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체제는 해방 직후 미-소의 분단점령으로 틀을 짜기 시작해서 1948년 8-9월 남북의 정부 수립으로 완성되었다. 큰 틀은 그 후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실제 양상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고, 동구공산권 붕괴 직후인 1990년대 초반도 한 차례 큰 변화의 계기였다. 어떤 변화였던가, 분단체제 성격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1950년대 분단체제의 남측 주체는 남한보다 미국이었다. 냉전체제의 한 부분으로서 한국의 분단을 미국이 필요로 했고, 미국의 지원에 기대어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친일파 집단은 남한 사회 내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권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북진통일’이란 이름으로 대결을 정당화했다. 인민의 통일 열망은 폭압적 정책에 억눌려 있었지만, 조봉암의 ‘평화통일’ 노선에 대한 열렬한 호응으로 나타났다. 4-19혁명 후 통일운동의 분출은 폭압이 사라진 상황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5-16쿠데타로 폭압이 복원되어 표면적으로는 1950년대 상황으로 돌아갔지만 대립 상황은 북한이 우세한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 건설에서 앞선 북한은 4-19 이후 드러난 남한 민심에 자신감을 얻고 ‘평화통일’ 선전에 힘을 더했다. 국제관계에서도 비동맹운동의 발전이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미국이 마음 놓고 이용했던 유엔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도전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한반도와 비슷한 틀로 미국이 매달려 있던 베트남의 전쟁은 점차 미국이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남한의 베트남 파병과 북한의 무력공세가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냉전의 틀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비자본주의 국가를 모두 적대시하는 오만한 자세로 국제사회에 임했다. 그런 극단적 독단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된 미국은 ‘적’의 범위를 좁히고 적대의 자세도 누그러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과의 수교를 비롯한 데탕트에 나서게 된다.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체였던 두 나라 사이의 화해는 그때까지도 두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남북한의 입장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틀에 전쟁 이후 최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홍석률은 그 윤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서 격돌했던 미국과 중국이 1970년대 초 관계 개선에 나섰다. 한반도 문제는 양국 사이에 하나의 의제를 형성하였다. 미국은 현상유지를, 중국은 현상변경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강대국은 평화정착이든 남북통합이든 한반도 분단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중 두 강대국은 동아시아의 긴장완화와 미중관계 개선을 위해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고, 자신들이 한반도의 분쟁에 다시 연루되어 또다시 격돌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두 강대국은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한반도 분단 문제를 국제적 분쟁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의 문제로 내재화하는 데 공조하였다. 또한 두 강대국은 한반도 분단 문제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개입을 축소하고 분단유지의 책임을 남북한으로 전가하였지만, 자신들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자체는 계속 유지하려 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 391-392쪽)

 

당시의 데탕트는 상대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종래의 극단적 대결을 약간 누그러트리는 것이지, 대결을 없앤 것이 아니었다. 중-미간의 대결 양상은 수교 후에도 상당부분 계속되었고 한반도는 대결의 무대로 남았다. 다만 강대국의 직접 대결을 삼가게 되었을 뿐이다. 분단의 내재화란 두 강대국의 이런 필요에 부응하는 변화였다. 근년 대기업이 부담이 큰 성격의 업무를 하청회사에 맡기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은 남한을 냉전대결을 위한 직할부서에서 하청회사로 위상을 바꿔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분단의 내재화를 통해 남북한은 대결의 주체로서 입장을 키우게 되었다. 분단의 비용과 책임을 더 많이 떠맡게 된 것이다. 남한의 경우,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코리아게이트’까지 저질러야 했고, 긴장 완화를 바라는 민심을 억누르기 위해 독재를 강화해야 했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북한 역시 비슷한 위기의식에 몰렸다.

 

남북의 체제경쟁은 결국 남북의 집권세력이 각자의 정치체제를 더욱 억압적인 방향으로 개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 모두 미중관계 개선, 데땅뜨로 조성된 유동적인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남쪽에서는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북쪽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고 후계체제가 확립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일면 데땅뜨 상황에 부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을 격화시키고, 데땅뜨를 위기국면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같은 책 393쪽)

 

베트남전 종전 직후인 1975년 6월 주한 미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는 본국으로 보낸 비밀보고서에서 남한을 미국의 속국으로 보는 ‘구시대적 발상’을 언급했다.

