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냉전 종료 선언을 들으며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소련이 ‘악의 제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냉전을 빌미로 일어났던 많은 나쁜 일들이 이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꽤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 나라도 이제 좋은 쪽으로 많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그 나라의 나쁜 측면으로 보이던 것이 대개 냉전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가상적이 없어진 만큼 외부 세계를 대하는 미국의 태도에 여유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세계경찰’이란 말이 통한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 경찰이 ‘공익을 위한 폭력’을 맡는 것처럼 미국의 그 막강한 군사력 운용이 조금이라도 더 인류의 공익을 향하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담은 말이었다.

 

1990년대에 많이 쓰이던 이 말이 지금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아마 2001년 9-11테러가 이 말이 사라진 계기가 아니었던가? 미국이 지나치게 호전적인 태도를 보일 때 “세계경찰이 저래도 되는가?” 하던 비판의 기준이 이제는 없어졌다. 미국에게 남들 입장 생각해 줄 여유가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냉전 종식을 계기로 미국인의 생활이 좋아진 것 같지도 않다. 냉전 종식 후 미국에 가본 일이 없어 실정을 잘 모르겠지만, 뉴스나 책을 통해 접하는 미국의 풍경은 그때보다도 살기 힘든 쪽으로 많이 변한 것 같다.

 

냉전 종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시대에는 나쁜 일의 원인이 모두 냉전 상태에 있고, 상대방을 쓰러트려 냉전을 끝내기만 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선전에 파묻혀 살았다. 그런데 막상 냉전은 종식되었는데 더 좋은 세상은 온 것 같지 않다. 미국인에게조차도.

 

그래서 냉전 종식이 미국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 부득이해서 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필요를 느낀다. 이런 설명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현재 ‘중국의 부상’이나 ‘인도의 부상’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한 번 더 글로벌 축적을 시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전략적 보루(중국, 인도 같이 자원이나 노동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를 동원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전장에서 어떤 군대가 마지막 남겨놓은 전략적 보루를 사용한다는 것은 패배 직전까지 몰렸음을 의미한다. 현재 세계경제의 발전은 현존하는 세계체제에 내재한 몇 가지 주기적인 운동이 이제 역사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은연중 암시한다. (리민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 (류현 옮김, 돌베개 펴냄 46쪽)

 

리민치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발판으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한다. 이 정도 설명은 세계체제론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만 갖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가 정치권력의 작용 없이 시장의 동력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불평등’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자원과 노동력의 분포가 고르지 않아야만 그 격차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이윤이 자본의 움직임을 위한 동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댐의 낙차가 있어야만 발전용량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발되지 않은 자원의 존재가 자본주의체제의 동력원이 되는 것처럼, 미개발 노동력의 존재도 자본주의체제의 활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자본주의체제의 패권을 쥘 무렵의 광대한 저개발 지역이 그 후 반세기 동안 상당 수준의 산업화를 이뤘다.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노동력의 조직과 임금의 상승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 과제는 아직 개발이 덜 된, 따라서 아직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자본의 자유로운 이전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냉전 종식은 아직까지 자본주의식으로 조직되지 않은 노동력이 존재하는 광대한 지역, 즉 옛 공산권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킬 필요에 몰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리민치의 견해다. 그는 냉전 종식을 앞둔 시기에 미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본다.

 

세계시장에서 서유럽과 일본의 맹추격을 받고 베트남전 패배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전후 ‘글로벌 뉴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미국 헤게모니는 역사적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에서 1990년까지 미국 행정부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을 늦추고, 나아가 이를 재건하기 위해 세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첫째, 서유럽과 일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둘째, 주변부 및 반주변부 국가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셋째, 자국 기업의 이윤율을 회복하고 글로벌 경제에서 실추된 위상을 되찾기 위해 신자유주의 의제를 강요했다. (위 책 200쪽)

 

이 책은 2009년 중국에서 나오고 이듬해 한국에 소개된 책이다. 미국의 냉전 종식이 넉넉한 힘으로 여유 있게 이뤄낸 것이 아니라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라는 생각은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전에는 떠올리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미국 대외정책의 난맥상과 2008년 금융공황 앞에서 미국의 입장이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다.

