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을 다각적으로 추진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경색된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접근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초 나는 이단 네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지난 5년간 경색된 남북 당국간 대화를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편 민간기업들로 하여금 대북 교역을 활성화하고 경협을 추진케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 동안 수세적 입장에서 경원시해온 민간차원에서의 남북교류와 대화를 장려하기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7년간 파탄된 군사정전회담도 어떤 형태로든지 조속히 복원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스메이커> 359)

 

411일 정세현 통일부차관과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를 수석대표로 하는 차관급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림으로써 근 4년 동안 닫혀 있던 당국간 회담이 다시 열렸다. 북측에서 적십자사를 통해 비료 20만 톤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해 그런 대규모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라야 가능하다고 응답함으로써 당국간 회담이 재개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남측은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시키는 상호주의입장으로 나섰고 북측이 이에 반발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포용정책은 상호주의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서 남한 수구세력이 포용정책을 비판할 때 단골로 들고 나오는 것이 상호주의였지만, 첫 접촉에서 남측이 상호주의를 고집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이 호소력이 큰 과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경험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회담이 결렬된 후부터 북측은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잠수정에 의한 도발행위도 이때 일어난 일이다. 국내언론은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시도했던 상호주의원칙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결렬된 이번 회담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북측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가진 자로서 먼저 베풀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선공후득(先供後得)’의 지혜를 강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된 것은 이로부터 1년 후인 19995월 남북당국간 비공개 접촉을 통해서이다. (<피스메이커> 361-362)

 

경제교류, 민간교류와 군사정전회담 재개 등 다른 과제들을 위한 조치도 이어졌다. 4월에는 정부가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고, 9월에는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가 정부 지원 아래 발족했다. 그리고 군사정전회담을 파탄에 빠트렸던 김영삼 정부의 자존심 위주 정책을 현실적으로 수정해서 6월에 장성급회담형태로 다시 열리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이런 노력의 가시적 성과로 처음 나타난 것이 616일과 1027일 두 차례에 걸쳐 펼쳐진 정주영의 소떼 방북이었다. 500마리씩의 소떼가 동원된 이 이벤트는 시각적으로도 세기(世紀)의 장관(壯觀)’이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1118일의 금강산관광 개시는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한반도의 변화를 세계인이 눈으로 보게 만든 일이었다.

그러나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은 포용정책의 산물이라기보다 현대그룹의 사업이었다. 10년 전 이미 노태우 정권의 비호 아래 북한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놓고 있었음을 박철언의 회고 중 19892월 초 북한에서 막 돌아온 정주영을 만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57-58)

 

정주영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북사업이 남북관계의 경색에 따라 지연되고 있다가 김대중 정권 출범 후에야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 동안 이 사업을 살려내려는 현대그룹의 노력이 치열했을 것은 분명하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김대중 정부의 경협정책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앞서가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후에 현대가 관련된 대북송금이 포용정책 비판의 빌미가 되는 것도 기업의 정책이 정부 정책을 앞서간 상황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로 볼 수 있다.

남북 경협의 준비된 선수인 현대그룹의 활약 외에는 1998년 내내 포용정책의 성과가 크게 나타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악재가 속출했고, 그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포용정책의 기조를 무너트리지 않은 것이 김대중 정부 첫 해 대북정책의 가장 큰 성과라 할 것이다.

가장 큰 악재는 831일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1미사일이었다. 북한은 이 발사로 평화적 목적의 인공위성 광명성 1를 궤도에 올렸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국제기구에도 발사를 예고하지 않았고 발사 4일 후에야 공식발표가 나왔기 때문에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북한은 오랫동안 군사기술로서 미사일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금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이 장사정포인데, 소련의 카튜샤 로켓을 발전시킨 것이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때 헤즈볼라가 수천 발의 카튜샤 로켓을 이스라엘에 발사해서 43명의 사망자와 4천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일이 있다. 그 후 미국인 이스라엘 거주자 30명이 북한을 상대로 1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했다. 헤즈볼라가 발사한 로켓의 핵심부품이 북한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스커드 미사일 역시 소련이 개발한 기술을 북한에서 발전시킨 무기다. 걸프전에서 부각된 스커드 미사일은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다. 이것을 필요로 하는 아랍국들이 북한의 가장 중요한 외화획득원이 된 까닭이다.