 

“미국의 현 한반도 정책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은 남한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토대로 삼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장차 중견 국가로 성장할 남한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남한 정부는 미국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미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이와 같이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박 대통령은 언젠가 다가올 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 내에서 탄압 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북한은 언젠가 미군이 철수할 날을 고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미국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남한의 장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품고 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110-111쪽에서 재인용)

 

미국의 베트남 포기 정책이 분명해지면서 불안해진 한국 정부를 달래기 위해 미국은 군사적 지원을 과시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74에 작성된 ‘작전계획(작계) 5027’이었다.

 

(한-미 제1군단 사령관) 홀링스워스 중장은 부임 일년 만에 주한미군의 기본적인 작전개념을 바꾸어 버렸다. 북한과의 전쟁을 대비해 미국은 ‘작전계획 5027’을 세워놓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의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그것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한-미 연합군은 이를 격퇴하고 휴전선을 다시 복구한다는 제한적 목표를 지닌 방어전략이었다. 그러나 1974년 홀링스워스는 공세적인 ‘전진방어전략’을 도립했다. 그는 대규모 야포부대를 비무장지대 남쪽 최전방까지 북상시킴으로써 언제든지 북한 영토를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미군 제2사단 소속의 2개 여단은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개성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전진방어전략’은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고 9일 이내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24시간 동안 막강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B-52 폭격기의 지원을 비롯해 한-미 양국군의 엄청난 화력동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시 미 중앙정보부 한국 책임자였던 그레그의 회고에 따르면, 홀링스워스는 한-미 양군이 ‘전진방어전략’을 수행할 정도로 충분한 화력을 보유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공격적인 전략은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발휘해 당시 불안에 떨던 한국인을 안심시키는 성과는 분명 있었다. (김일영-조성렬 <주한미군 역사-쟁점-전망>(한울아카데미 펴냄)91-92쪽)

 

뒷받침할 화력의 확보 없이 공격적 전략을 내놓은 것은 심리적 효과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이 무렵 시작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실효성 없는 이 전략에 실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스나이더의 말대로 ‘임기응변식’ 대응이다. 작계 5027은 꼭 필요한 것인지, 또는 바람직한 것인지 따지기보다 남한 정부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한반도 분단체제는 한 차례 틀을 바꿨고, 그 틀이 1990년경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 396-403쪽에서 이 시기 분단체제의 특성으로 ‘변덕(volatility)’,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 ‘권력의 무책임성과 식민성’ 세 가지를 설명했다.

 

‘변덕’은 ‘휴전’이라는, 전쟁과 평화 사이의 애매한 상황에서 기인한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복잡한 관계망을 갖기 때문에 문제가 폭발하기도 어렵고,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어렵다.” 한국전쟁 후 계속해서 존재한 특성이지만, 특히 1970년대 이후 강대국의 의지가 애매해지면서 유동성이 더욱 늘어났다.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도 분단의 시초부터 나타나 있던 특성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대로, 강대국 정책추진의 수단으로 약소국이 이용되어 갈등을 집약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이 특성 역시 1970년대 이후 강대국 간의 관계가 복잡해지는 데 따라 약소국의 부담이 더 많아졌다.

 

‘권력의 무책임성과 식민성’은 남북관계의 한계를 빚어낸 특성이다. 대화를 하더라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 없이 이쪽 동맹국과의 관계, 때로는 상대편 동맹국과의 관계에 이용만 할 생각만 하기 때문에 “서로 곁눈질을 하는 대화, 쳐다보지 않는 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설명을 일부 옮겨놓는다.

 

한반도 분단체제가 장기지속하는 기본 원인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 때문이다. 분단체제는 이러한 권력의 무책임함을 계속해서 발생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란 사실상 ‘식민성’(coloniality)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식민성은 과거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여기에 한정되지 않고, 이와 유사한 권력관계 및 사회관계를 넓게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권력의 기본 특징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총독은 한반도를 통치하였으나 한반도 주민들은 물론이고, 일본 내각이나 의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오직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다. 2차 대전 이후 제국, 식민지 질서는 붕괴되었지만 세계체제의 불균등성은 지속되었다. 이와같은 세계체제의 불균등성은 항상 권한과 책임이 불일치하는 상황을 창출한다.

