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김동성 공보처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 두 가지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정부가 8월 5일에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8월 6일 남조선주둔 미국사령관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에게 정식 통고하였다는 것이다. 하지중장에게는 8월 15일을 기하여 행정권 이양을 개시할 것을 요청하고 유엔조위에 대하여는 1947년 11월 14일부 유엔총회 결의에 의거하여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경향신문> 1948년 08월 10일 “미 주둔군사령관에게 각 행정기구 접수 준비 교섭 요구”)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정부로 이양될 일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 핵심이 경찰이었다. 미군정도 경찰력으로 지탱해 왔고, 대한민국정부도 다른 무엇보다 경찰력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8월 7일 대한민국 내무장관 윤치영과 과도정부 경무부장 조병옥이 공동담화를 발표한 것도 경찰권 이양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군정 이양을 계기로 하여 경찰권의 이양에 따르는,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조직법에 의한 경찰행정의 이속 및 경찰의 재편 문제가 박두한 사실 및 정부수립 직후의 치안유지의 완벽을 기할 필요성에 비추어 경찰권 이양 및 재편에 관한 경무부의 헌책을 내무부의 자료로 남조선 과도정부 경무부장 조병옥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게 제출하기로 공식으로 요청하였던바 이 대통령은 자기 자신, 내무부장관 윤치영 및 법무부장관 이인 양씨를 위원으로 하여 경무부장 및 경무부차장과 6일 오후3시 대통령실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경무부 개편안을 심사한바 대체로 경무부안을 채택하기로 동의하였으므로 앞으로 경찰의 기구 및 인사문제에 있어서 급격한 변동이 없어야 할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결론은 내무부장관 및 경무부장의 공동담화로써 발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8일 “급격한 변동 없다 - 경찰권 이양에 경무부안을 기초”)

 

조병옥이 아직도 칼자루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경찰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떻게 운영할지 미군정 경무부장이 대한민국정부에게 합의를 요구했고, 대통령 이하 대한민국 측은 이에 응해 내무부장관이 공동담화에 나섰다. 무엇이든지 제 맘대로 하고 싶은 이승만이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3년 가까이 경찰을 키우며 장악해 온 조병옥은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민심의 이반과 중간파의 공격 등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사령관은 자기를 버리지 못했다. 모든 권력과 함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하지도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힘도 없는 이승만이 어떻게 자신에게 경찰을 맡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안으로 삼을 유일한 인물 장택상까지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서 도저히 등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윤치영이 내무부장관을 맡아 경찰을 넘겨달라고 나섰다. 조병옥은 그런 똘마니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이승만에게 요구를 제출했고 이승만은 그에 응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조병옥을 요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요리방법 중 하나는 조병옥의 대항마인 장택상을 지키고 키워주는 것이었다. 장택상을 내무부장관으로 차마 발탁하지는 못했지만, 슬쩍 외무부장관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장택상의 심복들도 풀어주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인 해적단을 빨갱이를 죽인 것이니 용서한다고 석방하고 압수 물품을 팔아 썼으며 홍삼 밀조범을 잡고도 물건과 현금만 압수하고 석방하고 생고무 사정가격을 위반한 상인을 협박하여 금품을 받고는 석방한 등등의 혐의로 중부서 이구범 서장 현을성 형사주임 외 2명의 경관이 지난 7월 23일 불구속으로 수사국에서 송청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나 9일 서울지방검찰청에서는 전기 이구범 서장을 불기소하고 현을성 형사주임 외 2명을 기소유예 처분에 붙이기로 결정 하였다는 바, 담당 검찰관인 이원희 검찰관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구범 서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본다는 것이며 현을성 형사주임 외 2명은 사실은 있으나 이미 현직에서 물러났을 뿐더러 편취했던 금전을 반환하였으며 또 국립경찰의 공로자인 까닭에 관대히 처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특히 서장에 관한 살인범 은닉 혐의사건에 대하여서는 상사의 명령에 의한 것이니 본인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 검찰청의 견해이며 상사는 누구냐 하는데 대해서는 답변을 피하고 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1일)

 

이구범은 7월 15일에 독직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 정도 혐의로 수도청장 장택상의 심복 부하가 체포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 노덕술, 최운하 등이 고문치사 사건으로 걸려들면서 장택상에 대한 조병옥의 공격이라는 사실을 세인들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구범을 풀어주는 데서 고문치사 사건도 장차 어떻게 처리될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은 장택상 비호에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들의 수사에 앞장섰던 경무부 수사국의 조병설 국장과 이만종 부국장이 8월 10일 사표를 제출했다. 그 사표에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민족 전체의 시대적 요청 아래 책임을 완수하고자 시간과 정력과 정렬을 경주하여 최대한도의 노력은 하였으나 완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선량한 국민의 기대에 어그러졌음에 자책의 감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금번 조각의 인물구성을 일별하고 우리의 양심을 살리기에는 너무나 환경과 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사임을 결의하였다. 실례를 들면 전일 수사국에서 적발한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에 있어 군정의 책임자도 아닌 신정부의 일원이 불필요한 간섭과 제약을 가함으로서 사건 취급상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는 전례에 비추어 직접 권한이 없는 군정에도 간섭함으로서 부패분자의 구명운동에 동분서주하였거든 하물며 자기 권한 하에 있는 신정부에 있어서는 가히 추측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까닭이다. 또한 당해사건의 최고 책임자의 1인이 각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앞으로 정의감을 살려서 정열과 양심을 발휘하기에는 객관적 제약성이 강압할 것을 자각한 나머지 금일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한 바이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1일)

