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대 초반에 강단을 떠난 후 지금까지 20년간 독학(獨學)을 하며 지냈다. 이 글을 발표할 때도 “역사학자”라는 수식어가 내 이름에 붙겠지만, 내게 합당한 타이틀인지 늘 불안한 마음이다. 역사학자의 자세를 내가 잘 지켜온 것인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강단에 남아있었다면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들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역사학 교수’란 직업을 갖고 있는 이상, 한 인간으로서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인지 반성은 할지언정, 제대로 된 역사학자인지 스스로 의문을 품을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뚜렷해진 것이 6년 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을 집필할 때였다. 그때까지는 더러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내가 내 좋아하는 일을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남들이 역사학으로 인정해 주건 말건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당대의 대표적 ‘경제사학자’로 꼽히는 안병직과 이영훈의 논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러 나서려니, 비판자의 입장이 온당한 것인지 책임감을 갖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안병직은 학생 시절부터 직접 배우지는 않았어도 연구 자세를 흠모하던 학자였다. 그의 근년 논설을 찾아 읽으면서 그가 옛날의 그 안병직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옛날의 안병직을 알던 사람을 만나면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한 차례 조사를 한 뒤 나는 안병직이 ‘역사학자’는 결코 아니고, 학자다운 학자도 못 되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마음속으로 내렸다. 판단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이런 말이었다.

 

“김대중 씨는 자기의 주관적 통일 이론만 가지고 남북 수뇌 회담을 추진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북한 정세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우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민족이야 어떻게 되었던 자기의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을 철저히 추구할 만큼 사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기파랑 펴냄) 288쪽)

 

한마디로 ‘학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학자로서 직업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 말에는 학자의 자격이 담겨 있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국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볼 만한 아무런 학문적 근거 없이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낸 것일 뿐이다.

 

‘사악’과 ‘우둔’을 한꺼번에 뒤집어씌우려 든 것은 학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격에도 의문을 품게 한다. 뭔가 잘못된 행동을 봤을 때 보통사람들은 원인이 사악함에 있는 것인지 우둔함에 있는 것인지 가리려 한다. 어느 쪽 하나만으로도 잘못된 행동을 낳을 수 있는 충분조건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조건이 겹치는 일은 별로 없다. 겹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제3자 입장에서는 한 가지 조건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두 가지 혐의를 몽땅 뒤집어씌우려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미국 기독교 우파와 한국 뉴라이트 이념의 관계를 살펴본 류대영의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 펴냄) 380-414쪽)에 이런 부자연스러운 태도에 적합한 설명이 보인다.

 

기독교 우파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극히 단순화시켜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세상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행동과 의도, 말과 뜻, 현상과 본질, 사물의 이미지와 실체, 그리고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인간이 실측하거나 충분히 인지할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찬찬히 이해하는 데 유용하기보다는 화급한 전투를 위해 필요한 무기와도 같다. 그들의 이원론은 우군과 적군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하며, 적군을 악의 세력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절박하고, 적에 대한 분노는 맹렬하며, 전투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는 결연하다. (397쪽)

 

미국 기독교 우파가 최대의 적으로 삼는 것이 ‘인본주의’라고 류대영은 짚었는데, 이것 역시 한국 뉴라이트가 공유하는 것 같다. 뉴라이트가 공격하는 ‘친북좌파’의 대표적인 구호 하나가 “함께 사는 세상” 아닌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바라는 인본주의가 실제로 뉴라이트에게는 첫 번째 적이다. 전쟁을 벌이려면 맞서는 적군을 상대하기에 앞서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내부의 평화주의자부터 자갈을 물려야 한다.

