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을 방문하는 일부 한국인의 과도한 민족주의 과시를 회고하던 연변의 중견작가 우광훈씨(50세)의 이 말은 분노라기보다 탄식이었다.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한 한국인은 한중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연길에 와서 택시 기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윽박질러 택시에 태극기를 꽂고 할 일도 없이 시내를 빙빙 돌았다고 한다.
  
  이런 돌출행동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수그러들었지만, 같은 심리상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우씨는 말한다. 만주가 옛날에 우리 민족의 판도였다느니,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간도는 우리 땅이라느니 하는 주장이 중국 당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조선족 정책에 불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지적조차 ‘패배주의’라고 매도하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가 그는 묻는다.
  
  중국 조선족은 현실 속에서 늘 ‘민족’을 의식하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연변자치주에서도 조선족 인구비율은 40% 전후에 불과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고,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중국어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 고민이다.
  
  대표적인 문제의 하나가 자녀교육이다. 조선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중국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조선족 학교에 다니며 중국어를 덜 익힐 경우 진학과 취업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나 꼭 중국 명문대학을 나와 중국사회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자기 문화를 지키며 그 속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조선족 사회가 잘 발전해, 그 안에서 일 잘하는 것이 민족사회를 떠나 이민족들 사이에서 출세하는 것 못지않게 보람있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의 민족주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적 발전으로 귀결된다.
  
  한편 한국내에 사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떠한가? 대다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을 접할 일도 없고 외국어를 쓸 필요도 없다. 대통령에서 노숙자까지 모두 같은 민족이다. 따라서 ‘민족’을 의식할 현실적 필요가 없다. 정치를 걱정하는 데도, 돈벌이를 궁리하는 데도, 먹고 마시고 노는 데도, ‘민족’이 실질적 변수로 등장하는 일은 별로 없다.
  
  현실에 자극받지 않는 민족의식은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민족’은 거룩한 관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하는 사람도 ‘민족’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는 처신을 삼가야 한다는 관념을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민족의식은 현실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고민을 덜 하고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을 찾는 실제적 노력이 그들의 민족주의다. 중국의 국력을 키우는 데 공헌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의 투자유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타협주의? 패배주의? 타협도 좋고 패배도 좋다. 조선족 자제 중 빼어난 인재들이 민족사회를 떠나 사는 길을 강요받는 이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혼동되기 쉽다. 전세계 8천만 가까이로 추산되는 한민족 인구의 60%가 남한에 살고 있고, 경제주체로서도 다른 어느 곳의 한민족 집단보다 월등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 속에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인이 한민족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 조선족이든, 러시아 고려인이든,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한민족의 일원으로 행세하려면 뛰어난 민족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한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닥쳐오는 세계화의 시대, 통일의 시대에 이런 민족주의가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이겠다. 그런데 다른 문명권들이 블록화의 길을 걷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웃 나라들을 깔보고 미워하려고만 들며 블록화를 거부하는 독선이 바람직한 자세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체제를 겪어 온 한민족 집단들을 포용해야 할 통일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관념과 표준에 벗어나는 것을 일체 배격하는 편협성이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민족주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한국인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 조선족은 중국의 통치권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각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키워 왔는지는 서로 배울 일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거룩한 관념이 아니라 괴로운 현실로 끌어안고 씨름하는 자세는 단연 한국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이용재는 <나폴레옹 평전>(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나은주·이용재 옮김, 열대림 펴냄) 역자 서문에서 나폴레옹에 관한 책이 지금까지 8만여 권이 나와 있다고 했다. 나폴레옹 당대부터 지금까지 평균 매일 한 권 이상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

그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명쾌하게 파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책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의 하나겠지.) 꽤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그 제국이 진보적 현상인가, 반동적 현상인가를 놓고서부터 의견이 첨예하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너무나 많다.

"주권자로서 나는 공화국의 정신을 고수했다."

위 책 538쪽에 인용된 나폴레옹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대혁명의 계승자였다. 전쟁광이 이끄는 군사 독재 제국이 민주주의 발전의 상징적 사건인 대혁명의 계승자라니! 이 주장을 지지하는 보르도노브의 관점은 이렇다.