 

1990년을 전후한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1970년대 초의 데탕트보다도 훨씬 더 큰 정세 변화였다. 한반도 분단체제에도 획기적인 틀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나아가 분단체제 자체의 해체를 몰고 올 수도 있는 큰 변화였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이 분단체제의 변화 방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모색한 것인지를 놓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분단체제의 틀을 크게 바꿀 계기를 만들려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종래 분단체제의 틀을 더 굳히는 퇴행적인 것이었다.

 

홍석률이 제시한 분단체제의 세 가지 특성에 비추어 그 퇴행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변덕’. 외부 여건에 변화가 없을 때도 여론의 피상적 변화에 따라 정책이 극과 극을 오갔다. 둘째, ‘강대국 갈등의 이전과 증폭’. 이제 ‘강대국 간’의 갈등은 보이지 않고, ‘강대국 내’의 갈등이 문제다. 미국에서 대북 강경노선과 온건노선이 일으키는 작은 갈등이 한국에서는 극한적 대립으로 나타났다. ‘조문 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이 ‘무책임성-식민성’의 문제였다.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다. 조금 떠밀기만 하면 더 빨리 붕괴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그토록 철석같이 가질 수 있었나? 그 믿음이 맞고 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어떤 근거 위에 세우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충분한 숙고를 했는가 여부다. 김영삼 정권에게는 그런 책임감이 없었다. 모든 것을 미국이 책임져 주리라 믿고 저지른 짓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삿대질을 하고 호통을 친 것이 자주성의 표현이라고 김영삼은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른에게 앙탈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책임성이었다.

 

이런 무책임을 ‘식민성’이라 하는 것은 주권도 책임도 없는 식민지인이 종주국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해방 50년 시점에서 이런 식민성이 나타난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원나라의 예속에서 풀릴 때의 고려가 생각난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할 때는 원 제국의 붕괴 조짐이 뚜렷할 때였다. 공민왕의 내외 정책은 원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개혁정책이 중단되고 이인임과 최영이 주도하는 친원 수구정책으로 돌아갔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개혁정책이 재개되어 1392년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1374년이면 원나라가 대도(大都)를 잃고 장성(長城) 밖으로 쫓겨난(1368) 뒤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친원 수구정책이라니? 원나라에 대한 예속을 내재화한 친원파의 존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백년에 걸친 예속기간 중 고려에는 예속 상태에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을 좌절시킬 만큼 강했다. 그러나 더 이상 외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고, 14년 만에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1945년에 명목상의 해방을 맞았지만 친일파를 바탕으로 형성된 남한의 집권세력은 50년간 외세에 대한 종속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책임과 주권이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동안 ‘식민성’이 척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냉전 해소는 종속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국제정세를 만들어주었음에도 식민성을 내재화한 집권세력이 종속 상태의 연장을 바란 것은 고려 말의 수구세력과 마찬가지였다.

 

김영삼의 ‘잃어버린 5년’간 남한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했고, 남북관계에는 발전이 없었다. IMF 충격 속에 김영삼이 퇴진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가는 남한의 움직임이 시작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

 

매년 10월 초순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가 알려질 무렵, 하버드대학의 샌더즈 극장에서 열리는 시상식 하나가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시상 부문에는 노벨상 대상인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외에 공공의료, 공학, 학제간 연구 등의 여러 부문이 있다. 1991년 ‘명랑과학’ 잡지를 표방하는 <황당 연구 연대기>(Annals of Improbable Researches) 편집자 마크 에이브러햄스가 창설한 이 상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서서 시상식 진행을 맡아줄 만큼 큰 호응을 얻으며 해마다 많은 웃음을 과학계에 선사하고 있다.

 

고귀하다는 뜻의 ‘noble’에 ‘ig’를 붙여 반대말을 만드는 데 빗대 ‘Nobel’에 ‘Ig’를 붙인 것은 물론 노벨상에 대한 패러디다. 하지만 날선 비판이 아니라 부드러운 풍자의 분위기다. 수상 기준을 초기에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연구로 제시했지만 근년에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웃게 만들고, 이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연구로 바뀌었다. 1995년 평화상을 “정치인들이 서로 치고 차고 때리는 것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보다 생산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공로”로 타이완 의회에 수여한 것(대한민국 국회는 분발할 필요가 있다!), 1996년 문학상을 ‘소칼 사태’(학술지의 권위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뉴욕대학의 물리학교수 앨런 소칼이 일부러 제출한 가짜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일어난 논쟁)에 휘말린 <소셜 텍스트>지에 수여한 것, 1999년 과학교육상을 진화론 교육과 관련하여 콜로라도 주와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에 수여한 것 등은 초기의 투쟁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차츰 ‘재미있는’ 기준으로 옮겨왔다. 2006년에는 창설자 에이브러햄스도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의 목적은 특이한 연구에 각광을 비추고 연구자의 상상력에 명예를 헌정하며 과학, 의학과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키워주는 데 있습니다.”

