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을 나는 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출발점으로 본다.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이 선언을 계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남북한은 겉으로는 서로를 적대할 뿐이었고, 속으로는 이용할 뿐이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 1993-1994년에 통일원장관을 지낸 한완상은 최근 낸 책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 머리말에서 냉전기 남북관계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적대적 공생관계란 무엇인가? 이 정체를 나는 이 비망록과 회고록에서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한반도는 아프다>는 바로 이 기괴한 ‘적대적 공생관계’의 실제적 효력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징은 무엇인가? 도대체 이 비극적 관계가 증폭되면 어떻게 남북 대결이 첨예화되면서 그 비용도 그만큼 무거워지게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관계가 갖는 비극적 특징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첫째, 남북 간의 대결이 심화되는 것은 양 체제 안의 권력주체가 극단주의적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쪽에 극우 수구세력이 집권하고 북쪽의 극좌 군부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남북 간 냉전 대결은 극단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즉 남북 간의 극단적 대결은 각 체제 안의 권력 주체가 갖는 극단주의 정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호전적 권력주체는 체제 안보의 이름으로 다른 체제와의 긴장과 대결을 부추기고 합리화한다.

 

둘째로, 남북 양 체제의 권력주체는 안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마다, 곧 그들의 권력이 체제 안에서 도전을 받거나 위협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이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기 위해 짐짓 상대방 체제로부터의 위협을 심각한 것으로 각색하고 과장한다. (...) 다시 말하면 반정부-반체제를 이데올로기의 적으로 범죄화하여 그들의 인권을 박탈한다. 그만큼 양 체제는 반민주적-반인권적 정권으로 퇴행하게 된다. 그만큼 민족과 국가 둘 다 앓게 된다.

 

셋째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양 체제의 강경-극단 권력은 체제 간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그들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시키려 한다고 했다. 남북 간 긴장은 바로 남북 안의 강경권력이 호전적 극단주의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고 했다. 그러기에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극단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두 체제 간 모순-갈등은 각 권력주체에 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에 하나의 심각한 정치적 위선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상대방 체제의 권력주체를 미워하고 악마화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양 체제의 극단세력은 서로 도와준다는 기막힌 역설과 위선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

 

7-7선언 이전에 남북한이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민간을 통한 우회적 대화 아닌, ‘당국 간 대화’도 이따금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가 아니라 대화의 시늉에 그치는 경향이 있었다. 1972년의 7-4공동성명이 전형적인 예다.

 

1969년 7월 ‘닉슨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데탕트정책을 펴며 베트남 철군 등 동맹국에 대한 군사적 책임을 줄이는 정책으로 나섰다. 이 변화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무력을 앞세운 대남정책을(1968년의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와 울진-삼척사태 등) 전면적 평화공세로 바꿨다. 남한 정부는 이 상황에서 불안감에 빠졌으나 미국의 강압 아래 남북대화에 나서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을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75-76쪽) 이렇게 설명했다. 인용된 김형욱 발언의 출처는 “From 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1970.1.2), ‘Conversation with General Kim Hyung Wook, former Director, ROK CIA’”로 표시되어 있다.

 

북한의 위협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권유하였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주한미군 추가 철수조차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소련 압박 카드로 생각하는 한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미국과 공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은 대중 관계개선,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부담 경감, 대소 긴장완화를 위해 박정희 정권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서 주기를 원했으며 필요시 압력도 행사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다음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이나 베트남의 상황은 한국과 매우 다르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독일이나 베트남 어느 쪽보다도 더 나쁜 경험을 했다. 대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은 군사력과 산업,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북측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을 가질 만큼에 이르진 못했다. 그 같은 일을 하기엔 구조가 너무 허약해서 해체되고 말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어떠한 주제로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북쪽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를 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그를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남북 당국 간 대화의 출발점은 1971년 11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제9차 예비회담장에서 한적 대표단의 정홍진이 북적 대표단의 김덕현에게 실무자 간 비밀접촉을 제의한 것이라고 한다.(김해원 위 책 80쪽) 이로부터 7-4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7개월간 24차례 판문점에서 접촉이 있었고, 정홍진의 평양 방문(1972년 3월 28~31일)과 김덕현의 서울 방문(4월 19~21일)이 있었으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5월 2~5일)과 북한 박성철 부주석의 서울 방문(5월 29일~6월 1일)이 있었다.

 

그런데 대화가 시작된 직후인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사실이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 선언과 함께 약 3천 자에 달하는 긴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이튿날 <동아일보> 기사 “국가비상사태 선언, 안보 위주로 급회전” 중 담화문 내용 일부에 대한 설명을 옮겨놓는다.

