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를 당시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비하면 세상이 그렇게까지 바뀐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그 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면, “역사의 종말” 같은 네오콘의 환상적 승리감이 너무 들뜬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 현실의 냉엄함을 깨닫게 된 것일 뿐이지, ‘동구공산권 붕괴’는 정말 큰 역사적 변화의 계기였다. 아무리 그 의미를 작게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가 반세기 만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냉전체제에 심한 구속을 받고 있던 한반도에 세계 어느 곳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개항기 이후 줄곧 작용해 온 외세의 힘이 대폭 줄어드는 변화라는 점에서 더욱 큰 계기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서는 일본제국의 성립과 발전을 위해,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패권체제 구축을 위해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던 한반도였다. 미국과 소련-중국 사이의 긴장관계가 풀어짐과 함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해소되었고, 그것은 외세의 작용이 줄어들 수 있는 조건이었다.

 

외세의 작용이 줄어들면 주체적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이에 따라 냉전기 동안 막혀있던 민족문제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본제국 아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냉전체제 아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민족국가 건설의 의지는 외세의 힘에 막혀있었다. 외세 작용의 약화는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하나의 확실한 필요조건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북방정책의 목표와 방법에 비판할 점이 어떤 것이 있다 하더라도, 냉전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지향성은 분명했기 때문에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일련의 고위급회담 끝에 1991년 12월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새로운 국제질서 안에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으로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의 발전이 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1994년 봄에는 1953년 이후 가장 심각한 전쟁위기까지 치닫기도 했다. 그 책임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당시의 미국과 남한에서는 선전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책임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후 밝혀졌다. 북한은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대외개방 없이는 난국이 더 심각해질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외개방의 열쇠인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한 사실이 확인된다. 북한에게 책임이 있다면 주장을 펼치는 방법에 있어서의 기술적 문제 정도였다.

 

북한의 개방을 가로막은 큰 책임은 미국과 남한 정부에게 있다. 한반도 긴장의 주체는 남북한이고 미국은 제3자다. 제3자 입장인데도 미국의 역할이 컸던 것은 40년 전의 한국전쟁 이래 북한 봉쇄의 주체였고, 북한 대외개방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란 북한이 민족을 등진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각에서 만들어낸 말인데, 북한이 남한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앞세운 것은 기본적으로 이 현실적 필요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안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이 신뢰할 수 없었던 문제도 있었다.

 

북한이 관계개선에 그야말로 목을 매달고 달려드는 데 대해 미국의 태도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세계적 긴장완화의 일환으로 북한의 개방을 도와주거나 적어도 허용하려는 것인데, 클린턴 정부는 대개 이런 태도를 보였다. 한편 공화당 쪽에는 군사정책의 수요를 키우기 위해 긴장의 확대를 원하는 네오콘 경향이 강했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가 12년 만의 민주당 정권으로 들어설 때는 북한을 철저히 굴복시키거나 붕괴시켜야 한다는 네오콘 분위기가 관계와 언론계에 팽배해 있었고 정보도 네오콘 세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중에 북한관계 정보를 조작해서 ‘북핵위기’를 만들어 놓은 데 대한 반발로 북한이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을 때 막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위한 정보와 인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자라난 위기를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해소해주었고, 그 결과 1994년 10월의 제네바합의가 이뤄졌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제네바합의는 대외개방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순탄할지는 소련도, 중국도, 누구도 장담해줄 수 없었다. 미국의 ‘선의’가 계속해서 필요했다. 제네바합의에 이르게 해준 밑천은 자신의 핵능력(또는 그 능력에 대한 미국의 평가)이었다. 합의에 대한 대가로 이 밑천을 꼭 필요한 만큼 제한할 수는 있지만 아주 버릴 수는 없었다. 그 밑천을 지킬 수 있는 대로 지켜야 앞으로 미국의 선의를 확인하는 데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길을 열어주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핵심이었지만, 그 길을 다져주는 데는 남한의 역할이 미국 못지않게 중요했다. 긴장완화의 의지를 다른 누구보다 남한이 확인해 준다면 북한이 개방의 길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핵능력이라는 보험 상품에 대한 필요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적대적 태도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남북대화에 나설 때도 북한을 ‘이용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한결같았다. 김영삼 정권 동안 남한은 북한의 개방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을 위축시키는 역할만 맡았다.

 

제네바합의 이후 한반도는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가 최소한으로 줄어든 상황을 맞았다. 소련과 일본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중국은 한반도 긴장완화를 바라는 입장이었고, 북한을 끝까지 봉쇄하고 있던 미국까지 물러섰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은 남북한 두 주체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정책 선택의 폭이 넓지 못했다. 따라서 가장 큰 책임은 남한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분단의 큰 피해를 입어 온 남한에게 긴장완화는 ‘대박’ 정도를 넘는 엄청난 행운이다. 경제-정치-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획기적 발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의 염원 중에도 ‘통일’보다 큰 것이 있을까. 그런데 남한이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분단의 내재화’다. 남한 수구세력은 모든 면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 수구성의 초점이 분단체제 고착에 있다. 분단체제를 이용해 장악해 놓은 기득권을 유지-확장하는 데 분단체제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재계와 언론계를 지배하는 이 세력이 긴장완화를 막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쪽으로 정권을 몰아가는 것이다.

 

제한된 범위의 세력이 장기간에 걸쳐 다수 인민의 염원을 거스르는 쪽으로 정권을 운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반공독재 기간에 축적된 노하우가 활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통일’의 의미를 뒤트는 것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로 시작된 이 선전기술은 통일을 화합의 과정이 아니라 정복의 과정으로 그려낸다. 말로는 ‘통일’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대결’에 집착하는 것이다. 김영삼의 북한붕괴론은 그 변형의 하나였다.

