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공산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가 북한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위기에는 군사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동맹국들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미국과 남한의 위협 앞에 아무 보호막 없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남한이 전반적 위기를 이용해서 군사적 위협을 더 늘릴 위험도 있었다.

군사 위기보다 더 크고 다급한 위기가 경제 위기였다. 군사 위기가 현실화하는 데는 적대국의 의지도 필요하고 도발의 계기도 필요했다. 반면 경제 위기는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공산권 내의 협력체제가 사라져버린 이제, 북한경제는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위험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봉쇄정책이 구원의 손길조차 가로막고 있었다. 중국이 거의 유일한 북한의 교역 상대였지만 이 무렵에는 중국도 아직 힘이 약한데다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위축된 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기의 존재 때문에 정보의 봉쇄가 더욱 심했다. 위기 상황이 미국과 남한에 알려질 경우 이를 이용해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는 정책에 유혹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세력과 남한의 김영삼 정권이 추구한 노선을 보면 타당한 두려움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사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벌어진 일들을 놓고 1990년대 북한의 상황을 당시보다는 넓고 깊게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1991년 이후 북한의 개방정책 지향이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분명해졌다. 그 절박한 수준으로 볼 때 핵사업을 진심으로 억제할 방침이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북한의 개방정책에 제동을 건 것은 미국의 부시 정권이었고, 클린턴 정권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쪽으로 정책을 펼쳤지만 공화당의 반대와 남한의 비협조로 인해 정책의 효과를 빨리 거둘 수 없었다.

김영삼이 집권한 1993~19975년간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 중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남한의 역할이 극히 작았다는 것이다. 그 앞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철학적 근거가 충실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어도 전략적 타당성은 갖춘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을 둘러싼 정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더라도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반면 김영삼 정권 동안 남한은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맡았다. 남한의 경제 발전에도 평화 증진에도 불리한 결과를 자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략 차원에서도 평가를 받을 가치가 없다.

1998년 초 김대중의 집권은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였다. 변화의 출발점은 5년 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낸 고위급회담의 최고급 실무담당자라 할 수 있는 임동원의 외교안보수석 기용은 남북대화 재개 의지를 북쪽에 알리는 신호였다.

이 신호를 북쪽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당시 북한의 상황부터 더듬어본다.

1990년대 중반에 북한이 겪은 가장 큰 변화 두 가지는 경제난과 김일성 사망이었다.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난이 1998년 시점에 어떤 상황에 와 있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아직 위기상황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급한 불은 꺼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측해본다.

경제난보다 더 절박한 것이 리더십 문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건국을 주도하고 한국전쟁 후 40년간 절대권력을 구사하며 유일지도체계를 이끌어온 김일성의 부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까? 절대적 지도자가 사라질 때 집단지도체제가 일시적으로라도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유일지도체계를 이어받았다. 30대 초반에 후계자로 지목되어 20년간 준비를 해온 김정일이 온몸으로 북한을 대표하던 김일성이 비운 자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

김일성 사망 후 3년 반이 지난 1998년 초까지 북한의 권력승계는 파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백학순은 이 과정에서 김정일이 일종의 여유를 부린 것으로 관찰하기까지 했다.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은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북핵문제와 미사일문제로 미국, 남한 등과 생사를 건 싸움 중에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전대미문의 식량난을 겪는 등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 이러한 위기상황은 권력교체와 권력승계에서 불안정성을 확대할 수 있는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후대 수령으로서 큰 어려움 없이 예정대로 권력 승계를 마쳤다. 이는 현실적으로 수령제의 권력이양과 권력승계의 안정성을 증명했다. 더구나 형식적으로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즉시 당 총비서를 승계하지 않고 3년상을 치른 다음에야 총비서가 되고, 또 헌법 개정을 한 후에야 국방위원장에 취임했다. 전대미문의 위기의 상황에서 일종의 여유를 부린 것이다. 수령제가 유일체제로서 유연성과 융통성이 부족한 수직적 위계질서의 권력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권력승계를 하는 데 정치적 안정성을 담보하는 데는 유리한 점이 있었고 또 성공했던 것이다.(<북한 권력의 역사>(한울 펴냄) 683-684)

