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며칠 전 선생님이 당한 ‘망신’ 얘기부터 하고 싶네요. 너무 우스워서요. 7월 22일 이화장에 갔다가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신 일 말씀입니다. 미리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면회가 안 되었다고 신문에는 나왔더군요.

 

안재홍: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얘기 꺼내는 뜻을 알겠으니 솔직하게 대답하죠.

 

“미리 연락”을 한다면 내가 이 박사랑 직접 통화를 하겠습니까? 비서들 사이의 일이죠. 내가 이 박사를 찾아간다면 아무 연락 없이 불쑥 쳐들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미리 연락”을 하죠. 연락을 했는지 안 했는지 무슨 증거가 있겠습니까? 설령 연락 사실이 그분에게 전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만날 만한 사람이 찾아와 있다면 못 만날 이유가 없죠. “당신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하는 뜻을 밝히신 겁니다.

 

그분은 면회 거절을 통해 내게 창피를 주려 한 건데, 나는 창피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나라 일이 걱정될 뿐이죠. 새 정부의 수반이 된 이제 사사로운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며 여러 사람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할 그분이 오히려 득의양양해서 평소 감정을 저렇게 앞세운다면 많은 일에 지장이 클 겁니다.

 

김기협: 신문기사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보면 일부러 망신주려는 뜻이 분명합니다. 10시부터 와 있던 한민당 의원 몇 사람이 10시 반에 나가고, 선생님과 이청천 씨가 와 있었는데 이 씨만 만나고 선생님 면회는 거절했더군요. 달포 전까지 과도정부 수반 자리를 지킨 선생님이 안 찾아온다면 청해서라도 만나야 할 이승만 씨가 찾아온 선생님의 면회를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혀를 찹니다.

 

이승만 씨의 선생님에 대한 평소 감정이 어떠한 것일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짐작하는 것이지만, 그와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 생각도 한 차례 듣고 싶습니다. 협력관계와 적대관계를 두루 거친 그 관계에서 그 사람의 정치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안재홍: 3년 전 그분 귀국 때 나는 그분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성심껏 그분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분 지지 세력의 간판이 된 “독립촉성”이란 말도 내가 제안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분을 중심으로 추진한 비상국민회의에도 내가 주비회장을 맡아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즉 민주의원을 만들 때 나는 빠질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기구가 미군정 자문기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떳떳치 못하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내가 빠지겠다는 것을 만류하려는 그분 말씀이 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최고정무위원 자리가 머지않아 세워질 새 정부의 ‘대신(大臣)’ 자리로 이어질 것이라며 유혹하는 그분 태도를 보며 존경심을 잃었습니다.

 

다시 몇 달 후 ‘정읍 발언’을 보면서는 민족사회에 대한 그분의 공헌에 대한 기대보다 그분의 해악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습니다. 내가 역시 큰 기대를 걸었던 백범 선생께도 적지 않은 실망을 겪어 왔습니다만, 백범 선생께는 “좀 더 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의 마음이라면 이 박사에게는 “저렇게 좀 안 해주셨으면” 하는 두려움의 마음입니다.

 

그분이 나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내 민정장관 역할 때문이죠. 자신에게 유리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그분의 온갖 부탁을 내가 물리쳤을 뿐 아니라, 경찰 개혁, 인사 개혁에서 미소공위 추진까지 내 모든 정책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그분은 생각했습니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지지해 온 중간파 노선도 물론 그분과 맞서는 것이었고요.

 

김기협: 다들 ‘중간파’란 말을 쓰는데, 중도우익에서 중도좌익에 걸쳐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노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중간파’보다 ‘민족주의’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도 같습니다. 극우와 극좌가 아니라는 뜻에서 ‘중간파’라는 것인데, 계급에만 매달리는 극좌나 반공에만 매달리는 극우와 달리 민족의 입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하자는 것 아닙니까?

 

