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지난 3년간 50회 가까이 선생님을 만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이 작업을 끝내면 그 동안처럼 자리 갖춰 선생님 모시는 일은 그만두겠지만 남겨주신 글을 통해 계속 배우겠습니다.

 

안재홍: “좋은 말씀”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3년 동안 어두워지기만 해 온 내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어떻게 “좋은 말씀”일 수 있겠습니까. 김 선생이 꾸준히 들어준 덕분에 답답한 심중을 스스로 한 차례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 고마운 일입니다.

 

김기협: 마지막으로 모시는 자리니까 지난 3년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간절한 염원이 늘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정부가 공포됨으로써 선생님의 염원이 이뤄진 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재홍: 사람의 일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 공부에서 제일 먼저 깨우쳐야 할 것이 역사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완성’이란 것이 있을 수 없어요. 이뤄지는 것과 이뤄지지 못하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로부터 흐름이 일어나는 거죠.

 

3년 전 일본의 패망을 맞을 때도 우리 민족사회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에는 역시 현실의 엄혹함에 대한 인식이 많이 마비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하는 것을 말조차 못하던 오랜 상황이 풀리는 그 순간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버렸던 거죠.

 

김기협: 그 당시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의 엄혹함을 그 동안 확인해 오면서 마음의 괴로움을 많이 겪으셨죠. 인식의 허점 중 어떤 것이 그중 심각한 것이었는가요?

 

안재홍: ‘해방’이란 것이 일본의 패망이라는 한 가지 조건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진정한 해방을 위한 조건이 안팎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외적인 문제부터 말하자면, 세계정세를 너무 몰랐어요. 카이로선언의 조선독립 약속이 어떤 뜻을 가진 건지 모른 채, 마치 불의의 시대가 가면 정의의 시대가 온다는, 무슨 유사종교 광신도 같은 믿음에 빠져 있었죠.

 

역사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런 믿음에 조금이라도 빠졌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 제국주의의 죄악이 너무나 극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인류 전체가 어느 정도 반성을 할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희망을 나도 갖고 있었습니다.

 

김기협: 연합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던 미국과 소련이 지금 서로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면, 지난 세계대전이 정의로운 연합국과 사악한 추축국 사이의 전쟁이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죠. 각자 자기네 국익을 추구하다가 추축국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는 연합했다가, 공동의 적이 사라진 뒤에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서로 싸우게 된 것일 뿐입니다.

 

세계대전의 성격을 그렇게 본다면 두 나라의 조선 점령도 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 거죠. 결국 전쟁 때까지는 일본의 국익을 위한 일본 지배를 받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의 국익을 위한 두 나라의 점령을 당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조선 점령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남조선의 미군정은 총독부의 지배를 물려받아 일방적 통치로 일관한 반면 소련은 조선인의 자치 노력을 지원해 주며 최대한 서둘러 통치권을 넘겨주었죠. 덕분에 북조선에는 남조선에 비해 민족주의자들이 마음을 붙일 만한 정권이 세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토지개혁과 민생 안정, 친일파 척결과 자주독립 등 여러 중요한 과제에서 이북이 앞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누구보다 믿고 좋아하는 홍명희 선생, 이극로 선생 같은 분들이 넘어간 것 아닙니까?

 

선생님은 북조선이 민족국가 건설의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소련과 미국의 점령 방식 차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안재홍: 이남에서 잘 되지 않는 일이 이북에서라도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합니다. 그리고 저만큼이라도 되어 가는 것을 반갑게 생각하는 일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문제가 있어요.

 

이북에서 여러 일이 잘 풀리는 가장 큰 원인이 통일전선, 즉 좌우합작의 성공에 있습니다. 김두봉 씨가 상징하는 민족주의 진영과 김일성 씨가 대표하는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협력이 원만하게 이뤄져 왔어요. 그런데 겉보기로는 원만하지만, 합작의 원칙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디까지, 너는 어디까지 양보한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지금 당장은 원만하게 보여도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거죠.

 

공산주의자들이 술수와 책략을 너무 좋아한다는 신간회 이래의 내 인상이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르죠. 일제의 모진 탄압 아래서의 지하운동 성향을 이제는 벗어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금년 들어 남북회담 과정을 봐도 그들의 책략지상주의는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홍명희, 이극로 선생 모두 이북 정부수립 앞에서 벌써 괴로운 입장에 빠져 있습니다.

