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중국은 세계정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구 공산권 국가의 하나로 여겨졌다. 자본주의 원리를 급격히 도입한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1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의 앞길이 더 막막해 보였다. 이 단계 변화의 의미를 원톄쥔(溫鐵軍)<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3) 124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거시경제에 파동을 일으킨 배경을 시간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어본다면, 각각의 시작 시점은 1980, 1988, 1994, 2002년이 될 것이다. 성격을 기준으로 분류를 하자면 21세기 이전 대외개방의 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외부 자본을 유인하기 위해, 그들이 들어와 이익을 얻는 데 유리하도록 조건을 마련한 임시방편의 성격을 띤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 이후의 네 번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현저하게 다르다. 3대 차별이 심화됨으로써 심각한 내수 부족 현상이 초래되고 산업자본 과잉의 압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 내 생산능력 과잉의 압력을 국제시장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미 빌붙어 사는 처지로 전락한 국제 산업자본도 금융 버블의 압력에 밀려서 중국으로 대거 확장해 들어왔다.

 

기존 세계체제의 주변부 현상이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적 변화의 한 중심축으로 부각된 것이다. 막강한 발전 동력과 함께 상당한 안정성을 가진 강대국의 모습을 중국이 갑자기 드러낸 것이다. 자본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독자적 발전을 계속하는 중국의 존재에 서방 관측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을 국제사회의 위험 요소로 보는 중국위협론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은 중국위협론이 중국 발전을 견제하려는 서방 일각의 책략이라고 보고, 중국의 발전이 세계경제에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중국기회론과 중국공헌론으로 대항했다. 그러다가 200310월 원로학자 정비젠(鄭必堅)화평굴기(和平崛起)’란 말을 쓰고 두 달 후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이 공식석상에서 이 말을 씀에 따라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굴기라 함은 중국이 19세기 중엽 이래 치욕과 고난의 역사를 헤치고 대국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이 굴기를 통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발전을 이룬다는 뜻에서 화평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몇 달 후부터 중국 지도부는 화평굴기란 말을 더 쓰지 않고 화평발전이란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굴기’(rising)는 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국제적 권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개념인 데 반해 발전’(development)은 단순히 중국의 위치가 상승한다는 뜻이다. ‘화평굴기가 민간에서는 계속 쓰이고 있는데 당과 정부에서 굳이 화평발전이라 하는 것은 외부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한 뜻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굴기는 진행 중인 현상이다.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굴기의 성격을 명쾌하게 재단할 길은 없다.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현상에 작용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파악하고 그 요소들이 앞으로 계속 작용할 방향을 검토함으로써 향후의 진로에 대한 예측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서세동점에 의한 근대화를 겪기 전에 중국의 천하체제가 나아가던 방향의 연장선을 검토해 본다.

 

중국 변화의 네 가지 과제

 

조영남은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나남, 2009) 278-279쪽에서 중국 변화의 큰 과제를 (1)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 (2) 국가체제의 합리화, (3) 정치민주화, (4) 세계 강대국화의 네 가지로 지목했다.

 

정치-외교분야에서 중국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추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중국의 특수성과 모든 국가의 보편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도출한 것이다.

첫째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이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 강화와 통합유지를 목표로 한다. 중국은 당-국가로서 공산당과 국가가 조직적-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실제 정치과정에서 공산당이 국가기관의 역할을 종종 대체하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중국의 현황과 전망을 검토할 때에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성 문제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만약 중국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통치 엘리트의 안정성에 이상이 생길 경우이다.

둘째는 국가체제의 합리화이다. 1978년 중국이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이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국가 통치능력 강화는 핵심과제로 제기되었다. 계획경제 시대의 국가체제로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9.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와 함께 국가체제의 합리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치민주화이다. 이는 민주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전체주의적 국가-사회관계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혁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회 불안정 요소가 증가했다. 국민의 비관습적 정치참여의 급증은 이런 불안요소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고, 향후 중국정치는 민주화 정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넷째는 세계 강대국화이다. 이는 중국이 아시아 지역 강대국에서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의 고도 경제성장과 지속적 군비증강, 소프트 파워 강화 등을 통해 지역 강대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현재는 이를 바탕으로 미국 등 기존 강대국과 함께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려고 한다. 중국의 강대국화는 아시아 및 세계질서를 변화시킬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은 다시 중국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네 가지 과제는 서로 맞물린 것이거니와, 나는 가장 기본적 과제가 (4) ‘세계 강대국화라고 본다. 10년 전 중국 지도부가 굴기란 말을 피해 발전이란 말을 쓴 것은 중국의 목표가 세계 강대국 아닌 지역 강대국에 있다고 엄살을 떤 것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대란 이후로는 중국의 G-2 위상에 의문의 여지가 일체 없어졌다.