금년 들어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나오면서 ‘협상파’란 말이 쓰이게 되었는데, 협상파 안에서 극우파, 즉 한독당과 중간파 사이의 단층이 많이 의식되어 왔습니다. 협상파를 단일 세력으로 보지 않고 두 세력의 일시적 연합으로 보는 거죠. 하지만 지금 결성되고 있는 통일독립촉성협의회(통촉)에 이르기까지 두 세력의 보조가 잘 맞춰져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두 세력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주의 세력’으로 통합하는 것이 민족통일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더 강력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안재홍: 좋은 말씀입니다. 단정 추진세력에서 ‘민족진영’의 이름을 참칭하면서 반민족적 노선을 걸어온 것을 응징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통일을 원하는 여러 세력이 조그만 차이를 접어놓고 ‘민족주의’ 깃발 아래 뭉치면 그것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중간파의 한독당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극우의 특징인 패권주의 성향에 대한 의심이죠. 나 자신 국민당을 한독당에 합당시켰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민족주의 세력이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 의심을 나 자신 거두지 못합니다. 남북협상이라는 당장의 목표 때문에 세력을 통합할 경우, 중간파가 한독당에게 이용당하다가 자기 입지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기협: 선생님은 한독당에서 나온 후 홍명희 씨 등과 함께 민주독립당(민독당)에 참여했습니다. 애초에 이끄시던 국민당과 성격이 비슷한 중도우익의 민족주의 정당이죠. 대표를 맡은 홍명희 씨도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분일 뿐 아니라 정치적 입장도 아주 가까운 분으로 보입니다. 불후의 명작 <임꺽정전> 탄생에도 연재 초기에 선생님이 조선일보 경영진에서 힘을 많이 쓰셨죠.

 

그런데 홍 씨가 4월에 평양회담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죠. 그곳에서의 행보로 보나, 가족을 모두 데려간 사실로 보나, 북쪽에 눌러앉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민독당을 비롯한 민련의 기본 노선은 남조선만이 아니라 북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 씨가 북쪽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북조선 정부 수립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방조하는 결과가 됩니다. 정치적 입장을 많이 공유하는 선생님께서 그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나요?

 

안재홍: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고 가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북조선 지도자 중 김두봉 선생은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입니다. 투철한 민족주의자일 뿐 아니라 욕심이 없고 품성이 원만한 분이어서 지도자의 자격이 훌륭한 분입니다. 김일성 씨는 직접 알지 못하지만 김두봉 선생과 두터운 신뢰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 인정됩니다.

 

그들이 이끌어온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책을 보면 물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이지만 민족주의 노선 또한 분명합니다. 민족진영을 자칭하는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민족을 팔아 소비에트를 섬기는 반민족주의라고 선전하는데, 과장된 선전입니다. 공산주의자가 계급을 중시하면서 민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일부 극좌 외에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어느 정도는 존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이북 지도부는 극좌노선이 아니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통일전선 노선으로 보입니다.

 

홍 선생이 한 개인으로서는 이북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합리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반민족적 파시스트 세력이 판치는 이남에서 뜻을 펼치기는커녕 생명의 위협까지 겪는 것보다 민족주의 이념 실현에 더 적합한 길일 수 있습니다. 이북의 통일전선 노선이 민족주의 이념에 더 충실하게 되도록 이끌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득실만으로 거취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홍 선생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투항’입니다. 자기 길을 버리고 남이 열어주는 길로 뛰어든 겁니다. 협상파 민족주의자들은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는 ‘최선’의 목표를 위해 어느 쪽에도 협력하지 않는 자세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선생은 이 최선의 목표를 포기하고 ‘차선’의 길을 고른 것입니다.

 

김기협: 저는 홍명희 씨의 선택을 긍정하는 생각이 큽니다. 무엇보다, 여운형 씨의 불행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위해 불요불굴의 자세를 지키던 그분이 어느 날 테러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그 책임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를 지키고 있는 분들 중에 누가 언제 그 뒤를 따르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남조선 상황입니다.

 

도처에서 대규모 검거가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아무런 범죄 혐의 없이, 남로당 당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내란음모죄라도 되는 것처럼 공권력의 처단을 받고 있습니다. 극우테러는 말할 것도 없고요. 미군정이 대한민국으로 바뀌면 이런 상황이 개선은커녕 더 악화될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한민당과 독촉에서는 벌써 중간파를 공산당 앞잡이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 신변부터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이승만 씨가 선생님 면회를 거부한 것도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신호 아닐까요?

 

