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4일 오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앙청 앞마당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취임사에는 참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었다. 사심 없는 노 애국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말씀 가운데 이따금 숨은 가시처럼 그의 정치관이 드러난다. 두 대목만 짚어본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되어 2·3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 색태로 지목받은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원 중에서 사상충돌로 분쟁 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열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사를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 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북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남북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 개과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5일)

 

위 대목은 국회 내의 반대세력에 대한 그의 시각을, 아래 대목은 이북 정권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여준다. 좋은 말씀을 열심히 엮어 내놓는 취임사에서도 감출 수 없는 반대세력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 장차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세를 예고해 준다.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 동안 질릴 정도로 많이 봐 왔고, 부통령에 취임한 이시영(1869~1953년)에게 한 차례 주의를 돌려 본다. 이승만과 김구보다 6-7세 연상인 그는 임정 최고 원로였다. 나이로만 원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공로가 엄청나게 큰 인물이었다. 합방 전 평안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 등 대한제국 고관을 지냈고, 합방 후 이회영 등 6형제가 함께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재중 항일운동의 종갓집 노릇을 했다.

 

탁월한 경력과 지대한 공헌에 걸맞는 자리를 임정에서 차지한 일이 없고 어떤 분규에도 두드러지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로 보아 특출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리를 탐내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주견을 내세움에 있어서도 겸양의 자세를 지킨 분 같다. 주견이 약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당당히 내세우되 남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귀국한 뒤의 행적도 그렇다. 1947년 9월 26일자 일기에 그가 세 차례 ‘퇴진’ 성명을 발표한 일을 적었다. 1946년 8월 독촉국민회 위원장직 사퇴, 1947년 9월 국민의회 국무위원직과 의정원 의원직 사퇴, 그리고 1951년 5월의 부통령직 사퇴다.

 

이시영은 사퇴할 때마다 사퇴 이유를 얼버무린 일이 없다. 완곡하면서도 분명하게 이유를 밝혔다. 1946년 8월 독촉국민회 위원장직 사퇴 때의 성명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민족적 중대위기에 임하여 민주주의국가 건설이란 동일한 정치이념에도 불구하고 각 지도자들의 파지(把持)하고 있는 그 구구한 정견과 방략의 사곡 고집을 볼 때에 끝없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합류불능을 통감하는 바이다.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간부로 말하면 다 당시 준초인물(俊楚人物)이라 한다. (...)그러나 가끔 그들의 동작이 법규나 조리에 맞지 못하는 표현이 있을 때에는 물의가 훤등하여 나로 하여금 극도 불안을 느끼게 할 뿐이요 광정할 도리가 없으므로 결연히 일절 공직을 탈리 사퇴하고 동시에 3천만 형제자매에게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서울신문> 1946년 08월 18일)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사조직이었지만 명분은 그럴싸하게 내걸고 있었다. 그 잘못된 행태가 드러날 때 자기로서는 “광정할 도리가 없으므로”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9월 국민의회와 의정원으로부터 물러날 때의 성명서에서도 그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해방 후 정부책임자들은 국제의 무리 압박으로 부득이 사인 자격이라는 수치스러운 걸음으로 귀국하여 떳떳치 못한 형편도 불무하였으나 지켜온 법통 정신만은 그다지 손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회에 소위 43차 회의가 진정한 혁명자의 집단으로 개편치도 않았고 특히 국무위원회의 결재와 지시도 없이 상임위원회에서 권리를 남용하여 몇 개인이 자의자상(自意自想)대로 제반 사항을 결정하였다.

 

이는 30년 전래의 신성한 법통을 유린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임정의 위신을 잃게 한 일대 유감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하자와 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망행은 용서할 수 없는 위헌행동이다. 30여 년간 법통과 고절(苦節)을 지켜온 본인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은인 묵과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을 다 탈리하는 바이다. 다만 직무의 불충실한 과오를 일반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6일)

 

독촉국민회와 달리 국민의회와 의정원은 임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기구들이었다. 이로부터의 탈퇴는 모든 공적 활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은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시영의 나이는 79세였고, 공로만 있고 허물은 없는 깨끗한 은퇴였다.

 

그렇게 은거한 80세 노인이 왜 부통령으로 나서게 된 것일까? 이승만의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떤 반대도 없을 만한 훌륭한 후보이면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위험이 없는 인물.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권위가 김구에게 떨어지지 않는 인물. 김구가 단정 반대에 나선 것이 이승만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었다. 자기 노선을 김구가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김구에 못지않은 권위를 가진 인물의 존재가 필요했다.