 

1980년대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소련에 대한 군사적 압박정책의 반동성을 나도 2008년에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181-182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1970년대의 경제 위기는 두 진영 모두에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진영이 효과적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무기력한 침체에 빠진 반면, 자본주의 진영 일부가 미국의 주도하에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나왔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상황의 문제점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격화시켜 파국을 앞당김으로써 추진 주체가 상대적 이익을 얻자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레이건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함께 추진한 군사정책이 어떤 것이었던가. 그야말로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드는 ‘별들의 전쟁’이었다. 경제 여건에 역행하는 군비 확장은 상대방이 먼저 손들도록 압박하는 치킨 게임이었다. 냉전의 대결 상황이 이 소모적이고 반동적인 정책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1973년의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계기로 자원과 환경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고 때맞춘 석유위기로 현실적 위기감까지 일어났다. 그래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란 이름을 얻은 당시의 악성 경기침체의 원인으로 자원 측면이 중시되었지만, 착취의 여지가 줄어든 노동시장의 상황도 또 하나 중요한 측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패권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려온 자본주의체제가 1970년대 들어 여러 거시적 지표에서 한계에 부딪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1980년대 미국의 위치가 위기 상황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대책을 강구할 압력은 존재했던 것이다. 냉전 종식은 냉전시대의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계기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기본 문제들이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바꿔 나타나는 계기로 봐야겠다.

 

독일은 냉전 해소와 함께 통일을 이뤘는데 한국은 이루지 못한 사실을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통탄한다. ‘냉전의 내면화’를 흔히 그 이유로 지적한다. 물론 상당히 중요한 이유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1990년을 전후한 이른바 냉전 종식이 당시의 인식에 비해 한계를 가진 현상이라고 본다면, 독일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 사이의 차이점도 생각할 수 있다. 동유럽의 전선(前線)이 사라진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전선은 새로 형성되고 있지 않은가.

 

21세기 들어와 미국의 모습이 초라해져 온 데는 중국의 흥기와 대비되는 까닭이 있었다. 1990년대 말까지도 중국은 냉전 이후의 세계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향후 세계의 진로에 미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주체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또한 지금까지 크게 자라나 왔고, 앞으로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여 년간 전 세계적 상황 변화, 특히 한반도가 처한 상황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패권 성격의 변화와 중국 흥기의 의미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3년간의 “해방일기” 작업을 지난여름 마무리하면서 그 뒤를 이어 하고 싶은 일이 여러 갈래 떠올랐습니다. 두 달 동안 쉬면서 새 작업의 방향을 “냉전 이후”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달 동안 준비해서 이제 집필을 시작합니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된 이 민족이 분단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며 몇 가지 전보다 확실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하나가 분단의 근본적 원인은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내적 원인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분단을 향한 길을 걸은 자들이 조선인 중에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단의 결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자기 사회를 배신하는 반역자는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칼자루를 쥐게 된 원인을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서 “망국의 역사” 작업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임금의 무능과 무책임이나 몇몇 반역자의 죄악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원인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있었습니다. 서세동점은 최소한 왕조교체 한 차례는 겪지 않을 수 없는 너무나 거센 물결이었고, 때마침 조선을 삼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이웃나라의 야욕이 있었기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의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도 민족국가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충분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냉전의 상황은 이 민족에게 제국주의시대보다 별로 유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단 건국을 피하고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반도를 이용 대상으로 여기는 외세가 반역자들에게 실어준 힘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다시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또 하나의 기회가 왔습니다. 냉전의 주역이던 미국과 소련 정상이 1989년 12월 3일 냉전 종식을 함께 선언한 것입니다. 냉전이 한민족 분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면, 그 종식은 민족 통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이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통일은커녕 평화협정조차 맺지 못한 채로 적대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25년 전과 달라진 것도 있지만 중국과 대만 사이의 양안관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초라한 상태입니다.

 

온 세계가 벗어난 냉전에 한반도만 묶여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강요하는 외세가 없는데도 우리 민족이 분단 상태를 좋아해서 매달려 있단 말일까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1980년대까지 냉전의 장벽은 우리가 넘어서기에 너무나 벅찬 장애물로 보였습니다.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그 동안 나타나지 못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접어두겠습니다. 그런데 냉전 종식 후 4반세기가 되도록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따져보려 합니다. 냉전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현상이었고 그 종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미국의 패권과 중국의 흥기가 21세기 한반도에 어떤 상황을 형성하고 있는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집권세력은 민족문제 해결에 어떤 자세로 임해온 것인지, 힘닿는 대로 따져보려 합니다.

