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이 선언을 전후해서 독일이 통일되는 등 동유럽 공산권이 해체되었다. 냉전에 묶여 있던 한반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정부의 반응은 많은 국민들에게 뜻밖으로 느껴질 만큼 빠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미 1988년 2월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방외교’ 정책이 제시되었고, 몇 달 후에는 이를 구체화한 ‘7-7선언’이 나왔다. 몰타 선언 시점까지 한국은 이미 헝가리와 국교를 맺는 등 동구 여러 나라와 관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몰타 선언 이후 한국의 북방외교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린 데 이어 9월 말 국교가 맺어졌다. 중국과의 관계는 톈안먼 사태로 인해 다소 지체되었으나 1991년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 대표부 개설을 거쳐 1992년 8월 국교 수립에 이르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개막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고위급도 보통 고위급이 아니라 남북 총리가 2년 후 제8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지속적으로 여는 회담이었으니 웬만한 정상회담보다 더 크고 깊은 접촉이었다.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가장 기본적 원칙을 담은 것으로 인정되는 1991년 12월의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역시 이 회담의 산물이다.

 

그런데 1992년 12월로 예정되었던 제9차 회담이 취소되고 남북고위급회담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 회담을 통해 발전되어 온 남북관계도 중단과 퇴행을 겪게 된다. 냉전 때문에 갈라져 있던 민족이 냉전 해소에 따라 화합의 길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길이 막히면서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멍에를 오랫동안 벗어 던지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만 2년간 8회에 걸쳐 남북한의 총리 이하 수십 명의 대표단이 만나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 방향을 의논한 고위급회담은 냉전 해소에 따른 세계적 변화에 발맞추는 노력이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편 4권 140-145쪽 “노태우 정권의 정략적 대북정책”처럼 북방외교의 정략성을 지적하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거대한 세계적 변화 앞에서 정략성은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위급회담은 남북기본합의서라는 획기적 성과를 낳고도 더욱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면서 동력도 충분히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는 남북관계 변화의 움직임이 1992년 말 갑자기 중단되어 버린 것이 무슨 까닭이었을까? 아직까지도 걸핏하면 남북관계를 중단과 퇴행으로 몰아가곤 하는 장애 요소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1992년 9월 제8차 고위급회담에 파탄을 몰고 온 ‘훈령 조작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통일원차관으로 회담에 참석했던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289-290쪽에서 회담 직후의 조사 내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발-수신된 모든 전문을 안기부로부터 제출받았다. 일련번호가 표시된 9월 17일자 평양 발신 전문 4건과 서울 발신 전문 3건 등 총 7건의 3급 비밀 전문의 사본이 입수되었다.

 

제1호 전문은 정원식 총리의 지시로 내가 평양에서 새벽 0시 30분에 발송한 ‘청훈 전문’ 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평양에서 발송된 제2호 전문이 있었다. 202(이동복)가 102(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보낸 이 전문의 내용은 놀랍게도 “청훈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전문에는 “전문을 보고 난 후 파기하라”는 조치 사항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제3호 전문이 오전 7시 15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발신되었는데, 문제의 “3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사실 이 전문은 공식 전문이 아니라 102가 202에게 보낸 SVC(서비스)가 표시된 사신(私信)이었다. 그러나 정 총리와 내가 평양에서 본 전문에는 102와 202, 그리고 ‘SVC’라는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보내온 정식 훈령으로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이날 오후 4시 15분에는 서울에서 수석대표 앞으로 또 하나의 전문(제7호)이 발신되었다. 이 훈령은 이미 정해진 협상전략대로 “2개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하여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실제로 북측이 동의했던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의 정식 훈령이었지만, 차석 대표이자 이 문제에 관한 협상 책임자인 나에게는 물론, 수석대표인 정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고위급회담의 남한대표단 대변인 이동복은 당시 국무총리 특보란 명함도 갖고 있었지만, 실제 역할은 안기부장 특보였다. 평양에서 회담이 열릴 때 대표단과 서울 사이의 통신을 안기부가 맡고 있었는데, 이동복은 이를 이용해 수석대표 정원식 총리가 보낸 청훈(請訓) 전문을 가로챈 ‘청훈 차단’,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대통령의 훈령처럼 대표단에게 내놓은 ‘가짜 훈령 조작’, 그리고 대통령이 뒤늦게 보낸 훈령을 감춘 ‘진짜 훈령 묵살’을 저질러 대표단의 임무 수행을 방해했던 것이다.