 

적에 대한 “맹렬한 분노”는 뉴라이트 대열에 서기 위한 기본자격이다. ‘뉴라이트’란 이름이 떠오를 때부터 관련된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망언(妄言)과 기행(奇行)이 꼬리를 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안병직이 김대중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욕보이려 든 것도 자기 대열의 분위기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자기 패거리의 범위만 벗어나면 웃음거리가 되는, 그리고 안병직 같으면 존경하던 후배의 눈으로도 ‘학자’의 자격을 벗어나는 이런 기발한 언행을 일삼는 동기가 무엇일까? 나는 뉴라이트운동의 목적이 진보진영과의 경쟁이 아니라 보수진영 안에서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뉴라이트의 목적은 진보 진영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의 봉쇄다. 그람시가 말한 '문화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를 보수 진영 내에서 장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 헤게모니의 구축을 위해서는 '상식' 체계의 확립이 필요하다. 진보와 경쟁해 국민을 설득하려는 것이라면 진보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실제로 문화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보수 진영의 기존 조직인 한나라당 내에서일 뿐이다. (<뉴라이트 비판> 213쪽)

 

뉴라이트는 수구세력의 선봉대다. 선봉대에게는 전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보통사람과 다른 용기와 투혼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기와 투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포상이 두터워야 한다. 포상이 중하면 일반 장병들도 선봉대를 선망하며 그 못지않은 용기와 투혼을 보여주려고 애쓰게 된다.

 

그 동안 일반인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뉴라이트 깃발을 휘날린 사람들은 나름대로 수구세력의 포상을 받아왔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포상 수준이 엄청 높아졌다. 국사편찬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등에 뉴라이트 활동 빼면 별 존재감 없는 인물들이 임명받고, 뉴라이트 주장을 받아 외우는 사람들이 국무총리를 비롯해 온갖 요직에 꽂히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역사학자’로 행세하는 사람 하나가 KBS 이사장으로 들어앉았다. 내게 대학 선배라는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안병직에게처럼 존경심을 품은 일도 없는 사람이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니 역사학자의 기본은 갖춘 사람이려니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 정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KBS 이사장이 되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그가 하는 말이 알려지는 것을 들으니 기가 턱턱 막힌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이인호가 한국현대사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역사학자라면 전공하는 ‘나와바리’를 넘어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하고, 그 안목에 따른 견해를 적극적으로 발표할 의무를 사회에 대해 가지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대부분 역사학자들에게 그런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모자라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원로 역사학자라는 이인호의 발언이 그 자체로는 반갑다.

 

발언 자체는 반가운데 그 내용이 너무 한심하다. 김구에 대해서는 나 자신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좀 뺄 필요를 느꼈다. 완벽한 인물로서 ‘민족의 지도자’로 받들기보다, 투철한 민족주의자이기는 하지만 행적에 공과가 엇갈려 있는 인물로서 인간적 이해를 통해 그 뜻을 배울 만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인호는 뭐라고 하나? “대한민국 독립을 반대한 분이기에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그를 거론하는 게 옳지 않다”고 했단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정부로 평가받지 못했고 우리가 독립국가 국민이 된 것은 1948년 8월 15일 이후”라고 했단다.

 

김구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평생에 걸쳐 많은 일을 한 사람이다. 1948년에 그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것은 독립 반대가 아니라 더 좋은 나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66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볼 때, 그 주장이 옳았다. 그때 건국을 조금 늦추더라도 분단건국을 피했다면 한국인이 더 좋은 나라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김구의 주장이 옳았다고 보는 나와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없는지 열심히 살펴야 하는 것이 학자로서 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구의 1948년 주장이 옳지 않다고 본다 해서 그를 대한민국 공로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내 편이 아니라 해서 조금도 존중할 의미를 찾으려 들지 않는 사람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버릇 나쁜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이인호를 역사학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고 어느 학교 명예교수도 못 된 사람이 하버드 학위에 서울대 명예교수라는 사람의 자격을 가타부타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가소로울지 모르겠으나, 내 주관인데 어쩔 건가? 나는 이인호가 학문을 팔아 이익을 챙긴 하나의 사이비 학자로 볼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사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학문의 본질에 눈감은 우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고 절대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둔함만으로도 그의 처신과 발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면 그가 사악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따질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런 것까지 따지는 것은 뉴라이트나 하는 짓이다.

