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메가와트 규모의 츠벤텐도르프 원자력발전소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핵발전소로 1972년 4월 착공해서 1978년 가을까지 140억 실링(지금 돈으로 약 10억 유로)을 들여 완공을 보았다. 그러나 이 발전소는 가동되지 못했다. 1978년 11월 5일의 주민투표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법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50.5% 대 49.5%)

 

이 주민투표를(국가 차원의 주민투표를 ‘국민투표’라 부르기도 하지만 투표의 본질이 ‘주민’의 의사를 묻는 것이므로 ‘국민투표’란 이름을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기로 오스트리아에서는 핵발전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비핵국가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건이 경각심을 크게 일으키기 8년 전에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다 지어놓은 발전소를 폐쇄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찬반 차이가 그토록 작았는데도 이 문제의 재론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일반적 약점이 불안정성이다. 어떤 문제든 제기를 쉽게 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같은 의제가 조금씩 내용을 바꿔 거듭 제안될 수 있어서, 집념을 가진 세력이 있다면 언젠가 관철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단 한 번의 주민투표로 비핵국가의 길을 확정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제일 활성화된 나라로 단연 스위스가 꼽힌다. 18세기 말 이래 세계적으로 집계되어 있는 국가 차원의 주민투표 5백여 회 중 3백여 회가 스위스에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Wikipedia> "referendum") 바로 옆의 오스트리아가 2위로, 20여 회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의 주민투표 중 그 나라의 진로에 큰 고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이해에도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독일과의 합방에 대한 1938년 4월 10일의 투표였다.

 

한 달 전 독일군이 진주해 합방을 실행해 놓은 상태에서 주민에게 추인을 요구하는 투표였으니 공정한 투표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위 투표지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한 달 동안 좌익과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있어서 7만 명 이상이 체포되고 40만 명 이상이 투표권을 빼앗겼다고 한다. 투표권자의 10% 가까운 숫자다. 이 투표에서 찬성이 99.7%룰 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투표가 철저한 조작은 아니었다. 1870년을 전후한 ‘독일 통일’에서 오스트리아가 빠진 것은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으며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독일인 국가들이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뭉치는 민족통일의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제국이 몰락하고 독일인 지역만이 오스트리아공화국으로 출범할 때 독일과 합쳐 ‘독일인 공화국’을 만들자는 ‘통일’(Anschluss) 열망이 높았다. 그때 티롤과 잘츠부르크에서 시행된 주민투표에서는 오스트리아-독일 통일 찬성이 98~99%에 달했다. 그러나 승전국들이 ‘큰 독일’을 꺼렸기 때문에 베르사이유조약에서 분리독립을 강요했다.

 

1830년대 초 오스트리아 출생의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운동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독일 통일운동이 격화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나치가 주도한 이 운동은 소박한 민심에 역행함으로써 오히려 반발을 키웠다. 독일계 미국 작가 존 건서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1932년에 오스트리아인의 통일 찬성은 80% 정도였을 것이다. 이것이 1933년 말까지 최소한 60% 반대로 뒤집혔다. 이유는 히틀러의 테러리즘이다.”

 

1920년대 말 이래 오스트리아 정권은 기독교사회당의 국수주의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정권도 파시스트 정권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독일인이 독일 독일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통일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세력 강화에 따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1938년 3월 13일 통일에 대한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했다. 청년층의 통일 지지를 봉쇄하기 위해 투표연령 하한을 24세로 올리는 등, 이 투표가 시행되었다면 한 달 후 독일의 점령 하에 실시된 투표보다 더 심한 부정투표가 되었을 것이다. 통일 지지자들의 항의로 소요사태가 이어지자 독일은 치안 유지를 빌미로 침공, 정권을 접수해 버렸다.

 

1938년의 오스트리아-독일 합방이 우리 현대사에 하나의 거울 노릇을 해주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신탁통치 때문이다. 추축국에 합방되어 있었다는 것이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공통점이었다. 전쟁 후 (연합국이 이길 경우) 두 나라를 독립시킨다는 연합국의 방침이 1943년 가을에 나란히 나왔는데, 두 나라 인민의 일본과 독일에 대한 항쟁을 독려하는 한편 전후에 일본과 독일을 약화시킨다는 뜻이 겹쳐진 방침이었다.