세계 강대국화를 변화의 기본 축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복원력 때문이다. 2천 년 전부터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물적-인적 자원을 가진 강대국역할을 해왔다. 주변부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은 역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약화된 시기도 있고, 그럴 때는 오랑캐의 정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국의 굴기를 보게 되는데, 그 방대한 물적-인적 자원이 뒷받침한 현상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의 물결 앞에 중국이 치욕의 시대로 빠져든 것은 과거에 거듭 겪었던 제국의 해체가 또 한 차례 반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굴기는 그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과제들은 부수적-지엽적인 것이다. 특히 (2) ‘국가체제의 합리화는 국가 기능의 심화와 확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술적 문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국가통치의 원리가 이데올로기 측면에 쏠려 있다가 문화혁명을 겪은 후 개혁-개방정책을 선포한 것은 국가 기능의 실용주의적 발전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은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근래에는 강대국으로서 역할에 맞춰 국가체제의 합리화가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특별히 제기할 논점이 없다. 그 밖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세계 강대국화의 의미에 접근해 보겠다.

 

중국의 내부 착취발전정책이 가진 의미

 

근대의 만인평등 이념은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물질세계가 독립성을 가진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관점 그대로 사회를 독립성을 가진 개인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당연한 현상이고, 투쟁의 효과적 방법을 찾는 데 정치제도의 목적이 있다.

반면 중국의 전통적 질서구조, 특히 유가적 질서구조는 유기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 신하가 신하 노릇, 아비가 아비 노릇, 자식이 자식 노릇을제대로 하는 것이 질서의 근본이라 했다. 각자의 신분에 따른 역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기(禮記)>에는 ()는 서인(庶人)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大夫)에게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명예를 좇아 움직이는 높은 신분 사람들과 두려움에 몰려 움직이는 낮은 신분 사람들을 구분한 것이다.

엘리트 정치의 담당자가 명예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지배계급이었고, 역사를 통해 사대부’, ‘진신등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 역할을 지금 중국공산당이 맡고 있다. 지금의 공산당원들은 마레(馬列-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학 입학을 위해 수능시험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당을 위해 한 차례 시험을 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원의 명예에 대한 의식은 확고하고, 이 위에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류문명 발생 이래 유기론적 세계관이 일반적인 것이었고 원자론적 세계관이 세상을 휩쓴 것이 특이한 현상이다. 생명체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유기적 특성을 가지는 것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물질세계도 이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스템공학 관점에서도 원자론-기계론적 조직방법은 과도한 경쟁으로 낭비를 불러오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약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2백 년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쓴 것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상황의 한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는 풍조에 있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규정하고 절제 없이 착취하는 동안 지속가능성 문제에 눈감고 지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널리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연장한 미개인의 타자화풍조였다. 미개사회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무절제한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도 성립하는 것 같다.

근대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방세력은 자연과 미개사회에 대한 착취를 발판으로 지속가능성 없는 체제를 억지로 지금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중국은 그와 같은 외부 착취에 의존할 수 없는 나라다.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 11-12쪽에서 중국의 개발은 내부 착취를 통해 이뤄져왔다고 했다. 중국의 개발 논리는 서방의 것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처럼 해외 식민지를 통해 재부를 약탈하고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초대형 대륙국가인 중국은 주로 내향형의 원시적 축적에 의존해서 공업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식은 첫째, 고도의 조직화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노동잉여가치를 점유하고, 공업과 농업 생산품의 협상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농업의 잉여를 추출하는 것이며, 둘째, 노동력 자원을 자본화하여 국가의 기본적인 건설에 대규모로 집중 투입함으로써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결핍되어 있는 자본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 ‘중국의 경험의 본질은 정부의 기업화라는 조건 하에서 산업구조를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해온 데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중국은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수천 년 전통의 관개농업으로 형성된 집단문명을 지켜낼 수 있었고, 동시에 동방의 특색을 갖춘 중앙집권체제 내부에서 사회적 자원을 통합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첫째, 유구한 역사적 유산의 핵심인 집단문화를 통해, ‘시장경제의 심각한 외부성 문제를 내부화해서 처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둘째, 수천 년 이어진 농가경제에 내재하는 대가를 따지지 않는 노동력을 자본을 대신해서 투입하는 메커니즘인데, 극도의 자본 부족 문제를 이를 통해서 완화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가운데 중국은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할 때, 훨씬 빠르고 손쉽게 공업화 단계로 진입했다.

 

아시아적 가치가 되살아나는가?