 

그나저나 이 정권 들어서는 뉴라이트에 대한 포상 수준이 왜 이렇게 후해진 것일까? 전에는 수구세력의 포상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은근한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요즘은 ‘국격’을 팔아서까지, 여러 주요 기관의 권위와 신뢰성까지 팔아서까지 무절제하게 ‘퍼주기’를 하고 있다. 선봉대에 포상이 후한 것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말일까? 누구를 상대로 한 전쟁이든 첫 전투의 타격 대상은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진영 중에서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나는 내다본다. “보수면 보수지, 무슨 합리적 보수야? 닥치고 줄 서!”

 

 

Posted by 문천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를 당시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비하면 세상이 그렇게까지 바뀐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그 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면, “역사의 종말” 같은 네오콘의 환상적 승리감이 너무 들뜬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 현실의 냉엄함을 깨닫게 된 것일 뿐이지, ‘동구공산권 붕괴’는 정말 큰 역사적 변화의 계기였다. 아무리 그 의미를 작게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가 반세기 만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냉전체제에 심한 구속을 받고 있던 한반도에 세계 어느 곳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개항기 이후 줄곧 작용해 온 외세의 힘이 대폭 줄어드는 변화라는 점에서 더욱 큰 계기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서는 일본제국의 성립과 발전을 위해,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패권체제 구축을 위해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던 한반도였다. 미국과 소련-중국 사이의 긴장관계가 풀어짐과 함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해소되었고, 그것은 외세의 작용이 줄어들 수 있는 조건이었다.

 

외세의 작용이 줄어들면 주체적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이에 따라 냉전기 동안 막혀있던 민족문제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본제국 아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냉전체제 아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민족국가 건설의 의지는 외세의 힘에 막혀있었다. 외세 작용의 약화는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하나의 확실한 필요조건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북방정책의 목표와 방법에 비판할 점이 어떤 것이 있다 하더라도, 냉전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지향성은 분명했기 때문에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일련의 고위급회담 끝에 1991년 12월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새로운 국제질서 안에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으로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의 발전이 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1994년 봄에는 1953년 이후 가장 심각한 전쟁위기까지 치닫기도 했다. 그 책임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당시의 미국과 남한에서는 선전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책임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후 밝혀졌다. 북한은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대외개방 없이는 난국이 더 심각해질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외개방의 열쇠인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한 사실이 확인된다. 북한에게 책임이 있다면 주장을 펼치는 방법에 있어서의 기술적 문제 정도였다.

 

북한의 개방을 가로막은 큰 책임은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있다. 한반도 긴장의 주체는 남북한이고 미국은 제3자다. 제3자 입장인데도 미국의 역할이 컸던 것은 40년 전의 한국전쟁 이래 북한 봉쇄의 주체였고, 북한 대외개방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란 북한이 민족을 등진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각에서 만들어낸 말인데, 북한이 남한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앞세운 것은 기본적으로 이 현실적 필요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안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이 신뢰할 수 없었던 문제도 있었다.

 

북한이 관계개선에 그야말로 목을 매달고 달려드는 데 대해 미국의 태도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세계적 긴장완화의 일환으로 북한의 개방을 도와주거나 적어도 허용하려는 것인데, 클린턴 정부는 대개 이런 태도를 보였다. 한편 공화당 쪽에는 군사정책의 수요를 키우기 위해 긴장의 확대를 원하는 네오콘 경향이 강했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가 12년 만의 민주당 정권으로 들어설 때는 북한을 철저히 굴복시키거나 붕괴시켜야 한다는 네오콘 분위기가 관계와 언론계에 팽배해 있었고 정보도 네오콘 세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중에 북한관계 정보를 조작해서 ‘북핵위기’를 만들어 놓은 데 대한 반발로 북한이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을 때 막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위한 정보와 인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자라난 위기를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해소해주었고, 그 결과 1994년 10월의 제네바합의가 이뤄졌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제네바합의는 대외개방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순탄할지는 소련도, 중국도, 누구도 장담해줄 수 없었다. 미국의 ‘선의’가 계속해서 필요했다. 제네바합의에 이르게 해준 밑천은 자신의 핵능력(또는 그 능력에 대한 미국의 평가)이었다. 합의에 대한 대가로 이 밑천을 꼭 필요한 만큼 제한할 수는 있지만 아주 버릴 수는 없었다. 그 밑천을 지킬 수 있는 대로 지켜야 앞으로 미국의 선의를 확인하는 데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길을 열어주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핵심이었지만, 그 길을 다져주는 데는 남한의 역할이 미국 못지않게 중요했다. 긴장완화의 의지를 다른 누구보다 남한이 확인해 준다면 북한이 개방의 길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핵능력이라는 보험 상품에 대한 필요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적대적 태도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남북대화에 나설 때도 북한을 ‘이용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한결같았다. 김영삼 정권 동안 남한은 북한의 개방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을 위축시키는 역할만 맡았다.