 

“군정의 책임자도 아닌 신정부의 일원”이란 윤치영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아직 미군정 산하에 있는 경찰에 저렇게 막 달려드는데, 내무부 밑으로 들어가면 어떤 꼴을 볼지 안 겪어도 훤하다는 얘기다. “당해사건의 최고 책임자의 1인”이란 물론 장택상 얘기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표를 내고 이렇게 나온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수도청을 뒤집어놓은 것이 조병옥의 지지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윤치영이 간섭하고 나서고 이구범이 풀려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조병옥과 함께 항전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사표를 낸단 말인가?

 

바로 이튿날 두 사람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조병옥이 발표한 담화를 보면 완전히 꼬리를 내린 것 같다. 두 사람이 “새 정부의 위신을 손상”한 것이 마땅히 처벌할 일이지만 그 동안의 공적에 비추어 처벌만 보류하고 사표를 수리하였으며 이에 대해 대통령에게 ‘진사’를 했다는 것이다.

 

“수사국장 조병설 부국장 이만종 양인은 작일 오전 본관에게 사표를 수교하였으나 군정이양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 복무하기를 요청하였고 또 본인들도 쾌락하였던 것인데 그 발표 내용이 경찰관의 신분으로 대한민국 각료를 비난하고 새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함에 이르렀으므로 경찰복무규정에 의거하여 처단할 것이나 그 공적에 비추어 처벌만은 보류하였으나 사표는 수리하였다. 그리고 각료 비난에 대해서는 이 대통령에게 정통한 진사를 하였으며 일반 경찰관에게 경고하노니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정국에 비난을 가하거나 신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하는 언동을 하는 자는 엄중처단 할 것이다.”(<조선일보> 1948년 08월 12일)

 

조병설과 이만종은 사표에 적은 사유를 마치 담화문처럼 언론에 발표했던 것이다. 자기네 입장을 조병옥이 지켜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표 내기 전에 당연히 조병옥에게 윤치영과 장택상에 맞서 싸우기를 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병옥이 호응하지 않으니까 사표를 낸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이 대통령의 구미 방면 특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이 같은 날 전해졌다. 이승만은 윤치영을 통해 경찰을 장악하는 동안 조병옥을 국외에 내보내놓기로 한 것이다. ‘특사’ 자격은 타협일 것이다.

 

“구미 특사 지명은 모호 - 국의 보선 출마도 미지(未知)”

 

이승만 대통령의 구미특사로 지명된 조병옥은 11일 기자단과 회견하고 그 소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특사로 지명은 받았다. 그러나 출발은 아직 미정이다. 그 이유는 정국의 추이와 나를 대통령이 특사로 지명한 연유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15일경에 출발한다는 것도 준비상 곤란한 일이다. 또 항간에는 내가 국회의원 보선에 시내 모구(某區)에서 출마하리라는 말도 있으나 이것은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고 본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2일)

 

“시내 모구”라 함은 이승만이 비운 동대문갑을 말하는 것이다. 조병옥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얘기가 다 나왔던 모양이다. 8월 15일경 출국설까지 나왔다니 얼른 내보내려고 마음이 바빴나 보다. 위 기사에 인용된 말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보이지만 이 시점에서 특사로 나가 미국 고위층과 안면 틀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야심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 조병옥은 결국 9월 9일에 특사만이 아니라 ‘유엔대표단 고문’의 직함까지 쥐고 출국한다.

 

이렇게 조병옥을 설득해 놓고도 경찰 인수인계가 순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8월 2일자 일기에 이미 적은 대로다. 조병옥이 인수인계를 서둘러주지 않는다고 조병옥을 민족반역자로 체포해야 한다는 주장을 윤치영이 공개 장소에서도 하고 국무회의에서도 했다는 것이다. 조병옥은 8월 30일 윤치영을 비판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윤치영은 9월 6일 국회에서 이 문제를 추궁받자 거짓으로 대답했다가 기자들에게 망신까지 당했다.

 

8월 15일자 <서울신문>에는 과도정부 요인들이 지금까지 맡아 온 역할을 회고하고 새 정부에 당부하는 말을 모아 실었다. 그중 조병옥의 새 정부에 대한 당부는 이런 것이었다.

 

“신정부에 부탁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대한민국의 일부 영토가 상실된 채 또는 천만에 가까운 동포가 총선거에 참가치 못한 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함은 결국 현하 국제적 정세에 제약되어 남북통일을 바랄 수 없는 비참한 민족적 운명에 직면한 조선민족이 남북통일을 꾀하고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려는 초비상적 대치인 것을 인식하여야 된다. 이 조치의 결실은 안으로 국력을 육성하고 밖으로 국제여론을 환기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국제적 요소를 대한의 정의 앞에 굴복시키는데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신정부는 반드시 강력한 정부라야 한다. 정부의 수립과 북한공산계열의 음모에 기한 소위 8·25 총선거를 계기로 하여 남조선의 치안은 극도로 우려되는 바이다. 요컨대 현 정부는 태평천하의 정부가 아니다 남조선의 사태는 정상적이 아닌 것을 철저히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정부는 강력한 경찰 제도를 당분간 유지하는 데 착안하기를 바란다. 중앙집권제의 현 국립경찰 제도를 인계함에 있어서 그 조직 그 인사에 있어서 격변함이 없는 경찰행정을 바란다.”

