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는 서세동점 현상의 여파가 조선에 닥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유럽에서 본격적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자본주의시장을 전 세계로 확장해 가는 움직임이 서세동점 현상의 본질이었다. ‘부국강병’을 이룬 유럽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전통체제에 머물러 있던 어떤 세력도 맞설 수 없었다. 근대 이전에 세계최강의 제국이던 중국이 19세기 중엽 유럽의 힘에 유린당하면서 동아시아지역이 서세동점에 노출되었다.

 

동아시아 천하체제 속에 오랫동안 안주하고 있던 조선도 변화를 강요당하게 된 것이 개항기였다. ‘개항’이란 곧 자본주의시장으로의 편입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구된 변화 방향이 ‘개화’란 이름으로 인식되었고,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한 일본은 같은 방향을 ‘문명화’라고 불렀다. 당시의 유럽인은 자기네의 기독교문명 내지 근대산업문명을 유일한 문명이라 주장하며 정복사업을 ‘문명화’란 이름으로 포장했는데 일본은 이것을 흉내 낸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문명화’가 ‘근대화’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억압통치의 본질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단계에서 시혜적 입장인 문명화보다 조선의 주체적 과제로 근대화를 인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조선의 ‘민족자본’ 세력이 이에 호응해 일본제국 내에서의 발전을 주장하는 ‘개량주의’로 나타났다. 해방 후에도 근대화는 해방 전의 의미를 그대로 가진 채 독재세력의 구호가 되었다.

 

개화-문명화-근대화는 내면화된 서세동점 현상으로서, 무엇을 건설하느냐에 앞서 전통을 파괴하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았다. 처음에는 정복자가 피정복 사회의 저항력을 줄이기 위해 추진한 것인데, 피정복 사회의 매판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복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자기 사회의 통제력을 확보한 매판세력이 제국체제 또는 자본주의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하는 것인데, 편입하는 체제에서 수탈당하는 위치를 향하는 것이다.

 

안병직,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은 20세기 초 일본의 문명화론을 복원해서 식민지배와 독재정치의 범죄성을 ‘근대화’의 포장에 감추려 한다. 이런 시대착오적 주장을 환영하는 상당 범위의 세력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매판세력의 역할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매판세력이 의지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현상이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념 아닌 현상으로 본다. 19세기 말의 제국주의를 이념 아닌 현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자본주의 극한경쟁이 한계를 보였을 때 모순을 완화하거나 해소하기보다 극한으로 몰고 간 반동노선이 제국주의였다. 1970년대 자본주의체제가 또 한 차례 모순을 드러냈을 때 나타난 반동노선이 신자유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개항기 이후의 우리 민족사는 서세동점 현상에 짓눌려 왔다. 좋은 뜻을 가진 선현들이 있었지만 외세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식민통치도 겪고 분단과 내전도 겪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민족사회의 득실보다 외세의 의지를 받드는 세력이 외세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냉전 종식이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멸이라는 사실이 2008년 금융공황을 계기로 분명해졌다. 자본주의 진영이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공산주의 진영을 압박하게 된 것이 애초에 자신의 모순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안정돼 있던 ‘적대적 공존’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공산권 붕괴에 따라 그 자원의 편입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얼마동안 더 연명할 수 있었지만 모순의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추가된 자원이 소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008년은 그 한계가 드러난 시점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굴기가 그 시점에서 두드러진 것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 도달과 짝을 이루는 현상이다. 물론 중국 정책에 자본주의 성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성향도 작지 않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 영국과 미국이 누려온 패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여러 모로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고 있는 중국 리더십의 성격을 예단하기 어려운 점들도 있지만, 서세동점 현상의 극복이라는 지향성은 검토의 가치가 있다.

 

민족문제에 대해 지금 남한 사회에서는 대결주의와 포용주의가 맞서 있다. 그런데 대결주의가 냉전시대의 매판세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외세의 압력이 줄어드는 향후 상황에서는 포용주의로 기울어갈 것이 예상된다.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에 따라 민족사의 회복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Posted by 문천

 

1994년 10월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불만은 북미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의 진전과 관계없이 이뤄진다는 데 있었다. 1993년 6월 고위급 북미대화가 시작된 이래 김영삼 정부는 북미 간의 어떤 합의에도 남북대화 진전을 조건으로 연계시키도록 미국 측에 계속 요구했다. 스스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애쓰지 않으면서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북미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북미회담의 미국 대표단에게 곱게 보일 수 없었다.