 

정치민주화가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다. 조영남은 위 책에서 중국정치가 전체주의로부터 권위주의로 지금까지 옮겨왔고, 이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것을 당위적 과제로 본다. 정치민주화에 실패하면 중국의 변화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한국과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권위주의 체제 하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다음 정치민주화를 성취한 것을 중국을 위해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회의 어떤 변화든 그에 적합한 정치적 발전이 따르지 않으면 파탄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발전이 꼭 민주화여야만 하는가? 민주주의가 널리 실현된 것은 인류의 역사 중 최근 몇 백 년에 불과하다. 최근의 제도이기 때문에 최고로 발달시킨 성과물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민주주의 외의 여러 근대적 현상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커지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모든 인간사회의 절대적 과제로 보는 관점은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넓은 의미로 본다면 바람직한 정치질서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념으로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근대서양식의 선거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모든 인간사회에 적용시킬 당위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원톄쥔의 글 중에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란 말이 보인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 경제발전의 핵심 원리를 짚은 말이다. 십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가장 놀랍게 본 특징이 사회경제적 낙차, 즉 불평등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비슷한 낙차가 있다면 당장 뒤집어질 정도인데, 큰 문제없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댐의 낙차가 커야 큰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댐이 튼튼하지 않으면 큰 낙차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중국의 노동력시장은 큰 낙차를 버텨내 왔고, 그것이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서양식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 익숙하다. 사회경제적 낙차를 견뎌내기 힘든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이념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직 민주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며, 민주화의 완성에 매진할 다짐을 한다. 이것을 원톄쥔이 말하는 바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질곡의 일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대에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미국 등 서방의 압력에 대항해서 아시아적 가치를 제창했다. 1997~1998년 금융공황의 직격탄을 맞으며 이 주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 주장에 타당성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이 조그만 나라들에게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대항할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 중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국식 민주주의주장은 기존 세계체제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저항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왜 세계정부를 말했나?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중국식 민주주의주장에도 나쁜 선입견을 갖기 쉽다. 이 주장 중에 그런 수준의 편의주의가 꽤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비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에는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의미가 훨씬 더 많이 들어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순전히 내부용이었다. 반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는 대외관계 해명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앞에 말한 화평굴기’, ‘화평발전외에도 중국 지도부는 책임대국’, ‘신안보관’, ‘조화세계등의 구호로 원만한 대외관계를 표방하는데, 이것이 모두 중국식 민주주의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효사상만을 단편적으로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넓고 깊은 사상적 체계성을 추구한다.

이 추구의 겉으로 드러난 표적이 유가사상이다. 2004년 이래 공자학원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있는 중국의 해외문화원 조직이 그 상징이다. 유가사상 부활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부활된 유가사상이 진짜 유가사상인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유가사상 자체가 긴 역사를 통해 내용과 형식을 조정해 온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방 정치학자들은 리콴유와 마하티르의 아시아적 가치를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권위주의로 규정했다. 그 기준으로는 중국식 민주주의도 권위주의 규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인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 충분한 효용성을 가진다면 민주주의의 이름을 가지건 말건 정치발전의 가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중국식 민주주의 또는 유가적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유기론적 세계관에서 찾는다. 19-20세기를 지배한 원자론적 세계관은 지속가능성을 가진 체제를 만드는 데 근본적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승자의 싹쓸이’(winner-take-all) 원리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는 이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원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의 하나가 아인슈타인이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에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 차원에서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의 자기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러 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제기된 세계화는 정치적 세계화가 아닌 경제적 세계화로서, 오히려 무정부상태를 더욱 심화시키는 추세였다. 유가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중국의 굴기가 세계정부로의 접근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중국인 중에도 패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책임대국이나 조화세계를 편의적인 구호로만 활용하고, 중국의 힘이 정말 커지면 과거의 영국이나 미국처럼 패권을 휘두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중국인의 대다수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중국에게는 과거의 패권국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볼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큰 정치경제적 변화가 없더라도 몇 십 년 내에 인류문명이 큰 벽에 부딪칠 것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어 왔는데,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중국인이 패권국가다운 소비수준을 추구한다면 파국이 바로 코앞에 닥칠 것을 그들도 모를 수 없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문명 전통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어 왔다. 유기론적 조직-운영 방법을 가장 고도로 발전시킨 것이 중국문명이었다. 중국은 기존 패권주의적 세계체제를 바꾸기 위한 문화적 자원을 가진 나라다.

기존 세계체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은 중국의 굴기를 견제할 이기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중국의 모든 현상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변화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한다. ‘중국위협론이다.