 

대한민국정부가 “초비상적 대치”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전제로 이 “정상적이 아닌” 사태 앞에서는 “강력한 경찰 제도를 당분간 유지”하기 바란다고 했다. 무엇보다 국가경찰 제도의 유지를 조병옥은 주장했다. 자신이 당장 내무부장관을 맡지 않는다 해도 경찰이 지금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으면 그만큼 자신의 영향력은 유지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없었던 국가경찰 제도는 미군정 하의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드는 핵심 조건이었다. 정부수립 후에도 국가경찰 제도가 지켜져야 한다는 조병옥의 주장에 얼마만큼의 타당성이 있었을까? 1947년 가을까지 경무부 차장으로 있다가 그 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최경진은 조병옥과 가장 가까이서 일한 사람이다. 1948년 8월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의견은 조병옥과 영 다르다.

 

“제일 먼저 경찰의 지도이념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여야 한다. 해방 후 혼돈된 사회를 정리하겠다는 것은 그 공은 매우 큰 것이었으나 ‘치안 치안’하는 구호로 인권을 유린하여 가면서도 치안 지상주의로 나가 권력의 무제한의 감을 일반에게 주고 있는데 경찰 권력은 국가 권위의 표현이니 민중을 위한 치안이 되어야 할 것으로 민중의 공복이란 뚜렷한 지도이념을 내세워 치안과 인권옹호가 평행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조직의 재편성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치안군의 역할까지 하여온 경찰은 강력하고 또 단일조직이 필요해서 국립경찰이란 경찰국가를 만들었으나 앞으로는 일반 행정권이 각 도에 위양되는 것과 같이 경찰시정도 각 도로 위양되어 지방자치제를 실행하는 것이 민주경찰로 전환하는데 절대 필요하다. 그리고 경무총감부나 감찰서를 폐지하고 그 반면 수도는 치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특별한 기구가 필요하다.

 

셋째는 인적 재편성인데 경찰의 공로는 위대한 것이 있었으나 지식수준이 얕으니 간부부터 순경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도이념 아래 재훈련할 것이 필요하다. 특히 간부 등용에 있어서는 교양과 덕망이 높은 인물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모당(某黨)의 배경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하여 이 기회에 용퇴하기 바라며 전직 경관도 역시 그러하다. 끝으로 권력에다가 총칼까지 겸하였으니 이를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생활 안정이 있어야 할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8월 16일자 <국제신문>의 한 기사에는 3년간 수도경찰청의 검거 실적이 소개되어 있다. 장택상 지지자들이 그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홍보작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검거 실적의 분류를 보며 미군정기 경찰의 역할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지긋지긋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이루어진 일제의 경찰제도가 만 3년 전 8·15를 분수령으로 허물어져간 후 과도적이지만 우리 국립경찰이 수립되어 혼란된 해방 3년의 치안유지의 업적은 소홀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폭탄을 무릅쓰고 사선을 돌파하여 가며 혼란을 수습한 것은 약간 탈선은 있다 하더라도 그 공적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래 국립경찰이 수립된 후 1945년부터 작8월 15일 내무부에 이양할 때까지의 수도청에서 취급한 검거통계를 살펴보면 포고령 위반이 수위를 점하고 있으며 검거자의 중요한 것만도 다음과 같다.

 

△내란죄 83명 △포고령위반 13,395명 △군정법령위반 2,657명 △소요죄 10명 △선거법위반 156명 △불법체포 350명 △폭행죄 177명 △살인죄 345명 △방화죄 47명 △통화위조 25명 △주거침입죄 176명 △사기공갈 93명 △절도 19명 △강도 15명 △행정령 제1호 위반 19명 △기타 1,141명으로 총인원 1만 9천 명의 불순분자를 검거하여 치안유지의 공헌을 남기고 신정부에 이관하게 되었다.

 

‘포고령 위반’과 ‘군정법령 위반’ 중에도 경제사범 등 일반범죄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은 치안범이다. 이 두 항목이 전체 검거자의 80퍼센트 이상을 점하는 데 주거침입 176명, 사기공갈 93명 등 민생사범 수가 너무 적은 것을 보며 남조선에 왜 그렇게 많은 경찰이 필요했는지, 그 많은 경찰이 어떤 일을 열심히 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

 

헌법이 반포되고 대한민국 정부 조직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통일건국 추진세력도 통일독립촉진회(통촉) 조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4월의 평양회담을 앞두고 결성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의 확대-강화를 시도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드러난 문제는 유림의 반발이었지만,(1948년 5월 24일, 7월 10일 일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문제도 많았을 것 같다. 통협의 진로가 순탄한 전망이었다면 유림이 같은 불만을 가졌더라도 그토록 격렬한 표현은 삼갔을 것이다.

