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도 특산물이다."

 

농업과 환경은 원천적인 상극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1백만 년 전 현생인류가 나타나고부터 1만여 년 전 농업이 발생할 때까지 지구상 인류의 개체수는 1백만에서 5백만 사이를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지구생태계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큰 위협을 가하는 일 없이 기후 등 조건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지낸 것이 인류의 원시상태다.

 

그러다 어느 날 농업을 발명하고부터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기 시작해 지금은 원시상태의 1천 배가 넘는 상태에 와 있다. 이 번영은 다른 생물종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것이다. 인류에게 쓸모 있는 생물종만을 골라 더욱 쓸모 있는 모습으로 바꿔가며 키우고 쓸모없거나 해로운 생물종은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에 박멸해 가며 지구 표면을 인류의 번식에 유리한 모습으로 바꿔온 것이다.

 

제주 땅에도 기천 명 인구가 살며 채집과 수렵으로 생활한다고 하면 몇 만 년이 지나도 환경에 별 영향을 주지 않고 지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만 명이 살고 있는 이상, 환경을 그대로 지킨다는(preservation) 것은 불가능하다. 가까운 장래에 큰 파탄을 맞지 않도록 최대한 아끼는(conservation) 것이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환경을 아낌에는 개발의 이익과 환경의 가치 사이에 끊임없는 저울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발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 드러난 가치에만 시각이 한정된다는 점이다. 환경자원의 잠재적 가치를 넓고 깊게 음미하지 않는다면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아먹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없다.

 

희소성은 재화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결정적 요소다. 그 동안 제주의 관광과 특작물이 희소성의 가치를 누려온 것은 국가의 장벽 덕분이다. 해외관광이 어려운 시절 이국적 풍취를 제법 가진 제주가 관광지로 인기 있었고, 수입과일이 귀하던 시절 제주의 감귤과 온실재배 바나나, 파인애플이 경쟁력을 가졌다. 그러나 무역개방과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그 희소성은 빛이 바래고 있다.

 

희소성을 누릴 대체상품으로 제주의 환경을 생각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육지부의 환경파괴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에 비하면 제주는 마음먹고 노력하면 한국인 대다수가 와서 살고 싶어 할 곳으로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돈 있다고 우리말과 우리 음식이 없는 곳에 가서 살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쾌적한 환경을 찾아 뉴질랜드로 이민 갔던 사람들 중에 돌아오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지 않은가.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을 학대하기보다는 환경을 아끼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사이의 캘리포니아 해안지대에는 소위 실버타운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쾌적한 노후를 지내려고 미국 각지에서 평생 번 돈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곳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대신 자연환경을 잘 지킴으로써 땅값 상승과 서비스산업의 성장을 기하고 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과 기름 소비의 억제다. 원수(原水) 값을 올리는 최근의 정책은 반갑지만, 더 바짝 올려 다른 곳에서 물을 실어오는 원가 수준에 접근시켰으면 한다. 수입가격이 엄청나게 오르는 기름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영농형태는 지양하고 농업과 목축업의 규모를 지금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름의 소비세와 자동차등록세도 제주의 환경을 지키기 위한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길이 만들어지기 바란다. 1998. 1. 17

 

‘개발’이란 무엇인가. 잠재해 있는 가치를 캐어내 활용하는 것이다. 문명 발생 이래 인간은 새로 습득한 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개발하는 일을 꾸준히 해 왔다. 새 기술을 습득함에 따라 전에는 활용가치가 없던 사물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달한 근대에 이르러 ‘개발’ 작업이 인간의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황무지와 삼림이 경작지로 개간되고, 재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쓸모없던 물질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인간사회마저도 새로운 산업구조 안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의 대상이 되었다.

