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Sherry, In the Shadow of War - the United States since the 1930s

 

"전쟁 통해 부상한 미 현대사 조명"

"2차대전 거치면서 군사대국으로 등장 - 냉전 종식 후엔 서방 결속의 구심점 역할"

 

 

미국은 전쟁을 통해 탄생한 나라다. '프런티어정신'이라는 말 자체에 투쟁의 냄새가 깊숙이 배어 있다.

 

그러나 남북전쟁 무렵까지 미국 국토 내에 구체적인 모습의 프런티어는 사라진다. 1880년대까지 계속된 인디언 섬멸전을 제외하고는 미국 본토에 다시 전쟁이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이 미국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미국인들이 전쟁을 찾아 나섰다고 할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의 첫 번째 특징은 '군사대국'이었다. 한국전에서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전쟁다운 전쟁 중 미국이 큰 역할을 맡지 않은 것은 별로 없었고, '슈퍼파워'로서 미국의 면모는 그 경제력보다 단연 군사력으로 대표된다.

 

1백여 년 동안 국토가 전쟁에 짓밟힌 일이 없는 천혜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전쟁을 벌이거나 참여해 왔다. 공습과 포격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도 미국인들은 전쟁을 자기네 일로 의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마이클 셰리의 In the Shadow of War (예일대 출판부)는 이 특이한 현상을 통해 미국현대사의 전체 흐름을 살핀 책이다.

 

셰리의 서술은 1930년대의 뉴딜정책에서 출발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취임하자마자 뉴딜을 '불황과의 전쟁'으로 선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시 고조됐던 국민의식을 되살려내기 위한 비유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한 비유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의 집행력을 강화하고 국가의 동원능력을 확대하는 등 전시에 준한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미국은 뉴딜정책 덕분으로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생산력과 경제체제가 꽤 안정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긴장된 상황을 견뎌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정치분위기와 국민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미국은 단역배우로 출연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맡는 주역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슈퍼파워로 화려하게 등장한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몇 가지 강렬한 요소들이 얽혀 있었다. 그중 하나로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최첨단 과학과 기술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의 학살과 일본의 가미카제 등 인간의 잔인성에서 받은 충격과 공포가 있었다. 이 잔인성을 스스로 본받은 원폭 투하의 경험이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공포심을 더 키워주었다. 수십년간 전화로부터 안전했던 지정학적 위치가 현대전에서는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미국의 군국화에 앞장선 것이 직업군인들보다 민간정치인들이었다는 특이한 사실을 셰리는 지적한다. 군국화의 동기가 전쟁에 대한 공포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군국화 전략은 지상군의 교전능력보다 공군력과 첨단병기를 중심으로 속전속결에 목표를 두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미국의 군국화 방침은 확정되지 않았었다. 가상의 적인 공산주의를 '적색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움직임이 넓게 일어났지만 전쟁을 막 겪은 후의 염전 분위기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 한국전쟁이었고 이로써 공산주의가 가상의 적이 아닌 현실의 적으로 규정됨에 따라 일어난 매카시 선풍 속에 냉전체제가 굳어졌다.

 

셰리는 맹목적 군국화를 견제한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를 높이 평가한다. '군산복합체' 개념을 처음 제기한 것도 아이젠하워였고, 베트남에 원자탄을 쓰자는 막료들에게 "자네들 미쳤나? 그 끔찍한 물건을!" 하고 쏘아붙였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반대로 '뉴프런티어'를 제창한 케네디는 군국적 사고방식을 퍼뜨린 것으로 평가한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보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명언을 떠올리면 수긍이 가는 의견이다.

 

냉전이 미국의 군국화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셰리는 본다. 따라서 냉전의 종식이 미국의 군비축소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서방 결속의 구심점으로서 미국의 역할이 퇴화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은 더더욱 군사력을 과시할 필요를 느꼈고, 이것이 걸프전의 형태를 빚어내는 데 작용했다고 셰리는 설명한다. 전쟁 후 부시가 "우리는 드디어 베트남 콤플렉스를 이겨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을 인용한다.

 

저자의 기본 시각은 군국화를 미국현대사의 중심축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정부의 공식적 표명으로 석연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 사건들 중에 이 시각으로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 상당히 엄격한 학술적 기준을 지키기 대문에 그 기본시각이 현대사를 관통하는 힘은 강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단편적 서술에 대한 신뢰도는 그만큼 높게 느겨진다. 근래 우리 사회에 부각돼 오고 있는 반미 시각의 정리에도 좋은 참고가 될 책이다. (<중앙일보> 1996년 4월 21일 또는 5월 12일)

 

 

 

 

연재를 끝내고 보니 한가한 시간에 이따금 마주치게 됩니다. 전에 쓴 글을 그런 시간에 더러 훑어보게 되네요. 근년에 저를 찾아주신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글도 가끔 옮겨놓겠습니다.

 

 

 

Posted by 문천
2013. 8. 18. 00:19

 

 

 

1~5권 다섯 책을 예스에서 55,500원에 주문받고 있네요. 일간 알라딘에서도 실시할 거란 말을 들었고요.

출판사에서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독자들이 쉽게 구매할 기회가 생긴 건 반갑네요. 열흘 가량 실시하는 세일이라고 들었습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 선생님,

우선 <해방일기> 마치신 것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글이 담담하고 담백하네요.

저는 무언가 커다란 얘기를 기대했는데, 거꾸로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3년의 작업을 저렇게 가볍고도 소탈하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구나.

한 수 또 배웠습니다.