로켓기술은 외화획득에 앞서 북한의 군사적 안보를 위한 절대적 자산이다. 19946월의 위기에서 미국과 남한의 주전파를 좌절시킨 것이 바로 장사정포였다. 이 무렵의 한미연합사 회의 광경을 김종대는 “[군사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비극] <9> 한미연합사령부(3) 전쟁 준비 미군, ‘반대하는 한국군 가만두지 않겠다’”에 이렇게 그렸다.

 

이 당시 한국군의 걱정은 영변을 포격을 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며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장사정포인데, 갱도 안에 있는 장사정포를 무력화하려면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 장사정포 중 170미리 포는 거리가 걸(?)어서 우리 포가 미치지 못하고 갱도 진지나 산의 뒤쪽에 있는 포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일이 특수부대가 가서 제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개전 초 2~3일 이내에 우리 군사력의 37%가 손실되고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 사망한다는 것이 우리 측 결론이었다.

그런데 게리 럭(연합사령관)이나 프랭크스(연합사 작전참모)는 이런 한국군의 걱정을 무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랜턴 장비를 부착한 미 7공군사령부의 F-16을 동원해서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방안이다. 당시 7공군에서는 27대의 F-16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성 부사령관과 당시 3군사령관인 윤용남(육사 19) 대장이 이 방안을 "관철하라"고 당시 연합사 지상구성군 선임 장교로 가 있던 정경영(육사 33)에게 지시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것을 미국에 설득하지 못하면 서울 시민은 집단학살 된다. (...)

이 주장을 들은 7공군은 경악했다. 저공비행으로 방공망이 조밀한 북한 장사정포를 타격할 경우 그 생존확률은 50%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7공군이 "절대로 못한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커밍스 대령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1652)

 

아직 핵무기를 확보하지 못한 북한에게는 전쟁억지력의 핵심이 장사정포에 있었다. 50여 킬로미터 사거리를 가진 장사정포의 남한 수도권에 대한 위협이 걸프전에서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의 위협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컸던 것이다. 북한형 스커드 미사일인 사거리 5백 킬로미터 전후의 로동1호는 정밀성이 떨어지고 북한의 경제사정으로는 다량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장사정포의 직접 위협에 비해 먼 지역에 대한 위협은 훨씬 약했다.

1994년 제네바합의로 핵사업에 제동이 걸린 북한이 억지력 확장을 위해 노력할 분야는 당연히 미사일이었다. 그 기술의 구입을 원하는 아랍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개발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1998년에 이르러 김정일이 후계를 완성하는 시점에서 그 동안의 성과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대포동 1호를 발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광명성 1호의 궤도 진입 성공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위성 자체보다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발사지점에서 155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남쪽 태평양상에 떨어진 추진체였다. 어떤 탄두라도 그 거리까지 보낼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 추진체가 65킬로미터 상공으로 지나갔다는 사실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로동미사일의 사거리가 1300킬로미터까지 늘어나 있었으므로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머리위로 날아간 데 대한 충격은 새로운 것이었다.

미국도 충격을 받았다. 몇 주일 전부터 금창리 지하 핵시설의혹이 제기되고 있던 차에 대륙간탄도탄(ICBM) 수준의 장거리미사일 발사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미국에서도 소동이 벌어졌다.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정치 공세의 계기로 삼았다. 당시 워싱턴에서 대북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베트남전 이후 최악의 혼란 상황이었다. 공화당은 대북 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했고, 1999년 회계연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지원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지원 예산 3500만 달러는 결국 나중에 미 외교협회의 중재를 통해 살아났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대북 정책 조정관을 임명하라는 외교협회의 권고를 동시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 조정관이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화당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연철 <냉전의 추억> 232-233)

 

남한의 대북정책이 포용정책으로 바뀐 데 대한 북한의 직접 응답은 1998년 내내 없었다. 바로 이득이 되는 현대그룹의 사업에만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남한의 포용정책에 대한 북한의 신뢰는 꾸준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1999615연평해전이 일어날 때 북한의 태도 변화가 분명히 확인된다. 북한 측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비교적 합리적인 자세를 지켰던 것이다.

신뢰가 신뢰를 낳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초기 실적이 부진한데도 신뢰를 잘 지키고 키울 수 있었던 출발점은 정책담당자 임동원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확고한 신뢰라고 생각된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한완상이 대북정책 담당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주화세력의 명망가로서 매우 큰 정치적 효용을 가진 인물이었는데도 1년을 버티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어쩌면 임동원이 아무 다른 정치적 효용성이 없는, 남북관계 발전 하나에만 매달린 인물이기 때문에 그 역할이 흔들리지 않은 면도 있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역사 공부에는 국경이 있다!