 

제네바합의 이후 한반도는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가 최소한으로 줄어든 상황을 맞았다. 소련과 일본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중국은 한반도 긴장완화를 바라는 입장이었고, 북한을 끝까지 봉쇄하고 있던 미국까지 물러섰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은 남북한 두 주체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정책 선택의 폭이 넓지 못했다. 따라서 가장 큰 책임은 남한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분단의 큰 피해를 입어 온 남한에게 긴장완화는 ‘대박’ 정도를 넘는 엄청난 행운이다. 경제-정치-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획기적 발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의 염원 중에도 ‘통일’보다 큰 것이 있을까. 그런데 남한이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분단의 내재화’다. 남한 수구세력은 모든 면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 수구성의 초점이 분단체제 고착에 있다. 분단체제를 이용해 장악해 놓은 기득권을 유지-확장하는 데 분단체제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재계와 언론계를 지배하는 이 세력이 긴장완화를 막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쪽으로 정권을 몰아가는 것이다.

 

제한된 범위의 세력이 장기간에 걸쳐 다수 인민의 염원을 거스르는 쪽으로 정권을 운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반공독재 기간에 축적된 노하우가 활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통일’의 의미를 뒤트는 것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로 시작된 이 선전기술은 통일을 화합의 과정이 아니라 정복의 과정으로 그려낸다. 말로는 ‘통일’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대결’에 집착하는 것이다. 김영삼의 북한붕괴론은 그 변형의 하나였다.

 

김영삼의 ‘잃어버린 5년’이 끝날 때는 수구세력의 무리한 정권 운용이 파탄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파탄은 IMF사태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오만’이었다. 경제 파탄도 남북관계 파탄도 모두 오만의 산물이었고, 그 오만은 수구세력이 키워준 것이었다. 이때 정권을 넘겨받은 김대중이 오랫동안 남북관계 발전을 중요한 목표로 세워온 정치가였기 때문에 남한의 대북정책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4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안전 보장, 그리고 남북 교류와 평화 통일”을 공약으로 들고 나온 일이 있었다. 1956년 조봉암 이후 처음으로 평화통일을 대통령선거의 중심 이슈로 만든 것이다. 그 무렵 만들어진 3단계 통일론을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1단계에서는 평화 공존을 위해 동족끼리 전쟁을 않는다고 약속하고, 동시에 긴장 완화를 위해 쌍방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했다. 서로가 상대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여 (...) 구체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4대국의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억제 보장과 함께 북한의 유엔 출석, 그리고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남한이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북한은 도쿄나 워싱턴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등의 동시 외교도 촉구했다.

 

재2단계는 평화적 교류의 확대이다. 기자 교류나 문화-예술-스포츠 교류를 앞당기고, 서로의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경제적 교류는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적으로 실질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남북 교섭이 성공하고, 남북의 민족애와 신뢰가 회복되고, 그럼으로써 완전 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가 성취되면 비로소 마지막 3단계인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1권 278쪽)

 

대통령 취임 후 김대중의 대북정책은 근 30년 전에 작성한 이 통일론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일관성도 치하할 만한 것이지만, 1970년대 초에 필요했던 원리가 1990년대 말까지 그대로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1992년 선거에서는 남북관계를 이슈화하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으로 이미 긴장완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분위기였으므로 호소력이 강하지 않은데다가, 김대중이 색깔론에 가장 심하게 시달린 선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거를 70여 일 앞둔 시점에서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었고, 선거전이 시작되자 색깔 공세가 마구 쏟아졌다.

