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제27차 국회본회의 오전회의에서 헌법초안의 제2독회가 끝났다. 오후회의에서 제3독회에 들어갔지만 토론과 수정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분위기에서 진행을 다음 월요일(12일)로 미뤄놓고 휴회에 들어갔다.

 

“헌법 제2독회 완료 - 12일 정부조직법 상정”

 

26차 회의에서 103조까지의 전문 축조토의를 완료한 헌법안은 27차 오전회의에서 전체적인 재검토를 마치고 드디어 제2독회를 종결하였다. 즉 김동원 부의장 사회로 진행된 동 회의는 전차회의록 통과와 제반 보고에 이어 헌법안 심의를 계속, 먼저 진헌식 의원 외 44인의 제안으로 “제7조에 외국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항을 삽입하자”는 동의를 가결하고 또 제41조 조약 조항에 상호원조조약의 문구를 첨가하자는 조병한 의원 외 10인의 수정동의를 채택, 이어서 윤치영 의원 등의 전문(前文) 수정안이 제출되어 여러 의견이 진술되었으나 결국 이 문제는 특별위원 5인(백관수·최국현·김준연·윤치영·이종린의원)을 의장이 선출 그들로 하여금 전문을 재수정케 하여 오후 회의에 제출토록 결정하고 서정희 의원 동의로 헌법전의 명칭을 대한민국헌법으로 하자는 것을 가결한 다음 제2독회 종결을 결정 선포, 제3독회는 오후회의에서 개시할 것을 가결하였다.

 

그런데 제3독회에 관하여서는 전문에 걸쳐 문구를 수정할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제3독회가 종결되면 헌법은 즉시 통과 제정되어 공포만 하게 되면 직각으로 발효하여 대통령을 선거하여야 할 것이며 정부도 수립할 것이므로 그러기 위하여서는 정부조직법이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일부 의원과 전문위원들 간에는 이러한 절차 문제를 생각하고 헌법안 제3독회는 우선 보류하여 수일간 휴회한 다음 정부조직법이 상정되면 그때에 동법과 함께 제3독회를 진행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후 회의에 있어서 결국 정부조직법을 초안하기 위하여 11일(일요일)까지 휴회하고 12일 상정하기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8일)

 

헌법초안 심의과정에서 가장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제17조 ‘근로조항’이었다. 원안에 비해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하는 여러 수정안이 제출되었는데,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사업이득의 노동자 배분이 핵심 문제였다.

 

“이득 균점 문제로 논쟁 - 수정-원안 양파 대립”

 

헌법안 대체토론에서 이미 상당한 물론(物論)을 일으킨 제17조 근로조항은 24차 본회의 축조토론에 있어서 본격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날 회의에는 동조에 근로이득 배분의 조항을 삽입하자는 7개의 서면수정이 제출되어 종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 원안 지지자와 수정제안자 간에 진지한 설명 논전이 전개되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산업재건과 관련하여 국회 내에서도 양론을 위요하고 논쟁이 격화될 것으로 관측되며 특히 수정지지자로서 대한노총 및 농총 등 노동단체에서는 이미 수정안을 찬성하는 건의서를 전달하여 수정안의 통과를 촉진시키고 있어 국회 내에서도 상당한 찬성투표를 획득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이를 반대하는 세력도 무시할 수 없으며 국내 50여 기업 단체 및 조합에서는 수정을 반대하는 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하여 국회 내의 원안지지자를 성원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토론은 더욱 격화될 것이며 과연 어느 안이 통과될지 주목되는 바이다.

 

(...) 먼저 김동준 의원의 국가는 국민에게 직장을 부여할 의무를 가진다는 조문을 16조 다음 조에 삽입하자는 동의가 있었으나 부결되고 17조 근로조항 심의에 들어갔는데 7종의 수정안을 정리하여 두 개로 만들고 먼저 수정제안자로서 문시환 박해정 조병한 윤재욱 의원으로부터 수정 취지 설명 또는 수정안 지지의 발언이 있었고 원안 지지자로서의 김준연 의원의 원안지지의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원안과 수정안은 다음과 같다.

 

원안: 제17조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수정안: (1·2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근로자는 노자협조와 생산증가를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기업의 운영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 (3항) 기업주는 기업이익의 일부를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근로자에게 균점시켜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4일)

 

7월 5일 제25차 본회의에 제17조에 대한 두 개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문시환 의원 등이 제출한 제1수정안은 노동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 양쪽을 명시하는 것이었고 조병한 의원 등이 제출한 제2수정안은 이익균점권만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제1수정안은 81대 91로 부결되고 제2수정안이 91대 88로 가결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6일 “근로조항 수정안 통과 - 헌법안 토의 신단계에”)

 

노동권 관계 조항들에 대한 토론은 본회의에서 8시간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토의 진행 도중 이승만 의장이 등단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같은 기사 내)

 

“이 조문은 전 민족에게 관계가 중대한 만치 충분한 토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헌법제정이 지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헌법은 모세 십계와 같이 만년불변의 것은 아니고 시의에 따라 또한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8월 15일은 며칠 안 남았다. 이날까지 정부를 수립하려면 사소한 것에 구애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며 노동자나 자본가는 자기 이익에만 집착되지 말고 조속한 정부 수립을 위하여 호양의 정신이 필요할 줄 안다. 어느 때나 완전무결이란 것은 있을 수 없으니 17조 원문이 지나친 과오만 없다면 표결에 부쳐 속히 통과시키기 바란다. 미국에서는 이미 대사도 내정되어 대조선 정책도 확립되었다 하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독립정부 수립에 매진하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가 아닌가 한다.”

