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대의 미니버스"

 

LA에서는 자동차 없이 꼼짝도 할 수 없다. 전철도 지하철도 없고, 대부분의 버스는 구역 내에서만 운행하기 때문에 승용차가 아니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여행자라도 차를 빌리지 않으면 관광버스가 데려다주는 곳밖에 다닐 수 없다.

 

지금은 1천만을 헤아리는 LA의 인구가 아직 1백만이 안 되던 1930년대까지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전차 노선이 잘 깔려있는 도시의 하나였다. 그런데 1938년에 자동차회사 GM이 스탠다드 석유회사, 파이어스톤 타이어회사와 힘을 합쳐 전차회사를 매입했다. 그리고 전차를 없애버렸다.

 

2차대전 후 팽창하는 LA의 도시계획은 자동차 위주로 설계됐다. 시내의 어느 지점도 고속도로에서 6km 이상 떨어진 곳이 없다. 그러나 세계제일의 도로망도 7백만 대의 차량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LA시민들의 냉소적인 자랑거리 두 가지는 '세계최대의 주차장'과 '원조 스모그'다.

 

필자가 처음 제주에 와본 것이 1980년이다. 통계를 찾아보니 그때 제주도의 등록차량은 6천 대 미만이었는데 최근의 통계(1996년)는 12만여 대로 20배 이상 늘었다. 그 주범은 승용차, 특히 자가용 승용차다. 화물차는 이 기간 중 10배 는 반면 자가용 승용차는 물경 70배로 늘어 전체 차량 대수의 56%를 점하고 있다. 화물차의 증가를 생산활동의 성장에 대략 비례하는 것으로 본다면 소비 성향이 강한 자가용 승용차는 그보다 7배의 속도로 증가해 온 것이다.

 

거품시대의 대명사 자가용은 불황기를 맞아 수많은 제주의 가구에 힘겨운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나 쉽게 차을 없앨 수도 없는 것은 그 편리함에 길이 든 까닭도 있지만 공공운송 체계가 미흡한 때문이다. 이 거품을 시원스레 걷어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결단에 앞서 정책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보통사람들이 자가용 없이도 불편하지 않게 다니려면 얼마나 큰 공공운송 체계가 필요할 것인가? 제주에서 가장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도 하루 20회 이상 버스가 닿고 가장 한적한 군도(郡道)라도 50회 이상 버스가 지나다닐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지금 운행 중인 시외버스 330대의 갑절이면 충분하리라 한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버스는 중소형이면 된다. 330대의 미니버스를 투입해 수만 명의 자가용 차주들로 하여금 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앞으로도 자가용의 추가 수요를 막을 수 있다면 제주의 경제를 위해, 그리고 제주의 환경을 위해 엄청난 이득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갑절의 버스를 운행하면서 수지를 맞춘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운송은 공영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보다도 운임을 낮춰 적자 폭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마 연간 100억원대의 적자가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적자를 보전할 재원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자가용 승용차의 차량세를 대폭 올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새로 등록하는 차량은 곧바로 크게 올리되 기존 차량은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다. 상당수의 차주는 앞으로 자가용의 보유를 포기하겠지만, 역시 상당수의 차주는 보유를 계속한다고 볼 때 머지않아 차량세 수입 증가가 1백억원대에 이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세계라 하더라도 교통만은 시장논리에 방임할 수 없다는 것이 LA의 교훈이다. 제주의 환경은 제주인의 쾌적한 생활을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330대의 미니버스로 몇 만 대 승용차를 대신할 수 있다면 이 불황기에서 얻는 최대의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1998년 1월 14일에서 20일까지 <한라일보>에 “IMF와 제주”란 제목으로 여섯 꼭지 글을 올린 일이 있다. 5년간 살던 제주도를 떠나며 그곳에 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김현우님 글 “운전면허증을 찢어라!”를 보며 그중 한 꼭지가 생각나 꺼내보고, 그때의 생각에 몇 마디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기계문명에 대한 반감도 크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계의 하나가 되어 있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렇게 익숙하다는 사실에 합당한 이유가 없는 것 같고, 그 때문에 인류사회가 겪는 손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된다.