홍명희 씨가 남조선 상황을 체념한 것이 냉철한 판단으로 보입니다. 망나니 같은 테러 위협 아래 가족들까지 고통을 겪게 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뜻을 펼 수 있는 길을 찾아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민족사회에 더 잘 공헌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재홍: 분단건국을 가로막음으로써 당장 통일건국을 이룬다는 최선의 목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도 합니다. 여운형 씨의 운명을 누가 언제 따라가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분단건국을 가로막을 수가 정녕 없다면, 오늘을 사는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최소한 무시당하고 거부당하지는 않는 북조선 정권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홍 선생의 선택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선택이 선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제(齊)나라 진항(陳恒)이 제 임금 간공(簡公)을 죽였을 때 공자께서 임금 애공(哀公) 앞에 나아가 진항을 정벌할 것을 청했죠. 임금이 들어주지 않자 물러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뢸 수 있는 데까지 아뢰는 것을 대부의 도리로 여긴 겁니다. 후세 선비들이 이것을 선비의 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홍 선생이 현명한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미련한 선택을 하렵니다. 공자의 뜻이 당장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도리를 다함으로써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분단건국이 지금 내 노력에 관계없이 진행되더라도, 선비의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기록은 남겨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뤄지지 않는 일이 후일에라도 이뤄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홍 선생의 선비로서 자세를 내가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순국한 분의 자제입니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 군수로 있다가 경술국치 때 자결했다.) 홍 선생이 선친의 뒤를 그대로 따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분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내가 내 길에서 겪는 괴로움을 그분도 동정할 것이고 그분이 그분 길에서 느끼는 상심을 나도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

 

윤창중 사건은 일단 당사자의 개인 문제다. 하지만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너무 크다. 그 자신과 범행 피해자의 피해보다 국가사회의 피해가 더 크다. 그를 임명한 사람의 권위와 신뢰성에 입힌 상처가 무엇보다 큰 피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누구에게든 뭔가 마뜩치 않은 느낌이 들 때마다 국민의 마음에는 “저놈도 윤아무개 식으로 임명된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스쳐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많은 인사권을 쥔 자리다. 인사권 행사 방식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폐쇄주의와 공개주의로 갈라진다. 양쪽 득실이 엇갈리고, 폐쇄주의는 능률 측면에서, 공개주의는 안전 측면에서 장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친 공개주의는 불필요한 논란이 일어날 틈을 만들어 인사권의 적정한 행사에 지장을 줄 염려가 있다. 적절한 인물인데도 말이 너무 많다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낙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폐쇄주의의 심각한 위험성에 비하면 공개주의의 폐단은 가벼운 것이다. 윤창중 사건의 피해가 큰 것도 이 폐쇄주의 때문이다. 그의 기용이 공론에 합당한 것으로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었다면 임명자의 책임과 그에 따른 피해가 그토록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용이 너무나 자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책임과 피해가 큰 것이다.

 

폐쇄주의의 유혹은 권력의 극대화에 있다. 여론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인사권자의 의지를 최대한 관철한다는 것이다. “소경 제 닭 잡아먹기”와 같은 환상이다. 당장은 권력자 마음대로 하기에 편할지 모르지만, 신뢰의 상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실이 더 크기 마련이다. 더구나 개인의 신뢰 상실보다 시스템의 신뢰 상실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런 유혹에 약한 권력자는 공인의 자격을 의심받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놓고 본다면, 그가 인사권을 쥐게 되었을 때 폐쇄주의로 빠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사권의 첫 행사인 국무총리 임명에서부터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당시 사람들은 대통령의 권력이 국회를 압도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갑자기 바꾸기는 했지만, ‘제왕적 대통령’ 관념은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총리 지명도 국회 세력분포에 따를 것으로 기대했고, 한민-독촉-무소속을 대표하는 김성수-신익희-조소앙이 물망에 올랐던 것이다. 7월 23일자 <경향신문>의 “난중난(難中難), 총리 적재(適材) - 김성수-조소앙-신익희 씨 등 외 이윤영 씨 아연 물망에” 기사에는 “국민 일반 일치된 관점”이라 하여 두 가지 전망을 내세웠다.

 

* 한민당 인물이 나오면 어떤 의미로 보면 강력한 내각이라고 볼 수 있으나 반 한민계 측의 반정부운동이 대두되고 따라서 정부는 불안한 가운데 있게 된다.

 

* 한독당계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국내 여론은 수습하게 되나 정부 운영상 세력 대립으로 일대 지장이 있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국회의장 자리를 확보해 놓은 신익희를 제외하고 김성수와 조소앙을 놓고 저울질한 것이다. 한민당이 이승만과 협력해 온 자취를 보면 김성수가 나설 경우 정부의 결속력이 강하겠지만 반대 여론이 거셀 것, 반대로 조소앙이 국무총리가 될 경우 여론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이승만과 보조 맞추기 힘들 것을 내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제4의 인물로 이윤영을 지목했다. 이승만이 그를 “지명할 기색이 농후”하다고 했다. 부통령선거 때 이승만이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을 거론했었는데 그가 이북에 있어서 안 됐으니, 대신 이남에 와있는 부당수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기용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임명이 국회에서 통과될 전망에 회의를 표했고, 이윤영 이야기는 7월 27일까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1890~1975년)은 신탁통치 문제가 터져 나온 직후인 1946년 2월 월남해서 조선민주당을 군정청에 등록하고 계속 부당수로 활동했다. 이남에 세력근거가 없는 만큼 독자적인 힘을 가질 수 없었고, 독촉 부위원장 등의 위치에서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북 주민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5-10선거에서는 김성수가 출마를 양보하고 지원해준 덕분에 종로갑구에서 당선되었다. 이북 우익을 대표한다는 간판 덕분에 대접을 받아왔을 뿐, 국정을 이끌 경륜이나 정치력은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7월 27일 오전 제35차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음을 밝히면서 대한민국정부공고 제1호를 공개했다.