 

박 대통령은 안보위기론의 정당성으로 (1) 핵의 교착상태 때문에 강대국들의 행동이 제약받는 때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으로 인해 한반도의 국지적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고, (2) 유엔에 가입한 중공이 유엔 결의로 창설된 유엔군과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를 요구하고 (3) 미국에 우리 안보를 부탁할 수 없는 실정에다 주한미군의 추가 감군 문제도 이미 논의 중에 있으며 (4) 이웃 일본도 중공 및 북괴와 더욱 빈번히 접촉하기 시작한 사실 등을 들었다.

 

담화문 중 “혹세무민의 일부 지식인들의 무책임한 안보론”을 지적하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응분의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필요할 때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비상사태 선언 이후 언론의 자율성이 심각한 제한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도 않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의 표현은 이런 우려를 씻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지금 읽는 데는 약간의 기술이랄까, 감안이 필요하다. 위 기사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에 대한 신뢰가 표명되어 있지만, 바로 옆의 사설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문단으로 맺어져 있다.

 

한데 자유민주체제를 살리기 위한다는 이유 아래 바로 그 자유민주체제의 제 장점이 부당히 유린되는 자기모순의 사례를 우리는 여러 후진국에서 많이 보아왔다. 공산독재와 싸우는 대결 과정에서 이와 같은 자기당착적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다 같이 반성하고 명심하지 않는다면 국가비상사태 선언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2012년 12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한홍구의 글 “‘자랑스런 동아일보’는 이렇게 추락했다” 중 1975년 초 동아일보 사태 때 “새로이 이사 겸 주필로 선임된 사람은 1971년 12월 비상사태 선포를 비판하다가 정권의 압력으로 물러난 이동욱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위 사설 때문에 혼이 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비상사태 선언은 1971년 10월 15일 학생운동 진압을 위해 위수령을 발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시점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국민이 감지할 만한 아무런 사태 변화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조치에 어리둥절했다.

 

국민이 모르고 있던 사태 변화는 당국 간 접촉의 시작이었다. 비밀리에 접촉을 진행하면서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필요할 때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해야 한다”는 엄포를 놓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불안한 상태에 박정희 정권은 처해 있었던 것이다.

 

휴전협정 때도 입장을 서로 맞추지 못했던 남북한이 함께 합의한 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7-4공동성명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성명을 발표하면서도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한 ‘굴복’이라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발표 사흘 후인 7월 7일 국무회의에서 “7·4 공동성명이 나왔다고 좋아라 날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이런 자들을 단속하는 동시에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공동성명에 뒤이어 체제 유지를 위한 극단적 조치로 유신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 79쪽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연구자로서 국가관이 나보다 훨씬 확고한 분으로 보인다. 그의 연구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입장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음미할 대목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데탕트 하의 국내정치적 도전과 압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추진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비상사태 선언 등 일련의 정치적 조치는 한반도 정세를 보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미국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국무부의 한 분석자료는 “북한의 새로운 유연성에 대한 반응으로 최근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경직된 정책노선을 택하였다”고 묘사하기도 하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있어서는 남북대화 추진 그 자체보다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불식시키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집요하고도 일방적인 평화공세를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를 조치하고 난 이후 비밀접촉에서 비로소 남북정치회담을 제의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 392-393쪽에서 7-4공동성명의 의미를 “분단의 내재화”로 설명했다.

 

미중관계 개선과 맞물려 남북대화도 시작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내재화는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분단 문제의 근본적 개선이 없다면 이는 분단유지의 책임과 비용이 남북한에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반도 분단을 둘러싼 기본 대립구도가 동서 진영대결에서 남북의 체제경쟁으로 이행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중관계 개선과 남북대화는 새로운 화해국면을 열었고 한반도 평화유지에 보탬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남북의 체제경쟁은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었다. 남북은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체제우월성 경쟁과 자신의 체제를 상대방 지역으로 확산하려는 체제확산 경쟁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남북간의 외교적 경쟁도 치열해졌다.