나폴레옹에게서 우리는 장군의 모습과 동시에 행정가이며 입법가의 모습도 보아야 한다.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 그는 황제, 즉 민간인 장군이자 창건자, 건설자, 조직가였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1789년 프랑스 군중을 봉기시켰던 대원칙들은 라인 강을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며 그 영향력도 곧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다른 왕들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폴레옹이 다른 왕들의 '대오'에 들어갈 수 없었던 요소이자 다른 왕들에게 불안함을 주었던 요인은 민법이 내포하고 있는 원칙, 그 중에서도 특히 평등의 원칙이었다. (548쪽)

나폴레옹의 진보적 역할을 보르도노브는 행정가와 입법가의 모습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성과를 라인 강 동쪽에 혁명의 '대원칙'을 이식시킨 데서 찾는다. 나폴레옹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입장에서도 여기가 한계일 것이다. 대혁명이 빚어 놓은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쥔 나폴레옹은 혁명 정신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어도 대혁명의 성과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제국의 힘을 키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널리 전파하게 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용한 대혁명의 성과 중 중요한 것 하나가 '국민' 동원력이었다. 혁명의 이념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가 '국민 주권'이었다. 지배 대상이던 서민 대중이 국가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근대 국민 국가는 방대한 국민을 조직함으로써 국력을 키울 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이념을 군대 조직에 활용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이룩했다.

체계적 징집은 나폴레옹이 아직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던 1793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의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이 두각을 나타내 출세가도에 오르게 되었다.) 1792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등 인접국과의 교전이 시작될 때 프랑스군의 전투력은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크게 퇴화해 있었다. 1793년 2월 국민의회가 30만 명의 징집령을 발했지만 잘 시행되지 못했다. 반년 후인 1793년 8월의 국민총동원령에서부터 체계적 징집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병력은 그 후 1년 동안 64만5000명에서 150만 명으로 늘어났다.

병력의 징집만으로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구의 10%를 군대에 갑자기 모아놓았을 때 그 보급과 훈련에서부터 국가 경제 운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다. 이 난관을 돌파하는 과업을 수행한 것이 당대 일류 수학자이기도 했던 라사르 카르노(1753~1825년)였고, 그에게는 '승리의 조직자'란 별명이 붙었다. 제1공화국에서 국방장관 등 요직을 맡았던 카르노는 1802년 나폴레옹의 종신 통령 취임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우대를 계속 받았다. 카르노가 조직한 '국민군'을 잘 물려받은 것이 나폴레옹의 군사적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였다고 전쟁사가들은 본다.

▲ 나폴레옹 1세. ⓒwikipedia.org
나폴레옹의 정복 사업에서 '나폴레옹 법전'의 의미가 주목된다. 절대 왕정을 벗어나 법치의 원리를 바라는 정복 지역의 민심에 부합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복 사업을 쉽게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전파'라는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도 국민군과 함께 대혁명의 성과를 나폴레옹이 활용한 사례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념을 키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혁명의 성과를 활용하는 데는 훌륭한 실적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르도노브는 나폴레옹 성공의 큰 원인을 그의 유연성에서 찾으며 아래와 같은 말을 인용한다.

"계획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문제에서는 전혀 내 자유가 아니었소. 내가 나름대로 조정을 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지요. 내 조정 능력보다 훨씬 더 힘이 센 수많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생겼으니까. 그럴 때마다 고집스럽게 저항하면서 암울해지기보다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혜를 택했소.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의 지배자가 아니었고 항상 지배를 받았소. 통령 정부 시절 내가 상승 기로에 오르던 초기에 내 진정한 친구들, 열정적인 투사들이었던 그들은 아주 순수한 선의에서 내게 묻곤 했소,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나는 항상 나도 모른다고 대답했소. 그들은 놀랐고 아마 내심 불만스러웠을지도 모르지." (555쪽)