 

이승만은 6월 19일 기초위원회의 토론이 모두 끝나 6월 21일 본회의 상정이 예정되었을 때 초안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책임제로 바꿔놓기 위해 본회의 상정을 23일로 늦춘 일이 있다. 그런데 이제 노동자의 권리를 규정하는 조항을 놓고는 대충대충 하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7월 5일 오후 본회의에는 이승만이 사회에 나섰는데, 보도 중에 “특히 이날 회의를 이 의장이 사회한 관계인지 전진한·진헌식·이원홍 제 의원이 수정안을 전부 철회한 것은 주목을 끌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7일 “단원제로 결정 - 헌법안 토의 일사천리”)

 

7월 2일 제23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이 서두르는 마음을 너무 과격한 언사로 드러내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며칠 후 이 발언을 취소해야 했다.

 

“국회방청석 - 헌법 지연책을 밀의(密議) - 이 의장 의원들에게 중대 경고”

 

국회 제23차 오전 본회의 석상에서 이문원 의원 외 32인이 헌법 제3독회에서 “의결은 재적의원 3분지 2에 3분지 2 이상 찬성으로써 하자”는 제안을 수정하여 제2독회에서부터 동안을 실시하자는 발언에 대하여 이승만 의장은 다음과 같은 일장의 중대 경고를 하였다.

 

“여기 지금 이 문제는 국회법 30조에 위반되는 문제입니다. 지금 몇몇 분이 제출한 것은 국회법을 수정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국회 안에 몇 구분이 있어서 헌법을 속히 통과하지 말고 이 방면 저 방면으로 천연(遷延)해서 나아가자는 것이 몇 의원들이 조용히 약속하였다는 것이 나에게 들려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보고하는 말이고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아니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들은 말만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어떻습니까. 헌법을 아무쪼록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 더 길게 나아가서 세계 대세가 어떻게 될는지, 당파가 생겨가지고 어떻게 되든 그럴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을 여러분이 찬성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헌법을 제정해 가지고 정부를 세워서 우리 일을 해 나아가는 것이 불가하다면 그렇게 설명이 되겠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루바삐 우리 일을 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의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가 박사의 말이 끝나자 의장은 물론 방청석에서까지 박수. (<경향신문> 1948년 7월 3일)

 

“국회방청석 - 이승만 의장도 실언 취소”

 

취소병(取消病)이 많은 의회라는 것은 이미 김모 의원이 제24차 회의에서 지적한 바어니와 드디어 이승만 의장도 발언을 취소하다.

 

내용인즉 국회 5일 회의에서 노동문제를 조상(俎上)에 놓고 논쟁이 한참 벌어진 틈을 타서 “전일에 내가 국회 내에 몇 갈래로 나뉘어 헌법 지연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밖으로부터 들려온다는 말을 오해하신 분이 계신 모양인데 이는 이 국회 내에 있다는 것도 아니요 없다는 것도 아니니 내 말이 잘못된 점은 취소한다.”라는 내용의 천명이었다. (...) (<경향신문> 1948년 7월 6일)

 

이승만의 재촉 아래 본회의의 헌법안 심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 와중에서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수정안으로 채택한 것은 모처럼 제헌국회의 수확이었다. 7월 7일자 <경향신문> 사설은 그 의의를 부각시켰다.

 

“이익균점권의 의의”

 

국회 제25차 본회의에서는 헌법초안 제17조에 “단 근로자는 이익배당의 균점권을 가진다.”는 단서를 추가하기로 의결하였다. 그것이 비록 단서일망정 그것의 입법적 의의는 심대한 바 있어 민주주의적 제헌사상 획시기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를 취하고 있는 기성의 모든 국가의 생산 제 관계에 있어서 ‘자유방임’을 전 세기와 같이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경제적 현실은 그들 국가로 하여금 그 어떠한 방법으로써라도 기업의 독점을 억제 혹은 금지하고 노자(勞資)의 조정과 협조에 대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래에 있어서 노동을 상품시하고 자본기업의 우선적 지위를 전제하는 시책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의 이익과 지위를 옹호한다는 모든 노동법이나 사회정책이 모두 일시미봉 미온적 무마 교활한 회유정책에 그치고 만 것이 통례였다.

 

이러한 현세로 우리네의 헌법을 비추어볼 때 이익배당의 균점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노자를 대립관계에서 협조 혹은 조정하자는 것이 아니요, 그 이상으로 일원적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취의이니 그것은 노동도 자본이라는 인식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자 이윤은 자본 없이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니 노동자가 이익배당을 요구할 권리는 노동을 자본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형성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입법 취지를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한다면 고전경제학 마르크스학설을 승화시킬 수 있을런지도 모를 것이다. 실로 의의 심절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끝으로 부언할 것은 아무리 국회에서 이북 동포의 국회 적격적 참가를 요청하고 아무리 양김 씨가 남북협상을 주창하고 책동한다 할지라도 국민의 가장 중요한 재산권에 대하여 법헌상으로 근본적 조정이 없이는 무가망이라는 점에서도 이번의 노동자 이익균점권 인정이 민주주의적으로나 민족국가의 통일로나 획시기적 의의와 전환적 계기의 충분한 구현을 기하여 일층의 유의와 추진이 있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끝의 ‘부언’이 특히 눈길을 끈다. 식자들의 눈에는 정치적 협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남북통일의 한계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같은 사회주의적 원리가 헌법에 자리 잡는다는 것은 정치적 협상의 한계를 넘어 통일을 실현시키는 기반조건이 될 것을 필자는 중시한 것이다.

 

제헌국회에 좌익은 없었다. 그리고 중간파도 5-10선거 보이콧으로 국회에 많이 들어가지 못했지만 중간파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이 상당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헌법 제17조의 수정안 채택도 그런 역할을 예고해 주는 것이다. 중간파는 국회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어떤 움직임을 벌이고 있었는지 한 차례 살펴봐야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