 

소련과 미국의 점령 방식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소련이 자기 국익을 양보하는 착한 나라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한 것일 뿐이죠. 흔히 ‘미-소 대결’이라 하지만 힘의 차이가 압도적입니다. 미국이 택하는 노선에 소련은 소극적으로 대응할 뿐이죠. 조선에서도 미국은 자기 힘으로 남조선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반면, 소련은 북조선 확보에 국운을 걸 생각 없이, 조선인들에게 맡겨놓고 자기편에 붙어주면 좋겠다는 정도의 소극적 입장입니다.

 

김기협: 진정한 해방을 위한 조건이 안팎으로 부족하다고 하신 뒤에 외적 문제를 먼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내적 문제를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인간사회의 어떤 현상도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얽혀서 일어나는 거죠. 40년 전 조선 망국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결정적인 외적 요인이었죠. 당시 조선인이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내적 요인은 그에 가려져 충분히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식민통치의 피해로 쌀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하는 식의 물질적 피해를 먼저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구상하지 못하게 한 정신적 피해가 더 크다고 봅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과거를 반성해야 미래의 구상을 빚어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그런 노력을 철저히 틀어막았습니다.

 

3년 전 해방 때 조선사회가 미래에 대한 구상을 키워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그 결과였습니다. 40년 전 망국의 원인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고 있었고요. 나도 그제서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열심히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분단건국이라는 서글픈 결과에 이르기까지, 나쁜 뜻을 가진 자들이 너무 많았다는 문제보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너무 적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기협: 분단건국은 민족 구성원 대다수가 원하지 않는 길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민심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일단은 정부가 갈라져 세워지더라도 통일의 길을 앞으로 찾아 나갈 수 있을까요?

 

안재홍: “천도(天道)는 무심(無心)”하다는 말도 있어요. 인민이 원하는 일이라 해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노력이 있지 않으면 천도는 그저 무심할 뿐입니다. 인민의 염원이 실천으로 나타날 때라야 민심이 천심일 수 있는 겁니다.

 

미국과 소련의 힘은 과거의 일본보다도 강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진다면, 두 나라가 일본보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본처럼 악착스럽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과, 두 나라의 힘이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세를 잘 잡기만 하면 그 힘에 휘둘리는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단건국을 향해 걸어온 자세는 좋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의 힘으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였어요. 오히려 두 나라의 대결을 더 격화시키는 역할을 조선인이 맡아 왔다고까지 할 수 있어요. 정부 수립 절차의 완결로 소소한 문제들이 정리된 뒤에는 자세를 바짝 가다듬으며 지금까지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김기협: 민족사회의 득실을 앞세워 생각하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이 현실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이 이 사회의 자세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문제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주의자의 입장은 더욱 위축되지 않겠습니까? 이남의 경우 새 정부에서 반민족적 반동세력이 미군정 때보다도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정부 요인의 면면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시영 부통령 외에는 민족주의 지도자가 보이지 않아요. 김병로 대법원장이 민족주의자로 꼽을 만한 인물이지만 그보다 합리주의자의 면모가 더 큰 분이죠. 신익희 국회의장과 이범석 국무총리는 임정에 종사하기는 했어도 지도자보다 야심가로 평판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더구나 이승만 대통령이 이시영 부통령의 의견을 조각에 전혀 참고하지 않아 그 점잖은 분이 화가 나서 사임을 생각할 정도였다니...

 

안재홍: 고르고 골라 최악의 상황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주의가 악용될 위험까지 있어요. 인민의 통일 염원을 권력자들이 대결정책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떠오를 때부터 민족 간 내전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합쳐져 있어야 할 민족을 억지로 떼어놓았을 때, 그 합치려는 힘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전쟁 같은 형태로도 터져 나올 수 있는 거죠.

 

북쪽으로 간 분들은 그쪽 정부가 반민족적 노선으로 나가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이고, 남쪽에 남은 우리는 이쪽 정부의 반동성을 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쪽 사정도 만만치 않겠지만, 이쪽 사정이 참 난감해 보입니다.

 

민심이 정부에 비쳐지는 길이 너무 좁게 되어 버렸어요. 국회에서 무소속구락부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추진하는 등 민심 반영에 나서고 있지만, 그 범위가 너무 좁습니다. 인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바라는 일을 국회에서는 겨우 30퍼센트 의원들이 짊어지고 있으니... 남북협상에 나선 분들의 5-10선거 보이콧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선거의 정당성을 따지는 명분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민심을 힘껏 받드는 성심도 중요한 것인데.