 

남북의 체제경쟁은 결국 남북의 집권세력이 각자의 정치체제를 더욱 억압적인 방향으로 개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 모두 미중관계 개선, 데땅뜨로 조성된 유동적인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남쪽에서는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북쪽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고 후계체제가 확립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일면 데땅뜨 상황에 부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을 격화시키고, 데땅뜨를 위기국면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분단의 내재화”란 타율적인 것이었던 분단이 자발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국민 모두의 생각이 그렇게 바뀐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 정부가 분단 상태에 대한 내부의 반대를 스스로 억누르며 분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미-소군의 진주로 시작된 분단은 외세의 강압에 따른 타율적인 것이었고 미국은 한국인의 민심에 역행하는 이 상태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이제 미국이 갖고 있던 책임을 한국 정부가 넘겨받게 된 것이다.

Posted by 문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1989년 7월 3일 평양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중이던 임수경이 기자회견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 셋째 절이 여기 적은 것과 달랐을 것 같다. 그에 관한 생각은 뒤에 적겠다.

 

임수경 방북의 배경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설명했다.

 

1988년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통일운동은 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로 이어졌다. 북한은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라는 점에 의미를 두면서 동시에 서울 올림픽이 공동 개최될 경우에도 대비해 1987년 봄부터 ‘축전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막대한 시설 투자와 더불어 열성적인 준비를 해왔다.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의 평양축전 초청장을 받은 전대협은 89년 2월, 그 해 7월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산하에 ‘평양축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와 관련해 89년 초반 정부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예컨대 <한국일보> 2월 12일자에는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는 큰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정부는 애초 평양축전 참가를 승인하려 했었지만, 1989년 3월 갑자기 방침을 바꿔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투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위해 문교부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축전 시기가 임박한 6월 초 정부가 평양축전은 반미반한의 정치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허 방침을 내리자 끝내 축전 참가는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되었든, 이 무렵 정부의 입장은 오락가락했는데, <워싱턴포스트>는 노태우 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대북한 정책으로 한국인들이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익환의 방북을 계기로 공안정국의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지금 상황에서 통일운동에 주력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라는 의견이 운동권 내부에서도 제기되며, 평양축전 참가는 물건너간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대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가고야 말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4권 116-117쪽)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의 ‘정략성’에 대한 강준만의 지적은 지당한 것이다. 1980년대 말 세계적 해빙 추세에 보조를 맞춰 민족문제 해결을 지향한다는 기본 방향은 타당한 것이었지만, 변화의 성과를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는 집착이 너무 강했다. 이 집착이 흐름을 왜곡시키며 혼란을 일으켰고, 그 혼란이 후에 북방정책의 좌초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1987년 체제’의 문제점과 한계가 지금은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뤄지지 못한 것보다 이뤄진 것이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의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민족문제 해결도 그 하나였다.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동유럽의 해빙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과감한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림픽 공동개최 운동을 통해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상황에서의 관점도 자라나고 있었다.

 

1989년 3월 황석영과 문익환의 연이은 방북, 그리고 석 달 후 임수경의 방북이 이 움직임을 대표한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 서경원이 1988년 8월 몰래 방북했던 사실도 뒤이어 밝혀졌다. 남한 정부는 이에 모두 사법처리로 대응했는데, 실정법을 존중하는 ‘법치’의 원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평양축전 참가 불허 방침은 설명이 안 된다. 아직 열리지 않은 행사에 ‘반미반한’ 정치 선전의 조짐이 있다면 대표단을 보내 그런 선전을 억제하도록 애쓸 일 아닌가. 거의 모든 참가국이 우리 수교국이거나 수교를 추진하는 나라들인데. 변화의 칼자루를 정권이 독점하려는 집착에 기인한 자가당착이었다.

 

위에 올린 ‘통일 노래’의 셋째 절이 원래는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었다.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통일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뒷받침한 변화로 보인다.

 

그 노래가 만들어질 때는 민족의 분단이 생살 찢는 고통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느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후의 긴 세월 동안 고통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이 찢겨졌던 부위는 딱지를 몇 번이고 떼어내며 적어도 표면은 아물었다. 분단 직후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필사적인 심정으로 매달리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민족문제 해결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의 내 모습이 일그러진 사실을 자각하고 과거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당당한 미래를 맞겠다는, 보다 능동적이지만 덜 절박한 과제로 바뀌어 왔다.

 

민족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이 약해진 사실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분단의 상처에서 당장 피가 철철 쏟아지지 않고 있으니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헤어지기 싫은 사람들을 억지로 떼어놓는 것이 하나의 폭력이었던 것처럼, 뭉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뭉치기를 강요하는 것도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지금의 우리 모습을 스스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에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가 달려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이 사회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면 민족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 이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 문제가 분단 상태와 긴밀히 얽혀있는 것이라고 볼 때 민족문제 해결이 절실한 과제가 된다. 민족문제에 대한 소위 ‘진보’와 ‘보수’ 사이의 온도차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1988년 7-7선언 직후의 좌담 “민족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박현채-백낙청-양건-박형준, <창작과비평> 1988년 가을)에서도 이 온도차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양건은 급박한 상황 전개를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보수’ 입장을 소개했다.