 

김현우님 글은 자동차의 존재가 사람들 생활에 끼치는 위해를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자동차가 넘쳐나는 데서 일어나는 문제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또 하나 중요한 측면은 에너지 낭비다. 자동차 운행에 쓰이는 연료 소비만이 아니라 자동차 재료에 들어가는 에너지까지 생각한다면, 현대문명의 위기를 구성하는 자원과 환경 문제의 주범 중 하나에 틀림없다.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에는 남용의 위험이 있다. 제일 눈에 잘 띄는 예가 휴대전화다. 30년 전에 존재하지도 않다가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는 휴대전화 중에는 과잉소비가 꽤 있다. 이 과잉소비에도 개인의 원자화, 사회질서 약화 등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자동차의 과잉소비가 초래하는 온갖 위험과 손해에 비길 만한 것은 아니다.

 

위험과 손해를 가져오는 물건이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자동차에는 필요악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자격에 한도가 있다. 꼭 필요한 규모보다 열 배 스무 배 넘는 과잉소비를 약간의 필요성 때문에 방치할 일은 아니다.

 

비교적 폐쇄된 공간인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도의 차량 수요에 대해 생각해 봤다. 1996년 제주도의 등록 차량 12만여 대 중 약 7만 대가 자가용 승용차였다. 공공버스는 3백여 대였다. 공공버스 대수를 갑절로 늘려 편의성을 높이면 얼마나 많은 자가용 보유자들이 자가용 대신 버스 서비스에 만족하고 살 수 있게 될까 생각하며 위 글을 썼다.

 

당시 제주도에는 버스로 쉽게 다닐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운행 간격이 길고 연발, 연착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어느 곳에서나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고, 또 어느 버스를 타기 위해 몇 분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면? 나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량등록세나 유류소비세를 엄청 높여 자가용 보유와 운행을 억제할 경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큰 비용을 감내하고 마이카를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차가 줄어든 도로 상황에서 ‘마이카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그들이 내는 세금은 대중교통 확충의 재원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부자가 못 되는 사람들 중에는 ‘마이카의 비용’에서 기쁘게 벗어나는 사람이 많고 환경조건의 향상을 반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마이카의 자유’를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대부분을 만족시킬 만한 카셰어링 제도가 보급될 것이다. 주먹구구지만, 제주도에 1천 대의 공공버스가 운행된다면 아마 지금 10만 대를 넘어섰을 자가용 승용차의 수요가 1만 대 미만으로 떨어지리라는 추정이 그리 허황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가용 승용차가 줄어들면 구입자금과 운행비용이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제주 사람들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질 것이다. 환경 훼손이 줄어들어 관광자원의 가치가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생활도 더 쾌적해질 것이다. 이렇게 두루두루 좋은 길을 마다하고 각자 자가용 굴리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제주 떠난 지 15년이 되었고, 최근 가본 지도 5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섬으로서의 특성 때문이다. 반도국가의 일부로서 제주가 겪는 마이너리티의 위치에 한민족이 중국문명권의 일부로서, 그리고 세계의 일부로서 겪어 온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겹쳐보고 싶은 마음에서 애초에 제주 가서 살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제주인은 마이너리티의 조건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많은 불이익과 고통을 겪어 왔다. 오늘의 상황에서 그 마이너리티의 조건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은 작은 나라 한국이 작다는 조건으로 겪어 온 불이익과 고통을 벗어나기 바라는 마음과 이어진 것이다. 제주에서 살아보고 제주 역사를 살피면서 나는 제주 잘 되는 길이 우리 민족 잘 되는 길과 통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키워 왔다.

 

자동차에 매여 살지 않는 세상을 꿈꾸면서도 제주를 통해 그 꿈이 이뤄질 것을 생각한다. ‘차 없는 세상’ 좋은 것을 모두들 알게 되더라도,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고 대통령이 말하는 대한민국에서 변화의 길을 찾아내고 실행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제주인의 합의가 한국인의 합의보다는 훨씬 쉽지 않겠는가.

 

제주인들에게 부탁한다. 자동차 줄이는 길을 찾아 달라고. 여러분 생활을 안락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이며, 관광지로서만이 아니라 낙토(樂土)로서 제주도의 가치를 늘리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주도가 보여주면 육지것들도 고마운 마음으로 배울 테니, 마이너리티의 조건을 유리한 쪽으로 뒤집는 길이기도 하다.

