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7월 혁명의 성격에는 별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나폴레옹 몰락 후 복위한 부르봉 왕정이 너무 극단적 반동이어서 15년 만에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온 것이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루이18세(1814~1824년)와 샤를10세(1824~1830년)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꽤 많이 보였다. 그러나 부르봉 왕조는 연합국(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등)의 힘으로 왕조를 되찾은 것이었고, 연합국의 '비엔나 체제'에 묶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혁명 이후의 모든 변화를 부정하는 정책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 1830년에 이르러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몰락 당시에는 나폴레옹 체제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이 힘을 모아 부르봉 왕조를 복위시켰다. 그중에는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법통파(légitimistes)도 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부르주아 계층이 대혁명 당시보다도 크게 자라나 있었다.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잃으면서 법통파에만 의지하게 되었고, 결국 법통파의 극단적 반동성에 불만을 가진 모든 세력의 연합이 1830년 7월 혁명을 가져왔다.

7월 혁명은 여러 모로 한국의 1987년 6월 혁명과 방불하다. 보수와 진보의 타협이었다. 시가전에 나선 파리 시민은 급진적 공화주의자가 주류였지만,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 보수파가 방향타를 쥐게 되었다.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민 권력의 과격과 군주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똑같은 거리를 두고 올바른 중도(juste milieu)를 지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루이 필리프는 자신의 왕위를 '프랑스의 왕' 아닌 '프랑스 인민의 왕(Roi des Français)'으로 규정했다. 대혁명 이래의 인민 주권을 인정하는 이 관점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인민의 황제'를 표방한 뒤를 따른 것이다. (루이16세도 혁명 후 1891년 헌법에 따라 '프랑스 인민의 왕'을 칭한 바 있다. 그때까지 프랑스 왕의 정식 호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이었다.)

▲ 루이 필리프. ⓒwikipedia.org
루이 필리프의 배경과 경력을 보면 과연 1830년 대타협의 대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부르봉가의 방계 오를레앙가 출신인데 그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은 혁명을 적극 지지한 최고위 귀족으로서 '평등의 필리프(Philippe Égalité)'란 별명까지 얻은 인물이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1793년 1월 루이16세 재판에서 처형에 찬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공포 정치의 시작이 루이 필리프 부자의 혁명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다. 북방군의 뒤무리에 사령관 아래 사단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루이 필리프는 과격파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을 얻어 파리로 진격하자는 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1793년 4월 오스트리아군 진지로 넘어갔다가 그대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오를레앙 공작은 아들의 망명에 연루된 혐의로 그 해 말 단두대에 올랐다.

많은 프랑스 왕족과 귀족이 대혁명 이후 망명길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의 망명은 진짜 고생스러운 망명이었다. 대혁명을 지지했던 경력, 특히 아버지가 루이16세 처형에 찬성한 사실 때문에 그는 망명자 집단까지도 피해 다녀야 했고, 다른 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해외 재산을 활용할 길도 없었기 때문에 생계부터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1800년 영국에서 안정된 망명 생활에 접어들 때까지 여간 아닌 고생이 계속되었다.

영국에 자리 잡기 전에 미국에서 3년을 지낸 루이 필리프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판단에 있어서 미국 생활 중 얻은 것이 많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대혁명 전부터 자유주의 사상에 기울어 있던 그가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등 미국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진보적 정치관을 굳혔던 것이다.

<Wikipedia>에는 1830~1848년 루이 필리프 치세의 성격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루이 필리프는 앞선 부르봉 군주들의 허세와 사치를 삼가며 소박한 방식으로 왕 노릇을 했다. 겉보기에는 이렇게 검소한 모습이었지만,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후원을 받았다. 즉위 초에는 국민의 사랑을 받아 '시민의 왕', '부르주아 군주'라 불렸고, 나폴레옹 유해의 귀환 조치로 인기를 모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수록 보수적이고 제왕적인 통치 성격이 드러나면서 인기를 잃었다. 그의 통치 아래 노동 계층의 생활수준은 퇴화하고 소득 격차가 크게 늘어났다. 1847년의 경제 위기가 1848년 혁명과 그의 퇴위로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과 1987년 한국의 6월 혁명의 공통점이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두 혁명 모두 극단적 억압 체제를 극복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충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광범위한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유력 계층의 선택에 따른 '엘리트 연합'을 이루는 데 그쳤다. 그 앞 단계보다는 발전했지만 국민 대다수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안정된 체제를 세우지는 못한 것이다.

루이 필리프의 실패를 가져온 직접 원인은 온건 우파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 있었다. 당시의 우파는 왕정 지지자였다. 우파 중 과격파인 법통파는 귀족과 교회 중심이었고, 부르주아지 중심의 '오를레앙파'가 온건 우파였다. 그런데 루이 필리프의 정책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재벌 성격의 금융 부르주아지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펼쳐졌고, 중산층 성격의 산업 부르주아지를 외면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강남 좌파' 비슷한 온건 우파가 반정부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48년 2월 혁명의 도화선은 1946년 이래의 경제 불황이었다. 정부의 불황 대책이 금융 부르주아지의 보호에 치중하면서 산업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가 박탈감에 빠져 거리의 좌파와 손을 잡게 되었다. 좌파는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였다.