정말로 여유를 부릴 여지야 있었겠는가. 수직적 위계질서에 생래적으로 부족하게 마련인 유연성과 융통성을 늘리기 위해 애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을 장악하는 총비서 자리를 2년간 방치했을 뿐 아니라 1998년의 헌법 개정에서도 수령자리를 영원한 수령김일성에게 안겨 보내고 김정일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평생을 통해 키워놓은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 큰 자리를 억지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최고지도자로서 최소한의 자리만을 우선 물려받은 다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업적으로써 덩치를 키워나간다는 실용주의적 방법을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할 일이 많은데, 너무 큰 감투를 너무 일찍 쓰고 앉았으면 하기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예컨대 1994년에서 1997년 사이에 김정일은 노동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종종 쏟아냈다. 당 총비서를 맡고 있는 입장이라면 그런 표현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과 행정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국방위원장,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만을 확고히 장악한 입장에서 객관적비판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1996127일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연설 원고를 황장엽이 후에 갖고 와서 <월간조선>에 공개한 일이 있다. 자신의 책임 범위를 제한적으로 본 김정일의 관점을 담은 이 연설에 대해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은 그 연설에서 현재 제일 긴급하게 풀어야할 과제는 식량문제다. 그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북한이 직면한 어려움을 어느 정도 시인했다. 또한 김정일은 도처에서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거리에 나와 식료품을 팔고 행상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농민 시장과 장사꾼이 번성하게 되면 사람들 속에 이기주의가 조장돼 당의 계급진지가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이 대중적 기반을 잃고 녹아날 수 있다. 이것은 그전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난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경제 지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김일성이 그에게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당 사업도 못하고 군대 사업도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신의 과업이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돌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내가 경제 실무 사업까지 맡아보면 혁명과 건설에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미칠 수 있다. (...) 인민들이 현재 당 중앙위원회 명령을 무조건 따르고 있는 것은 나의 권위 때문이지 당 조직과 일꾼들이 사업을 잘 해서가 아니다. (...) 나를 똑똑히 도와주는 일꾼이 없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 (<두 개의 한국> 571-572)

극한적인 경제난 앞에서 경제 사업을 돌아보지 못할 만큼 중요한 김정일의 과업이 무엇이었나? 체제의 뼈대를 지키는 일이었다. 수백만 인민이 굶어죽거나 국경을 넘어가는 상황을 남에게 미루면서 최고지도자가 다른 일에 매달려야 한다니, 북한의 싹수를 가급적 좋게 해석하려고 애쓰는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김정일 혼자의 판단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당부한 것이라 하니, 김정일의 성격 문제보다는 북한체제의 성격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사 제쳐놓고 지켜야 할 체제의 뼈대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것이 군대였다는 사실에서 북한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극도로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인민 전체를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는 위기상황이라면 지켜야 할 뼈대로 당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당도 아니고 군대만 붙잡고 있었다니, 문자 그대로 뼈대만 지킨 셈이다. 굳이 비유한다면 인민은 살집이고 당은 근육이다. 살집만이 아니라 근육까지 놔두고 뼈대만 지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군(先軍)정치는 후계과정의 보장에 필요한 장치였다.

김정일도 1990년에서 1992년에 걸쳐 노동당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사실을 백학순이 지적했다.

김정일은 199010월에 조선로동당은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혁명과 건설에 대한 당의 영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19915월에는 전국당세포비서 강습회 참가자들에게 당세포를 강화하자는 서한을 보내 모든 당세포를 충성의 세포로 만들자!”라는 혁명적 구호를 제시했다. 19921010일 조선로동당 창건 47주년에 즈음하여 혁명적 당건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정일은 당의 령도가 곧 사회주의 위업의 생명선이며 혁명적 건설과 성패는 당을 얼마나 튼튼히 꾸리고 당의 령도적 역할을 어떻게 높이는가 하는 데 달려있음을 강조했다.(<북한 권력의 역사> 687)