 

미국 측은 합의문에 남북대화에 관한 언급을 꼭 넣도록 고집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갈루치를 비롯해 대부분의 협상단원들은 이 조항을 꼭 넣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협상 막판에 와서 제멋대로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고 진저리를 쳤다. 남북대화 같은 중요한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한 김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미국의 정책결정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뉴욕타임스> 같은 미국 언론에 털어놓은 것 자체가 그의 판단력이 수준 이하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333쪽)

 

1994년 6월 카터의 북한 방문 이후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대화를 꾸준히 진행시켰다. 그런데 이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어려웠다. 북한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공화당의 오만한 정책을 미 국민의 대다수는 더 좋아했다. 1992년 1월 뉴욕회담에서 북한의 대화 요청을 여지없이 거부하던 그 당당한 자세를 왜 누그러트려야 하는지 이해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미국 국민 중에 소수였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북-미 합의에 대한 불만을 <뉴욕타임스>에 털어놓는다는 것은 클린턴 정부의 발목을 잡는 정도가 아니라 등에 칼을 꽂는 짓이었다. 미국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한다는 것인데, 전쟁이 나면 미국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나라가 한국 아닌가.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필요가 없다는 협상에 미국 정부가 매달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독기 어린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기사는 미국 여론에 독을 뿌렸다. 이 독이 제네바 기본합의의 실행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당장의 협상 진전에는 도움이 된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김영삼은 더 이상 미국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기사가 나온 당일로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 외무장관에게, 미국 안보보좌관이 한국 외교안보보좌관에게 항의 전화를 거는 등 전방위 공세로 나오자 김영삼은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꿨다.

 

다음날[10월 13일] 아침 김 대통령은 마침내 마음을 바꿨다. 한[승수] 장관의 표현을 빌면 대통령은 “국가지도자가 될 준비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제네바 합의를 지지할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해야만 정책변화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385쪽)

 

그래서 클린턴이 전화를 했고, 김영삼 정부는 이홍구 통일부총리의 발표 형식으로 임박한 제네바합의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한국 정부 때문에 미국은 협상의 마무리를 서둘러야 했고, 그로 인해 실행과정의 어려움을 더 많이 남겼다.

 

10월 14일 저녁 미국협상단은 워싱턴에 조만간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알려왔다. 이제 워싱턴에서 언제 어떤 형식으로 마감할 지를 결정해야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한[승주] 장관이 요청한 대로 바로 합의를 마무리 짓는 방법이었다. 그럼으로써 재협상의 위험을 줄이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의회와 상의할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일단 잠정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협의를 한 다음 제네바로 돌아와 최종합의서에 서명하는 방법이었다. 보다 합당한 방법이었지만 서울이나 평양에서 합의를 깨고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첫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서울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한 달 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는 행정부에 맹공을 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전 협의 없이 결과만 의회에 들이밀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책 387-388쪽)

 

합의문 서명은 10월 21일에 이뤄졌지만, 합의 내용은 나흘 전인 17일에 완성되었다. 완성을 앞둔 마지막 난관도 남북관계 문제였다. 10월 15~17일 사흘간의 협상과정을 <북핵위기의 전말> 388-396쪽에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저자들이 너무나 애를 먹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합의문의 이 대목이 “애매하고 엉성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문제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The DPRK will engage in North-South dialogue, as this Agreed Framework will help create an atmosphere that promotes such dialogue."

 

이런 글을 잘 썼다고 하는 영작문 강사는 없을 것이다. 접속사 "as"에 문제의 초점이 있다. ‘이유’를 뜻하는 것인가, ‘병행’을 뜻하는 것인가? 북한은 ‘이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합의가 먼저 효력을 발휘한 뒤에 남북대화가 따라올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은 ‘병행’으로 생각해서, 기본합의와 남북대화가 함께 진행될 것이라고 했으니 남한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우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네바 기본합의는 겨우겨우 만들어졌다. 북한은 NPT 규정보다 엄격한 기준의 사찰에 응하면서 일부 핵활동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하고, 미국은 그 대신 외교관계 수립을 목표로 제재를 완화할 것, 핵위협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북한의 경수로 도입을 도와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 동의를 얻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2000년 물러날 때까지 이 합의를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를 유지했다.