 

이승만의 뜻이 그렇다면 이시영은 왜 호응했을까. 나는 진퇴에 대한 선비의 자세로 이해한다. 주어진 역할이 대의에 맞는 것이라면 취향이나 의심 때문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의가 지속하는 한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투가 욕심나서 나섰다고 볼 만한 꼬투리는 그의 일생을 통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947년 9월 이후 이시영의 은거는 철저했다. 기념행사나 유엔위원단 환영 등 의전적인 일 빼고는 그의 이름 석 자가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 수립을 눈앞에 둔 1948년 7월 들어 그의 존재가 언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침묵을 깨뜨린 노 혁명가 이시영 옹 담 - 이 박사 김구 씨 타협 곤란”

 

재작년 가을 국민의회 한독당 등 임정 계통의 모든 정치단체와 관계를 끊는 비장한 성명을 발표하고 초야에 나려 묵묵히 새로운 독자적 건국 구상에 잠기고 있던 성재 이시영 옹의 최근 동향은 정계의 변화와 함께 크게 주목받고 있거니와 정부 수립을 앞두고 이 박사와 이 옹 간은 물론 기타 정계 요인들의 내왕이 빈번한데 정부가 수립되면 이 옹이 부통령으로 출마하리라는 설이 유포되고 있는 때인 만큼 옹의 거취는 더욱 일반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옹은 그 동안 경춘선 마석 향촌에 가서 일삭이나 정양을 하다가 지난 30일 귀경하였는데 옹은 3일 왕방한 기자와 옹과 이 박사와의 관계, 김구 씨와 김 박사의 태도 및 서 박사 추대운동 등 제반 시사문제에 대하여 80 노령에 정정한 기력으로 대요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이 박사가 대통령으로 피선된다면 옹은 부통령으로 입각하게 되리라는 설이 있는데?

답: 나로선 금시초문이다. 나보다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있는데 나 같은 노후한 인물이 나가서 뭣하겠는가. 그러나 일생을 조국 광복에 바쳐 이 몸이 이렇듯 늙어빠진 만큼 앞으로도 건국에 여생을 바칠 각오이다.

 

문: 이 박사 개인에 대한 옹의 기대와 요망은?

답: 이 박사는 좀 양보성이 있어 주길 바란다. 정부가 서더라도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다.

 

문: 이 박사와 김구 씨는 합작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답: 합작? 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조각(組閣) 일보 전에 듣고 아니 듣고 간에 김구 씨에게 최후로 협조를 요청하게 될 것인데 글쎄... 김구 씨가 들을라구?

 

문: 선거 국회는 물론 정부수립까지 보이콧하는 김구 씨의 태도를 어찌 보는가?

답: 나는 여러 번 김구 씨더러 그러지 말고 마음을 돌려 반쪽 정부나마 세우는 데 협력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해 보았으나 결국 도로(徒勞)였다.

 

문: 그러면 김규식 박사는?

답: 물론 김구 씨와 함께 훌륭한 분이나 좀 더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 서(재필) 박사의 신당설에 대한 소감은?

답: 서 씨는 늦게 귀국하여 현재 군정청 최고의정관 자리에 앉아있는 만큼 해방 이래 3년 가까이 남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뒤에 참섭(參涉)하여 뭣이니 뭣이니 한다는 것은 자미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새로운 파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찬성이다.

 

문: 38선은 언제나 터질 것이며 남북통일은 가능한가?

답: 38선이 터지는 것이라든가 또는 남북통일 등의 문제는 국제간에 해결할 성질의 것이요, 우리 독력으로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는 써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4일)

 

보름 후에 있을 부통령 출마설을 “금시초문”이라는 것이 웬만해서는 곧이듣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워낙 어떤 일에든 원칙에 투철한 인물이라서 이것까지 곧이들릴 지경이다. 이 기자회견 중에도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데, 정치적 입장이 표현에 영향을 끼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좀 양보성이 있어 주길” 바란다며,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라고, 직격탄이다. 김구에 대해서는 드러내 악평을 하지는 않지만 김구의 고집이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을 분명히 한다. 김규식에 대해 “좀 더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김규식의 노선에 찬성하면서 추진력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재필에 대해서는 그 위치부터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기자가 서재필에 관한 질문을 한 것은 얼마 전의 ‘서재필 추대 운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의 귀국은 그를 이승만의 대항마로 삼으려는 하지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데,(1947년 4월 27일자 일기) 서재필 본인은 권력투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조선사람이 될 생각도 없이 미국인으로만 행세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이 목전에 닥쳐오자 이승만 반대자들이 서재필에게 매달린 모양이었다.