중국위협론은 오래 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조영남의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 176쪽에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가 20056월 발표한 조사결과가 인용되어 있는데, 유럽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에 대해 더 우호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영국 55:65, 프랑스 43:58, 독일 41:46, 스페인 41:57, 네덜란드 45:56] 아시아지역(터키,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레바논, 요르단, 인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중국의 굴기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의 변화에서 좋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데, 이것이 정확한 의견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설령 정확한 의견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변화가 인류에게, 특히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더해줄 측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내다보이는 이 시점에서 이웃의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중국의 발전 진로를 찾는 데 생각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Posted by 문천

 

 

농업문명 발생 이후 유라시아대륙 중위도지대가 문명 발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기술수준이 유치한 단계에 있던 초기 농업에는 자연 식생이 너무 왕성한 아열대지역도, 태양광이 적은 고위도 지역도 적합하지 않았다. 중위도의 온대지역을 따라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지형조건이 적합한 곳에 여러 초기 문명이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문명 간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대륙 안에서는 자연의 절대적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교류가 이뤄졌다. 중요한 기술 발전은 얼마간 시차를 두고라도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접촉이 늘어나고 기술 전파의 속도도 빨라지게 된다. 역사학계에서 통상 중세라 부르는 시대에는 한자권-힌두권-이슬람권-기독교권의 몇 개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같은 문명권 안에서는 지속적 교류가 진행되고 인접한 문명권 사이에는 간헐적 접촉이 이뤄지는 반면 멀리 떨어진 문명권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문명권 사이의 이 평형상태가 13세기에 크게 깨어졌다. 이슬람 통치자들이 힌두권의 중심부를 다스리는 델리술탄국이 자리 잡았고, 몽골인의 정복사업이 유라시아대륙의 태반을 휩쓸었다. 한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에서 중세체제를 뛰어넘는 기술 발전이 이뤄진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거대한 정복사업을 통해 문명권 간의 기술 전파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3-14세기의 격동기가 지난 후 한자권과 이슬람권은 명-청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안정된 체제로 돌아갔다. 반면 서쪽 끝의 기독교권은 14-15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 후 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끝에 산업혁명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빚어진 근대문명19세기 이후 세계를 휩쓸게 된 현상을 서세동점이라 한다.

이슬람 선진문명 앞에 수백 년간 위축되어 있던 유럽인이 외부로 활동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 이후의 대항해시대였다. 항해술을 포함한 유럽인의 기술은 아직까지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 남부와 아메리카대륙의 기술수준이 낮은 사회들을 정복하면서 확보한 자원을 발판으로 인도양에 진출, 세계를 일주하는 항로를 확보했다.

16세기 중에 세계일주 항로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유럽인의 힘이 다른 기존 문명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 문명권의 주변부에 조그마한 거점들을 만들고 그 사이의 항로를 확보하는 점과 선의 해상제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무기와 항해술의 집중적 개발이 해상제국을 겨우 뒷받침해 주었을 뿐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무기와 상품의 대량생산에 따라 기존 문명권과 정면 대결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19세기 중엽까지 힌두권이 제일 먼저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한자권과 이슬람권의 공략이 계속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에는 전 세계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나 영향권으로 편성된 결과 열강들 사이의 상호쟁탈전이 벌어지는 제국주의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정복자들의 첫 번째 요구: ‘개항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은 근대문명을 일으킨 유럽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고, 또한 기존 문명권 중 가장 강고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통한 부국강병의 효과가 충분히 자라난 뒤에야 한자권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었다. 한자문명권의 끄트머리로 유럽인의 활동영역에 제일 가까이 있던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에 프랑스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1859년의 일이었다. 그 밖의 한자권 지역에 대해서는 개항요구 수준의 공략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개항요구는 경제적 공략을 위한 것이었다. 유럽인은 대항해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 역조에 내내 시달려 왔다. 비단, , 도자기 등 중국의 고급상품에 대한 유럽인의 수요는 경제발전과 함께 꾸준히 자라난 반면 중국인에게는 유럽 상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캐낸 막대한 분량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편전쟁은 이 무역 역조를 줄이려는 영국의 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두 차례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으로 중국의 완전한 개항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유럽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며 중국 시장의 모습을 바꿔 나가는 가운데 가장 앞장선 품목은 군사장비였다. 2차 아편전쟁 후 시작된 양무운동은 군사현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1868년부터) 일본과 중국 사이에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 경쟁이 벌어졌고, 일본의 청일전쟁(1894-1895) 승리로 근대화가 동아시아지역에서 절대적 과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의 이웃들보다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열강 대열의 끄트머리에 합류하고 제국주의 경쟁에 나섰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고, 일본은 중국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이 경쟁에서 상당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승리에 도취한 일본인에게 근대화의 과제는 종래의 화혼양재(和魂洋才)’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단계로 나아가기에 이른다.