 

1994년 12월 17일 휴전선을 넘어간 미군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생포되는 소규모 위기가 발생했지만 12월 31일까지 해결되어 문제가 확대되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북한 측의 의지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버르장머리를 고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걸고넘어진 것은 경수로의 ‘한국형’ 표시 문제였다.

 

미국은 경수로 비용의 70%를 남한이, 20%를 일본이 내도록 협상을 해놓았는데, 북한이 남한의 도움을 직접 받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컨소시엄 형태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었는데, 명색은 국제기구지만 한-미-일 3국 외에 형식적으로라도 참여한 것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5백만 달러), 뉴질랜드(30만 달러)뿐이었다. 1995년 3월 9일 KEDO가 발족하고, KEDO와 북한 사이의 경수로 공급계약 협상을 위해 제5차 북미회담이 5월 20일부터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이때 공급될 경수로를 ‘한국형’으로 표시할 것을 남한 정부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제네바 기본합의를 둘러싸고 많은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었다. 물론 북한 형편이 풀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 보기에도 김영삼 정부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한다고 간헐적으로 핏대를 올리다가는 그 결과를 결국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종내 수십억 달러의 비용까지 짊어지는 석연치 않은 모습에 이르렀다. 반공주의자는 말할 것 없고, 대북 유화론자가 보기에도 그만한 비용을 투입하면서 뚜렷이 추구하는 정책목표가 없었다.

 

김영삼은 경수로에 ‘한국형’이란 이름을 붙임으로써 ‘체제 승리’의 기쁨이라도 국민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일까? 99% 미국 기술에 1% 덧붙인 것을 ‘한국형’으로 불러야 한다니,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진다”고 한 말을 잘못 해석한 걸까? 아니면 아Q의 ‘정신적 승리’가 부러웠던 것일까?

 

<북핵위기의 전말> 443-444쪽에는 쿠알라룸푸르 회담에 참석한 한 미국 관리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경멸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단어를 둘러싼 제로섬게임의 포로가 돼있었다. 그 게임에서 남과 북은 서로 상대가 체면을 살릴 여지를 남겨두려고 하지 않았다.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의미하는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헙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한 쪽이 수락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이는 곧 충분히 모욕적이지 않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승리란 상대방을 화나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다.”

 

경수로의 ‘한국형’ 표시에는 미국 협상단원들도 전혀 공감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KEDO와 북한 간의 계약에는 그런 표시를 하지 않고 KEDO와 남한 사이에서만 그 표시를 쓰기로 했다. 한국 측에게 대단히 불만스러운 결정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은 한국인들을 설득하느라고 보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측이 북한 측으로부터 얻어낸 최선의 용어는 KEDO가 “미국을 원산지로 하는 디자인 중 신형”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한국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힘든 회담 중 잠시 취한 휴식시간에 한국의 한 외교관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을 말로 표현했다: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라면 한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타헙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타협만이 아니었다. 그처럼 시시한 말장난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미국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구제불능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허락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타결을 봐야 했다. 6월 7일 미국의 제안에 따라 북한은 이중구조의 합의안에 동의했다. 즉 KEDO와 북한은 한국이라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한다; KEDO는 별도로 한국을 경수로의 제공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한다. (같은 책 444쪽)

 

이 결정이 내려진 이튿날 클린턴이 김영삼을 달래려고 전화했을 때 김영삼이 꽤나 성질을 부린 모양이다. 클린턴의 통화를 도와주던 대니얼 폰먼이 나중에 김영삼의 통역이 번역한 내용과 자신이 들은 내용을 대조했을 때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통화가 끝난 후 폰먼은 김 대통령의 통역이 전한 영어를 중심으로 자신의 메모와 클린턴 대통령의 통역이 적은 메모를 비교해봤다. 한국 측의 통역이 김 대통령의 표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드러났다. 특히 영어에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없는 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김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을 부를 때 사용한 이인칭 대명사는 동등한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부를 때 쓰는 용어였다. (같은 책 445쪽)

 

그 2인칭 대명사가 뭐였을까? “당신” 정도에 폰먼이 감명을 받았을 것 같지 않은데... 설마...? 폰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Posted by 문천

 

1863년 10월에 창설된 국제적십자사는 인도주의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국제기구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기구가 설립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적십자사의 성격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 여기에 ‘인도주의’란 이름을 붙여 제도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생겼는가?