 

김기협: 마지막 질문을 드리기 전에 가상인터뷰의 규칙을 어기는 한 가지 고백을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5년 후인 2013년 8월 15일까지도 민족통일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차례 전쟁으로 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고도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고, 분단건국의 배경인 미-소 대결이 해소된 뒤로도 남북 간의 단절은 20년 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관계의 돌파구로 겨우 만들어놓은 개성공단조차 폐쇄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분단건국이 앞으로 65년 이상 계속될 수 있으리라고 지금은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선생님은 역사를 공부한 분이니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분단의 시작을 목격한 입장에서 그 긴 분단을 겪은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안재홍: 65년...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이군요. 그 세월의 의미를 잠깐 마음속으로 더듬어 보겠습니다. (잠시 침묵)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이라면 1883년. 임오군란, 갑신정변 시절이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강산이 몇 번 변해 왔는데, 그와 같은 세월을 분단 상태로 지낸다니... (또 침묵)

 

65년 후의 세상에도 민족주의자들이 있겠죠. 통일이 안 되어 있다니 더더욱 마음이 뜨겁겠죠. 내가 65년 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면 다른 사람보다 그들에게나 건네야겠습니다.

 

마음을 누그러뜨릴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통일’을 열망하겠죠. 그보다 ‘통합’ 정도를 생각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65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닙니다. 그 세월을 필요한 만큼 존중해 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분단 상태에 익숙해져 있을 것 아닙니까? ‘통일’을 불편해 하는 그들을 버리거나 맞설 생각을 한다면 ‘분단’ 위에 ‘분열’까지 겹쳐질 겁니다.

 

한 차례 전쟁을 겪는다고 했지요. 조짐이 벌써 나타나고 있어요. 북쪽에서는 ‘국토 완정(完整)’을 말하기 시작했고, 이쪽 정부의 ‘남북통일’도 협상 아닌 무력에 의한 통일로 뉘앙스가 쏠리고 있습니다. 민족주의가 대결에 이용되는 거죠. “저쪽의 우리 동포들이 나쁜 정권 아래 신음하고 있으니 우리가 힘으로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단절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런 식의 민족주의 이용도 틀림없이 계속되고 있을 겁니다.

 

지금의 민족주의자도 식민지시대와는 다른 민족주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민족주의’ 얘기를 꺼낸 거죠. 제국주의시대 민족주의는 경쟁과 대결의 민족주의였고, 조선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상태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런 경향이 특히 심했습니다. 65년 후의 사람들은 민족 아끼는 마음을 우리보다는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민족주의로 풀어내기 바랍니다.

 

김기협: 네, 저도 ‘21세기의 민족주의’를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Posted by 문천

 

이승만 정부의 구성 내용에 대한 당시 언론의 비평 중 가장 치밀한 것이 7월 29일부터 8월 10일 사이에 우승규(1903~1985년)가 8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실은 논설이다. 7월 29일과 30일 “국무총리 임명과 조각에 붙여”란 부제를 붙인 “이 대통령에게 역이(逆耳)의 일언(一言)” 상-하편을 올렸고, 8월 1일, 3일, 4일에 “친일-역도-모리배 문제에 대하여”로 부제를 바꾼 “역이의 일언”을 3회 올렸다. 그리고 8월 7일, 8일, 10일에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를 3회 올렸다.

 

“이범석 내각의 해부”를 3회로 그칠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제4회분 원고를 써 냈고 조판까지 확인했는데, 당시 편집국장이던 그가 모르는 채로 그 글이 사라져버렸다. 대한민국 언론탄압 제1호로 보이는 이 일을 그는 27년 후 이렇게 회고했다.

 

“나절로 만필 <67> 등신 된 편집국장”

 

그처럼 나도 모르게 7회나 연재된 글이 8회째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둔갑을 하자, 나는 그것이 공보처 당국의 언론 탄압하는 시초임을 직감했다. 분통이 치받쳤다.

 

그때 K신문의 경영 주체는 모 종교단체. 아마 당국으로부터 그 기관으로 직접 내 글을 중단시키라는 지령이 내렸던 모양이다. 그러한 비밀 내용은 그날로 바로 드러났지만, 처음엔 그 교(敎)에서 자제하는 뜻으로 자율하는 게 아닌가 노엽게도 생각됐다.

 

앞서 말했듯이 편집국의 누구나 나를 국장으로 상대하지 않자, 나는 완전히 바지저고리가 돼버렸다. 로봇이란 이런 것일까. 이처럼 ‘등신 국장’ 노릇을 하면서 하루 이틀, 나는 여전히 매일 출근하면서 내 자리를 지켰다. 사(社)로부터 어떤 이유로 나가달라는 말이 떨어질 때까진 버텨보자는 속심이었다. 말하자면 ‘언론자유 수호의 양심적 반항’이다.

