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동안 살펴보면서 그를 배신자나 웃음거리로만 여기던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행정가로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도덕성에도 큰 파탄이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완벽한 도덕군자는 아니었지만, 역사상 '권력자'라 불릴 수 있는 어느 누구에 비해서도 큰 약점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다.
황제 즉위와 제국 선포 자체가 그를 하나의 웃음거리로 보는 첫 번째 빌미다. 그런데 그는 '제국'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건설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황제 즉위를 얼마 앞둔 1852년 10월의 '보르도 선언'이 이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국이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L'empire, c'est la paix)."
그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개간해야 할 방대한 영토가 있습니다. 건설해야 할 도로, 준설해야 할 항만, 정비해야 할 하천, 완성해야 할 운하, 부설해야 할 철로가 있습니다. 마르세유 건너편에는 프랑스로 통합시켜야 할 거대한 왕국이 있고, 서해안의 여러 항구에는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를 이어줄 근대적 수단이 아직 갖춰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구해야 할 폐허가 있고, 무너뜨려야 할 우상이 있으며, 승리의 길로 이끌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제국이 복원될 수 있다면 그 제국의 과업은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복은 그런 것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좋은 미래를 원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제국의 병사들이 될 것입니다." ('Napoleon 3', <Wikipedia>)
여기서 마르세유 건너편의 "통합시켜야 할 거대한 왕국"이란 알제리를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1830년부터 알제리 침략을 시작해서 1847년까지 통치권을 확립했고, 1848년부터는 지중해 연안의 알제리 북부 지역을 식민지 아닌 프랑스 영토 형식으로 편입하고 있었다. 나폴레옹3세 통치 방식의 특징이 알제리 정책에 잘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알제리 정책은 당시 유럽국의 식민 정책으로는 두드러지게 인도적인 것이었다. 프랑스인 이주를 북부 해안 지역에 제한해서 알제리인 사회의 교란을 억제하고 알제리 인에게는 프랑스 국적 선택권을 주었다. 1847년 이래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항쟁 지도자 에미르 압델-카데르의 망명을 1852년에 후한 조건으로 허용했다. (항쟁 중에도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로 널리 알려졌던 압델-카데르는 1860년 망명지인 다마스쿠스에서 기독교인 학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기독교인 보호에 적극 나섬으로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비오9세 교황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나폴레옹3세의 알제리 정책은 분명히 선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선량함의 문제점은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과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 인의 인권을 옹호하되 그 인권의 기준은 시혜자의 것이었다. 그의 관대한 정책의 혜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슬람교도로서, 또 알제리 인으로서 정체성을 포기해야 했다.
▲ 나폴레옹3세. ⓒwikipedia.org |
파리 재건설에 25억 프랑의 자금이 들어가고 기존 건축물의 60%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부담의 결과가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의 하나로 남아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난 150년간 자동차의 보급을 비롯한 온갖 변화를 겪고도 자랑스러운 모습을 지키고 있는 이 도시는 행정가로서 나폴레옹3세의 뛰어난 능력을 증언해 준다.
파리 재건설 못지않게 중요한 나폴레옹3세의 업적이 교육 제도 개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1860년대에 역사학자 출신의 빅토르 뒤뤼이(1811~1894년) 교육부 장관을 앞세워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교육의 1차 주체가 교회에서 국가로 옮겨졌으며, 여성 교육이 궤도에 올랐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도와 교과목이 프랑스에서만큼 큰 효용성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곳이 따로 없다.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되풀이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웃음거리로"라며 나폴레옹3세를 조롱했던 카를 마르크스는 1869년의 같은 책 재판 서문에서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1세의 동상은 방돔 기념주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썼었다. 그것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것이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7년이 지나 정권이 무너진 사실보다는 17년이나 버텼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웃음거리라면 나폴레옹3세 자신보다 제2제정을 필요로 한 프랑스의 상황이 웃음거리다. 나폴레옹3세는 이 필요에 부응한 것이고, 그 역할을 잘 해낸 사람이다. 한 개인으로서 그의 능력과 노력에는 크게 탓할 것이 없다. 나 자신 이번 조사를 시작하기 전 그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문제는 제2제정의 정치가 독재자 개인에게 얽매였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문제가 황제의 건강을 둘러싼 비밀주의에 있었다. 1873년 그는 담석 제거 수술 중 죽었는데, 적어도 1860년대 내내 그를 괴롭힌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담석이 1870년에야 진단되었다. 통증 때문에, 그리고 통증을 견뎌내기 위해 복용한 아편 때문에 황제가 정상적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자기 건강의 이상이 알려지면 지도력의 균열을 불러올 것이 두려워 의사에게 몸을 맡기지 못했던 것이다.
개인의 판단력이 가진 한계는 내정보다 대외 관계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 자신의 파멸과 프랑스의 파국을 불러온 프로이센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1860년대 초반의 멕시코 개입에서 드러날 만큼 드러나 있었다.