 

통일건국 추진세력의 진로는 유림을 떼어놓고 통촉으로 방향을 바꾼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통촉이 7월 21일 결성된 후 8월 1일까지 선임된 간부진의 면면을 보면 몇 달 전의 통협보다 훨씬 빈약한 감이 있다. 평양회담 후 이북에 주저앉은 민련의 주요 인물들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8월 5일 제1차 중앙상무위원회가 경교장에서 열렸지만, 주석 김구가 결석한 이 회의에서는 유엔 파리총회 대표단 파견 등 준비되었던 안건조차 처리하지 못했다.

 

8월 11일자 <조선일보>에 통촉의 지리멸렬한 상황을 지적한 기사가 나왔다. 중립적 언론에서도 통촉의 행보를 석연치 않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조선 신정부 수립에 따르는 정계의 동향은 미묘한 바 있어 여당 격으로 신당운동이 대두하고 있는 반면에 기성정당 단체에도 불원하여 재편성이 예상되는 바인데 세칭 중간파의 연맹체인 통일독립촉진회가 분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즉 동 촉진회는 제2차 남북협상 지지파와 현상유지파와 남조선신정부 참여파의 3파로 분열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단적 표현으로 김규식 박사는 별항과 같이 UN총회에의 파견대표를 거부했고 제2차 남북협상조차 부인하고 이에 참여한 자를 처단할 것까지 언명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전혀 부지의 사실이라고 언명하였는데 기실은 제2차 남북회담의 개최 경위는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평양에서 제1차 회담에 참여 했던 민연 산하 제 정당 단체 대표는 공식 비공식 여하를 불구하고 참여했으며 한독당 대표만 불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북조선 측으로부터 김일성 김두봉 양씨의 6월 10일부 서한으로 양김 씨에게 제2차 회담을 6월 23일 만주에서 개최하자고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 박사는 회한으로 남조선 현실에 감하여 북행이 곤란하니 북조선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 국회에 남겨둔 의석 백 명을 파견하여 이를 중심으로 남북회담에 대행하여 통일책을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서도 김 박사가 제2차 남북회담 개최에 관하여 공사한의 접촉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기만이라 하여 동 촉진회 간부 측에 물의가 되어 있으며 또한 UN참여 문제도 김구와의 주장과는 모순되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하였다.

 

더구나 통일촉진회 구성에 있어서도 7·80정당 단체를 망라 운운하나 기실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추진에 있어 독로당 유림 등과 대립되자 이 계열을 제외하고 통촉을 결성했으나 근민 민주한독당 등은 형식상으로 1·2개인을 포섭한데 지나지 않으며 간부인 선거에 있어 상무위원 13명의 명단은 과연 남북통일을 운위하고 각 정당 단체를 망라하였다는 기구의 대표인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으며 양김 씨의 비서진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한 일부에서 지적 비난이 되고 있다. 여하간 이렇게 통촉은 확고한 당면목표가 없이 오늘날에 이르러 분열위기에 직면한 것이며 그의 금후 귀추가 주목되는 바라 한다.

 

기사 끝에서 통촉에게 “확고한 당면목표”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렬한 지적이다. 통촉의 노선은 남북 어느 쪽의 단독건국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남북 모두 정부 수립이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느 쪽에라도 참여해서 다음 단계에서라도 통일건국의 길을 바라보려고 했다. 홍명희, 이극로 등 흠 잡을 데 없는 민족주의자들이 이북 정부 수립에 참여한 것도 그런 뜻이었고, 조소앙이 평양회담 후 이남 정부 수립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도 그런 뜻이었다.

 

통촉 참여자들은 현실이 요구하는 정부 수립의 과제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고한 당면목표”를 가질 수 없었고, 민족주의자 동지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좁은 길을 고른 것이다. 좁은 길 안에서도 합쳐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7월 21일 통촉 결성대회에서 김규식의 치사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제 남조선 국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나는 과거에 나의 성명과 같이 반대도 안하고 참가도 아니하는 동시에, 그것나마도 잘돼나가기를 바라며, 그것이 정부가 아무렇든 간에 외국인의 군정부보다는 낫게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북에 또 하나 정부가 선다면, 그 북정부와 남정부가 한데 합하여 우리가 살길을 얻기 바란다. 여러분은 앞으로 속히 다같이 중간이고 좌이고 우이고 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통일을 완수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해주기를 바란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245쪽에서 재인용)

 

김규식의 단독정부 반대는 소극적 반대였다. 바람직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지만 적극적 반대는 하지 않고, 그 길을 통해서라도 최선의 결과를 얻기 바란다는 뜻이다. 8월 11일자 <조선일보> 위 기사 뒤에 실린 김규식의 기자회견 내용 중 이런 문답이 있다.

 

문: UN총회에 통촉 대표로 참석한다는데 언제쯤 출발할 것인가.

답: 이 문제는 통촉 결성대회에서 결의되었지만 제1차 중집회의에서 나는 남조선의 민중대표가 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수반대표로 선임하였으나 기후 제1차 상위회의 석상에서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 그러나 김구 씨는 부산에서나 인천에서 귀하가 파견된다고 언명하였는데?

답: 그것은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것만 알고 그 후 내가 불접수한다고 말한 것을 몰랐던 까닭일 것이다.