 

3년째 해방공간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면서 나 자신 생각을 바꾸게 된 일이 많다. 40년간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도 전공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속한 사회의 성격에 직접 관련된 영역의 이해를 너무 소홀히 해왔음을 반성한다. ‘나와바리라고까지 불리는 전공의 벽의 폐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을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흔히 말하지 않는가? 과거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세워져 있어야 한다. 내가 위치해 있는 이 사회가 어떤 성격의 사회인지 확실한 인식 없이 대화에 나선다면 누구와 어떤 말을 나눌 수 있겠는가. 대화를 나누는 시늉을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동양의 선현들은 인간사회의 원리를 가까운 데서부터 멀리로 미루어나가는 데서 찾았다. 공자는 ()’을 그렇게 설명했고, 주희가 <근사록(近思錄)>을 쓴 것도 그런 의미였다. 가까운 사람을 아낄 줄 모르면서 먼 사람을 아낀다고 나서겠는가? 가까운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먼 일을 알겠다고 나서겠는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의 범주로 대개들 생각하지만 그 작업방법에서는 인문학다운 특성을 잘 살리는 일이 드물다. 인문학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놓고 여러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세기 중엽 사회과학이 발생할 때 배경이 되었던 자연과학의 환원주의(reductionism)’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환원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분석적 탐구를 통해 모든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이것이 근대인의 오만이라고 본다. 근대 이전의 학자들은 그런 오만한 믿음을 갖지 않고도 학문을 보람 있는 활동으로 여겼다.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가다듬는 노력에서 가치를 찾았던 것이다.

나 자신 중년을 지날 때까지 그런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위논문 작성을 위해 마테오 리치(1552-1610)의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4백 년 동안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면 리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동인(動因)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처했던 불확실성 못지않은 불확실성에 지금의 우리 자신도 처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환갑 가까운 나이에 한국현대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3년에 걸친 <해방일기> 작업을 펼치게 된 것이 이 깨달음 때문이었다. 19세기의 어느 자연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는 국경만이 아니라 겹겹의 울타리에 갇힌 존재로서 나 자신을 본다. 그 울타리는 질곡이기도 하면서 또한 역사학도로서 내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내가 속한 현재를 바라볼 줄 모르면서 어떤 과거와 대화를 하러 나선단 말인가?

우리 사회의 현대사 인식에 부족함이 많은 이유로 식민통치와 독재정치의 억압만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끝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뉴라이트가 활개 치는 것을 보며 다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이민족의 식민통치와 폭압적 독재정치를 미화하는, 상식과 직관에 어긋나는 기이한 주장을 이 사회의 꽤 많은 사람들이 솔깃해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역사의 종말까지 외칠 수 있는 근대인의 오만한 믿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

 

한국현대사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에서 중심축은 민족주의에 있다. 전에는 민족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균질(均質)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해방을 맞아 민족주의 표출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민족주의가 여러 정치세력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용당하는 가운데 어느 민족주의자가 순정(純正) 민족주의를 외치는 것을 보며, 민족주의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으로 빚어지는 하나의 이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큰 거울 하나가 김구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김구는 당시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김구가 민족주의의 지상과제인 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 맡은 부정적 역할을 살펴보며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가 1945년 연말부터 주도한 반탁운동은 민족국가 수립을 어렵게 만든 일이었다. 수십 년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서 결과만 놓고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다. 조선과 비슷한 상황에서 해방된 오스트리아와 비교하면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이 당시에도 분명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를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에서 분리 독립시킬 연합국의 방침은 1943년 가을에 확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독일과 일본이 항복할 때 연합국의 눈에는 조선인과 오스트리아인의 독립 노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일본과 독일을 도와준 죄가 컸다. 그래서 일정기간의 신탁통치 결정에는 벌칙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조선인에게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10년보다 가벼운 5년의 신탁통치가 부과된 셈이다.

