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국회의원 의원실에서 연구용역 하나를 발주해 주겠다는군요. 이거 따내면 16년 만에 연구비를 받아보겠네요.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을 밝히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던 작업을 할 계기를 만들어주려는 뜻이 대단히 고맙습니다. 연구 목적과 주요 내용을 적어둡니다.

 

 

목적: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 이후 세계정세에는 예측하기 힘든 변화가 꼬리를 물고 있다. 공산권 붕괴 당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말”에는 이제 자본주의 세계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역사의 굴곡 없이 안정된 체제가 유지되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냉전시대보다 불확실성이 오히려 더 커졌고, 미래의 전망이 갈수록 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 한국의 정책결정에도 어려운 조건이 되어있다. 아무리 풍부한 데이터를 갖고도 안정된 좌표계 없이는 유효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지금 세계가 갖고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변화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 살피는 거시적 관점이 안정되어 있어야 국가의 과제를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

 

좌표계의 상실을 토머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전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력을 유지하는 정상상태(normal state)에서는 미시적 지표들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지배 패러다임이 바뀌는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 단계에서는 정상상태에서 상식으로 통하던 명제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생각의 틀을 새로 짜야 하는 것이다.

 

동서문명교섭사를 중심으로 문명사를 연구해 온 김기협 박사는 냉전 이후의 세계적 변화에 대해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시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냉전시대에 이르는 하나의 정상상태가 끝나고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아직 이론 제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설명이지만 새로운 좌표계의 모색을 위해 참고가 될 것을 기대하며, 그 이론의 국가정책에 대한 함의를 정리함으로써 검증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이 과제의 목적이다.

 

 

 

주요 내용:

 

-‘근대성’의 특질은 무엇인가? /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절대시한 정책노선을 반성해야 한다.

 

-산업문명은 꼭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 자본주의 모순을 격화하는 신자유주의 반동노선을 막아야 한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일까? / 세계질서의 구조에 2백년만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굴기’는 정말로 ‘화평’을 향한 것일까? / 중국의 리더십은 영국-미국의 패권과 성격을 달리한다.

 

-‘근교원공’의 시대에 ‘동맹’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외교다운 외교가 필요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는 민족주의의 설 자리가 없는 것일까? / 새로운 세계질서는 주체의 확립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세계화’와 ‘정치적 세계화’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 산업문명의 안정을 위해서는 유기론적 세계관의 회복이 필요하다.

 

-‘어린이참정권’은 왜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것인가? /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던 시대는 끝나고 있다.

 

 

Posted by 문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미국 관료-학자-언론인의 회고에서 김영삼의 정책결정 기준에 관한 일치된 견해가 있다. 국내여론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론에 억지로 영합하려 한다 해서 꼭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연철이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 251쪽에서 김영삼 정권 시기의 남북관계를 요약한 대목에 지지율 추이가 언급되어 있다.

 

정권별로 남북회담 횟수를 살펴보아도 김영삼 정부가 제일 적다.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이 집중적으로 개최되어 111회, 전두환 정권은 32회, 노태우 정권은 163회, 김대중 정부는 80회였으며, 김영삼 정부 시기는 28회에 불과했다. (...) 김영삼 정부 시기는 1995년 베이징 쌀 회담의 차관급 접촉 2회를 제외하고는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 실무접촉 8회,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 5회로 본회담은 한 번도 못해 보고 대부분 준비단계에서 무산되었다. 이런 점에서 남북접촉의 역사에서 김영삼 정부 시기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던 1993년 3월 대통령 지지도는 84.2퍼센트에 달했다. 쌀 지원 과정에서 촌극을 빚었던 1995년 9월에는 33.3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보 사태를 겪던 1997년 3월에는 8.8퍼센트로 떨어졌다. 물론 그의 지지율 하락은 결코 대북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즉흥성은 다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도 비슷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김연철은 바로 이어 설명한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왜 온탕과 냉탕을 넘나들었을까? 역설적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여론에 너무 민감했다. 그러나 몰랐던 부분이 있다. 바로 대북정책에 대한 여론의 이중성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평상시에는 북한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전쟁 위기와 같은 불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교착이 길어지고 위기가 고조되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정부의 능력을 문제 삼는다. 시간이 지나면 정부의 해결능력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초의 김영삼은 참 행복한 정치가였다. 지지도가 80%를 넘은 것은 한국 대중정치의 초창기 혼돈 덕분이었다. 민주화 투사로서 후광은 아직 살아있는 위에 3당합당 후에 보여준 파워폴리티션의 면모가 수구세력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큰 반대세력이 없었다. 정치적 양극화가 진행된 후로는 불가능하게 된 행운이었다.

