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업 구상을 떠올린 지 3년이 되었다. 오는 8월 15일에 연재를 마치려 하니 겨우 한 달 남짓 남았다. 3년 전 막막하던 데 비하면 뭔가 해냈다는 만족감이 든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수없이 많지만, 공부하는 자세를 지켜왔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이다.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막연히 알던 사실들의 미묘한 의미를 포착하고, 그 의미의 집적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이해를 얻는다는 것이 이 작업의 기조였다. 이제 작업의 마무리를 바라보며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큰 시각으로 돌아가 본다. 지금까지 밝혀 온 미세한 사실들이 전 세계적 변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확인할 틀을 펼쳐보려는 것이다.

 

먼저 중국 사정을 살펴본다. 연합국 5대강국 중 역사적-지정학적으로 조선에 대해 큰 중요성을 가진 나라인데, 국공내전의 혼란에 빠져 국제적인 힘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중국 사정의 변화는 눈에 덜 뜨이는 가운데서도 조선 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끼칠 것이다.

 

일본 항복을 앞두고 국공합작은 명목만 남아있어서 국부군과 공산군 사이에는 직접 대결만을 겨우겨우 회피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항복은 국공내전 대대적 발발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의 내전 발발을 원하지 않은 미국과 소련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8월 말부터 10월 10일까지 모택동과 주은래 등 공산당 대표가 국민당 아성 중경에 가서 ‘중경회담’을 열었다. 국공합작의 갱신-연장을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도의 성공 전망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 1946년 1월의 ‘정치협상회의’였다. 그 전 달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미-영-소 3국이 연합국의 중국 문제 불간섭을 선언하고 중국인 자신의 협상을 촉구한 결과였다. 소규모로 시작되고 있던 충돌을 중단하기 위한 정전협정이 1월 10일 조인되고 22일에 걸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외에도 중국청년당과 민주동맹 등 여러 정파가 참여했고, 공산당도 만족할 만한 협의안이 이 회의에서 도출되었다. 공산당의 합법적 정권참여를 허용하는 협의안이었다.

 

국민당은 평화를 원하는 인민의 요구와 미-소 양국의 압력 때문에 협상에 응하고 있었지만 다른 세력, 특히 공산당과 권력을 함께 나눌 마음이 없었다. 국민당 병력은 인원으로도 공산당의 3배가 넘었고 무기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공산당을 제거해 놓지 않으면 갈수록 더 어려운 상대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2중전회는 정치협상회의 협의안을 거부했고, 이 무렵 소련군의 만주 철수가 시작되면서 국민군과 공산군의 충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마셜 특사가 내전 확산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국부군의 대규모 작전이 6월 26일 시작되고 말았다. 국공내전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으로 보였다. 국민군의 승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공산당의 저항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미국은 경고만 발할 뿐 국민군을 가로막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소련도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두 나라 눈치를 보면서 공격을 계속했고, 1947년 3월 공산당 근거지 연안을 점령하면서는 완전 소탕이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소탕당하지 않았다. 국공내전 내내 공산군이 국부군의 우세한 장비 앞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도 병력 충원이 원활했던 것은 농촌의 인구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1948년 초 중국의 전황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조선에도 보도되고 있었다.

 

“위기에 직면한 중국 - 미국의 적극적 원조만이 국부군 붕괴 방지”

 

[북평 4일발 UP 조선] 장개석 씨 영도하의 중국 국민정부는 지난 2년 동안에 군사적 실패를 거듭하고 현재 종전 이래로 가장 심각한 난경에 처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중공군은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년말 이래로 중공군은 중국의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만주는 이미 중공군의 수중에 거의 함락할 것 같이 보이며 화북에서는 도처에 전투가 발생하고 다수 도시가 고립화하고 있다. 그리고 화중에서의 중공군의 세력 흥기는 양자강 계곡을 위협하고 있다. 장춘에서 남경에 이르는 각지의 중립관측자들은 중공군이 소모전에 승리를 취하고 있으며 중공군은 완전 승리와 중국 제패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는 국부군 측에 중대 환심사(患心事)가 되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하북성 석가장에서의 중공군의 승리는 중공군의 전략이 기습전으로부터 정면공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을 시사한다.