 

 

Posted by 문천

 

나폴레옹1세의 몰락에서 나폴레옹3세의 집권까지 걸린 33년의 시간이 박정희 저격에서 박근혜 집권까지 기간과 같다는 점에 흥미를 느껴 나폴레옹3세의 행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몇 주일 동안 살펴보면서 그를 배신자나 웃음거리로만 여기던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행정가로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도덕성에도 큰 파탄이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완벽한 도덕군자는 아니었지만, 역사상 '권력자'라 불릴 수 있는 어느 누구에 비해서도 큰 약점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다.

황제 즉위와 제국 선포 자체가 그를 하나의 웃음거리로 보는 첫 번째 빌미다. 그런데 그는 '제국'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건설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황제 즉위를 얼마 앞둔 1852년 10월의 '보르도 선언'이 이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국이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L'empire, c'est la paix)."

그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개간해야 할 방대한 영토가 있습니다. 건설해야 할 도로, 준설해야 할 항만, 정비해야 할 하천, 완성해야 할 운하, 부설해야 할 철로가 있습니다. 마르세유 건너편에는 프랑스로 통합시켜야 할 거대한 왕국이 있고, 서해안의 여러 항구에는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를 이어줄 근대적 수단이 아직 갖춰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구해야 할 폐허가 있고, 무너뜨려야 할 우상이 있으며, 승리의 길로 이끌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제국이 복원될 수 있다면 그 제국의 과업은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복은 그런 것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좋은 미래를 원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제국의 병사들이 될 것입니다." ('Napoleon 3', <Wikipedia>)

 

여기서 마르세유 건너편의 "통합시켜야 할 거대한 왕국"이란 알제리를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1830년부터 알제리 침략을 시작해서 1847년까지 통치권을 확립했고, 1848년부터는 지중해 연안의 알제리 북부 지역을 식민지 아닌 프랑스 영토 형식으로 편입하고 있었다. 나폴레옹3세 통치 방식의 특징이 알제리 정책에 잘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알제리 정책은 당시 유럽국의 식민 정책으로는 두드러지게 인도적인 것이었다. 프랑스인 이주를 북부 해안 지역에 제한해서 알제리인 사회의 교란을 억제하고 알제리 인에게는 프랑스 국적 선택권을 주었다. 1847년 이래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항쟁 지도자 에미르 압델-카데르의 망명을 1852년에 후한 조건으로 허용했다. (항쟁 중에도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로 널리 알려졌던 압델-카데르는 1860년 망명지인 다마스쿠스에서 기독교인 학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기독교인 보호에 적극 나섬으로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비오9세 교황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나폴레옹3세의 알제리 정책은 분명히 선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선량함의 문제점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과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 인의 인권을 옹호하되 그 인권의 기준은 시혜자의 것이었다. 그의 관대한 정책의 혜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슬람교도로서, 또 알제리 인으로서 정체성을 포기해야 했다.

▲ 나폴레옹3세. ⓒwikipedia.org
나폴레옹3세에게는 훌륭한 업적이 많이 있었다. 교통-산업 인프라 확충으로 영국에 크게 뒤쳐졌던 산업 수준을 대등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을 많이 배려하며 영국에 비해 고통이 적은 산업화를 이룩했다. 대외 관계에서도 이탈리아 민족 국가 건설에 큰 도움을 주는 등 유럽의 새 질서 도입에 나름대로 공헌했다. 현대인의 눈에 무엇보다 두드러진 업적은 파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파리 재건설에 25억 프랑의 자금이 들어가고 기존 건축물의 60%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부담의 결과가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의 하나로 남아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난 150년간 자동차의 보급을 비롯한 온갖 변화를 겪고도 자랑스러운 모습을 지키고 있는 이 도시는 행정가로서 나폴레옹3세의 뛰어난 능력을 증언해 준다.