 

‘독설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버나드 쇼의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당신과 내가 결합해서 당신의 두뇌와 내 육체를 함께 물려받는 아이를 얻고 싶어요.” 하며 어느 절세미인이 접근할 때 “내 육체와 당신의 두뇌를 함께 물려받는 아이를 얻을 수도 있지 않겠소?” 하고 사양했다는 이야기다. (아인슈타인과 매릴린 먼로를 대입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지만, 아무래도 이런 독설은 아인슈타인보다 쇼에게 어울린다.) 김영삼은 민주화 정신과 산업화 정신의 장점을 결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결과를 보면 단점만 결합한 것 같다.

 

김연철의 말처럼, 김영삼의 정치적 몰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울려 작용했다. 그러나 임기의 딱 중간인 1995년 9월까지 33.3%로 폭락한 데는 대북정책 혼란이 큰 몫을 맡았다. 그때까지는 대형 사고나 정치적 문제가 터져도 그의 취임 전에 쌓여져 있던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주는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노태우의 북방정책으로 키워져 있던 남북관계의 발전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그는 너무나 황당하게 저버렸다. 당시 국민의 기대 중에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바라는 ‘진보적’ 희망과 북에 대한 남의 우위를 빨리 확립해서 교착상태의 부담을 벗어나기 바라는 ‘보수적’ 희망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는 양쪽의 기대를 동시에 저버렸던 것이다.

 

한 쪽 기대를 저버리면 다른 쪽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양쪽 기대를 동시에 저버린다는 것은 양쪽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일 하나가 위 인용문에 언급된 1995년의 ‘쌀 지원’이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지원 요청을 한 것은 1995년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친 집중호우로 최악의 홍수를 겪은 직후의 일이었다.

 

‘사회주의 낙원’을 자처하던 북한은 전통적으로 국내의 재해를 외부에 떠벌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8월 중순 비가 그치자 북한은 침묵을 깨고 과장까지 섞어가며 홍수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자력갱생의 화신처럼 행세하던 북한이 8월 말 사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바깥 세상에 도움을 호소하고 나섰던 것이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537쪽)

 

사실 이 홍수를 계기로 공개적으로 나섰을 뿐이지, 북한은 식량부족 문제를 여러 해 전부터 겪고 있었다.

 

북한이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나라에 남몰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은 홍수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서동권 전 안기부장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초 북한은 비밀리에 제공한다는 단서를 붙여 남한에 쌀 50만 톤 지원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 후일 북한 관리들은 94년 미국과의 제네바 협상에서도 자신들의 절박한 식량 사정을 밝혔지만 핵문제에만 골몰해 있던 미국 협상단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책 539쪽)

 

식량부족 문제는 공산권 붕괴 이후 북한에 닥친 경제난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이태섭은 <북한의 경제위기와 체제변화>(선인 펴냄) 294-295쪽에서 주체사상에 입각해 ‘자립경제’를 표방하는 북한이 의외로 대외 경제관계에 예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북한식 자립 경제의 보다 근본적인 한계는 그것이 대외 경제 관계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대외 무역과 경제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를 역사적 추이를 통해 분석해보면, 그 양자 사이에는 대체로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하였다. 즉 무역 의존도가 증가하면 경제 성장률도 증가하고, 무역 의존도가 감소되면 경제 성장률도 감소되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의 대외 무역 의존도는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양이 아니라 질이다.