 

양건: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통일문제의 제기가 일반시민들이 처음 받아들일 때에는, 좀 뭐라고 할까요, 적절한 표현 같지는 않지만 느닷없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통일문제, 분단문제가 재야운동권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왔지만, 시민들은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또 한편으로, 시민들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열려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6-10남북학생회담 문제가 나왔을 때 대한변호사협회에서 회장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가 있는데, 그것이 일반시민들의 보통 느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런 골자입니다. “너무 성급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한다.” 이것이 첫번째이고, 또 하나는 “통일논의에는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먼저 기성세대 설득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두번째 얘기, “기성세대 설득부터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운동에 있어서 시민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또 앞서 나간다라는 선도적인 역할도 중요하겠습니다만, 특히 민주화운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중간층의 흐름을 누가 잡느냐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보수적 입장을 ‘기성세대’란 이름으로 내놓고 ‘설득’이 가능한 대상으로 양건은 본 것이다. 지금 독자들에게는 ‘기성세대’보다 ‘기득권층’이란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고,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인식이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동안 많이 확인되어 왔기 때문이다.

 

폭넓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양건의 희망은 ‘87혁명’의 주류 관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도 얼마 전 감사원장을 그만두면서는 그런 희망을 많이 접었으리라고 짐작되거니와, 25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희망이었다. 나 자신 비슷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박현채는 당시에도 문제의 성격을 더 확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박현채: 나는 조금 견해가 달라요. 6-10회담에서 나타난 양상이란 것은 28년 전에 나타난 양상입니다. 4-19 후에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제안이 있었고 6-10과 똑같은 양상의 진전을 보였습니다. 물론 내용은 달랐죠, 그러나 큰 맥락에서 봤을 때 그것은 같은 양상이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꼭 이런 것들이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해서 주어져야 하고 학생이나 또 각기 작가면 작가, 음악가면 음악가, 이런 다원적인 접촉이 거부되어야 하는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7선언에 대해 본다면 민주화와 통일이 하나라는 인식, 그로부터 통일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태우정권이 종래와 같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야권의 논리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자기 안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통일추구세력의 논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주어진 것이 이번 7-7선언이었습니다. 이 7-7선언에서 제기한 바가 통일원장관 이홍구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이다” 이런 것이 기초한다고 했을 때, 다원적 접촉을 위한 ‘국민적 합의’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민족 밑에 종속하는 것이 지금 현상적으로 국가란 말이죠. (...)

 

‘통일추구세력’과 ‘정권’을 별개의 대응 주체로 놓고, 통일추구세력의 논리에 정권이 모처럼 내놓은 합리적 대응으로 7-7선언을 평가한 것이다. 두 주체의 입장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지만, 이런 대응과정을 통해 사회의 진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25년 전의 내게는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봉쇄되어 있는 40년 동안은 생살 찢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도 못하고 있었던 셈일까? 표현의 자유가 회복되기만 하면 분단건국 당시의 민족의식이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대로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자란 내 또래 사람들 중에도 다른 문제에 몰두해서 민족문제를 경시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런 풍조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민족문제 표출을 가로막은 반공독재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설득’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처해 있는 조건과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민족문제에 대한 입장에는 우리 사회 안에 상당히 큰 편차가 있고, 어느 입장도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일의 당위성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 근년에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 지나쳐 불필요한 고통을 불러올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세상의 좋은 점을 잘 지키려는 노력에 비중을 둔다.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점진적 방안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왔다. ‘통일’보다 ‘통합’으로 인식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정말 이런 건 바뀌어야 하는데”, 생각되는 일인데도 이 사회에서 너무 인식이 아쉬운 것들이 있다. 민족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평화, 정의, 민주주의 등 중요한 가치들이 민족문제의 미해결로 인해 큰 장애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는데도 아직까지 사회에 충분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설득은 역시 필요하다. 설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문제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어떤 기형적 문제들이 민족문제 미해결에 말미암은 것인지, 지금까지 쌓여온 훌륭한 지적들을 드러내는 것을 이번 <냉전 이후> 작업의 한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대통령의 발언 앞에서 이 필요를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대통령의 딸이 된 것을 대박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대통령 된 것을 대박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민족문제도 복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 몫을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에게는 통일이 한 차례 게임이나 작전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힘들고 괴로운 점이 있더라도 열심히 그것을 살아낼 뿐이다. 대박 같아서 달려들고, 대박 아닌 것 같아서 걷어찰 대상이 아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라도 정성을 바쳐 추구할 대상이다.