패자인 중국이 받은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직후에 일어난 변법운동에서 시작해 1900년대의 공화제운동과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나아가는 동안 전통문명을 부정하고 서양 근대문명을 받드는 분위기가 갈수록 심화되었다. 1920년대에 시작된 공산주의운동도 그 연장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엇갈리는 위치에 있던 조선은 이웃 두 나라의 사정을 살피며 간접적으로 개화, 즉 근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되지만 국가체제가 심하게 이완되어 있어서 능동적 대응에 실패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견제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사회경제적 변화는 일본이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러일전쟁(1904-1905) 이후에는 일본의 전면적 통제 아래 들어가고 뒤이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럽인이 이룩한 근대문명의 본질은 산업혁명의 성과를 자본주의체제를 통해 확장해 나가는 데 있었다. 자본주의체제의 확장은 미개발자원(인력과 물자)의 편입을 필요로 했다.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지역의 미개발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였고, 이 경쟁이 지구 전체로 확대되면서 경쟁의 구조가 입체화되었다. 착취당하는 입장에서 세계시장에 편입된 일부 지역이 근대문명을 내재화하면서 2류 열강의 대열을 형성한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이 미국, 러시아와 함께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문명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체제 외에도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확장과 서세동점 현상의 추동력은 바로 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원리에 있었다. 이 원리가 근대문명의 다른 요소(민주주의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것을 근대문명의 가장 본질적 요소로 볼 수 있다.

 

근대화에도 상류가 있고 하류가 있다.

 

2류 열강의 대열에도 들지 못한 사회에서는 주변에 있는 2류 열강의 상대적 성공에 대한 선망이 크게 일어났다. 중국과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추세에 겹쳐진 것이 매판세력의 발흥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은 효율적 착취를 위해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선전하면서 이에 호응하는 매판세력을 착취 대상 사회 안에서 육성했다. 식민지시대 한국의 친일파가 이런 매판세력이었다.

매판세력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사회의 재편도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체제의 내재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류 열강, 즉 일본의 자본주의체제 내재화에 비해 낮은 층위의 것이었다. 일본은 선진 열강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면서도 주변의 저개발사회에 대해서는 착취하는 입장에 섰는데, 한국의 식민지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당하는 입장이었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착취 대상인 하부구조에 들어가 개발 없는 성장에 그친 것이다.

일본은 1904년 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후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한국에 추진했다. 초기에는 종래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혼란에 대비되어 환영받는 면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착취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919년 식민통치에 대한 거족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 후에는 매판세력 육성 정책이 강화되어 재계에서 학계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조선인의 역할이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종료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 식민지인의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각지의 저항운동은 두 개 방향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민족모순에 치중하여 이민족지배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는 우익 민족주의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계급모순에 착안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는 좌익 공산주의운동이었다. 좌익의 운동이 기존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저항을 바라본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주변부의 2류 열강으로 20세기를 시작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류 열강의 자리로 올라섰고,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소련은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좌익 운동을 규합하여 미국의 패권에 40여 년간 맞섰다.

냉전체제를 흔히 양극체제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단극체제의 성격이었다. 미국의 패권은 산업혁명 이래 근대세계의 주축이 된 자본주의체제를 통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반면 공산권에서 소련의 패권은 방어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그 통제력이 동유럽 공산권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련의 역할은 미국의 주적이라기보다 스파링 파트너에 가까운 것이었다. (통일 전의 진나라가 패권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중원의 반대편에 있던 제나라를 설득해 동-서제(-西帝)를 나란히 칭하던 상황이 냉전체제와 비슷한 것이었을지?)

남한은 식민지를 벗어난 직후 미국의 통제를 가장 엄격하게 받는 나라의 하나가 되어 반공을 국시(國是)’처럼 여기며 냉전시대를 지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받든다는 점에서 서세동점의 논리에 세계 어느 사회보다 강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1987민주화를 성취하고 곧이어 세계적 냉전이 해소되면서 자본주의 논리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고 강하게 내재화되어 있는지 전보다도 더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근본 모순은 역사의 단절에서

 

10-11세기의 중국과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에서 자본의 역할이 크고 활발했던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중세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비교해 보면 자본의 권력화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자본이 일종의 권력으로 자라나기는 했어도 핵심 권력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자본이 국가권력과 대등한 관계를 맺었고,(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첫째 의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자본이 권력의 주인이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고등문명을 가진 사회에서는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사기> “식화지(食貨志)”<한서> “화식열전(貨殖列傳)”에 거부(巨富)의 권력화 사례들이 실려 있다. 진 시황의 집권을 도와준 여불위(呂不韋)도 그런 예의 하나다. 산업 발전에 따라 자본의 역할이 아무리 커져도 자본의 힘이 국가권력을 벗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본 권력화의 폐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근대유럽에서는 그런 견제가 없었다.