 

즉 북한은 주요 전략 물자인 원유, 코크스, 생고무 등 주요 원자재와 에너지, 설비 등을 다른 나라에 의존하여 왔다. (...) 때문에 1990년대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에 따른 무역 등 대외 경제 관계의 급격한 감소는 북한 경제에 실로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연속 9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북한은 대외 무역의 70% 정도를 사회주의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던 바,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는 극심한 원자재난과 에너지난을 야기하였다.

 

“이런 바보, 문제는 경제야!” 했다는 클린턴의 말이 생각난다. 1980년대 공산권의 경제침체 속에서 골병이 들어 있던 북한 경제에 공산권 붕괴가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미국과 남한의 북한붕괴론도 그 인식에 발판을 둔 것이었고, 북한 당국도 그 때문에 나름대로 개방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연료도 비료도 부족한 가운데 식량난이 계속 깊어지다가 이제 집단아사의 지경에 이르러 공개적 지원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 위기는 김일성의 사망과 맞물리며 곧 정치 위기로 파급되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국가 공급 능력이 크게 약화됨에 따라 기존의 국가 식량 배급 체계와 소비품 공급 체계도 와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자가 증가되고, 직장에서 이탈하여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사회 이동성이 증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조직 정치 생활도 이완되었다. (...)

 

경제난으로 인해 국가 기능뿐만 아니라, 당 기능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1996년 12월 김정일은 식량난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되고 있으며, 당 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사회주의 건설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조성되고 있다며 당 중앙위원회를 비롯해 당 조직과 당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요컨대 경제 위기가 당과 국가의 기능 약화와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 등 정치적, 사상적 위기로 파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 296-297쪽)

 

1994년 8월 초순 제3차 북미회담 중 북한 측의 식량원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케네스 퀴노네스였다. <한반도 운명> 303쪽에 이렇게 적었다.

 

북한 대표부에서 축소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다. 휴식시간 중에 한성렬이 허바드, 세이모어와 함께 큰 회의실 안에서 쉬면서[쉬고 있던?] 나를 자기 옆으로 불렀다. 한성렬의 질문은 나를 놀라게 했다. 미국이 1994년 가을부터 100만 톤의 밀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북한이 어떻게 대금을 결제하려는지 되물었다. 한성렬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미국은 PL480 식량원조계획에 따라 밀을 무상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를 허바드 차관보에게 전달하기는 하겠지만, 양국간에 정상적 외교관계가 없다는 점에 비추어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게까지 손을 벌렸다면 누구에게든 기회 있는 대로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오버도퍼가 <두 개의 한국> 539쪽에서 “95년 1월에는 남한과 일본에 긴급 구호 식량지원을 호소했다”고 한 구체적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5월 말 식량지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일본보다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쌀 회담’에 나섰다. 6월 27의 지방선거를 의식해서 더더욱 서둘렀다. 김연철이 “이상한 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결과였다.

 

비극의 첫 단추는 북한이 남한 당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년 반의 대립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대화가 끊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기 8번의 고위급 회담을 치렀던 공식 채널도 끊겼고, 전두환 정부 시기부터 가동되었던 비밀 접촉 라인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북한은 한술 더 떠, 쌀을 주겠다니 받겠지만 당국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보다 먼저 쌀을 주겠다는 방침을 정한 김영삼 정부는 할 수 없이 민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비선이다. 비선은 밀사와 다르다. 밀사는 비밀 접촉이지만 공식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선은 민간 업자가 중재하는 비밀 접촉이다.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되고 공식 회담이 갖추어야 할 절차가 소홀해지며, 결국 후유증도 커지고, 남북 당국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

 

마침내 회담을 베이징에서 열기로 합의하고 북측에서는 전금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남측에서는 이석채 재정경제부 차관이 대표로 결정되었다. 북한은 당국 회담이 아니라는 의미로 전금철의 직함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정했다. (...) 출국 사실도 숨기고 베이징으로 온 이 차관은 회의록도 작성하지 않은 채 회담을 했고, 6월 21일 작성된 합의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차관은 대한민국 재경원 차관으로 서명했지만, 전금철은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서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당국 회담으로 보이고 싶어 했던 김영삼 정부는 결국 이 합의문을 공개하지 못했다. (<냉전의 추억> 246-247쪽)

