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이 선언을 전후해서 독일이 통일되는 등 동유럽 공산권이 해체되었다. 냉전에 묶여 있던 한반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정부의 반응은 많은 국민들에게 뜻밖으로 느껴질 만큼 빠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미 1988년 2월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방외교’ 정책이 제시되었고, 몇 달 후에는 이를 구체화한 ‘7-7선언’이 나왔다. 몰타 선언 시점까지 한국은 이미 헝가리와 국교를 맺는 등 동구 여러 나라와 관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몰타 선언 이후 한국의 북방외교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린 데 이어 9월 말 국교가 맺어졌다. 중국과의 관계는 톈안먼 사태로 인해 다소 지체되었으나 1991년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 대표부 개설을 거쳐 1992년 8월 국교 수립에 이르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개막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고위급도 보통 고위급이 아니라 남북 총리가 2년 후 제8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지속적으로 여는 회담이었으니 웬만한 정상회담보다 더 크고 깊은 접촉이었다.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가장 기본적 원칙을 담은 것으로 인정되는 1991년 12월의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역시 이 회담의 산물이다.

 

그런데 1992년 12월로 예정되었던 제9차 회담이 취소되고 남북고위급회담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 회담을 통해 발전되어 온 남북관계도 중단과 퇴행을 겪게 된다. 냉전 때문에 갈라져 있던 민족이 냉전 해소에 따라 화합의 길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길이 막히면서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멍에를 오랫동안 벗어 던지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만 2년간 8회에 걸쳐 남북한의 총리 이하 수십 명의 대표단이 만나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 방향을 의논한 고위급회담은 냉전 해소에 따른 세계적 변화에 발맞추는 노력이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편 4권 140-145쪽 “노태우 정권의 정략적 대북정책”처럼 북방외교의 정략성을 지적하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거대한 세계적 변화 앞에서 정략성은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위급회담은 남북기본합의서라는 획기적 성과를 낳고도 더욱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면서 동력도 충분히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는 남북관계 변화의 움직임이 1992년 말 갑자기 중단되어 버린 것이 무슨 까닭이었을까? 아직까지도 걸핏하면 남북관계를 중단과 퇴행으로 몰아가곤 하는 장애 요소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1992년 9월 제8차 고위급회담에 파탄을 몰고 온 ‘훈령 조작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통일원차관으로 회담에 참석했던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289-290쪽에서 회담 직후의 조사 내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발-수신된 모든 전문을 안기부로부터 제출받았다. 일련번호가 표시된 9월 17일자 평양 발신 전문 4건과 서울 발신 전문 3건 등 총 7건의 3급 비밀 전문의 사본이 입수되었다.

 

제1호 전문은 정원식 총리의 지시로 내가 평양에서 새벽 0시 30분에 발송한 ‘청훈 전문’ 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평양에서 발송된 제2호 전문이 있었다. 202(이동복)가 102(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보낸 이 전문의 내용은 놀랍게도 “청훈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전문에는 “전문을 보고 난 후 파기하라”는 조치 사항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제3호 전문이 오전 7시 15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발신되었는데, 문제의 “3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사실 이 전문은 공식 전문이 아니라 102가 202에게 보낸 SVC(서비스)가 표시된 사신(私信)이었다. 그러나 정 총리와 내가 평양에서 본 전문에는 102와 202, 그리고 ‘SVC’라는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보내온 정식 훈령으로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이날 오후 4시 15분에는 서울에서 수석대표 앞으로 또 하나의 전문(제7호)이 발신되었다. 이 훈령은 이미 정해진 협상전략대로 “2개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하여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실제로 북측이 동의했던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의 정식 훈령이었지만, 차석 대표이자 이 문제에 관한 협상 책임자인 나에게는 물론, 수석대표인 정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고위급회담의 남한대표단 대변인 이동복은 당시 국무총리 특보란 명함도 갖고 있었지만, 실제 역할은 안기부장 특보였다. 평양에서 회담이 열릴 때 대표단과 서울 사이의 통신을 안기부가 맡고 있었는데, 이동복은 이를 이용해 수석대표 정원식 총리가 보낸 청훈(請訓) 전문을 가로챈 ‘청훈 차단’,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대통령의 훈령처럼 대표단에게 내놓은 ‘가짜 훈령 조작’, 그리고 대통령이 뒤늦게 보낸 훈령을 감춘 ‘진짜 훈령 묵살’을 저질러 대표단의 임무 수행을 방해했던 것이다.