 

“2차 회의에 벌써 파란 - 문제의 ‘독립협회’”

 

방금 국회가 소집되어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헌법을 신중 기초 중에 있는 이때 지난 총선거에 낙선된 일부 인사들이 정일형 박사를 회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정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여 독립협회를 확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려는 기색이 농후하여 오던 바 지난 11일 제1차, 또 17일 하오 2시 제2차로 시내 남대문로5가 명신백화점 3층에서 최능진 백인제 안동원 김붕준 이용고 노진설 여행열 정인과 윤석진 등 30여 인이 회합하여 동회의 사옥 문제 재정 문제와 서재필 박사에게 보낼 간원문을 토의하였다 하는데 (...) 서 박사에게 보내려던 간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애하는 서재필 박사, 조국과 그 인민은 선생을 지도자로 부릅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를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 한 분이 있으니 그는 서 박사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명 등은 선생께서 정계의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 간청하기로 결심하였사오니 선생은 우리 한족의 건국 초두에 그른 길에 끌지 않고 참된 민주주의의 직로를 걷도록 노에 응하여 주시기를 간원하나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9일)

 

그러나 이 움직임이 허황한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튿날 신문에 밝혀진다.

 

“정계 혼란을 초래할 뿐 - ‘독협’ 간원(懇願)을 서 박사 거절”

 

서재필박사를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려는 흥사단계 독립협회에서는 서 박사에게 간원문을 보냈으나 서 박사는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하며, 한편 정일형·백인제·장도빈·이용고·안동원 제씨는 이 독립협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단체에 아무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각각 작일 표명한 바 있었고 이분들의 이름을 남용하여 모략을 하려는 것이 판명되었는데 이 회합에 참석하였던 백영엽은 회합 내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독립협회의 책임자는 정인과 씨와 최모이며 나는 여러 번 간청을 받아 2차나 출석하였으나 정일형·장도빈·안동원·노진설·백인제는 본 일이 없다. 그리고 후 이러한 책동은 하등의 성과도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0일)

 

인용된 백영엽의 발언 중 “최모”란 최능진을 가리킨 것이다.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있다가 1947년 12월 조병옥-장택상과 충돌하고 파면당한 최능진은 5-10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역구에 도전하다가 등록을 취소당했다. 그는 김구 노선 추종자로 알려졌고 여순사건에도 연루될 사람이다. 미군정 지도자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갖고 있어서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적개심과 결탁해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저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장택상에게 대항할 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미군정을 업고 계략을 꾸미는 모습에는 수단방법을 가리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서재필 추대운동은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서재필 자신도 시종일관 추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독촉국민회에서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결의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이 이미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7일 “서 박사 추대운동에 대항 - 독촉 산하 전적 반대운동”) 서재필은 7월 4일 ‘피맆 졔이손’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 “나는 미국 시민이며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6일 “서 박사 추대 거부 성명”)

 

7월 20일 오전의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바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밖에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가 나왔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이므로 무효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표결로 무효처리했다. 오후의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차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했으나 3분지 2 지지에 미달하여 2차투표에서 133표로 당선되었다. 김구에게 1차투표에서 65표, 2차투표에서 62표가 나온 것은 무소속구락부의 투표로 보인다.

 

한민당과 독촉계열은 부통령선거까지 보조를 맞췄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첫 번째로 할 일인 국무총리 임명을 둘러싸고 한민당은 이승만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이익으로 뭉친 사이는 이익을 함께 하는 동안 꿀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이익은 언젠가 갈라지게 되어 있다.

 

 

Posted by 문천

 

5월 14일 북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군정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송전 문제 의논할 것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북조선의 통치권은 주둔소련군에게 있으므로 그 밖의 어떤 상대와도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담의 격을 따지는 것은 회담을 회피하고 싶은 축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소련군사령관은 진주 당시의 치스차코프 대장이 1947년 4월 코로트코프 중장으로 바뀌었다가 1948년 6월초에 메르쿠로브 소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계급장이 작아지는 것을 보더라도 주둔군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메르쿠로브 사령관 취임 후 송전 문제와 관련된 회답을 하지에게 보냈다.