 

시상 내용에 재미있는 것이 참 많다. <Wikipedia>의 “이그노벨상 수상자 명단”(List of Ig Nobel Prize winners)만 들여다봐도 한참 재미있다. 한국인으로는 1999년 환경보호상을 코롱사의 권현호(Hyun-ho Kwon)가 받은 것이 눈에 띈다. 향수를 따로 뿌릴 필요가 없는 신사복을 발명한 공로라고 한다.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을 모두 받은 과학자는 소련 출신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연구 활동을 해온 안드레 가임 한 사람뿐이다.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2007년 이후 중요한 과학상을 휩쓸다가 201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에 이르지만 수상 경력의 첫머리에 2000년의 이그노벨상을 올려놓는다. 전자기 부양효과 연구 실험에서 하필 개구리를 공중부양시킨 것이 이그노벨상 수상 자격이 되었다. 노벨상을 받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에 똑같은 가치를 둡니다. 이그노벨상은 제가 농담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약간의 겸손은 언제나 좋은 것이죠.”

 

2010년 12월 노벨상 수상자들의 심포지엄에서 류샤오보의 옥중 평화상 수상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중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인권 상황에도 개선이 있었다는 사실에 아무리 엄격한 인권옹호론자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사실을 왜곡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Wikipedia>의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 항목 중 시상식 설명도 무척 재미있다. 야유는 언제나 환영이다. 무대를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도록 객석에 종이도 준비해둔다. 진행자의 전형적 폐막 멘트는 이런 것이다.

 

“금년에 상을 놓치신 분들은 내년에 분발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은 분들은 더 많이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안드레 가임 말고도 이그노벨상을 노벨상과 연결시킨 사람이 또 하나 있다. 하버드대학 물리학과의 노교수 로이 글로버는 시상식마다 수시로 빗자루를 들고 나와 무대에 쌓인 종이비행기 치우는 일을 자청해서 ‘빗자루장관’(Keeper of the Broom)이란 공식 직함까지 얻은 사람인데 2005년에 그 역할을 못했다. 노벨상 받으러 스톡홀름에 갔기 때문이다. 80세 나이에 그가 노벨상을 받은 공적은 38세 때인 1963년 발표한 양자역학 논문이었다. 노벨상 받은 이유를 스스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물었다면 “오래 산 덕분”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노벨상은 생존 인물에게만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그노벨상은 초창기의 투쟁적 자세를 완화시키며 노벨상을 보완하는 쪽으로 역할을 키워왔다. 겉보기로는 비판정신의 약화일 수도 있는데, 나는 오히려 비판정신의 성숙과 심화를 그 변화에서 읽는다. 노벨상의 권위주의에 분노하는 단계를 넘어 그 한계를 굽어보며 그 한계 안에서나마 노벨상의 역할을 인정하는 초연한 자세로 느껴진다.

 

노벨상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지만, 대개는 응당 받을 사람에게 주지 못했다거나 줘서는 안 될 사람에게 줬다거나 하는 기술적 기준에서의 비판이다. 노벨상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은 흔하지 않다.

 

받을 사람에게 주지 못한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는 1937, 1938, 1939, 1947년에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노르웨이노벨위원회가 영국 눈치를 보느라고 지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독립 후인 1948년 지명이 당연시되었지만 그 해 1월에 서거했고, 노벨위원회는 그 해 평화상을 공석으로 하면서 “생존 인물 중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발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간디에 대한 추모의 뜻을 표현했다.

 

2006년에 노벨위원회 서기 게어 룬데스타드가 한 말에 음미할 점이 있다.

 

“106년 노벨상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일이 간디에게 평화상을 주지 못한 사실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노벨상 없는 간디’는 간디에게 흠이 되지 않지만, ‘간디 없는 노벨상’은 노벨상에게 남겨진 아쉬움이다.”