 

 

Posted by 문천

 

1948년 8월과 9월에 각각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를 ‘국토 일부를 참절한 반역도당’으로 간주하였다. 남쪽 헌법에는 대한민국 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되었고, 북쪽 헌법에는 수도가 서울로 되어 있었다.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 극한적 대립상태는 냉전 종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대립상태의 성격을 김근식은 “북한과 대한민국”(<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이병천-홍윤기-김호기 엮음, 한울 펴냄) 317-318쪽)에 이렇게 요약 설명했다.

 

전쟁 이후 분단의 공고화와 본격적인 체제경쟁의 가속화는 남한의 자본주의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는 한편 북한 역시 사회주의체제가 보다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서로가 상이한 체제로 더욱 멀어져갔고 남한의 반공국시에 입각한 권위주의체제와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일체제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면서 이를 통해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는 이른바 ‘적대적 의존관계’로 고착돼갔다. 이제 남북의 구성원은 잠재의식 속에서조차 상대방을 적대하는 데 익숙해야 했다. 적화통일과 승공통일의 구호 속에서 남북은 그 어디서도 절충점을 찾을 수 없었다. 뿔 달린 괴물 이미지와 미제의 괴뢰 이미지가 상호 교차하면서 남과 북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민족이라기보다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다. 남북한 당국은 상대방과의 적대관계를 내부의 정권유지와 정적 탄압에 유용한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과 체제분만 세력들은 곧바로 적대하고 있는 상대방과 내통한 세력으로 매도됐고 이는 곧 반체제세력으로 낙인찍혀 정치적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결국 분단은 양측의 적대적 대결을 한층 첨예화시켰고 냉전은 이를 더욱 확대재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분단의 공고화가 진전되면서 불완전한 반쪽은 자기 반쪽이 아닌 다른 한쪽에 의존하는 종속적 국제관계를 결과함으로써 외세의 영향력을 확대해가야만 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첨예한 대결장이 돼버린 한반도는 남과 북 공히 민족의 협력과 단합이 아니라 각 진영의 첨병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남측은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이해관계를 추종해야 했고 북측 역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적대적인 다른 반쪽을 압도하기 위해 전혀 다른 한쪽에 좌우되는 피동적인 지위였을 뿐 한 번도 주도적 입장에 서지 못했다.

 

김근식이 말하는 ‘적대적 의존관계’는 내가 <해방일기>에서 지적한 극좌-극우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연장된 것이다. 해방에서 정부수립에 이르는 3년간의 해방공간 속에서 극좌파와 극우파는 상대방의 존재를 자기 노선의 근거로 삼아 정상적 정치현상을 가로막으며 각자의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 권력 위에 세워진 두 국가는 상대방의 부정을 자기 정체성의 일차적 근거로 삼으며 독재권력을 유지한 것이다.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의 가장 큰 의미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 있었다.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선언은 북한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앞서 남한을 스스로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을 담은 것이었다. 남한의 국가권력이 북한과의 대결 주체로서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40년간의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이 선언에 들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해 준 선언이었다. 경제 발전 덕분에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의 역할이 상당 수준 충족되었고 1년 전의 민주화운동 결실로 민주공화국의 요건도 대폭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냉전 때문에 거듭 파행을 겪던 올림픽대회가 서울에서 모처럼 성공적으로 열릴 전망이었으니 국제사회에 대한 대한민국의 체면도 크게 올라가 있었다. ‘반공의 보루’를 넘어선 국가정체성을 당당히 내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나는 이 선언의 의미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 면이 있었다. 양김 대립 덕분에 불과 36.6퍼센트 지지로 당선되어 군사독재정권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당시 정권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는 위에, 두 달 후로 닥쳐 있던 올림픽대회를 위한 정략적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7-7선언에 앞서 학생권과 재야에서 펼쳐 온 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 운동을 정부가 탄압해 온 상황을 보더라도 7-7선언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임기 말까지 ‘북방 외교’ 노선을 유지한 사실을 이제 와 놓고 생각하면 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의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7-7선언은 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7-7선언은 냉전 종식을 선포한 몰타선언보다 17개월 앞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냉전 종식의 기미가 아직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나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체제 붕괴를 향한 변화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올림픽대회만 하더라도 제22회 모스크바대회와 제23회 로스앤젤레스대회를 ‘반쪽 대회’로 만든 동서대립이 1988년에는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제24회 서울대회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종식이 동유럽에 국한된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본다고 지난 회에 적었다. 공산권의 서울올림픽 참가 대세도 동유럽 국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북방 외교 최초의 큰 성과였던 헝가리 수교의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정리했다.