자본 권력화는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인가? 돈의 힘이 억제받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주먹의 힘이 억제받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벌거벗은 힘이 날뛰는 정글상태는 인간의 이성을 위축시킨다. 문명사회의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지혜가 작동하지 못하면서 머지않아 파국을 맞게 된다. 진화의 법칙으로 보면 도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의 근대문명은 어째서 세계를 휩쓸고 2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획기적 발전 덕분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기술만능주의가 테일러리즘(Taylorism)’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풍미한 것이 그 까닭이다. 그러나 20세기 전반부에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기술만능주의의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자원과 환경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면서 역사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근대문명의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본주의체제의 타당성에 대한 회의론을 물리치기 위한 정면돌파 전략이었다. 공산권과의 승부를 자본주의체제 성공의 시금석처럼 부각시키는 한편 공산권의 미개발자원(인적-물적)을 자본주의시장에 추가함으로써 모순을 이어갈 여지를 늘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본주의체제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2008년의 미국 발 금융공황은 체제의 한계를 다시 알려주었다.

20세기 초에 닥친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는 제대로 극복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넘어갔다. 미봉책의 핵심이 저유가체제였고, 무리한 저유가체제는 냉전체제의 압력으로 유지되었다. 20세기 말에 다시 닥친 위기는 앞서의 미봉책이 한계에 부딪친 결과였고, 이번에는 전번만큼 효과적인 대응책도 찾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19세기에 자리 잡은 이래 어느 때보다도 큰 조정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체제에 자리를 내어줘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해야 할 때다.

근대 이후(postmodernism)’에 관한 이야기가 그 동안 많이 펼쳐져 왔다. 나는 그 까닭이 산업혁명에 의해 규정된 이른바 근대의 모순이 한계에 이른 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담론은 역사의 연속성을 포괄해야 제 궤도에 오를 것이다. 근대는 역사의 연속성을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근대정신, 즉 자본주의정신에 투철한 어떤 사람은 근대 이후의 이야기가 확산되는 한쪽에서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19세기 유럽의 근대는 중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멋진 신세계를 찾았다. 근대의 모순을 심화시킨 하나의 큰 요인이 역사의 단절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를 진행해 온 이제 중세 농업사회로 돌아갈 길은 없다. 하지만 중세, 특히 그 말기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중세 이후를 모색하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 중 중요한 의미들을 근대의 풍요와 격변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 의미들이 근대 이후의 길을 찾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세 이후의 모색에 가장 많은 노력이 쌓여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2천여 년 전 전국시대부터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났고, 1천여 년 전 당나라 말기부터 자본의 권력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체제가 말기적 증세를 일으키는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굴기(崛起)’의 바닥에는 이 지적 자산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을 동세서점(東勢西漸)’ 현상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 굴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중국 밖에서뿐 아니라 중국 안에서도 많은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새로 일어나기 시작한 큰 현상이라서 인식의 혼란이 아직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겠지만,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더 기본적인 이유일 것 같다. 중세 말기에 중세 이후를 모색한 풍부한 지적 자산이 아마 중요한 요인의 하나일 텐데, 근대인의 눈으로는 제대로 살피기 어려운 것이므로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인류의 역사에 온갖 굴곡이 있거니와, 선사시대에 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농업혁명과 18세기 이후 농업경제로부터 산업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산업혁명, 두 가지가 가장 큰 변화로 꼽힌다. 이 두 차례 변화는 인류의 존재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큰 변화로 꼽히는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과 대략 대등한 상태로 존재했다. 포유류 가운데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었기 때문에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상 전 지역으로 서식지를 넓히기는 했지만 그 확장에는 식량 획득의 조건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이 단계에서 인류의 개체수는 1백만에서 1천만 사이를 오갔을 것으로 고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상태를 이후의 문명 상태와 대비해서 인류의 자연 상태라 할 수 있다.

농업혁명은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얻어먹던단계에서 찾아먹는단계로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량 획득 능력이 늘어나서 서식지를 크게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에 걸친 이 단계에서 인류의 개체수는 억대까지 늘어났다.

농업문명 초기의 식량 생산력은 잉여생산 없는 자급자족 수준이었다. 늘어나는 생산력은 인구 증가와 서식지 확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서식지 확장이 한계에 접근하면서 제한된 영역 내에서 입체적 사회조직이 시작되었다. 잉여생산을 발판으로 2-3차 산업이 자라나는 분업 현상의 전개에 따라 본격적 문명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농업인구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만큼 잉여생산이 늘어난 후기 농업사회에서는 산업구조와 사회조직의 원리를 교체할 필요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농업문명의 후반부가 역사학에서 말하는 중세에 해당되는데, 중세의 사회조직 원리는 농업문명의 속성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농업문명을 가장 고도로 발달시킨 중국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서열이 대표적인 예다. 조정자 역할의 제1계급 아래로 1-2-3차 산업이 서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농업인구의 비율 감소는 그 사회의 경제활동에서 2-3차 산업의 비중이 커진다는 뜻이다. 체제 질서의 운용에 있어서도 농업활동보다 상공업활동의 통제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에 따른 변화가 중국에서는 당나라 말기인 9세기에 뚜렷해졌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무력(武力)국가당나라와 재정(財政)국가송나라를 대비시킨 뜻도 여기에 있다.

