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연맹(민련)과 한독당 중심의 남북협상파는 1948년 4월 초 평양행을 앞두고 노선 조율을 위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를 결성했다. 이남의 남북협상 추진세력으로는 2년 전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간파와 민전 중심의 좌익이 있었는데 1948년 들어 김구가 이끄는 우익의 한독당이 가담했다. 통협은 중간파와 우익의 연합이었는데 중간파 중 좌익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므로 민족주의 진영 형성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5월 초 평양에서 돌아온 후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통협 확장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일이 순조롭지 못하자 통협 확장을 포기하고 새 기구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양김 씨의 진영, 통촉(統促)을 신 결성”

 

민련과 한독당에서는 8일 하오 3시부터 동 6시 반까지 경교장에서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유림 씨와 타협이 성립되지 못하여 ‘통협’과는 별개로 새로운 기구 조직을 의논한 결과 ‘통일독립촉진회’를 구성하고 신발족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동일 발기주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 위원으로 김붕준·이두산·여운홍·엄항섭·배성룡·조헌식 등 6씨가 선정되었는데 작 9일 오전 10시부터 약 3시간 민련 회의실에서 동 위원의 초회합을 하고 ‘통촉’ 발기에 대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0일)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통협의 한 축을 맡았던 유림은 우익 지도자들이 이북 측 의도에 말려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경계하고, 4월 평양회담 후에는 김구, 김규식 등 참석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섰다고 비난했다. 7월 8일 통협에서 통촉으로의 전환 결정의 계기가 그 날 나온 유림의 비타협 선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협이 ‘통일탁치운동자협의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성명서를 유림은 이런 말로 맺었다.

 

“보살은 아귀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갈 수 있으나 범부 중생은 보살을 따라 지옥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양김 씨는 공산당을 선택 수단으로 포용할지라도 나는 무명소졸이라 부지중에 공산당 오열에 징용되지 않도록 부단히 경각을 가지고 싶다.

 

나는 통일운동을 통해서 사세(私勢)를 확충하려는 심사도 없고 허구 선전으로 모해 중상하려는 일체 무치(無恥)행위는 괘치 아니하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최후까지 항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은 동포들의 혁명 도의와 애국 양심의 판단에 맡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0일, “찬탁에 서명한 양김 씨 통협 영도권 없다 - 유림 씨, 폭탄성명 발표”)

 

유림이 양심적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탁치 수용을 주장한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들과 갈라선다는 것은 지나친 결벽증 같다. 이념으로 뭉치는 붕(朋)이 이익으로 합치는 당(黨)보다 현실 속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문제다. 이익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인 반면 이념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파 대표인 유림의 반발 앞에서 통협을 포기하고 통촉으로 전환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당시 지사(志士)들의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보는 것 같다.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거나 몰아내기보다 함께 하던 일에서 물러서는 자세. 유림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조소앙의 대답에서도 이런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유림 씨는 명쾌한 비판을 잘하는 분이다. 그러나 국가의 독립을 완성하는 수단방법으로 민족의 총단결은 물론이며 역사적으로 동일한 궤도에 섰던 민족계열들의 단결을 유효하게 추진하는 것도 비판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줄로 본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1일)

 

평양회담 이후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협상파의 세력은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유림처럼 타협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협을 너무 좋아해서 이북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이 막강한 힘으로 추진하는 분단건국을 막을 길이 없다는 체념으로, 이북에서라도 민족국가의 꿈을 이뤄보겠다는 뜻이었다. 이북 정권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배합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족주의자로서는 합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에는 비대칭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북측은 단일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는데, 남측의 협상 추진세력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남로당과 민전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은 북측 입장에 호응하고 있었고, 민족주의 진영이 통협으로 뭉쳐져 있었지만 결속력이 약했다. 민족주의 진영에서 상당수가 이북 정권 참여파로 넘어가면서 남북협상은 북측의 명분 확보에 이용되는 결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남 민족주의 진영이 통촉 설립의 방향을 겨우 잡고 있을 때 이북에서는 정부 수립을 위한 중요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를 결정한 것이다.