그러나 이 무렵 후계가 임박한 김정일에게는 군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권한이 집중적으로 넘겨졌다. 1991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이듬해 4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 1993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개방정책 추진이 여의치 않게 되어 극한적 위기상황을 내다보면서 체제 장악력을 최소한의 범위에 집중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선군정치의 공식 출범은 199511일로 선전되어 왔다. 김일성 사후 첫 정초인 이 날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 묘소) 참배 후 다박솔중대 지도방문 중 선군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책 691)

그런데 김정일의 선군혁명영도가 19691월 조선로동당 인민군당위원회 제4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1월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가 펴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선군혁명사>라는 책자도 김정일의 후계준비 기간을 인민군 당위원회 제4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가 개최된 19691월부터 김일성이 사망한 19947월까지로 구분했다. 이 출판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 일대기가 선군혁명영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당의 선군정치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억센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 책이 총 8개 장 44개 절로 이뤄져 있는데, 1, 2장에서는 19266월부터 19458월까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서술했으며, 이 기간에 김일성이 선군혁명 위업을 개척하고 총대에 의거하여 항일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19691월부터 19947월까지를 다룬 제7, 8장에서는 김일성이 선군위업 계승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서술하면서, 그가 전당, 전군, 전민의 한결같은 염원과 일치한 의사를 헤아리고 조선의 군대와 인민이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주체혁명 위업의 후계자로 추대하는 역사적 위업을 훌륭히 이룩하도록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같은 책 692)

19691월의 회의는 인민군에서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 회의였고 김정일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995년 선군정치 출범 이후 선군이념의 연원이 깊고 김정일의 후계자 입장이 확고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가 부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정일의 후계 과정은 1998년 중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당 총비서에 취임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강성대국을 선포하는 일이 이어졌다. 후계 과정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은 고난의 행군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1998년 남한의 대북관계에 대한 태도 변화에 임해 북한도 이에 호응할 태세가 안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

 

인간세상의 어떤 변화에나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하나의 열쇠가 있다. 동심의 세계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흑백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어떤 좋은 일에도 부담되는 면이 있고 나쁜 일에도 위안이 되는 면이 있다는 사실, 어떤 좋은 사람에게도 어려운 면이 있고 나쁜 사람에게도 아낄 면이 있다는 사실을 자라나면서 차츰 깨우쳐 가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다듬다 보면 어른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이럴진대 많은 사람이 모인 사회는 말할 나위가 없다. 한 사회의 어느 정책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양면성을 갖는 것이다. 현명한 정책결정은 시대의 흐름을 읽음으로써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근대화가 마치 절대선처럼 인식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지고 오래 지켜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치우친 인식은 이 사회의 미숙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한 차례 되돌아보아, 그 필요가 여전히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는 측면은 계속 추진하되, 지나친 측면에 대해서는 자세를 바꿀 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근대화는 원래 19세기 후반 개항기에 개화란 이름으로 떠오른 명제였다. 서양의 발달한 문명을 들여오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일본의 통제력이 확립될 때는 문명화란 이름을 내세웠다. 서양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조선 통치를 통해 전해준다는 뜻이었다. 1919년 일본 통치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난 후로는 근대화란 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근대화의 목적은 유럽에서 발달한 근대문명의 도입과 정착이다. 익숙하던 전통문명을 버리고 근대문명을 받아들일 필요성은 부국강병으로 인식되었다. 서양 열강의 군사력에 압도당하면서, 그리고 근대화된 산업국가의 경제력을 부러워하면서, 또 나아가 선진국의 치밀한 제도에 감탄하며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한 것은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열강의 침략과 정복에 직면한 모든 사회에서 그런 열망이 일어났다.

근대화의 구체적 표적은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회제도였다. 이 표적들은 유럽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명의 진행과 확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화를 흔히 산업화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표적들이 모두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19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이 확산-심화된 것은 당시 그 지역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중부유럽을 거쳐 동유럽까지,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과 일본까지 확산되면서는 산업화의 모순이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겪었는데도 산업화의 물결이 가라앉기는커녕 전 세계로 번져나간 데는 더 큰 모순이 깔려있었다. 그 끝물에서 근대화를 진행한 우리 사회에서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 중에 이 모순으로부터 파생된 것은 없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불평등에서 나온다.