 

간이 얼마나 큰 사람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단독범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독범행을 주장한 이동복은 아무런 형사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의 범행 성공을 도운 것으로 보이는 이상연 안기부장과 엄삼탁 기조실장의 책임은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동복의 안기부장 특보(차관급)와 남북회담 대표로서 신분과 역할도 유지되었다. 사건 며칠 후 열린 고위전략회의(총리, 통일부총리, 안기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통일부차관과 이동복 참석) 상황을 임동원은 같은 책 293쪽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그가 어째서 이토록 무리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도 모두들 알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8-15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사업을 파탄시킨 것이나, 이번에 훈령 조작으로 또다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을 파탄시킨 것에 대해 모두들 ‘정권 재창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안보 불안과 긴장 조성으로 남북관계가 파행되는 것이 특정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유리하다’는 일부 안기부 간부들의 구시대적 판단에 따른 조직적 활동의 소산일 터였다.

 

단순히 노태우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기에는 민족의 운명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큰 중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한 사정에 대해 드러내놓고 논의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정작 당사자인 이동복 특보도 자기 혼자 저지른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아무런 변명이나 자기방어도 하지 않은 채 시종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원식 총리는 결국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는 한마디 말로 회의를 마쳤다.

 

이 전략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9월 2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의원의 ‘폭로’로 청훈 조작 사건이 부각된 것이 전략회의의 배경인데, 이 사실을 임동원은 위 책에서 서술하지 않았다. 임동원 자신이나 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표단 관계자가 이부영 의원 측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원 남북관계 ‘폭로성 심문’

 

22일 통일원 회의실에서 열린 외무통일위원회의 통일원에 대한 국정감사는 남북대화 통일정책에 대한 안기부의 관여 문제를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날 이례적으로 이동복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민주당-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안기부 소속으로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고 있는 상황의 부적합성과 대변인의 사퇴 의사 *고위급회담 과정에서의 ‘월권’행위 여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발언들의 문제점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

 

안기부 쪽에 대한 공세의 포문은 이동복 대변인을 증인으로 신청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공식적으로는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 국무총리 특별보좌관‘으로 돼 있는 이 대변인이 실제로는 ’안기부장 제1특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열렸다. 청문회를 방불하게 하는 1문1답 식의 진행방식으로 들어간 이 의원은 “안기부장 특보가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으면 조직 간의 마찰을 빚을 수 있으므로 당연히 대변인의 소속은 통일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궁했다. 특히 이 의원은 “지난 9월 제8차 고위급회담 당시 정부쪽에서는 북에 가 있는 대표단에게 이인모 씨 송환과 관련해 기존의 동진호 선원 송환 요구를 빼도 좋다는 훈령을 보냈는데, 이 대변인이 이 훈령을 무시하고 원래 입장을 고수해 이 부분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

 

민주당-국민당 의원들은 이부영 의원이 처음부터 강성으로 나오자 좀 더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나섰다.

 

정대철 의원(민주)은 “이 대변인의 신분이 노출됐으므로 남북대화에 비효율적이고, 북에서 오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결론적으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계속하려면 안기부쪽 직책을 사퇴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변인을 사퇴하라”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이어 발언권을 얻은 조순환 의원(국민)은 “오늘 이 대변인이 안기부장 특보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 솔직히 놀랐다”고 털어놓은 뒤 “이런 귄위주의 시대의 소산은 용납될 수 없다”며 안기부쪽 직책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는 이어 북한 핵의 생산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 대변인은 사퇴 공세가 거듭되자 “나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 직분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해서 대표단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대변인으로 일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겸직 신분이 지장 있다는 견해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 (<한겨레신문> 1992년 9월 23일)

 

배후관계도 밝혀지지 않았고 형사 처벌은커녕 인사 조치조차 따르지 않았지만 이 정도 기본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임동원은 공직에서 물러나도 좋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몇 달 후 차관직을 물러나게 된다. 나중에(1995년 2월) 그가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취임할 때 김대중 이사장은 환영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런 유능한 분을 사무총장으로 영입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제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소위 ‘훈령 조작사건’이 생겼을 때 이를 계속 추궁한 불굴의 용기와 정의감입니다. 차라리 재야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기는 쉬워도 공직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참된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같은 책 318-319쪽)

 

199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이동복이 그토록 ‘소신껏’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동이 순탄하지 못했던 사정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강경노선을 향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설명이다. 그러나 퇴임까지 다섯 달이나 남은 현직 대통령을 그렇게까지 ‘생까는’ 짓이 선거가 석 달 남은 후보의 영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을까? 이 사건에 작용한 다른 요인은 없었을지, 다음 회에서 짚어보겠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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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8 13:37 신고

