 진행과정에서 선발국과 후발국의 대비가 계속해서 나타났지요. 후발국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대화된 체제를 빨리 세우기 위해 기존 체제를 마구 때려 부수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도시재개발을 위해 옛 시가지를 뭉개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죠.

 

근대화의 선발국인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든 자본주의든 자기네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억지로 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영국의 근대체제에는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서유럽국가의 근대화 진행에는 영국에 뒤졌다는 조바심 때문에 다소 서두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전통의 연장이 꽤 이뤄졌습니다. 그보다 뒤진 독일, 그리고 더 뒤진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후발국으로 갈수록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좁아지게 되었죠.

 

20세기로 넘어올 무렵까지 ‘열강’의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이 명단에 든 나라들은 선발국을 쳐다보며 열등감과 초조감에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주변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을 지킬 여지가 있었던 거죠. 막차를 탄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유행한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가 전통 부정의 자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몇 십 년 후 그 일본을 부러워한 중국 지식인들의 신문화운동이 유교 전통의 부정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정복의 일방적 대상이 되었습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의 압도적 힘 앞에서 자기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힘들었고, 정복자들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피정복사회의 전통을 열심히 파괴했습니다. 물질적 정복과 정신적 정복이 나란히 진행된 거죠.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일본의 세계대전 패전으로 한국인은 일본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이질적 문명의 정복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영향력 확보와 강화를 위해 당시 한국인이 염원하던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정권을 세워주었고, 그 결과 한국인은 전쟁과 독재를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의 양심적 활동을 억압하는 일본 식민지배의 민족탄압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재정권 아래 특권을 누린 집단은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집단과 거의 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자의 집단이 후자 집단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이 무성한 것은 그 동일한 속성 때문입니다. 사실관계를 엄밀히 살펴보지 않았으나, 정신적 후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독재정권 종식 이후 특권 집단은 식민지배나 독재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호하려는 유산계층과 유식계층의 노력이 미약한 사회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트계층의 부재는 패망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근로자와 사업가들이 아무리 생산에 힘을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국부 유출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왜 전통의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돌려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해 온 침략과 정복은 ‘개인의 파편화’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개항기 때 만국공법의 ‘만국평등’ 원리를 내세워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해체시킨 일을 생각해 보세요. 일본 침략의 첫 번째 구호가 ‘조선 독립’ 아니었습니까?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쓴 사실이 그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현실의 차등을 가려놓음으로써 천하체제의 결속력을 해체하고 손쉽게 각개격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동성 증가가 근대화의 기본 과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 해서 꼭 한 순간에 몽땅 해치워야 하는 것은 아니죠. 유기체인 사회는 유동성을 늘리더라도 적절한 속도로 적절한 수준까지 늘려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동성 증가에는 부담이 따릅니다. 힘이 강한 사회는 이 부담을 힘이 약한 사회에게 떠넘깁니다. 자기는 견딜 만한 정도로 완만하게 유동성을 늘리면서 다른 사회에게는 주체성을 지킬 수 없는 급격한 유동화를 강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복’이죠. 정복당하는 사회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근대화를 ‘당하는’ 겁니다. 근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입니다.

 