 

근대화가 추구한 근대성이 어떤 것인지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보면 근대화정책의 타당성을 논할 수 있는 범위가 결정될 것이다. 넓은 지역에서 긴 시간에 나타난 현상이므로 근대성의 정체를 간단히 밝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근대화가 지향한 방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논의의 완결이 아니라 출발점 확보를 위해 스케치 수준의 그림을 그려본다.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생산력)은 산업혁명의 직접 산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중심의 정치사회 제도는 산업사회로의 구조 변화에 맞춰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조건은 산업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의 완결은 자본주의체제의 성립을 필요로 했다. 중국에서 1860년대에 서양의 산업기술을 들여오는 양무운동을 벌였으나 1890년대에 한계를 드러내고 변법운동으로 넘어간 데서 체제 변혁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경쟁의 심화를 위해 불평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 착취하는 강자와 착취당하는 약자가 모두 있어야 성립하는 체제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 격차가 커야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열강의 경쟁에서 훌륭한 시설과 제도를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착취 대상의 확보였다. 그래서 식민지 쟁탈전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의 세계적 구조에는 강자와 약자의 비율에 한계가 있다. 산업화를 먼저 이룩한 국가들이 열강의 자리를 차지해서 정원을 채워놓으면 그 후에 산업화를 시도하는 국가는 강자의 자리에 끼어들기 힘들다. 그럼에도 강자들은 약자들에게 산업화를 권한다. 약자도 산업화를 시도해야 강자 입장에서 착취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원이 많은 식민지라도 항만, 철도, 공장 등이 없다면 착취가 어렵지 않은가. 열강이 식민지에 대해 문명화를 내세워 체제 변혁을 유도한 것은 자기네 같은 강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먹잇감이 되라는 뜻이었다.

약자인 후발국 입장에서 한계가 주어진 산업화에 나서는 데는 자해행위의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을 처음에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동안 당하다 보면 현실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의미를 깨우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자해행위를 계속하게 하려면 약자의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Divide and rule”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목적을 위해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손해 속에서 조그만 이익을 얻는 매판세력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이 세력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한국에서 근년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쟁 원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한국을 불리한 위치로 몰고 가는 것인데, 이를 추진하는 지금의 매판세력이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 과거 매판세력의 입장까지 정당화하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시대의 매판세력인 친일파가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통해 매판적 역할을 계속해 온 끝에 이제 국제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과학을 향한 근대인의 신앙

 

1972년의 <로마클럽보고서> 이후 지속가능성이 전 세계적 과제로 떠오른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근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자연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 태도의 바탕에는 과학의 전능(全能)’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의 제약에 인간이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이런 기술만능주의가 특히 맹위를 떨친 것이 제국주의시대의 사상적 분위기였다.

과학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신앙차원이었다. 이런 깊은 믿음은 보편성에 대한 확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신앙의 교리라 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가 원자론이었다.

19세기 벽두에 돌턴이 제출한 원자론이 근대문명의 보편적 원리가 되었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원자론은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의 전능, 나아가 인간의 전능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원자를 탐구하면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9세기에 발생한 사회과학도 원자론 관점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사회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사회도 독립적 개인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초창기 사회과학자들은 보았다. 원자의 탐구가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처럼 개인의 연구가 인간사회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미시적 탐구가 완벽한 이해를 가져온다는 환원주의 경향으로 쏠렸다.

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재편성에도 원자론 관점이 적용되었다. 근대 이전의 국가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지만, 지역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의 중층적-복합적인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개중에는 중앙집권화가 비교적 많이 이뤄진 국가 형태도 있었지만, 근대국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구성원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직접 상대하는 근대국가는 산업화와 함께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원자론의 세계관은 심리적으로는 개인주의, 제도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유행시켰다. 자유주의는 한쪽으로 개인의 경쟁을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를, 또 한쪽으로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두는 민주주의를 뒷받침했다. 19세기 말에 서양인이 자랑스러워하고 동양인이 부러워한 근대문명은 이 몇 가지 원리를 핵심 요소로 가지고 있었다.

