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의 목적은 역사를 잘 보기 위한 것이고, 잘 보는 데는 넓게 보는 길과 깊게 보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넓게 보는 길을 좋아해서 지역과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문명의 흐름을 살피는 쪽으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요 몇 해 동안 한국근현대사에 바짝 매달려 문명사 쪽 공부를 덮어놓고 지냈습니다. 좀이 쑤시기는 하지만, “해방일기” 작업 하나 제대로 해놓은 뒤에 보자고 꾹 참고 지냈죠.

 

그러다가 지난 7월 광복회에서 중등교원 상대의 강연을 제안 받고, 오늘의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문명의 흐름에 대한 생각이 몇 해 전보다 탄탄해진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랐습니다.

 

어찌된 일일까 생각해 보니, 제가 해방공간의 복원에 매달려 문명의 흐름을 의식에 떠올리지 않고 있는 동안 의식의 밑바닥에서 생각은 자라나고 있었던 겁니다. 해방공간을 바라보는 제 시선 밑바닥에도 문명의 흐름에 대한 제 생각이 늘 깔려 있었던 거죠.

 

공부가 깊으면 폭을 필요로 하고, 공부가 넓으면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죠. 취향 때문에 깊이에서 뒤쳐졌던 제 공부가 “해방일기”를 계기로 폭과 깊이의 균형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방일기” 연재를 끝내는 인사로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자라 온 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 독자들께 올릴 생각을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교사로서, 또는 어버이로서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역할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정리했습니다.

 

 

 

 

여는 말: 오늘의 한 민족주의자가 겪어온 곡절

 

 

저는 제가 속한 사회를 다른 어떤 의미보다 ‘민족사회’로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민족주의자입니다.

 

제 부모님 두 분 다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가 붕어빵처럼 찍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저는 적지 않은 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에 대한 제 생각에도 부모님과는 다른 점이 꽤 있게 되었습니다.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제가 겪은 곡절은 어머니의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1세 젊은 나이에 스승처럼 모시던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혼자 손으로 키우게 된 어머니 마음에는 “얘들은 민족주의자로 키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자가 괴로움을 겪는 세상을 사셨고, 그런 세상이 쉬 바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요.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민족주의 같은 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연과학의 길을 권했습니다. 과학 쪽 재능을 과장하고 강조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심한 예로, 제가 어렸을 때 말배우기가 늦는 것을 걱정하시다가 어느 날 혼자 옹알거리는 것을 잘 들어보니 구구단을 외우고 있더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자라는 동안 계속 해주셨습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미국 가서 살기를 어머니는 바라셨습니다. 그때 노벨상 타령을 하신 것은 민족주의자로서 좌절감을 스스로 달래기 위해서였겠죠. 노벨상을 통해 민족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속셈인즉 험한 세상에 시달리지 말고 가급적 편안하게 사는 것이 첫째 중요한 일이고, 세상을 위해 좋은 일 하든지 말든지는 그 다음 일이었던 거죠.

 

형 하나는 그 뜻에 따라 서울공대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고, 그곳에 자리 잡아 미국 시민권을 얻고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미국정부 주변에서 과학 연구에 종사하며 아이들을 미국인으로 키웠습니다. 마음 착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주변에서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잘 살아 왔습니다.

 

저도 물리학과 입학하던 열여덟 나이에는 그 비슷한 길을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할 때 어머니 마음속에는 제 장래의 가능성에 대한 온갖 생각이 오갔을 텐데, 제게는 별로 복잡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막연히 키워온 학문의 자세를 실천하는 데 자연과학보다 인문학이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정도 생각뿐이었죠.

 

역사학도가 된 뒤에도 어려서부터 키워온 ‘과학자 마인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서양사보다 동양사, 동양사보다 한국사를 전공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동양이나 한국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내 위치에 따른 기술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역사학을 보편적 학술활동으로 생각하고 내 위치에서 내 몫을 한다는 식의 생각이었죠.

 

그런 자세가 그 후 3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공부를 무작정 넓히기만 하는 태도가 그 자세에서 나온 거였죠. 공부 내용을 저술로 풀어낼 생각도 없었습니다. 글쓰기보다 번역 쪽이 공부 넓히는 데 더 효과적인 작업이니까요.

 

그런데 나이 50대에 들어와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공부 넓히기가 무한정 계속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내 공부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추상적 ‘학자’ 아닌 구체적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 거죠. 10년 전 읽었던 아버지 일기에서 점점 강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사회를 대하던 자세에 비겨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제 자세를 반성해 보게 되었습니다.

