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하 남조선 언론은 공산권 동향에 어두웠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티토”를 검색해 보니 1948년 6월 말까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합쳐 11회 나타난다. 그런데 7월 초순 열흘 동안에 25회 나타난다. 6월 28일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공산당 축출을 계기로 스탈린-티토 간 갈등이 표면화된 여파였다. 7월 9일자 <경향신문>에는 모처럼 큼직한 해설기사도 실렸다.

 

“소련 블록 붕괴의 조짐? - 유고 사태는 비상 - 조선공산당에 타산지석”

 

7월에 들어서자 외전은 철의 장막 속에서 돌발한 이변을 연일 전하고 있다. 즉 9개국 국제코민포름은 유고의 티토 수상을 동 코민포름에서 추방하였다는 것을 성명하였고 소련은 동 성명을 지지하고 티토 수상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진의는 소련을 배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유 친목을 강조, 동구 각국 간의 오해를 풀어달라고 스탈린 수상에게 간원(懇願)하였으나 일척(一擲)당하고 소련은 내 21일 개최되는 유고공산당 전국대회에 사절 파견을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는 유고와의 국교 단절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종가인 소련을 위시하여 동구 제국은 유고를 보이콧하고 있다.

 

이처럼 진전된 이유로서 외전은 단지 유고의 티토 수상은 마르크스-레닌 노선에 이반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고 인민은 티토 절대 지지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제2차 대전 후 철의 장막 속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라 볼 수 있는 동 사건의 귀결에 대하여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외전도 전하는 바와 같이 결국 티토는 자기비판으로서 소련 노선을 추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난 요인을 우리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 국제 문제에 대한 권위자 측의 말에 의하면,

 

1. 티토 수상의 노선은 소련 측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의 노선이라는 것보다 사회주의 노선이요, 거기다가 ‘민족’이라는 두 자가 더 있었다. 제2차 대전 후 약소민족이면 약소민족일수록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더 강하였다. 그런데 국제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의 관념을 냉대한 나머지 공산주의운동은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 실례를 우리는 조선에서 볼 수 있고 조선공산당이 주의운동에 실패한 것도 이 점에 있다.

 

2. 공산주의사회에는 헤게모니 장악전이란 격렬한 것이다. 과연 티토는 동구에 있어 혹성(惑星)과 같은 존재였다. 이를 시기하는 제국의 음모가 없을 수 없으니 그러한 예는 능히 조선에 있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해방 후 남로와 사로의 대립, 장안파 대 대회파 공산당의 알력 등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였다.

 

3. 그 위에 마셜계획의 역할이 있고 또 유고의 국민성 내지 9할을 점하고 있는 종교의 힘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을 잘라 말하자면 철의 장막 속은 평온무사하고 행복한 것 같지만 기실은 불안과 불행의 지역이라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는 산 자료일 것이다.

 

수준 높은 해설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런 정도가 일반 조선인들의 공산권 사정 이해를 위해 주어진 자료였다.

 

해설자의 눈에도 스탈린에 대한 티토의 저항이 당랑거철(螳螂拒轍) 내지 이란격석(以卵擊石)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오래지 않아 진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도 나타나 온 소련의 큰 힘과 유엔에서 소련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동구 공산국의 행태에 비춰보면 당연한 인식이다.

 

그런데 유엔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위성국가’ 행태에서 벗어난 일은 이미 있었다. 1947년 11월 하순 유엔총회에서 조선 문제와 나란히 상정된 팔레스타인 분리건국 제안에 소련이 찬성하는데 유고는 기권했다. 민족주의와 관련된 사안에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령’을 벌써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두 달 전 코민포름 결성 때까지도 유고슬라비아는 누구 못지않게 모범적인 공산국이었다. (1947년 9월의 코민포름 결성 과정은 1947년 10월 5일자 일기에서 설명했다.) 코민포름 본부가 베오그라드에 설치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후 몇 달 동안 티토와 스탈린 사이의 신뢰가 사라지고 1948년에 들어서면 유고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 가시 돋친 편지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Wikipedia> "Tito-Stalin Split")

 

분쟁의 이유로 유고슬라비아가 독자적 경제정책을 추진했다는 점과 소련이 제창하는 국제공산주의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점이 거론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후자가 더 근본적인 문제다. 티토의 경제정책이 마르크스-레닌 노선에서 벗어난 것인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큰 문제이기 때문에 분쟁의 출발점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나니까 티토 노선을 비난하기 위해 들고 나온 문제일 것 같다.