    그 동안 "남북관계사"로 생각하던 작업을 "냉전 이후"란 가제로 바꿔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냉전 해소 이후 세계와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남북관계의 전개에 비춰가며 살펴보는 작업입니다.
    본격적 집필을 연초에 시작할 생각으로 샘플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방향에 대해서든 방법에 대해서든 의견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2. 2013.12.09 16:22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보면, 그 5공시절에 그 자신이 그 흉악한 전두환을 설득해서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 놓고서 북한을 특사로 다녀오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전두환의 대북의식이 급변해버렸는데, 그 배후에 당시 안기부장/ 국무총리 등 5공 시절 잘나갔던 노신영을 주축으로 한 극우친미세력들이 공작한 결과라고 하더군요(회고록 일반의 흔한 성격상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적절한 가감이 필요하겠지만, "황태자"라고 지칭되던 6공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5공 시절에도 이철희/ 장영자 사건 등 굵직굵직한 이슈는 죄다 자신이 다 조언해서 해결되었다는 식의 허장성세가 은근 깨알웃음을 많은 선사합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등 자신에게 껄끄러울 수 있는 사안은 과감히 넘어가 버려서 책 이름에 걸맞게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한 것 같지도 않구요^^)

    중국 수교과정에서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서동권이 은근히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했다는 내용을 TV에서도 말하는 것을 보면, 앞서 5공시절의 노신영류 인맥, 더 거슬러서는 50년대 김창룡류의 방첩대 인맥까지 연결되는 안기부내 극우반공인맥들의 면면한 흐름이 남북화해/ 대화 국면에 6공시절의 민자당 YS계 재창출파의 정권적 이해와 맞닿아 이런 대형사고를 쳤던 것이 아닌가 쉽습니다.. (그러고 보면, 안기부 극우인맥과 YS계 정권 이해의 접점이랄 수 있는 왕실장 김기춘이 부산 초원복국집 모의를 한 것도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닌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익히 알려졌다시피 YS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92년 후반기에는 정권에서 사실상 축출/ 탈출한 상태였었고, 앞서 중국 수교 시 안기부장 서동권이 자신을 뒷조사한 것이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양해/승인하에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노태우는 특유의 조심스러움으로 이쪽 저쪽 다 판돈을 다 거는 심정으로 안기부 내 극우반공인맥의 북방외교에 반하는 흐름도 용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이에 더하여 북방의 혼란을 정권재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YS계의 정파적 이해에 대한 동의/ 승인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듦으로서 이후 YS 집권시 사정의 보험으로 활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훈령 조작사건의 조연으로 참여했던 엄삼탁이 이후 YS 집권 후 사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는데, 무슨 뒷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그 뒤에 더 화끈하게 사업을 추진하지 못해서 미운털이 박힌 걸까요???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정치인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고, 오항녕 교수 글을 읽으니까 오늘날 공무원 합격은 공무원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과거 합격은 자격을 합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그 무수한 관료들의 파직이 오늘날의 파면과는 성격이 달라서(오늘날로 치면 직위해제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공무원 신분을 잃어버리는 오늘날처럼 그다지 큰 충격이 아니었다고 하던데요...그래도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사안에 대해서 관료가 국가의 공적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명확히 밝히고, 형식적일 수도 있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려서 국왕도 상언을 적극적으로 구함으로써 언로를 틔우려고 했는데, 지금은 형식적 3권 분립이라는 미명과 언론/ 비판은 비정부 언론기관을 통해서라는 기능주의적 분리 관념에 따라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의 국가시책의 부당한 운영에 대한 비판은 일절 막는 것이 이러한 부문에서는 퇴행적으로 보입니다..국외자일 수 밖에 없는 비 행정부 입법/사법부, 언론기관의 비판뿐만 아니라 행정부 내 비판적인 목소리를 활성화하는 제도적 방안이 필요하고, 엄격한 3권분립주의, 막스 베버적 기계적 집행/ 기술관료의 관념도 이제는 수정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봅니다.....

  3. 2019.02.20 19:56

    돈 오버도퍼의 The Two Koreas를 보면 1992년 가을 안기부의 '이선실 간첩사건' 발표도 노태우의 대북 유화책에 반발한 세력의 작품이라더군요. 그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땐 별로 와닿지 못했는데, 위 훈령 조작 사건을 접하니 이해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