허구의 평등으로 현실의 차등을 감추는 것은 ‘만국평등’만이 아니라 ‘만인평등’의 구호를 둘러싸고도 벌어진 일입니다. 피정복사회의 정복에 대한 저항력을 꺾기 위해 그 내부질서를 무너뜨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평등의 이념이 이용된 것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평등이 사회 구성원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이뤄지기 바라며, 외부의 정복자가 던져준 평등이 내부질서 붕괴에 이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를 통해 우리 민족사회가 외부세력에게 당해 온 침략의 중요한 본질이 성숙과정 없는 유동성 증가에 있었다고 나는 봅니다.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비생산적이고 불건강한 사회풍토, 안보의 주체와 공공성의 수호자로서 엘리트계층의 부재가 모두 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사회의 생명의 원리로서 전통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5. 지금까지의 ‘근대’란 ‘가(假)근대’가 아니었을까?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맞는 존재양식의 큰 변화입니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먹을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먹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농업혁명으로 ‘찾아먹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자연이 던져주지 않아도 재주껏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산업혁명은 ‘뺏어먹는’ 단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자연을 변형-훼손시키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뽑아내 욕심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조직 원리에도 변화의 필요가 일어납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개체수는 지구상에 1천만 이하였다고 추정됩니다. 몇 억이 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지금은 70억에 이르렀습니다. 말 그대로 세계가 ‘좁아지는’ 변화입니다. 좁아진 공간 안에서 어울려 살려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중세 농업사회로,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유동성 증가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 까닭입니다. 농업혁명으로 채집-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체제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농업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죠.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안정된 체제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에 따른 체제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근대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체제가 사실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의 시행착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죠. 기존의 근대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탈(脫)근대’(postmodern)란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본(本)근대’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근대’가 ‘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보여주려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가(假)근대’(pseudomodern)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이런 제안을 본 일이 없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금까지 겪어온 ‘가근대’와 가상적인 ‘본근대’를 구분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산업사회의 안정된 운영에 적합한 ‘본근대’체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인류사회의 지속을 길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탈근대’란 이름으로 시작된 변화를 ‘근대화’의 본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란 생각을 한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이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변화가 ‘탈근대’란 이름대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또 하나의 격변의 시대를 인류가 겪게 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선 진정한 ‘근대화’로 안정된 세계체제를 이룩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단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 차례 생각을 ‘본근대’ 쪽으로 모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라면 ‘근대 이후’가 어떤 것이 될지 판단할 근거가 박약한 데 반해 ‘본근대’의 방향은 지금까지의 궤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화의 본질은 사회유동성의 증가에 있습니다. 중세체제가 한계에 접근하며 유동성 대폭 증가의 필요가 느껴질 때 그 대책은 여러 방향으로 강구되었겠지요. 그중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산업혁명을 앞세운 유럽식 근대화였습니다. 유동성을 일거에 급증시키는 극단적 대책인데, 어떤 변화든 변화 초기에는 온건한 대책보다 극단적 대책이 유리한 조건을 누리게 되어 있죠. 기존 체제 파괴라는 단기적 과제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시계추가 중간에 머물지 않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럽식 근대화가 궤도에 오르자마자 문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제도주의 등 그에 대한 대응책이 나왔죠. 그러나 시계추가 관성을 가진 것처럼 기존 ‘근대화세력’이 반동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확장은 유동성 억제 필요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계추가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간 결과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유동성을 너무 줄였던 거죠. 그에 비해 일부 유럽국에서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 원리를 가미하는 중도적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을 지표로 하는 중도적 정책이 유동성을 적정선에 조정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기본 방향으로 보입니다.

 

이 기본 방향에 거스르는 반동 노선이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유동성의 극단적 증대를 제창합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파편화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고,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자본의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 노선입니다. 소수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계가 움직여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동 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설을 보면 해외의 신자유주의자들에 비해 표현이 노골적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미화하는 주장이 이렇게 당당하게 횡행하는 것은 별난 일입니다. 타이완의 경우 식민지로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누렸지만, 그런 주장이 공론의 무대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신자유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항력이 약한 문제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 심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단적인 문제가 엘리트계층의 부재 현상입니다. 재산과 고등교육을 비교적 많이 누리는 계층이 한국사회처럼 바깥만 쳐다보는 것은 정상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습니다.

 

 

6.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의 실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근대화’가 산업사회 초입에서의 한 차례 방황이라고 본다면, 본 단계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의 변화일까요? 나는 두 가지 지표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입니다. 물론 두 가지 지표는 서로 얽힌 것입니다.

 

종래의 근대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아무런 절제나 균형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방적 지배만 생각했지요. 이 관계에서는 인간의 권리만 생각하고 그 책임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책임보다 권리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입각한 근대사회 조직방법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메커니즘이 취약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에 나는 공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해도 역시 큰 뜻이 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인간사회의 가치관 획일화와 극단적 분화현상을 불러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의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지금까지의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졌던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이야기해 온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만을 뜻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주의’를 확장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죠.

 

국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해주는 것처럼 모든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관리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무정부상태 지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본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해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세계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수십 년간 계속해 온 나라고, 무리한 사회구조를 힘의 원리로만 버텨 온 나라입니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죠. 그 제약의 수준은 냉전시대의 소련에 비해 훨씬 심대한 것이고, 지금도 힘이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세계적 변화의 추세를 외면하는 미국의 정치적 관성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입장이 반사적 이익을 얻는 형국입니다.

 

중국 역시 힘을 키우면 패권주의 성향을 나타낼 걱정이 있다고도 합니다. 이미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슷한 것이 될 염려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갑을관계’를 맺은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 같지도 않거니와, 중국은 미국과 달리 문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식 근대화의 시작 무렵에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동성 과잉 시대의 산물로서 절제의 메커니즘이 취약한 사회였습니다. 중국이 설령 큰 힘을 갖게 되더라도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를 답습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정부’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근대국가처럼 꼭 확고한 체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조약과 협약의 집합체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원과 환경에 관한 협약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의 저항이 뚜렷했지요. 미국의 저항력은 그 동안 약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약해질 것이 전망됩니다.

 

68년 전 아인슈타인이 말한 ‘당위’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얼마나 뚜렷한 현실이 될지는 지금 장담하지 못해도,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무정부상태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은 분명합니다. 무조건적 절대자유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절제’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내다봅니다.