 

하루같이 사에 나가 빈 의자만 빙글빙글 돌리면서 국원들과 사 간부들의 태도만 살피고 눈치작전 하기 여러 날, 하루는 공보처로부터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신문 선배로 존경하던 K차장이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내깐엔 작전계획을 머릿속에 단단히 그리면서 K차장을 공보실로 찾았다. K씨는 직접 아무 말도 없이 K처장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했다. 그는 외관으론 단아한 선비요, 또 몸맵시가 신사풍의 ‘외래형’. 장차 무슨 소리가 나올까 하고 그의 입만 쳐다보기 몇 분 만에 K처장은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처장의 위신을 보이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수인사 하자마자 알 수 없는 편지쪽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거기엔 국무총리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내겐 펼쳐 보여주지 않았지만, 곁눈질해 보기엔 ‘K신문’이니 ‘나절로’니 등의 문자가 산견(散見)됐다. 묻잖아도 그 동안 내가 써내려온 “이 대통령에 역이의 일언”과 “이범석 내각의 해부”에 대한 어떤 조치를 담은 철기(鐵驥)의 친서임이 분명했다.

 

K처장은 단도직입적으로 “K신문에 여러 회 실어 오는 귀하의 글은 총리실로부터 ‘게재 억제’의 지시가 내렸으니 그런 줄 알라”는 단지 한 마디뿐. 마치 법정에서의 재판관의 준열한 선언 같은 형식이었다. 이런 판국에 나도 할 말은 해야 되겠다고, 어느 날치 신문의 어떤 부분이 ‘기휘’에 저촉됐느냐고 따지자, “그건 묻지 말라”고 어물쩍하지 않나. (...)

 

K처장에게 정필(停筆)(사실은 퇴사) 명령을 받고 나와서도 나는 전이나 다름없이 K사에 출근했다. 내깐엔 배짱이다. 내 등을 밀어 내몰기 전엔 죽어도 못 나간다는 침묵의 저항이었다. 이렇게 되자 K사의 입장은 딱해졌다. 내가 그 글을 씀으로써 신문의 인기는 올라갔다. 부수가 부쩍부쩍 올라갔다.

 

그러한 터에 감탄고토(甘呑苦吐)라니, 편집국장을 나가 달랄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직 집권자의 압력에 눌린 국무총리와 공보처장의 명령이니 내보내긴 해야 되겠는데 당자 되는 내가 끝내 태산부동(泰山不動)의 자세다. 병신 구실을 하면서도 외로우나마 제 자리에서 꼼짝달싹 떠날 체를 않으니 어쩌랴. (...) (<동아일보> 1975년 3월 21일)

 

글 속의 “K처장”이란 김동성 공보처장 얘긴데, “K차장”이란 누구일까. 당시 대통령공보비서관으로 있던 시인 김광섭(1905~1977년)일 것 같은데 두 살 연하의 김광섭을 “신문 선배”라 한 것은 어떤 연유인지 확실치 않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과 어릴 적 즐겨 읽던 <삼국지> 번역자를 이런 장면에서 마주치는 것은 참 뜻밖의 일이다.

 

우승규는 이 일련의 논설이 누린 인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961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 15주년 특집에 보낸 글 “대공(對共)투쟁의 기록”에서도 “내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의 경향은 그 부수가 매일 올라가서 8만5천부 대까지 나갔다는 지나간 날의 기록”을 말했다. 온건하면서도 예리한 해학을 담은 그의 글이 당시 허용되던 범위의 논설 중에서는 발군의 인기를 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 우호적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았지만.

 

우승규는 분명한 반공의 입장에서 5-10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그런 입장에서조차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제라면 변명하기 힘든 문제라 할 것이다. 이승만의 1인 독재 경향이 우승규의 글에서는 벌써 분명히 지적되고 있었다. 친미파를 친일파와 같은 ‘반역자’의 범주에 넣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 저 민족의 공적(公敵) 되는 친일도당은 지방 정계 이 귀퉁이 저 귀퉁이에 숨어 우국지사니 혁명가니 하는 허울 좋은 위장을 하고 지도자연 오만방자 추썩들 대고 있습니다. 저들은 합하 문전을 찾고 합하의 안전(眼前)에 나타나 가진 요사를 피우는 것입니다. 도생(圖生)을 비는 것도 오히려 대담하거늘 환로(宦路)를 얻으려고까지 온갖 농간을 부리는 데는 가증가오(可憎可惡) 분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언필칭 “자기가 합하와 제일 접근하는 사이며 또 합하의 두터운 권애(眷愛)와 신임을 받는다”고 호언들을 하면서 그것을 미끼로 대중을 농락하여 울거먹고 있습니다. 합하께서는 어인력(御人力)과 포용성이 원체 크고 넓으신 지라 웬만한 데는 유념도 않으시고 치지도외하실지 모르나 그것이 큰일입니다. 합하께서는 좀 더 작은 데 큰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호환(虎患)도 무서우려니와 그보다도 서질(鼠疾)을 더욱 조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지대(地臺)를 아무리 굳게 닦고 지은 누각이라도 ‘나나니’ 같은 미충(微虫)의 힘으로 족히 도괴될 수 있다는 가장 범속한 진리를 잘 파악하셔야만 될 것입니다.