 

이 말은 1964년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하면서 한 말과 표리를 이룬다.

 

“작가는 자신이 하나의 제도로 전환되는 일을 피해야 한다. 그 전환이 아무리 명예로운 모습을 가진 것이더라도.”

 

노벨상 상금이 아무리 크더라도 역대 수상자의 쌓여진 권위가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상의 권위가 지켜지지 못한다. 노벨상은 하나의 ‘권위의 은행’이다. 상을 주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받는 사람은 노벨상에 깔려 있는 권위를 나눠 갖고, 주는 사람은 거래를 통해 권위의 재고를 늘린다. 간디 같은 고객은 노벨상의 권위를 크게 늘려줄 영양만점의 손님이고, 그처럼 질 좋은 고객을 많이 잡으면 키신저 같은 엉터리 손님이나(베트남-미 평화협상의 공로로 키신저와 함께 1973년 평화상을 지명받은 레둑토는 “진정한 평화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오바마 같은 먹튀 손님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할 여유가 생긴다. 사르트르는 그런 거래를 거절한 것이다.

 

노벨상을 적절한 사람들에게 주었냐고 따지는 것은 그 사업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무기상에게 부당이득 취득 여부를 따질 때 사업 자체의 윤리성은 문제 삼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와 ‘맹목적 경쟁의 시대’를 반성하는 입장에서는 노벨상에 학문적-예술적-정치적 권위가 집중된 현상 자체에서 문제를 느끼게 된다.

 

노벨상이 만들어질 때는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던 제국주의시대였다. 그 경쟁의 열기 덕분에 노벨상의 흥행이 성공할 수 있었다. 노벨상은 올림픽대회와 함께 20세기를 특징짓는 사업이었다. 아직도 손님을 많이 끌고 있기는 하지만 사양산업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30년 전 노벨문학상 발표를 기다리던 한국 출판계의 긴장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노벨상의 ‘폐단’을 꼬집는 글 하나를 1997년에 쓴 일이 있다. 노벨상의 쇠락을 나 자신 예견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돌아보며 금석지감을 느낀다.

 

상중상(賞中賞) 노벨상

 

퀴리부인의 딸과 사위 졸리오-퀴리 부부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것은 1935년. 그 다음으로 프랑스인이 화학상을 받은 것은 1987년의 일이다. 물리학상은 1929년 브롤리가 받은 뒤 1991년 젠느가 받을 때까지 60여년 사이에 1966년의 알프레드 카슬러가 유일한 프랑스인 수상자였다.

 

방사선의 분석을 통한 원자구조 연구로 물리학상을 받은 카슬러의 이름은 독일식이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로렌 지방 출신이니 프랑스로서는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건진 셈이다. 수상이 결정된 뒤 수상이유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카슬러의 대답이 걸작으로 전해진다. “그 논문을 영어로 발표한 덕분 아니겠습니까.” 노벨상이 영어권에만 편중된다는 프랑스사람들의 불만을 대변한 말이다.

 

상과 벌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당근과 채찍이니 인간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늘 있어 온 것이다. 그런데 벌의 종류는 가두기, 때리기, 죽이기, 재산 뺏기 등 몇 가지 되지 않는데 상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무슨 까닭일까.

 

인간의 두려움은 모두 비슷하지만 원하는 것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먹고싶은 음식은 가지각색이지만 굶주림은 똑같이 두려워하지 않는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영위하는 모든 활동에 상이 따르게 되었으니 상의 다양성은 바로 가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달리기 잘해 받는 상, 공부 잘해 받는 상, 착한 일 해 받는 상이 모두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것이 곧 가치의 다양성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노벨상이 다른 모든 상을 압도하는 막중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가치관의 획일화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성의 다양한 발현방법이 고르게 존중받는 분위기에서는 한 가지 상이 모든 사람의 선망대상이 될 수 없다.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하며 “노벨상은 작가정신을 제도 속에 옭아 넣는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불건전성을 지적한 것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국적을 보면 평화상 수상자를 낸 나라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는 문학상이다. 구미 선진국에 집중된 학술분야에 비해 평화상과 문학상에는 정치적 배려가 따르기 때문이다. 인구와 경제력에 비해 노벨상과 인연이 멀었던 사실을 놓고 우리가 반성할 것은 빈약한 학술정책이다. 상 자체를 따내려 목적의식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은 바로 노벨상의 폐단에 빠지는 길이다.