특권층을 대변하던 왕정이 물러나자 혼란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급진적 정책이 탄생했다. 보통선거권과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선언이다.

1830년 7월 혁명을 촉발한 조치의 하나가 선거권 축소였다. 지위가 향상되고 있던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선거권 확대가 당시 유럽의 추세였는데, 이것을 거꾸로 줄이려 한 것은 전형적 '반동' 정책이었다. 1830년 당시 인구 1800만 명의 프랑스에서 선거권자는 겨우 10만 명 남짓이었다. 1832년 영국의 선거법 개혁으로 인구 1400만 명의 잉글랜드-웨일스에서 선거권자가 50만 명으로부터 80여만 명으로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 선거권이 적어도 영국 수준까지는 늘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1848년까지 프랑스 선거권은 2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 필리프의 지지 기반이던 부르주아지가 돌아서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따라서 선거권 확장은 2월 혁명의 당연한 과제였는데, 이것을 일거에 900만 명으로 확장한 그야말로 '혁명적' 조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프랑스에 펼쳐놓았다.

한편, 좌파는 루이 필리프의 퇴위 직후 국민의 노동권을 선언하고 그 실천을 위해 임시 정부를 통해 국영 공장(국민작업장) 제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많은 일자리를 갑자기 만들어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땅파기 같은 쓸 데 없는 일거리도 더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지원자에게 일당 2프랑의 절반을 지불하는 사회보장제도처럼 되어버렸다. 그 1프랑이라도 받겠다고 지방의 실업자와 영세농민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거대한 룸펜 집단을 만들었고, 국영 공장 운영을 위해 불가피했던 증세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 인민, 특히 지방민들이 임시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4월 26일 제헌의원 선거 때까지 인민 대다수가 지나치게 과격한 개혁과 그에 따른 혼란에 불안감을 품게 되었기 때문에 보수파를 규합한 질서당(Parti de l'Ordre)이 53% 득표로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질서당 정부가 6월 23일 국영 공장 폐지를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혁명군'과 정부군 사이에 3일간의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태를 계기로 제2공화국은 일체의 혁명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6월 봉기(les journées de Juin) 진압으로 혁명의 기세가 꺾인 가운데 대통령 선거 준비가 진행되었다. 약 900만 명의 선거권자 앞에 여섯 명의 후보가 나섰다. 6월 봉기 진압을 지휘한 질서당 후보 카베냐크 장군의 당선이 일찍부터 확실시되었다. 직접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으면 질서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뽑게 되어 있었고, 카베냐크가 설령 과반수 득표는 못하더라도 압도적 최다표를 얻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물며 다른 후보가 과반수 득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런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74.44%의 표를 쓸어 담았다.

여섯 명 후보 가운데 네 명이 유의미한 득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파 후보로 카베냐크와 보나파르트 그리고 좌파 후보로 온건파의 레드뤼-롤랭과 과격파의 라스파유였다. 개표 결과는 카베냐크 19.65%, 레드뤼-롤랭 5.08% 득표였고, 혁명의 깃발을 선명하게 내건 라스파유는 참혹한 0.49% 득표에 그쳤다.

선거를 앞두고 루이 나폴레옹은 "나는 누구에게나 뭔가 줄 게 있는 후보"라고 장담했다. 우파에게는 질서와 프랑스의 영광을, 좌파에게는 개혁의 추진을 약속해 주는 위치라는 것이다. 선거 결과를 보면 우파와 좌파가 모두 그에게 흡인되었고, 특히 좌파, 특히 과격파가 많이 흡인된 것으로 보인다.

루이 나폴레옹 자신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정치 노선으로서 보나파르티즘의 애매성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후는 법통파고 모르니 공작(루이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같은 동생)은 오를레앙파, 그리고 나폴레옹 황태자는 공화파인데,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야. 진짜 보나파르티스트는 페르시니 공작(내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오래 지냄) 하나뿐이야. 미친놈이지!"

루이 나폴레옹의 압도적 승리는 당시 프랑스에 만연한 정치 혐오증의 결과였다고 볼프강 몸젠은 설명했다.

선거 결과는 사실상 농민, 소부르주아지, 일부 노동자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대중이 2월 혁명을 이끌었던 이제까지의 정치계급에 대해 보여준 불신임 투표였다. 최초의 프랑스 혁명을 종식시키고 동시에 나라를 유럽의 빛나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나폴레옹의 신화가 합리적 논증에 대한 나라 안의 요구, 즉 파리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혁명 노선 변경에 피로를 느낀 나머지 다시 안정과 질서를 희구하던 목소리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입증되었다. 보통선거권이 꼭 좌파적인 정치적 다수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는 초보수적인 결과들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원치 않은 혁명, 1948>(최호근 옮김, 푸른역사 펴냄), 309쪽)

몸젠의 설명으로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좌파, 특히 극좌파가 우파보다도 더 철저하게 루이 나폴레옹에게 흡인되었다는 사실이다. 혁명을 꿈꾸는 극좌파가 '보나파르트'의 이름에 더 쉽게 넘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대혁명이 빚어놓은 상황 위에 군사 독재 제국을 세웠던 나폴레옹은 혁명과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는가?

1848년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 그리고 그가 대통령과 황제로서 프랑스를 다스리는 동안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폴레옹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다음 회에 살펴보겠다. (계속)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