 

친일파라면 왜적에 붙어서 왜적을 위해서 진충갈력한 무리들을 일컬음이요, 민족반역자라면 그것보다도 테두리가 커서 외세에 아부하여 동포를 팔고 민족을 해쳐서 외인에게 이익을 준, 그야말로 나라의 역적을 범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엄지손가락에 친일파가 꼽힐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속엔 친X파도 친X파도 모두 끼어들어가야 될 것입니다.

 

이렇듯 친일파와 반역자를 분간해서 볼 때 반역배 수는 해방 전과 해방 후가 거진 비등비등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들의 처단의 한 때가 바쁘게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일 “이 대통령에게 역이의 일언 1”)

 

이 글에도 이승만의 “어인력과 포용성”을 칭송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그의 논설에는 거의 ‘아첨’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다. 수십 년 후의 회고를 보더라도 그런 칭송은 ‘반어법’이 아니었다. 우승규는 이승만이 표방해 온 노선을 진심으로 지지하며 그 성공을 빌고 있었다.

 

합하, 여기서 필자가 친일 반역 도배 처단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은 저 좌익계열이 덮어놓고 합하를 비난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저의는 추호도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북한 측과 및 그쪽에 기맥을 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합하를 유실무실 간에 악폄하고 중상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합하는 친일 반역배의 아유구용(阿諛苟容)에 현혹되시고 교언영색에 실총(失聰)하신다는 것입니다.

 

합하를 존경하는 필자는 이것을 굳게 부정합니다. 도리어 저들의 혹평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하는 어느 정도까지 이 점에 마음의 무장을 하셔야 될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합하의 문전엔 적지 않은 불순분자들이 자천타천으로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있다면 야(野)에 계신 과거보다 조(朝)에 계신 현재나 미래가 우심할 것입니다. (...)

 

이같이 함으로써만 해방 4년간에 해이해진 기강 퇴폐된 민심을 돌이켜 바로잡으실 수 있을 것이요, 또 저 공산계열의 합하를 주상(呪傷)하는 소리와 북한 측에서 언제나 “친일 반역배의 도피 소굴”이라고 남한을 조롱하는 따위의 누명을 깨끗이 씻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남한의 이 약점을 가지고 적화공작의 한 큰 선전 자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적마다 우리는 현실을 뚫어지게 보고 자기성찰을 한 나머지 얼마쯤 얼굴이 붉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군정 아래 있다지만 이다지도 소소(昭昭)한 천일(天日) 아래 그 같은 도배가 거리낌 없이 호세(豪勢)를 뽐낼 수 있을까 상도(想到)할 때 천도가 무심함을 다시금 개탄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경향신문> 1948년 8월 3일 “이 대통령에게 역이의 일언 2”)

 

독촉을 비롯한 이승만 지지세력 중에 우승규와 같은 입장이 상당히 있었을 것 같다. 미국이 남조선의 진로를 장악한 현실 위에서 이승만처럼 독립운동가로서 명망도 갖고 미국 사정도 잘 아는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 민족사회의 진로를 위해 순탄한 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리적 민족주의자가 가질 수 있었다. 이승만에 비해 김구는 독단적이고 편협하다는 인상을 준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좌익은 음모를 좋아하는 성향을 많이 보여 왔으며, 중간파는 좌익의 음모에 놀아나는 허약한 존재로 우승규 같은 사람들 눈에는 보일 수 있었다.

 

이승만 지지세력 중 ‘청류(淸流)’라 할 수 있는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정부수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을 현 단계에서 불가피한 ‘권도(權道)’로 이해하려 애썼다. 좌익의 교란을 물리치고 정부 수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찰과 반동세력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제 정부가 세워져 ‘본색’을 드러낼 수 있게 된 단계에서 이승만이 드러낸 ‘본색’을 보고 납득할 수 없었다. 이승만의 주변 사람들보다 자신이 이승만에게 더 충성스럽다고 생각한 우승규 같은 사람은 붓을 빼앗겨야 했다.