 

유엔총회 대표 파견은 통촉의 가장 중요한 투쟁방법으로 제기되어 있었다.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김규식이 맡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고 싶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 뒤의 상황 진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유엔총회 개회에 임박해 통촉에서는 9월 23일 리 사무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뒤이어 한독당에서 김구 주석의 명의로 별도의 편지를 유엔 임시위원단 앞으로 보냈다. 두 편지의 내용과 성격을 서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서한에서 통촉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은 유엔 총회가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결의한 1947년 11월 14일부의 정신을 관철할 것,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정당한 해결을 얻기 위하여 한국인의 의사를 충분히 청취할 것, 본회는 유엔 총회에 절대다수의 한국인의 통일 열망을 대변하고 있는 본회의 대표를 참가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함 등을 주장하였다. 매우 온건한 주장이었는데, 김규식이 서명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그와 같이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독당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의해 한독당 주석 김구의 명의로 9월 29일 또 한 통의 서한을 유엔 임시위원단에 보냈다. 그 서한에는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고 그 진공기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엔에서 치안을 책임질 것, 남북지도자회의를 초집하여 남-북을 통한 임시중앙정부 수립방안을 작성할 것, 유엔 감시하에 절대 자유분위기를 보장하고, 새로운 남-북 총선거를 시행할 것 등이 쓰여 있었다. 철저한 유엔 중심의 통일방안으로, 남의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소련과 북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63-264쪽)

 

김규식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결의만이 아니라 1948년 2월 26일 소총회 결의도 존중하고, 소총회가 결의한 ‘가능지역 선거’를 통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면서 통일운동에 그 정부의 역할도 요구하는 그의 입장은 정부 참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조소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정부 밖에서 민련과 통촉을 통해 자기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7년 여름의 미소공위 좌초 이래 1년 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건국방안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현실조건의 변화가 컸기 때문에 입장의 변화도 부득이한 것으로 대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김규식은 이례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지킨 소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입장이 당시의 변화를 비쳐볼 수 있는 거울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김규식이 어떤 일에든 감정적 반응을 보인 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8월 10일 북조선정권 수립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신경질적인 것이었다고 서중석은 평했다.

 

“김구 씨와의 공동성명(7월 19일)에 충분히 지적, 발표한 바도 있지만, 북조선의 일은 지금도 전혀 모르며, 소위 제2차 남-북 협상인지 하는 사한이나 공한의 통지를 개인으로나 또는 따로 받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연맹 산하단체이고 맹원들이 참가한 일이 있다면, 나로서는 누가 어느 때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또는 위임장이나 대표증을 발행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북조선에 따로이 정부가 서는 데 본맹 산하단체나 개인은 심사 처분하기로 되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58쪽에서 재인용)

 

4월의 평양회담을 잇는 제2차 남북지도자회의가 7월 초순에 열렸는데 김구와 김규식은 참가하지 않았다. 평양회담 이후 현실화된 남조선 정부 수립 작업에 대응해서 북측도 정부 수립에 나서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평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주장한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을 북측에서 외면한 상황을 이신철은 이렇게 설명했다.

 

1차 지도자협의회에서는 단독선거가 성공할 것에 대비해 공동성명서 마지막 조항에 단독선거와 그 결과 수립되는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삽입했었다. 2차 지도자협의회 결정에서도 이 조항을 근거로 단독정부를 인정할 수 없음이 천명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동성명서 3항에서 규정한 전조선 정치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북측은 3항의 규정 중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선택했다. 3항을 다시 상기해보면, 이 조항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외국 군대 철수 후 제정당 공동명의의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 즉시 수립”이라는 부분과, 임시정부 주도 아래 “총선에 의한 조선입법기관 선거 후 조선헌법 제정하고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부분이다. 앞부분은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었고, 뒷부분은 북측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북은 앞부분은 정세 변화로 실현할 수 없지만 뒷부분은 실천해야만 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88쪽)

 

남쪽의 ‘총선거’는 이북의 100개 선거구를 보류해둔 채 ‘가능지역’의 200개 선거구에서 시행되었다. 북측에서는 이것보다는 ‘총선거’에 가까운 선거를 통해 전 조선의 최고인민회의를 만들고, 그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제2차 지도자협의회가 끝난 이튿날인 7월 6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상임회의와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를 거쳐 7월 9~10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 시행과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북측의 선거 ‘가능지역’은 남측보다도 좁았다. 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불가능지역’의 선거까지 시행할 방침을 세웠다. 공작원들이 유권자에게 일일이 투표와 서명을 받는 ‘지하선거’였다. 비밀선거, 직접선거 등 선거의 기본 원칙이 지켜질 수 없는 선거였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민의 수렴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라는 명분이었다.