파리 재건설 못지않게 중요한 나폴레옹3세의 업적이 교육 제도 개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1860년대에 역사학자 출신의 빅토르 뒤뤼이(1811~1894년) 교육부 장관을 앞세워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교육의 1차 주체가 교회에서 국가로 옮겨졌으며, 여성 교육이 궤도에 올랐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도와 교과목이 프랑스에서만큼 큰 효용성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곳이 따로 없다.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되풀이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웃음거리로"라며 나폴레옹3세를 조롱했던 카를 마르크스는 1869년의 같은 책 재판 서문에서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1세의 동상은 방돔 기념주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썼었다. 그것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것이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7년이 지나 정권이 무너진 사실보다는 17년이나 버텼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웃음거리라면 나폴레옹3세 자신보다 제2제정을 필요로 한 프랑스의 상황이 웃음거리다. 나폴레옹3세는 이 필요에 부응한 것이고, 그 역할을 잘 해낸 사람이다. 한 개인으로서 그의 능력과 노력에는 크게 탓할 것이 없다. 나 자신 이번 조사를 시작하기 전 그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문제는 제2제정의 정치가 독재자 개인에게 얽매였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문제가 황제의 건강을 둘러싼 비밀주의에 있었다. 1873년 그는 담석 제거 수술 중 죽었는데, 적어도 1860년대 내내 그를 괴롭힌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담석이 1870년에야 진단되었다. 통증 때문에, 그리고 통증을 견뎌내기 위해 복용한 아편 때문에 황제가 정상적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자기 건강의 이상이 알려지면 지도력의 균열을 불러올 것이 두려워 의사에게 몸을 맡기지 못했던 것이다.

개인의 판단력이 가진 한계는 내정보다 대외 관계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 자신의 파멸과 프랑스의 파국을 불러온 프로이센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1860년대 초반의 멕시코 개입에서 드러날 만큼 드러나 있었다.

1861년 군사 정권과의 내전에서 겨우 승리를 거둔 베니토 후아레스의 멕시코 개혁 정부가 외채 금리 상환을 유예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프랑스는 그해 말 스페인, 영국과 함께 멕시코에 출병했는데, 멕시코의 외채 2억6000만 프랑 중 프랑스의 몫은 절반이 넘는 1억3500만 프랑이었다. 그런데 그 중 7500만 프랑은 어느 스위스 은행가의 채권이었고, 이 은행가는 채권 회수를 위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황제의 측근(아버지가 다른 동생 모르네 공작)이 채권 회수 시 30%를 커미션으로 받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3세는 채권 회수를 핑계로 출병했으나 그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를 모방한 제국을 멕시코에 세워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키울 야심을 품었다. 그 결과 막시밀리안1세 황제를 내세워 '멕시코 제국'을 세웠으나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남북 전쟁을 끝낸 미국이 먼로주의를 내세워 압력을 가함에 따라 프랑스는 1866년에 멕시코로부터 철군했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이듬해 수도를 탈환한 후아레스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프랑스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멕시코 개입으로 6000명의 목숨과 3억여 프랑의 비용을 잃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때도 나폴레옹3세는 이익만 저울질하고 있다가 전쟁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중립을 지켜준 대가로 프랑스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합병에 대한 프로이센의 승인을 요구했다가 코웃음을 샀을 뿐이다.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프로이센의 국력이 프랑스와 대등한 수준으로 자라나 있는데도 나폴레옹3세는 프로이센을 계속 깔보기만 하다가 결국 최후의 일격을 맞게 된다.

1870년 초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의 친척 레오폴드공이 스페인 왕위 후계자 물망에 올랐을 때 프로이센 세력의 확대를 꺼린 나폴레옹3세가 반대에 나섰고, 레오폴드공은 즉위를 포기했다. 그런데 나폴레옹3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빌헬름1세에게 그 가문의 어느 인물도 장차 스페인 왕위를 넘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보장을 받으려 했다.

7월에 빌헬름1세가 엠스 온천에 있을 때 프랑스 대사가 왕을 접견하고 이 문제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 왕의 측근이 그 내용을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전보로 알렸는데, 비스마르크는 왕과 대사가 험악한 말싸움을 나눈 것처럼 '마사지'를 해서 언론에 흘렸다. 나폴레옹3세의 자존심을 긁으려는 의도였다. 이것이 보불 전쟁의 도화선이 된 '엠스 전보'였다.