 

6월 21일 작성된 합의문에 따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삼천리총회사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 것은 6월 25일 정오경이었다. 계약서는 즉각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홍구 총리 일행에게 공수되었고, 계약서를 받은 일행은 헬기를 타고 동해항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씨 아펙스 호가 2천 톤의 식량을 싣고 총리 일행이 참석할 ‘대북 쌀 지원 수송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이 끝나자 배는 바로 출항했다. 북한의 어느 항구로 갈지도 모르는 채로.

 

씨 아펙스 호는 청진항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6월 26일 오후에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청진항에 들어갈 때 북한 관계자의 요구에 따라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단 채 입항했다. 베이징 합의 내용이 항만당국에게도 선장에게도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공기 게양’ 사건이었다. 대북 강경론자는 물론 유화론자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Posted by 문천

 

1997년 7월 1일부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 주권이 옮겨진 것을 중국인은 ‘반환(Return)’이라 하고 영국인은 ‘양도(Handover)’라 한다. 두 가지 뜻이 다 들어있었다. 1898년 조차된 신카이 지역은 99년의 조차기간이 끝나 ‘반환’된 것이 맞지만 1842년 남경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으로 할양되었던 홍콩 섬과 코울룬 반도는 ‘양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 측은 섬과 반도의 할양이 불평등조약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 주장하고 마찬가지로 반환을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1984년 영국의 대처 정부가 중-영 공동성명으로 홍콩 전체의 중국 귀속에 동의한 것은 ‘통 큰 양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적으로 유일한 대책이었다. 홍콩 면적의 86%를 점하는 신카이 지역을 반환하고 섬과 반도만을 식민지로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며 홍콩 문제가 제기된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경제도시 홍콩의 기능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부동산의 표준 담보기간은 15년이다. 그런데 15년 후 홍콩의 체제를 예측할 수 없다면 부동산에 근거한 금융제도가 무너지게 되어있었다. 퇴로를 그 시점에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84년의 공동성명은 협력의 원리 위에 만들어졌다. 반환 후 50년간 홍콩의 ‘기존 체제’를 보장한다는 약속은 중국 측의 큰 양보였다. 이 양보가 가능한 것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일국양제’ 원리 덕분이었다. 홍콩과 마카오를 넘어 멀리 타이완까지 바라본 원리였다. 홍콩을 원만하게 수용하는 것을 타이완을 쉽게 끌어들일 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1989년 톈안먼 사태와 뒤이은 공산권 붕괴를 바라보며 마음을 바꾼 영국인들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제, 중국에게 약속한 양보를 꼭 지켜야 하나? 메이저 정부는 1992년 홍콩 총독을 데이비드 윌슨에서 크리스 패튼으로 교체했다. 중국학 연구자 출신의 외교관인 윌슨이 1987년 취임 이래 중국 측에 너무 협조적이었다는 이유였다. 한편 패튼은 보수당 의장으로 1992년 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외무장관이나 재무장관 물망에 오르다가 낙선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총독 패튼은 27인의 전임 홍콩 총독과 다른 기록을 두 가지 남겼다. 하나는 정치인 출신의 첫 총독이란 것이었고(거의 대부분이 군인과 외교관이었다.), 또 하나는 현지인들에게 별명을(“뚱보 패튼”) 얻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기는 무엇보다 ‘민주화’를 향한 정치개혁에 있었다.

 

식민지로 통치하던 시절에 그런 개혁을 했다면 좀 좋았을까. 식민지 시절 홍콩의 민주주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그런데 주권이양 일정이 정해진 상황에서 난데없이 개혁을 서두르니 “못 먹는 밥에 재 뿌리는” 꼴로 보일 수 있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홍콩 민주화세력에게도, 영국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었지만 식자들의 빈축을 샀다. 특히 홍콩 정책 관계자들은 분노까지 했다. 1971-1982년간 최장기 홍콩 총독을 지낸 머리 매클리호스는 “그런 무책임한 정치적 양극화는 홍콩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중국과 영국의 “협력적 관계”에 해독을 끼칠 것을 걱정했다.