 

7월 15일부터 시행된 지하선거의 결과는 해주에서 8월 23~25일간 개최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 대표 선거 총화에 관한 결정”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결정에 따르면 유권자 8,681,746명 중 6,732,407명이 투표, 77.48%의 투표율이다. 이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 1,080명 중 1,002명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고, 여기서 360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들은 8월 25일 선거로 선출된 212명의 북조선 대의원과 함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남조선 지하선거는 선거의 기본 원칙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 줄 수 없는 선거였다. 5-10선거도 문제가 많은 선거였지만 지하선거의 문제점은 그와도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신철이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101쪽에 올린 “표 4”에서 1,080명 대표자가 남로당 137명을 비롯해 민독당 53명, 근민당 62명, 인민공화당 68명, 전평 66명, 전농 70명 등 꽤 고르게 갈라졌다는 사실, “표 3”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55퍼센트를 점했다는 사실 등을 보면 지하선거에 5-10선거보다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기본 원칙 준수 여부 외에도 선거의 정치적 성공을 가름하는 여러 조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대통령 부인 동반, 이 부통령을 방문”

 

11부 장관과 2처장의 조각 인선을 완료한 이승만 대통령은 4일 하오 5시 50분 부인 동반하여 혜화장으로 이시영 부통령을 취임 후 처음으로 방문하고 6시 10분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6일)

 

5시 50분에 혜화장으로 갔다가 6시 10분에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앉았다가 바로 일어섰단 말인가? 같은 날 같은 신문 다른 기사를 보면 사정을 알 수 있다.

 

“부통령 수원에”

 

부통령 이시영 씨는 돌연 지난 4일 하오 7시반경 당지에 도착하여 시내 차준담 씨 댁으로 향하였는데 동 일행의 자동차는 3대이며 내원(來原)의 목적은 아직 알 수 없다 한다.

 

7시 반경 수원에 도착했다면 이승만이 찾아오기 전에 혜화장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 움직임에 어떤 뜻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기사 또한 같은 신문에 실려 있다. 관련된 기사들이 갈팡질팡 실린 것으로 보아 돌발사태 앞에 편집진이 당황한 것 같다.

 

“조각 인선 문제에 불만, 이 부통령 일간 사직? - 중대성명 보류, 초각의에도 불참”

 

조각인선에 있어 이대통령의 지나친 독단적 처사에 함분(含墳)한 나머지 앙앙불락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혜화장에서 굳은 침묵과 명상에 잠겨있던 이시영 부통령은 지난 4일 모종의 중대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예측되던 중 돌연 이화장 측의 만류로 이것을 중지하고 동일 오후 수원 수 명을 대동 혜화장을 떠나 모처로 사관(舍館)을 옮기어 새로운 구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측근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번 조각에 있어 내외상을 필두로 각 각료의 전형을 무여 대통령 일개인의 자의로 했을 뿐 아니라 이 부통령에게 사후 각료의 명부를 보내어 ‘이리이리 결정했다’는 정도의 통지에 불과한 데 이부통령은 극도로 분개하여 사의를 굳게 가지고 이것을 성명하려던 것이라 한다.

 

이 부통령의 그 같은 심경은 5일 초 국무회의에 궐석한 것을 보거나 또는 지난 3일부 본지에 보도된 바와 같이 “나는 나대로 이미 결심한 바가 있다”고 본보 기자에게 강경심사를 암시한 것으로 보더라도 넉넉히 규지할 수 있는 일로서 만일에 이 부통령이 공식으로 사의를 천하에 표명하는 경우엔 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현 내각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는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어 일반 민중으로부터 약체내각의 빈축을 받느니만치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8월 6일 대법원장 김병로와 체신부장관 윤석구가 수원으로 이시영을 찾아갔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8일) 윤석구는 새 정부의 유일한 한독당계 국무위원이었다. 두 사람은 이시영과 3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튿날 찾아간 국회의장 신익희는 불과 10분간의 요담을 나눴다고 한다. 이시영이 신익희와는 별로 할 얘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비서를 7일 밤 보내 이시영 가까이서 하룻밤 자고 오게 한 국무총리 이범석이 소통을 위해 더 실속 있는 노력을 한 셈이다.

 

결국 이시영은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8월 9일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승만을 만나기보다 먼저 경교장을 방문하고 김구와 요담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튿날 제5차 국무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고, 그에 앞서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몸이 괴로워서 정양하고자 시골에 가 있었”다고 하면서 “내 언동으로 돕지는 못하나마 파괴 같은 것은 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경향신문> 1948년 8월 11일 “몸 괴로워 정양, 난관 있어도 밀고 가자”)

 

이승만의 처사를 마음으로는 용납할 수 없지만, 이승만이 못할 짓을 한다 해서 자기까지 못할 짓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사임함으로써 새 정부가 깨어질 때 책임질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우선 정권회복 - 귀경한 이 부통령 담” 기사 끝에는 이범석 총리가 이 부통령 기자회견에 앞서 기자단에게 질문은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부통령의 담화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을 가로막은 사실이 적혀 있다. 부통령이 새 정부의 잠재적 ‘내부고발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언론인 우승규는 조각 인선에 대한 이시영의 불만이 특히 총리, 외무, 내무의 세 자리에 초점을 둔 것으로 파악했다.(<경향신문> 1948년 8월 7일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1”) 이시영이 경무부 수사부국장 이만종을 불러서 만난 사실만 봐도 고문살인 연루 혐의가 있는 장택상의 기용에 반대했을 것은 분명하다. 윤치영에 관한 이야기는 이 일기에서 많지 않았지만, 며칠 전(8월 2일) 일기만으로도 그에 대한 당시 여론이나 이시영의 의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시영이 수원으로 가던 날 아침 윤치영이 방문했으나 면회를 거절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5일)

 

이범석에 대해서는 이시영이 근본적인 반감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우승규는 보았다. 국방장관이 그의 적임이라고 인정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인(武人)인 이범석이 정치적 책임을 더 크게 갖는 자리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이라 한다. 장택상과 윤치영의 기용 등 이승만의 말도 안 되는 조각 방침에 이범석이 동의한 것을 정치인 아닌 무인으로서의 한계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새 내각의 인선 내용에 불만을 가진 것은 이시영만이 아니었다. 가히 거국적인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었다. 8월 6일자 <경향신문>의 “초대 내각과 각 정당 반향”기사를 보면 이승만의 직계세력인 독촉마저 흔쾌한 지지를 못하고 있고, 대부분 우익단체도 비판적 태도다.