 

“헌법 제 69조에 의하여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대한민국 30년 7월 27일에 임명하였음을 공고함.” 대한민국 30년 7월 27일 대통령 이승만

 

이 정부공고 제1호는 며칠간의 국무총리서리를 임명하는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 이윤영 임명 발표 직후의 국회 상황이 7월 28일자 <경향신문> “총리 재지명은 누구에? 승인 부결까지의 35차 국회 경과” 기사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이때 의장(議場)은 폭풍전야와도 같이 공기 험악하여졌으며 각 의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의아한 낯으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돌연 정준 의원이 발언을 청하여 “너무나 돌연히 듣는 일이라 결정을 짓기 곤란하니 이로써 오전 회의를 일단 휴회하고 신중한 심사를 한 다음 오후 회의에서 이를 결정하자”는 동의가 있자 뒤를 이어 이원홍 의원이 “즉석에서 표결로 결정하자”는 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 동의와 개의를 표결한 결과 즉석에서 무기명투표로 표결할 것을 가결하고 11시 30분부터 무기명투표를 시작하여 12시 5분 투표를 완료하고 개표한 결과 이윤영 씨 총리 인준은 부결되고 말았다.

 

인준 여부를 토론 없이 즉각 표결하자는 이원홍의 제안은 재석 194인 중 찬성 133표, 반대 26표였고, 인준 표결은 재석 193인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였다. 이원홍의 즉각 표결 제안은 “말도 안 되는 후보니까 토론해도 입만 아프다”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 제안에 찬성하고 인준에 반대한 132-133표는 대략 한민당과 무소속의 범위로 보인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독촉은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전술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윤영 임명에 관해 독촉계 의원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윤영의 하마평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의원들은 설마설마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윤영 임명의 이유로 남북통일을 내세웠는데 노일환 의원은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반박했다.

 

“이 대통령의 처사는 잘못된 줄 생각한다. 대통령은 남북통일의 정신에서 이 의원을 총리에 임명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의원이 이북을 대표한다는 말인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동 임명은 민주주의 상도(常道)에 배치된 줄 아니 제 의원의 숙고를 촉구한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8일 “이윤영 씨 총리 인준 요구 132표로 부결”)

 

5-10선거로 구성된 국회는 당시 정치계의 정당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정당 중 좌익의 남로당은 물론이고, 우익의 한독당과 중도우익의 민주독립당, 중도좌익의 근민당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세력 그대로 국회에 진입한 대 정당은 한민당뿐이었고, 정당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던 독촉계가 또 하나의 큰 세력이었다. 그리고 한독당, 민주독립당 또는 근민당 노선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무소속구락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3대 세력이 적어도 원내에서는 정당정치를 전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5-10선거를 치르고 정부를 수립하는 노선에 한민당과 독촉계가 협력해 왔다. 정부 운용에 있어서도 두 세력이 연합을 계속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예상되는 진로였다. 한민당 역시 이 진로를 기대하고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구상을 지지하면서 국무총리 자리는 자기네에게 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승만이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진로는 무소속을 포섭해서 한민당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앞에 인용한 7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의 전망처럼 여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강력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척결을 기대할 수 있는 진로이기 때문이다. 허울로나마 민족주의를 표방해 온 이승만 입장에서 선택이 가능한 길이었다.

 

조소앙의 존재가 이 가능성을 뒷받침해 줬다. 조소앙은 당시 우익 정치이념의 표준으로 부각되던 삼균주의의 제창자였으며 한독당 제2인자로서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자기 길을 지켜온 인물이었다. 독촉계 중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약했다. 현실적 힘을 가진 김성수와 폭넓은 명망을 가진 조소앙이 유력한 총리 후보가 된 것은 국회 내 독촉계-한민당 또는 독촉계-무소속의 연합 가능성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식적 전망을 벗어나 인준 부결이 확실한 이윤영을 임명하고 인준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인준 부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것이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방일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지만, 이런 일을 놓고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참고해서 설명을 좀 보충해야겠다.