 

간이 얼마나 큰 사람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단독범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독범행을 주장한 이동복은 아무런 형사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의 범행 성공을 도운 것으로 보이는 이상연 안기부장과 엄삼탁 기조실장의 책임은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동복의 안기부장 특보(차관급)와 남북회담 대표로서 신분과 역할도 유지되었다. 사건 며칠 후 열린 고위전략회의(총리, 통일부총리, 안기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통일부차관과 이동복 참석) 상황을 임동원은 같은 책 293쪽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그가 어째서 이토록 무리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도 모두들 알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8-15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사업을 파탄시킨 것이나, 이번에 훈령 조작으로 또다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을 파탄시킨 것에 대해 모두들 ‘정권 재창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안보 불안과 긴장 조성으로 남북관계가 파행되는 것이 특정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유리하다’는 일부 안기부 간부들의 구시대적 판단에 따른 조직적 활동의 소산일 터였다.

 

단순히 노태우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기에는 민족의 운명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큰 중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한 사정에 대해 드러내놓고 논의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정작 당사자인 이동복 특보도 자기 혼자 저지른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아무런 변명이나 자기방어도 하지 않은 채 시종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원식 총리는 결국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는 한마디 말로 회의를 마쳤다.

 

이 전략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9월 2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의원의 ‘폭로’로 청훈 조작 사건이 부각된 것이 전략회의의 배경인데, 이 사실을 임동원은 위 책에서 서술하지 않았다. 임동원 자신이나 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표단 관계자가 이부영 의원 측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원 남북관계 ‘폭로성 심문’

 

22일 통일원 회의실에서 열린 외무통일위원회의 통일원에 대한 국정감사는 남북대화 통일정책에 대한 안기부의 관여 문제를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날 이례적으로 이동복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민주당-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안기부 소속으로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고 있는 상황의 부적합성과 대변인의 사퇴 의사 *고위급회담 과정에서의 ‘월권’행위 여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발언들의 문제점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

 

안기부 쪽에 대한 공세의 포문은 이동복 대변인을 증인으로 신청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공식적으로는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 국무총리 특별보좌관‘으로 돼 있는 이 대변인이 실제로는 ’안기부장 제1특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열렸다. 청문회를 방불하게 하는 1문1답 식의 진행방식으로 들어간 이 의원은 “안기부장 특보가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으면 조직 간의 마찰을 빚을 수 있으므로 당연히 대변인의 소속은 통일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궁했다. 특히 이 의원은 “지난 9월 제8차 고위급회담 당시 정부쪽에서는 북에 가 있는 대표단에게 이인모 씨 송환과 관련해 기존의 동진호 선원 송환 요구를 빼도 좋다는 훈령을 보냈는데, 이 대변인이 이 훈령을 무시하고 원래 입장을 고수해 이 부분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

 

민주당-국민당 의원들은 이부영 의원이 처음부터 강성으로 나오자 좀 더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나섰다.

 

정대철 의원(민주)은 “이 대변인의 신분이 노출됐으므로 남북대화에 비효율적이고, 북에서 오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결론적으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계속하려면 안기부쪽 직책을 사퇴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변인을 사퇴하라”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이어 발언권을 얻은 조순환 의원(국민)은 “오늘 이 대변인이 안기부장 특보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 솔직히 놀랐다”고 털어놓은 뒤 “이런 귄위주의 시대의 소산은 용납될 수 없다”며 안기부쪽 직책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는 이어 북한 핵의 생산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 대변인은 사퇴 공세가 거듭되자 “나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 직분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해서 대표단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대변인으로 일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겸직 신분이 지장 있다는 견해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 (<한겨레신문> 1992년 9월 23일)

 