 

크리미아전쟁(1854-1856)은 나폴레옹전쟁 이후 40년 만에 유럽에서 일어난 큰 전쟁이었다. 40년간 무기의 기술이 발전해서 전쟁의 파괴력이 커진 데 비해 전쟁 운영의 기술이 뒤처져 있었다. 특히 의료부문이 미개했다. 영국이 보낸 25만 명의 군대에는 의료진이 없었다. 2만5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으면서 여론이 끓어오르자 런던에서 치료소를 운영하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군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로 가서 구호 활동을 펼쳤다. 이것이 근대적 간호제도의 출발점이었다.

 

크리미아전쟁을 기점으로 비엔나체제가 무너지고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859년 6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14만 명의 프랑스-피에드몽 연합군과 13만 명의 오스트리아 군 사이에 벌어져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솔페리노전투는 이 시대의 전쟁 중 특별히 규모가 큰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 의미가 큰 것도 아니었다. 앙리 뒤낭(1828-1910)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특별히 기억에 남을 이유가 없는 숱한 전투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제네바의 사업가 뒤낭은 알제리아의 사업에 관련된 청원을 위해 이탈리아에 출정 중인 나폴레옹 3세를 찾아왔다가 전투 직후의 솔페리노에 도착했다. 2만여 명 부상자가 구호를 받지 못한 채 전쟁터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낭은 볼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남아 구호작업을 펼쳤다. 그가 자금을 대며 앞장서자 인근 주민들도 호응해서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솔페리노 주민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착한 마음을 갖고도 펼칠 길을 쉽게 찾지 못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 뒤낭은 <솔페리노의 기억>을 써서 1862년 자비로 출판, 유럽 각국의 요인들에게 보냈다. 전쟁부상자 구호를 위한 자발적 조직을 각국에 만들 것을 호소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중 열렬한 반응을 보인 한 사람이 제네바공공복지협회 회장 귀스타브 무와니에(1826-1910)였다. 무와니에가 제네바 유지 몇 사람과 뒤낭을 청해 사업을 의논하기 시작한 모임에 ‘부상자구호국제위원회’란 이름을 붙인 1863년 2월 17일이 국제적십자사의 창립일이 되었다.

 

‘부상자 구호’라는 첫 이름처럼, “전쟁 속에서도 자비를!”을 구호로 내건 적십자사의 원래 목적은 전쟁터에서의 고통과 희생을 가능한 한 줄이자는 것이었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서로 죽이고 죽는 장면에서도 전사와 전사, 즉 사람 사이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근대 전쟁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 공격 대상이 되고, 공격받는 공간 안에 있던 병사들은 공간의 부속물로서 부수적인 희생자가 되었다. 병사는 더 이상 전투의 주역이 아닌 것이다. 그런 병사가 전투력을 잃은 상태에서 다시 사람으로 인정받게 해준다는 것이 적십자의 뜻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터에서도 이 본성이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런데 근대 전쟁에서 이 본성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이제는 모니터 위의 점으로 적군 병사를 인식하고 스위치 하나를 눌러 상대방을 떼거리로 멸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인도주의’ 운동은 18세기 중엽에 나타나 19세기 중에 큰 발전을 보았다. 산업혁명의 진행과 확산에 뒤따른 현상이었다. 적십자사의 부상자 구호사업 외에도 노예제도 철폐, 형벌제도의 합리화, 고문 폐지, 감옥의 환경개선, 정신질환자 보호, 여성차별의 극복, 동물학대 방지 등 여러 방면의 인도주의 운동이 이 시기에 전개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근대문명’의 ‘인간 실종’ 현상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이 현상이 19세기 후반에는 전쟁터에서 극명했기 때문에 나이팅게일과 적십자가 나타난 것이다.