 

2008년 봄에 낸 <밖에서 본 한국사>는 정체성에 매이지 않은 채 30여 년간 쌓아온 공부를 한 차례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민족사회에 대한 제 나름의 입장을 세우게 되었지만 민족에 대한 애착을 앞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편적 인류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저 자신을 인식하는 시각의 연장선 위에서 생각을 정리해 본 것인데,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통념보다는 민족사회의 의미를 중시할 필요를 인정한 것입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를 계기로 한국근현대사를 5년간 집중해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인류의 문제’로 생각해 온 것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살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민족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정체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책상 위에서 공부의 내용이던 민족주의가 현실 속에서 존재의 바탕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생각을 키워온 자취를 한 차례 더듬어봤습니다. 사해동포주의에 접근했던 제 생각이 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억지로 민족의 가치에 집착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폭력을 싫어하고 인간성의 순조로운 발현을 바라는 마음으로 더 좋은 세상을 바라보는 길을 찾다 보니 민족사회의 의미를 더 크게 볼 필요를 생각하게 된 것일 뿐입니다.

 

같은 사회 안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의해 생각의 방향과 폭에 상당한 압력과 제약을 받아 왔습니다. 앞 세대에 비해 민족사회의 의미를 작게 보게 된 것도 그 결과의 하나죠. 이제 제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민족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더 크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 차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민족주의 비판은 한민족의 실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약 20년 전 ‘세계화’란 말이 부각되면서 ‘국가’와 ‘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보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추세이며, 이에 저해되는 국가와 민족의 틀을 얼른 벗어나는 것이 이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죠.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양심적 지식인들 중에도 ‘탈민족’을 바람직한 진보를 위한 과제로 여기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 “발명된 전통” 같은 말이 유행했습니다. 1983년 출간된 두 권의 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와 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가 엮은 <전통의 발명The Invention of Tradition>입니다.

 

이들의 민족주의 비판은 중요한 담론입니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생각할 때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대상과 논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경우 폐단이 클 수 있습니다. 이들 서양 학자들의 비판이 서양 민족주의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민족’에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국가’라 할 만한 대형 정치조직은 봉건적 계약관계로 맺어진 것이어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과 별 관계가 없었죠. 한 왕실이 여러 언어 쓰는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것도, 같은 언어 쓰는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도 중세유럽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민족보다는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국민국가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서둘러 정비할 필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권력이 이 정비작업을 서둘러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에 비슷한 무리한 작업이 진행되었지요. 무리하게 빚어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 많은 갈등의 촉매가 되고 심지어 유태인 대학살 같은 비인도적 현상까지 일으키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주의 비판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여기에 비교해 보세요.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할 무렵 한반도에는 민족국가 고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민족국가가 천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튼튼한 민족국가를 누려온 민족입니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가 민족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15세기 초의 한글 창제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근대적 민족문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문자를 향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민족문화를 담는 민족 고유의 문자라는 점에서 민족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문화는 민족문화로서 뚜렷함과 단단함이 매우 뛰어난 문화입니다.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된 전통”이 아니고, 이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이고 실존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한민족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의 발명>에 다뤄진 메이지시대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오랜 전통인 신도(神道)가 국가신도로 변형되는 과정에 분명히 ‘발명’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도는 오래된 전통이지만 서양에게 배운 일본 ‘내셔널리즘’의 주축이 된 국가신도는 전통 신도와 크게 다른 것입니다. 메이지시대 이후 국가주의 형태로 표현되어 온 일본인의 민족의식에는 유럽인의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조작되거나 과장된 점이 있습니다.

 

한민족의 민족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민족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던 한민족의 민족의식이 일본 내셔널리즘의 침략에 자극받아 갑자기 강렬한 표현의 필요를 느끼면서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근대 내셔널리즘은 정상적 민족의식에 비해 현실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특성을 가지는데, 조선에서는 침략당하는 입장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 특성이 더욱 강했습니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쟁’ 지향성이었습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인근의 다른 민족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면 됐지, 꼭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로 볼 필요가 없었죠. 그런데 내셔널리스트는 다른 민족을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나 열등한 존재로 파악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우승열패’의 근대적 인간관이 민족의식에도 적용된 겁니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될 때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인식으로 ‘신민족주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945년 9월에 발표된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가 대표적인 논설이었죠. ‘경쟁’과 ‘정복’의 민족주의에서 ‘협력’과 ‘공존’의 민족주의로 나아간다는 지향성이 이 글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반도 남북에 독재정권이 자리 잡음에 따라 민족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이 다시 막혔습니다. 독재정권이 이용하기에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편리했고, 그 때문에 한국 민족주의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맞춰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민족주의에는 ‘상상의 공동체’나 ‘발명된 전통’으로 반성할 요소들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남북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정세의 변화 추세에 비추어볼 때 근대 내셔널리즘의 경쟁적-독선적 세계관을 벗어날 필요는 분명합니다. 이 측면이 1970년대 이후 많이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개인주의를 넘어설 필요가 있으며, 민족주의와 같은 ‘네트워크 속의 소속감’ 확충이 그를 위해 좋은 방도라는 점을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근대 내셔널리즘의 거품을 빼면서 자연스러운 수준의 민족주의를 살려내는 것을 진행 중인 세계적 변화 앞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보는 것입니다.