 

이북의 헌법 제정 작업은 이남에 비해 차분한 과정을 거쳤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조선 관계 결정이 있은 며칠 후 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헌법 제정 논의가 이뤄지고 31인의 임시헌법 제정위원이 선임되었다. 제정위원회는 11월 20일 첫 회의에서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전부장 김택영, 역사가 이청원과 북조선최고재판소 판사 김윤동 3인을 초안 작성위원으로 임명했다. (<북한의 역사 1>(김성보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26-130쪽)

 

제정위원회는 1948년 2월 초순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 임시헌법 초안을 제출했으나 인민회의는 이 초안을 바로 심의하는 대신 초안의 형태로 공표해서 ‘전 인민 토의’에 부쳤다. 2개월간 진행된 전 인민 토의 중 제정위원회는 2,236건의 수정안과 첨가안을 접수했다. 이것을 근거로 수정 작업을 진행, 완성된 초안은 4월 29일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김성보는 이 초안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채택된 헌법 초안은 인민위원회를 국가권력의 기초로 하는 인민적 국가 형태와 인민주권 형식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경제구성에서 국가소유, 협동단체의 소유, 개인소유를 모두 인정했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 북한 헌법 초안은 소련 헌법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일반화되고 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틀에서 수용한 것이었으며, 남북분단의 상황 등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북한의 역사 1> 129-130쪽)

 

6월 3일에야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서 두어 주일 만에 초안을 작성하고 다시 두어 주일 만에 본회의 심의를 끝낸 이남 국회의 헌법 제정 과정은 민의 수렴도 미흡하고 졸속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군정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미국과 단정 추진세력은 9월의 유엔총회 전에 건국 작업을 끝내기 위해 서둘렀고, 이승만은 헌법 심의를 지연시키는 의원들을 반역세력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이남의 헌법도 이북의 헌법도 분단국가의 헌법이 아니었다. 이남에서는 국회 정원을 3백 명으로 하되, ‘가능지역 선거’에서 선출된 2백 명 의원으로 개원했다.(실제로는 북제주 2명이 빠진 198명) 정원의 3분의 2 이하 의원만으로 헌법 제정 등 가장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는 문제는 건국의 정통성 확보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0일 발표된 이북의 선거 계획은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을 포함한 것이었다. 8월 25일 실시될 이북의 선거 전에 이남에서는 간접선거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7월 15일부터 남조선 대표자선거를 시작하고, 여기서 선출된 1,080명의 대표자가 38선을 넘어 해주에 집결, 8월 23~25일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해주대회에서 선출되는 360명의 대의원이 8월 25일 이북 선거에서 선출되는 212명 대의원과 함께 정원 572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게 된다.

 

실제로는 반쪽 정부면서 서로 전 조선 정부라고 우기는 상황 자체가 많은 무리를 낳았다. 적대관계를 취하더라도 반쪽 정부라는 사실만 피차 인정했다면 대립의 양상은 훨씬 완만했을 것이다. 미-소의 대리전을 하필 조선이 떠맡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당시에도 오기영 같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능지역 정부”

 

1948년 5월 10일 남조선에서 시행된 선거는 그것이 북조선의 참가가 없이 남조선에서만 단독으로 시행된 것이니 이것을 일러서 단독선거라는 말은 지당한 말이다.

 

더구나 남조선에서도 각당각파가 모두 다 참가한 것이 아니라 일당일파만 단독으로 참가하였으니 이러한 관점에서 단독선거라는 말은 더욱 지당한 밀이다.

 