 

패튼은 개혁을 추진했고 1995년 홍콩입법의회 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시행되었다. 개혁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참정권 확대 방향으로 추진된 것은 분명하다. 식민지시대 홍콩에서는 참정권의 범위가 아주 좁았다. 중국에 반환되면 참정권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것이 중국 측 계획이었다. 이질적 조건을 많이 가진 홍콩의 순조로운 동화를 위해 수십 년에 걸친 점진적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었다.

 

패튼이 일방적으로 정치개혁을 시행하는 데 중국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반환 전의 홍콩에서 일방적으로 방법을 바꿔 구성하는 입법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임시입법의회를 구성해 두었다가 주권이양과 동시에 입법의회를 해산했다. 홍콩의 이양 과정에서 순탄하지 못했던 하나의 매듭이었다.

 

매클리호스 전 총독의 말이 맞았다. 1995년 선거에서 기세를 올리며 모습을 나타낸 홍콩 민주화세력이 지금까지도 더 빠른 민주화를 요구하며 중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패튼은 홍콩에 지뢰를 묻어놓고 간 것이다.

 

민주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민주화 선배인 우리는 알고 있다. 1987년까지 대통령 직선이 우리 민주화운동의 가장 뚜렷한 표적이었던 것처럼, 지금 홍콩에서도 행정장관 직선이 초점이 되어 있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나?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에도 치를 떨지 않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우리 국민 중에 많지 않다.

 

‘중국식 민주주의’는 수뇌부를 직선으로 뽑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중국식 민주주의’에도 나쁜 선입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한 선거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만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덩샤오핑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중국 지도부의 순탄한 계승에는 우리가 부러워할 점이 있다.

 

중국 측이 홍콩 민주화를 ‘중국식 민주주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월 말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2017년부터 행정장관 선거를 직선제로 전환하되 1200명의 후보추천 위원 중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은 후보 2~3명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주는”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 중국 입장에서는 큰 양보다. 그런데 이것을 홍콩 민주화세력에서는 “짝퉁 민주주의”라며 거부하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괴씸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지구 반대쪽에서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고 지내던 인민을 해방시켜 중국인과 같은 수준의 참정권을 보장해 주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니! 십억여 중국인을 대충 만족시키며 중국을 150년 고난의 역사에서 건져낸 중국의 체제가 짝퉁이라며 별로 신통한 실적을 보이지도 않은 ‘서방식 민주주의’를 꼭 들여와야 한다니!

 

어떤 운동에나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홍콩의 민주화운동에 외부세력의 사주와 선동세력의 획책이 깔려 있다고 보는 중국 측 일부 주장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사주와 선동에 휘둘리는 민심 그 자체다. 중국이 제시하는 미래의 전망을 다수 인민이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무리 극심한 사주와 선동이 있어도 민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박인규는 일전 “진퇴양난 시진핑…'짝퉁 민주 거부' 홍콩은 어디로?”[주간 프레시안 뷰]에서 한 홍콩 교수가 말한 중국 정부의 네 가지 선택지를 이렇게 인용했다.

 

첫째, 완전한 자유 직선제라는 홍콩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둘째, 톈안먼 사태와 같이 강경 진압에 나선다. 셋째, 자유 직선제는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다른 유화책으로 타협을 시도한다. 넷째, 시위가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린다.

 

첫째와 둘째는 현실적 가능성이 없고 셋째와 넷째 방안을 시도할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나도 동감이다. 2003년의 상황을 돌아봐도 그렇다. 사스(SARS)의 타격으로 민심이 흉흉한 위에 홍콩정부의 보안법 제정 시도가 겹쳐져 수십만 군중이 거리로 나오는 “톈안먼 이후 최대”의 시위사태가 벌어졌다. 보안법을 추진하던 장관들이 사임하고 법안이 철회되는 동안 중국정부는 직접 개입을 삼갔다. 사태가 진정된 후인 2004년 말 퉁치화 홍콩 행정장관을 비판하는 후진타오의 발언이 있고 두 달 후 퉁치화가 사임했다.