오스트리아인은 10년 신탁통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분할점령에 놓였지만 오스트리아의 좌우익은 온전한 독립을 위해 단합해서 좌우합작정부를 세웠다. 그래서 어느 쪽 점령군에게도 분규의 빌미를 주지 않고 10년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반탁운동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 독립 노력이 부족했다 해서 부과된 신탁통치에 대해 우리의 독립 노력이 그렇게 미미한 것이 아니었다고 당사자로서 항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이끈 반탁운동은 순수한 반탁이 아니었다. ‘반공-반소운동을 위한 간판이었다.

나는 이것을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으로 본다. 식민지시대의 좌익운동에는 민족운동의 측면이 강했다. 물론 좌익인사 중에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시를 민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우익인사 중에 자기 이익을 민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에 비해 더 많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일반 인민은 좌익의 도덕성에 큰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좌익의 민족주의 측면을 무시하는 맹목적 반공은 민족주의진영에 대한 자해행위였다. 독일과의 합방 전 오스트리아의 좌우익 항쟁은 조선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국가의 위기극복을 위해 누구도 나무랄 데 없는 합작을 이뤄내지 않았는가.

이승만의 맹목적 반공노선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다. 하지만 김구는 속된 말로 민족주의 아니면 쓰러지는사람 아니었나.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의 반탁운동에 그가 말려든 이유가 무엇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한민당의 임정 봉대(奉戴)’ 주장에 현혹되었다면 그의 지혜를 의심할 일이고, 민족주의진영의 헤게모니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일이다. 확실한 것은, 김구를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다. 역사학자를 자칭하는 KBS 이사장 이인호가 김구의 건국 유공자 자격까지 왈가왈부하는 망동을 냉정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도 우리 시야에서 거품을 거둘 필요가 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의 진면목을 찾았으나...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김구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던 비장한 모습이다. 이 모습을 김구는 19482월에야 보여주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이승만의 조직 민족대표대회(민대)를 자기 기반조직 국민의회(국의)에 통합시키기 위해 이승만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1947122일의 장덕수 암살에는 김구의 뜻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날 김구는 이승만을 만난 뒤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곧이어 민대와 국의의 통합 협상서가 발표된 것으로 볼 때 김구가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해주는 대신 이승만은 조직 통합을 양해하는 빅딜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한민당-이승만 진영에서 자신을 반대해온 책사 장덕수를 제거할 뜻을 가졌을 것이다.

장덕수 암살의 주모자 김석황은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116일 김석황이 체포될 때 김구에게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 편지 한 장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김구의 뜻에 따라 암살에 나섰다는 뜻을 풍기는 내용이었다. 김석황이 정말 부칠 뜻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체포될 경우 김구를 연루시키기 위해 보험용으로 써둔 것 같다.

이 편지가 김구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군정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수모를 겪었을 뿐 아니라 조직의 통합에까지 제동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쪽으로 노선을 돌렸으니, 이 노선 전환의 정략적 동기도 의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경위야 어찌됐든 민족주의자로 다시 선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나는 이 전환으로 김구가 득실에 연연하던 방황을 끝내고 진면목을 찾은 것으로 본다. 1948210일에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이 그의 진심을 담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글 중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란 대목은 자신의 방황을 반성하는 것처럼 들린다.

분단건국 반대진영은 김구의 가세로 기세를 올릴 수 있었다. 원래 좌우익 중도파가 좌우합작을 통해 이 진영을 형성해 왔으나 19477월 중도 좌익의 구심점 여운형의 타계로 인해 혼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가 분단건국 반대에 나서자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 우익의 민족자주연맹(민련)은 좌우합작 대신 우익연합으로 방향을 잡았다.

민련과 한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익연합이 4월 중-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분단건국 저지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좌우합작 없는 우익연합은 남조선의 절반밖에 대표할 수 없었다. 북조선 지도부는 남로당에 대한 배려 때문에 우익연합의 대표성을 백퍼센트 인정할 수 없었다. 유엔위원단에는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위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성과가 남북협상에서 나오지 못했다.

당시 이북 지도부가 단독건국을 원하는 속셈 때문에 남북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혁명 목표 지역의 일부를 먼저 확보한 다음 단계적으로 넓혀 나간다는 민주기지론이 이 무렵 고개를 들고 있던 상황이 지적된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단정할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이남 일부 세력의 단독건국 의지가 분명해지는 데 따라 대응책으로 민주기지론이 제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이북 지도부가 단독건국의 방안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남북협상에 한계를 지워주는 조건이었다.