원자론의 영향력이 절정에 올라 있던 19세기 말 과학계에서는 원자론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자기와 방사선 연구를 통해 원자 이하의 물질세계로 창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는 쪼개지지 않는(a-tom)’ 원자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사회를 원자론의 관점으로 보는 학술과 사상과 제도는 힘을 잃지 않았다.

물질세계도 인간사회도 유기체적 특성과 원자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문명 발생 이래 대부분의 사회조직 원리는 두 가지 특성을 함께 감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19세기의 근대인은 유기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봉건제를 비롯해 모든 문명사회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을 야만으로 경멸했다. 이 극심한 사상의 편향성은 아주 특별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인류사회가 처한 조건이 당시의 조건과 달라진 것으로 인식한다면 이 편향성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말은 바로 근대화의 종말

 

자본주의체제에 주기적으로 위기를 일으키는 모순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체제는 착취 대상으로서 저개발 상태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발전 초기에는 산업화를 이룬 소수의 열강이 나머지 세계 모두를 착취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아무런 절제 없이 자본주의 원리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열강의 국내에도 미개발 노동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 노동력이 개발과정을 통해 조직력을 키우면서 일방적 착취가 어렵게 되자 해외식민지에 의존하게 되고, 경쟁하는 열강의 수가 늘어나면서 식민지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큰 위기가 제국주의시대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원리를 완화하는 노력이 널리 일어났다. 유럽의 사회보장 발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노력을 가장 소홀히 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내부자원도 넉넉한 편인데다 냉전체제의 패권 위에 신식민지체제(neo-colonial system)를 통한 외부착취를 원활하게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특수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세계 평균의 5배를 넘는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미국 혼자만 절제 없이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열강이 모두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은 꽤 오래 잠복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로마클럽보고서>가 나오고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또 한 차례 큰 위기가 드러났다. 19세기 말의 위기가 산업화세력들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번 위기는 산업문명과 자연 사이의 충돌을 통해 더 근본적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 모순의 기본 양상은 불평등에서 동력을 얻는다는 데 있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열역학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평형상태로 움직여가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체제 도입 초기에 착취 대상이던 대중은 체제 안정에 따라 중산층을 향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가 자연에 대한 착취를 격화시키는데, 그 한계가 1970년대부터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은 드러난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격화시킴으로써 패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반동적 선택이었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이전보다 더 큰 시장과 더 철저한 착취를 필요로 한다.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는 이 필요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권 붕괴 직후 어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완벽한 해답이 존재한다는(그리고 그 해답이 실현되었다는) 근대적 신앙을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계적 경제위기의 심화를 볼 때, 그런 신앙고백이 그처럼 힘차게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본주의체제를 대폭 수정하거나 대안을 마련할 필요를 아직까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노선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개항기의 개화운동 이래 한국인은 자본주의국가로서 발전할 길을 150년간 찾아 왔다. 이 사다리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위만 바라보며 기어오르는 데만 몰두했다. 식민통치자와 독재자들은 한국인이 이 믿음을 떠나지 않도록 독려했다. 이 믿음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한 차례 냉철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굴기가 재검토를 더욱 재촉하기도 하고 참고의 대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왕후이(汪暉)는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근년 발전정책 성공의 열쇠였다고 주장한다.

 

비록 타이완해협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지만, 중국은 주권을 확립하고 고도로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정치적 위상을 찾아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정치적 위상을 바탕으로, 국민경제와 공업에서도 고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체제를 형성했다. 이런 자주성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의 길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1989년 이후 중국의 운명도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혁개방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에는 이미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민경제 체제가 존재했다. 이것이 개혁의 전제였다. 중국의 개혁은 내재적인 논리를 갖춘 자주적 개혁이고, 능동적 개혁이다. (<탈정치시대의 정치>(성근제-김진공-이현정 옮김) 19)

 

Posted by 문천

 

 

성심껏 모시고 연구활동을 돕겠습니다.”

 

1995123일 김대중을 자택으로 찾아가 처음 만난 임동원이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했다는 말이다. 간단한 표현에 많은 뜻을 품은 말이다.

김대중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활동 아닌 연구활동을 돕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활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연구활동을 돕겠다는 것이다.