배후관계도 밝혀지지 않았고 형사 처벌은커녕 인사 조치조차 따르지 않았지만 이 정도 기본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임동원은 공직에서 물러나도 좋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몇 달 후 차관직을 물러나게 된다. 나중에(1995년 2월) 그가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취임할 때 김대중 이사장은 환영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런 유능한 분을 사무총장으로 영입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제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소위 ‘훈령 조작사건’이 생겼을 때 이를 계속 추궁한 불굴의 용기와 정의감입니다. 차라리 재야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기는 쉬워도 공직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참된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같은 책 318-319쪽)

 

199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이동복이 그토록 ‘소신껏’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동이 순탄하지 못했던 사정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강경노선을 향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설명이다. 그러나 퇴임까지 다섯 달이나 남은 현직 대통령을 그렇게까지 ‘생까는’ 짓이 선거가 석 달 남은 후보의 영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을까? 이 사건에 작용한 다른 요인은 없었을지, 다음 회에서 짚어보겠다.

 

 

Posted by 문천

 

1848년 2월 루이 필립 왕이 물러나 프랑스 제2공화국이 출범했으나 당시의 프랑스인 대다수가 공화정을 꼭 원한 것은 아니었다. 50년 전 제1공화국의 기억은 공포와 혼란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1815~1830년간의 반동적인 부르봉 치세도 1830~1848년의 중도적인 루이 필립 치세도 실패로 돌아간 이제 공화정만이 대안으로 남아있었다.

혼란이 되풀이될 조짐은 곧 나타났다. 권력의 공백을 틈타 사회주의자들이 '일할 권리'를 내세워 강행한 국민작업장 제도가 경제 파탄과 사회 혼란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질서당이 6월과 9월의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다. 질서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제정해 11월 4일 반포한 헌법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규정한 것이었다. 이 헌법이 독재를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며 반대에 앞장선 쥘 그레비(1807~1891년)는 나중에 그 통찰력을 인정받고 제3공화국 대통령을 지내게 된다.

질서당은 왕정주의자와 공화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월 10~11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질서당은 공식적으로 루이-외젠 카베냐크 후보를 지지했지만 왕정주의자들은 확고한 공화주의자인 카베냐크를 경원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의 반대자들은 대체로 그를 경시했다. "자기가 독수리인 줄 아는 칠면조"라고 그를 조롱한 말이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서 왕정 복고를 드러내 추진할 수 없던 왕정주의자들은 세력 기반이 약하고 정치 이념도 없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 되면 왕정 복고를 향한 징검다리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일단 두각을 나타내자 대중의 열렬한 지지가 그에게 쏠렸다.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처럼 후세에 알려지지만, 파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혁명의 열의가 일부 지식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영광을 떠올려주는 '보나파르트'란 이름과 견줄 만한 무기를 다른 어느 후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 선거는 제2공화국이 루이 나폴레옹에게 차려준 밥상이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행정권을 부여하는 대신 임기를 4년 한 차례로 제한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이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속셈은 당시 사람들도 대개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다. 대통령 재임 3년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지 세력 확충에 매진한 자세에서 이 속셈이 드러난다.

보나파르트 대통령의 첫 번째 중요한 정책이었던 이탈리아 출병에서 이 자세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출병 자체가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에 대한 대중의 향수에 영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을 옹위함으로써 가톨릭 세력의 환심을 사려 했다. 당시 비오9세 교황은 주세페 마치니와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민족 운동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청년 시절(1831년) 이탈리아 민족 운동과 연계하려 한 일이 있는 루이 나폴레옹으로서는 하나의 배신이었다.

한편, 교황에게는 교황령 국가에 나폴레옹 법전을 채용하고 개혁 정책을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공화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이탈리아 민족 운동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황에게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이 모순된 태도는 국내 여러 세력에게 추파를 던지는 원칙 없는 포퓰리스트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 회에서 황제로서 루이 나폴레옹의 치세를 개관할 텐데, 그가 매우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1851년 12월의 쿠데타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그의 치적에는 그런 면모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황제 즉위를 향한 권력 강화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헌법에 따른 의회 선거가 1849년 5월 13~14일에 시행되었다. 750명의 의원을 뽑는 이 선거에서도 질서당은 400석이 넘는 과반수를 확보했다. 사회주의자와 급진 공화주의자의 좌파 연합은 약 200석으로 제2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좌파 연합 지도자들이 권력 탈취를 위한 봉기 시도에 실패하고 좌파에 대한 극렬 탄압이 시작되었다.