 

 

분단건국을 도와준 소련의 보이콧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의 권위로 분단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작을 폈다.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역할이 회자되어 오거니와 그것은 선정성 때문에 주목을 더 받는 것일 뿐이지, 위원단에 대한 전방위 로비활동의 일환일 뿐이다. 치안 책임자인 미군정도 로비활동을 단속하기는커녕 도와주기 바빴다.

당시의 유엔에는 미국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조선위원단을 보낸 것도 그 힘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총회에서도 대다수 회원국이 미국이 고집하는 정책에 정면 반대는 피하면서도 은근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 많았다. 조선위원단에도 미국이 속으로 바라는 분단건국 노선에 승복하지 않는 위원들이 많았다.

원래 위원단을 구성하려던 9개국 중 우크라이나가 빠진 8개국 가운데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셋은 미국을 무조건 지지하는 나라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셋은 미국의 독단을 견제하는 경향을 가진 나라였다. 시리아는 이스라엘 때문에 미국에 강한 반감을 가진 나라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도. 영국 식민지로부터 막 독립해서 약소국 민족주의에 동정심이 큰 입장인 인도가 미국의 조선민족 분단정책에 쉽게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예상을 벗어난 인도의 태도가 많은 의혹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19471114일 유엔총회의 한국위원단 설치 결정은 남북한 총선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8226일 소총회는 이와 다른 내용의 새로운 결의를 채택했다.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남조선 단독건국에 유엔이 나서는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이 결의안에 찬성이 31, 반대가 2, 기권이 11표였다. 반대한 나라는 조선위원단에 참여하고 있던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소총회의 의결에는 참석회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필요한 30표를 넘겼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소련의 보이콧이 가진 의미를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애초에 소총회를 1년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든 것은 소련의 거부권이 있는 안보리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다. 대다수 회원국이 이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총회의 결의 조건을 참석국의 3분의 2 찬성으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다. 압도적 찬성이 아니면 통과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5개국이 226일 소총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찬성 30표가 필요했다. 6국이 참석했다면 34표가 필요했을 것이고, 조선 관계 새 결의안은 통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단독건국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조선위원단이 추천했던 다른 방안, 즉 남조선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일단 만들고 최종적 건국을 뒤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조선위원단의 312일 회의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일부 대표는 별도의 결정 없이 소총회 결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지만 자체 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과반수 찬성을 결의 요건으로 정했는데, 표결 결과는 찬성 4, 반대 2(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시리아와 프랑스)였다.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에 참석했다면 그런 엉터리 결정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에서 소련이 주도한 공산권의 보이콧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도와준 셈이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 뿐이었을까? 소련도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하고 있었다는 확정적 증거는 아니라도 강한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외교안보수석을 맡은 임동원은 5년 동안 어느 직책에서든 대북정책의 사령탑 노릇을 했다. 특히 정권 출범 초기 IMF 사태로 인해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전념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동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깊은 신뢰는 임동원의 활동에 든든한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임동원은 외교안보수석실의 기존 인원을 가급적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외교안보수석실도 구조조정의 영향을 받았으나 4개 비서관직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개혁 차원에서 비서관급 간부를 모두 교체하고 직원의 대부분을 교체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부인원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전문성을 중시하여 파견공무원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렇게 하여 나는 재임기간 중 외교비서관으로 권종락과 송민순, 국제안보비서관으로 이상철, 통일비서관으로 조건식과 이봉조, 그리고 국방비서관으로 임충빈 준장 등 탁월한 공무원들로부터 훌륭히 보좌를 받을 수 있었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332)

 

5년 전 통일원장관에 취임한 한완상이 당시 차관이던 임동원을 유임시키지 못했을 때 외부 인사를 영입하지 않고 통일원 내에서 발탁했다가 후회한 일이 있다.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목적의식-비전-철학은 나와 비슷하거나 같아야 했다는 것이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60-61) 과연 한완상이 당시 발탁한 송영대가 5년 후 임동원이 김영삼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인물들에 비해 확연하게 냉전근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그럴 개연성은 크지 않다. 김영삼 정권의 대결정책에 동원된 인물들과 통일원 관료였던 송영대 사이에 가치관의 차이가 컸을 것 같지 않다. 차이는 한완상과 임동원이 기존 관료들을 설득하는 능력과 그 위에 있던 대통령의 태도에 있었을 것 같다. 관료들은 직속상관인 장관이나 수석 못지않게 대통령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코드가 맞는인사를 외부에서 끌어들이기보다 기존 관료를 설득하려 한 태도는 한완상이나 임동원이나 모두 훌륭한 것이었다. 정책을 수립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면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실행까지 하려면 중립적인 관료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동원이 여기에 성공한 데는 그의 군인-관료 경력이 한완상의 학자 경력보다 유리한 점도 작용했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배경도 중요했을 것이다.

