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 1일부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 주권이 옮겨진 것을 중국인은 ‘반환(Return)’이라 하고 영국인은 ‘양도(Handover)’라 한다. 두 가지 뜻이 다 들어있었다. 1898년 조차된 신카이 지역은 99년의 조차기간이 끝나 ‘반환’된 것이 맞지만 1842년 남경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으로 할양되었던 홍콩 섬과 코울룬 반도는 ‘양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 측은 섬과 반도의 할양이 불평등조약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 주장하고 마찬가지로 반환을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1984년 영국의 대처 정부가 중-영 공동성명으로 홍콩 전체의 중국 귀속에 동의한 것은 ‘통 큰 양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적으로 유일한 대책이었다. 홍콩 면적의 86%를 점하는 신카이 지역을 반환하고 섬과 반도만을 식민지로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며 홍콩 문제가 제기된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경제도시 홍콩의 기능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부동산의 표준 담보기간은 15년이다. 그런데 15년 후 홍콩의 체제를 예측할 수 없다면 부동산에 근거한 금융제도가 무너지게 되어있었다. 퇴로를 그 시점에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84년의 공동성명은 협력의 원리 위에 만들어졌다. 반환 후 50년간 홍콩의 ‘기존 체제’를 보장한다는 약속은 중국 측의 큰 양보였다. 이 양보가 가능한 것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일국양제’ 원리 덕분이었다. 홍콩과 마카오를 넘어 멀리 타이완까지 바라본 원리였다. 홍콩을 원만하게 수용하는 것을 타이완을 쉽게 끌어들일 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1989년 톈안먼 사태와 뒤이은 공산권 붕괴를 바라보며 마음을 바꾼 영국인들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제, 중국에게 약속한 양보를 꼭 지켜야 하나? 메이저 정부는 1992년 홍콩 총독을 데이비드 윌슨에서 크리스 패튼으로 교체했다. 중국학 연구자 출신의 외교관인 윌슨이 1987년 취임 이래 중국 측에 너무 협조적이었다는 이유였다. 한편 패튼은 보수당 의장으로 1992년 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외무장관이나 재무장관 물망에 오르다가 낙선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총독 패튼은 27인의 전임 홍콩 총독과 다른 기록을 두 가지 남겼다. 하나는 정치인 출신의 첫 총독이란 것이었고(거의 대부분이 군인과 외교관이었다.), 또 하나는 현지인들에게 별명을(“뚱보 패튼”) 얻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기는 무엇보다 ‘민주화’를 향한 정치개혁에 있었다.
식민지로 통치하던 시절에 그런 개혁을 했다면 좀 좋았을까. 식민지 시절 홍콩의 민주주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그런데 주권이양 일정이 정해진 상황에서 난데없이 개혁을 서두르니 “못 먹는 밥에 재 뿌리는” 꼴로 보일 수 있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홍콩 민주화세력에게도, 영국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었지만 식자들의 빈축을 샀다. 특히 홍콩 정책 관계자들은 분노까지 했다. 1971-1982년간 최장기 홍콩 총독을 지낸 머리 매클리호스는 “그런 무책임한 정치적 양극화는 홍콩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중국과 영국의 “협력적 관계”에 해독을 끼칠 것을 걱정했다.
패튼은 개혁을 추진했고 1995년 홍콩입법의회 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시행되었다. 개혁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참정권 확대 방향으로 추진된 것은 분명하다. 식민지시대 홍콩에서는 참정권의 범위가 아주 좁았다. 중국에 반환되면 참정권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것이 중국 측 계획이었다. 이질적 조건을 많이 가진 홍콩의 순조로운 동화를 위해 수십 년에 걸친 점진적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었다.
패튼이 일방적으로 정치개혁을 시행하는 데 중국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반환 전의 홍콩에서 일방적으로 방법을 바꿔 구성하는 입법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임시입법의회를 구성해 두었다가 주권이양과 동시에 입법의회를 해산했다. 홍콩의 이양 과정에서 순탄하지 못했던 하나의 매듭이었다.
매클리호스 전 총독의 말이 맞았다. 1995년 선거에서 기세를 올리며 모습을 나타낸 홍콩 민주화세력이 지금까지도 더 빠른 민주화를 요구하며 중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패튼은 홍콩에 지뢰를 묻어놓고 간 것이다.
민주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민주화 선배인 우리는 알고 있다. 1987년까지 대통령 직선이 우리 민주화운동의 가장 뚜렷한 표적이었던 것처럼, 지금 홍콩에서도 행정장관 직선이 초점이 되어 있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나?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에도 치를 떨지 않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우리 국민 중에 많지 않다.
‘중국식 민주주의’는 수뇌부를 직선으로 뽑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중국식 민주주의’에도 나쁜 선입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한 선거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만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덩샤오핑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중국 지도부의 순탄한 계승에는 우리가 부러워할 점이 있다.
중국 측이 홍콩 민주화를 ‘중국식 민주주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월 말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2017년부터 행정장관 선거를 직선제로 전환하되 1200명의 후보추천 위원 중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은 후보 2~3명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주는”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 중국 입장에서는 큰 양보다. 그런데 이것을 홍콩 민주화세력에서는 “짝퉁 민주주의”라며 거부하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괴씸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지구 반대쪽에서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고 지내던 인민을 해방시켜 중국인과 같은 수준의 참정권을 보장해 주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니! 십억여 중국인을 대충 만족시키며 중국을 150년 고난의 역사에서 건져낸 중국의 체제가 짝퉁이라며 별로 신통한 실적을 보이지도 않은 ‘서방식 민주주의’를 꼭 들여와야 한다니!