 

“인위와 교섭하라 - 전력문제에 대하여 소련 측에서 회한”

 

지난 달 14일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단절된 후 하지 중장은 누차에 걸쳐 전력대금으로 지불할 물자를 준비한 것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회의를 열 것을 소련사령관에게 제안한 바 있었으나 하등의 소식이 없더니 지난 15일부로 대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한이 도착하였다.

 

“남조선에 대한 송전의 중지는 미소 당국의 전력협정 불이행에 기인한 것이며 남조선의 선거와는 하등의 관련성이 없다. 북조선에서는 특히 전력시설을 포함한 국유화산업의 운용 권한이 인민위원회에 속하고 있으므로 동 위원회와 직접 교섭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9일)

 

6월말에는 주소 미 대사를 통해 소련 외무성에도 하지의 요구가 전달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일, “즉시 송전을 요구 - 남조선 단전에 주소 미 대사 항의”) 그 직후 북측에서 상당히 친절한 제안이 들어왔다.

 

“소측, 송전을 제안 - 단 전력대는 인위에 지불해야만”

 

2일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1947년 6월까지의 전력대금을 지불하는 즉시로 미군 점령지역 내에 전력을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하지 중장에 대한 소련 측의 제의는 미국이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그 대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군사령관은 수차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승인 또는 이와 교섭하는 것을 거부하여 온 만치 금번 신 제안으로 인하여 즉시 남조선에 대한 송전이 재개될 희망은 박약하다. 공산주의자들은 하지 중장의 형용에 의하면 미군 점령지역의 재건사업에 지장을 주고 남조선 주민들을 공갈하기 위한 압박 공작의 일단으로 지난 5월 4일 이래 송전은 중지되었던 것이다. [조통 제공]

 

“전력대 지불하면 곧 송전 - 소, 인민위 대표 파견을 결정”

 

[주 서울 AP특파원 무어 제공] 북조선 소련 측은 만일 미국당국이 전력대를 지불하기 위하여 미군사령관이 수집하였다는 물자를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넘겨준다면 남조선에 대한 전력공급을 부활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평양방송은 북조선 소련사령 멜쿠로브 소장으로부터 하지 장군에게 보낸 서한 속에 동 제안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하지 장군은 동 서한을 아직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하등 비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전력문제 해결을 미 국무성이 소련 외무성에 대하여 요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6월 30일 발표되었던 것이다.

 

멜쿠로브 소장은 인민위원회가 전력 대상물자를 받고 남조선에 대한 협정을 짓고자 그 대표를 서울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였다. 하지 장군은 인민위원회와의 교섭을 거절하여 왔다. 1947년 6월 30일 이전에 사용한 약 6백만 달러의 가격의 물자를 포함한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협정은 양 사령부 간에 행하여진 것이다. 그 후 사용한 전력대금 지불 교섭에 수련 측이 참가하라는 그의 초청은 소련 측에 의하여 이는 인민위원회의 소관사항이라는 제의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3일)

 

소련군사령관이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제안이라고 평양방송에서는 말하는데, 하지는 그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7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미소군 사령부 승인 하 조선인 대표 협상 용인 - 미측 태도”에 붙어 있는 “미-소 교(交)한(翰) 내용”을 보면 멜쿠로브 소장의 편지는 6월 25일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지의 답장은 7월 2일부로 되어 있는데, 이런 말로 시작한다.

 

“친애하는 멜쿠로브 장군, 7월 2일 나에게 전달된 1948년 6월 25일부 귀하의 서한은 확실히 받았습니다.”

 

평양방송으로 멜쿠로브의 제안 내용이 발표될 때, 하지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날 편지를 전달받았다며 그 날로 답장을 보냈다. 내 짐작으로는 자기 사무실에 이미 와 있는 편지를 하지가 열어보지도 않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가 평양방송에 나오니까 얼른 열어보고, 수세에 몰린 입장이니까 얼른 답장을 보냈을 것 같다. 이미 읽은 편지를 받지도 못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어주고 싶어서 하는 짐작이다.

 

7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모처럼 전력문제에 돌파구가 생길 듯한 희망적 기사였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AP 특파원 제공”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또한 씁쓸하다.