 

1주일에 두 차례씩 생각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20여 년 전 학교를 떠난 후 언론계 주변에서 활동해 오며 “역사를 시사로 보고 시사를 역사로 읽는” 자세를 추구해 왔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 자세를 특히 철저하게 지켜보려 합니다. 전문가로서 권위 있는 견해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상식적인 이해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니 독자 여러분도 의견을 많이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문천

 

"섬의 운명"

 

크레타섬의 웅장한 미노스궁전 유적을 보노라면 섬들을 무대로 펼쳐진 에게문명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문명 초기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중해 지역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섬 지방이 육지보다 선진문명을 누리고 요충지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와 반대로 농업문명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켜온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섬 지방의 의미가 변방에 그치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이 진출하면서 비로소 길목에 있는 몇몇 섬들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장 미개한 섬오랑캐로 꼽히던 일본인들이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의 자극을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그런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제주 역시 12세기 초 고려에 복속한 이래 조선말까지 변방의 위치를 지켜왔다. 열악한 농업조건과 교통여건 때문에 공세(貢稅)를 통한 중앙정부에의 공헌은 변변치 못한 반면, 행여나 왜구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안보상의 부담으로만 인식되었다.

 

아마 13세기 말부터 1세기 간의 원(元) 복속기가 요충지로서 제주의 가치가 이례적으로 발휘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벗어날 때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난 것도 1세기 간 상승해 있던 제주의 위상이 다시 추락하는 데 대한 반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의 직할지로서 탐라총관부는 고려에 대한 일방적 복속기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비극인 합방을 맞아서도 제주의 위상은 조선시대보다 높아진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 최고의 학술-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진출한 제주인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에 비해 일제시대에는 상당수 제주인이 서울뿐 아니라 일본의 대학에 진출해 일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 제주의 산업도 다각화되었고, 또 형편에 따라 육지나 일본으로 나가 일거리를 찾게 된 것도 조선조 후기의 출륙금지령에 비하면 제주인의 숨통을 풀어준 일이었다.

 

어찌 보면 제주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과 궤적을 달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것은 전 국토의 98%를 점하는 육지부(및 연안도서)와 기본조건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섬의 운명이다. 중앙집권적 농업국가는 전국을 획일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국토와 다른 조건을 가진 섬 지역은 다르다는 데서 오는 유리한 점은 묵살당하고 불리한 점만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앙의 국가가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외부 세력에게 유린당할 때에야 비로소 요충지로서 그 유리한 점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를 봐도 대한민국의 폐쇄성이 심하던 시절에는 제주가 극심한 고통과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개방성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의 위상도 향상되어 왔다. 관광과 감귤 등 육지부와 다른 특징이 좋은 대접을 받게 되고 일본에 진출한 제주인들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MF사태를 맞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는 상황은 지방자치 발전의 기회를 제기하고 있거니와, 그 의미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다.

 

제주는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독자적 발전의 길을 찾아갈 여지가 있으며, 그것이 또한 민족과 국가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닥쳐오는 세계화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풀뿌리민주주의와 풀뿌리자본주의의 실험장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과제인 통일을 위해서도 제주의 주체성 성장은 통일에의 접근로를 다변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일부이고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제주도 역사의 궤적 중 육지에 중심을 둔 국가의 역사와 어긋나는 점을 짚어내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국가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범죄가 될까?

 