 

“이범석 내각의 해부” 제1회에서 우승규는 이범석 총리를 다루고 제2회에서 윤치영 내무와 장택상 외무를 다뤘다. 제3회에서는 국방장관으로서 이범석을 다시 다뤘고, 지면에 오르지 못한 제4회에서는 임영신 상공을 다뤘다고 한다. 이범석에 대해서는 국방장관으로는 적격이지만 국무총리로서는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승규가 이범석 외의 인물로 윤치영, 장택상, 임영신을 제일 먼저 다룬 것은 가장 물의가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발표된 글에서도(<경향신문> 1948년 8월 8일) 윤치영과 장택상을 거칠게 공격하지 않았다. 윤치영에 대해 “씨는 매우 사물에 밝고 처세술에 능하다 한다”며 이승만의 권총(眷寵)으로 발탁된 모양이라며 “극도로 혼탁하고 문란해진 이 나라의 기율과 질서를 바로잡아 놓을 치안의 총책임자로서의 윤씨”는 커다란 의문부 속에 잠겨있다는 정도 표현으로 비판했다. 장택상에 대해서는 노리던 내무장관 자리를 잃은 것이 “평일의 인기는 높아도 덕망이 적은 때문”이 아닌가 하며 외무장관으로서는 “일국 외교의 담당자로까지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쾌답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했다.

 

우승규는 꽤 점잖은 말로 문제를 살짝 지적했지만 윤치영과 장택상은 비열한 인품으로 악명이 높던 사람들이었다. 임영신은 직함에 관계없이 이승만의 비서로 이미지가 굳어진 사람이었고 좋지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성 입각’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의미가 잘 부각되지 못했다. 이들은 능력과 적성 이전에 인품 수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초대 내각 입각을 여론이 개탄했던 것이다.

 

초대 장관 중 개별적으로는 상당한 기대를 모은 인물도 있었다. 예컨대 안호상 문교장관은 학계와 교육계에서만 활동해 온 인물이기 때문에 참신한 문교정책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한노총을 이끌어 온 전진한 사회장관도 나름대로 노동 전문가로서 역량을 인정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기대를 모은 인물은 단연 조봉암 농림장관이었다. 8월 6일자 <경향신문> “새 정부에 보내는 말” 중 대한농총 이평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봉암 농림부장관 취임을 환영한다. 그것은 그분의 과거 경력으로 보아 능히 혁명적으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도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토지개혁에 대한 주장은 변함이 없이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요구하나 과정 중앙토지행정처의 입안인 현물세 2할 15년 연부에는 반대하며 우리는 현물세 2할5부로 5년 연부제를 요구한다.”

 

같은 기사 안에서 상공회의소 전용순 회두가 임영신 상공에 대해 “이 방면에 전혀 경험이 없는 분이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게 된 데 대해서는 우리는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러한 국사다난한 시절에 그런 분을 우리의 장관으로 모시게 된 것은 그분들은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는지 몰라도 참으로 의외의 일”이라고 푸념한 것과 대조된다.

 

토지개혁은 ‘건국 주도세력’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회피할 수도 없는 과제였다.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민생 안정, 남북통일, 친일파 척결과 함께 꼽히는 것이 토지개혁이었고, 조봉암은 그 과제에 적합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불과 반 년 만에 장관직을 떠나게 되지만, 그 사이에 토지개혁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1950년 전쟁 발발 직전에 시행된 토지개혁의 한계와 문제점이 많이 지적되어 왔으나 그 정도 개혁을 이승만 정권처럼 비개혁적인 정권에서 시행했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농림부장관으로서 조봉암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1948년 9월 14일 국회에 제출된 양곡매입법안은 정부수립 후 가장 큰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책이었다. 아무리 엉터리 정부라도 우리 정부가 미군정보다 못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이었다.