 

[주 서울 AP 특파원 무어 씨 22일 제공 합동] 남조선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소 양 사령부에 의해 승인된 전력문제 협상을 용인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소련사령부는 종래 동 문제는 공산괴뢰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소관사라고 주장하여 왔던 것이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단절된 5월 14일 이래 하지 중장은 미군사령부는 송전 복구 문제에 관하여 인민위원회와 협의하라는 소련 측의 제안을 거절하여 왔었다.

 

그 발표 내용인즉 6월 25일부 멜쿠로브의 편지와 7월 2일부 하지의 편지뿐이다. 특파원이 물어보니까 이 편지 내용을 보여줬는데, 특파원이 보기에는 “조선인 대표 협상 용인”이라는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으로 보여서 이 희망적인 기사를 만든 것 같다.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되고 7월 20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로 정부 조직이 시작되었다. 몇 주일 내로 행정권을 이양해야 하는 시점에서 미군정의 잘못 중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이 송전 중단 사태였다. 이제 송전 협상의 남쪽 주체도 미군정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될 참인데, 북측 대표로 조선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자세가 어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소군 사령부가 지명한 대표라면 조선인이 협상에 나서도 좋다고 한 7월 2일부 편지 내용을 대단한 입장 변화라도 되는 것처럼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1주일 전에 보낸 편지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우기는 배짱이 참 대단하다. 7월 15일 딘 군정장관이 기자회견 중 전력대책위원회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온다 해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수준이다. “그들은 북조선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 만났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딘은 말했다.(1948년 7월 15일 일기)

 

북측과의 적극적 협상을 주장해 온 전력대책위원회에서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회는 7월 21일부로 딘 장관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가지가지로 불안한 중에 있는 남조선사태는 전력문제로 더욱 절박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에 각하의 구체적 방안과 그 성산의 유무를 듣는 한편 민의의 일단을 개진하려 함은 각하의 치하에 있는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인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리하여 전후 다섯 번이나 배방하였으나 놀란 것은 7월 16일부의 각하의 담화였습니다. 면회하려 온 사실이 없다고 단언한 각하의 안하무인적 담력에 대하여 위선 경의를 표합니다.

 

각하는 우리를 가리켜 북조선정책을 지지하고 미군정을 비판 반대하는 까닭에 만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각하께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발전선은 비용 과대로 유해무익입니다. 요컨대 남조선 단독조치로는 해결의 길이 용이치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대북해결의 일로가 있을 뿐입니다. 이 길을 생각하는 사상이 곧 공산주의요 북정(北政) 지지라 할진대 실로 전력에 지질린 남조선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요 북정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전력문제의 해결 여하는 사상적 차이를 캐고 정략적 기교를 따질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내조한 미국 기술자들도 하등의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언명한 각하의 말씀은 너무도 무책임한 것으로 느끼어집니다. 우리는 예를 갖추어 언사를 삼가리다. 다못 바라는 것은 전력입니다. 철의 장막도 우리끼리라는 자주적 원칙 하에서는 통할 수 있는 것이니 연백의 통수(通水) 문제가 이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22일)

 

전력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 이종만과 설의식의 프로필을 통해 위원회의 성격을 가늠한다면 좌익은 아니다. 이종만(1885-1977년)은 후에 월북하기는 했지만 광산업자이면서도 문화-교육-언론 분야의 공로가 큰 인물로서, 당시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을 맡고 <독립신보>를 경영하던 인물이었다. 설의식(1900-1954년)은 일제시대 <동아일보> 명기자의 하나로 해방 후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으나 1947년 <동아일보>를 떠나 <새한민보>를 창간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들을 모두 ‘북정 지지자’로 만드는 판이었다. 공개편지 끝의 “연백의 통수”란 7월 5일자 일기에 나온 연백평야 수리(水利) 문제 해결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미군정은 송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남북이 각기 정부를 세운 뒤에는 송전 문제가 다시 나오지도 않았다. 1948년 연말까지 남조선 사회가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칼럼을 하나 옮겨놓는다.