 

결국 두 나라가 연합국의 인정을 받을 만한 항쟁을 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는데, 두 나라를 독립은 시켜주되 신탁통치를 거치게 한다는 전후 연합국의 방침에는 추축국에 항쟁하기보다 추축국의 전쟁노력을 거들어준 데 대한 벌칙의 의미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벌칙이 더 무거워서 10년, 그리고 한국에는 5년 이하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자발적인 합방에는 독일민족주의 입장에서 ‘통일’의 의미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통일의 열망이 높을 때 연합국이 강제했던 ‘분단’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결과로 떨어진 10년의 신탁통치를 오스트리아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좌우합작이 잘 되어 소련 측과 서방 측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신탁통치에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분단건국에 이른 한국과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확대와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선출된 공직자의 무책임과 부패 등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이 드러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시대 요구의 변화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확산될 때는 국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선 미국의 헌법 기초자들도 “다수의 독재”라는 이유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다.

 

1787년에서 1788년에 걸쳐 “연방주의”(The Federalist)란 제목을 단 85편의 글이 발표되었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연방헌법 비준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가명으로 발표된 글인데도 미국 법정에서 헌법 해석에 널리 활용될 정도로 중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10호 문서가 꼽히는데, 매디슨이 썼다는 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언제나 별개의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도 비슷한 차이가 있습니다. 토지, 제조업, 상업, 금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문명국가 안에서는 자라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정서와 견해를 가진 여러 계층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다양하고도 상호관련성을 가진 이 이해관계들을 조율하는 것이 근대국가 입법의 중심 과제이며, 정부의 일상적 운영에 있어서의 당파성이 그 과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작은 수의 시민으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시민이 모여 정부를 직접 운영하는 순수 민주주의는 당파성의 폐단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다수가 어떤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할 때 소수를 희생시키고 싶은 유혹을 억제할 길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안전이나 소유권의 보호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끝날 때 험한 꼴을 보인다는 사실이 늘 확인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Wikipedia> "Direct democracy")

 

미국의 독립에 이상주의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적 측면은 아니었다.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에게는 영국에 세금 바치기가 아깝고 노예제 폐지의 위험을 피하려는(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마음이 더 컸다. 지배층의 권리에 대한 민중의 위협을 싫어하는 마음은 영국 지배층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매디슨만이 아니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존 위더스푼도 말했다. “순수 민주주의는 오래 계속될 수도 없고 모든 정부기관에 깊이 파고들 수도 없다. 대중의 분노가 가져오는 변덕과 광기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해밀턴도 말했다. “순수 민주주의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최선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고들 말한다.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증명한다. 시민들이 직접 토의에 참가하던 고대 민주정치에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 본질은 독재였고, 그 모습은 기형적이었다.”

 

독립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순수 민주주의”(pure democracy)라고 말한 것은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이념 자체로는 직접민주주의가 옳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독립운동이 일단 벌어지자 이념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다 건너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를 연장해서 연방정부의 지배도 거부한다는 뜻으로 각 주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방주의자들은 ‘아메리카합중국’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연방헌법을 각 주가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원리의 한계를 강조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독립 때부터 이처럼 국가주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유럽국들에 비해 주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의 힘이 약하다. 그러나 근년 확장되고 있어서 지금 절반가량의 주에 주민투표가 법제화되어 있고,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도 정책 결정에 주민투표를 활용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주민투표의 역할이 늘어나는 추세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가’의 의미가 약화된 데 따른 것이다. 영토의 귀속을 결정하거나 신탁통치의 종료를 확인하기 위해 국제 감시하의 주민투표가 끊임없이 필요하게 되면서 국가 차원에 얽매이지 않는 민의 수렴방법이 주목받게 되었다. 국가의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민투표가 필요한 상황도 늘어났다.

 

정치제도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도 주민투표 제도가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지방자치 발전에 따라 주민투표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경직성에 빠져 있는 한국에서는 주민투표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원전을 반대하는 삼척 주민의 뜻을 확인한 주민투표를 정부가 ‘법적 근거’를 따지며 묵살하려 드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주민투표의 중심은 ‘민심’에 있다. 정부에게는 주민투표를 도와줄 ‘책임’이 있는 것이지, 주민투표를 시행해라 마라 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자산인 주민투표를 짓밟으려만 드는 현 정권은 과연 40년 전의 국가관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