 

이승만은 ‘독재’를 원한 것이었다. 자기가 차지하는 대통령 자리를 견제할 만한 다른 자리가 없게 될 것을 그는 획책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권위를 가지는 자리로 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을 맡도록 이끌었다. 명망은 높지만 정치적 세력을 갖지 않은 노인을 앉힌 것이다. 이시영이 참다 참다 못해 1951년 사임하자 어쩔 수 없이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뒤에는 역시 노령인 함태영(1872~1964년)을 앉혔고, 1956년에는 추종자 중에도 평판이 나쁜 인물인 이기붕을 내세웠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부통령 자리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 역시 주목적이 이기붕의 부통령 만들기에 있었다.

 

국무총리 자리는 임명권을 통해 권위를 죽여 버렸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없앨 때까지 다섯 사람이 국무총리 자리에 앉았다.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는 열 차례 임명되었다.(그중 네 차례가 이윤영이었다.) 이 시기 국무총리들의 능력과 인품을 도매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정부 수립 당시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여망과 거리가 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승만이 국무총리 선택에 있어서 국정수행 능력보다 자기 권력에 대한 위험이 없는 인물 위주로 선택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가 정식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윤영, 신성모, 백낙준, 허정, 이갑성, 백한성이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대통령의 독재를 일컬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 이전 군주제 시대의 진짜 임금은 무책임한 독재자가 아니었고, 전근대시대의 군주제를 모두 비민주적 전제정치로 보는 근대인의 통념은 현실에서 벗어난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군주제는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비록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갖는 상당 수준의 민주적 원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사회는 소수 집단의 전횡을 억제하는 공공성의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 없이는 내부 질서의 유지도 어렵고 다른 사회와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 없이 국가란 공공성의 원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후기 권력의 과도한 사유화로 인한 공공성의 증발을 조선 망국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왕과 신하가 모두 ‘분수’를 잃고 권력에만 집착하던 풍조가 유교국가의 원리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일본 침략에 관계없이 왕조 멸망의 조건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지배에서 해방되어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공화(共和)’의 원리가 필요했다. 국가사회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순조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공헌할 수 있는 ‘협력’의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경쟁’의 대상으로서 권력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행정부 안에서조차 국무총리가 자기 권위를 갖고 자기 몫의 공헌을 하도록 놓아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역사가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게 되는 데는 물론 많은 요인이 뒤얽혀 작용했지만, 이승만처럼 공공성 의식이 없는 인물이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중 중요한 하나였다.

 

 

Posted by 문천

 

헌법 제정 과정에서 이승만이 가장 집착했고, 결국 관철시킨 것이 대통령중심제였다. 기초위원회 참석 자격이 없는 의장으로서 초안이 완결될 단계에 회의에 ‘임석’, 내각책임제로 준비되어 있던 내용을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다 만들어놓은 초안에서 한 대목만 바꿔놓으니 다른 조항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초안 작성의 중심 역할을 맡았던 유진오가 6월 30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서 필요한 추가 수정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은 그르치면 독재적인 경향으로 흐를 염려도 없지 않으니 추상적인 조문보다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비상사태는 내란, 외환, 천재, 경제상 중대한 위기 등을 말함이라고 예거하면 될 것이다.

 

다음 대통령중심제가 독재적으로 될 우려가 있지 아니하냐는 것이다. 국회와 대통령 간의 알력을 조정하기 위하여 제 68조의 대통령이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을 임면한다는 것을 국무총리의 임면은 국회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국무위원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동의로써 임면한다고 수정하면 좋을 것이다. 국무위원의 임면을 국회가 간섭하게 되면 정부조직에 있어 통일을 가져오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일 “유 위원 중대발언”)

 

이 의견이 채택되어 완성된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면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기초위원회에서부터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주장이 쉽게 통하지 않은 것은 한민당의 반대 때문이었다. 좌익을 탄압하고 중간파를 배제하면서 반동세력의 정권을 만드는 데까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러나 만들어놓은 정권을 운용하는 데서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한민당은 경쟁력 있는 대통령후보를 내놓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를 외면하거나 거스르는 본색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울로라도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권은 대통령에게 바치지 않고 국회를 통해 자기네가 지키고 싶었다. 의회 운용에서는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자기네가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관철하기 위해 극한적인 수단까지 써야 했다. 한민당이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서 끝까지 지킨 마지노선의 핵심이 국회의 총리 임면 동의권이었다. 자기네가 원치 않는 인물을 국무총리에 앉히지 못한다면 연로한 대통령의 권력 행사에 큰 제약을 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7월 들어 이시영의 부통령 추대설이 나오자 국무총리 자리가 더욱 부각되었다. 명망과 평판으로 보아 이시영의 부통령 당선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정치세력을 갖지 않은 팔십 노인이 권력의 무대에서 맡을 역할은 클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국무총리가 정권 운용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법 공포를 목전에 둔 7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질문이 국무총리 임명에 집중된 것은 새 대통령이 첫 번째로 할 중요한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총리 문제는 불급(不急) - 이승만 의장 기자회견 담”