 

“공출제도 드디어 폐지 - 농민의 원성도 종차(從此)로 해소”

 

종래 일본 제국주의 착취의 발악인 미곡 공출제도가 해방 후 3년간 군정 아래 그대로 계속되었었는데 이번에 새 정부를 수립함을 계기로 이 공출제도를 그대로 계속하느냐 폐지하느냐 하는 문제로 사회에 큰 화제를 던져주고 있던 바 새 농림장관으로 취임한 조봉암 씨는 소비자 생산자 학계 등 각 방면의 의견을 듣는 한편 신중히 이 문제를 검토한 결과 공출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고 별항과 같은 양곡매입법안을 작성하여 14일 국회에 회부하였는데 이것이 통과되면 과거 10년 동안 계속되던 강제공출제도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번에 정부에서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의 정신은 종래 실시하였던 일정한 수량을 할당하여 어느 날까지 내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아가는 것과 같은 공출제도를 전폐하고 농민으로 하여금 자유로 언제든지 팔고 싶으면 팔도록 하며 값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정부에 팔게 하며 소비자도 암취인 안하고 배급쌀만 가지고 넉넉히 먹고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에서 사들이는 값은 벼 일등미 한 가마에 1천2백 원에 보상물자까지 배급할 것이라고 하며 소비자는 3홉까지는 배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15일)

 

 

Posted by 문천

 

8월 4일 이승만이 비운 국회의장 자리에 신익희가, 신익희가 비운 부의장 자리에 김약수가 선출되었다. 8월 5일에는 대법원장 김병로의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0일 정-부통령 선거와 8월 2일 이범석 국무총리 인준안의 통과에 이어 새 정부 3부의 수뇌부가 모두 짜여진 것이다.

 

정부 조직의 큰 틀이 짜인 뒤 국회가 첫 번째로 착수한 과제가 친일파 문제였다. 8월 5일 제40차 본회의는 민족반역자 등을 처단할 특별법안 기초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했다. 헌법 제101조 실행을 위한 첫 조치였다. 각도에서 3인씩(제주도는 1인) 뽑아 28인으로 기초특위를 만들었고, 8월 6일 첫 회의에서 김상돈과 김웅진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7일 “친일-반역자 처단의 날은 온다 - 특위 28명 선정”)

 

8월 6일 이후 12인 소위원회가 6인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검토하여 8월 12일 특위 전체회의에 보고했다. 친일파 처단 문제는 그 실행이 미군정에 가로막혀 있을 뿐 민족사회의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걸려 있던 것이기 때문에 법안 작성을 위한 준비는 실제로 다 되어 있는 셈이었다.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통과시켰으나 미군정에 묵살당한 “부일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 법안이 일차적 기준으로 고려되었다.

 

“직위 여하를 불문, 반민족행위 처벌 - 친일 반역 도배 처단 법안 내용”

 

국회 특별위원회에서는 12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법안의 최후적인 토의를 하였다.

 

동 법안 기초에 있어서는 그간 재경 위원들은 수차에 걸쳐 회합 토의한 결과 전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 통과를 본 그 안을 수정하여 채택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으나 12일에 개최된 전체회의에서 다시 토의한 결과 동 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인 고병국 의원의 초안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채택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런데 동 법안은 전문 13조로 되어 있으며 부칙으로 특별조사위원회 및 특별재판소를 설치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처벌의 종류로는 징역, 공직추방, 재산몰수, 공민권 박탈, 벌금형 등으로 구별되어 있으며 과거 입의 안과 같이 직위 도는 지위에 중점을 두지 아니하고 직위나 지위의 상하를 불문하고 반민족적 행동을 감행한 자는 전부 처벌하기로 되어 있는데 동 안은 내 16일부터 속개되는 국회 본회의에 정식 상정하여 토의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3일)

 

기초특위에서 8월 13일까지 확정한 본회의 제출용 초안은 3장 32조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6일) 원래의 초안에서는 부칙에 들어가 있던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소에 관한 내용이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와 제3장 “특별재판부 구성 및 수속”으로 확충된 것이다. 본회의에서는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 9월 7일 통과시키게 된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처단 기준에서는 관대한 편이라는 세평이었지만,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 등 강력한 실행수단을 확보했다는 데 두드러진 성취가 있었다. 반민특위가 정권의 심한 비협조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업적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실행수단이 법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법치를 정면으로 뒤집는 조치를 거듭 취해야 했다.