후기 농업사회에 닥친 변화의 과제를 한 마디로 유동성 증가라 할 수 있다. 중세질서의 핵심은 인간의 관리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농업문명 초창기에 세워진 제민(齊民)’의 원리가 중세를 지배했다. 그러나 산업의 다각화와 비생산활동의 증가에 따라 그 원리로는 효과적 사회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인간 아닌 다른 관리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대상이 이었다. 추상적-보편적 가치를 가진 돈은 과밀해진 인구와 다양해진 활동 사이에 효율적으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유동성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과 운영의 기본 도구로 돈을 활용한다는, 넓은 의미의 자본주의는 후기 농업사회의 필연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외세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학계의 관심을 모은 일이 있다. 이 논의가 자본주의 맹아문제에 집중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상적-제도적 변화 중에 자본주의 요소를 추구한 것이 있었다면 자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지역에서도 탐구되었다. 그중 10-11세기의 중국과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의 체제 운용에서 자본의 역할이 커졌던 일을 많은 연구자들이 확인했다. 유럽의 근대자본주의처럼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역할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탈 중세의 의미를 가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흑사병이 유럽의 특이한 발전을 일으킨 것일까?

 

후기 농업사회의 유동성 증가 과제를 뻑뻑한 반죽에 물을 넣어 부드럽게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자본이 용매(溶媒)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일어난 자본주의는 반죽에 물을 넣는 것이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격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방법이었다. 왜 이런 과격한 방법을 쓰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해주는 적절한 연구를 아직 참조하지 못했다. 내 나름대로 추측할 때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 걸친 흑사병 유행이 배경으로 큰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현상을 초래한 과정은 잘 연구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과격한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향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변화를 이 인구 급감 사태가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유럽의 과격노선과 비교하면 중국과 이슬람세계의 자본주의는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색할 만큼 온건한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 자본은 무력과 함께 통치수단의 하나로 채택되었지만 자본 자체의 권력화는 억제되었다. 명나라 후기 정권을 농단하던 환관들이 탄핵당할 때 조정 세입의 몇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몰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얼마간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재력이 비공식적 권력 운용 수단이 되어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기 농업사회 단계의 중국에는 유럽과 달리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체제가 안정되어 있었다. 변화를 도입하더라도 기본 체제를 흔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법을 취했다. 14세기 초에 명나라가 정화(鄭和)를 앞세운 대항해에 나섰다가 접은 이유를 놓고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의 급격한 확대를 원하지 않는 체제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무렵까지 중국의 자연과학과 물질문명이 유럽보다 크게 앞서 있다가 그 후 몇 세기 동안 역전된 사실도 같은 이유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농업문명은 유럽보다 일찍 난숙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탈 중세의 과제도 일찍부터 제기되어 있었고 10세기경부터 그 방향의 변화를 완만하게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14-15세기의 인구 격감을 계기로 다른 선진지역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흔들린 것 역시 인구 격감의 영향을 받은 일로 보이는데, 보편적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에서 문명권 차원의 절제가 없어진 것도 중국 등 다른 지역과 다른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특이한 변화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종교개혁을 거치며 힘과 속도를 더해갔다. 식민지경영과 원거리무역이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자라나면서 격화하는 경쟁의 주체로 국민국가가 나타났다. 그 경쟁이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이르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큰 길이 열렸다. 19세기 들어 부국강병을 이룬 유럽국들이 밖으로 나서자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일어났다. 종래 유럽인의 해외활동은 기존 문명권의 외곽에만 머물렀는데, 이제 유럽인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앞에 아무런 거침이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체제가 필요로 한 소유권의 절대화

 

자본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것은 1776,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막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환상의 파트너였다. 산업혁명이 추구한 대량생산체제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실적 운용을 위해서는 시장을 마음껏 키워주는 대량생산체제가 필요했다. 자본주의체제의 탄생은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소유권의 절대화와 가치의 획일화, 그리고 경쟁의 극대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농업사회는 체제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소유권을 부정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무기 소지를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유권의 행사에 절제가 없을 경우 사람을 해치는 데, 그리고 질서를 교란시키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이 무기와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책임을 지우는 규정을 되새겨보자. 생명은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와 나란히 재산을 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 명예, 사랑, 행복 등 인간이 누리는 온갖 가치를 제쳐놓고 재산 하나를 생명과 나란히 놓는 것이 무슨 뜻인가? 재산을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독립적 가치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생명에 종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산이 생명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가치를 재산에게도 종속시키는 관념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생명을 제외한 모든 인간적 가치가 돈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심지어 생명의 가치까지 재물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일각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 가치의 획일화가 자본의 지배력을 보장해 준다. 한국인은 이 사실을 해방공간에서 처절하게 경험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돈의 힘으로 민심에 역행하는 노선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1987 민주화 이후의 ‘87체제에서 총칼의 힘을 대신해 돈의 힘이 수구세력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도 또 하나의 사례다. 자본주의체제의 극한적 강화를 주장하는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것도 가치의 획일화를 고착시키려는 의도다. 자본주의체제는 한 번 작동하면 가치의 획일화를 통해 체제의 변동을 가로막는 메커니즘을 가진 것이다.