나폴레옹3세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가 도발자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프랑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인구 2200만 명에 병력 70만 명이었고 프랑스는 인구 2600만 명에 병력 38만 명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최근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잘 조직되어 있는 반면 프랑스군은 알제리, 이탈리아 등지에 정예 부대가 분산되어 있었다. 1866년 이후 프로이센과 같은 징병제 도입을 시도하려던 황제의 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무리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전쟁을 직접 지휘한다고 나서서 패전을 더 빠르고 더 참혹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개전 두 달도 안 되어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즉각 제정이 폐지되고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3공화국은 이듬해 1월까지 처참한 파리 농성을 이끌었고, 빌헬름1세는 베르사유에서 포위전을 지휘하던 중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나폴레옹3세의 영욕을 더듬어보다가 한신이 유방을 격려하며 항우를 평한 말이 생각난다.

"항우가 용맹하다 하나 그것은 필부의 용기이고 항우가 어질다고 하나 그것은 소인배의 어질음이니 천하를 다스릴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나폴레옹3세는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고,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항우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제왕(帝王)의 모습에 이르지 못한 것은 '소아(小我)'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개입에서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작은 욕심과 작은 자존심이었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자세가 투철하지 못한 것이었다.

역사가 되풀이할 때 두 번째는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는 말에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겐 웃음거리일지 몰라도, 안에서 겪는 사람에겐 두 번째 아니라 몇 번째라도 새로운 비극이다. 1848년 이후의 프랑스가 제2제정으로 흘러가고 나폴레옹3세가 집권한 것이 운명적 필연은 아니더라도 벗어나기 힘든 역사적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이용해서 권력을 쥔 나폴레옹3세는 끝내 치졸한 사심(私心)에 얽매여 나라를 망치고 자기 몸을 망쳤다. 그러나 한 측면이나 마지막 장면만을 놓고 그의 통치를 통째로 폄훼할 일은 아니다. 역사에 명멸한 숱한 권력자 중에 프랑스를 근대 국가로 만들고 파리를 근대 도시로 만든 그의 공로를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인과 개인 간의 괴리는 모든 절대 권력의 비극이며, 이 점에서 나폴레옹3세의 비극은 그 아저씨 나폴레옹1세의 비극 못지않게 처절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

 

훈령 조작 사건은 이동복이 혼자 저지른 일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집단의 범죄행위가 드러났을 때 “개인의 일탈”로 미뤄버리는 ‘꼬리 자르기’는 통상 사용되는 수법이다. 정말로 개인의 일탈로 인한 단독범행인지, 조직범죄를 감추기 위한 꼬리 자르기인지는 범죄의 동기와 수단을 검토하면 대개 판별된다.

 

예컨대 윤창중 추행 사건은 동기가 개인적인 것이고 조직의 도움 없이 혼자 저지른 것이므로 단독범행이 분명하다. 반면 청와대 직원들의 검찰총장 ‘찍어내기’ 관여는 동기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불법 조사를 각 개인의 힘만으로 행한 것이 아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조직범죄의 의심을 벗어나기 힘들다.

 

회담 결렬을 목적으로 한 이동복의 훈령 조작을 소신 관철이라는 개인적 동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짓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훈령을 차단하고 조작하다니. 이보다 더 심한 ‘국기 문란’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그 결과인 남북관계 파탄이 몰고 올 국가적 규모의 이해관계 변동은 한 개인이 바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이동복의 범죄는 혼자 힘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연 안기부장과 엄삼탁 기조실장이 할 일을 않거나 안할 일을 해줘야 회담 결렬을 위한 조건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부수적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동복이 결국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것도 범행의 진짜 주체인 배후세력의 힘 덕분일 수밖에 없다.

 

이 조직범죄에 참여한 사람의 대부분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맡은 반면 이동복은 현행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감출 수 없는 방법으로 저지르는 역할을 맡았다. 총대를 멘 것이다. 그에게 총대를 메워준 것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이 범죄가 너무나 대담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미국의 네오콘 세력과 CIA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국, 특히 부시 정권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여 가면서까지 북한의 고립을 풀어주지 않으려고 기를 쓴 사실을 놓고 볼 때, 미국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떠오른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 해소로 인해 네오콘의 기세가 가장 수그러들었을 때였다.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를 돕기 위해 1992년 팀스피릿 훈련까지 취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선거 와중에서 적극적 공작이 어려울 때였다. 특별한 증거가 없는 한 미국의 입김이 이 사건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가능성에는 고려할 여지가 크지 않다.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동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더 많았다. 앞에서 소개한 임동원의 회고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연 당시의 김영삼 세력이 진행 중인 고위급회담의 결렬을 바라고 있었을까?