 

정부 수립을 목첩에 둔 국내 정국은 국무총리와 및 기타 각료자리 문제를 싸고 활발한 공작이 전개되고 있는데 16일 오후 1시 국회의장실로 의장 이승만 박사를 방문한 기자에게 이 박사는 격무 중에도 시간을 내어 당면 정국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1문1답을 하였다.

 

문: 최근 국무총리에 김성수·조소앙·신익희 등 3씨의 설이 있는데?

답: 이는 나 개인의 생각인데 우리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총리 같은 것이 선결문제가 아니다. 총리 문제로 말하면 3천만이 다 되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사심을 버리고 우국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문: 이 박사의 ‘의중’의 총리는?

답: 지금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다.

 

문: 15일부 중국지의 조선 문제에 관한 평에 의하면 김구 씨 영도 하의 단체를 신정부에 포섭하였으면 하는 의견이던데.

답: 그것은 그럴 수 있다. 미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은 중국의 입장에서, 또 소련은 소련의 입장에서 그러한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 꼭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문: 8월 25일의 북조선 선거에 대한 감상은?

답: 공산주의자들의 선거이다. 그것은 소련에서나 북조선에서나 똑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7일)

 

아직 대통령이 되지 않은 단계에서 지금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총리 같은 것이 선결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상한 소리다. 정부조직에 임해 총리 임명이 선결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선결문제란 말인가? 이제부터 진행을 보면 알겠지만, 이승만은 총리 임명을 자기 권력 확대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총리 임명보다 ‘국회 길들이기’를 선결문제로 보는 그의 속마음이 이 대답에 드러난 것일까?

 

이 무렵 국회에는 한민당, 독촉, 무소속구락부, 3개 세력의 분립이 뚜렷해져 있었다. 총리 자리를 놓고 한민당은 김성수, 독촉은 신익희, 그리고 무소속은 조소앙을 미는 형세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무렵 장개석이 사절과 편지를 보내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김구가 국무총리로 정부에 참여할 가능성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위의 문답 중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바란다는 중국 측 의향에 대해 “중국은 중국의 입장에서, 또 소련은 소련의 입장에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일축하는 ‘자주적’ 태도가 참 인상적이다. 지난 해 4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중국에 들러 장개석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쓰던 이승만이... 참 많이 컸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과연 그가 누구를 국무총리로 임명할지, 관측기사가 나왔다.

 

“정계 동향 아연 활발 - 임정 협상파 입각설 대두”

 

헌법 발포와 더불어 정부수립을 목전에 둔 국내 정정은 더욱 긴장의 빛을 보이고 있으며 불일내로 실시될 대통령선거에 따르는 초대 국무원의 조직은 앞으로 조선의 운명과 관련하여 일반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있다. 즉 국회에서 선출되는 대통령은 이승만이 당선될 것이 확정적이라고 하나 대통령이 임명할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은 과연 누가 될 것인지 내외의 시청은 여기에 집중되고 있는데 각 방면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총리의 결정은 현재 국회 내 3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한민 독촉 무소속관계를 대표한 인물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관찰은 현 정세에서 귀결되는 상식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의외의 결과가 나올런지도 모른다고 보는 편도 없지 않다. 즉 과반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 씨 등은 최근에 이르러 정부수립을 중심으로 미묘한 동향을 보이고 있다. 권위 측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근 장개석 씨는 김구 씨에게 사적 사절을 보내어 금반 탄생되는 정부에의 참가를 극력 종용하고 있다고 하며 한편 이 박사는 모 측근자에 대하여 양김 씨와의 합작은 양김 씨가 과거의 노선을 청산하고 독립노선에 매진할 것을 성명해야만 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어 앞으로의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바 70평생을 조국광복의 독립투쟁에 바쳐온 이승만 박사의 투쟁의 결정도 머지않아 탄생될 국무원의 구성원 선출에 달려있는 만큼 요즈음 전 민족은 모든 혼선을 정리 극복하고 민족정기에 입각한 순화된 강력내각이 구성될 것을 갈망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7일)

 

그런데 이승만은 대통령 당선과 취임 중간인 7월 22일, 국무총리 인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묘한 대답을 했다.