 

 

 

2. 개항기의 과제 ‘개화’는 부국강병형 근대화를 바라본 것이었다.

 

 

이제 백여 년 전 망국의 상황을 한 차례 돌아보겠습니다. 망국의 원인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쇄국정책 등 ‘개화’의 부진을 지목해 왔습니다. 개화, 즉 서양식 근대화가 당시의 절대적 과제였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서양식 근대화에 대한 반성이 1970년대 이후 서양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위에 소개한 앤더슨 등의 민족주의 비판도 그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이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이 있습니다. 근대유럽의 가치기준이 지나치게 위세를 떨쳐온 현상을 지적한 것인데, 이 가치기준이 침략 대상자의 의식 속에 내면화되는 ‘거울 속의 오리엔털리즘’ 현상까지 지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화를 절대적 과제로 생각해 온 것도 이 현상에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유럽의 근대화는 산업혁명을 주축으로 일어난 변화입니다. 산업혁명은 제조업의 급격한 발달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근대화’가 꼭 그런 식이어야만 하는 걸까요? ‘근대화’란 중세적 질서의 해체에 대응하는 변화입니다. 꼭 산업혁명 방식이 아니더라도 중세적 질서를 대치하는 새로운 질서의 형성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중기 이후의 조선에서도 자본주의 원리의 발달 현상이 일어났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어 왔는데, 조선뿐 아니라 유럽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지역에서도 자본주의적 현상이 많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자본주의체제’란 자본의 힘이 질서의 중심축 노릇을 맡는 체제입니다. 극단으로 갈 경우 신자유주의체제처럼 자본의 힘을 사회질서의 거의 유일한 근거로 여길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사회형태 안에서는 자본의 힘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여러 힘 중 하나로서 다른 힘들과 어울리는 관계를 통해 작용하게 됩니다.

 

산업혁명 후의 서양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져서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했습니다. 10-11세기의 중국이나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에서도 자본의 역할이 상당히 커진 일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근대자본주의처럼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역할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탈중세’의 의미를 가진 현상이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는 한 마디로 유동성의 증가입니다. 문명 발달은 인구 증가를 몰고 오는데,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회유동성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구조가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옮겨가는 거죠. 자본의 역할은 사회구조를 액체화하는 ‘용매’와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당나라를 무력국가, 송나라를 재정국가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 것은 10세기를 전후한 중국사회의 탈중세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고체의 액체화에도 여러 방식이 있는데, 1천 년 전 중국이나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뻑뻑한 반죽에 물을 조금씩 더 넣어 서서히 유동성을 늘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3백 년 전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앞세워 일어난 근대화는 훨씬 격렬한 변화였죠. 반죽에 물을 넣는 게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격이었습니다.

 

중세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옮겨가는 여러 방식 사이의 경쟁에서 유럽의 ‘산업혁명형 근대화’가 압도적 우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의 채택 여부에 따라 생산력과 군사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패망과 순종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산업혁명형 근대화가 근대화의 유일한 방법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고요.

 

개항기 조선의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여겨지는 ‘개화’도 이 산업혁명형 근대화를 말하는 겁니다. 일본은 개화에 성공해서 강국이 되었고 조선과 중국은 실패해서 침략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이 아직까지도 강고하게 남아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런 개화가 분명히 중요한 과제였지요. 그러나 시각을 더 넓혀본다면 개화의 성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아요. 제국주의 시절 일본 인민이 겪은 피해와 고통은 침략 대상인 조선과 중국 인민보다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의 경우,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이런 역설적 현상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에 있습니다. 유동성 극대화를 위해 개인을 파편화하고 그 사이의 경쟁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자본주의 원리에는 낭비적 속성이 있습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경쟁은 낭비를 일으키니까요. 기술 발달로 인해 자원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이런 낭비적 구조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한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의 큰 굴곡을 살피면서 백 년 전의 망국을 단순한 우발적 사고처럼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을사오적이니 뭐니 매국노 몇 놈에게 책임을 지울 일도 아니고 일본의 침략성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데,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서야 왕인들 왕 노릇 제대로 할 수 있고 신하인들 신하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길을 잘 찾아나가지 못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세기 초 망국의 장면에서만 한 차례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기 말 경제고속성장에 집착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난 몇 년간 20세기 한국사를 살펴보면서 들었습니다. 어느 한 시점에 국한해서 그 자세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보다 100년간 이어져 온 측면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