 

◊ 독촉=독립 완수의 현단계적 목표는 미군정으로부터 하루바삐 행정권 이양을 받아 유엔의 승인을 받는 데 있으나 국부적인 내각 구성원에 대한 불만은 없는바 아니나 대국적 견지에서 금반 초대내각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당면한 임무일 줄 안다.

 

◊ 대청=뜻밖이다. 민생문제라든가 기타 제 문제를 타개할는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서북청=섭섭하다. 초당파적이라고 내걸고도 오히려 편파적인 결과를 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번 조각에 서북인이 한 분도 선출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 이북인대표단=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월남동포의 사활문제를 해결 못하는 정부는 단명일 것이라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 독로당=자주성 없는 정부에 대한 시시비비를 말할 흥미조차 도무지 없다.

 

◊ 신진당=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다.

 

◊ 한독당=관심이 없으므로 말하기 싫다.

 

◊ 민련=처음부터 민심을 안가지고 있다.

 

◊ 여자국민당=기대와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나 외정의 혹독한 경험이 있는 우리는 불평불만은 안하겠다.

 

◊ 조민당=초대조각이 너무 의외에 감이 없지 않다. 그중에 여자장관이 선임되었다는 것은 여권 옹호의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국가로서의 비약적인 발전일 것이다.

 

◊ 민독=우리 당으로선 거기에 대하여 언급할 수 없다.

 

◊ 한민=후일 이에 관해 정식 담화를 발표하려 한다.

 

같은 날 <조선일보>에는 조각 내용에 대한 여러 개인의 논평이 실렸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국회의원 중에서는 이청천의 “비평하려 들자면 여러 가지로 말 할 수 있으나 일절 언급하고 싶지 않다.”, 김약수의 “내각이라기보다는 이 박사 비서진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이남규의 “초당파적 내각이라 하나 현실을 무시한 데 실망했다. 이러한 조각을 한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김영동의 “대통령의 독재도 좋으나 민의에 이반된 데 실망했다.” 등 논평이 있었고, “이번 조각은 전체로 보아 국내세력을 소홀히 한 감이 불무하며 (...) 백성은 실질적인 것을 바라는데 너무 형식만 갖춘 것 같이 인상을 줌은 유감”이라는 변호사 정순석의 논평, “금반 조각은 너무나 정실관계로만 되어 있으며 정실로 하더라도 강력한 조각이나 되었으면 좋을 것을 그렇지도 않고 (...)” 하는 대법원 이아무개의 논평(이상기 대법관으로 필자는 추측),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하는 정보국장 김광섭의 논평이 있었다.

 

어떤 인물들이 각료로 임명되었기에 그토록 세간의 평이 나빴을까? 당시 신문에 보도된 장관-처장들의 경력을 뽑아본다.

 

◊ 김도연 재무장관

서울 출신 당년 55세 한민당 중위 / 1919년 3월 일본 경응대학 경제학과 졸업 / 1927년 8월 뉴욕콜롬비아대학 경제학사 획득 / 1931년 아메리카대학 경제학박사학위 획득 / 1931년 6월 연희전문학교 강사 / 1935년 4월 조선잠사회사 감사역 / 1946년 5월 민주의원 의원 / 동 10월 입법의원 의원 / 1948년 5월 대한민국의회 의원

 

◊ 이인 법무장관

경북대구 출신 52세 / 일본 명치대법과 졸업 / 경성법학원 강사, 물산장려회장, 어학회 간부 등 역임 / 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집행유예, 석방 후 총무 겸 부장 등 역임 / 현재 과정 대검찰청장

 

◊ 조봉암 농림장관

경기도 강화 출생 50세 / 1921년 중앙대학정경과 졸업 / 1920년 3-1운동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1년 징역 / 1925년 27년 양차에 걸쳐 조공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파견 / 1934년 중국 상해에서 활약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7년 징역 / 1945년 1월 해외연락 관계로 인천에서 일본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었다가 8·15해방으로 출옥 / 1946년 민전에 참가 후 동년 이탈 / 1947년 3월 민주주의독립전선 의장단 참가 /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의원

 

◊ 민희식 교통장관

본적 서울시 계동67의22 / 1908년~1911년 중국 연대명법학당 재학 / 1911년~1915년 귀국 후 가정에서 학업습득 / 1915년 9월 도미 / 1918년 5월 콜로라도 주 골덴고등학교 졸업 / 1922년 5월 콜로라도 주 광산학교 입학 / 1922년 9월 네바다주립대학 경제과로 전학 / 1924년 5월 동교 졸업 / 1924년 5월 캘리포니아 하계대학 동양무역 및 국제통상과 수료 / 1925년 9월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취직 / 1928년 의원퇴직 / 1945년 8월 한국인 직원 요청에 의하여 교통국에 재취직 / 1945년 12월 운수국장 고문을 원명 / 1947년 2월 운수부장 취임 (<경향신문> 1948년 8월 4일)