 

1947년 3월 12일과 14일, 그리고 1948년 5월 13일 일기에서 그리스 사태를 설명할 때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을 곁들여 소개한 일이 있다. 티토는 영국과의 흥정으로 그리스공산당을 배신한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발칸연방’을 추구하면서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의 합방도 추진했는데, 스탈린은 그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지도를 받지 않고 서둘러 추진하는 데 분노했다고 한다.

 

1948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소련공산당과 유고공산당 사이에 오고간 몇 차례 편지를 통해 분쟁이 격화되었다. 4월 13일의 유고공산당 편지에는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5월 4일 소련공산당에서 보낸 편지에는 소련 적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파멸로부터 구원”해 줬다며 유고공산당의 오만을 질책했다. 유고공산당은 5월 17일 편지에서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의 항쟁 성과를 묵살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다음 달 코민포름 회의장에서 따져보자고 했다.

 

이것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스탈린의 오만이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의 도움 없이 추축국을 물리쳤다. 마지막 고비에서 소련군이 잠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정부와 협정을 맺고 들어와 제한적 역할만을 맡은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위성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힘에 의지해 정권을 잡은 것과 달리 티토의 유고공산당은 자기 힘으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한 것이었다.

 

1948년 6월의 코민포름 제2차 회의에 유고공산당은 불참했고, 이 회의에서 유고공산당의 제명이 의결되었다. 소련은 9월에서 10월에 걸쳐 유고슬라비아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그 위성국들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까지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흐루시초프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의 목록에서 티토가 한국 다음이었지.” (<Wikipedia>에 이 발언의 출처는 표시되어 있지 않음.)

 

코민포름과 결별한 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대적 ‘코민포름주의’ 탄압이 있었고 다른 공산국에서는 ‘티토주의’ 탄압이 있었다. 코민포름주의란 국제노선에 충성하며 조국을 등지는 것이었고, 티토주의란 민족주의에 매달려 국제노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에게 버림받은 유고슬라비아는 마셜플랜의 도움을 받으며 활로를 찾았다. 미-소 경쟁에서 이득을 취한 셈인데, 어떻게 이런 입지가 가능했는지는 언제든 더 세밀히 살펴보고 싶다. 경쟁의 중간에 서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런 위치에서 양쪽 압력에 치어 패망의 길을 걷기가 더 쉬울 것이다. 티토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라비아의 체제가 튼튼했기 때문에 압력에 눌리는 대신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격화되고 있던 냉전의 와중에서 독자적 입지를 세운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깃발이 되었다. 비동맹기구는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설립되었고, 티토는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엥크루마와 함께 그 지도자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과 화해했지만 그 위성국의 위치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토와 바르샤바동맹 양쪽에 모두 대항하는 국방체제를 유지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탈퇴는 당연히 공산권의 구조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소련과 미묘한 관계 속에 ‘해방전쟁’을 수행하던 중국공산당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취하는 입장에도 작지 않은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김성보는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243-246쪽에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는가?” 질문을 제기하는데, 북한이 소련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위성국가였다고 하는 통념에 반성의 여지가 있다. 동유럽에서 6개 위성국과 유고슬라비아의 노선 차이를 기준으로 하여 초기 중국과 북한의 소련과의 실제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스탈린과 티토 사이의 갈등을 살펴보다가 소련이 유엔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를 다시 생각해볼 만한 실마리도 떠올랐다. 그리스 문제에 대해 미국 정책을 비난하며 유엔의 개입을 보이콧한 것은 조선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처칠에게 양해한 바 있었고, 실제로 그리스공산당의 항쟁 지원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엔에서는 말로만 핏대를 올리며 보이콧으로 미국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조선 문제에 대해서도 말로만 미국의 분단건국 제안을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보이콧으로 부결의 위험을 없애준 것 아닐까? 조선을 통째로 차지하려고 미국과 극한대립을 벌일 뜻이 스탈린에게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절반을 차지하게 하면서 나머지 절반을 챙기는 것이 힘도 안 들고 소련의 이익에 충분히 부합하는 방책으로 생각되었을 것 같다. 그리스에서나 조선에서나 스탈린은 내전의 참극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알리바이만 챙기고 있었던 것 아닌가. 반공 선전 중 “스탈린의 음흉함”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를 찾지 못하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