나는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본다. 서로 다름을 용납하면서 어울리는 것,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원리이지만, 한민족은 이 원리를 특히 잘 체현함으로써 오랫동안 남다른 평화와 번영을 누려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원리도 백퍼센트 완벽한 실현은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름을 용납하지 못해 불필요한 고통을 겪은 일은 우리 역사에도 곳곳에 있었고, 지금 현실 속에도 있다. 원리의 실현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부단히 반성하며 극복의 길을 찾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화이부동의 원리가 특히 중요한 상황에 우리 민족은 처해 있다. 남북한 주민은 수십 년간 서로 다른 상황 속에 살아오며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길들여져 왔다. 통일은커녕 교류 확대만 되더라도 이 이질감이 어떤 문제들을 일으킬지, 탈북정착민(새터민)의 적응 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족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화이부동 원리의 강화가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화이부동 원리의 실패가 가장 컸던 사례의 하나가 제주도의 경험이다. 육지와 다르다는 조건 때문에 제주도민은 많은 고통을 겪어왔다. 먼 옛날 일만이 아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 제헌국회에 빈자리가 둘 있었다. 제주에서 뽑아 보낼 세 자리 중 둘을 치안상태 때문에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다른 지방에 비해 여당도 야당도 아닌 무소속 국회의원이 많이 선출되었다. “여당도 야당도 제주도에서는 괸당(친척) 앞에 힘을 못 쓴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1948년 발발한 4-3사건의 본질은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악랄한 폭력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 군사독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진상규명 작업이 <제민일보> 취재팀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미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도 제주도민을 이유 없이 적대시하며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 책임을 인정하고 2003년 10월 대통령이 사과함으로써 50여 년 만에 겨우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4-3사건은 제주도민이 역사를 통해 반도국가로부터 당해 온 차별과 억압의 한 사례일 뿐이다. 1272~1274년의 목호(牧胡)의 난은 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실상을 밝히기 어렵지만, 4-3사건보다도 더 참혹한 도민 탄압이었을 것 같다. 이 난 진압에 최영을 필두로 2만5천 명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당시 섬 인구를 5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면, 공식 기록처럼 일부 친원(親元) 세력의 반란으로 보기 힘들다. 전 주민의 항쟁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처럼 격렬한 상황은 아니라도 장기간에 걸친 철저한 억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1629년부터 200여 년간 시행된 출륙(出陸)금지령이다. 금지령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민들이 섬을 떠나고 싶어 하던 열악한 상황을 말해준다.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가장 엄중한 죄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되었거니와, 출륙금지령은 전 도민을 죄수로 감금한 셈이다.

 

제주 지낼 때 어느 단체에도 가입한 일이 없지만 몇몇 시민단체 간부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시민운동 의논하는 자리에 무심코 끼어 앉아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느 해 4-3 기념행사 준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새로운 의견을 낸 일이 있다. 4-3 기념행사에서 미국 비판에 치우쳐 왔는데, 다른 지역 시민운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본 비판에도 비중을 좀 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반대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근대화론이 꽤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억압은 종래 조선 정부의 억압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 지배를 통해 제주도가 큰 발전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때 이재수 세력이 일본인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실도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이 여러 면에서 현실적 어려움을 가져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이 어려움이 특히 큰 곳이 제주도였다. 식량 자급률이 원래 낮은 지역에 귀환에 따른 인구 증가가 40%에 육박했다. 4-3사건의 중요한 배경조건의 하나였다.

 

제주 역사의 기존 서술에서 섬과 반도국가 사이의 갈등 측면이 은폐-축소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민족국가의 정합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도민 입장에서는 ‘반역의 섬’이라는 누명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로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국가폭력의 위협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87년 대한민국이 폭력국가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을 계기로 4-3사건의 진상규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6년 특별자치도 위상 획득은 그 부산물의 하나다. 갈등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것이 부당한 폭력의 위협 대신 현실조건에 합당한 대우를 가져오는 시대에 이 나라는 들어선 것이다.

 

지난 3년간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에는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정통성은 60여 년의 기간을 통해 점진적으로 확충되어, 이제 남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 2003년 제주도민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정통성 향상의 중요한 한 단계였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정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 확립을 위해 중요한 일 아닌가. 한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많은 갈등을 품고 있는 국가다. 1987년을 계기로 갈등의 수준이 크게 완화되었지만 여러 방면의 갈등이 아직도 심각한 수준으로 남아있고, 근년에는 갈등 해소보다 격화를 향한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목전에 놓여 있는 민족문제 해결의 과제를 위해 갈등 수준의 또 한 차례 대폭 완화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 시점에서 연일 전해지고 있는 갈등 격화의 소식이 해밑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어두운 마음 한 구석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 지난 20여 년간 제주의 경험이다. <제민일보> 4-3취재팀, 폭력국가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던 작업 초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낸 덕분에 참혹한 갈등을 극복해내는 소중한 경험을 이 나라에 가져왔다. 고마운 일이다.

 

지역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그리고 앞으로 더 크게 닥칠 남북한 주민 간 갈등, 많은 갈등을 우리 사회는 품고 있다. 갈등의 정직한 인식이 그 극복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제주의 경험이 보여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