 

“국무총리는 아직 지정한 사람은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다. 각 정당 사회단체가 다 소망대로 되기를 기대하는 중에도 이번에 여러 가지로 발표되고 낭설이 유행되었으나 나의 생각에는 이와 같이 되지 않을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놀랄 것으로 본다. 내가 또 믿는 것은 모든 정당과 국체가 자기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자기들의 믿는 사람이 정당한 자리에 앉아야 나라일이 잘될 줄 알고 기대하는 것뿐이니 어쨌든지 자기들의 의외의 사람이 나서 일을 잘 될 줄 믿게 되는 때에는 일심으로 복종할 줄 안다.” (<서울신문> 1948년 7월 23일)

 

이승만의 정치 감각은 정말 탁월하다. 관심이 집중된 문제를 손에 쥔 입장에서 며칠 전에는 “선결문제가 아니”라며 대답을 아끼더니 이제 “모든 사람이 다 놀랄 것”이라며 약을 올리고 있다.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될 수밖에. 7월 24일자 <동아일보> “총리 문제에 정-부통령 합의 - 의외 인물은 누구?” 기사의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지난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단과의 문답에서 국무총리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는데 이는 조각을 목전에 두고 국내외에 다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즉 이 발표는 현재 항간에 구구한 억측을 빚어내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회 내 각파 세력은 당황하여 미묘한 동향을 보이고 있는데 여하간 동 담화에 대해서는 이를 하나의 복선으로 취급하고 총리는 역시 의외의 인물이 아니요, 국회 내 세력을 대표하고 현재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인사 중에서 임명되리라고 보며 따라서 현재 국회 내의 3대 세력인 한민-독촉-무소속 중 한민계를 대표한 인물로서 김성수 씨, 독촉 무소속계를 대표한 조소앙 씨가 유력하다고 보는 편도 있으나 (...) 앞으로 임명될 의외의 인사가 어떤 인물일런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것이 건국 벽두의 초대 내각을 담당할 만한 거물의 등장이 아닌 이상에는 국회에서는 이를 헌정의 상도에 배치된 것이라 하여 인준을 거부할 것으로 각파 간에 보조가 일치되고 있다고 한다.

 

이시영이 부통령이 된 것처럼, 확고한 명망을 가진 인물이 나선다면 국회에서 어느 파도 저항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슈퍼거물이 아니라면 3개 파 중 둘을 만족시킬 만한 인물이라야 국회 승인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2개 파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조소앙이었다. 독촉계에서 신익희를 민다고 하지만, 국회 제1부의장 신익희는 이승만을 이어 의장 자리를 맡을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이 조소앙을 임명한다면 독촉계도 이에 반대하지 않을 전망이었다. 7월 23일자 <동아일보>의 아래 기사에는 이런 전망에 대한 한민당 측의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협상파 추대는 신정부에 혼탁 가할 뿐”

 

국회 무소속구락부에서는 22일 국무총리에 조소앙 씨를 임명할 것을 국회의원 백여 명의 서명을 받아 이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한다. 그런데 정계 옵서버 측에서는 무소속 측의 이러한 공작은 앞으로 수립될 안정성을 가진 정부를 방해하려는 획책이 아닌가 보고 있다.

 

즉 이 대통령은 20일 기자단 초회견에서 김구 씨와의 합작 불가능한 이유로 정부에 있어서 의사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정부가 흔들려서 안정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지적한 바와 같다면 조소앙 씨 역시 동일한 규범에 속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조소앙 씨는 한독당 부위원장 당시에 한민 독촉 등 주류 민족진영 대부분을 제외한 소위 13정당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합작 재판(再版)을 기도하였으며 또한 남북협상에 있어서는 양김 씨와 함께 주동이 되어 총선거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일에 있어서도 자기의 과오를 청산하여 민족진영 주류에 환원하는 하등의 의사표시가 없다.

 

그런데 부통령에 있어서도 합작 불가능을 지적한 이 대통령으로서 이제 대통령을 보필하여 각부 장관을 통솔할 국무총리를 이와 같은 남북협상파로 임명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북조선 총선거 등을 비추어볼 때 이것은 완전히 앞으로 수립될 정부 구상을 혼탁케 하려는 공작이라고 간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무소속 측의 이러한 공작은 주로 한독당 계열 의원이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다.