 

개발 작업에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자연이 대상이 된다.(인간사회를 개발할 때는 문명인이 주체, 미개인이 대상이다. 개발 대상이 되는 미개인은 자연과 같은 속성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원래 자연의 일부이기도 한 것인데 개발 작업에 임하는 인간은 그 측면을 묵살한다. 자연을 타자화(他者化)하여 ‘정복’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자연의 타자화는 문명 초기부터 있어 온 현상이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타자화는 그리 철저한 것이 아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세계에서는 자연 정복을 인간의 당연한 과업으로 여기는 사상이 풍미했다. 더 많은 자원을 자연으로부터 착취하고 ‘미개한 자연’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 인류를 더 훌륭한 존재로 만드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역사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비쳐진다. 근대 이전의 역사관은 폐쇄회로 형태가 지배적이었다. “하늘 아래 어느 것도 전혀 새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역사 속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에는 문명이 무한히 발전해 나간다는 진보사관(Whig interpretation)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변화를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무조건 환영하는 습성을 근대인은 갖게 되었다. 인간 자신의 모습이 바뀌는 것도 좋아하고 자연의 모습을 바꾸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모든 개발은 가치를 창출하는 절대 선으로 간주된다.

 

이 관점에 대한 뚜렷한 반성이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3년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1973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왔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개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 개발을 통해 ‘사라지는 것’을 시야에 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런 한계 없는 변화란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이 명백한 상식을 물질문명의 발전에 도취된 근대인은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발이 어느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개발할 자원이 무제한한 것으로 보인다. 노력만 더 기울이면 얼마든지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 왔을 때, 창출해 온 가치보다 파괴해 온 가치가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성장의 한계’다.

 

산업화가 아직 덜 되었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 가치를 파괴해 나간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희소성을 갖게 되었을 때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제주도는 개발이 힘든 곳이었다. 산업화 이전의 농업문명 단계에서도 수분을 쉽게 투과시키는 지질 때문에 농업 확대가 어려웠다. 산업화 단계에 들어와서도 위치 때문에 제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없었다. 제주인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조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 덕분에 제주의 자연환경이 잘 지켜질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의 산업화 과잉시대에는 엄청나게 큰 가치를 갖게 되었다.

 

제주도 개발의 최후 관문은 물 문제였다. 이 관문 돌파를 위해 1960년대 후반 어승생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물 문제 해결의 진짜 열쇠는 관정(灌井)에 있었다. 수백 미터 땅속에서 뽑아내는 지하수의 분량이 어승생 공급량의 수십 배에 이른다. 이 관정 기술 덕분에 제주도의 농업이 크게 확대되고, 목축업도 종래의 방목을 넘어 집약적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관정에서 뽑아내는 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섬 위에 떨어지는 빗물의 대부분은 하천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땅 속으로 스며든다. 해수면 가까이 내려와서야 땅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해안 가까운 샘에서 나오기도 하고 바닷물 속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해안 가까이 샘이 많은 것이다.

 

지하수위(地下水位)라는 것이 있다. 소금물이 담긴 대야 속에 커다란 스펀지 한 덩어리를 놓고 스펀지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을 많이 부을 때는 스펀지를 적신 물이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소금물의 수면보다 꽤 높은 선까지 채워져 있고, 적게 부을 때는 수면 가까이로 내려간다. 그것이 지하수위다.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지하수위가 올라가고 가뭄 때는 내려간다.

 

그런데 수십 년간 관정으로 물을 뽑아내다 보니 지하수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15년 전에도 이 문제가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 높은 곳의 샘들은 말라붙고 낮은 곳의 많은 샘들이 버려졌다. 지하수 수압이 낮아지면서 전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던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제주 지낼 때 나는 기회 있는 대로 수돗물 값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주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더군다나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생업을 위협하는 얘기다. 그러나 섬의 생명의 근원이라 할 지하수원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에 비하면 작은 이해관계일 뿐이다. 농업과 목축업이 더 확장되지 않는 선에서 응급대책을 시행하고 장기적으로는 더 축소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수돗물 값 책정에 직접비용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직접비용이라면 관정의 설치와 유지, 운영, 그리고 공급에 드는 비용이다. 원수(原水) 값도 생각해야 한다. 육지에서 같으면 원수를 확보하기 위한 댐의 설치, 유지, 운영에 드는 비용이 원수 값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제주도의 수돗물에도 원수 값이 포함되기는 한다. 그런데 나는 원수 값을 훨씬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책정 기준은 지하수원의 가치에 달려 있다. 지하수원의 가치가 너무 저평가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 소비 수준이 지하수원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할 만큼은 그 평가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 값 올리란 얘기를 제주 떠난 사람이 하기가 제주인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작은 부담을 받아들임으로써 큰 손해를 피하기 바라는 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