혁명적 요소가 제거되고 질서당 일색이 된 의회에서는 정통 보수파와 보나파르티스트 사이의 대립이 전개되었다. 왕정주의자 중심의 보수파는 선거권의 축소를 추진했다. 국민 주권 이념의 핵심인 보통 선거권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수파는 "3년 이상 거주" 조건을 붙임으로써 900만 명 유권자 중 약 350만 명을 줄이는 선거법 개정에 나섰다. 유산계층과 농촌 주민의 선거권을 보호하면서 산업 노동자와 도시 빈민층의 선거권을 위협하는 조치였다.

1850년 5월에 이뤄진 이 선거법 개정을 계기로 루이 나폴레옹은 의회를 무시-적대하는 독재 체제 구축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선거권의 수호자'를 표방하며 자신을 국민 주권의 대표자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국민 주권의 원래 제창자인 좌파를 탄압으로 배제해 놓고 보수파를 상대로 국민 주권의 옹호자 행세를 한 것이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의회의 보수파를 비난하고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정치공세가 일으킨 효과는 의회에서도 나타났다. 1850년 5월의 선거법 개정 표결은 찬성 433표에 반대 241표였다. 그러나 몇 달 후 루이 나폴레옹의 재개정 요구에 대한 표결은 찬성 348표에 반대 355표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됐다. 적지 않은 의원들이 나폴레옹의 공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1851년에 들어서자 의회의 보수파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군부와 지방 정계의 지지를 확보한 루이 나폴레옹은 보통 선거권의 회복을 넘어 의회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헌법 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루이 나폴레옹의 헌법 개정안은 1951년 7월 의회에서 찬성 446표, 반대 278표로 3분의 2 찬성에 못 미쳐 부결되었으나 보수파 최후의 보루인 의회마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다. 몇 달 후에 일으킬 친위 쿠데타를 루이 나폴레옹은 아무 조직적 저항 없이 공공연하게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1848년의 프랑스 상황을 바라보며 노령의 웰링턴 공작(1769~1862년,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후에 영국 수상을 지낸 장군, 정치가)이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지금의 프랑스는 또 하나의 나폴레옹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아직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

▲ 빅토르 위고. ⓒwikipedia.org
1851년 12월에는 또 하나의 나폴레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혁명의 열기를 막아낼 길도 없고 키워낼 길도 없는 상황이 50년 만에 되풀이되는 프랑스의 모습에 대한 한 이웃나라 지도자의 탄식으로 이해한다.

당대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년)는 루이 나폴레옹의 공화정에 대한 배신을 가장 치열하게 고발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는 <소 나폴레옹(Napoléon le Petit)>과 <어느 범죄의 역사(Histoire d'un crime)> 등 많은 기록과 작품을 통해 나폴레옹3세의 폭압적 통치를 고발했을 뿐 아니라 온 몸으로 제2제정을 거부했다.

1848년에 의회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의 가장 유력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표방한 실용적 개혁주의를 지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 강화에 나서자 반대로 돌아서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시민군 조직을 위해 거리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준비된 계엄군 앞에 시민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400명 가까운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고, 1만여 명이 체포되어 유배나 추방을 당했다.

위고는 브뤼셀로 망명했다가 노르망디 앞바다의 영국령 채널군도에 거처를 잡아 20년을 지냈다. 1859년 나폴레옹3세가 내린 사면령도 거부하고 1870년 황제 퇴위 후에야 프로이센 군에게 포위당한 파리로 돌아와 그 해 겨울의 참혹한 농성에 동참했다. 이로써 위고는 작품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는 지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Posted by 문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이념의 갈등이 끝났으니 갈등으로 엮어지는 역사가 더 이상 엮어질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뒷받침하기도 한 이 단정의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은 그 후 드러난 ‘문명의 충돌’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단정에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갈등은 세계사의 한 시대를 지배한 명제였다. 이 갈등의 종말이 비록 ‘역사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근대사의 종말’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그리고 이것을 ‘역사학의 종말’로 음미해 볼 여지도 있다.
  
  역사서술은 인류문명의 초창기부터 있어 온 지적 활동이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도 역사서술은 주술사의 푸닥거리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의 정체성을 제공했으며, 주술사는 그 구연을 통해 영도력을 발휘했다.
  