임동원은 대북정책의 기조를 처음부터 포용정책으로 확정했다.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은 세 가지였다. 그 하나는 북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 위한 적대적 대결정책인데, 이는 전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어 채택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관정책인데, 북한으로 하여금 대외적 폭발이나 내부적 폭발을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공존하며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도모하는 포용정책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

화해-협력-변화-평화가 새로운 대북정책의 4가지 키워드였다. 이것은 북한이 조만간 붕괴될 것이라는 붕괴임박론이 아니라 북한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진적 변화론에 토대를 둔 정책이다. (<피스메이커> 333-334)

 

임동원은 취임 직후인 3월 초 미국 관리들과 정책협의를 가진 자리에서 점진적 변화론에 기초한 포용정책의 타당성에 대한 양국 정부의 공감대를 확인했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4자회담 대표인 찰스 카트먼 국무성 부차관보,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대사와 잭 프리처드 NSC 국장이 찾아온 자리였다.

 

나는 보스워스 대사와 카트먼 부차관보 일행을 맞아 국민의 정부의 대북시각과 대북정책 기조를 설명하고 4자회담에 대한 입장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들은 새 정부의 정책과 입장에 대해 잘 이해했으며 새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와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첫 번째 정책협의가 되었다. (...)

그날 면담에서 우리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이미 8년 전에 북한이 1~2년 내에 루마니아처럼 갑자기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3년 전에는 늦어도 2~3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점을 상기하며 오히려 최악의 상태는 넘긴 것 같다는 의견을 함께 나누었다.

물론 정보기관의 판단이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하여 정책결정자들이 예방, 또는 미리 대처하도록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든 북한이 붕괴되는 경우 예상할 수 있는 두 가지 상황, 즉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는 대외적 폭발사태나 내란이 일어나거나 수백만 명의 탈북난민을 발생케 할 내부붕괴사태는 모두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 자리에 모인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사태를 예방하는 데 치중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막연한 희망사항인 붕괴 임박론에 기초한 정책은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공유했다. (같은 책 342-344)

 

클린턴 정부는 19946월의 위기 이후 공화당 정권에 비해 대북 포용정책을 기조로 삼아 왔다. 그런데 대북정책에 앞장서거나, 최소한 보조를 맞춰줘야 할 한국 정부가 협조는커녕 방해를 일삼아 왔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공화당의 심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 위에 언급한 자리에서 실무자급 미국 관리들이 새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노선에 쉽게 공감을 표한 것은 미국 정부의 정책노선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북정책 추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임동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운영을 외교안보수석실로 넘겨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국가안보회의는 군사 부문에 치중해 온 기구였는데, 이것을 외교-안보-대북정책을 관리하는 상설기구로 만들어 사무처를 두고, 관계 장관으로(통일, 외무, 국방, 안기부장, 외교안보수석)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매주 열기로 한 것이다.

임동원은 199837일의 제1NSC 상임위원회 내용을 <피스메이커> 347-352쪽에 소상히 적었다. 이후 추진할 대북-대외정책의 기본 과제들이 망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개 의안이 처리되었다고 한다.

 

(1) 경수로 비용부담. 당시 총 사업비가 약 52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었고, 한국이 70%36억 달러를 맡을 계획을 김영삼 정부가 승낙해놓고 있었다. 이 계획을 김대중 정부가 승계하기로 결정되었다.

(2) 4자회담 대책. 19978월의 예비회담으로 시작한 남---4자회담이 임박해 있었다. 4자회담은 대북관계에 무성의한 김영삼 정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미국이 강압적으로 끌어들인 회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대중 정부는 4자회담 참여를 넘어 별도의 남북대화를 함께 추진할 방침을 세웠다.

(3) 대미 방위비 분담 조정. “주한미군 유지를 위한 직접비용의 1/3 수준을 분담한다는 원칙으로 19894500만 달러로 시작한 방위비 분담금이 1998년에는 약 4억 달러까지 늘어나 있었다. IMF 사태로 환율이 두 배 이상 오른 상황에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4) 대북 식량지원. 김영삼 정부는 세계식량기구를 통해 식량지원을 행해 왔는데, 김대중 정부는 직접 지원할 것과 민간 차원의 지원을 적극 권장할 것을 결정했다.