 

21세기 민족.....도 잘 읽었습니다.

이걸로 강연회도 하시는 것이죠?

후지이 다케시가 역문연 연구실장이던데,

작년에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의 '유교적 근대론' 토론회 사회도 맡은 걸로 압니다.

 

글 읽으며 떠오른 단상 몇몇만 풀어둡니다.

북에 대한 견해가 궁금해지네요.

남의 친일파, 친미파 엘리트층이,

전통 문명과 단절되고 자기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공공성이 부족한 집단임은 분명한데,

북쪽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맺는 말로 남겨두신 민족사회 회복과도 통하는 문제일 터인데,

선군정치, '김일성 민족' 등등에 저는 기겁하는 편이라서요.

남쪽보다 더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가근대-본근대 발상은 신선하네요.

확실히 너른 시각의 미덕이 발휘된 지점 같습니다.

미야지마 선생의 유교적 근대,

요나하 준의 '재근세화' 등과 아울러서 요긴한 참조틀로 새겨두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본근대의 밑천을 발굴하고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20세기에도 '전통적 근대화'의 지향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재적 발전론이 '실학'에서 근대의 흔적을 과장되게 주장했다면,

식민지 근대론은 20세기 초의 한글 근대, 일어 근대만 주목한 담론 같아요.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한학적 소양을 갖춘 상태에서 서학도 익힌 이들이 남긴 '한문 근대'가 있지 않았을까.

그게 내발론이나 식민론 양 진영의 서로 다른 이유로 외면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고루한 한학도 하니고, 성급한 서학도 아니고, 옹졸맞은 국학도 아닌,

셋을 조화롭게 회통시킬 수 있는 동학의 유산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남과 북의 통합이 문명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도 그러해야 할 것 같고요.

 

베트남어 공부하며 베트남사 공부를 병행하는데,

프랑스어, 국어(베트남어), 한문이 혼재했던 20세기 초가 흥미롭더군요.

협력자가 된 프랑스어 구사자, 혁명으로 내달린 국어 구사자,

그에 못지 않게 지방에 내려가 서당을 꾸려간 일군의 식자들이 있었습니다.

1919년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국자감이 제 역할을 못하니 하방한 셈이죠.

이들(중 일부)은 좌나 우로 기울지 않으면서 근대 안에서 근대 밖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던 게 아닌가.

1920년대부터 '불월학교'에 입학한 신청년들보다 더 깊이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식민지 조선에도 투사해 보게 됩니다.

   

 

적절한 속박... 얘기는 참 흥미롭네요.

혹 싱가포르에 대한 관심도 있으신지요?

요즘 리콴유 인터뷰와 책들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유교국가가 현대화되면 싱가포르처럼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와 '아시아적 가치' 논쟁하며 민주주의 편을 든 것이 김대중이었는데,

어떤지 시간은 리콴유 편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글로 한 번 정리하고 싶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밖에서 본 중국사>는 아껴만 두겠습니다.

선생님의 공력이 십분 발휘될 주제겠구나 하는 면도 있고,

한국의 중국학자가 쓴 중국통사가 나올 때가 이미 지났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독자적인 시점으로 중국사를 꿰는 책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납니다.

민두기 선생도 그 일은 못하셨죠.

그 다음 세대와 요즘 신진들은 논문 쓰기 급급해서 더 요원해 보이고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을 구하는 곳이 많으니, 일단은 물러나 있겠습니다.

 

한국도 무척 더운 모양이더군요.

늦여름,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빕니다.

 

-이병한 드림

 

 

 

이 선생과 주고받는 메일을 얼마 전부터 감춰놓고 지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배경도 모르던 통신 초기에는 감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대면도 하고 주변 사정도 조금씩 알게 되면서는 메일에도 프라이버시가 조금씩 스며들게 되어서... 감춰놓고 얘기하는 게 편하게 되었죠. 

 

오늘 받은 메일에는 드러내기 불편한 내용은 별로 없고, 이곳 손님들께 보여주고 싶은 내용은 많고 해서... 이 선생과 따로 의논 없이 올려놓습니다. 두어 줄만 가려 놓았습니다.

 

싱가포르 얘기를 이 선생이 건드렸는데... 제가 종북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글에서 싱가포르를 들먹였었죠. 세습에도 좋은 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해방일기 중 좌우합작을 살펴보면서 리콴유의 공산당에 대한 태도가 더러 생각에 떠오르기도 했죠. 그것도 한 번 써먹었으면 좋을 걸 그랬다.

 

"밖에서 본 중국사"는 얼마 전 이 선생이 권해준 작업입니다. "해방일기" 이후의 작업에 대해 지난 연말 이래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온 것이 모두 한국현대사 범위였기 때문에 중국사로 돌아가지는 않게 될 것 같다고 일단 대답은 했는데, 역시 제 입맛에 맞는 권유이긴 하죠. 완전 개인 취향의 중국통사로 몰고 가면서 "밖에서 본 중국사" 간판을 내걸 전망을 세울 수 있다면 매우 솔깃한 일거리입니다.

 

집중적 일거리로 "남북관계론" 생각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사 열전"은 집중적 일거리가 아니라 은퇴상태의 취미생활 모델로 생각하는 거죠. 언제까지 얼마만큼 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다른 할 일 없을 때 슬슬 하는... 뜨개질 같은 거죠. 그런데 이번 강연 원고로 정리하고 있는 "21세기 민족주의"의 이론적 바탕인 '탈근대론'을 남북관계 제반 현안에 적용시키면 우리 사회의 그 방향 시각을 넓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