 

여당은 노골적으로 나를 공격했다. “김일성은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영삼은 반대하고 있다. 김일성이 지지하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뽑아도 좋은가?”

 

정원식 선거대책위원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민민전 방송을 통해 민주당과 전국연합이 정책 연합 형식으로 김대중 후보를 범민주 단일 후보로 추대키로 합의한 데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 바 있다.” (...)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민주화 동지라는 김영삼 후보가 선거 막판인 12일부터 유세장에서 색깔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용공 혐의를 씌워 나를 매도하며 박정희 군사 정권 때부터 써먹던 흑색선전 발언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그는 나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최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이 김영삼이를 낙선시키고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지령했다. 색깔이 분명치 않은 정당에게 정권을 맡겨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북한이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느냐,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느냐.” (같은 책 600-601쪽)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패퇴한 후 한반도 평화정책에 노력을 집중하고, 그를 위한 기구로 아태평화재단을 1994년 1월에 출범시켰다. 1년 후 임동원이 이 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되어 김대중의 통일정책을 함께 준비하고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후 ‘햇볕정책’을 함께 추진하게 된다. 김대중은 임동원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햇볕정책과 더불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도 아태평화재단에서 치열한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임동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7-7선언과 남북 기본 합의서를 이끌어 냈다. 대북 협상과 전략에 풍부한 경험과 탁원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의 경험과 능력이 탐났다. 마침 통일원 차관을 마치고 쉬고 있기에 사람을 보냈다. 함께 일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런 능력이 없다”고 거부했다. 다시 사람을 보내 설득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사양했다. 다시 사람을 보냈다. 이제야 그가 흔들렸다.

 

나는 그와 점심을 같이하며 아태평화재단 일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두 시간이 넘게 남북문제, 북한 핵 문제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예상대로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내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삼고초려’였다. 나는 그를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임 총장은 정치인 옆에는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요조숙녀 같은 사람을 소도둑놈이 훔쳐 온 격이었다. (같은 책 644쪽)

 

김대중이 보냈다는 사람은 비서실장 정동채였다. 1994년 12월 중순 정동채를 만난 후의 소감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평소 김대중 이사장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정말 뜻밖이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내가 군사정부와 보수언론 등을 통해 익히 들어온 바는 “김대중은 사상이 불순하다. 빨갱이다. 과격하다” “김대중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다.

 

(...)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 더구나 오랫동안 야당지도자였던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청은 고마우나 그분을 모시고 일할 생각이 없고 능력도 없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피스메이커> 309쪽)

 

한 달 여가 지난 후 김대중을 자택으로 찾아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이야기를 임동원은 이렇게 맺었다.

 

나는 ‘아, 이런 분이 지난 대선에서 당선되었다면 지금쯤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이룩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또한 지난날 그의 능력과 인기를 두려워한 집권자들이 그가 정치에 나설 때마다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를 빨갱이, 거짓말쟁이, 과격분자로 몰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 역시 속아 살아왔음을 부끄럽게 자인하게 되었다.

 

‘평화통일’을 말하면 그 순간부터 빨갱이가 되고, ‘민주화’를 외치면 과격분자가 되고, ‘정치하겠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야만의 세월을 의연히 버텨온 그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성심껏 모시고 연구활동을 돕겠습니다.” (같은 책 315-316쪽)

 

 

Posted by 문천

 

692메가와트 규모의 츠벤텐도르프 원자력발전소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핵발전소로 1972년 4월 착공해서 1978년 가을까지 140억 실링(지금 돈으로 약 10억 유로)을 들여 완공을 보았다. 그러나 이 발전소는 가동되지 못했다. 1978년 11월 5일의 주민투표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법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50.5% 대 49.5%)

 