 

“해를 넘기는 과제 1 - 실명(失明)의 7개월간, 언제나 해결되려나”

 

“딱!” 5월 14일 정오 고압전화로써 북조선 산업국장 이문환 씨와 과정 오 상무부장 사이에 통화중 전화는 끊어지고 북조선에서는 급기야 단전하였다. 그 후부터 남한에서는 날로 전력 사정이 악화되어 공업 농업 등 제 부문을 비롯하여 생활양식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영월 청평 당인리 인천 부산 등지의 발전소에서 발전하고 있는 전력으로 인하여 완전 실명의 위기는 면하였으나 이즈음 전력 사정은 석탄 부족과 수위 저하로 지난 15일 현재 4-5만 kw를 넘지 못하는 형편으로 앞날이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단전 이래 7개월이 경(經)통(通)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전력 사정이 암담함은 당국자의 격별한 조치가 부족한 탓일런지 모르나 한편 노력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디젤엔진 수입발전소에 대한 특수한 배려, 미인 전력기술자의 초빙 등 제 조치를 열거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보아 신통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상임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경제 민생에 미치는 악영향이란 더 말할 것 없을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초소한도로라도 필요한 양을 13만 kw로 추산한다면 방금 발전량은 그 4분지 1밖에 되지 않는 형편. 이러고서야 어찌 산업의 발전은커녕 복구도 꾀하기 힘들 것이다.

 

본래 북한에서 송전을 중단한 것은 대상물자를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좀 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5-10선거가 실시되고 머지않아 국회와 정부가 수립될 것을 앞질러서 단전하였던 것이다. 이를 좀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냉정전의 한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정부 수립에 대한 소의 보복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소 냉정전 틈에 끼어서 시달리는 것은 우리뿐, 이제 대한민국도 들어섰으니 당국자의 좀더 적극적인 전력 시책이 긴급히 요청되는 바이다.

 

아! 전력문제는 해결을 짓지 못한 채 무자년을 보내고야 마는구나. (<경향신문> 1948년 12월 21일)

 

비교적 중립적 신문인 <경향신문>에 실린 글에도 송전 중단을 ‘소련의 일방적 횡포’로 보는 반공 선전이 투영되어 있다. 건국 반년도 안 된 시점인데, 남북협상에 의한 전력문제 해결은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조선인끼리 해결하면 좋을 일을 해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 미군정이었고, 미군정이 물러난 뒤에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이 분단건국이었다.

 

 

Posted by 문천

 

1947년 3월 중국 국부군이 공산당의 오랜 근거지 연안을 탈취하면서부터 잘만 하면 공산군의 완전 박멸에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상황이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 무렵에는 국민당 지지자들도 그런 희망을 지키기 힘들게 되었고, 여름에 와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국 양분을 점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공산당의 위세가 자라났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일본과의 전쟁 중부터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왔다. 일본 항복 후 유리한 조건을 누리게 된 국민당 정권의 원조 수요는 줄어들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고 미국의 원조를 더 많이 요구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미국 여론이 돌아서고 그에 따라 미국 정부와 의회의 태도도 갈수록 엄격해졌다.

 

“미 대중 원조 결정 - 동시 장 정권 부패상 통격”

 

[워싱턴 27일 발 UP 조선] 상원 외교위원회는 중국에 대한 4억6300만 불 원조안을 가결하였는데 동시에 장개석 영도 하 국민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3명으로 구성된 동 위원회는 원조 계획을 전원 일치로 승인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중국 내의 민간 파업, 경제적 혼란에 언급한 후 장개석 정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비능률, 부패, 관료적 폐해는 혼란과 인플레이션 시기에 더욱 파괴적 효과를 내고 있다. 군사 지도의 부적당한 것과 국 지휘관 사이의 부패는 국부군대의 저열한 사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깊은 동정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의 원조는 중국의 자조 노력을 조장하지 못한 것이 상례였다. 현재 계획은 중국 인민 자신이 장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있으므로 미국 측에 유망한 열의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 대중 원조 계획은 중국 내 건설적이고 민주주의적 분자를 격려하기 위하여 채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중국 지도자들은 현재 차별대우로 부진 상태에 있는 미국 실업가의 활동을 조장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8일)

 

미국 여론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민당정부는 1948년 봄에 입헌정부 수립의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장개석의 ‘비상대권’이 유지되었으므로 ‘장개석정부’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공산군(인민해방군)과의 내전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장개석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미약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장개석 씨의 고문 우 주교, 이승만 김구 양씨에 친서 - 정부조직 앞두고 의의 심대”

 