통일방안의 연구는 물론 임동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다. 공직생활을 통해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해온 일이다. 그러나 통일부차관에서 물러난 후 2년 동안 그 일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민간에서 그 일을 다시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김대중의 뜻에 따라 일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김대중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면 언제든지 물러서겠다는 의지가 돕겠다는 말에서 느껴진다. 자기 일이 아닌 김대중의 일이니까,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할 때는 물러설 수밖에.

이 만남이 있었던 19951월은 김영삼 정권이 2년을 채웠을 때고, 1차 북핵위기가 수습된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임기 말까지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갈팡질팡을 계속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전향적인 입장이라 할 만한 것이 4자회담 제안이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외교는 그 중요성이 컸다. 그리고 미국은 남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

96년 봄 클린턴이 일본 공식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정상 외교 문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시 미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궁핍한 경제상황과 불안한 정세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일관성 없고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둔감하기까지 한 김 대통령의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는 남한에 들르는 것이 상례처럼 돼 있었지만 클린턴은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 측 내부 논의에 참여했던 미 행정부의 한 관리는 클린턴이 이미 한 차례 남한을 방문했고 김 대통령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당초 남한 방문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

남북관계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던 레이니 당시 주한 미 대사는 한반도 평화 구축에 유익한 이야기가 나올 만한 여지가 없다면 클린턴이 시간을 내어 남한에 들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재차 청와대 측에 통보했다. 결국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과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양국 대통령이 그와 같은 성격의 제안을 채택하고 발표하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554-556)

 

일본 방문 뒤에 한국에 들르는 관례를 클린턴이 등지겠다고 한 것은 김영삼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311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김영삼의 행패를 클린턴이 잊을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다. 199410월 제네바합의 타결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도. 대북관계를 어렵사리 풀어가는 고비마다 쓸데없이 고춧가루를 뿌린 김영삼을 만나기 위해 아무 대책 없이 관례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레이니 대사 등을 통해 ‘4자회담의제를 확정해놓은 뒤에야 한국 방문을 결정했다. 4자회담은 19957월 김영삼의 워싱턴 방문 때 한국 측이 선물처럼 내놓고 815일 공식 발표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의 귀국 직후 북한이 한국 쌀 수송선의 진입을 막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영삼은 미국에 아무 협의나 통보 없이 이 계획을 취소했다. 정책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런 식으로 뒤집어버리는 데는 클린턴이 질려버렸을 것이다. 4자회담 약속을 단단히 받아놓고도 클린턴은 서울까지 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도 한 꼬장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416일 제주에 와서 5년 전 노태우가 고르바초프를 만난 호텔방에서 김영삼을 만난 다음 그날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엄밀히 말해서 한국 방문이 아니라 일본 가는 길에 들러서 김영삼의 영접만 받고 지나간 것이다.

-미 공동의 4자회담 제안에 중국은 물론 북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극한적인 식량난 때문에도 그 정도 온건한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1996918일 강릉 잠수함사건이 터지자 김영삼은 다시 극단적 적대정책으로 돌아섰다. 북한 경수로 건설을 위한 KEDO 활동을 중단시키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을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래 전작권 환수에 가장 접근했던 상황이 아니었을지.

 

-미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남한에 있던 미국 관리들은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견해차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달라진 분위기를 상징하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 장교들이 북한 잠수함 조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된 한 미국 무관에게 조사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마지못해 허락한 후에도 조사를 마치고 잠수함을 떠날 때 몸수색을 받게 한 것이다. 이에 미국 대사관은 즉각 항의했다.

9610월 중순 중앙일보는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 육--공군 차원의 보복 공격을 가하기 위해 한국군이 북한 내 12개 공격 목표를 선정해 놓았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원칙적으로 한국군에 대해 전시 작전 통제권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돼 있는 주한미군 사령부는 이 기사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

그러던 중 11월 초 김 대통령이 갑자기 공로명 장관을 해임하면서 미국 측의 우려는 증폭됐다. 공로명이 김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 정책에 이견을 표시했다는 보도가 떠돌고 있을 때였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장관의 사임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내던 남한과 미국의 관리들은 안기부가 김 대통령에게 건넨 공로명의 발언 기록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믿었다. 전화 도청을 통해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발언 기록에는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정책에 공로명 개인적으로 이견을 표시했던 내용이 들어 있었다. (<두 개의 한국> 565-566)