 

중공군의 성공은 한정이 있는 것이나 건실한 데 의미가 있으며 장개석 씨는 “미국이 원조할 것인가, 하시에 여하히?” 하는 연래의 의문이 아직도 번민의 재료가 되고 있다. 거년 초 국부군은 불원 승리를 희망하고 (...) 서북부에서도 1년 전 국부군은 장대한 철도망을 확보하고 수원성(綏遠省) 내에 세력을 펴고 역사적 장성 관문인 장가구를 중공군에게서 탈회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장가구도 고립상태에 있다.

 

중공군의 전술은 소모전이며 교통기관을 마비시키고 철도를 폭파하고 산업을 파괴하고 수확을 몰수하고 도시를 질식시켜서 기아 또는 반란으로 패망케 하고 약점을 공격하고 강력한 저항을 회피하는 데 있다. 이 전술은 예상 이상으로 성공하여 국부의 경제생활에 중대 타격을 주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방관 태도를 지속하고 있으며 충고는 하나 적극적 군사원조는 행하지 않고 있다. 국부 공군도 대체 정비가 없으므로 열악화하고 있다. 대부분 군사소식통에서는 미국의 적극원조만이 국부군의 금후의 붕괴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6일)

 

국공내전의 경위를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는 책 하나를 소개한다. 현이섭의 <중국지>(2책, 인카운터 펴냄). 국공내전만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사와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세밀한 서술을 담은 책이다.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혁명사 관점에 묶여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1947년 연안 함락으로 위기에 몰렸던 공산군이 1948년 여름까지 전세를 만회한 까닭이 이 책에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훌륭한 지도와 공산군 지휘관들의 훌륭한 임무수행으로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대다수 중국인이 공유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사회에도 그런 설명을 이해해 둘 필요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관점이 단순한 만큼 사실 파악에는 유용한 책이다.

 

중국 내의 중국현대사 서술은 공산당정권과 국민당정권의 관점에 오랫동안 지배되어 왔다. 공산당정권의 관점은 계급혁명에 중점을 둔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이르는 ‘해방전쟁’ 과정 역시 공산주의의 정당성 중심으로 서술된다.

 

근년 들어 더 넓은 관점이 개발되고 있다. 종전 당시 중국인의 염원이 계급혁명보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더 쏠려 있었다는 관점이다. 공산당의 승리는 이 염원을 국민당보다 잘 반영한 데 원인이 있었다는 설명이 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진정한 공산화는 1950년대 중엽에야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동(東)아시아 근(近)현대(現代)통사(通史) 7>(암(岩)파(波)서점(書店) 펴냄) 235-254쪽 중(中)촌(村)원(元)재(哉), “국공(國共)내전(內戰)과 중국(中國)혁명(革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에서 약소민족의(당시에는 중국도 약소민족의 하나로 자타 공히 인식하고 있었다.) 염원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로 집약된 것은 일반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좌우 대립이 더 중요한 문제로 흔히 인식되어 온 것은 양대 강국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투영된 까닭이다. 그리고 이 왜곡된 인식이 냉전구도 속에서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조선 경우에도 해방공간의 실제 상황의 이해를 위해 민족주의 측면의 보강 필요를 느낀다.

 

장개석은 1948년 5월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헌정 형식을 갖춘 국가체제를 세운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장개석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진정한 헌정 실현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었다.

 

“입헌 중국 초대 대통령 장개석 씨 당선 - 국가 안전보장에 최대권한을 부여”

 

[남경 20일발 UP 조선] 현 국민정부 주석 장개석 씨는 19일 국회에서 거행된 선거에서 압도적인 대다수로 입헌정체 하 초대 중화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 투표수 2,734표 중 장 씨는 2,430표를 획득하였으며 유일한 경쟁자인 현 사법원장 거정 씨는 269표를 획득하였고 잔여 35표는 무효로 취급되었다.

 

현재 계획에 의하면 장 씨는 5월 5일에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될 것이며 국회 결의에 의하여 비상대권이 부여될 것이다. 국회는 대통령선거 전일에 있어 대통령에게 헌법에 규정된 제한을 받지 않고 국가 안전보장에 대한 중대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장 씨는 중화민국 창설자 고 손문 씨 서거 이래로 중국의 제1 실력자로서 1927년 이래로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여 왔으며 1943년 이래로는 국민당 선거에 의하여 국민정부 주석으로 중국을 통치하여 온 것이다. 그는 일찍이 대통령입후보 사절을 선언하였으나 그는 금번 국민당 대표로서 입후보한 것은 아니며 국회의 공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절차를 취하였으며 입헌 하 초대 대통령에 피선됨으로써 그의 수십 년래의 혁명투쟁 생애는 이에 최고 승리를 노리게 된 것이다.