 

 

7. 민족사회 복원이 세계적 변화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이다.

 

 

정치적 세계화를 바라보는 움직임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란 이름으로 나타나 왔습니다. 그 이념을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로 표현했지만 그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기존 주권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와 주권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가 형태에 있어서는 지금의 유엔을 넘어서는 치밀한 조직을 당장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습니다. 유엔이 탄생한 때가 바로 국제주의가 한껏 고양된 시점이어서 세계정부의 전망이 유엔 조직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그 후 미국의 패권이 부각됨에 따라 유엔의 세계정부 조직이 공동화(空洞化)하고 만 것입니다. 세계정부 형성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약과 협약이 확대-강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형태가 어떠하든 세계정부 형성이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명 어떤 사회에서든 지속가능성은 공공성에 바탕을 둡니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의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 공공성입니다. 절제 없이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에서는 문명도 사회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처럼 거대한 변화에는 상당 기간의 과도기가 필요합니다. 새 체제의 건설보다 옛 체제의 파괴에 주력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는 대형전쟁 등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데,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덕분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공공성이 약화됩니다.

 

자원 공급 증가 추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공성이 회복된 안정적인 체제가 자리 잡게 됩니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믿음 체계가 오랫동안 ‘정상상태(normal state)’에 머물러 있다가 단기간의 급격한 변화인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겪는다고 합니다. 사회체제의 변화도 같은 틀이 아닐까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가근대’를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로 볼 수 있는 거죠.

 

근대적 현상의 핵심 요소로 꼽혀 온 개인주의가 이 패러다임 전환기의 특징입니다. 개인주의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공공성의 확충은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론적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합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뒷받침하는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평등의 관념이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는 상대화의 대상이 됩니다. 자유도 평등도 현실의 인간관계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겁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믿어져 온 ‘천부 인권’도 절대적 의미가 부정됩니다. 문명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억압이라면 모든 개인과 집단이 감수해야 하는 체제, 그것이 공공성의 확충이 가져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세상으로 여겨 온 ‘장밋빛 세상’을 잃고 ‘회색세계’, 심지어는 ‘암흑세계’로 전락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실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제체제니 봉건체제니 하여 억압 속에 살던 상태를 근대인은 미개한 것이었다고 깔보지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종이 상당한 억압 속에서 살아갈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특성을 진화시키지 않고서는 자연조건의 억압 속에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절대적 인권과 절대적 자유는 마치 인간이 자연조건의 억압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처럼 생각한 환상의 산물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환상에 빠져 문명 발생 이래 사회를 보호해온 공공성의 원리를 잊어버렸을 때 힘을 가진 집단들이 아무 견제 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형전쟁을 비롯한 온갖 ‘근대적’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을 버리고 억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억압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적합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공공성이 확충된 새 체제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존과 생활의 양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환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근대화 시작 이래 파기 대상이 되었던 ‘전통’의 재발견이 중요한 일입니다. 근대화 이전 긴 시간에 걸쳐 농업사회가 운영되어 온 원리가 바로 전통입니다. 이제 산업사회의 정상상태를 내다보는 데는 농업사회의 정상상태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상태’라는 공통점 때문에 ‘전환기’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세계정부 체제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겁니다. 봉건체제처럼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입니다. 유럽 통합운동에는 세계정부 체제 구축을 촉진하면서, 또 그 체제 안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려는 목적이 함께 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이 가진 1천년 민족국가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나타내게 될까요? 한반도가 가진 자연자원보다, 지금까지 쌓아온 국부보다, 그리고 20세기 동안 갈고닦아온 근대적 기술보다도 더 큰 가치를 가진 우리의 자산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20세기 이전 1천년 동안 우리의 민족국가는 이웃을 깔아뭉개는 큰 힘을 키운 일이 없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체제 속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천하 질서에 제 몫을 공헌하면서 같은 시기 어느 곳에서보다도 대다수 인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안정되게 마련해준 것이 우리의 민족국가였습니다.

 

더구나 장래의 세계체제가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중요한 모델로 삼을 공산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야겠습니다. 물론 천하체제가 그대로 복원될 것도 아니고, 천하체제에서 중국이 맡았던 것과 같은 중심 역할을 특정국이 맡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원자론적 세계체제가 유기론적 세계체제로 옮겨간다면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참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경험입니다. 우리 민족사회가 오랫동안 실천해온 화이부동의 원리가 유기론적 세계체제에서는 유리한 적응방법이 될 것입니다.

 

생각을 넓게 펼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결론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르치시는 학생들이 영어공부보다 국어공부 더 많이 하고, 기술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이끌어주세요. 지금까지 내 말씀이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역사 공부가 얼마나 생산적인 활동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던 우리 조상들의 화이부동 정신을 다음 세대가 많이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그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