 

이 자리를 빌려 출판인들에게 광고 하나. 이그노벨상에 관한 책 두 권이 2002년과 2005년에 출판된 것이 있는데, 구해 보지 못했지만 재미있고도 유익한 책들일 것 같다. 비슷한 방향의 책을 구상하는 분들은 검토해 보시길. 그리고 혹시 번역출판하게 된다면 번역자로 나를 고려해 주시길.

 

Posted by 문천

 

 

‘과거에 대한 성찰’이란 의미에서 역사는 인류문명의 초기단계부터 정치적 의미를 갖고 행해진 것이었다. 주술사의 푸닥거리는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을 내용으로 삼아 부족의 결속력을 지켜주는 기능을 가졌다. 농업문명의 발전에 따라 문자를 향유하는 지배층이 통치의 지혜를 찾아내는 거울로서 역사를 교양의 중요한 부문으로 삼았다.

 

인쇄술의 발달로 대중이 문자를 향유하게 된 산업사회에서는 근대국가 이데올로기의 공급원으로서 역사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국민의 단결력과 동원력을 높여줄 체계적 연구방법의 개발로 근대역사학이 만들어지고 국민과 대중의 교육에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다. 역사의 연구와 교육이 국가적 사업이 된 것이다.

 

국가적 사업이라면 국가의 목적에 적합한 방향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 공립학교건 사립학교건 모든 공교육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므로 국가의 통제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방식의 통제가 적합한 것인가를 따질 일이다. 교과서의 성격은 통제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에는 국가의 성격도 반영된다.

 

교과서 통제의 대표적 방식이 국정과 검인정이다. 국정은 교과 내용을 국가가 직접 결정하는 것이고, 검인정은 민간의 결정에 어느 정도의 범위를 국가가 설정하는 방식이다.

 

국정에는 검인정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이념적 장점은 통제가 철저하다는 것이고, 기능적 장점은 비용 절감에 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는 이념 통제의 필요가 없는 과목의 교과서도 모두 국정으로 했다. 경제가 빈약한 상황에서 비용 절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의 이념적 장점에는 양면의 날이 있다. 국가주의 관점에서는 철저한 통제가 바람직하지만 민주주의 기준으로는 반대다. 한국의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옮겨온 추세에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이 모두 작용한 것이다.

 

검인정 제도를 국정으로 바꾸자는 것은 국가의 발전 방향에 역행하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 주장에 솔깃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수정주의’ 역사교과서 출현 과정을 소개해주고 싶다.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무조건 정당화하고 아랍과의 갈등을 상대방 책임으로만 떠넘기던 것이 역사 교육만이 아니라 학계의 기조이기도 했다. 교과서는 모두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백 년 전 팔레스타인은 비어 있다시피 한 땅이었고 그 땅을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사들이며 주변 아랍인과 도와가며 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만한 아랍인들은 유대인을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유엔의 결정까지 무시하면서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한 전쟁을 걸었다. 이스라엘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의지 하나로 침략을 물리쳤으며,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이스라엘 역사학계에 수정주의가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곤경에 빠진 아랍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유대인 측의 잘못된 판단이나 무리한 정책을 반성하려는 노력이 일어난 것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학계에서 당당한 위치가 확보되었다.

 

이 관점에 입각한 교과서 편찬이 1994년 시작되고 1999년 완성되어 교육 현장의 주류가 되었다. 역사교과서 교체는 민주국가로서 이스라엘의 발전과 서로 맞물린 현상이었다. 새 교과서가 민주주의 발전의 산물이면서, 또한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발판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에 바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 나라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더 훌륭한 발전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 검인정 제도를 지키고 싶어 할 것이라 믿는다.

 

 

어느 학교 학보사에서 '시론'을 청하기에 쓴 글입니다. 청탁서에 원고료 표시가 없기에 궁금하다고 메일을 보냈더니 청탁서 양식에 안 나와 있어서 적지 못했다고, 알아보고 알려드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려주기 전에 얼른 써서 보내면서 "원고료를 알려주면 쓸 마음이 없어질까봐 서둘러 썼습니다." 했지요. 그런거 궁금해 하는 게 너무 궁상 떠는 걸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