 

이 날 국회 내빈석에는 리턴 스튜어트 미국대사, 레이프 스티븐슨 영국특사, 기타 외국 외교사절도 내림하여 역사적인 중국 국회의 대통령선거 광경을 목도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21일)

 

선거를 앞두고 장개석은 일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6일) 그러나 그 속셈이 ‘비상대권’ 확보에 있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4일) 그리고 대통령선거 전에 비상대권에 관한 국회의 결의를 받아냈다. 대통령중심제라야 출마하겠다고 우긴 이승만이 보고 배운 데가 있었던 것이다.

 

중화민국의 헌정 체제는 불구인 채로 시작되었다. 국민당과 장개석의 강권통치는 그대로 계속되었고, 최소한의 개혁을 요구해 온 미국정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대중 원조자금 미 하원 세출위원회서 가결 - 경제 재건 활용 기대”

 

[워싱턴 4일발 UP 조선] 금반 하원 세출위원회는 정부에서 요구한 4억6300만 불의 대중 원조계획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동 위원회는 이에 대한 보고서 중에서 미국은 본 자금에 대하여 철저한 통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 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강조하였다.

 

“종래의 대중 원조가 만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본 위원회는 금반의 할당 자금에 대한 전면적 감독으로써 이의 활용을 기하도록 미국 정부가 방책을 세울 것을 고집하면서 본안을 지지하는 바이다.”

 

(...) 대중 원조기금 중 1억2500만 불만은 중국정부의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3억3800만 불은 아래와 같이 세분된 것이다. 미곡 8500만 불, 목면 7250만 불, 석유 및 석유생산품 6500만 불, 비료 2400만 불, 연초 1000만 불, 주요시설 보충 2000만 불, 운영비 160만 불, 재건비 6000만 불.

 

그리고 기간 비밀에 붙여져 있다가 금반 공개된 세출위원회의 증언록에 의하면 국무성 당국자들은 대중 원조의 성공 여부는 전혀 의문이며 장개석정부의 강화를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은 토지개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 의하면 W. 소프 국무장관보는 동 위원회에서 아래와 같이 마셜 국무장관을 대변하였다.

 

“마셜 국무장관은 중국 사태는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으로 보고 있다. 즉 오늘 다수의 인민은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 정강을 더 많이 세우고 있는 때문에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공산주의사상은 모르나 토지개혁과 공산지구에 들어갈 때 그들이 받는 전반적 대우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정부 측에서도 이 점에 착목하여 토지개혁을 위한 준비공작을 진행시키려는 인사가 있는 것을 마셜 장관도 인정하고 있다.”

 

소프 씨는 또한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대중 원조는 즉 중국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대중 원조를 단순한 쥐구멍 투자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국내에 진정한 개혁을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나는 동감이다. 그리고 장개석 씨로 하여금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게 할는지도 모르는 1억2500만 불을 의회에서 따로 계상한 데 대하여 국무성은 약간 불만이다. 국무성에서 최초 본안을 상정하였을 때는 그 전액이 경제원조를 위하여 사용되기를 원하였으나 의회는 하등의 조건도 없이 1억2500만 불을 중국정부에 직접 할당하였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5일)

 

미국의 국제정책 결정에서 외국정부의 로비능력으로 전설적 명성을 떨친 것이 ‘China Lobby’와 ‘Israel Lobby’다. 국무성에서 엄격한 조건을 붙여 대중 원조안을 작성했는데, 의회에서는 그 조건을 풀어주고 있었으니, 참으로 탄복할 만한 로비능력이다. 세계대전이 끝난 이제 미국에게 중국 원조의 필요가 줄어들고 있는데 장개석정부는 로비능력만으로 상황 변화에 대응하고 있어서 결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서울에서의 중국 사정 보도는 당연히 미국 언론사와 국민당정부 쪽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공산당 쪽 사정의 보도는 원활하지 못했는데, 커밍스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에서 중국공산당 측과 이북정권 사이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 측면은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