그런데 이 선거에 참가한 편에서는 이것을 총선거라고 말한다. 어느 모로 보아도 총선거라고 할 수는 없어야 옳건마는 굳이 이것을 총선거라고 하면 장차 남북이 통일하여 시행할 정말 총선거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그야 애꾸도 애꾸라면 싫어하는 모양으로 단독선거도 단독선거라면 싫어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코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애꾸가 아무리 애꾸이기를 싫어할지라도 별 수 없이 애꾸는 애꾸다. 이십세기의 의학발달은 애꾸의 보기 흉한 한쪽 눈에 그럴듯한 가짜 눈알을 해 넣어서 겉으로 보기에 애꾸가 아닌 것처럼까지 만드는 수는 있으나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 애꾸는 애꾸라, 그는 한쪽 눈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대하여 아무리 단독선거라는 말을 싫어할지라도 단독선거는 별 수 없이 단독선거다. 모든 정치적 제스처와 미문여구로 합리화할지라도 실질에 있어서 이 나라의 반쪽에서만 시행된 단독선거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차라리 조선의 정치가들의 협량(狹量)을 슬퍼한다. 이 말은 단독선거를 총선거라고 불러주지 않는 데 대해서가 아니라 단독선거는 단독선거라고 떡 버티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이 다르고 견해가 달라서 이번 선거에 찬부(贊否)가 갈렸다. 하다면 찬부에 대한 정부(正否)는 후일의 사필(史筆)에 맡길 일이요, 일단 그 신념대로 행동한 데 대해서 우물쭈물하거나 가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이 불참하면 남에서만이라도, 똑 각당각파가 불참하면 일당일파 단독으로라도 선거를 행하고 거기 의하여 군정 하에서보다는 나은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었으면 그로써 좋은 일이다. 구태여 총선거 아닌 단독선거를 단독선거 아닌 총선거처럼 주장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충분히 이해한 바와 같이 단독선거라는 말이 듣기 좋을 까닭은 없을 것이다. 나도 지금 단독선거라는 말을 여러 번 썼지만 내가 그 편이 되어도 그 말이 굳이 좋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듣기 좋을 것 없는 말을 구태여 쓸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비위에 거슬리는 용어를 많이 써서 그것이 동족 간에 얼마나 불화를 더하였는지 모른다. 가령 적구(赤狗)라, 매국노라, 극렬분자라 하는 따위 용어의 남용은 쓰는 사람도 옳지 않거니와 듣는 사람으로서도 아무리 정치운동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마는 결국 사람은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좋지 못한 용어에 감정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동족 상화하여 통일건국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피차에 이러한 감정적인 매언(罵言)으로 상대편의 감정을 자극하는 용어는 지극히 삼갈 필요가 절실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운동에 있어서도 높은 교양과 스포츠맨십이 필요할수록 저열하고 속악적인 용어는 일체 사용치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 이르러 우리는 단독선거라는 용어가 생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이해할 때에 구태여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다. 본시 이번 선거는 국제적으로 공식상으로 가능지역선거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주의를 환기하는 바이다.

 

그렇다 이번 선거는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시행하는 것이 좋다는 UN소총회의 권고에 의하여 UN임시조선위원단은 가능지역 선거를 시행토록 하고 그들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 내에서 감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정확히 불러서 이본 선거는 단독선거도 아니요 또 총선거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가능지역선거인 것이다.

 

그러니까 구태여 단독선거라고 꼬집어 뜯어서 상대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동족불화를 조장할 위험이 있는 비례적인 소위라고 생각하거니와 동시에 나는 이것을 실질과 달리 총선거라고 하는 가장(假裝)적 허장성세도 그만두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선거를 가지고 내가 왜 지금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인가. 내가 이것을 구태여 문제 삼는 것은 본뜻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 의하여 성립되는 정부에 대해서 이제ㅐ 또 중앙정부라는 말과 단독정부라는 말이 서로 충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가능성은 결코 기우적인 예측이 아니라 이번 선거에 대한 두 가지 칭호에 의하여 그 실험적 논리 하에서 누구나 시인할 가능성을 가진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심각한 문제요 신중히 생각할 문제다.

 

그러면 이제 성립될 정부를 무슨 정부라고 부를 것인가?

 

마땅히 가능지역정부라고 할 것이다. 가능지역 선거에 의하여 성립되는 정부이니 가능지역정부요, 그 법률과 행정을 거부할 북조선에까지 시행될 가능성은 없고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 시행될 것이니 별 수 없는 가능지역정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가능지역정부를 일러서 혹은 중앙정부라, 혹은 단독정부라 하여 피차의 심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앞날의 통일을 완수하는 데 방해가 되는 동족불화를 조장할 위험스러운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건마는 이 가능지역정부를 가능지역정부라고 부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딱한 가능지역이다. (1948년 6월 10일) (<진짜 무궁화> 89-93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