 

◊ 윤치영 내무부장관

서울 출신 당 51세 / 일본 와세다대 법과 졸업 / 미국프린스턴대학에서 3년간 국제법 및 외교 연구 / 콜롬비아대학 연구과에서 1년간 국제법 및 외교 연구 / 조지워싱턴대학 국제법 및 외교 연구과에서 BA의 학위 수득 / 아메리칸대학 학사원에서 국제법 및 외교학으로 MA 학위 수득 / 조지워싱턴대학 법과에서 국제법으로 LLB 학위 수득 / 카네기국제평화재단 국제법 및 외교 연구부에서 5개년간 연구 / 대한민국임시정부 워싱턴주재 구미위원부 위원 / 하와이동지회총본부 이사 겸 재무부장 / 제2차 태평양대회 한국대표로 출석 /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 민주의원 비서국장 / 국제법 및 외교연구회 이사장 / 조선민족청년단 이사 / 주간태평양 주필 겸 이사 / 국회의원

 

◊ 안호상 문교장관

경남 의령 출신 48세 / 중동학교 수료 후 일시 동경에 유학, 중국에 건너가 상해오송동제대학 예과(독일인 경영) 필업 후 독일에 유학, 뮌헨대학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학위 획득 / 귀국 후 보전 교수 역임 / 서울대학 교수 및 건국실천원양성소 교원으로 현재에 이름.

 

◊ 전진한 사회장관

강원도 고성 출신 48세 / 1928년 와세다대 정경학부 졸업 / 1926년 협동조합운동사 조직위원장 피임 / 1928년 사상범으로 1년간 복역 / 1939년 금간산중에 은거 / 1945년 전국협동조합총본부 위원장, 민통 노농부장, 대한노총 위원장 역임 / 1948년 국회의원 피선

 

◊ 윤석구 체신장관

충남 서천 출생 57세 / 한영중학교 중업 / 도만(渡滿)하여 독립단에 참가 / 군산메리벌덴여학교서 교육에 종사 / 한약업에 종사 / 해방 후 군산건준위장 독촉군산지부장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한독당군산위원장 입의 의원 등 역임 / 현 국회의원 무소속구락부 간사장

 

◊ 임영신 상공장관

전주 출생 당48세 / 미국남가주대학 졸업 / 중앙보육학교장 / 중앙여자전문대학교장 역임 / 해방 후 여자국민당 당수 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 재작년 민주의원 대표로 도미하여 국련에서 활약하고 현 중앙대학 학장

 

◊ 장택상 외무장관

경북 칠곡 출신 56세 / 에딘버러대학 졸업 / 파리강화회의 임정구미위원부 조선대표 / 고 이관용 씨 수행 귀국 후 교육계 종사 / 해방 후 국민대회준비회 외교부 피임 / 현재 서울시 상임고문 제1총감부경무총감 겸 수도경찰청장

 

◊ 유진오 법제처장

서울 출생 당44세 / 경성대학 졸업 / 보전 교수 겸 법정대학장 / 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

 

◊ 김동성 공보처장

개성 출생 1909년 / 중국 소주 동오대학 유학 / 1912년 미국 아칸소 주 칸웨이 시 헨드럭스·애카데미 졸업 / 1915년 오하이오주립대학 3년 수료 / 1918년 귀국 / 1920년 동아일보사 입사 / 1921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 출석 / 1921년~22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워싱턴군축회의출석 / 1924년 조선일보 편집인 취임 /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 1945년 합동통신사 사장 취임 금일에 이름 (<동아일보> 1948년 8월 5일)

 

안호상, 전진한처럼 중량감이 떨어지거나 검증 안 된 느낌이 드는 인물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지만, “말도 안 된다!” 하는 손가락질을 모은 것은 장택상, 윤치영, 임영신의 세 사람이었다. 장택상은 최근 터진 고문치사 사건까지, 지난 3년 동안 너무나 악명을 떨친 사람이었고, 윤치영과 임영신은 아무 주견 없는 이승만의 ‘비서’였다. 김약수의 “이 박사의 비서진” 논평이 그래서 나왔다.

 

8월 4일 국회에서 새 의장단이 선출되고 이튿날 김병로 대법원장 인준안이 통과됨으로써 새 정부의 윤곽이 확정되었다. 국회의장 선거에서는 신익희가 재석 176인 중 103표를 얻어 56표의 김동원을 눌렀다. 신익희가 비운 부의장 자리를 놓고는 경쟁이 치열해서 2차투표까지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고, 결선투표에서 87표를 얻은 김약수가 74표의 김준연을 겨우 따돌렸다. 두 차례 선거에서 모두 한민당이 패퇴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한민당이 부의장 자리 하나를(김동원) 이미 확보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독촉계와 무소속이 힘을 합쳐 한민당을 견제하는 경향도 있었던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무소속(소장파)이 상당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의 대립관계 덕분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