이 주민투표를(국가 차원의 주민투표를 ‘국민투표’라 부르기도 하지만 투표의 본질이 ‘주민’의 의사를 묻는 것이므로 ‘국민투표’란 이름을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기로 오스트리아에서는 핵발전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비핵국가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건이 경각심을 크게 일으키기 8년 전에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다 지어놓은 발전소를 폐쇄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찬반 차이가 그토록 작았는데도 이 문제의 재론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일반적 약점이 불안정성이다. 어떤 문제든 제기를 쉽게 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같은 의제가 조금씩 내용을 바꿔 거듭 제안될 수 있어서, 집념을 가진 세력이 있다면 언젠가 관철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단 한 번의 주민투표로 비핵국가의 길을 확정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제일 활성화된 나라로 단연 스위스가 꼽힌다. 18세기 말 이래 세계적으로 집계되어 있는 국가 차원의 주민투표 5백여 회 중 3백여 회가 스위스에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Wikipedia> "referendum") 바로 옆의 오스트리아가 2위로, 20여 회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의 주민투표 중 그 나라의 진로에 큰 고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이해에도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독일과의 합방에 대한 1938년 4월 10일의 투표였다.

 

한 달 전 독일군이 진주해 합방을 실행해 놓은 상태에서 주민에게 추인을 요구하는 투표였으니 공정한 투표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위 투표지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한 달 동안 좌익과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있어서 7만 명 이상이 체포되고 40만 명 이상이 투표권을 빼앗겼다고 한다. 투표권자의 10% 가까운 숫자다. 이 투표에서 찬성이 99.7%룰 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투표가 철저한 조작은 아니었다. 1870년을 전후한 ‘독일 통일’에서 오스트리아가 빠진 것은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으며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독일인 국가들이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뭉치는 민족통일의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제국이 몰락하고 독일인 지역만이 오스트리아공화국으로 출범할 때 독일과 합쳐 ‘독일인 공화국’을 만들자는 ‘통일’(Anschluss) 열망이 높았다. 그때 티롤과 잘츠부르크에서 시행된 주민투표에서는 오스트리아-독일 통일 찬성이 98~99%에 달했다. 그러나 승전국들이 ‘큰 독일’을 꺼렸기 때문에 베르사이유조약에서 분리독립을 강요했다.

 

1830년대 초 오스트리아 출생의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운동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독일 통일운동이 격화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나치가 주도한 이 운동은 소박한 민심에 역행함으로써 오히려 반발을 키웠다. 독일계 미국 작가 존 건서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1932년에 오스트리아인의 통일 찬성은 80% 정도였을 것이다. 이것이 1933년 말까지 최소한 60% 반대로 뒤집혔다. 이유는 히틀러의 테러리즘이다.”

 

1920년대 말 이래 오스트리아 정권은 기독교사회당의 국수주의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정권도 파시스트 정권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독일인이 독일 독일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통일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세력 강화에 따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1938년 3월 13일 통일에 대한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했다. 청년층의 통일 지지를 봉쇄하기 위해 투표연령 하한을 24세로 올리는 등, 이 투표가 시행되었다면 한 달 후 독일의 점령 하에 실시된 투표보다 더 심한 부정투표가 되었을 것이다. 통일 지지자들의 항의로 소요사태가 이어지자 독일은 치안 유지를 빌미로 침공, 정권을 접수해 버렸다.

 

1938년의 오스트리아-독일 합방이 우리 현대사에 하나의 거울 노릇을 해주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신탁통치 때문이다. 추축국에 합방되어 있었다는 것이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공통점이었다. 전쟁 후 (연합국이 이길 경우) 두 나라를 독립시킨다는 연합국의 방침이 1943년 가을에 나란히 나왔는데, 두 나라 인민의 일본과 독일에 대한 항쟁을 독려하는 한편 전후에 일본과 독일을 약화시킨다는 뜻이 겹쳐진 방침이었다.