정부 탄생 전야의 국내 정계는 아연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조선 독립에 지대한 성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 우방 중국의 열의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즉 지난 15일 상해에서 발행된 화문지 신문(申聞)보(報)에 의하면 김구 씨 영도 하의 단체의 인물을 정부에 포섭하기를 종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유 영사의 경교장 방문은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 국내에서는 혁명애국지사의 포섭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있어서 일찍 이승만 박사와 김구 씨와는 망명시대부터 친교가 있고 현재는 장개석 대통령의 고문으로 있는 남경 우(于)빈(斌) 주교는 17일 여(呂)자(子)훈(勳) 씨를 통하여 친서를 양 영수에게 각각 전달하였다 하는데 동 주교의 서한은 정부 수립을 목첩에 둔 이때 의의가 깊은 것이며 이 박사에게는 정부 조각에 큰 참고가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북조선에서 단정을 수립하려는 때이니만큼 김구 씨 본연의 노선에 환원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8일)

 

김구의 “본연의 노선”이라 함은 1948년 들어 남북협상에 나서기 전까지의 ‘반공반탁’ 노선을 말하는 것이다. 이북의 정부수립 추진이 7월 10일의 총선거 계획 발표로 분명해진 이상 남북협상은 물 건너가 버렸고, 이제 이승만 대통령 아래 국무총리를 맡는 것이 그에게 유력한 진로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었다.

 

중국 땅에 있으면서 국민당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던 임시정부에 경력의 근거를 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이 손잡고 한국 정부를 이끌게 되면 그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장개석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누구도 장개석의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 장개석의 권위가 떨어지고 국민당정부의 장래가 어두워진 것도 원인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는 2천년 이상 중국의 상황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아 전개되어 왔다. 개항기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시대에도 한민족의 해외 항일운동이 대부분 중국 땅에서 펼쳐졌고,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제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이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에게도 잘 먹히지 않게 된 것은 한중관계의 역사상 공식적 관계가 이례적으로 약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소련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이 이처럼 약화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은 어땠을까? 이북 정권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출신의 연안파는 물론이고 김일성 등 빨치산파 지도자들도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리고 이북 정권은 만주의 ‘해방전쟁’을 적극 도와주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참여가 인민해방군에게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기의 이북 정권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관계는 별로 드러난 것이 없다. 지금까지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고, 당시에도 미군 첩보기관에 포착된 것이 별로 없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도 미군이 북-중 관계의 중요한 사실 세 가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350쪽)

 

1. 이북에서 소련의 영향보다 중국의 영향이 우월했다는 사실.

2. 조선인과 중국인이 혁명의 협력관계로 연대되어 있었다는 사실.

3. 역사가로서 돌이켜볼 때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로 생각해야 할 만큼 그 연대관계가 강력한 것이었다는 사실.

 

커밍스는 이어서 이후 북-중 관계의 중요성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1. 북한 학자들은 김일성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이것을 감추려 들었다.

2. 소련 측은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이것을 묵살했다.

3. 남한 학자들은 북한이 ‘소련 괴뢰’라는 주장에만 집착했다.

4. 1970년대까지 미국 학자들은 공산권을 한 덩어리로 보는 관점에만 매달렸다.

 

커밍스의 설명에는 중국 학계의 입장이 빠져 있다. 이 빈틈을 내 추측으로 메운다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지나친 좌경노선으로 학술연구가 원활하지 못한 기간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1980년대까지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외부 학계에서 참고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학술계의 공황상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보였다.

 

초기 북-중 관계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실마리를 10년 전 연변에 체류할 때 감지한 것이 있다. 조선족 연구자 류연산의 구술자료 수집 작업이다. 류연산(1957~2011년)은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편집원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후 연변대학 조선어문학계 교수로 부임했다가 연전에 작고했다.

 

류연산은 1990년대 초부터 조선족사회의 역사 탐구를 위한 구술자료 수집 작업에 매진했다. 이 작업에 초기 북-중 관계가 상당히 포함되었다. 중국 해방전쟁과 한국전쟁에 연이어 참전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당시 상황을 여러 위치에서 겪은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그가 수집한 자료에 들어 있다. 그 자료가 제대로 활용된다면 초기 북-중 관계를 비롯한 많은 주제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류연산은 타계를 앞두고 녹음테이프 4백여 개를 비롯한 수집 자료를 연변대학에 남겼는데, 그 자료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 한국 학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협력을 제공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음 달에 “해방일기” 집필을 끝내면 3년 만에 연변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 길에 그 자료가 처해 있는 상황도 알아보고자 한다.