 

해방 3년 만에 제정된 반민법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친일파 처단은 두 개 차원에서 의미를 가진 과제였다. 나쁜 행위를 응징한다는 정의 차원과 식민통치체제를 청산한다는 정치 차원이다. 정의 차원의 처벌은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저촉될 수 있다. 행위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법률로 처벌할 필요는 정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와 도쿄 등지의 전범재판에서 소급처벌의 정치적 필요가 확인되어 있었다. 법학자가 이 필요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필요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규모로 일어나는 범죄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제정하는 법률이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선에도 친일파 처단을 위한 정치적 필요가 컸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빚어놓은 엄청난 규모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소-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정법 차원을 넘어서는 혁명적 조치가 필요했다. 외세에 의지해서 민족사회를 해치는 행위가 당시의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실정법 체계라는 것이 일본에게 강요당한 것이며, 민족사회의 기준으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친일행위를 통해 구축해 놓은 재산-학력-경력에 견제를 가할 실제적 필요가 있었다. 아무런 견제 없이 자유경쟁을 펼칠 경우 친일파 집단은 조선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어 있었다. 친일을 통해 확보한 우위를 이 집단이 그대로 유지한다면 친일의 정신이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 집단 구성원들이 갖춘 ‘실력’은 활용하더라도, 그 집단이 똘똘 뭉쳐 하나의 이익집단으로서 활보하게 놓아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식민지배에서 정말로 벗어나려면.

 

당시의 일반인에게는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한 과제였다. 지금까지 겪어 온 식민지배라는 ‘나쁜 시대’를 벗어나 민족독립이라는 ‘좋은 시대’를 맞으려면 나쁜 시대에 대한 나쁜 놈들의 책임을 따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엄격하고 너그러운 것은 둘째 문제였다. 따질 것 따진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인 섬기며 민족사회를 괴롭히던 자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계속해서 거들먹거린다면 ‘해방’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군정 당국자들은 조선인을 해방된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인 대신 자기네들이 조선인을 지배하러 와 있는 것이었다. 일본인 잘 섬기던 자들은 자기네 섬기는 데도 솜씨가 좋았다. 그래서 3년간 친일파 처단을 극력 가로막았다. 일본제국주의 추종자에 대한 처단이 세상에서 제일 철저하게 가로막혀 있던 곳이 남조선이었다.

 

1946년 말에 개원한 입법의원에는 미군정의 지원과 보호를 받는 친일파 집단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입법의원에서도 “부일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민심의 압력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세력 주류가 외면한 제헌국회도 친일파 처단을 향한 민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구성이었다. 그러나 민심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민법 제정을 첫 번째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반민법을 서명하지 않고 국회에 돌려보낼 기색을 보이다가 9월 22일에야 서명하고 공포했다. 그에 앞서 9월 14일 전 공무원을 중앙청광장에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승만의 훈시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내가 1945년 10월에 귀국하자 각 방면으로부터 제일 먼저 제시된 것이 이(친일파 숙청) 문제였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이런 문제는 외정 하에서는 해결키 곤란한 문제이니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에 우리끼리 해결짓자고 말하여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일반은 이제 우리 정부가 섰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여론이 또 다시 있는 듯하나 친일분자 처벌 문제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으니 그 문제를 해결 후에 하는 것이 좋을 줄 안다. 급한 문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토대를 든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은 참은 김에 좀 더 참아주어야 하겠다.” (<동아일보> 1948년 9월 15일)

 

“토대를 든든히” 한다는 것이 ‘반공’을 완성한다는 뜻일 텐데,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놓으면 든든한 토대에 안심하고 친일파 처단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시작해서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가 결국 할머니까지 잡아먹었다는 호랑이가 생각난다.

 

김구가 반탁운동에 집착한 것이 민족주의자로서 큰 실수였다는 의견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만큼 두드러진 일이 아니지만 민족주의자로서 김구의 자격을 더 깊이 의심케 하는 발언이 있었다. 귀국 직후 기자회견에서 문답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문: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줄 안다.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A+B = B+A. 수학에서 교환의 법칙이라 하던가? 수학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인간사회와 같은 복잡계에서는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의 법칙에 밀리게 되어 있다. 정부수립 과정에 친일파의 참여를 허용하느냐 여부는 수립된 정부가 친일파 처단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크게 좌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 태두로서 권위가 쌩쌩하던 김구가 이렇게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친일파 척결이 좌익의 구호처럼 되어 버렸다.

 

이승만이 도덕성은 형편없지만 정치 감각만은 뛰어난 대중정치가로 평판을 누린다. 그런데 정부수립 시점에서 친일파 처단을 바라는 민심에 편승하지 않은 것은 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지금까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장택상 계열의 악질 경찰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박살내는 대신 마음에 없는 민족주의 깃발이라도 열심히 휘둘렀다면 최대의 경쟁세력인 한민당을 가볍게 누르고 최고권력자의 위치를 더 편안하게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승만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정치 감각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후 12년간 그의 정치적 선택을 보면 도덕적 기준만이 아니라 실용적 기준에서도 납득할 만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12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미국에게 다른 대안이 없어서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