 

1993년의 집권 초기 몇 달간을 제외하고 김영삼은 남북관계에서 극단적 대결정책을 추구했다. 레이건이 대결정책을 통해 소련을 붕괴시킨 업적을 그대로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의지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인정할 수 있고, “갈팡질팡이란 표현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바란 대결정책은 현실적 타당성이 없는 것이었다. 대결정책을 원래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비교적 현실주의적인 클린턴 행정부가 정권을 맡고 있어서 김영삼의 의지를 억눌렀다. 김영삼의 의지는 5년 동안 남한이 북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맡지 못하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정책은 갈팡질팡이라기보다 현실부적응이었다.

정부의 힘에 비해 민간 영역이 미약한 한국 상황에서 아태재단의 역할은 연구의 영역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19952월 초 아태재단 사무총장(겸 재단 부이사장 겸 아태평화아카데미 원장)에 취임한 임동원은 연구 영역에서 아태재단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김대중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 도움이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었다고 나는 본다. 김대중의 기존 구상을 확인하고 뒷받침해 주는 것을 넘어 수정까지 시도했던 것이다.

 

내가 제시했던 이러한 문제점들은 토론과정을 통해 대부분 그 내용이 더욱 충실한 것으로 발전되었으나 한 가지 문제점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나는 남북연합단계로 진입하는 데도 한반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상당한 준비기간을 거쳐야할 것임을 지적하고, 그 이전의 단계로서 화해협력단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나는 화해협력단계 역시 통일의 중요한 한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1990년대 초부터 주장해온 것으로서 1993년에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수용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구태여 연방제단계와 완전통일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1단계 화해협력 단계, 2단계 남북연합 단계, 3단계 연방제통일 단계로 정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3단계론,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이라는 단계공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제시한 화해협력단계를 통일의 과정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으며 남북 간에 합의만 되면 화해협력 단계 없이도 남북연합은 언제든지 즉각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대통령이 된 후에는 남북연합의 즉각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따라서 남북연합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에 화해협력의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화해협력을 지향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화해협력단계도 남북연합단계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분명한 한 과정임을 인정하게 된다. (<피스메이커> 322)

 

화해협력단계의 별도 설정을 둘러싼 두 사람의 이견은 전문연구자와 정치가의 입장 차이를 비쳐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연구자로서 임동원은 이 과제와 관련된 현실조건을 엄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현실조건은 양쪽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1990~1992년간 임동원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중에서 북한과의 실질적 접촉을 가장 많이 가진 대표로서 북한 상황, 특히 북한 지도부의 상황에 가장 정통한 남한 관리였다. ‘남북연합단계를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북연합단계를 곧바로 바라보기보다 화해협력의 단계를 거쳐야 하겠다는 그의 판단은 북한의 적응력만이 아니라 남한사회의 적응태세도 고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극적 긴장완화라 할 수 있는 화해협력의 중간단계 없이 적극적 통합의 길인 남북연합에 곧바로 뛰어드는 데 불안을 느끼는 남한 내 세력과 계층의 존재를 노태우 정권에서 일하는 동안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소극적 중간단계를 통해 긴장완화의 이점을 확인함으로써 반대세력의 범위와 반대의 강도를 줄일 필요를 그는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한편 정치가로서 김대중은 화해협력의 자세 정도는 정치적 지도력을 통해 쉽게 갖춰질 것으로 보고, 별도의 단계를 설정할 필요를 부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정작 대통령이 된 후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정권 획득조차 김종필의 보수세력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던 현실조건을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초기의 중간단계 설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종단계의 성격이었다. 목표를 낮춰 잡고자 한 임동원의 입장이 지식인의 자세에 부합하는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분단이라는 불행한 상황은 몇몇 사람의 의지로 빚어진 것이 아니고,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이런 거대한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만한 마음을 피해야 한다. 분단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완전통일을 너무 앞세우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연방제를 바라보는 것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은 성실한 자세보다 화끈한 자세에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임동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기도 했고, 큰 행운이기도 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