 

그 시점까지 김영삼이 냉전체제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에 관해 전향적 태도를 보인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완상을 통일부총리에 임명하자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는 평화주의자들이 큰 기대를 걸었다.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도 김영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한완상이 부총리를 할 때에 통일정책 평가위원으로 위촉된 것을 계기로 하여 93년 4월 13일에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리영희는 스스로 “‘문민시대’라는 말을 되풀이해 사용”하면서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에 상당한 신뢰”를 보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관은 이전 정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 확산 금지조약 탈퇴라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인모 씨 북송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편 1권 268쪽)

 

그러나 김영삼이 평생의 라이벌로 여긴 김대중이 남북관계 해결에 신명을 바친 진지함에 비하면 그의 남북관계 이해는 피상적인 것이었고 그와 관련된 태도는 정략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김대중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를 반동적인 태도로 몰고 간 측면도 느껴진다.

 

(김영삼은) 93년 12월 한완상을 물러나게 했으며, 이후 대북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오락가락 문제와 관련, <문화일보> 기자 김교만은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나 장기적 비전이 없었다”며 “따라서 누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가에 따라 대북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한완상의 퇴진은 그가 영국에서 귀환한 김대중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선물로 보낸 게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영삼이 화를 냈다는 것이다. 한완상의 경질은 김영삼의 통보가 아니라 경질 1시간 전 비서실장 박관용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이루어졌다. (강준만 위 책 337쪽)

 

1990년 1월의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 내에서 벌어진 노태우와 김영삼 사이의 갈등과 힘겨루기에 관해서는 당시에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었거니와, 20년 넘게 지난 이제 그 마지막 단계의 양상을 노태우의 회고로 다시 확인해본다.

 

나는 대권 후보가 너무 일찍 부각되는 것은 우리 현실로 보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김 대표 측에서는 대권 후보가 조속히 가시화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합당을 했으면서도 우리 측을 확고하게 믿는 자세는 아닌 듯했다. ‘이용만 당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버림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직접간접으로 김 대표를 차기 대권 후보로 보장받으려고 했다. 국민들에게도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애썼다. (...)

 

합당 목적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와 여당은 국정을 원만히 수행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차기 정권을 담보받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노태우 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 펴냄) 상권 500-501쪽, 밑줄은 필자가.)

 

합당 2년 후인 1992년 시점에서 노태우는 정국 주도권이 차기 후보에서 넘어가는 것을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밑줄 친 단어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근 2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노태우의 의식 속에서 ‘그들’과 ‘우리 측’은 구분되어 있다.

 

김영삼은 여당 대표로서, 그리고 1992년 5월 이후에는 여당 대통령후보로서 현직 대통령과 별개의 권력 거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후보 선출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노태우의 ‘우리 측’과의 대립을 통해 입지를 확장해 왔고, 후보가 된 후에도 노태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힘썼다.

 

문제의 제8차 고위급회담이 진행 중이던 9월 16일에 회담 대표로 평양에 가 있는 정원식 총리의 경질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 시점에 그런 주장을 내놓다니 주장의 타당성에 관계없이 김영삼의 악착스러움을 보여주는 일이다. 노태우는 이틀 후 민자당 탈당으로 이에 응수했다. 훈령 조작이 저질러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의 일이다.

 

9월 23일의 고위전략회의에서 훈령 조작 사건 중 최소한 이동복의 범죄 행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응분의 조치가 취해질 수 없었던 것은 대통령선거 상황 때문이었다. 권력을 참월당한 노태우 입장에서도 민자당의 선거 패배를 불러올 조치는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자당 탈당을 통해 극단적 조치의 위협을 풍기기는 했지만 그 위협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도끼 가진 자가 바늘 가진 자를 못 당하는 법인가 보다.