1861년 군사 정권과의 내전에서 겨우 승리를 거둔 베니토 후아레스의 멕시코 개혁 정부가 외채 금리 상환을 유예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프랑스는 그해 말 스페인, 영국과 함께 멕시코에 출병했는데, 멕시코의 외채 2억6000만 프랑 중 프랑스의 몫은 절반이 넘는 1억3500만 프랑이었다. 그런데 그 중 7500만 프랑은 어느 스위스 은행가의 채권이었고, 이 은행가는 채권 회수를 위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황제의 측근(아버지가 다른 동생 모르네 공작)이 채권 회수 시 30%를 커미션으로 받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3세는 채권 회수를 핑계로 출병했으나 그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를 모방한 제국을 멕시코에 세워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키울 야심을 품었다. 그 결과 막시밀리안1세 황제를 내세워 '멕시코 제국'을 세웠으나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남북 전쟁을 끝낸 미국이 먼로주의를 내세워 압력을 가함에 따라 프랑스는 1866년에 멕시코로부터 철군했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이듬해 수도를 탈환한 후아레스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프랑스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멕시코 개입으로 6000명의 목숨과 3억여 프랑의 비용을 잃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때도 나폴레옹3세는 이익만 저울질하고 있다가 전쟁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중립을 지켜준 대가로 프랑스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합병에 대한 프로이센의 승인을 요구했다가 코웃음을 샀을 뿐이다.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프로이센의 국력이 프랑스와 대등한 수준으로 자라나 있는데도 나폴레옹3세는 프로이센을 계속 깔보기만 하다가 결국 최후의 일격을 맞게 된다.
1870년 초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의 친척 레오폴드공이 스페인 왕위 후계자 물망에 올랐을 때 프로이센 세력의 확대를 꺼린 나폴레옹3세가 반대에 나섰고, 레오폴드공은 즉위를 포기했다. 그런데 나폴레옹3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빌헬름1세에게 그 가문의 어느 인물도 장차 스페인 왕위를 넘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보장을 받으려 했다.
7월에 빌헬름1세가 엠스 온천에 있을 때 프랑스 대사가 왕을 접견하고 이 문제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 왕의 측근이 그 내용을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전보로 알렸는데, 비스마르크는 왕과 대사가 험악한 말싸움을 나눈 것처럼 '마사지'를 해서 언론에 흘렸다. 나폴레옹3세의 자존심을 긁으려는 의도였다. 이것이 보불 전쟁의 도화선이 된 '엠스 전보'였다.
나폴레옹3세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가 도발자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프랑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인구 2200만 명에 병력 70만 명이었고 프랑스는 인구 2600만 명에 병력 38만 명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최근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잘 조직되어 있는 반면 프랑스군은 알제리, 이탈리아 등지에 정예 부대가 분산되어 있었다. 1866년 이후 프로이센과 같은 징병제 도입을 시도하려던 황제의 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무리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전쟁을 직접 지휘한다고 나서서 패전을 더 빠르고 더 참혹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개전 두 달도 안 되어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즉각 제정이 폐지되고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3공화국은 이듬해 1월까지 처참한 파리 농성을 이끌었고, 빌헬름1세는 베르사유에서 포위전을 지휘하던 중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나폴레옹3세의 영욕을 더듬어보다가 한신이 유방을 격려하며 항우를 평한 말이 생각난다.
"항우가 용맹하다 하나 그것은 필부의 용기이고 항우가 어질다고 하나 그것은 소인배의 어질음이니 천하를 다스릴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나폴레옹3세는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고,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항우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제왕(帝王)의 모습에 이르지 못한 것은 '소아(小我)'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개입에서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작은 욕심과 작은 자존심이었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자세가 투철하지 못한 것이었다.
역사가 되풀이할 때 두 번째는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는 말에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겐 웃음거리일지 몰라도, 안에서 겪는 사람에겐 두 번째 아니라 몇 번째라도 새로운 비극이다. 1848년 이후의 프랑스가 제2제정으로 흘러가고 나폴레옹3세가 집권한 것이 운명적 필연은 아니더라도 벗어나기 힘든 역사적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이용해서 권력을 쥔 나폴레옹3세는 끝내 치졸한 사심(私心)에 얽매여 나라를 망치고 자기 몸을 망쳤다. 그러나 한 측면이나 마지막 장면만을 놓고 그의 통치를 통째로 폄훼할 일은 아니다. 역사에 명멸한 숱한 권력자 중에 프랑스를 근대 국가로 만들고 파리를 근대 도시로 만든 그의 공로를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인과 개인 간의 괴리는 모든 절대 권력의 비극이며, 이 점에서 나폴레옹3세의 비극은 그 아저씨 나폴레옹1세의 비극 못지않게 처절한 것이었다.
'페리스코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를 부탁해” (2) 농업과 목축업 ‘성장’, 이제 그만! (6) | 2013.12.17 |
---|---|
“제주를 부탁해” (1) ‘차 없는 세상’ 앞장서 열어주세요. (2) | 2013.12.17 |
나폴레옹 이야기 ④ '공화정의 배신자'에 맞서 총을 든 빅토르 위고 (2) | 2013.12.06 |
[서평]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3) | 2013.11.29 |
나폴레옹 이야기 ③ / 나폴레옹과 박정희는 똑같은 '기회주의자'! (5) | 201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