 

그런데 셋째 방안의 “다른 유화책”이 10년 전보다 아주 강력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정장관 직선제 자체는 거부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적극적 민주화 조치를 제시할 가능성이다. 행정장관 직선제에 가려져 있는 입법의회의 구성방법과 선거방법의 개혁방안을 들고 나올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이 10년 전보다 크게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일국양제’는 통합 초기의 일시적 조치로 인식되어 왔다. 홍콩의 경우 반환 후 50년간 중국과 다른 체제를 허용한다는 1984년 중-영 공동성명에 따라 2047년 이후에는 중국 체제에 동화시킬 것이 예상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한 없이 ‘일국양제’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중국정부가 제시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타이완은 말할 것도 없고,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대외관계와 대내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도 쓰다 보니 중국의 향후 진로를 밝게 보려는 내 관점을 또 드러냈다. 동서교섭사를 통해 문명사를 공부해 온 나로서는 중국의 ‘화평굴기’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나름의 몇 가지 근거가 있고, 그 근거 위에서 중국의 미래를 밝게 보는 관점을 세우게 되었다. 언젠가 그 관점과 근거를 한 차례 집중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직 그 작업을 하지 않은 채로 내 관점이 꼭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다만 현실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런 관점의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만을 짚어둔다.

 

홍콩 반환 1주년에 임해 썼던 글 하나를 통해 당시의 소감을 돌아본다.

 

 

홍콩, 차이나 1년

 

반환 1주년을 맞는 오늘 홍콩인들의 표정은 1년 전과 판이하다. 중국 정권을 대표하는 신화사(新華社) 분사(分社)의 초법적 횡포가 심심찮게 눈에 띄는 위에 정청(政廳)시절에 없던 비리사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총선에서 65%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은 60석의 입법회에서 겨우 16석을 얻은 채 좌절감에 빠져 있다. 선거로 뽑는 의석은 20석 뿐이다.

 

더욱 답답한 것은 경제사정이다. 반환 당시 15,000대를 넘보던 항셩지수가 지금은 8,000대에서 맴돌고 있다. 홍콩화와 달러화와의 연계체제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홍콩의 번영을 찾아 중국인들이 너무 몰려들 것을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거리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 홍콩인들이 늘고 있다.

 

1년 전 온 세계의 이목을 모았던 축제분위기는 이제 홍콩에서 찾아볼 수 없다. 1주년 기념식도 외교사절 외에는 바깥손님 부르지 않고 조촐하게 치른다고 한다. 그러나 홍콩인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지난날의 영화(榮華)는 빛이 바랬지만 중국 내에서 홍콩의 장래 위상에는 큰 위험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송백(松栢)의 푸르름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경제적 역경 속에서 홍콩의 가치가 투철하게 확인된 셈이다.

 

홍콩을 끌어안은 중국의 표정도 여전히 느긋하다. 재작년 봄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군사훈련을 벌였던 것과 같은 긴장된 태도는 다시 보일 것 같지 않다. 홍콩을 가지고 1국2체제의 타당성을 입증한 만큼 대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된 덕분일 것이다.

 

9년 전 천안문사태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붕괴를 예측했다. 의지해 온 공산권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마저 퇴색한 뒤에 그 낙후된 경제를 끌고 거대한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뜻밖의 착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홍콩까지 무난히 접수한 것이다. 이질적인 체제의 홍콩을 포용한 데서 중국의 장래는 더더욱 세계인의 신뢰를 얻고 있다.

 

베트남 통일은 군사적 정복이었고 독일 통일은 경제적 정복이었다. 정복당한 쪽 옛 체제는 새 통일체제의 부담이었고 파괴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중국과 홍콩은 두 체제의 미래 진로에서 공통점을 찾아내 접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가 짐이 되기보다 자산이 된 것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은 통일의 과제에도 요긴한 교훈이다. (1998년 6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