 

류 선생의 명복을 빌며, 그가 남긴 녹음테이프 목록 일부를 아래 붙여놓는다.

 

록음 테잎(A) 목록

 

1) 대련시 장상현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2) 대련시 김도영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3) 대련시 백석형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4) 대련시 리림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5) 무순시 허관문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6) 무순시 예운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7-10) 무순시 최강 2000.3월/ 조선의용군 관련

11) 무순시 최혜순(최강 부인) 2000.3월/ 해방전쟁

12) 무순시 김성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13-14) 무순시 리영우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15-16) 무순시 량덕준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17-18) 무순시 윤재환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19) 무순시 최광길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

20) 무순시 려쾌술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1) 심양 김창원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2) 심양 최창수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3) 단동 최정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4) 단동 윤옥순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5) 단동 김정자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6) 단동 권태영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7) 단동 황의간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8) 매화구 산성진 김경수 2000.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29) 매화구 산성진 리용기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30-31) 매화구 산성진 강룡권 2000. 3월/ 해방전쟁 및 조선전쟁(문자정리)

32-33) 매화구 산성진 강룡권 2005. 5. 22일/ 매화구시 강씨 딸집에서

34) 매화구 산성진 金潤益 2000. 3월/ 지원군, 장진호전투, 비행기 로획

35) 매화구 산성진 韋忠院(漢族) 2000. 3월/ 지원군 담가대

36) 매화구 산성진 孫秉義(漢族) 2000. 3월/ 지원군

37-38) 단동시 李景洙 2005.8.10일/ 반우파투쟁 관련

39) 단동시 韓石梅(리경수의 부인) 2005.8.10일/ 조선전쟁시기 단동 군병원, 김성수의 남만방직공장, 오애은 목사 이야기

40-42) 봉성시 李秀哲, 金福順 부부 2005. 8. 11일/ 광복 후 서울 다녀옴, 조선의용군 참가, 해방전쟁시기 토지개혁, 감옥, 문혁시기 투쟁-

43) 연길 최하진 2006.1.3일/ 해방전쟁, 조선전쟁 간호병

44-45) 룡정 최근갑 2003년/ 은진중학, 반우파, 룡정역사기념사업(선구자탑 관련)

46) 연길 崔高峰 2006년 8월/ 부친 崔性純 관련/ 문혁시기 중심으로(문자정리 됨)

47) 서란시 金太福 2005. 3. 24일/ 서란시 조선족 일반, 문혁시기 군 생활 관련

48-49) 연길 崔高峰 2005. 6. 2일/ 부친 최성순 관련

50) 서란시 金太福 2004. 10. 18일/ 서란시 조선족 관련/ 광복초기 피난살이 등

51) 서란시 朴守振 2004. 10. 19일/ 부친 朴在浩 관련

52-53) 서란시 허춘자(박재호 부인), 박수진(박재호 아들), 朴仙嬌(박재호의 딸) 2005. 3. 24일/ 박재호 관련 가정사

54) 서란시 高光東 2004. 10. 19일/ 해방전쟁 전투영웅, 1950년 8월 19일 조선 최후로 나감

55) 서란시 金海鎭, 高正熙(강원도 출신), 林興龍 2005. 3. 24일/ 김해진은 3천리 구국동맹원으로 18년 감옥/ 고정희 이민단 생활, 귀국길/ 해군 생활 등/ 림흥룡의 부친 3천리 구국동맹원 18년 감옥살이

56-58) 서란시 崔元集, 李春福 夫婦 2005. 3. 25일/ 강원도 출신의 농촌생활, 이주, 해방전쟁, 지원군 포병, 3천리구국동맹, 문혁시기, 며느리 시집살이 등

59-67) 길림시 김영아 권사, 조인순(딸), 김영자(신도/ 강원도출신) 2001, 5, 2-3일 / 길림시 조선족 역사관련, 신앙생활 중심으로

68-70) 본계시 왜두산 조선족교회 2005, 12, 25-26일/ 성탄절 기도와 신앙생활 이야기

71-73) 교하시 朴相源, 姜京愛, 朴尙來 손자와 손녀와 손녀사위 2005. 5. 24일/ 해방전쟁 군 생활, 토지개혁, 신앙생활, 박상래 관련(박상래 맏손자 조선 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