 

결국 두 나라가 연합국의 인정을 받을 만한 항쟁을 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는데, 두 나라를 독립은 시켜주되 신탁통치를 거치게 한다는 전후 연합국의 방침에는 추축국에 항쟁하기보다 추축국의 전쟁노력을 거들어준 데 대한 벌칙의 의미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벌칙이 더 무거워서 10년, 그리고 한국에는 5년 이하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자발적인 합방에는 독일민족주의 입장에서 ‘통일’의 의미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통일의 열망이 높을 때 연합국이 강제했던 ‘분단’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결과로 떨어진 10년의 신탁통치를 오스트리아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좌우합작이 잘 되어 소련 측과 서방 측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신탁통치에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분단건국에 이른 한국과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확대와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선출된 공직자의 무책임과 부패 등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이 드러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시대 요구의 변화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확산될 때는 국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선 미국의 헌법 기초자들도 “다수의 독재”라는 이유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다.

 

1787년에서 1788년에 걸쳐 “연방주의”(The Federalist)란 제목을 단 85편의 글이 발표되었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연방헌법 비준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가명으로 발표된 글인데도 미국 법정에서 헌법 해석에 널리 활용될 정도로 중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10호 문서가 꼽히는데, 매디슨이 썼다는 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언제나 별개의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도 비슷한 차이가 있습니다. 토지, 제조업, 상업, 금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문명국가 안에서는 자라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정서와 견해를 가진 여러 계층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다양하고도 상호관련성을 가진 이 이해관계들을 조율하는 것이 근대국가 입법의 중심 과제이며, 정부의 일상적 운영에 있어서의 당파성이 그 과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작은 수의 시민으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시민이 모여 정부를 직접 운영하는 순수 민주주의는 당파성의 폐단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다수가 어떤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할 때 소수를 희생시키고 싶은 유혹을 억제할 길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안전이나 소유권의 보호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끝날 때 험한 꼴을 보인다는 사실이 늘 확인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Wikipedia> "Direct democracy")

 

미국의 독립에 이상주의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적 측면은 아니었다.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에게는 영국에 세금 바치기가 아깝고 노예제 폐지의 위험을 피하려는(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마음이 더 컸다. 지배층의 권리에 대한 민중의 위협을 싫어하는 마음은 영국 지배층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매디슨만이 아니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존 위더스푼도 말했다. “순수 민주주의는 오래 계속될 수도 없고 모든 정부기관에 깊이 파고들 수도 없다. 대중의 분노가 가져오는 변덕과 광기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해밀턴도 말했다. “순수 민주주의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최선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고들 말한다.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증명한다. 시민들이 직접 토의에 참가하던 고대 민주정치에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 본질은 독재였고, 그 모습은 기형적이었다.”

 

독립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순수 민주주의”(pure democracy)라고 말한 것은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이념 자체로는 직접민주주의가 옳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독립운동이 일단 벌어지자 이념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다 건너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를 연장해서 연방정부의 지배도 거부한다는 뜻으로 각 주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방주의자들은 ‘아메리카합중국’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연방헌법을 각 주가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원리의 한계를 강조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독립 때부터 이처럼 국가주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유럽국들에 비해 주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의 힘이 약하다. 그러나 근년 확장되고 있어서 지금 절반가량의 주에 주민투표가 법제화되어 있고,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도 정책 결정에 주민투표를 활용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주민투표의 역할이 늘어나는 추세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가’의 의미가 약화된 데 따른 것이다. 영토의 귀속을 결정하거나 신탁통치의 종료를 확인하기 위해 국제 감시하의 주민투표가 끊임없이 필요하게 되면서 국가 차원에 얽매이지 않는 민의 수렴방법이 주목받게 되었다. 국가의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민투표가 필요한 상황도 늘어났다.

 

정치제도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도 주민투표 제도가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지방자치 발전에 따라 주민투표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경직성에 빠져 있는 한국에서는 주민투표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원전을 반대하는 삼척 주민의 뜻을 확인한 주민투표를 정부가 ‘법적 근거’를 따지며 묵살하려 드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주민투표의 중심은 ‘민심’에 있다. 정부에게는 주민투표를 도와줄 ‘책임’이 있는 것이지, 주민투표를 시행해라 마라 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자산인 주민투표를 짓밟으려만 드는 현 정권은 과연 40년 전의 국가관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