 

7-7선언 후, 동구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헝가리였다. 노태우는 올림픽 개막을 불과 4일 앞둔 9월 13일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헝가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은 뒷거래의 산물이었다. 올림픽 개최 이전에 적어도 공산주의 국가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기에, 6공은 헝가리와의 협상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88년 6월 남한이 10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준다면,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남한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할 의향이 있다는 헝가리 정부의 제안이 있은 후, 박철언을 협상 책임자로 한 비밀협상이 3차례 진행되었다. 그리고 올림픽 개막식 4일 전에 헝가리에 6억2천5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우중이었다. 이미 84년 헝가리를 방문해 헝가리와 일련의 사업 계획을 성사시켰던 김우중은, 이런 관계를 활용해 87년 말과 88년 초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각각 무역사무소가 개설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인물과사상사 펴냄) 1980년대편 3권 283쪽)

 

공산권 국가 중 헝가리가 한국의 첫 수교국이 된 까닭은 무엇보다 헝가리가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당시의 체제 변화를 순조롭게 겪어내고 있던 나라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헝가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56년의 ‘헝가리사태’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후 나지 임레(Nagy Imre, 1896~1958) 수상의 ‘신노선’ 아래 진행되던 헝가리의 자유화 운동이 소련군의 침공으로 좌절된 사태다. 이 사태가 소련과 위성국의 관계를 비방하는 자료로 서방에서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헝가리란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태 이후 1988년까지 32년간 헝가리를 이끈 카다르 야노슈(Kádár János, 1912-1989)의 업적이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 편”이란 그의 말이 유명하다. 이것은 스탈린시대 헝가리 독재자였던 라코시 마챠슈(Rákosi Mátyás, 1892-1971)가 했던 “우리를 돕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 적”이란 말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카다르는 라코시 같은 독재자보다 나지 같은 개혁가에 가까운 성향의 인물이었고, 나지 내각에 국무장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헝가리에서 다른 유럽국과 달리 성을 앞에, 이름을 뒤에 적는 것이 흉노 기원설의 한 근거다.) 소련 지도부가 헝가리 침공 후 그를 선택한 것은 헝가리인의 반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33년이 지난 후 죽음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연설에서 그는 당시 자신이 소련의 위협에 너무 쉽게 굴복했다고 반성하고, 존경하던 동지 나지의 처형에 협조한 것이 자기 인생의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동유럽 지도자 중 가장 온건한 인물의 하나였던 카다르가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32년간 권좌를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헝가리의 정치적 평온을 말해준다. 그는 소련의 통제를 감수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실용적인 정책노선을 추구해서 헝가리를 동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이끌었고, 공산권 붕괴에 임해서도 헝가리의 체제 변화가 가장 순조로운 편이었다. 그가 당서기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국과의 수교 발표 넉 달 전이었다. 그 수교 방침도 그의 지도 아래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공산권 붕괴를 위한 조건은 1970년대의 경제 불황 속에서 성숙된 것으로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설명한다. 불황에 대한 대응책에서 소련과 중국의 차이를 설명한 것을 보면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와 냉전 종식이란 동유럽에 국한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더 굳어진다.

 

(소련과) 매우 비슷한 시장 자유화와 분권화 정책이 모택동주의 퇴조 이후 중국에서 극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1980년대 중국의 GNP 성장률은 연 평균 10퍼센트 가까운 것으로, 한국 한 나라에게만 뒤질 뿐이었다. (...) 만약 1980년의 러시아가 (그 시점의 중국처럼) 기껏 호강을 꿈꾼다는 것이 텔레비전 갖추는 것 정도인 농민의 비율이 80퍼센트인 나라였다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훨씬 나은 결과를 보았으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개혁정책 성과의 대비가 이런 시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쪽이 중앙 통제체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사실을 덧붙여도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다. 사회체제와 관계없이 경제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규명되고 있는 동아시아 문명전통으로부터 중국이 얼마나 큰 혜택을 얻었는지 밝히는 것은 21세기 역사가들에게 남겨줄 과제다. (<The Age of Extremes>(Vintage) p 483)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