어떤 운동에나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홍콩의 민주화운동에 외부세력의 사주와 선동세력의 획책이 깔려 있다고 보는 중국 측 일부 주장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사주와 선동에 휘둘리는 민심 그 자체다. 중국이 제시하는 미래의 전망을 다수 인민이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무리 극심한 사주와 선동이 있어도 민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박인규는 일전 “진퇴양난 시진핑…'짝퉁 민주 거부' 홍콩은 어디로?”[주간 프레시안 뷰]에서 한 홍콩 교수가 말한 중국 정부의 네 가지 선택지를 이렇게 인용했다.
첫째, 완전한 자유 직선제라는 홍콩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둘째, 톈안먼 사태와 같이 강경 진압에 나선다. 셋째, 자유 직선제는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다른 유화책으로 타협을 시도한다. 넷째, 시위가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린다.
첫째와 둘째는 현실적 가능성이 없고 셋째와 넷째 방안을 시도할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나도 동감이다. 2003년의 상황을 돌아봐도 그렇다. 사스(SARS)의 타격으로 민심이 흉흉한 위에 홍콩정부의 보안법 제정 시도가 겹쳐져 수십만 군중이 거리로 나오는 “톈안먼 이후 최대”의 시위사태가 벌어졌다. 보안법을 추진하던 장관들이 사임하고 법안이 철회되는 동안 중국정부는 직접 개입을 삼갔다. 사태가 진정된 후인 2004년 말 퉁치화 홍콩 행정장관을 비판하는 후진타오의 발언이 있고 두 달 후 퉁치화가 사임했다.
그런데 셋째 방안의 “다른 유화책”이 10년 전보다 아주 강력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정장관 직선제 자체는 거부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적극적 민주화 조치를 제시할 가능성이다. 행정장관 직선제에 가려져 있는 입법의회의 구성방법과 선거방법의 개혁방안을 들고 나올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이 10년 전보다 크게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일국양제’는 통합 초기의 일시적 조치로 인식되어 왔다. 홍콩의 경우 반환 후 50년간 중국과 다른 체제를 허용한다는 1984년 중-영 공동성명에 따라 2047년 이후에는 중국 체제에 동화시킬 것이 예상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한 없이 ‘일국양제’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중국정부가 제시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타이완은 말할 것도 없고,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대외관계와 대내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도 쓰다 보니 중국의 향후 진로를 밝게 보려는 내 관점을 또 드러냈다. 동서교섭사를 통해 문명사를 공부해 온 나로서는 중국의 ‘화평굴기’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나름의 몇 가지 근거가 있고, 그 근거 위에서 중국의 미래를 밝게 보는 관점을 세우게 되었다. 언젠가 그 관점과 근거를 한 차례 집중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직 그 작업을 하지 않은 채로 내 관점이 꼭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다만 현실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런 관점의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만을 짚어둔다.
홍콩 반환 1주년에 임해 썼던 글 하나를 통해 당시의 소감을 돌아본다.
홍콩, 차이나 1년
반환 1주년을 맞는 오늘 홍콩인들의 표정은 1년 전과 판이하다. 중국 정권을 대표하는 신화사(新華社) 분사(分社)의 초법적 횡포가 심심찮게 눈에 띄는 위에 정청(政廳)시절에 없던 비리사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총선에서 65%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은 60석의 입법회에서 겨우 16석을 얻은 채 좌절감에 빠져 있다. 선거로 뽑는 의석은 20석 뿐이다.
더욱 답답한 것은 경제사정이다. 반환 당시 15,000대를 넘보던 항셩지수가 지금은 8,000대에서 맴돌고 있다. 홍콩화와 달러화와의 연계체제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홍콩의 번영을 찾아 중국인들이 너무 몰려들 것을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거리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 홍콩인들이 늘고 있다.
1년 전 온 세계의 이목을 모았던 축제분위기는 이제 홍콩에서 찾아볼 수 없다. 1주년 기념식도 외교사절 외에는 바깥손님 부르지 않고 조촐하게 치른다고 한다. 그러나 홍콩인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지난날의 영화(榮華)는 빛이 바랬지만 중국 내에서 홍콩의 장래 위상에는 큰 위험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송백(松栢)의 푸르름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경제적 역경 속에서 홍콩의 가치가 투철하게 확인된 셈이다.
홍콩을 끌어안은 중국의 표정도 여전히 느긋하다. 재작년 봄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군사훈련을 벌였던 것과 같은 긴장된 태도는 다시 보일 것 같지 않다. 홍콩을 가지고 1국2체제의 타당성을 입증한 만큼 대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된 덕분일 것이다.
9년 전 천안문사태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붕괴를 예측했다. 의지해 온 공산권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마저 퇴색한 뒤에 그 낙후된 경제를 끌고 거대한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뜻밖의 착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홍콩까지 무난히 접수한 것이다. 이질적인 체제의 홍콩을 포용한 데서 중국의 장래는 더더욱 세계인의 신뢰를 얻고 있다.
베트남 통일은 군사적 정복이었고 독일 통일은 경제적 정복이었다. 정복당한 쪽 옛 체제는 새 통일체제의 부담이었고 파괴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중국과 홍콩은 두 체제의 미래 진로에서 공통점을 찾아내 접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가 짐이 되기보다 자산이 된 것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은 통일의 과제에도 요긴한 교훈이다.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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