 

김영삼의 ‘잃어버린 5년’이 끝날 때는 수구세력의 무리한 정권 운용이 파탄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파탄은 IMF사태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오만’이었다. 경제 파탄도 남북관계 파탄도 모두 오만의 산물이었고, 그 오만은 수구세력이 키워준 것이었다. 이때 정권을 넘겨받은 김대중이 오랫동안 남북관계 발전을 중요한 목표로 세워온 정치가였기 때문에 남한의 대북정책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4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안전 보장, 그리고 남북 교류와 평화 통일”을 공약으로 들고 나온 일이 있었다. 1956년 조봉암 이후 처음으로 평화통일을 대통령선거의 중심 이슈로 만든 것이다. 그 무렵 만들어진 3단계 통일론을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1단계에서는 평화 공존을 위해 동족끼리 전쟁을 않는다고 약속하고, 동시에 긴장 완화를 위해 쌍방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했다. 서로가 상대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여 (...) 구체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4대국의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억제 보장과 함께 북한의 유엔 출석, 그리고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남한이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북한은 도쿄나 워싱턴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등의 동시 외교도 촉구했다.

 

재2단계는 평화적 교류의 확대이다. 기자 교류나 문화-예술-스포츠 교류를 앞당기고, 서로의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경제적 교류는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적으로 실질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남북 교섭이 성공하고, 남북의 민족애와 신뢰가 회복되고, 그럼으로써 완전 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가 성취되면 비로소 마지막 3단계인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1권 278쪽)

 

대통령 취임 후 김대중의 대북정책은 근 30년 전에 작성한 이 통일론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일관성도 치하할 만한 것이지만, 1970년대 초에 필요했던 원리가 1990년대 말까지 그대로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1992년 선거에서는 남북관계를 이슈화하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으로 이미 긴장완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분위기였으므로 호소력이 강하지 않은데다가, 김대중이 색깔론에 가장 심하게 시달린 선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거를 70여 일 앞둔 시점에서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었고, 선거전이 시작되자 색깔 공세가 마구 쏟아졌다.

 

여당은 노골적으로 나를 공격했다. “김일성은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영삼은 반대하고 있다. 김일성이 지지하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뽑아도 좋은가?”

 

정원식 선거대책위원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민민전 방송을 통해 민주당과 전국연합이 정책 연합 형식으로 김대중 후보를 범민주 단일 후보로 추대키로 합의한 데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 바 있다.” (...)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민주화 동지라는 김영삼 후보가 선거 막판인 12일부터 유세장에서 색깔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용공 혐의를 씌워 나를 매도하며 박정희 군사 정권 때부터 써먹던 흑색선전 발언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그는 나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최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이 김영삼이를 낙선시키고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지령했다. 색깔이 분명치 않은 정당에게 정권을 맡겨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북한이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느냐,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느냐.” (같은 책 600-601쪽)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패퇴한 후 한반도 평화정책에 노력을 집중하고, 그를 위한 기구로 아태평화재단을 1994년 1월에 출범시켰다. 1년 후 임동원이 이 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되어 김대중의 통일정책을 함께 준비하고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후 ‘햇볕정책’을 함께 추진하게 된다. 김대중은 임동원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햇볕정책과 더불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도 아태평화재단에서 치열한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임동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7-7선언과 남북 기본 합의서를 이끌어 냈다. 대북 협상과 전략에 풍부한 경험과 탁원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의 경험과 능력이 탐났다. 마침 통일원 차관을 마치고 쉬고 있기에 사람을 보냈다. 함께 일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런 능력이 없다”고 거부했다. 다시 사람을 보내 설득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사양했다. 다시 사람을 보냈다. 이제야 그가 흔들렸다.

 

나는 그와 점심을 같이하며 아태평화재단 일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두 시간이 넘게 남북문제, 북한 핵 문제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예상대로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내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삼고초려’였다. 나는 그를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임 총장은 정치인 옆에는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요조숙녀 같은 사람을 소도둑놈이 훔쳐 온 격이었다. (같은 책 644쪽)

 

김대중이 보냈다는 사람은 비서실장 정동채였다. 1994년 12월 중순 정동채를 만난 후의 소감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평소 김대중 이사장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정말 뜻밖이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내가 군사정부와 보수언론 등을 통해 익히 들어온 바는 “김대중은 사상이 불순하다. 빨갱이다. 과격하다” “김대중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다.

 

(...)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 더구나 오랫동안 야당지도자였던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청은 고마우나 그분을 모시고 일할 생각이 없고 능력도 없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피스메이커> 309쪽)

 

한 달 여가 지난 후 김대중을 자택으로 찾아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이야기를 임동원은 이렇게 맺었다.

 

나는 ‘아, 이런 분이 지난 대선에서 당선되었다면 지금쯤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이룩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또한 지난날 그의 능력과 인기를 두려워한 집권자들이 그가 정치에 나설 때마다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를 빨갱이, 거짓말쟁이, 과격분자로 몰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 역시 속아 살아왔음을 부끄럽게 자인하게 되었다.

 

‘평화통일’을 말하면 그 순간부터 빨갱이가 되고, ‘민주화’를 외치면 과격분자가 되고, ‘정치하겠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야만의 세월을 의연히 버텨온 그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성심껏 모시고 연구활동을 돕겠습니다.” (같은 책 315-316쪽)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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