유연한 신념은 기회주의자의 특성이다. '기회주의자'란 말이 욕으로 많이 쓰이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혁명의 혼란을 나폴레옹이 어느 정도 수습하고 혁명의 성과를 꽤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혁명을 반대하는 신념도, 혁명을 받드는 신념도 없었기 때문에 혁명의 성과 중 자신의 출세와 집권에 활용할 만한 것을 활용함으로써 '혁명의 현실화'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한 것도 남로당에 관여한 것도 생존과 출세를 위한 것일 뿐,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도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권과 권력 강화에 활용할 만한 조건들을 거침없이 활용했기 때문에 당시 이 나라가 필요로 하던 과제를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시점의 특정한 문제 해결에는 기회주의자의 유연성이 유용한 몫을 맡을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가 너무 강고한 권력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으면 사회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그것이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와 박정희 시대 한국의 비극이었다.

더구나 과거의 기회주의자가 거두었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성공이 후세에 신화화하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면서 나폴레옹3세의 집권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던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반복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웃음거리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시대착오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이 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말한 웃음거리는 실제로 역사에 종종 나타난다. 문제점과 한계가 드러났던 상황이 쉽게 되풀이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 한국에서도 '웃음거리 되풀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나폴레옹3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상황을 살펴본다.

볼프강 몸젠은 <원치 않은 혁명, 1848>의 제4장('혁명 전야의 정치 노선들')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와 공화제를 지향하는 급진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보수주의를 거론했다. 2월 혁명 당시에는 루이 필립 치세의 주류였던 자유주의가 공화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가 대두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보수주의가 강화되었다. 4월 이후 보수파 중심의 질서당이 국민의회를 주도하고 6월 봉기를 진압하면서 제2공화국에서는 혁명 이념이 빛을 잃고 있었다.

나폴레옹1세와 3세가 모두 혁명을 타락시킨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반혁명적 집단이 권력을 쥐고 인민 대중을 지배하면서 대중에 영합하기 위해 일부 개혁 조치를 선별적으로 시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이 큰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계급도 투쟁 노선을 명확히 세우지 못하고 교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투쟁으로부터 초연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투쟁 양상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권력이 바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1848년 프랑스에서 펼쳐진 상황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설명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복고된 왕정의 파탄 때문에 공화파 혁명을 자유주의파가 지지하게 되었지만 공화정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주장은 6월 봉기의 파국을 몰고 옴으로써 공화파의 신뢰를 잃었다.

여러 정파의 합종연횡이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뭔가 줄 게 있는 후보"를 자임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후보가 대통령 선거를 휩쓸었다. 입헌제와 공화제 등 혁명의 핵심 내용에 비켜 서 있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내세운 기회주의 세력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움켜쥔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광'을 전쟁을 통해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나폴레옹의 책임이 아니었다. '혁명 프랑스'에 대한 주변 군주제 국가들의 의구심이 전쟁을 몰고 왔고, 오랜 전쟁 상태가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권좌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전쟁을 너무나 좋아하고 아무런 정치적 이념을 갖지 않은 그가 권력을 쥐고 보니 져서 쫓겨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만 하게 되었다.

길고 참혹한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런데도 1848년의 프랑스 대중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프랑스의 영광'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 나폴레옹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겠다. (계속)

 


 

Posted by 문천

  한 나라의 첩보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거의 전쟁에 준하는 국권 유린행위로서 엄청난 외교적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20여년 전 김대중 대통령을 일본에서 납치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사실을 자인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감추고 있어 봤자 영원한 걸림돌이 될 것을 알기 때문에 맞을 매 빨리 맞자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986년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한 이스라엘인을 영국에서 납치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일이 있다. 피납자는 바누누라는 이름의 기술자. 바누누는 이스라엘이 ‘디모나’라는 암호명으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한 사실을 국제 반전단체에 제보해 이스라엘을 반핵운동의 표적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본국에 송환된 바누누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면회도 없는 독방 감금으로 12년을 지내다가 몇 년 전부터 교도소 마당이라도 산책할 ‘죄수로서의 권리’를 겨우 허용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비밀이다. 긍정도 부정도 않고 버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나 건드릴 생각도 않는다.
  