  문자 발생 후 역사서술은 지배계층의 교양이 되었다. 문자 덕분에 정보의 거의 무제한 축적이 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전의 구연 단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가 역사의 공유를 통해 정체성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서술은 영토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문자를 향유하던 지배계층은 그 위상과 소명을 확인하는 데 역사의 거울을 애용했다.
  
  근대역사학의 발생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보의 축적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대형화함에 따라 피지배층까지 문자를 향유하게 된 상황에서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국민교육이 개발되었고, 역사교육은 그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내용을 확보하고 담당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대학에 자리잡음으로써 역사학은 종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는 다른, 분과학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죠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에서 ‘이야기 역사’와 ‘역사과학’을 대비시킨다. 교양으로서의 역사는 선사시대 이래 이야기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자기 사회의 역사를 그 사회 안에서만 서술하고 열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 고증이 있을 뿐, 이념적 해석의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국가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의 상황 속에서는 서로 다른 국가들이 자기네 역사서술이 옳다고 다투는 ‘역사의 경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수단으로 역사의 ‘과학화’가 촉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가의 기능은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혁명으로 인해 과거의 일을 되살피는 작업이 인류의 지적 활동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역사학의 수요는 사회에서도 대학에서도 줄어들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첨예하게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학 분야인 것이다.
  
  한국인이 단군을 숭상하고 광개토왕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다. 중국인이 3황5제를 숭상하고 자기네 성현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적으로 따진다 해도 따질 기록 자체가 이야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단군의 실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나서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없는 대상인 바에야 우리의 이야기 역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분들이 우리 조상임을 입증할 다른 방법이 없다.
  
  고구려사 관계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동북공정의 방향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의 일환으로 작년에 나온 <동북통사(東北通史)>(李治亨 주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일부 참여자들의 주장에는 참으로 한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서 제사도 지내 오고 벌초도 해 온 우리 조상을 놓고 어느 날 옆집에서 “이 분은 우리 외가 조상이니 이제 우리가 제사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다.
  
  중국의 이런 일부 학자들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느낀다. 오랫동안 그곳 역사학을 묶어 놓고 있던 유물사관이 힘을 잃자 서방에서는 한 물 가다 못해 타기받고 있는 국가주의 사관에 좋다고 매달리는 꼴이다. 우리만 잘나고 이웃은 못났다는 주장에 목청을 높이는 것 외에는 학자로서 사회에 공헌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딱한가.
  
  동북공정의 일부 독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중국 내에서도 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통일다민족국가’의 의미를 현상의 규정에 그치지 않고 통시적인 개념으로 확립하려 든다면 자가당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동북공정은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의 일환으로서 역사 연구는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인데, 앞으로는 역사 연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독선적인 성향도 억제될 것이 예상된다.
  
  철 지난 국가주의 성향은 한국의 반응에서도 적지않게 느껴진다. 동북공정의 연구비가 5년간 총 1500만 위엔(한화 약 21억원)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이 국내에도 충분히 알려져 있다는 것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린 이영호 씨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논설에 “3조원”의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일인가.
  
  중국 일부 학자들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놓고 중국 주류의 추세를 억측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프레시안>만 하더라도 일전 “동북공정은 후진타오가 지시한 사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거니와, 비준한다는 뜻의 “批示”를 “지시”로 곡해한 것이다. 중국의 행정과 지방자치 관행을 감안한다면 지방 또는 민간의 사업에 대한 중앙의 비준이나 승인이라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둘 수 없다. 한 조선족 학자는 한국 언론의 과열된 반응을 지적하며 “왜 그들은 미국과 일본만 좋아할 짓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의 말미에서 과학적 역사가 퇴조하고 이야기 역사로 돌아갈 추세를 전망했다. 역사가 투쟁의 무기에서 교양의 수단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근대역사학의 경력이 일천한 한국, 그보다도 더욱 경험이 빈약한 중국에는 아직도 역사를 투쟁의 무기로 휘두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교양의 도구로서 인접국 사이의 갈등보다 신뢰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역사전쟁’의 와중 “일사양용(一史兩用)”의 목소리가 자라나고 있는 중국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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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