 

참 심하다. 행여 이승만이 잊어버렸을까봐 조소앙의 이력까지 들춰내주고 있다. 김성수가 총리 자리에 앉아 국회의 한민당 세력과 손잡고 한민당의 지분을 지켜주기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녹아든 정도가 아니라 철철 넘치는 기사다.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은 7월 27일 국회에 제출될 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이틀 전까지도 기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즐기고 있는 기색이 완연했다.

 

“국회 인준 않으면 기외 인물 선정 - 이 대통령, 기자에 언명”

 

국무총리 인선에 대하여 하등의 발표가 없어 세간에는 억측이 구구한데 조각 제5일째인 25일에 기자단은 하오 7시 이 문제에 관하여 이 대통령과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국무총리 인선은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여하?

답: 국무총리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오는 화요일 국회에서 알게 될 것이다. 모든 풍설이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나 공연히 인심을 현혹케 할 뿐이니 이러한 낭설은 중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문: 대통령은 누차 의외의 인물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리라고 언명하였는데 지금까지 물망에 오르는 인물이 선정되었다고 보아도 좋은가?

답: 내가 일전에 발표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놀래리라고 한 말이 유행하는 말은 낭설이니만치 주의하하라는 의미로 한 말이요, 세상에 특출한 사람을 선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 국무총리 임명과 동시에 국회에 승인을 요청한다면 국회의원들이 이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은 여하히 생각하는가?

답: 그것에 대하여는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에서 참고할 일이 있으면 시간을 만들 것이니 이것은 국회에 달린 일이다.

 

문: 국회에서 인준 안 한다면 다른 인물을 선출하겠는가?

답: 그것은 물론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27일)

 

그런데 이 문답이 있던 전날인 7월 24일 이승만과 김성수가 함께 참석한 만찬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새어나오면서 김성수 임명설이 유력하게 떠올랐다. 이 설을 보도한 기사가 <동아일보>에도 실렸지만, 얼마나 유력한 설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경향신문> 기사를 본다.

 

“총리는 비(非) 의외 인물 - 돌연 김성수 씨 설 유력”

 

문제의 국무총리 인선은 재작 25일 오후에 인촌 김성수 씨를 임명할 것을 정-부통령 간에는 합의를 보았다 한다. 즉 이시영 부통령은 동일 오후 2시30분부터 동 4시까지 장시간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과 이화장에서 회담하고 현하 시국을 수습하고 국제관계를 보아 역시 김성수 씨를 지명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런데 총리에 김성수 씨를 지명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그 경위를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한 후로도 조각 제3일이었던 지난 23일까지에는 “의외의 인물을”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부통령과의 합의를 얻지 못하자 국회의원 간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묘한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대통령은 국제관계도 고려하여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중 지난 24일 대통령 취임 당일 오후 6시30분부터 수도호텔에서 UN조위 측으로는 필리핀대표 루나 박사를 비롯하여 각국대표와 미군정당국 측으로는 하지 사령관, 제이코프 씨, 노블 박사가 참석하고 그 위에 이 대통령 및 동 부인과 김성수 씨 및 동 부인이 출석하여 만찬회를 열고 간담을 한 후 동 10시20분에 폐회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화제가 총리 문제에 언급되자 외국인 측에서 총리 김성수 씨에 대하여 축배가 있자 이승만 대통령은 “김성수 씨로 말하면 비록 한민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으나 국사를 위하여는 초당파적 인물이니 김 씨는 총리 이상의 중요한 포지션에 있어야 할 분이다”라고 대화한 데 대하여 외국인 측에서는 “총리보다 더 중요한 포지션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수 씨는 모종의 요담을 하고 오후 12시30분에 귀가하였다.

 

그러므로 동 석상에서 이 회합을 계기로 총리 인선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의중의 인물이 결정되었는데 상기한 바와 같이 25일 이 부통령은 김성수 씨를 추천하고 동 4시부터 하지 중장 고문 제이코프 씨가 모종의 의사를 이 박사에게 전달하였고 26일에는 오전 4시경 유어만 총영사가 이화장으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 중국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한다. 이상 경위에 대하여 25일 오후 7시30분 무교동 부통령 저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측근자가 자기의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를 증언하였다. 이로써 김성수 씨에게 총리 지명이 갈 것은 확실무의케 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27일)

 

조간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고 국회에 등청한 의원들, 이승만이 밝힌 지명자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한 마디 붙여둘 것은, 이 시점에서 국무총리라는 자리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어마어마한 주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