 

군대와 산업조직의 대형화 및 도시화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이 지역사회 안에서 관습에 따라 처리되었다. ‘사람의 도리’에 대한 인식에 큰 편차가 없어서 ‘공론’이 질서 유지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약간의 문제를 살펴주는 정도의 소극적 역할에 그쳤다. 그런데 지역사회의 역할이 퇴화한 근대적 상황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커졌고, 국가의 권력을 아무리 강화해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속출하고 있었다. 국가 간의 대립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더욱 한계를 갖는 영역도 있다. 이런 영역을 떠맡기 위해 인도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NGO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도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킨 여러 방면의 참혹한 상황을 되돌아보면 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어렵다. 그러나 시야를 넓게 잡아보면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과연 이런 운동이 모순의 척결을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모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가? 적십자사가 평화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전쟁을 없애자는 목표가 아니다. 전쟁은 계속하되, 그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다. 인도주의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둔 사례는 모두 근본적 문제보다 지엽적 과제를 추구한 경우였다.

 

노예제도가 좋은 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1484-1566) 주교는 ‘인디언의 보호자’란 별명을 얻을 만큼 아메리카대륙 정복기에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애쓴 성직자다. 그런데 그가 노예무역의 길을 연 죄를 묻는 사람들도 있다. 원주민의 참상에 충격을 받은 그가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지 말자고 주장한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는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40세 무렵 종래의 활동방향에 회의를 느끼고 수도회에 들어가 10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아메리카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어느 쪽도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세웠다.

 

라스카사스는 수사가 되기 전 스페인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의 인도적 대우를 주장하면서도 아프리카 노예로 노동력을 충당하자는 ‘대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노예는 안 돼!” 하는 근본주의자였다면 왕이 불러서 의견을 묻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노예제를 제일 먼저 철폐한 나라였다. 18세기 후반에 연간 5만 명 전후의 노예를 수출하며 세계 노예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이 19세기 들어서자마자 노예제를 철폐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연구자 중에는 영국의 노예제 철폐가 선발주자 입장의 ‘사다리 걷어차기’였다는 의견도 많다. 19세기 전반기를 통해 영국해군의 중요한 업무 하나가 다른 나라 노예무역선 나포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일리 있는 의견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북부의 노예제 철폐 동기가 산업화에 있었다는 관점은 정설이 되어 있다. <엉클톰스 캐빈>을 쓴 스토우 부인은 물론 투철한 인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노예제 철폐 주장이 실제정책에 반영된 것은 노예해방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뜻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근대문명의 구조적 모순이 널리 지적되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19세기 인도주의 운동의 위선적 측면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백인의 짐’은 냉소의 대상이 된 지 오래거니와, 19세기 인도주의 운동 모두가 그와 같은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주어진 맥락 안에서 음미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박애주의자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덜 괴롭게 만들어주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애쓴 사람들이다.

 

대한적십자사의 존재도 한국인의 삶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한국이 국제적 고립상태에 있던 독재정치 시절 국제적십자사연맹의 일원으로서 그 기준을 지켜야 하는 대한적십자사는 이 사회에 작으나마 하나의 숨통 노릇을 했다. 남북한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던 1970년대에 적십자회담이 대화의 통로 노릇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제적십자운동의 권위를 배경으로 남북의 적십자사는 국가의 틀을 넘어 서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전의 “서리풀논평” “박근혜 정부, 혈액 사업도 민영화 물꼬 트나?”에서 ‘기업인’의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용에 대한 걱정을 읽었다. 그 걱정에 공감하면서, 또한 ‘사이비 정치인’의 등용이라는 측면에 더 큰 걱정이 든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무절제한 막말로 존재감을 과시한 사람 아닌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십자회담의 역할이 필요할 때 북한의 조선적십자사가 대한적십자사를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 “경륜과 덕망, 사회적 신임을 고루 갖춘 원로”가 총재를 맡을 때에 비해서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해악이 끝이 없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와 모순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반동적 대응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다. 드러나는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거꾸로 더욱 심화한다는 점에서 반동적 노선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의 성공이 아니라 진영의 승리를 추구하는 노선이다. 체제의 모순을 한 귀퉁이에서라도 완화하려는 노력의 가장 상징적 기구인 적십자사마저 정권의 전리품이 되다니, 어떤 안전망이 이 사회에 남아나겠는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