  조약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쌍무적인 것이다. 1970년 성립된 NPT는 핵무기 보유국이 당시까지의 5개국에서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조약이다. 미보유국이 미보유 상태에 묶여 있도록 하는 불이익을 보상하기 위해 보유국이 미보유국에 핵무기를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미흡하나마 미보유국에 대한 보상이다. 이 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미보유국은 NPT 체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핵무기를 실제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제멋대로 쓰겠다는 위협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핵무기 보유국의 의무다. 핵무기의 특성 때문이다. 보유국이 미보유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써 버리고 난 뒤에 조약에 어긋난 짓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파괴수단만이 아니라 위협수단으로서도 핵무기의 의미를 억누를 수 있어야 NPT는 실효성 있는 조약으로 성립된다.
  
  핵무기는 묘한 특성을 가진 무기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힘이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든 적든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듯, 핵무기 앞에서는 모든 국가가 비슷한 수준의 위협을 느낀다. 미국이 고성능 핵무기 수천, 수만 기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힘과 작은 핵무기 수십 기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이 마음먹는 데 따라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NPT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조약이다. 기존 보유국의 핵무기 독점은 아무리 그 사용을, 그리고 그 사용 위협까지 엄격하게 규제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전략적 이득이다. ‘평등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핵무기만 배제한다면 군사력은 군사비에 비례해서 결정되고 만다. 미국은 미보유국을 상대로는 아무 걱정 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NPT는 미국을 위한 조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자기네에게 유리한 조약에 더 많은 나라들이 묶여 있게 하려면 이 조약을 미국이 앞장서서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개방의 길을 겨우 내다보기 시작하는 북한을 부시는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아프가니스탄을 작살낸 직후다. 선제 핵공격 가능성까지 정권 주변에서 마구 풍긴다. NPT를 지켜도 그 대가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보장을 부시 정권은 지켜주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꼴 당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 북한이 미국과의 불가침조약을 요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북한이 호전적 정책을 버리고 있다는 것은 제네바 기본합의가 성립된 이래 여러 해 동안 꾸준히 확인되어 온 사실이다. 개방과 평화의 길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북한이 국제사회를 등지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이 남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기대다.
  
  그런데 미국은 켈리 한 사람의 증언을 근거로 북한의 불가침조약 요구를 묵살하고 NPT 기준과도 상관없는 무리한 핵사업 포기를 요구하는가 하면 중유 공급을 중단해 제네바 기본합의의 기본 틀까지 뒤집어놓았다. 그러니 의심이 드는 것이다. 과연 미국, 아니, 부시 정권이 바라는 것이 평화인가, 아니면 전쟁인가?
  
  대립의 격화를 좋아하는 부시 정권의 속성은 미사일 방어망(MD) 추진과 요격미사일 금지협정(ABM) 폐기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MD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타국의 핵공격으로부터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사업이다. 이것이 완성된다면 미국은 NPT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핵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소련과의 ABM 협정은 미국의 군비억제를 보장해 온 유일한 실질적 장치였다.
  
  북한의 NPT 탈퇴는 미국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적대정책 앞에서 존중할 만한 합리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감스러운 사태다. 우리 정부와 주변국들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유감과 우려의 뜻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언론이 ‘유감과 우려’의 뜻을 ‘비난’으로 포장해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사태가 북한만의 잘못으로 빚어진 것으로 온 세계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부시 정권의 기관지 노릇을 자청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무식도 이 정도면 죄악이다.
  
  거듭 말하지만 NPT는 불평등조약이다. 그러나 이만한 수준의 핵무기 억제체제라도 주어진 현실 앞에서는 잘 지켜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핵무기 미보유국이 무분별한 선제 핵공격만은 당하지 않게 한다는 NPT의 기본정신을 짓밟음으로써 NPT의 성립근거를 허물고 있다. 그 결과는 NPT의 최대수혜국인 미국으로 결국 돌아올 것이다.
  
  미국은 NPT가 제 구실을 하도록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핵무기 보유국의 위상을 양성화 해줘서라도 NPT의 통제에서 벗어난 핵무기가 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북한 들볶는 일보다 더 긴요하다. 북한이나 이라크보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더 큰 위협을 세계평화에 끼치고 있는지 미국인들은 정말로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무신경도 이 정도면 죄악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