가치의 획일화는 경쟁 극대화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각자의 특성을 두루 인정해준다면 심한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점수라는 하나의 기준만 내세워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울 때,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한두 점 더 따기 위해 아이들은 밤잠을 설쳐야 하고 부모들은 사교육에 재산을 바치게 된다.

경쟁은 인간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현상의 본질적 요소다. 경쟁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혈압 없는 동물이 죽은 동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혈압에도 적정선이 있지 않은가? 80~120의 범위를 어느 쪽으로 벗어나더라도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건강을 위한 경쟁의 적정선도 있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총 소득이 손실보다 큰 플러스섬의 경쟁은 건강한 경쟁이다. 고통과 좌절을 느끼는 패자가 있어도, 보듬어줄 여유가 승자에게 있다. ‘제로섬’, 총 소득이 손실과 같은 수준이 된다면 경쟁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여자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마이너스섬’, 총 소득이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경쟁은 사회에 해독이 된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사회를 무너트리는 길로 나아간다.

 

과잉경쟁의 늪에 빠진 자본주의체제

 

자본주의체제는 분명히 과잉경쟁의 경향을 보여 왔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과잉경쟁의 낭비 현상을 변명하는 논리가 개발되어 왔다. 19세기 중엽부터 유행한 깨진 유리창논리는 20세기 말까지 군사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sm)에 활용되기도 했다. 빵집 유리창을 주인 아들이 실수로 깨뜨렸을 때, 새 유리를 끼우기 위해 돈 쓰는 주인이 마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1850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로 이 주장을 반박했다.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는 것이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 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유리가게 주인이 실제로 번 돈이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그 손실이 사회 전체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후의 경제학에서는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근대인은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서 직관을 무시하려 든 일이 많았다.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하나의 대표적인 예다. 온갖 미시적 이론을 동원해 사회에 손실이 발생했다는 거시적 사실을 감추려 든 것이다. 원자론의 힘에 기댄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착시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거시적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될 때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미시적 이론을 더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데 활용되어 온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도 또 하나의 그런 예다. 낙수 효과가 생산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상황도 있다. 밭에 물을 줄 때, 물이 넉넉히 있다면 겉흙부터 적셔주는 것이 노력을 줄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심한 가뭄에 물이 넉넉지 못하다면 고랑에만 물을 부어 속흙을 적셔줘야 한다. 이랑에 붓는 물은 증발해 버리니까. 농부가 통상 겪는 것은 후자의 상황이다. 그런데 낙수 효과가 유효한 상황만 상정하고 세밀한 묘사로 그럴싸하게 내놓는 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려는 꼼수일 뿐이다.

사회 상황 중에는 자본주의가 유리한 상황도 있고 불리한 상황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체제는 상황이 바뀌어도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앞에서 말한 가치의 획일화 경향도 이 관성의 한 가지 요소다. 또 한 가지 요소는 힘을 가진 집단에게 이득을 주는 체제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이 사회 전체에 손해가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힘을 가진 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 지속을 바라고, 집단의 힘으로 그 뜻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노선의 승리에 이 점이 크게 작용했다.

1970년대는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어 자본주의체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떠오른 시기였다. 자본주의체제 아래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던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한 것은 불거지고 있던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거꾸로 격화시킴으로써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모순 격화는 파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모두가 피해를 입는 파국 속에서 힘을 가진 소수만 이득을 챙기겠다는 반동적 노선이 신자유주의다.

약자의 피해를 더 키우려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목적은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강자가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은 어떨지? 시스템의 전면적 붕괴 속에 강자라 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강자도 아니면서 이 노선을 추종하려는 세력에게 있다. 국가사회에 큰 피해를 입힐 노선을 추종하는 한국의 신자유주의 세력은 일제하의 친일파보다도 매판성이 더 심한 집단이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체제 아래 착취하는 입장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입장에 많이 서있어 왔다. 그 피해자 노릇을 더 심화시키려는 것이 신자유주의 노선이다.

 

Posted by 문천