 

김영삼이 훈령 조작의 물의에 불구하고 이동복을 계속 기용한 것을 보면 이동복의 범죄에 김영삼 측의 비호가 있었을 개연성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김영삼은 1992년 가을, 대통령선거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고위급회담의 결렬을 정말로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에 정략성이 있었다고 하는 강준만의 지적은 옳다. 그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내세우고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 한 정략적 의도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세가 전적으로 헌신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계적 변화에 부응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발전을 바라보았다는 점을 평가해 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략적이기는 했어도 반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도 북방정책에 대한 기본자세는 노태우와 같은 틀이라고 나는 본다.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발전해 준다면 그것을 자기 공로로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정략성이 도를 지나쳤다. 노태우가 북방외교의 성과를 다 따 먹는 것을 가로막아야 자기 몫이 늘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동복의 훈령 조작을 비호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김영삼이 당시 남북관계를 파탄내야 한다고 작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당장 진행 중인 고위급회담에 일시적으로 제동을 걸 정략적 의도 정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의 파탄을 더 분명히 원하는 세력이 김영삼의 정략적 의도를 이용함으로써 훈령 조작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세력이었을까? 군부와 안기부의 대결주의 세력이 얼른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에 이동복의 이력을 검토하면서 새로 떠오른 생각이 있다.

 

1937년생의 이동복은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2년부터 10년간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부대표를 지낸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끌어들인 것이라 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년간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지내고 1991년에 안기부장 특보로 들어가 대북정책에 다시 종사하게 되었다.

 

1971년 이래 대북정책 전문가로 활동해 온 이동복의 경력 중 특이한 대목 하나가 이번에 내 눈길을 끌었다. 통일원 대화사무국장을 그만둔 1982년부터 1988년 총선 출마 때까지 6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대목이다. 1993년 6월 10일자 <시사저널>의 “돌아온 ‘남북회담 실세’” 기사에 이렇게 나와 있다.

 

중앙정보부 남북대화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약화시키는 차원에서 대화사무국을 통일원으로 편입시키자 초대 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이범석 국토통일원장관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그는 보따리를 싸서 나와버렸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었다. 이회장은 영어를 잘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강한 이씨를 그룹회장 고문으로 앉혔다. 이후 그는 삼성항공 부사장, 삼성의료기 사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기업인으로 지내는 동안에도 남북회담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삼성에 있으면서도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삼성에 있으면서도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쪽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어를 잘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강한” 일반 인재들에게 바랄 수 없는 그만의 채용 자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대기업도 사업전략 결정을 위해 남북관계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2년 당시 경쟁기업 대우와 현대가 대북관계 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던 데 반해 삼성은 큰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후 남북관계의 퇴행은 대우의 몰락과 현대의 쇠퇴를 위한 배경조건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오늘날 삼성이 누리는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 1992년 이후의 남북관계 파탄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때는 대기업이 국가 중대사에 주동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때였다. 쟁쟁한 재벌이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해체되어 버리는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정권의 비호만을 업고 재벌의 꿈을 부풀리는 사업가들이 난무하고 있던 때였다. 재벌을 권력에 기생하는 존재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보고 있었다. 이동복의 경력 중 ‘삼성 6년’이 눈에 띄어도 무심히 지나치기 쉬웠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실토하는 세상이다. 삼성 엑스파일과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보며 누구도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삼성의 철저한 ‘인맥 관리’가 20년 전에는 없었겠는가? 6년간 삼성 임원을 지낸 이동복이 1992년에 삼성과 아무런 커넥션이 없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1987체제’ 안에서 제일 큰 권력을 획득한 것이 대기업이다. 이제 돌아보면 1992년 시점에서도 삼성, 현대, 대우의 3대 재벌은 국가권력에서 풀려난 상황을 각자 나름대로 활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현대와 대우는 남북관계 전개에서 맡을 역할에 기업의 명운을 걸고 있었고, 정주영은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서서 비록 스스로 당선을 바라보지는 못하더라도 판세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선출된 권력의 향배에 관해서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많이 있다. 하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움직임에 관해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도 못 된다. 군사독재가 끝난 대한민국의 진로에 대기업이 작용한 몫에 비해 그 실상은 너무나 가려져 있다.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동복과 삼성의 커넥션 같은 것은 그 개연성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