(5) 대북정책 기조. 김대중과 임동원이 준비해 온 정책노선을 통일부 기안 형식으로 검토하여 다음 주 회의에서 채택할 준비를 하였다.

(6) 국가안보회의 운영개선안. 임동원이 준비한 방안을 채택하고 관계법령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돈 오버도퍼는 김대중 정부의 초기 대북정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이 추진한 대북 정책들은 그의 전임자이자 정적인 김영삼 대통령이 추진했던 정책들과는 전혀 상이했다. 1970년대 초반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때부터 김대중은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북한을 포용하는 정책을 공공연하게 옹호해왔다. 또한 군사정권 하에서 오랫동안 용공분자라는 비난을 받아오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 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어떠한 무력 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 정권을 와해시키거나 북한을 흡수할 의도가 없습니다. 셋째, 우리는 가장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부문에서부터 시작해 남과 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

그 무렵 북한과의 공식적인 관계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의 햇볕정책은 쓰라린 시련을 겪었고, 실패로 끝난 또 한 번의 북한 잠수정 침투 기도에 이어 3주 후 남한 해안선 부근에서 북한 특공대원들의 시체가 발견되자 국민들 또한 깊은 실망에 빠졌다. 여러 달 동안 정부 차원에서 눈에 띄는 진전의 기미가 없는 듯했음에도 김대중은 포용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취임 1개월 째 되던 983월 필자가 대통령이 된 김대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북한이 어떤 의향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지금 북한 지도부에서는 한창 대남 정책 수정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 달 북한의 제안으로 공식적인 양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

김대중의 햇볕정책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남북 정부 간의 관계 진전 여부에 상관없이 남한 사업가가 북한과 거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관점은 더욱 폭넓은 접촉의 길을 트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 개의 한국> 589-590)

 

10여 년이 지난 지금 초기 햇볕정책의 어려움은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김대중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포용정책이 각광을 받으며 2000년의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큰 흐름이 내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적지 않은 곡절이 있었다. 김영삼 같으면 정책을 홀라당 뒤집어버릴 만한 도발들도 있었다. 햇볕정책의 성공은 그 내용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추진과정의 꾸준한 인내심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공의 가장 큰 조건 하나가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경 분리의 원칙이었다. 민간 접촉의 권장도 정부의 남북관계 독점을 푼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조치였다. 남한 정부는 건국 이래 북한과의 관계를 독점해 왔다. 적십자회담처럼 민간 접촉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정부의 통제를 확실히 했다. 대북정책이 민심에도 경제논리에도 역행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이 독점과 통제를 푸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새 대북정책이 민심과 경제논리에 맞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정책의 추진력을 재계와 민간에서 일으키는 방향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199861683세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는 장관(壯觀)이 이 덕분에 펼쳐질 수 있었다. 10년 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의 독점과 통제를 다시 시도했지만, 한 번 풀린 독점과 통제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자신감을 갖고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경제력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남한이 누리고 있던 확고한 우위에 있었다. 북한의 국민총생산(GNP)90년대 들어 반 토막이 나서 1997년 약 103억 달러로, 남한의 약 4670억 달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GNP 전체가 남한의 국방비(160억 달러)0도 미치지 못했다. 무역규모는 200 1, 더 차이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포용정책은 유화정책이 아니라 강자의 공세적 정책으로서 부전승전략을 추구한 것이라고 임동원은 설명했다. <손자병법>부전이승(不戰而勝)”을 말한 것이다.

 

이렇듯 남북 간의 국력격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궁지에 몰려 죽기 아니면 살기또는 이판사판식으로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남북이 보유한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쌍방이 입을 참화인 것이다. 우리가 승리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수많은 인명과 산업능력을 파괴할 민족적 대참화는 반드시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국력과 남북 간에 심화되고 있는 국력격차를 배경으로 북한의 도발과 모험을 억제하는 한편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내어 순화시키고 잘 관리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안보를 튼튼히 하여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는 한편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관리하여 평화를 만들어나가면서 공존공영하는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해나가려는 것이 곧 화해협력정책의 요체인 것이다. (<피스메이커> 33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